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4-04-22 23:29:31
슬로 모션만큼은 포기 못해!
영화 '레벨 문 파트2: 스카기버' 리뷰
파트2에서도 크게 나아진 점을 느끼진 못했다. 대신 이거 하나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슬로 모션 기법을 지독하게 사랑해 포기하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파트1이 공개된 지 4개월 만에 파트2를 내놓은 넷플릭스 영화 '레벨 문 파트2: 스카기버'는 코라(소피아 부텔라) 일행이 마더월드를 상대로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그린다. 파트1에서 대패를 당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노블 제독(에드 스크레인)은 전함을 이끌고 벨트 공격에 나서며, 코라 일행은 벨트 주민들과 보금자리를 지키고자 방어 태세에 돌입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파트1의 단점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마더월드의 최종병기급으로 훌륭한 전투력을 지녔던 코라가 하루아침에 쫓기는 신세가 되는 서사나 네메시스(배두나)의 과거, 반란군 일행이 벨트 주민들과 유대를 쌓는 과정 등에 좀처럼 몰입할 틈을 주지 않고 빨리빨리 전달하기 바빠 보였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벨트 전쟁 또한 꽤나 색다르진 않았다. 지하, 실내, 공중, 함선 등 다양한 배경을 활용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노력은 느껴지긴 하나, 시도 때도 없는 슬로 모션이 속도감을 떨어뜨린다. 액션이 주는 쾌감은 1도 없으니 전투 신이 나오기까지 1시간가량 기다린 시청자들에겐 다소 힘 빠지게 만든다.
극 중 빌런들의 활용법 또한 한숨이 나올 따름이다. 절치부심하여 코라를 쫓아온 노블 제독은 전편에서 생존한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이 들 만큼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며, 최종 보스 격인 발리사리우스 섭정(프라 피)은 코라의 회상 신에만 등장했을 뿐이다.
네메시스 역으로 반란군의 한 축을 담당한 배두나를 향한 기대도 다소 허무하게 다가왔다. 특유의 분위기와 눈빛으로 존재감을 피력하긴 했으나, 정작 그를 활용한 액션이나 다른 감정 신 등 분량은 많지 않았다는 것.
탄탄한 플롯과 스토리라인 없이 무리하게 세계관을 만든 잭 스나이더의 과욕은 '아미 오브 데드'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그대로 답습했다. 파트2까지 기대치를 못 미치는 졸작을 보인 가운데, 아직 '레벨 문'이 파트3이 남았다는 점이다. '레벨 문' 세계관에 더 이상 기대할 만하거나 반전이 될 만한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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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이 없을 때 불안감이 만드는 모습
우리 사회에서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살아가는 공간만 의미하지 않는다. 집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투자의 대상이 되었고 부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으로 재산을 늘리려 하고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한참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부터 집값은 빠른 속도로 뛰었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하나 마련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돈을 벌어 저축해야 했다. 그렇게 저축해서 집을 사는 기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길어져만 갔다. 그렇게 집에 대한 인식이 투자의 수단으로 변하면서 절망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집 한 채를 사기도 버거웠다. 집값이 오르면서 전셋값과 월세값도 늘어났다. 그렇게 집을 소유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인식 전환에도 불구하고 집은 우리가 가장 편하게 쉬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집을 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집을 사지 못하더라도 전세나 월세로 지낼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더 심각한 절벽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곰팡이로 가득한 집에서 생활해야 하거나 아주 작은 평수의 공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공간에서 아이를 키우고 가족과 살아가야 한다면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좀 더 나은 공간으로 가고 싶지만 당장은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까. 이들은 매 순간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보증금 사기로 살 집을 잃어버린 부부의 이야기
영화 <홈리스>는 보증금 사기를 당해 집이 없는 처지에 있는 한결(전봉석)과 고운(박정연)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보증금을 잃은 후 한순간에 갈 곳을 잃었다. 찜질방에서 숙박을 해결하지만 매일 쉴 공간을 찾기 벅차 보인다. 그들에게는 갓난아이가 있다. 그래서 이 가족에게는 집이 필요하다. 당장 생활비도 부족한 그들에게 보증금이 있는 월세집은 바로 들어가기 어렵다. 초반에 영화가 비추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 우울해 보인다. 그래도 한결은 배달 일을 하며 하루하루 일당을 받고, 고운은 아이를 케어하며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들은 도움받을 가족도 마땅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제도적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마땅치 않다.
한결과 고운 부부의 고민은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겪는 주거 문제를 좀 더 극적으로 영화에 담겼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조금씩 최악의 상황으로 빠진다. 사기를 당한 상황에서 아이가 다친다. 안 그래도 돈이 부족한데 돈이 필요한 일이 자꾸만 생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벌려 겨우겨우 하나의 상황을 해결하고 나면 그다음에 또 다른 문제가 그들의 앞에 나타난다. 그 상황에서 그들에게 집이라는 안락한 공간은 도저히 꿈꿀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꿈꾼다. 하지만 여전히 집값은 높고 은행 대출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자신만의 집을 구하기 어렵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좀 더 공격적으로 투자를 시도한다. 코인이나 주식에 들어간 돈이 불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한 순간에 그 돈이 없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대부분의 자산을 잃은 그들에게 결혼이나 출산은 먼 일이다. 만약 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다면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영화 <홈리스>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들이 부정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자신들 만의 집을 만들 수 있을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영화 속 주인공들은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그 집에 대한 비밀이 영화에 미스터리 한 느낌을 만든다. 그들이 그 집에서 아이와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는 내내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불안감은 관객의 마음도, 주인공들의 마음도 오염시킨다. 이들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하지 못할 행동을 하나씩 하기 시작한다. 남편인 한결 뿐만 아니라 부인인 고운도 당장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건 합법적인 선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집은 생존을 의미하고 그 생존을 위해 마음속에 자리한 '도덕과 상식'을 포기한다.
