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로진2024-09-29 13:02:48
[DMZ Docs] 1983년, 외계인 침공?
KBS 모던코리아, <1983 미지와의 조우>

1983 미지와의 조우
감독: 이은규
러닝타임: 76분
시놉시스: 1983년, 한국전쟁이 멈춘 지 30년. 세계는 냉전의 긴장감이 팽팽하다. 한편,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 상공 위로 불쑥 북한귀순 용사와 공산국가 민간항공기가 날아든다. 냉전의 한복판에 불시착한 사람들은 마치 지구에 온 외계인처럼 방송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생중계 되는데... 현실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이들은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
(출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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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했다. 수십 년간의 아카이빙을 바탕으로 푸티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내레이션 없이 오직 영상만으로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는 '모던코리아 시네마' 섹션이 따로 있는데,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의 영화판을 볼 수 있다. <코리아 드림:남아진흥 믹스테이프>, <한국의 시간>, <한국음식 만들기>, <1983 미지와의 조우>,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었다> 총 5편의 다큐멘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의 형태로 상영된다. <1983 미지와의 조우> 역시 48분의 다큐멘터리가 76분으로 확장된 감독판이다.
1983년에 두 대의 비행기가 한국에 착륙했다. 2월 25일, 북한 공군 이웅평 대위가 미그 19기(MiG-19)를 몰고 귀순했고, 5월 5일 중공 민항기 납치 사건으로, 납치된 민항기는 춘천에 착륙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두 번이나 떨어지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냉전으로 분단된 마지막 국가인 한국 땅에.
감독은 1983년의 날벼락을 마치 우주에서 우주선이 떨어진 것처럼 표현하면서, 푸티지들을 모은다. 1981년 데뷔한 가수 민해경의 노래로 시작하는 화면이 누군가에게는 향수를 불러올지도 모르겠다.

외계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영웅?
영화 <E.T>의 장면들 또한 간간이 삽입되는데, 냉전시대였던 1983년의 한국 사람들에게 이들의 등장은 외계인의 침공과 비슷했다. 그때만 해도 철저한 반공 교육으로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나고 얼굴이 빨갛다고(제 어머니 피셜입니다) 생각했다고 한다. 반공 포스터에 등장하는 공산당들은 죄다 뿔난 괴물이었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어도 그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소련제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대위는 키가 180cm에 멀쩡한 남자였던 것이다.
이웅평 대위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귀순 환영 인파가 백만 명이 넘었단다. 그가 몰고 온 미그 19기 역시 군사적 가치가 높아 무려 10억 원이라는 금액을 받는다. 은마아파트가 1983년에 준공되었는데, 34평이 오천만 원 정도 했단다. 은마아파트 20채 살 만큼의 어마어마한 보상이다.

그리고 다시 5월 5일. 경쾌한 어린이날 잔치에 공습 경보가 울린다. 대만으로 망명을 기도하던 6인조 납치범들이 중공 민항기를 납치한 것. 민항기에 타 있던 승객이 무려 96명이나 되었고, 승무원도 9명이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형을 선고받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중화민국(대만)으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대만에서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우리나라에서 이웅평 대위가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것처럼. 이때의 협상으로 우리나라와 중화민국이 교역을 시작한다.
영웅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1983년에 남한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10억 원의 보상을 받고 대한민국공군이 된 이웅평 대위와, 국민 영웅이 된 민항기 납치범.
이미 뉴스로 결말이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 시절 이웅평 대위(최종 계급은 대령이다)의 표정, 눈빛을 영상으로 보는 것과 글로 읽는 것은 전혀 다르다.
냉전의 끝자락이었던 1983년, 우리나라는 6.25전쟁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공습 경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실제 같은 해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대통령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북한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광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한다'며 소리친다. 지금에 와서 보면 광기 같기도 하지만, 그때는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때의 긴박했던 상황과 인터뷰, 뉴스 영상을 <1983 미지와의 조우>는 E.T, 외계인, 우주선 등의 메타포를 이용해 다소 깜찍하게 그려낸다.

