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4-04-22 23:29:31
슬로 모션만큼은 포기 못해!
영화 '레벨 문 파트2: 스카기버' 리뷰
파트2에서도 크게 나아진 점을 느끼진 못했다. 대신 이거 하나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슬로 모션 기법을 지독하게 사랑해 포기하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파트1이 공개된 지 4개월 만에 파트2를 내놓은 넷플릭스 영화 '레벨 문 파트2: 스카기버'는 코라(소피아 부텔라) 일행이 마더월드를 상대로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그린다. 파트1에서 대패를 당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노블 제독(에드 스크레인)은 전함을 이끌고 벨트 공격에 나서며, 코라 일행은 벨트 주민들과 보금자리를 지키고자 방어 태세에 돌입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파트1의 단점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마더월드의 최종병기급으로 훌륭한 전투력을 지녔던 코라가 하루아침에 쫓기는 신세가 되는 서사나 네메시스(배두나)의 과거, 반란군 일행이 벨트 주민들과 유대를 쌓는 과정 등에 좀처럼 몰입할 틈을 주지 않고 빨리빨리 전달하기 바빠 보였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벨트 전쟁 또한 꽤나 색다르진 않았다. 지하, 실내, 공중, 함선 등 다양한 배경을 활용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노력은 느껴지긴 하나, 시도 때도 없는 슬로 모션이 속도감을 떨어뜨린다. 액션이 주는 쾌감은 1도 없으니 전투 신이 나오기까지 1시간가량 기다린 시청자들에겐 다소 힘 빠지게 만든다.
극 중 빌런들의 활용법 또한 한숨이 나올 따름이다. 절치부심하여 코라를 쫓아온 노블 제독은 전편에서 생존한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이 들 만큼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며, 최종 보스 격인 발리사리우스 섭정(프라 피)은 코라의 회상 신에만 등장했을 뿐이다.
네메시스 역으로 반란군의 한 축을 담당한 배두나를 향한 기대도 다소 허무하게 다가왔다. 특유의 분위기와 눈빛으로 존재감을 피력하긴 했으나, 정작 그를 활용한 액션이나 다른 감정 신 등 분량은 많지 않았다는 것.
탄탄한 플롯과 스토리라인 없이 무리하게 세계관을 만든 잭 스나이더의 과욕은 '아미 오브 데드'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그대로 답습했다. 파트2까지 기대치를 못 미치는 졸작을 보인 가운데, 아직 '레벨 문'이 파트3이 남았다는 점이다. '레벨 문' 세계관에 더 이상 기대할 만하거나 반전이 될 만한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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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과 시선의 방향
SYNOPSIS.
1972년 뮌헨, 올림픽 생중계에 도전한 ABC 방송국 스포츠팀은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선수촌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이고 있음을 알고 이를 생중계로 보도한다. 솟구치는 시청률과 9억 명의 시청자까지,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단독 특종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그들은 테러리스트들 역시 자신들의 방송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올림픽 사상 초유의 테러 인질극 생중계! 방송을 멈출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POINT.
✔️ 실화 기반이지만,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전개됩니다.
✔️ 그러나 잔인한 장면은 들어있지 않아요. 저는 이 지점이 좋았습니다.
✔️ 속도감 있는 전개 안에서, 방송국에서 일하는 언론인들의 책임감과 고민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 더불어 언론인들의 전문가다운 면모로 척척 손발이 맞는 장면들도 재미있었어요.
✔️ 그 장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다양한 배우들의 협연입니다. <퍼스트 카우>, <쇼잉 업>에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존 마가로, <티처스 라운지>에서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준 레오니 베네쉬가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 포스터만 보면 <스포트라이트>보다 10년 앞서 나온 영화처럼 보여요... 하지만 영화는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영화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버거워하고, 영화라 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테러를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건 존 마가로의 얼굴이 궁금해서였다. <퍼스트 카우>에서 소처럼 순박한 눈망울을 보여주었고, <쇼잉 업>에서 불퉁하게 세상과 불화하는 동생의 표정을 보여주었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그리고 나는 존 마가로를 못 알아볼 뻔 했다. 아니 존 마가로를 궁금해 할 겨를이 없었다. 빠른 전개 안에서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하느라.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영화관에 앉았지만, 극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언론의 생중계 현장을 담은 영화이다 보니 그들의 대화와 상황 설명을 통해 친절하게 정보가 전달되고, 방송을 만드는 과정을 척척 담아내어 그 설명이 늘어지는 법도 없다. LA 비평가 협회상에서 편집상을 수상한 이유를 알 것 같은 대목이다.
전개가 빠른 영화의 스토리라인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보고 나서 마음에 남은 생각들만 정리해 보고 싶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
영화 초반에 인물들이 서로의 국적을 인식하고 있음이 대사에서 수 차례 드러난다. 지네딘 수알렘이 연기한 캐릭터 자크의 경우, 자크라는 이름보다 프랑스인이라는 국적으로 더 많이 불리고 인지될 만큼 국적이 강조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상황을 조망한다.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세계, 세계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독일. 앙금은 남아있지만 이제 가장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이벤트가 펼쳐져야 한다. 국적에 따라 다른 입장은 개인의 감정에도 영향을 준다. 평화와 우호를 말하는 행사에서조차 국적을 고려하여 방영 우선순위를 결정할 만큼.
우리 각자의 자리는 과연 각자만의 자리인가. 독일과 프랑스, 미국의 관계 뿐 아니라 영화의 배경이 되는 테러 사건 또한 국적에 따라 다른 입장과 감정이 뒤얽힌 사건이다. 테러리즘 사건 하나만 놓고 가타부타 판단하기엔 너무 많은 사건과 역사가 줄줄이 얽혀 있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맥마흔 선언과 밸푸어 선언의 발화자였던 영국을 비롯해 여기 얽힌 국가들이 더 많이 있다.