집이 없다는 불안감을 부부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영화
이런 주인공들의 선택은 굉장히 충격적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것 이외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은 궁지에 몰렸다. 이 가족이 꿈꾸는 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영화의 말미 이들이 할머니의 빈 집에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주 평범한 가정처럼 편안하게 보인다. 한결과 고운은 그들의 선택의 끝이 어떤 것일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충격적인 선택을 할 때마다 무척 마음이 무거워 보인다. 아이에게 자신들의 고통을 전달하지 않고 키우고 싶은 이들의 욕심은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그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한결을 연기한 배우 전봉석과 고운을 연기한 배우 박정연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최선을 선택을 하지만 한가닥 남은 양심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무척 잘 표현해냈다. 영화에서 이들이 고민하고 절망하는 순간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진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절망적인 상황을 해결하려고 뛰는 한결의 모습, 할머니 집을 자신의 집으로 만들려고 할머니의 집을 버리며 멍한 표정을 짓는 고운의 모습은 이들의 절망감을 무척 잘 전달하고 있다.
영화 <홈리스>는 21회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CGV 아트하우스상을 수상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겪는 일처럼 현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사지 못해 절망하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필요한 주거 공간은 가지고 있는 돈에 비례해 그 등급이 나뉜다. 혼자라면 어디에서라도 살 수 있겠지만 아이가 있다면 어느 정도 좋은 환경이 뒷받침되는 곳을 택해야 한다. 여기에 집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사건들이 무작위로 찾아온다. 어떤 방법으로도 구할 수 없는 주거공간에 대한 고민이 이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투자용으로서의 집도 요원하지만 주거공간으로서의 집에 다가서는 것도 무척 쉽지 않다. 영화 속 한결과 고운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마치 집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의 절망감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 무척 안타깝게 느껴진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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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과의 안녕이 정말 이별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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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분위기 아담 워록
어느 날의 노웨어. 가오갤 멤버들은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딱 한 명은 다르다. 가모라를 떠나보낸 스타로드. 타노스와의 일전 도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이다. 사실 가모라는 살아있다. 다른 평행우주선의 가모라일뿐. 스타로드와 사랑에 빠졌던 적이 없던 세계의 가모라. 스타로드를 보더라도 모르쇠 한다. 마음에 구멍이 난 스타로드. 수많은 은하수들 속에서 별이 되어 반짝였던 가모라는 이제 추억이 되어버렸다. 술로 하루를 지내는 스타로드. 그 어떤 일로도 상실감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노웨어. 로켓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트라우마처럼 피어오르는 기억들. 로켓은 애써 머릿속을 지우기로 한다. 무작정 스타로드의 zune에 이어폰을 연결한다. 들리는 노래는 라디오헤드의 ‘Creep’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 로켓의 시선에 맨티스와 드랙스가 보이고, 네뷸라와 그루트도 보인다. 그래. 현재에 집중하는 거야. 스타로드와 mp3인 zune을 건드리지 말라고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는 로켓. 시간이 지나 로켓도 일과를 마치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노웨어에 쳐들어온다. 빠른 속도로 달려온 아담 워록. 느닷없이 로켓을 공격한다. 당황하는 노웨어 사람들. 네뷸라가 대응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드랙스 역시 마찬가지다. 겨우 상황을 정리했지만 로켓이 치명상을 입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뭉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스타로드는 가오갤의 리더로서 로켓을 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나자고 독려한다.
퇴사 5분 전
6년 만에 돌아온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동안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와 <어벤저스 : 엔드게임>으로 나름대로의 서사를 이어갔던 가오갤 멤버들. 최근 마블이 새로운 히어로들을 출시함에 따라 이들의 행보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제임스 건이 메가폰을 잡는 게 확정이 됐고 이내 이 작품이 시리즈를 끝내는 작품이 되는 것이 확정됐다. 이 말은 즉슨 제임스 건이 이 영화를 마무리하고 MCU에서 하차한다는 말이 된다.
영화는 감독의 이 입지를 잘 활용하듯 기존 마블영화에서 약간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 우선 첫 번째. 영화에서 액션 비중이 덜 중요하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다른 시리즈물들에 비해서는 살짝 약하긴 하다. 이는 여태까지 만들어진 페이즈 4,5의 영화들이 갖고 있던 패턴을 깨려고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 그 액션 쾌감을 어디서 채웠나? 로켓의 과거회상과 SF적 상상력이다. 전자 로켓의 과거회상은 영화가 갖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를 표현한다. 이 전자도 중요하지만 후자 'sf적 상상력'은 특히 더 중요하다. 사실 4 페이즈 이후 마블 영화들이 시각적 상상력이 약했다는 것은 아니다.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의 탈로칸, <샹치 : 텐 링즈의 전설>에서 만다린이 이끄는 마을,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에서 양자역학 월드 등 나름대로 성의 있는 묘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이 갖고 있는 시각화의 단점은 뭔가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다. 탈로칸은 <아바타> 시리즈에서, <샹치 : 텐 링즈의 전설>은 할리우드가 바라본 동양문화에 대한 동경을 어느 정도 따라왔다는 점이,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는 <스타워즈>에서 봤다는 기시감이 느껴진다. 글쓴이는 이 작품이 이 영화들과 다른 차이점을 갖는다는 것이 예상이 안 됐다는 점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뭐 일부 크리처는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 <제5 원소>에서 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어떤 소재를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개성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우주선에서 어떤 파일을 가져가기 위해 도착한 한 장소가 그렇다. 여기서 전개되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클리셰를 뒤집는다. 이렇게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시각화가 영화의 중심이고 가장 큰 장점이 된다고 해서 액션이 약하나? 그건 또 아니다. 아담 워록이 갖고 있는 액션은 생각해 보면 좀 익숙하다. 멀리 안 가도 '이터널스'의 이카리스나 '캡틴 마블'이 갖고 있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빨리 달리기형 빌런중에서는 이 아담 워록이 가장 매력적이었을 정도로 영화는 상상력을 충분히 가진 채로 질주한다.