때마침 생중계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야말로 외계인이라도 나타난 듯한 리얼한 반응, 이제는 희미해진 서울 사투리 또한 재미있는 포인트다. 푸티지 다큐멘터리라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미래도 미지이지만 과거 또한 미지이다. 태어나지도 않았던 40년 전의 미지와 조우한 시간이었다. 모던코리아를 흥미롭게 보았다면 영화판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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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일정
09.28.(토) 13:30-14:45 메가박스 킨텍스 3관
10.01.(화) 13:30-14:45 메가박스 킨텍스 4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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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주 최신개봉영화
위드코로나 시대의
영화관의 부활을 시작하며
11월 2주차에는 어떤 영화가 개봉을 하는지 한번 볼까요?
11월 2주 개봉영화 5편!
강릉 Tomb of the River , 2021
믿고 보는 두 배우의 연기 열연
영화 "강릉"은 강릉 최대의 리조트 건설을 둘러싼 두 조직 간의 대립을 그리는 작품으로
개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던 도시 강릉이 올림픽을 계기로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들었던 양가적 감정을 영화에 담았는데요
정통 범죄 액션 누아르의 매력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영화의 탄생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특히 6년 만에 다시 호흡을 맞추는 장혁과 유오성 두 남자가 선보일 강렬한 카리스마는
범죄 액션 누아르 장르의 매력을 듬뿍 느끼고자 하는 관객들의 기대치를 100% 충족시켜줄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신세계', '범죄도시' 흥행 계보 잇는 범죄 액션 누아르!
첫번째 추천영화 "강릉"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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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움직이지않는다 太陽は動かない , The Sun Stands Still , 2020
후지와라 타츠야, 타케우치 료마, 변요한, 한효주
영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전 세계에서 극비 정보들을 조사하는 AN통신 요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논스톱 스파이 액션 영화입니다.
역대급 글로벌 로케이션 촬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요.
배우 후지와라 타츠야, 타케우치 료마, 변요한, 한효주 등이 한·일 스타들이 함께 출연합니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의 작품을 포함한 타카노 시리즈 3부작을 원작으로,
6부작 드라마와 영화가 동시에 제작된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보고하지 않으면 심장 속의 폭탄이 터지는 기발한 소재를 바탕으로
일본, 중국, 불가리아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압도적인 스케일로 많은 관심을 받았죠.
'분노', '악인' 등을 집필한 베스트셀러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첩보 소설 타카노 시리즈!
두번째 추천영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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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최동원 1984 CHOI Dong-won , 2020
무쇠팔, 부산의 심장, 최고의 투수, 등번호 11번, 불꽃 투혼, 금테 안경
영화 "1984 최동원"은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한국시리즈,
1984년 가을 그야말로 기적 같은 우승을 이끈 롯데 자이언츠 무쇠팔 故 최동원의 투혼을 담은 최초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최동원은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프로에 데뷔, 한국 스포츠사를 빛낸 인물이죠.
‘가을의 기적’이라 불리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시리즈 7차전 중 5경기에 등판,
만화 같은 4승 1패를 기록하며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끈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이기도 합니다.
특히, 올해가 故 최동원의 10주기로
그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 "1984 최동원"이 개봉해 그 의미가 더 깊습니다.
1984년 가을의 전설로 남은 최동원의 기적 같은 4승 1패의 활약상!
세번째 추천영화 "1984 최동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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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오더 Nuevo orden , New Order , 2020
<기생충>의 익스트림 버전! 올해 가장 강렬한 문제작!
영화 "뉴 오더"는 202X, 머지않은 미래,
마리안의 호화로운 결혼식을 앞두고 멕시코 사회의 질서가 완전히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담은 디스토피아 스릴러입니다.
칸영화제 3관왕에 빛나는 거장 미셸 프랑코 감독의 신작이자
도발적이면서 날카로운 문제 제기로 전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뉴 오더"의 놀라운 반전과 결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간 전쟁에서 결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며
작품의 메시지를 한층 더 과감하게 전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폐부를 꿰뚫어 본 통찰력 있는 문제 제기와 날카로운 연출로 빚어낸 마스터피스!