과거는 온전하게 과거로만 존재하지 못하고, 타자는 철저하게 타자로만 존재하지 못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무언가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가능한가? 언론인이라면 다르게 답할 수 있겠지만... 시민인 나로서는 그저 연결되어 있는 서로를 감각하며 나의 자리를 확인하고 내 시각이 어느 방향에 서 있는지를 좀더 명확히 아는 것, 그리고 그만큼을 감안하는 것, 어쩌면 그게 최선의 균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 밖에서 조심스러워지는 마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영화를 보는 동안도 영화 바깥이 궁금했다. 그리고 보는 동안 혹시라도 이스라엘의 '피해자성'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올까봐 꽤나 긴장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 먼저 감독과 제작진이 유대인인지 다급하게 찾아보게 될까봐 긴장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영화의 안과 밖 또한 예외가 아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인질이 석방되고 군이 철수하고 있다. 그동안 사람을 말살할 것처럼 쏟아붓던 공격이 멈춘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 지구를 "장악"해서 "재개발"하곘다는 소리를 하고 있고, 휴전 협상 다음 단계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런 세상에서 팔레스타인 과격 단체가 이스라엘 대표단을 인질로 잡아 벌인 테러극을 담은 영화라면, 이 영화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그리는지 민감하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전혀 담지 않았고, 테러 사건의 전개는 전화와 전보를 비롯한 소식으로 전달되어 대사로 공유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본인 할 일을 하는 언론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 영화다운 선택이다.
영화 속 언론인들은 이제 막 도입된 위성 생중계라는 신기술과, 자신들이 정통한 각종 기술을 펼쳐 보인다. 옛날 텔레비전에는 저런 식으로 자막을 깔았던 거구나, 사진을 저런 식으로 확대했구나, 스튜디오 연결은 저렇게 하는구나... 같은 생각들을 하며 본 그들의 능숙한 손놀림 뒤에는, 지금 어디와 연결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선택해야 하는 언론인들의 본능이 있다. 역시나, 영화 밖에서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이다.
제작자의 마음과 시청자의 마음
능숙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판단을 내리는 언론인들의 모습은, 전문가처럼 보여 한편으로는 멋있으면서도... 동시에 징그럽다. 선택을 내릴 때 그들은 인간성을 우선순위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이 미칠 파장을, 그 경우의 수를 일일이 계산한다면 방송은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이 영화처럼 급박하게 굴러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뉴스 보도국이 아니라 스포츠국이지만 지금 상황을 곧바로 담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사명감과, 방송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과, 갑작스럽게 굴러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따라가는 데 분주한 마음은 이리저리 뒤엉킨다. 그 안에서 최소한의 윤리 준칙이 무너지기 너무 쉬워 보이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제작자의 마음보다 더 징그러운 것을 발견하는데, 내 안에서 발견한 시청자의 마음이다. 사건 전개를 궁금해 하면서 상황이 전개되기를 기다리는 기자의 마음, 또 나의 마음. 그건 어디를 향하고 있나. 심지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모두가 각자의 스크린을 각자의 알고리즘 안에서 보고 있는 세상이다. 더블체크되지 않은 정보 채널이 마구 난립하는 세상.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언론인들이 서로 논의하며 갈등하여 적정선을 찾아가는 결과물조차 뜻하지 않은 사고를 칠 수 있는데, 그 과정조차 생략된 '가짜 뉴스 채널'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실시간으로 본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한때 실시간으로 보면서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렸다. 거대한 참사가 일어나는 장면을 몇날며칠 우리가 가만히 보고 있었던 순간들. 정제되고 편집된 뉴스 영상이 아닌, 마구잡이로 찍힌 사고 현장을 조용한 방에서 핸드폰으로 들여다 보면서 '이걸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아?' 싶었던 순간들. 가슴이 쿵쾅거려 잠들기 어려웠던 밤들로 이어졌지만, 이런 날들이 길어지고 아득해지면 무뎌질 수밖에 없다.
지난 15개월 동안 가자지구에서 얼추 추산하기로도 4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이 중 70% 가량이 여성과 어린이라는 UN의 분석이 있었다.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추측이, 카더라 통신이 아닌 의학 학술지에 실렸다. 병원과 학교는 의례적으로 마지막 안전지대지만, 전쟁 규칙을 무시하고 조준 폭격하기도 했다. 하루에 몇 명씩 죽었다더라, 그 중 아이들이 몇이라더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끔찍한 소식을 무수히 들으며 나는 이미 무뎌졌다.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괴롭게 하거나 무뎌지게 하거나, 둘 중 하나의 수순이 되기 쉽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이 의미있게 느껴졌다. 불 꺼진 스튜디오에서 제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 그곳은 유일하게 희미한 빛이 드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는 게시판이다.
우리의 시선은 계속해서 흔들린다. 상황 전개 소식을 듣고 복도에 선 언론인들을 비추는 카메라가 흔들렸듯. 물론 흔들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잡겠지만, 언론인도 흔들린다. (흔들렸을 때의 결과가 너무 끔찍하기에, 그들에게 남다른 균형 감각이 주어지길 간절히 바라게 되지만.) 시청자도 흔들린다. 시청자는 숫자가 되어 언론인에게 영향을 주고, 언론인들은 또 다른 숫자를 창조해낸다. 우리는 순환한다.