또 히어로 무비의 기본문법을 살짝 벗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동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선 빌런의 활용법이다. 본작의 빌런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원래 슈퍼히어로 영화 하면 빌런이 선량한 인물들을 공격하거나 이야기의 전개를 뒤엎는 경우가 많다. 가령 같은 mcU에서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아이언맨이 캡틴아메리카에 대응했던 방식은 빌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아이언맨이 얼마나 정의로운 인간인과는 별개로). 또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도 버키가 스티브의 오랜 친구인 것과는 별개로 작중에서 빌런 롤을 맡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이언맨이나 버키처럼 무력이 강한 인물도 빌런이 될 수 있지만 반대의 측면도 있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어벤저스 간의 분쟁을 조장하는 인물 제모 남작은 무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난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치 혀 놀리는 능력과 뛰어난 기획력으로 어벤저스 간의 갈등을 유도한다. 이런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서 빌런 활용법은 연작들이 첩보/스릴러 영화같이 느껴지게 만드는 연출방식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변박을 주는 빌런 연출법은 이 영화에도 쓰인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후반부의 한 대사가 있다. 또 어떤 장면이 반복됨으로써 주는 감동이 있다. 이 두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빌런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봤는지를 주목해서 관람한다면 영화의 신선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측면에서 이 지점은 영화의 단점이 될 수도 있다. 가오갤 멤버들의 서사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슈퍼히어로 장르의 특성을 어느 정도는 취한 듯 보이지만 빌런의 존재감이 약하게 느껴진다는 건 기대에 못 미치는 지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이 함께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어벤저스'시리즈들을 좋아했다. 글쓴이가 좋아했던 이유는 '액션을 잘 뽑아서'였다. 그러나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 깊던 장면들은 '연대'라는 가치에서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뭐 대표적으로 <어벤저스 : 엔드게임>의 일부 장면이 생각난다. "어벤저스! 어셈블" 장면은 타노스와의 전투를 앞두고 슈퍼히어로들이 하나 결집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면이다. 바로 전작이었던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슈퍼히어로들이 사라지는 장면은 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관객들 역시 봐왔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선이었다. 이 작품은 어느 부분에서는 슈퍼히어로물의 클리셰를 부쉈지만 한 편으로는 그 어떤 영화보다 강하게 특색을 유지했다. 무슨 말이냐. 영화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 그리고 내지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행동이 있다. 당연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데, 이 장면은 온갖 판이한 세상이 판치는 영화의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행위라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가진다.
이 공감대는 제임스 건이 얼마나 변태적인 인간(?)인가를 느끼게 한다. 첫째.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사람으로 국한 짓지 않았다는 점'이 그렇다. 아니 뭐 sf영화에 등장인물이 사람이 아닌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것이 강점처럼 느껴진다. 왜냐. 이 낯선 세상을 몰입시킬 공감대는 전적으로 인간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의 이해가 쉽다는 이점이 되고, 또 간단한 이미지인 원형(O)의 형태가 인물들끼리 반복되기 때문에 주제적인 측면에서도 관객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한다. 이 연대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소재인 동물 실험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과 동물이 큰 차이가 없어서 이런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역시 윤리적인 문제에 부딪힌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뜻한 가족 영화
뭐 다른 마블의 시리즈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작품 역시 가족영화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마니아>에서의 찐 부녀관계나 <블랙 위도우>에서의 대안가족적인 특성이 그 예시다. 당연히 온 가족이 가서 보기 좋은 영화를 목표로 이런 작품들을 만들어 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모름지기 칭찬도 1절만 해야 한다. 사실 마블이 페이즈 4에 돌입하고 나서 이런 가족영화적인 특성을 사골국 우려먹듯이 반복했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그래서 가족의 해체를 다뤘다는 점에서 <문나이트>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매번 반복되는 지루한 루틴을 제임스 건은 어떻게 주파했을까? 이 아저씨는 동물과 인간의 연대, 그리고 캐릭터 간의 떡밥수거로 해소했다.
우선 로켓이 개조실험을 받기 전후에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이 동물 친구들은 종류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가족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네 캐릭터가 쌓아 올린 서사는 <블랙 위도우>의 대안가족을 연상케 한다. 사실 이 네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알던 인물 서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물들이 왜 이런 상황에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변주를 줬다는 걸 알게 한다. 단순히 동물보호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 그런데 이게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특히 마블 영화가 이런 플롯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가족영화로서의 틈새시장을 잘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송태섭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짠 것과 궤를 비슷하게 하는 셈이다.
이 부분은 대조적인 측면에서도 이어진다. 가오갤 멤버 중에 유일한 사람이 누굴까? 스타로드다. 스타로드는 사실 비극적인 가족사를 갖고 있다. 이기적이었던 친부와 실질적 아버지 역할을 했던 욘두와의 서사는 우리가 1,2편을 보고 난 다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아버지 같지도 않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서사는 영화에서 반복되는 지점이 있다. 이 부자관계 모티브는 위에서 서술했던 영화의 원형 이미지와 시너지가 있다. 인물들 간의 대비를 더 강조시키는 느낌? 이 대조를 활용한 함께의 이미지는 영화의 쿠키영상까지 이어지는 따뜻함과 이어진다. 이렇게 정석적인 가족영화 클리셰의 반대지점을 정확하게 찔러서 이야기를 펼쳤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나 가오갤 멤버들의 개성과도 어울린다는 점은 제임스 건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알게 한다.