네번째 추천영화 "뉴 오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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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패밀리2 The Addams Family 2 , 2021
<슈렉><마다가스카> 제작진의 NEW 시리즈
1930년 대, 미국 만화가 찰스 아담스가 ‘뉴요커’에 그린 신문 만화로 시작한 '아담스 패밀리'는
이후 ABC 방송국에서 코미디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1991년에는 동명의 작품으로 영화화되었죠.
그리고 2019년 '슈렉', '마다가스카' 제작진의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제작되며
전 세계적으로 다시 한번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전편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담과 거대해진 스케일로 아담스 패밀리2가 개봉을 하는데요
사춘기에 접어든 ‘웬즈데이(클로이 모레츠)’와 ‘퍽슬리(제이본 워너 월튼)’,
권태로운 가족 분위기에 위기를 느낀 아빠 ‘고메즈(오스카 아이삭)’와 엄마 ‘모티시아(샤를리즈 테론)’,
트러블 메이커 삼촌 ‘페스터(닉 크롤)’까지 여전히 독보적인 매력으로 중무장한 아담스 패밀리의 특별한 가족여행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웬즈데이’를 시작으로 가족 간의 보편적인 여러 문제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다섯번째 추천영화 "아담스 패밀리2" 입니다.
예고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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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가 ‘불법’인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내는 법
8★/10★
동쪽 시장에서 아버지가 동전 2개로 작은 쥐를 사오셨네
그런데 고양이가 와서 작은 쥐를 먹어버렸네
아버지가 시장에서 산 쥐를
…
이번에는 개가 고양이를 먹었네
아버지가 시장에서 산 쥐를 먹은 그 고양이를〈Alla Fiera Dell‘Est〉라는 이탈리아 노래 가사 일부다. 유럽, 북미 등으로 이주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쥐는 고양이에게 먹히고, 고양이는 개가 삼켜버리고, 개는 지팡이로 두드려 맞고, 막대기는 불에 탄다. 더 강한 존재가 더 약한 존재를 먹거나 제압하는 일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민자들이 이 노래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노래 가사 속 약한 존재들의 운명이 여기저기서 치이기만 하는 자신들의 처지와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적 거장 다르덴 형제의 신작이자 칸영화제에서 75주년 특별기념상을 수상한 〈토리와 로키타〉는 두 이민자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로키타가 벨기에 어딘가에서 체류증 허가를 얻기 위한 심사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로키타는 자신이 이미 벨기에에서 체류증을 받은 토리의 친누나라고 주장하며, 어린 동생 토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자신 역시 체류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심사관의 질문이 뒤따른다. 말투는 차분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날카롭다. 로키타는 조금씩 수세에 몰리고 끝내 공황 장애가 와서 약을 먹고는 눈물로 인터뷰를 마무리한다.
로키타가 거짓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키타는 토리의 친누나가 아니다. 토리는 아프리카에서 횡행한 마녀/주술사 사냥의 표적이 되어 학대와 린치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체류증을 발급받았다. 반면 로키타는 체류증을 발급받아 가사노동자로 일하며 고향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유로 유럽에 체류 중인 토리와 로키타는 같은 보육원에서 생활하며 어느덧 친 남매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된다. 로키타는 토리를 지극히 아끼고 돌봐주며 토리 역시 로키타가 체류증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한다. 요컨대 토리와 로키타는 유럽 사회의 가장 낮고 험한 곳에서 그 무엇도 끊어낼 수 없는 우정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다르덴 형제는 이번에도 누군가의 삶을 극화하여 소비하는 대신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기법으로 토리와 로키타의 우정과 삶을 차분히 담아낸다. 마약 배달 및 재배, 이주 브로커의 갈취, 성착취 등이 등장하지만 이 소재들은 이주자들의 취약함을 과잉 극화하는 데 활용되지 않는다. 토리와 로키타가 조금씩 벼랑 끝으로 밀려나는 과정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우정과 사랑이 더 깊어지는 과정에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합리한 상황에서 불가능한 관계를 일구어낸 토리와 로키타는 끝내 비극을 마주하고 만다. 