그러나 흔들림 끝에 우리의 시선이 희미한 빛 아래 사람의 얼굴에 머물 수 있다면. 결국 시선은 마음 가는 곳을 향하게 되어 있다. 95분을 빼곡하게 채우는 영화적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영화 바깥 나의 시선을 가다듬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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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이른 유턴
이 글은 영화 [파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갈 때는 출처를 반드시 남겨주세요.
사진출처: 다음 영화
각각의 영화 장르가 그렇듯 오컬트라는 장르에도 "세계관"이 존재한다. 물론 마블 영화로 대변되는 대형 히어로 프랜차이즈 영화에 비하면 세계관이라는 것 자체의 설명이 똑 부러지게 되지 않을 때가 많겠지만 말이다.
등장인물의 측면에서 봐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마블 영화에서의 주인공들은 투자액수에 비례하게 번쩍이는 능력으로 입을 떡 벌어지게 할 때가 많지만. 오컬트 속 주인공들의 필살기는 빠른 확인이 어려울 때가 많다. 근거리공격인 주술적인 격투(?)도 존재하지만 원거리 공격인 저주로 힘을 겨룰 때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인물들이 가진 능력이 중첩되거나, 심지어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심심찮게 나온다. 이미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오컬트는 무려 "내공"이라는 단어 하나로 인물의(혹은 같은 능력의) 더블링을 퉁 칠 수 있다.
보통 주인공과 같은 능력을 가졌지만 더 높은 내공을 가진 고수를 찾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그 고수의 등장은 주인공에게는 최후의 숙적(Arch enemy)인 경우가 많으므로. 오컬트 영화의 세계관은 그 어떤 장르보다 인력난에 시달려야 한다. 또한 주인공은 마지막 대전을 겪기 위해 반드시 성장해야 하는데, 이 내적 성장(혹은 짬바가 차는 과정)은 주인공이 반드시 한 번은 뒤통수를 맞는 반전의 형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초반부 한 시간;숨이 자꾸 멎는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을 설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보이지 않게 싸워야 하는 모호함을 장르적 특성을 타고났기에. 영화 초반은 이 영화만이 갖고 있는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일정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영화 [파묘]에서는 이 역할을 화림(김고은)의 초반 내레이션이 도맡는다. 어둠에 있던 것들이 빛의 경계로 슬그머니 나올 때. 그때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그때가 되어서야 어둠으로 그 존재들을 돌려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똑 부러지게 그어놓은 자신들의 한계 위에서. 화림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은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뛰어놀아야 할 고유 영역에서 가장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할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표현을 효과음(BGM이나 배경음악보다는 효과음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을 이용해 쌓아 올리는 것도 꽤나 유효하다.
그저 점프 스케어(Jump Scare)에 집중한 크고 단말마 같은 음향이 아닌. 앉아있는 관객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와 손가락으로 슬쩍 목덜미를 훑는 것 같은 서늘함을 남긴다. 분명 기척을 느꼈음에도 뒤돌아 볼 수 없기에 관객은 자신의 상상력만으로 손가락의 실체를 향한 두려움의 몸집을 걷잡을 수 없이 불려 갈 수 있다.
영화의 초반 한 시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긴장감으로 관객들을 괴롭힌다. 다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인물들의 칼춤에 몇 번이고 떨어진 간이며 심장을 열심히 주워대다 보면. 그제야 겨우 가늘게 숨을 몰아 쉴 수 있는 잘 짜인 결말로 다다르게 된다. 안도하는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후련함은 마치 여기까지 잘 버텼다며 쥐어주는 시원한 물처럼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로소 찾아온 안정을 느끼며 마른 목을 축여갈 때 즈음. 영화는 급작스런 유턴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단 한 번의 유턴으로 인해 호불호라는 길 위에서 나머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오컬트 장르에 없는 것은?;메신저
사진출처: 다음 영화
현대적인 천재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셜록(BBC 드라마. 오이배치 출연)을 보자. 그는 모든 것의 정보를 기억하고 엮어낼 수 있는 비상한 머리와 뛰어난 관찰력을 가졌다. 그런 능력을 배가 시켜주는 소시오패스적인 기질 덕에(?) 자칫 미제로 남을 수 있는 사건을 풀어내는 데 있어서는 경찰들이 오히려 몰래 찾아올 정도다. 셜록의 이름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릴지언정 공공연하게 "대놓고"부를 수는 없다. 애초에 셜록이라는 방법 자체가 "공식적인" 해결 방법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 경계는 오컬트라는 장르의 한계와도, 또한 초반에 화림이 선언한 자신들의 역할, 혹은 존재의 위치와도 완벽하게 일치한다. 장르가 "설명이 불가함"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장르 속 인물들은 조금은 억울하고, 또 조금은 찌질한 채로 살아간다. 또한 누군가에게 감히 공식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다. 애초에 메신저로서의 자격이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영화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후반부의 시도는 낯설고 잘 알지 못하는"다른 나라"에서 온 존재를 엮어보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는 영화 [곡성], 그리고 드라마 [방법]에서도 시도했던 것이기에 그다지 새로운 시도라고는 부를 수 없다.
문제는 그 시도가 어설프다는 점이다. 딱 한 번만 존재할 수 있는 오컬트 장르의 반전 장치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데다, 그마저도 긴장감이 사그라진 상태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뒤통수를 가격하는 힘이 그다지 크지 않아 사건의 중대함이 얼마나 큰지 별로 느낄 수 없다.