그나마 뽑자면
오랜만에 마블 영화의 정수가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지점은 있다. 바로 빌런인 하이 에볼루셔너리다. 이 사람의 내면묘사가 조금 더 들어가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이 인물이 이런 능력과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는 건 대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물이 몇 없는 패턴으로 후반부까지 끌고 간다는 점은 이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철학적인 소재들이 더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인물들이 살짝 연극적인 느낌이 있다. 특히 스타로드 쪽이 그렇다. 영화를 보면서 살짝 끊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어떤 대사들은 마음을 알린다. 후반부 그루트와 워록의 대사가 그렇다. 그러나 워록과 하이 에볼루셔너리 이야기나 트랙스 쪽의 연기나 서사는 살짝 작위적인 느낌? 그러나 앞서 두 가지가 영화 관람에 있어 발목을 잡지는 않는다.
‘제임스 건’ 해버렸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음악이다. 이 부분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처팝송의 p도 모르는 글쓴이마저도 알고 있는 제일 첫 번째 삽입곡부터, 극후반부까지 영화를 더 따뜻하게 만드는 연출 지점이 된다. 글쓴이는 이런 음악의 활용을 보면서 제임스 건이 영화라는 매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마블이 다시 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까? 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제임스 건 같은 인재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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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유리는 참 기이한 물질이다. 유리 저편을 고스란히 보여주지만 넘어갈 수는 없다는, 통과와 차단의 기능을 동시에 한다. 날아가는 새가 머리를 부딪힐 만큼 투명하면서도, 은칠 한 번에 자신만 비추게 만드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영화 <노웨어 스페셜>의 주인공 존은 매일 유리를 닦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다. 그는 투명하고도 차가운,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통과와 차단을 동시에 하는 유리의 속성을 매일 접하는 사람이다. 가끔 유리 벽 너머 단란한 가족을 보며 울적해지기도 하는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서른넷, 선고받기 전에는 누구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나이. 유일한 가족인 4살 아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려는 여정이 <노웨어 스페셜>의 줄거리다.
영화 도입부에는 세상의 다양한 유리창들이 비친다. 가게 통유리 벽, 유리창 너머 고양이와 눈 마주치는 집, 귀여운 장식물이 놓인 벽돌집의 아기자기한 창까지. 그리고 유일하게 닦여있지 않은 지저분한 유리창 너머, 아주 작고 귀여운 아이 마이클이 아빠 존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를 따라 관객은 존의 사정을 서서히 알게 되는데, 자기 자리에서 육아에 최선을 다하는 좋은 아빠라는 점도 그중 하나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지치고 힘들지만 나름대로 야무진 손끝으로 죄다 곧잘 해낸다. 그러나 그럴 수 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유리창을 닦다 이따금 멍해진다. 유리창 너머 단란해 보이는 가족을 볼 때, 부유하고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볼 때.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생의 시간을, 마이클에게 줄 수 없었던 안락한 가정의 모습을 볼 때면 슬퍼진다.
존이 자기 사후 마이클을 맡길 집을 직접 찾아 나선 것은 아이에게 최선을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루트다. 보통은 보호자가 없는 아이에게 보호자를 찾아 주지, 보호자가 함께 나서서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주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래서 마치 부동산 매물을 보러 다니듯이, 아이의 남은 생을 덜렁 넘겨야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입맛을 쓰게 만든다.
존은 최선을 다한다. 일에 육아에 바쁜 와중에도 사회복지사를 대동하고 아이와 함께 새로운 집을 찾아다닌다. 사회복지사들에게도 아이에게 가장 좋은 조건의 집을 찾아주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들의 '최고'는 규정과 외적 조건으로 이루어진다. 무엇이 최선일까. 정답 없는 질문 앞에서 존은 혼란스럽고 괴로운 여정을 계속한다.
그가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건 유리창 안의 세계다. 안락하고 평안하고 다정한. 어딘가에서 끊어졌거나 버려졌다는 느낌이 없는. 설령 그 느낌을 위해 자신이 끊어지고 잊힌다 하더라도 그는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
유리창 안을 보며 슬퍼하는 그의 표정은, 아이에게 유리창 안의 세계를 주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삶에 어떤 전제가 깔려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는 자신이 유리창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 믿으며 살았다는 것을.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존과 마이클 사이에 오가는 작은 장면들은 그들 또한 유리창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남들의 유리창처럼 깨끗하게 닦여 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유리창의 존재는 더욱 선명하다. 아이에게는 아빠와 함께 있는 세상이 곧 유리창 안이었다. 병으로 평형감각을 잃어가는 존과 달리 아이는 도로의 실금 위로 곧잘 걸어가듯이, 유독 순하고 귀여운 아이가 유리창 안에서 행복한 매일을 사는 동안 아빠는 이 삶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것. 그 동상이몽이 신파 하나 없이 이 영화를 슬프게 한다.