체류의 ‘합법성’을 따지는 일이 한 인간 존재를 ‘불법’으로 내몰고, 가장 취약한 자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단단하게 만들어낸 관계는 폭력적으로 응징당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안보, 국경, 안전과 같은 가치들은 대폭 강화되었고 이 가치를 ‘훼손’하는 존재들은 곧바로 강한 비난‧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즉 이주자들은 ‘국민/민족 정체성’을 헤친다는 오래된 비난과 더불어 새로운 차별과 배제의 언어에도 대응해야만 했다. 이주자들은 더한층 공공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의 표상이 되어버렸고 그만큼 연대, 포용, 환대의 가치 역시 약화되었다. 〈토리와 로키타〉가 다르덴 형제의 전작에 비해 비관적이라는 관람평이 이어지고 있다. 악화된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이민자와 정주자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만 맺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토리와 로키타가 주고받은 우정과 사랑이 전체 사회로 확대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억지로 꺾여버린 토리와 로키타의 우정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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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립 투 그리스: 두 남자의 인생 오디세이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참석한 영화 <트립 투 그리스>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같이 코로나19가 극성인 시대에는 여행을 떠나기도 좀처럼 쉽지 않다. 국내 여행은 어찌 어찌 간다손 치더라도, 해외 여행은 웬만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세계 여행을 하지 못하던 그 옛날 쇄국의 시대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방랑에 대한 욕망이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방랑욕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두 중년 코미디 배우의 여행을 다룬 이 영화, <트립 투 그리스>는 그에 대한 좋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래에서는 필자가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몇 가지 관람 포인트를 짚어볼까 한다.
1. 논픽션 같은 픽션
소위 영국 영화판 "알쓸신잡"이라고도 불리는 이 영화는 유쾌함과 재치, 그리고 드라마까지 모두 잡았다. 실제 배우의 이름과 성향을 따와 캐릭터를 만든 만큼 픽션과 논픽션을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이 점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한다. 실제로 이 영화는 두 인물 뿐만 아니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거나 피서지에서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들의 모습, 요리사들이 요리하거나 직원이 서빙하는 모습 등을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포착해낸다. 그래서 더욱 실감난다.
2. 영국판 알쓸신잡
주인공인 스티브와 롭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 영웅인 오디세우스의 여정, 오디세이에 따라 그리스 곳곳을 누빈다. '트로이'에서부터 '이타카'까지! 그들은 각각의 명승지를 들러 훌륭한 요리를 먹고 재치있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때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의 깊이가 남다르다. 그저 헛소리라고만 치부하기엔 그 내용이 훌륭하다는 소리다. 두 배우는 오디세이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 성경, 그리고 20세기~21세기 유럽과 헐리우드 영화 속의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를 소개하거나 패러디하며 각 여행지에서 해 보면 좋을 법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그들의 유머는 때로는 시니컬하고, 때로는 심오하다. 다분히 영국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영국식 유머를 꽤나 좋아한다!
3. 캐릭터 간의 케미스트리
잘난척쟁이인 스티브와 까불거리는 롭은 매사에 툭탁거리지만, 그들은 썩 어울리는 콤비다. 그러지 않고서야 4번에 걸친 여행길에 나설 리가 있겠는가? (그리스로의 이번 여행은 4번째 여행이라고 한다. 다른 시리즈를 찾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과시적이고 알은 체 하길 좋아하는 스티브는 좋은 설명가가 되고, 롭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러한 역사에 대한 재치있는 반박을 제시한다. 관객은 그를 통해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철학, 개념에 대한 관념을 더 풍부하게 키울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이 단순히 서로 가르치기를 좋아하기만 하거나, 혹은 그 누구도 남에게 자기가 아는 것을 떠벌리길 좋아하지 않았다면, 애당초 이 영화는 성립되지 못했을 거니와, 설령 성립되었다하더라도 관객들의 재미는 반감되었으리라.