또한 전반부에는 이야기의 구심점이 사람들에게 있었으나, 후반부에서는 중심축이 사건을 설명하는 쪽으로 묘하게 이동한다. 이 덕분에 한국인의 DNA에 새겨진 일본은 적이다.라는 본능이 그대로 발동되어 버리고 만다. 덕분에 이 장르에서는 존재하면 안 되는 메신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거부감이 후반부 내내 마치 망령처럼 귓가를 맴돈다.
거 어데 도깨비입니꺼?;여기서도 내가 다 했어 임마.
사진 출처:다음 영화
전반부에서 형체가 없던 적은 후반부에 가서는 완벽하게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적에 가깝게 묘사된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거대하게 묘사되는 적이 무자비한 학살을 해대는데도 형태가 흐릿한 혼령이나 날카로운 소리 한 조각보다도 무서움을 실어 나르지 못한다. 상상력이 더 이상은 쓸모없이 되어버리면서부터, 그저 화면에 보이는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수동적인 감상은 초반부의 심장 롤러코스터를 겪어온 관객들에게는 그저 슬래셔 장면의 나열처럼 보일 뿐이다.
적의 속성이 바뀌면서 드러나는 첫 번째 문제점은, 유일하게 영화 속에서 오컬트적인 "전투 기술"을 갖고 있는 화림의 쓸모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화림은 후반부의 싸움에서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장면을 연출해내지 못한다. 완벽하게 기선제압을 당해 허둥거릴 뿐이다.
물론 언제나 영화 속 주인공이 승리의 편에 당당하게 서 있을 것이라는 법도 없다. 어쩌면 마이너 한 장르 영화의 특성상 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이 낯설지 않거나 오히려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적을 없애야 한다면 화림이 아닌 다른 등장인물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이 사건을 종결해야 한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점이 드러난다.
등장인물들이 가진 능력치의 최대와 최대가 맞붙어야 하는 후반부를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시간을 쓰다 보니 각 인물들의 숨은 능력을 보여주거나 설명할 시간이 없어져버린다는 것이다. 화림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데다 봉길(이도현)은 병원에 누워있는 상황에서. 관객의 머릿속에서 이 사태를 끝낼 "마땅한"인물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그러니 뜬금없이 상덕(최민식)이 소싯적 짬바를 발휘해서 직접 K-고스트 버스터즈가 되어버리는 장면이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누가 노래방의 민족 아니랄까 봐. 끝을 앞둔 겨우 3 분 전에 갑자기 등장하는 히어로라니. 능력에 대한 빌드업이 되지 않은 영웅은 이제 마블 프랜차이즈에서도 찬밥신세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기에. 상덕의 활약에 무게감이 실리지 않는 결말이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마치면서;감독님 사랑합니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그렇다면 과연 이 영화는 "별로"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아니오. 에 가깝다.
한 시간 후의 그 유턴이 정말 길을 잘못 들어 원점으로 가려고 했던 시도였는지. 아니면 의도된 유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장르에 대한 애정이 있는 관객이기에, 아쉬움의 투덜거림이 좀 더 크게 입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한국의 오컬트 장르는. 누가 뭐라 해도 장재현 감독님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한다. 음침한 곳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꺼내 경계까지 꺼내놓고, 자신만의 누울 자리를 용케 찾아 단단히 자리 잡아주신 덕분에.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를 한국 패치가 완벽히 장착된 채로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그것도 여러 번이나!!)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선택한 중반부의 유턴이 그저 조금 "이르다" 정도로 말하고 싶다.
스스로가 예상했던 바깥풍경을 못 보았기에 이질감이 들었고. 조금 기이한 기분과 낯섦 속에서 두리번거리는 바람에 이정 자체의 경이로움이 좀 줄어들었을 뿐.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의 TMI]
1. 독일어 공부는 여전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못해먹겠네요.
2. 좀 아파서 쉬었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3. 오늘 과자 한 봉지 다 먹음.
4.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파묘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장재현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브런치작가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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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승과 확장 사이 갈 길 잃은 정체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왕이자 ‘블랙 팬서’인 '트찰라(채드윅 보즈먼)'가 갑작스레 서거하자 와칸다는 위험에 빠진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비브라늄을 탈취하기 위해 와칸다를 간헐적으로 공격하고, 천재 공학도 '리리 윌리엄스/아이언하트(도미니크 손)'가 만든 탐지기까지 활용해 세계 각지에서 비브라늄을 찾기 시작한다. 이에 '슈리(레티티아 라이트)', 라몬다(안젤라 바셋)', '오코예(다나이 구리라)', '음바쿠(윈스턴 듀크)', '나키아(루피타 뇽오)' 등 트찰라의 가족과 친구들은 제각기 와칸다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선다. 한편, 마야 문명의 후예이자 해저 제국 '탈로칸'의 보호자인 '네이머(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는 지상 국가들의 비브라늄 수색 시도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이에 심해에 은거 중이던 그는 지상 세계와의 전쟁을 결심하고, 같은 처지에 놓인 와칸다에 동맹이 되거나 전쟁을 각오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대서양 바다 위, 와칸다의 거대한 전함이 나타난다. 와칸다의 도발에 발끈한 네이머와 탈로칸 전사들은 이내 전함을 포위한다. 거대한 물 폭탄의 폭발을 시작으로 전함을 차지하기 위한 공성전에 돌입한 와칸다와 탈로칸의 전사들. 바다를 헤엄치듯 하늘을 날아다니며 와칸다 병력을 도륙하는 네이머 덕분에 탈로칸 군은 조금씩 승기를 잡는다. 이에 질세라 슈리와 아이언하트도 피부로 호흡하는 네이머의 약점을 공략한다. 그들은 네이머의 피부를 말려 버린 후 역습을 가한다. 비브라늄을 가진 두 강대국이 전쟁을 펼치는 사이, 대서양은 처절하게 쓰러져 간 왕과 전사들의 피로 물든다.