두 사람의 집에 놓인 "최고의 아빠" 컵이, 고사리 손으로 아빠에게 덮어주는 담요가, 더러워진 호랑이 잠옷이, 함께 벽에 붙인 그림이, 그런 일상적인 것들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어쩌면 그것이 상실의 속성인지 모른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나면 남는 자리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거창하고 원대한 것들보다, 너무 일상적으로 함께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자잘한 것들의 자리인지도. 그걸 알아버린 우리에게 이 영화의 소품 하나하나가 너무 슬프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삶의 많은 순간에서 경계를 느낀다. 세상은 유리처럼 얼핏 투명해 보이지만, 경계 안팎이 명확히 다른 팍팍한 곳이라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차단하는 것만 같은데 누군가는 그 안에서 웃고 있을 때 느껴지는 박탈감도 있다.
그러나 세상이 그런 곳일지언정 하나하나의 삶은 유리 벽보다 스노볼에 가까울 것이라 믿고 싶다. 그 안에 놓인 것들의 물성과 기억이 따스함을 남긴다는 것을. 존에게는 어렴풋하게 들은 이야기로만 남은 자신의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의 기억은, 어쩐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 되어 아이 손에 늘 들려 있듯이. 사랑은 그렇게 유리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노웨어 스페셜>은 이중의 여정이다.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집을 찾아준다는 시놉시스 상의 여정과 함께,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사랑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여정. 유리창 바깥을 서성이기만 한 것 같은 생애조차 실은 따스한 스노볼 속의 한 장면이었음을 깨닫는 여정. 가장 추운 날 코끝으로 떨어지는 햇살의 따스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듯, 가장 가슴 아픈 이별에서 그 사랑은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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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들은 벗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2020년. "코로나19" 이후 2년간 "청소년 관람불가"를 달고서, 100만명을 넘긴 영화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가 유일하다.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방자전, 2010 - 인간중독, 2014>을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겼던 "한국 성인 로맨스"이다.
당연히, 노출에 대한 마케팅도 있었지만 극장에서 거둔 결과는 7만명에 불과했다.
700만명을 넘겼던 <은밀하게 위대하게, 2013> 이후 9년 만에 나온 신작임을 생각하면, 아쉬운 성적이나 VOD 공개 1달 만에 8만건의 이용 횟수가 확인되었다.1. 야해서 보는게 아닌가?
영화를 재밌게 볼 수 있는 공간은 어딜까? - 당연한 소리이겠지만, 영화관이 이에 충족하는 공간이다.
핸드폰과 태블릿, 컴퓨터, 혹은 TV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크기와 화질, 음향과 조명까지 비교가 될까? (최근 "공연 실황"에 "스포츠 경기"까지 그 범주가 넓어지고 있다만...)
그런 점에서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성인 로맨스"이다. - 아무리 <365일>가 재밌다고 한들,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으니...근데, 본 작품에 오가는 말들이 살벌하다.
'"색, 계'라니요, '화양연화'라니요, 대체."로 분노를 꾹꾹 눌러낸 "이동진 평론가"를 비롯해 관객들 역시,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물론,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라는 속 편한 소리도 있겠지만 '왜, <화양연화, 2000 - 색, 계, 2007>가 지금까지 관객들의 기억에 남는지?'를 아는가? - 설마, 자 영화들이 관객들의 눈요기만을 잘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2. 걷잡을 수없이 커진다고?
그저, '야함'만을 선보였다고 하기엔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분량은 146분으로 2시간을 훌쩍 넘긴다.
이는 그만큼 이야기에도 공을 들였다는 소리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 '무광 - 수련'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급격하게 무너지는 것까지의 묘사가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특히, 이 과정이 나쁘지 않았기에 관객들이 기대를 걸었던 '그렇고 그런 장면(?)'들도 좋았던 것이고...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데에는 무엇일까?
일단, "수련"이 "무광"에게 관심을 보이는 원인을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건, 필자가 '솔로'임을 유의하길...)
그저, 계급을 이용한 "역할 놀이"로 보일 만큼 그들의 '그렇고 그런 장면(?)'들은 '아이 캔디'에 그친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수련"의 남편 "사단장"의 성불구로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한 여성 개인의 불만은 "이혼"이라는 상호 신뢰 간의 문제, 즉 한 국가의 신뢰로 이야기를 넓혀나간다.3. 자꾸만 아니라고 하네요...
이후 넋이 나간 "무광"이 당의 말씀이 적힌 팻말에 집중하는 장면까지 그저, 야한 영화를 큰 스크린으로 보고자 했을 관객들의 기대치와는 한참이나 다른 야심에 당황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이런 이유에는 본 국 '중국'에서 검열로 일부 내용이 삭제되었고, 이후에는 이마저도 회수시켜 '금서'가 되어 영상으로도 제작되지 못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원작에 대한 소개말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이를 모르더라도, 사진이 있는 액자가 각 가정에 붙어있고 일부 군인들이 농사를 하는 방식이며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등의 실제 사건 등은 단번에 윗동네를 연상시킨다.
다만,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으며 쓰이는 언어도 다양하게 섞여있다.