4. 희비가 엇갈리는 두 남자의 오디세이
이 영화가 탁월한 점은 단순히 '걸어서 세계 속으로' 식으로 끝나지 않고 그 안에 일정한 서사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헐리우드 영화처럼 스펙터클하지는 않다. 그들의 서사는 여행의 뒤편에 가려져 언뜻 보기에는 대단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여행의 과정을 트로이 전쟁 이후 방랑의 운명을 맞이 해야 했던 오디세우스와 아이네아스의 여정과 비교하면 두 사람의 서사는 좀 더 선명해진다.
영화 내내 스티브는 자신의 친구인 롭을 시종 깔본다. '너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OO상을 7번이나 받았고...'라며 과시하는 그의 모습은 유치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나 대단했으므로, 옵저버 매거진의 화보 촬영에서 각각 희극과 비극을 상징하는 가면을 나눠 쓸 때조차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너는 코미디로 유명세를 얻었으니 희극 가면이나 써. 나는 정극 배우로 유명하니 이것(비극:찡그린 가면)을 쓰는 것이 좋겠어."(기억나는대로 썼다. 양해해달라!)라고.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각각의 결말도 그대로 났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분명 함께 여행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이기를 갈망하던 스티브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이타카에 다다르지 못했고, 그러지 않았던 롭은 이타카에서 아내와 재회한다. 마치 오디세우스처럼 말이다.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권선징악적인 이야기 구조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두 사람은 각각 얄미운 점도 있고, 재치있고 근사한 점도 있다. 그러니까, 악역을 상정하기 어렵다는 소리다. 우리는 오히려 두 사람에게서 우리의 인생 그 자체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역설의 연속이다. 그것은 이리저리 뒤엉킨 실타래와 같아서,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혹은 시기에 따라 희극이 되기도 하고, 비극이 되기도 한다. 상을 당한 후 이혼한 아내와 떨떠름하게 재회한 스티브의 결말은 과연 비극적이기만 한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극중 그의 운명이 '고향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트로이의 장수 아이네아스의 그것과 닮았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의 인생이 '아이네아스'의 이야기처럼 언젠가 다시 희극적인 지점을 맞이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해볼 수 있다. 이 아이네아스는 훗날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해 로마의 선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아름다운 그리스의 마을들과 해안 풍경은 더할 나위 없는 볼 거리이다.
무더운 여름, 집안에만 있지 말고 극장에 나아가 이 여행기를 한번 관람해 보는 것은 어떨까?
두 중년 영국 남자의 재치있는 수다를 듣다보면 어느새 당신의 영혼은 훌쩍 오디세우스의 배에 승선해 있을지도 모른다.
+) 이 영화를 단순히 유쾌한 미식 오디세이...라고 생각하고 관람한다면 실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는 것 많은 아저씨들의 수다쇼를 보고 온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각각의 서사보다는 전체적인 구조에 주목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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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는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할 수 있는가
6★/10★
자기만의 방.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도 돌볼 필요 없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가족과 함께 사는 여성들이 여간해서는 갖기 어려운 공간. 〈다섯 번째 방〉은 카메라를 든 딸이 자기만의 방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여성이 집, 공간, 가족과 맺는 관계를 위태로울 정도로 솔직한 자기/가족 고백과 함께 드러내 보인다.
딸(감독)은 조부모 때부터 50년간 산 2층 주택에서 자랐다. 엄마가 할머니의 양보로 집에서 가장 넓은 안방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아빠가 사업이 망한 후 일용직으로 근근이 노동을 이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엄마가 집에서 유일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방에서 안방으로 옮긴 엄마는 자기만의 방을 얻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엄마는 집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사노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많은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집에서 가사노동은 분담되지 않고 아빠와 할머니가 엄마에게 ‘도움’을 주는 일로 여겨진다. 프리랜서 상담가, 강사로 일하는 엄마는 수시로 드나드는 가족 때문에 업무를 준비할 때조차 일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한다.
