rewr2024-01-29 07:44:00
한국 현대사의 손꼽히는 거인
영화 〈길위에 김대중〉
〈길위에 김대중〉은 탄생부터 이른바 ‘양김 분열’ 직전까지의 김대중의 삶을 다룬 영화다(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고 한다). 90년대생인 내게, 이 영화는 그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정도로만 막연히 알고 있던 양김 분열 이전의 김대중의 정치적 여정을 살필 수 있던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민주주의, 평화, 지식인, 연설가의 이미지가 흐릿하게 중첩되어 있을 뿐이었던 그가 신념을 가진 협상가, 전술가, 의회주의자의 이미지로 재각인되었다.
1924년 전라도의 한 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사회에서는 해운회사를 세워 승승장구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는 사업을 지키기 위해 우익 단체에 가입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인민군에게 큰 고초를 당했고, 전후 부산에서는 권력을 향한 이승만의 야욕(이와 반대로 이승만의 ‘건국’과 ‘호국’ 업적을 기리는 영화로는 〈기적의 시작〉이 있다)에 크게 분노했다. 이 두 경험은 정치인 김대중의 향로를 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를 해야 공산당을 이긴다’라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사업과 달리 정치인으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연이어 낙선하다 38의 나이에 국회에 입성했다. 김대중은 정치 입문 초창기부터 탁월한 언변과 논리로 주목받았다. 박정희가 왜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김대중 하나를 못 당하느냐고 닦달했다는 대목은 정치인 김대중에게 말이 평생의 든든한 무기가 되어주리라는 걸 짐작케 한다.
김대중에게는 평생에 걸쳐 추구할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있었다. 국가 주도 경제가 아닌 대중 경제론, 중앙집중이 아닌 지방 자치제 등은 이를 위한 구체적 정책 제언이었다. 더불어 의회가 필연적으로 협상을 통해 굴러갈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점을 인식한 그의 현실 감각이 흥미로웠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을 무조건 반대하는 대신 이를 국가 발전과 민주주의 제도 확립과 연결할 방안을 제시했다. 즉 그에게 정치는 전부냐 제로냐(all or nothing)의 문제가 아니라 이득을 보는 협상을 이끌어내는 행위였다. 이런 태도가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운동가‧혁명가라면 타협할 줄 모르는 불굴의 정신으로 목표하는 바를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의회에 소속된 국회의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대중과 함께하는 정치인이라면 늘 그럴 수만은 없다. 이들의 방법론은 달라야 한다. 전제정치의 수장이나 왕이 아니라면 협상과 타협은 불가피하다. 영화는 정치인 김대중이 꺾이지 않는 신념과 협상할 줄 아는 현실감을 함께 가진 정치인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를 현대 한국 정치의 손꼽히는 거인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에 정치 활동을 하면서 김대중은 여러 고초를 겪었다. 100만 명이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이고, 당시 여당이 엄청난 금권 선거를 했는데도 간신히 대선에서 승리하자 본격적인 견제가 시작된 것이다. 김대중의 성취는 지역감정으로 줄곧 폄훼되었고(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는 어떻게 김대중에게 지역감정의 족쇄가 씌어졌는지를 다룬다), 심지어 정보기관에 의한 암살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탄압은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많은 이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멈추지 않았다. 해외에 망명 중일 때도 유수의 언론사에 기고문을 보내거나 인터뷰에 임했고, 강연을 진행하는 등 정치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민주화의 상징 김영삼과는 미묘한 연대를 이어가며 끝내 직선제를 쟁취해냈다. 그리고 언제나 김대중의 곁에는 그를 지지하는 국민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김대중 석방이었다는 데서 그가 많은 사람에게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적확히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의 시대정신을 제시하며, 단호하면서도 유연하게 원하는 것을 얻어낸 그의 정치 행로는 뭇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달리 사뭇 감동과 감탄을 자아내는 데가 있다.
정치인을 회고하는 영화는 모두 나름의 관점이 있다. 〈기적의 시작〉(2023), 〈노무현입니다〉(2017), 〈문재인입니다〉(2023) 등의 영화는 모두 대중에게 해당 정치인을 어떤 가치로 기억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이 가치는 그 정치인이 살아온 시대를 대변한다. 〈길위에 김대중〉은 신념을 가졌으되 협상할 줄 아는 정치인 김대중의 가치를 관객에게 제시한다. 소구력이 있는 가치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집요함은 탄압‧협상‧개척의 질곡을 건너 끝내 꽃을 피웠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지났고, 이제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이유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김대중과 그의 시대가 빚어낸 무언가에 빚지고 있다. 대중 정치인과 운동가,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국면에 맞추어 대중과 함께 자기 영역을 넓힐 줄 알았던 정치인. 인물에 대한 호불호와 업적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순 있겠지만, 누구도 김대중이 우리 현대사의 손꼽히는 거인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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