이런 모호함은 많은 분들이 지적하고 있는 여주인공 "수련"의 연기에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빠르고 정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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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리뷰
켄 로치가 영화를 통해 전하는 미덕을 하나 꼽자면 바로 정직이 아닐까. 영화란 결국 각본에 의거한 허구이니 본디 있던 사건이라 할지라도 '살짝 비틀어' 손쉽게 관객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거나,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말랑한 요소를 가득 첨가하여 온갖 인기를 누려도 될 터인데 그는 언제나 각본의 기틀을 현실 위에 튼튼히 쌓는다. 그리고선 허상을 예리하게 벼려 관객의 마음을 후벼 판다. 그의 영화에는 대단한 시네마틱 수사가 가미되지 않곤 하지만, 나는 그가 일생을 던져 전하는 메시지가 여전히 푸르며, 흔들린 적이 없다는 사실에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그런 의미에서든 아니든, 잉글랜드인인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은 한국인인 내게 더더욱 특별하고도 놀랍다. 우리나라로 간단히 치환해 이야기하자면(굳이 ‘간단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사적 갈등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인 감독이 한국 독립운동 역사를 그려낸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래서일까. 켄 로치 역시 영국 내에서 반영주의자가 아니냐는 말을 꽤나(어쩌면 이골이 날 만큼일지도)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감독의 대답은 그의 신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왜 내가 조국을 싫어한다고 말하는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내 고향과 영국인들과 정부를 싫어해야 한다는 말인가? 정부를 비판하는 건 민주주의의 의무다" (최을영, 2013).이런 외골수 감독이 그려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감상하고 나면 심경이 절로 복잡해진다. 그 까닭은 침묵하는 아름다운 대지와 피 흘리는 전쟁의 괴리에서도 일부 빚어지며, 아일랜드에 주둔하는 영국군의 야만적인 지배를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인 데이미언과 테디(패드레익 딜레이니) 형제의 우애와 인생이 역사적 질곡에 빠지며 어떻게 변모하였는지를 목격하는 것, 외부적 조건으로 인해 치닫는 형제간의 파국을 통해 비극은 더욱 처절하고 절절해진다. 데이미언은 런던에서 의사로 지낼 수 있었던 삶을 접고 형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가로 변모하며 형의 사살명령에 삶을 마감했고, 테디는 IRA (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공화군)을 이끄는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시작하여, 자유국 육군 장교로 입지를 굳히나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처형해야만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우리는 끝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인데, 왜 가족이, 연인이, 민족이 와해되어야 하나? 정녕 우리는 희생 없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영화 도입부에선 적이 너무도 명확하다. 다름 아닌 영국군이다. 헐링을 하던 데이미언&테드 형제와 친구들의 인권은 순식간에 짓밟히고, 급작스레 수색당하며, 함께 게임을 즐긴 열일곱 살 미하일(로렌스 베리)은 자신의 이름을 게일어로 댔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초반의 데이미언은 그럼에도 영국 런던으로 향하고자 하는데, 아마 미하일이 영국군의 요구대로 이름을 게일어가 아니라 영어로 발음했다면 살 방편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데이미언은 곧 그러한 생生의 연장은 결국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차역에서 목격한다. 무기를 소지한 잉글랜드 군인은 기차에 탈 수 없다는 규칙을 말하는 무고한 기관사가 끔찍하게 구타당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인이 원하는 것은 생존이 아니라 삶이라는 깨달음은 의사 데이미언의 발걸음을 돌려놓는다.
그러하므로 데이미언이 지향하는 아일랜드는 처음부터 사람을 살리기 위한 장소여야 했다. 영국군을 몰아내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네이드(올라 피츠제럴드)가 외쳤듯 내 삶을 살 수 있는 터전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데이미언의 지향점이 더욱 명확하게 피어나는 장면은 그가 오랜 친구인 크리스(존 크린)를 밀고자라는 이유로 사살해야 했던 씬이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는 말에 따라 데이미언은 크리스를 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배운 지식으로 동포를, 그것도 피를 나눈 형제처럼 친했던 이를 죽여야만 한다. 데이미언이 지닌 의사라는 속성과 상극인 이 선택은 짙은 그림자가 되어 그를 끝까지 따라다닌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는 거대한 대전제가 짓밟은 친구의 대안적 인생을 떠올리는 행위는 데이미언이 테드와 달리 태생적으로 군인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고민이자 질문이다. 잠시 발을 헛디뎠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를 죽여야 하는 상황은 과연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세계일까? 데이미언은 동의하지 않는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에게, 아일랜드는 이제 크리스를 희생했을 만큼 가치 있는 곳이 되어야만 한다.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IRA는 부당한 고리대금업자에게 투자를 받지 않으면 이길 방법이 없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기아상태다. 아일랜드는 전쟁을 이어갈 체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기실,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영국에게도 1920년대의 상황은 그야말로 치킨게임이었다. 양국 모두에게 휴전이 절실했다. 양측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전 협정이 체결되는데, 문제는 협정 내용에서 비롯된다. 무수한 희생이 뒤따랐건만 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아야 했고 분단이 이뤄져야만 한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이 내용은 납득하기 어렵기만 하다.
테디와 데이미언의 행보는 여기에서 갈라진다. 어쨌든 영국군이 머물지 않게 된 자유령을 수호하며 차근차근 완전한 독립을 이뤄낼 것인가, 혹은 협정을 인정하지 않고 완전한 독립을 이뤄낼 때까지 투쟁을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각기 달랐던 탓이다. 형인 테디는 전자를, 동생인 데이미언은 후자를 선택한다. 영화가 데이미언의 시각을 주로 쫓아가기에 언뜻 테디의 선택이 그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실질적으로 전쟁을 이어가기엔 아일랜드 역시 너무도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테디가 데이미언을 이상주의자라 비난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다만, 테디의 편에 서지 않은 데이미언이 현실적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어떤 면에선 옳을지도 모른다. 일단 자유를 얻는다면 지쳐있는 사람들은 일시적인 평화에 젖어, 추구해야 하는 이상과 혁명을 잊기 쉽다. 또한 실질적인 독립이 아닌 만큼 언제 영국이 돌변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부분을 외면하고 어쨌든 완전한 독립이 훗날 분명 가능하리라 말하는 테디의 꿈이 과연 데이미언의 것보다 곱절은 더 현실적인가(2021 현재 북아일랜드가 여전히 영국의 구성국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더욱)?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1920년대 아일랜드 내전은 이미 지나간 역사다. 또한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식민지배와 저항, 내전의 비극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그저 픽션으로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기엔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시네이드의 목소리가 사무치게 남는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념이라는 이름 하에 지구 상에서 자행되는 여러 종류의 집단적 폭력이 개인의 상상력을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넘어서는 경우가 잦다는 것을. 그러하므로 아일랜드 내전과 동일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지언정 유사한 사건은 무수히 많을 것이고, 영화의 메시지는 시대를 뛰어넘어 유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소한 관객인 우리만큼은 앞으로 이러한 형제의 비극을 반복해선 안된다는 울림, 이러한 비극이 시작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정의로운 평화를 수호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담담한 목소리 말이다.