<블랙 팬서>의 속편이자 MCU 페이즈 4의 마지막 작품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지상에 숨겨진 국가 와칸다와 심해에 숨겨진 문명 탈로칸의 거대한 전쟁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간다. 그런데 막상 미국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두 초강대국의 전쟁에서는 박력도, 비장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몰개성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트찰라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시도가 좀처럼 하나의 구심점으로 엮이지 않기 때문이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트찰라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사명을 마주한 인물들의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와칸다와 탈로칸의 확장된 세계관이다. 전자는 시리즈를 이어갈 새로운 블랙 팬서를 소개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전편이 흑인 영화라는 정체성에 국한되어 있다는 한계를 깨기 위한 노력이다. 종합적으로는 트찰라의 존재감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후계자의 성장을 통해 트찰라를 추모하면서도 블랙 팬서라는 영웅의 의미를 확대하는 것이다.
우선 영화는 트찰라의 죽음을 추모한다. 추모의 핵심은 계승이다. 트찰라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물려받을지가 관건이다. 사실 MCU 속 블랙 팬서는 언제나 복수와 밀접하게 연관된 히어로였다. <시빌 워>에서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트찰라는 복수를 위해 윈터 솔져를 찾아 죽이는 데 혈안이었다. 그의 아치 에너미인 '에릭 킬몽거(마이클 B. 조던)'도 복수귀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자신을 버린 와칸다와 국왕인 트차카에게 복수하려 했다. 또 미국에서 성장한 흑인답게 인종 차별로 인한 피해와 억압을 되갚아 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로운 블랙 팬서로 거듭나는 슈리도 다르지 않다. 슈리는 트찰라의 병을 알아채지도 못했고, 인공 하트 허브를 만드는 데도 실패했다. 갑작스레 오빠와 사별한 이후로도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어머니 라몬다의 위로나 충고도 듣지 않은 채 왕실의 일원으로서, 또 잠정적으로 블랙 팬서의 후계자로서 주어진 책임을 외면한다. 그러던 그녀는 네이머의 테러로 어머니를 잃은 후에야 그간 거부했던 책무를 다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아픔과 상실감을 네이머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다. 직접 개발한 인공 하트 허브를 마신 슈리는 꿈속에서 어머니도, 트찰라도 아닌 에릭 킬몽거를 만난다. 세상을 파괴하겠다는 킬몽거의 야심과 슈리의 분노와 상실감이 향하는 방향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리는 결국 네이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대신 그를 용서하고, 그와 동맹을 맺는다. 전편에서 트찰라가 남긴 메시지, 관용을 베풀 때 비로소 상실감이 치유된다는 유지를 마침내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랙 팬서>는 복수심을 어떻게 승화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트찰라와 킬몽거는 흑인, 특히 미국 사회의 흑인들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그들은 피부색을 이유로 자신들을 차별한 세상에 복수할지 아니면 용서할지를 두고 격렬히 논쟁했다. 마치 마틴 루서 킹과 말콤 x가 대립하듯이. 이 맥락에서 트찰라는 한층 더 성숙해졌다. 그는 고립주의를 포기했다. 와칸다의 문호를 열고, 와칸다의 자원을 활용해 세상을 돕겠다고 선언했다. 킬몽거의 원한과 복수심에는 공감하되 보다 발전적인 방향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킬몽거의 퇴장과 트찰라의 성장이 관객의 뇌리에 각인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슈리는 서로 다른 인물들의 입으로부터 트찰라의 유지를 전해 듣는다.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은 복수가 옳은 선택이 아니라며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한다. 음바쿠는 네이머와의 전면전이 와칸다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거라며 슈리를 말린다. 리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잃었던 라몬다도 딸이 복수심에 매몰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라고도 덧붙인다. 나키아도 슈리가 환상 속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계속 물어보며 복수는 와칸다와 탈로칸 둘 모두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걱정한다. 슈리가 네이머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 순간에는 라몬다의 영혼이 직접 딸을 설득한다. 그 덕분에 슈리는 복수와 용서 사이의 갈등과 딜레마를 극복하는 데 성공하고, 진정한 블랙 팬서로 거듭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왜 161분에 달할 정도로 길어야 했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게는 각 캐릭터의 세밀한 감정선을 충분히 묘사할 시간이 필요하다. 미처 풀어내지 못한 트찰라의 서사를 서로 다른 캐릭터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의 유지를 계승하며, 더 나아가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때문이다.
또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트찰라의 유산을 반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복수가 아닌 용서를, 폭력 대신 연대를 선택해야 한다는 그의 유지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킨다. 그 중심에는 네이머와 탈로칸이 있다. 해저 제국의 등장 덕분에 <블랙 팬서> 시리즈는 단순한 흑백 차별 너머의 메시지까지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하며 그 피해자들을 대변하고자 한다.