엄마는 이 집에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늘 ‘얹혀사는 사람’, ‘빌붙어 사는 사람’이라 느꼈다. 집의 주인이자 (시가) 가족의 일원이라는 감각을 갖지 못했다. 할머니 명의로 된 집이 언젠가는 부부의 집이 되리라는 믿음이 엄마를 버티게 한다. 엄마에게 집의 상속은 단순히 재산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 됨과 가족의 일원이라는 감각, 나아가 오랜 시간 시부모를 모시고 가족을 부양한 데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그러나 이 믿음이 무너진다. 감독의 고모이자 엄마의 시누이 중 한 명이 할머니에게 집의 상속 지분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현재 사는 집에서는 평생 ‘나’로서 존재하지 못할 거라는 엄마의 불안이 증폭된다.*
자기만의 방을 향한 엄마의 여정이 본격화된다. 모든 가족이 쉬이 오가던 안방 대신 2층으로 올라가 작업실을 꾸리는 것. 그러나 층의 분리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한다. 아빠는 이전처럼 수시로 엄마의 작업실에 드나들고 엄마의 답답함도 점점 커진다. 할머니가 가꾸는 2층 텃밭 한편에 허브를 심는 것조차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엄마에게서 결혼 후 쭉 살아온 집이라는 공간이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엄마는 어느 순간 판단을 내린다. 이 집에서는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다고.
1층 구석의 첫 번째 방, 경제력을 획득한 이후의 두 번째 방(안방), 작업실로 꾸민 세 번째 방(2층 방)에 이어 빌라로 이사해 네 번째 방을 마련하는 엄마. 영화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엄마의 짐에 여러 살림살이까지 포함된 것을 보면 엄마가 단순히 상담실만 꾸리기 위해 빌라로 온 것 같지는 않다. 때때로 폭력적으로 구는 아빠를 달래고 중재하는 일에 지친 엄마는 직업 활동뿐 아니라 가족을 돌보고 중재하는 데 소모된 자기감정을 지키기 위해서도 네 번째 방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완전한 자기만의 방으로서 다섯 번째 방이 제시되지 않는 이유는 다섯 번째 방은 앞으로 엄마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방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서사는 오래됐지만 해결되지는 않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화두일 공간과 정체성의 문제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허나 더 흥미로웠던 건 영화에서 카메라가 맡은 역할이었다. 영화의 빌런은 명백하다. 물질적, 감정적으로 엄마에게만 기대면서도 때때로 폭력적으로 굴고 엄마의 직업적, 인격적 경계를 수시로 침범하는 아빠. 그런 아빠의 모습을 딸인 감독이 담아낸다. 집의 상속 지분을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고모에게도 물려준다고 선언하는 할머니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는 엄마, 장인어른의 장례식장에서 만취해 다른 가족과 다툼을 벌이는 아빠를 다그치는 엄마, 가족회의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아빠에게 그의 폭력적인 모습을 성토하는 순간 등등에 감독과 카메라는 함께 존재한다. 그가 카메라를 든 감독인 동시에 가족의 딸이기 때문이다.
이때 카메라는 수동적, 객관적 관찰자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딸과 카메라는 하나가 되어 기록하는 동시에 개입한다. 딸/카메라는 엄마를 응원하지만 아빠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는 어렵다. 영화에는 거칠게 행동하는 아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공개하는 일에 대한 딸/카메라의 고민이 묻은 장면이 종종 나온다. 특히 인상적인 건 장례식장에서 엄마와 말다툼하는 아빠의 모습을 찍은 촬영본을 아빠에게 직접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빠는 그 장면을 보며 멋쩍게 웃으며 ‘네 영화에서 난 항상 악당이다’라고 말한다. 딸/카메라가 아빠에게 객관적 성찰의 계기를 주는 것이다. 딸/카메라에 영향받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다. 다음 방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여정 매 단계에 딸/카메라가 함께한다는 데서 가족에게 거리감을 두려는 엄마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을 거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딸/카메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증폭하고 아빠에게 성찰을 촉구하며, 엄마가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촉진한다. ‘관찰하기만 하는 카메라’가 아닌, 카메라가 행위자 역할을 한 영화는 이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이처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서사의 동력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카메라의 역할과 능력에 관한 유의미한 참조점이 되어줄 영화다.