그렇기에 켄 로치의 힘은 영화 후에 더욱 극적으로 발휘되는 것만 같다. 아마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감상한 관객이라면 형제의 비극을 멈출 수 있었을 법한 지점을 찾기 위해 저도 모르게 영화를 거슬러 올라갈 테니까. 상대방에게 이분법적인 꼬리표를 붙이고 배격하는 장소가 아니라, 궁극적인 지향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장소와 충분한 시간이 있었더라면 형제의 반목(확장하여 아일랜드 민족 간의 내전)은 최소화할 수 있었으리라는 가정을 한 번쯤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깨달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을 내가 얼마나 납작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어쩌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암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절, 독립을 위해 투쟁한 열사들이 이 정도의 대한민국에 과연 만족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의 말마따나 태어나려는 자는 언제나 (기존의) 세계를 깨뜨려야 하고, 이러한 부류의 투쟁은 언제나 지난하고 고단하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대한 청사진을 거듭 그려야 한다. 온 세상의 비극을 막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나 우리 주위의 비극을 최소화하는 데에 일조할 순 있을 테니.지치는가? 항상은 아니어도 좋으니 쉬엄쉬엄 힘을 내어 걸어가자. 도움은 되지 않겠다만 나는 내가 대단히 낙관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장기적 관점으론 언제나 긍정적이었다는 말을 덧붙여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뤄온 많은 발전도 이미 믿을 수 없는 성과가 아니었는가? 예술이 우리를 응원하는 한, 우리의 꿈은 언제나 무한할 것이고, 우리를 추동하는 동력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발굴해낼 것이다. 결국엔.
★★★★★
* 참고문헌
최을영 (2013). 켄 로치 :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싸우는 사회주의 영화 작가. 인물과사상, 6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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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라는 상속자에게 들려주는 편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석유 터져 나온 오세이지족 보호구역, 미국 서부 오클라호마. 오세이지족이 부자가 된 이 땅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타난다. 오세이지족의 친구로 명성을 쌓은 삼촌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
택시 기사로 오클라호마에서의 삶을 시작한 어니스트. 어느 날 그는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톤)를 승객으로 만나고, 곧장 사랑에 빠진다. 몰리 역시 어니스트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들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이내 난관에 부딪힌다. 윌리엄이 조카를 통해 몰리와 그녀 가족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으려는 음모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 몰리의 어머니와 자매가 하나 둘 죽어 나가는 가운데, 어니스트는 아내와 유산을 두고 잔인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스코세이지가 스코세이지 하다
<플라워 킬링 문>은 1920년대 오클라호마에서 발생한 오세이지족 살해 사건을 다룬 영화다. 1870년대에 오세이지족은 캔자스 보호구역에서 강제 이주를 당했고, 결국 오클라호마에 보호구역을 매입했다. 이후 1890년대에 오클라호마 보호구역에서는 석유가 발견됐고, 석유 채굴권을 오세이지족 전체가 공유함에 따라 오세이지족은 벼락부자가 됐다.
하지만 오세이지족은 이내 자기 재산을 강탈당했다. 미국 정부가 도입한 후견인 제도 때문. 백인 남성이 오세이지족 은행 계좌를 관리하고, 미국 정부가 석유 로열티를 대신 맡으면서 오세이지족 자본을 노린 범죄가 난무했다. 이 난리통 중에는 백인에게 가족 모두를 잃은 오세이지족 여성의 사연도 있었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데이비드 그랜의 동명의 논픽션에 기반해 그 비극의 시작과 끝을 차분히 비춘다.
소재만 봐도 <플라워 킬링 문>은 스코세이지다운 영화다. 그는 <갱스 오브 뉴욕>, <택시 드라이버>, <아이리시맨> 등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그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 역사의 역설을 성찰했다. '아메리칸드림'이 과연 자랑할 정도로 떳떳한지 질문을 던지면서.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이 가장 스코세이지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으로 되돌아간 셈이므로.
사랑과 상속의 줄다리기
<플라워 킬링 문>의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클라호마에 온 어니스트가 몰리를 만나고, 삼촌 빌의 지시 하에서 몰리의 가족을 살해한 후 유산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전반부다. 이후 FBI가 등장해서 어니스트와 빌의 범죄 행각을 추적하고 법정에 세우는 이야기가 후반부를 채운다. 이때 스코세이지는 전반부에 힘을 준다. 범죄 스릴러의 쾌감 대신 백인과 원주민의 드라마에 주목한다.
특히 어니스트와 몰리의 멜로가 핵심이다. 어니스트가 몰리를, 몰리가 어니스트를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영화는 두 남녀의 사랑 기저에 다른 감정을 깔아 둔다. 욕망과 두려움이다. 돈을 욕망하는 남편, 그런 남편에 대한 두려움. 부부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각자 내면의 괴물과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이 3시간 넘도록 반복된다. 영화는 그들이 마지막 선택을 내리는 찰나에 비로소 대미를 장식한다.