사실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비브라늄을 탐내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몇백 년 전부터 반복되어 왔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금과 은으로 가득한 엘도라도를 꿈꿨고, 후추를 찾아 탐험을 떠났으며, 차를 사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타 대륙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를 고려하면 와칸다와 탈로칸에 묻혀 있는 비브라늄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에 숨겨져 있던 금과 후추, 차 등과 다를 게 없다. 심지어 작중 탈로칸이 마야 문명의 후손이자 콩키스타도르에게 쫓겨난 피해자들이 세운 국가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덕분에 네이머는 단순한 빌런 이상의 매력을 뽐낼 수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만행을 두 눈으로 목격한 그에게는 지상 세계를 경계할 이유와 복수를 다짐할 당위성이 충분하다. 즉,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역사의 반복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캐릭터다. 따라서 그는 본질적으로 바닷속의 에릭 킬몽거나 다름없으며, 블랙 팬서의 아치 에너미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더 나아가 이는 미시적이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준다. 네이머와 슈리는 어머니를 잃은 후 복수심에 불타며, 서로 피 흘리며 싸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마야인과 흑인, 곧 소수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외부의 침략을 받았던 아픈 역사를 공유한다. 그래서 네이머와 슈리의 전쟁은 한 가정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소수 문명을 물들인 피의 역사이다. 또 와칸다와 탈로칸의 동맹이 트찰라를 향한 최고의 헌사인 이유이기도 하다. 용서와 연대의 정신으로 무장해 고립주의 노선을 포기한 트찰라의 비전이 실질적으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모라는 핵심 메시지를 적절히 녹여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두 축은 좀처럼 하나의 영화로 연결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MCU에 새로이 데뷔한 아이언하트가 스토리에 매끄럽게 녹아들지 못했다. 비브라늄 탐지기를 개발한 리리는 슈리와 네이머의 접점이다. 슈리는 리리를 보호하려 하고, 네이머는 리리를 죽이려 하면서 와칸다와 탈로칸은 충돌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아이언하트가 등장해야 할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리리가 슈리와 네이머의 접점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비브라늄 탐지기를 만들 만큼 뛰어난 공학자라면 그녀의 역할을 충분히 다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언하트가 클라이맥스 전투에서 눈에 띄는 활약상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시빌 워>에서 블랙 팬서와 스파이더맨이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것과 명백히 대조를 이룬다. 그 결과 아이언하트의 등장은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결과적으로 네이머와 슈리의 서사가 따로 노는 듯 보이게 된다. 리리 윌리엄스라는 캐릭터의 등장과 존재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그녀의 등장을 계기로 펼쳐지는 와칸다와 탈로칸의 서사가 긴밀히 엮이지는 않는 것이다. 네이머가 탈로칸의 역사를 설명하는 대목이 지나치게 길고 지루한 이유다.
두 번째로는 히어로 영화의 정체성이 약하다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액션의 비중이나 퀄리티가 장르적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네이머의 와칸다 공격 정도를 제외하면 기계적으로 찍어낸 전투 장면이 있을 뿐, 개성적인 액션 시퀀스가 눈에 띄지 않는다. 와칸다와 탈로칸 군은 가상의 국가들이고 독특한 기술로 무장했지만 평범한 백병전으로 일관한다. 블랙 팬서에게 기대할 법한 동물적인 움직임도 잘 보이지 않는다. 배 한 척을 사이에 둔 전투가 양 국가의 총력전으로 묘사되는 것도 영화의 스케일에는 걸맞지 않다. 이에 더해 CG도 발목을 잡는다. 탈로칸의 경관을 보여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닷속이 지나치게 뿌옇고 흐릿해 건물이나 사람의 구분이 어렵다 보니 바닷속 강대국이라는 느낌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아쿠아맨>의 아틀란티스를 떠올려 보면 이는 충분히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사실 <블랙 팬서>가 흑인 영화로서의 메시지와 슈퍼 히어로 영화로서의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트찰라와 채드웍 보즈먼의 존재감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이야기가 트찰라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더 바라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헌사이자, 추모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히어로 영화이자 액션 영화라는 정체성을 잃은 듯이 느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장르적 목표와 쾌감을 살려냈다고 보기 어렵다 보니,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는 인상적이지만, '블랙 팬서'라는 히어로를 만난다는 느낌은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리오넬 메시가 떠난 바르셀로나 축구를 보는 것처럼. 결국 MCU의 페이즈 4는 트찰라와 채드윅 보즈먼이 떠나간 빈자리만 새삼 느끼며 아쉬움 가득하게 마무리된다.
P(Poor, 형편없음)
아무리 추모에 방점을 찍어도, 오프닝 로고가 최고의 장면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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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과 불행으로 힘겹게 엮는 멜로
불행에 불행이 연이어 엮이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절한 지는 잘 알겠다. 그러나 불행 속에서 멜로를 피어나게 만드는 과정은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 '로기완'을 보고도 영 개운치 않은 게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은 삶의 마지막 희망을 안고 벨기에에 도착한 탈북자 기완(송중기)과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여자 이마리(최성은)가 서로에게 이끌리듯 빠져드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조해진 작가의 장편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 등장하는 캐릭터 로기완만 차용해 새로운 내용으로 각색했다.
영화는 초반부에 로기완의 생존기를 구구절절하게 보여준다. 엄마 옥희(김성령)와 함께 북한에서 탈출해 중국 연길에서 생활하던 그가 어떤 사유로 벨기에까지 오게 됐는지를 설명하고 벨기에에서 하루하루 버텨내는 그의 삶을 최대한 처절하게 그려낸다. 다소 지리멸렬한 느낌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불행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인간의 삶을 전달하기엔 나쁘진 않았다.
로기완과 이마리가 엮이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조금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좋지 못한 첫 만남을 가진 두 사람인데 왜 서로에게 빠져들게 됐는지 설명이나 서사의 빌드업이 생략됐다. "이끌리듯 빠져들었다"는 표현으로 넘어가기엔 이들의 감정선에 큰 구멍이 뚫려있다. 차라리 극한의 상황 속에서 견뎌낼 수 있는 연대나 응원을 전하는 휴머니즘이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두 캐릭터의 멜로만큼 부족한 게 하나 더 있었으니 마리의 감정선이다. 사격 국가대표 출신인 그가 왜 아버지와 반목하게 됐고, 자기 자신을 타락시키면서까지 아버지에게 상처 주려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마리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큰 장벽과도 같았고, 기완과의 멜로 케미도 설익은 느낌이 강했다.
