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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지2024-03-04 15:34:43

자기 자신에 관한 농담 ‘위 아 40’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인 시인 캐시 박 홍은 처음 시를 쓸 때 자신의 정체성 떨쳐내며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데뷔 이후 무슨 글을 쓰든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과 시 쓰기 사이의 거리에서 절망을 느끼던 중 스탠딩 코미디언 리처드 프라이어의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리처드 프라이어는 흑인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그것을 코미디의 재료로 삼은 최초의 코미디언이다. 시인과 달리 코미디언은 정체성이 없는 척할 수가 없다. 프라이어는 자신의 인종적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기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는 백인 청중들을 당황시키며 웃기기도 한다. 그러나 프라이어의 공연을 필사한 캐시 박 홍은 프라이어의 말을 글로 적으니 그다지 우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프라이어의 익살스러운 이야기 전달 방식이 빠지고 나니, 유머라는 용해제는 증발하고 분노의 소금기만 남은 것처럼 그의 말이 거칠고 둔탁하게 느껴졌다.’

 

40살에 갑자기 비트를 만나 랩을 하게 된 한물간 극작가의 이야기, 영화  <위 아 40>도 한 편의 스탠딩 코미디 같다. 한때는 30세 이하 30인의 극작가 상을 받을 정도로 주목받았지만 지금 라다를 둘러싼 것은 이런 것들이다. 방음 안 되는 벽 너머 들리는 신음 소리, 창문 밖 노숙자의 볼일 보는 모습을 맞닥뜨리며 시작하는 아침, 체중 때문에 달고 사는 다이어트 음료, 그리고 10년 전 멈춘 라다의 경력을 무시하거나 추파를 던지는 학생들. 여기서 벗어나려면 극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유명한 백인 제작자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흑인의 빈곤 포르노를 상업화하려는 백인 제작자를 들이받고 온 날, 라다는 엉엉 울다 갑자기 창밖에서 들리는 랩 비트에 맞춰 신들린 듯 랩을 내뱉기 시작한다.

 

나이 40이 되도록 여전히 집세 내기도 빠듯하고 겨우 닿은 기회마저 망쳐버렸는데 갑자기 랩까지 한다. 이쯤에서 나는 이런 결말을 쉽게 상상한다. 라다가 랩으로 인정받고 성공해서 제2의 인생을 사는 이야기. 아니면 <백 엔의 사랑>의 이치코가 서른에 갑자기 프로 복싱 선수에 도전했듯 극작가는 때려치우고 적어도 랩으로 끝장을 보는 이야기. 그러나 영화가 감독이자 주연인 라다 블랭크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라다 블랭크는 마치 비트라는 용해제를 사용해 스스로에 대해 농담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생리는 왜 안 터져?’로 시작하는 라다의 랩은 웃기고도 슬프다. 늘 종아리는 쑤시고 오줌은 자꾸 마렵고 10시만 되면 피곤해 쓰러지는 데다가 젊은 애들이 노인 취급한다. 라다는 ‘이게 40살 인생’이라고 외친다. 흑인이 성공하려면 빈곤 포르노를 팔아야 한다며 인종주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도, 나중에는 적당히 타협한 스스로를 셀프 디스 하는 것도 랩을 통해서다. 라다에게 랩은 제작자의 검열 없이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극작가를 하며 맛보지 못한 쾌감이다. 라다를 둘러싼 찌질한 상황과 스스로에 대한 농담이 웃길지언정, 전혀 우습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라다를 지켜보고 있자면 다시 <마이너 필링스>의 캐시 박 홍이 떠오른다. 캐시 박 홍은 프라이어의 공연을 접한 후로 시 낭독회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항상 강연장에서 자신이 유일한 아시안이 아닌 척해왔는데, 사람들이 늘 자신을 아시아인 정체성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이왕이면 내가 유일한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큰 목소리로 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내 농담을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면, 기왕 망하는 거, 내 삶에 관해 농담하면서 장렬하게 망하고 싶었다.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하다가 실패하고 싶었다.’

 

라다 또한 자기 자신에 관해 농담하면서 망하길 택한다. 영화 내내 라다와 친구 아치는 40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40대에는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냐고, 비주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내게도 ‘40’이라는 숫자와 관련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40살엔 꼭 자가용 몰아야지. 그때는 돈 좀 만지고 빠듯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기 암시이자 소망이다. 설마 40살의 내가 나를 가난하게 내버려 둘까 싶어 그때까지만 시간을 보류하기로 한다. 그때는 뭔가 달라야만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그러나 영화는 나를 보란 듯이 비웃고 40살의 라다에게 어떠한 매듭도 지어주지 않는다. 라다는 꿈에 그리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상황을 바로잡는다. 멈췄던 라다의 랩은 다시 시작된다. “네 목소리를 찾아.” 믹스 테이프도, 반짝이는 성공도 없다. 40살의 라다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것. 그뿐이다.

작성자 . 손민지

출처 . https://brunch.co.kr/@minzyson/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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