*고모의 생각과 입장도 궁금하다. 엄마가 집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믿는 데에는 남편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세 딸 중 한 명이 부모에게 집에 대한 권리 중 일부(25%)를 요구한 것이 과연 그렇게 잘못이기만 할까 싶었다. 가부장적 가족관계, 상속 관계에서의 을들의 부딪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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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춘희는 일찍이 엄마를 여의고 외가 식구가 사는 외삼촌 집 다락방에 얹혀살고 있다. 외삼촌네 가족이 그 집을 떠나고 한참 지난 후까지도 그 집의 다락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외삼촌 내외, 사촌이 생색내듯 베푸는 선의에 기 한 번 제대로 못펴고 히키코모리처럼 살아간 춘희는 점차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면 나올수록 점점 과거의 춘희가 현재의 춘희를 신경쓰이게 한다. 과거의 춘희는 왜 계속 등장해 현재의 춘희를 흠칫거리게 하는 걸까?
1.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망각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춘희에게는 다락방의 존재만이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로운 공간.
춘희는 자신의 엄마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집에 얹혀살게 된다. 춘희는 그 집은 삼촌 집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엄마의 집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집안의 가족들은 춘희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객식구, 눈치를 봐야만 하는 아이로 몰아간다. 딸에게 집을 주는 사람이 어디있냐며, 그 딸이 낳은 춘희는 이 가족이 사는 집에 지분을 행사할 자격은 없는 거라면서 말이다. 그들의 논리가 무엇이든 춘희는 상처를 받았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외삼촌네 가족이 춘희에게 그 집을 잘 지키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다른 집으로 이사갔어도 춘희는 여전히 그 집의 객식구처럼 행동한다. 눈치주는 외삼촌네 가족이 사라졌어도 여전히 다락방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처받은 춘희의 영혼은 십 몇 년동안 다락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들 한다. 하지만 표출되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한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방치되어 곪아 터질 뿐이다. 춘희도 그렇다. 외삼촌 내외에게서 짐짝 취급받던 어린 시절을 잊고 살았다고 착각했지만 사실 춘희는 그저 애써 묻은 것이었다. 자신의 상처를 외면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외면했던 상처는 잊혀진 것은 아니기에 춘희의 앞날에 꾸준히 걸림돌이 된다. 춘희는 한 번이라도 자신의 상처를 마주했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을 정당한 사유없이 핍박하는 외삼촌 가족들에게 한 번은 소리쳤어야 했다.
2. 다한증, 춘희의 지문
춘희는 자신의 다한증을 컴플렉스 쯤으로 여긴다. 어렸을 적, 자신의 손의 땀을 더러워하던 선생님의 반응, 그리고 땀 때문에 못마땅해하던 외삼촌의 짜증 섞인 표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든 자신이 왔다갔다는 흔적을 남겨버리는 이 땀 때문에 더 구박받는 것 같아 춘희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는다. 이렇게 살거라면, 난 왜 태어난 걸까, 내가 태어난 이유도 내가 객식구가 된 이유와 관련이 있는 걸까 싶은 자기비하적 생각이 춘희의 머리를 지배한다. 그 자기비하는 춘희의 삶의 디폴트값이 되어 춘희는 그 어디에도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의 장점인 손재주를 특화시킬 생각보다는 자신의 단점을 없앨 생각부터 한다. 자신의 손재주를 이용해 마늘 까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녀가 단점을 가리기 급급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손재주로 마늘 까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재능을 펼칠 만한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마늘 까는 이유도 사실 다한증 수술 받고 싶어서였기에
춘희의 이런 단점 지양적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어렸을 때,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에게 날렸던 그들만의 상식이 불러온 상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춘희가 객식구라는 것은 당연한 취급이었을지 몰라도 춘희는 평생 그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다락방에 영혼을 가둬버린다.
3. 상처받았다는 사람들에 관한 이중적 시선
영화를 보면서 가해와 피해의 모호함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춘희인지 외삼촌네 가족인지. 나는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을지, 또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었는지 이런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했다. 외삼촌네 가족의 매정함이 그들에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였고, 춘희의 순함은 그들이 춘희를 마구잡이로 휘두를 수 있는 허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외삼촌네 가족이 춘희를 두고 보여준 위선은 우리네의 삶에 얼마든지 있을 법한 위선이었다. 위선은 종이 단면과도 같다고 생각하는데, 삶이 팍팍했던 그들에게 춘희의 존재는 짐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매정함에 박수쳐주고 싶진 않지만 무자비하게 욕만 하기에 나도 저런 위선적인 모습이 있을 것 같아 찔린다.