'로기완'을 연출한 김희진 감독의 연출력도 다소 애매했다. 이국적인 풍광을 배경으로 한 점은 분명 이색적으로 느껴지긴 했으나, 과거 8~90년대 작품을 보는 듯한 촌스러움도 같이 묻어난다.
'로기완'의 두 주연배우 송중기와 최성은은 자신이 맡은 배역에 성실하게 임하며 연기력을 펼친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높은 완성도는 아니다 보니 '고군분투한다', '노력한다'에 그쳤다는 게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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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승완이 '밀수' 해온 바다 위의 한판승부
밀수를 시작하지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 가상의 해안가 도시 군천이다. 주인공인 춘자와 진숙은 해녀 동료들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친구들과 해녀 일을 하면서 바다생물을 채취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두 해녀의 삶에 위기가 들이닥친다. 군천 앞바다에 공장이 생긴다는 소식이었다. 공장이 들어서자 생계에 위협이 생기는 해녀들. 바다생물이 폐수로 인해 더러워졌기 때문에 제품으로 판매하는 것이 쉽지 않다. 위기에 직면한 군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오랫동안 진숙과 알고 지냈던 아저씨 한 명이 있다. 이 아저씨가 진숙 부녀에게 밀수업을 제안한 것이다. 솔깃한 춘자. 하지만 진숙 부녀는 썩 내키지 않는다. 그건 단지 부녀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군천이라는 마을 자체가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밀수업 제안을 수락한다.
돈을 갈퀴에 긁어모으고 있다. 지역사회에 돈이 돌고 있다. 이제 진숙 부녀에게 생계는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문제가 아예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불안한 엄 선장. 언제 어디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그만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는 딸 진숙에게도 마찬가지. 아버지를 항상 잘 따랐기 때문에 가족의 의중이 정말 중요했다. 동상이몽이라고, 친구 춘자는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밀수업으로 돈을 버는 게 그렇게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내심 밀수업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녀. 정말 마지막이라는 말에 속상하지만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마지막 밀수를 위해 출항을 나섰다. 그런데 사고가 벌어졌다. 늘 느릿느릿 출동하던 세관이 갑자기 등장했고, 해녀들이 모두 잡혔다. 과연 해녀들을 세관 찌른 인물은 누구일까? 군천 해녀들의 한판승부가 벌어진다!
최동훈이 아니라 류승완
2년 만에 돌아온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는 감독의 향을 맘껏 결부시킨 액션/스릴러물이다. 류승완은 이미 한국영화에서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해 왔다.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시작해 ‘한국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 것 같은’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이 <밀수>는 기존에 류승완 월드를 그대로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류승완이 그대로 유지해 온 ‘류승완 월드’는 고급스럽지 않은 척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영화는 이 기본적인 류승완 월드의 틀을 그대로 가져온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박력 넘치는 캐릭터 세팅과 이야기 구성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의 힘을 강하게 신뢰한다. 가상의 도시 군천은 물론이고 당시 시대상에 의한 ‘밀수’라는 소재가 ‘왜 이 이야기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류승완이 판을 합리적인 판을 깔아놓고 그 연계를 튼튼히 해 감독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렸다.
하지만 ‘단지 류승완 영화’라는 점은 영화의 장점이면서 단점으로도 작동한다. 우선 영화에서 장점으로 뽑을만한 것은 이야기다. 영화의 이야기 구성에 누수가 없다.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내적인 논리가 큰 흐름에서 잘 맞아떨어진다. 인물의 사용이 기능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반대로 인물의 서사를 영화 내적으로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에 대해 류승완 감독이 춘자/진숙 쪽에 분량을 많이 주는 수를 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굉장히 내밀하다고 볼 수 있는 지점까지 대사로 넣었다는 점은 ‘과연 류승완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하는 구조다. 이 구조는 다른 등장인물에게도 수혜로 작용한다. 권상사/고마담/장돌이/이 계장이 두 사람과 대응한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개성이 생긴다. 두 사람의 내적 동기도 이해하니 이야기 몰입에 효과적인 것이다.
심심한 컴백
또한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동안 류승완이 견지해 온 이야기의 박력을 품고 있다. 감독의 전작인 <베테랑>의 이야기는 왠지 과잉의 에너지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특히 장윤주, 오달수 배우가 맡은 역할이 그렇다. 작중에서 조태오가 맡았던 역할만 봐도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담당 배우나 황정민 배우의 연기는 연극적이다. 이 연기 톤은 영화 내적으로 시너지가 있다. 영화 후반부까지 액션/스릴러물의 장르적인 동력으로 작동하며 관객에게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이는 연기 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짝패>나 <피도 눈물도 없이>는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액션신으로 가득 찼던 작품이다. 전자 <짝패>는 이야기를 교차해서 꼬는 것이 아니라 액션으로 가득 채운 영화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여성 인물의 처절한 액션을 너절한 대사와 함께 표현한다.
이 <밀수>는 류승완의 장점을 그대로 구현한 듯 보인다. 영화 중후반부에 분기점 찍고 이야기의 톤에 박력이 들어간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액션신은 과연 충무로 키드가 어디 안 갔다는 걸 다시 상기시켜 준다. 또 후반에 특정 장소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관객에 따라서 신선하다고 느낄 여지가 충분하다. 영화의 단점은 ‘오히려 류승완스럽다’라는 점에 있다. 사실 이 작품의 단점은 전작 <모가디슈>와 <군함도> <베를린>와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올드하다. 이야기 모든 것이 다 적당하다는 점은 무난한 선에서만 끝나지 않았던 류승완의 드라마 제작 능력을 알기에 아쉽게 느껴진다.