더 나아가 영화는 이뤄질 수 없는 부부 관계를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의 근간을 드러낸다. 사랑, 욕망, 두려움의 근원에는 '상속'이 있다. 오세이지족의 유산을 상속받겠다는 빌과 어니스트의 야욕. 영화는 그 야욕이 단순히 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는 지난 세월 스코세이지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문제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정작 공동체이자 가족의 일원이 된 사람들을 짓밟는 모순. 그에 힘입어 만들어 낸 '미국'이라는 사회적 자본. 그 자본을 상속받은 지금의 미국까지. 영화는 미국의 자본축적이 피와 불의의 역사였다고 가감 없이 말한다. 그래서일까? 오세이지족 사람들이 만들어낸 꽃과 미국의 첫 번째 성조기가 겹쳐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지만, 처연하다.
미국인도, FBI도 아닌 오세이지족의 눈으로
물론 <플라워 킬링 문> 속 자성의 메시지는 자칫 뻔할 수도 있다. 미국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작품은 한 둘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 영화의 메시지는 유달리 날카롭게 폐부를 찌른다. 오세이지족의 관점을 빠뜨리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어니스트가 화자인 것과는 별개로, 영화는 범죄자와 형사 사이에서 자칫 가려지기 쉬운 피해자를 조명하고자 노력한다. 그 덕분에 메시지에도 최대한의 진정성이 담겼다.
오프닝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오세이지족 구역의 생활상을 비춘다. 오클라호마에서 석유가 터지고, 부유해진 이들. 양복을 입은 그들은 백인 기사를 거느리며 자동차를 타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며,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낸다. 이 몽타주는 이질적이라서 더 의미심장하다. 필름 속 오세이지족은 다른 미디어에서 흔히 접한, 통념 속에 갇힌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석유라는 행운 덕분에 손에 쥔 부를 미국인다운 방식으로 즐기는 모습일 뿐이니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논리적 귀결과 달리 이 몽타주는 여전히 이질적이다. 나도 모르게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국인'에서 배제하는 편현합의 발로 대문이다. 이는 스코세이지의 의도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백인들의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면서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의 진수를 암시한 셈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영화는 잊혔고, 잊힐 수밖에 없는 오세이지족의 생활상을 가능한 자세히 기록하려 한다. 템포를 과하게 잡아먹는 게 아닌가,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인가 싶을 정도다. 예를 들어 오세이지족 언어는 날 것 그대로 영어 자막 없이 삽입됐다. 그들의 장례, 결혼, 유아세례 비슷한 기념 풍습도 스크린 위에 재현된다. 심지어 오세이지족이 믿는 사후세계도 등장한다.
필연적인 호불호
다만 <플라워 킬링 문>은 결코 상업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모든 부분이 대중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러닝타임만 해도 그렇다. 3시간 26분에 달하는 분량 덕분에 영화는 어니스트, 몰리, 빌의 변화를 사냥개처럼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분량 때문에 영화의 접근성은 자연히 높아진다. 후반부에 FBI가 등장하며 템포를 끌어올리는 등 탁월한 완급조절을 자랑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스코세이지 영화를 많이 접했다면 전제적인 스토리텔링과 구성, 주제가 익숙하기에 더 지루한 느낌도 있다.
기술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다. 와이드 한 촬영법, 롱테이크와 이동하는 카메라 장면 덕분에 인물의 감정선과 영화의 주제에는 힘이 실린다. 다만 그로 인해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가 섞인 느낌도 든다. 자칫 올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나리오가 변경됨에 따라 배급권이 파라마운트에서 애플 티비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파라마운트의 결단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배우들의 연기도 호불호가 갈린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로버트 드 니로는 안정적이다. 다만 충격적이지는 않다. 특히 디카프리오의 경우 본인이 극을 주도할 때 빛나는 배우이기는 하지만, 이번만큼은 <장고: 분노의 추적자> 속 '캘빈 캔디' 같은 역할을 맡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어니스트' 역을 선택한 디카프리오 대신 FBI 형사 '톰 화이트'를 연기한 제시 플레먼스의 존재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도 조연을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누구보다도 '몰리'를 연기한 릴리 글래드스톤이 눈길을 잡아끈다. 사랑과 두려움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지만, 그 싸움을 숨기려 최대한 애쓰는 인물을 표정만으로 표현해 낸다. 그 감정선을 따라가기 위해 얼굴을 보다 보면 마치 모나리자 그림을 보는 것처럼 신비롭고 매력적이다.
끝내 기대치를 넘어서는 엔딩
하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엔딩 덕분에 <플라워 킬링 문>의 호불호는 이내 잊힌다. 영화는 남은 이야기를 에필로그 형식으로 보여주려 한다. 주요 인물이 재판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줄 차례이므로. 대부분의 영화는 이 순간을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실제 자료 화면이나 사진에 자막을 더하는 식으로.
스코세이지는 다르다. 그는 직접 영화에 출연한다. 단순히 모습을 비추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무대 위에 올라 낭독극의 화자가 된다. 감독 본인의 음성으로 인물들의 남은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낭독을 통해 영화가 보여준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듯하다.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지난날을 반성하는 이야기. 앞으로도 같은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점을 잊지 않겠다는 이야기.
이에 더해 스코세이지다운 방식으로 영화의 위기에 스코세이지가 대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결국 이야기라고. 설령 달라지는 일은 없더라도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고, 보여주는 게 이야기꾼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마블 영화를 테마파크라고 지적하며 서사를 들려주는 '시네마'의 공간이 줄어드는 세태를 비판했던 것처럼. <플라워 킬링 문>의 끝이 어느 때보다도 노장의 진심으로 가득한 마무리인 이유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마지막 낭독 덕분에 완성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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