모든 것에 단점이 있다지만
특히 류승완의 이야기에서 인공성이 느껴진다는 점이 이 작품에서 유달리 도드라졌다. 이야기에서 영화의 강점이 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고민시 배우가 맡은 고마담이다. 이 인물은 감독의 역량이 그대로 투영된 캐릭터로 보인다(<베테랑>에서 장윤주 배우가 맡았던 역할의 연장선상인 부분이 어느 정도 있다). 이 감독의 캐릭터 투사는 인물의작위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인물이 한 가지 장점에 의존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 또 이를 대사로 직접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은 이야기의 인공성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춘자-진숙이 케미를 보여주며 빌런들을 해치우는 것이 영화가 선택한 장르적인 특성 중 하나다. 이 특성과 이 인물의 설정이 맞지 않아 중반부가 넘어가면 좀 지루하다고도 느낄 여지가 있다. 패턴이 전형적인 것이다. 또 박정민 배우가 맡은 장도리 역에 대해서는 역시 장르적인 특성을 위해 디테일을 희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후반부 이 인물에 대한 부분은 스릴러물로, 또 한 클리셰를 비틀기 위해 인공적으로 전개된 부분이다. 이 장도리 캐릭터와 관련된 부분은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진주인공의 엄청난 퍼포먼스가 이 인물의 작위성을 어느 정도 가려준 감이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사건관계가 하이라이트를 위해 전시되기만 한 건 아닌지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이야기의 후반부를 영화의 장점으로 뽑을 관객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글쓴이는 그 중간에 변곡점 찍는 신의 액션에 비해, 이야기의 밀도를 쌓아 올리는 방식에 비해 단점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곳이어야 하는 근거는 있다. 이 과정이 매끄러웠나? 에 대한 것은 의문이다. 또 비슷한 맥락에서 이곳에서 벌어지는 액션이 매끄러웠나? 역시 의문이다. 류승완이 액션을 그동안 잘 만들어왔고 심지어 그전 장면에서 장소성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필모그래피 초반의 류승완의 기시감이 잘 안 느껴지는 지점이다. 전체적으로는 물론 이 시퀀스의 액션이 좋긴 했지만 딱 두 요소에서 영화의 단점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더군다나 이 영화의 엔딩신은 너무 갑작스럽게 결론을 냈다. 이런 요소들이 오히려 이 이야기가 ‘류승완스럽다’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부분이다. <모가디슈>에서 느껴졌던 아저씨스러움과 <베테랑>의 과잉, <군함도>의 조급함이 ‘이거 류승완이 만들었던 전작을 그대로 담습 하는 것 같네’라는 아쉬움을 낳은 것이다.
재미있나요라고 물으면 네
영화 재미있다. 무난하게 뽑힌 액션/스릴러물이다. 영화의 장단점을 따질 필요 없이 작품 자체가 ‘순수한 오락영화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가 아는 한국 상업영화에서 ‘잘 만들었다’ 싶으면 들어가는 것들 다 있다. 오해, 액션, 생기발랄한 캐릭터, 빌런의 명연기, 톡톡 튀는 감초들에 무난한 이야기까지 이 작품이 관객을 많이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점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의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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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쯤 마음에 품고 있잖아요 지브리 남주. 최애 지브리 남주 고르기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이자 지브리의 신작이 공개되었습니다!!
항상 따듯한 분위기의 영상과 함께 아련하고 설레는 이야기들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는데요 오늘은 줄거리와 더불어 지브리 최애 남주를 선택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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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러의 보디가드 2 영화 후기 / 라이언 레이놀즈와 사무엘 잭슨의 티키타카 / 난무하는 f*** 욕설 / 사방에 튀는 핏방울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킬러의 보디가드 2”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 전에 쿠키영상이 하나 있고, 엔드크레딧 후에 관객도 깜빡한 쿠키사진이 하나 있습니다.#코믹, #액션, #블록버스터, #라이언레이놀즈, #사무엘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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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켓이 가지고 있던 '한(恨)'이 표출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3
?Rabbitgumi 입니다!
오랜만에 리뷰를 업로드 합니다.
지난 주 개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볼륨3의 반응이 무척 좋습니다.
이미 많은 리뷰어와 관객들이 좋은 평가를 하고 있죠.
다양한 관점의 리뷰도 이미 보셨을 거에요.
저는 영화의 완성도 보다는 로켓이 가지고 있었던 감정과 그가 겪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에서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에서는 일반적인 영화 리뷰 보다는 보면서 떠올렸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정리하여 전달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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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내겐 너무 소중한 너> 메인 예고편
가짜라도! 아빠가 되어야 한다!
돈만 빼고 세상 무서울 게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재식’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지영’의 전재산을 먹튀하기 위해
‘지영’의 딸 ‘은혜’의 가짜 아빠를 자처하게 된다.
알고 보니 ‘은혜’는 시각과 청각 장애를 모두 가진 아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은혜’를 귀찮아 하던 ‘재식’은
손끝으로 세상을 느끼는 ‘은혜’만의 특별한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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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낫아웃> 티저 예고편
고교 야구부 유망주 광호는 프로야구 드래프트 선발에서 탈락한다.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원하는 광호. 하지만 광호의 선택은 동료들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만들고, 기댈 곳이 없어진 광호는 친구 민철과 함께 가짜 휘발유를 판매하는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