상처란 주관적이라서 시각을 바꾸면 극복할 수 있다. 춘희는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어 자신의 단점인 다한증에 집착하는 바람에 자신의 손재주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삼촌에 매정한 말에 매몰되어 숙모의 츤데레를 주목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남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릴 시간에 자기자신부터 사랑하자. 남을 위해 날 가꾸지 말고, 내가 즐겁고자 나를 가꾸자. 춘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총평
영화가 자칫 루즈하고 뻔할 수 있는데 춘희의 썸남이 있어 그래도 지루하진 않았다. 춘희의 썸남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귀엽다. 오글거리는 건 관객이 감수해야할 부분이다. 조금만 참으시라. 광명과도 같이 개그가 찾아올 것이다.
※해당 영화 시사회는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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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남긴 어떤 것
올해 봄에 팀 마샬의 <지리의 힘> (원제: Prisoners of Geography)을 읽었다. 책 내용을 효과적으로 설명해주는 영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리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동의하는 주장이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난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서는 특히 유럽인들이 억지로 그어버린 직선의 국경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아프리카는 영국과 프랑스가, 중남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일말의 존중도 없이 통치 편리성만 중시하면서 멋대로 국가의 경계를 만들어버렸다. 둘 중에서도 아프리카는 더 심각한 편이라 아프리카 고유의 기후에 직선의 국경선에 의한 분쟁이 더해져 세계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 중에 하나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언제쯤 개선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프리카 지도 출처: maps.com
이런 아프리카의 가나 아크라와 케냐의 나이로비가 내 첫 출장지였다.
(Borading Pass와 Kenya Airways)
친구들은 위험한 것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나는 철없이 가보지 못한 대륙, 아프리카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것에만 설레 들떠있었다. 입사 약 1년 만에 떠난 첫 출장, 그리고 안전을 고려해 묵게 될 비싼 5성급 호텔, 아프리카 내에서 이동할 때만 탈 수 있다는 비즈니스석. 철없는 신입 직원을 설레게 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부끄럽지만 ‘일은 선배가 많이 하겠지’라는 무책임한 생각과 함께. 그리고 중남미 배낭여행하면서 워낙 열악한 환경은 많이 접해봤으니 딱히 걱정이 되거나 두려울만한 것도 없었다.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는 동아프리카의 대표 도시이다. 심지어 유엔본부가 있는 이 도시는 아프리카에 대해 가질만한 나의 선입견을 다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사무소 소장님께서 좋은 식당, 비싼 카페에 데려가 주신 것을 안다.
(같은 도시라는 게 믿기지 않는 상반된 풍경)
출장 마지막 날, 사무소 소장님께서는 출장 소감을 물으셨다.
“이주임, 아프리카 와보니까 어때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전하기도 했고 훨씬 좋은데요?”
“사실 이주임이 호텔이랑 사무실만 왔다 갔다 했는데, 사무실이나 호텔이나 다 여기서 제일 동네에 있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뭐라 반박할 만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정말 일부분의 모습만 보고 좋다고 말해버렸다.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매우 낯 뜨거워지는 대답이다. 할리우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내게는 낯 뜨거워지는 대답이다. 영화는 커피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서 덴마크에서 온 카렌과 그곳에서 만난 데니스와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다. 케냐에서 현지 촬영을 했다는 이 영화는 드넓은 아프리카의 초원을 보여주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준다. 흥행에도 성공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의 상까지 탔다.
그런데 이게 이 영화의 전부일까? 커피 농장은 거기 원래 살던 사람들이 경영해야 맞을 텐데, 왜 덴마크인이 여기까지 와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커피 농장을 운영한 걸까? 러브스토리에 초점이 맞춰져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유럽인들의 제국주의, 케냐 침략을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전역이 엄청 찌듯이 더울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나이로비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날씨가 한국보다도 훨씬 좋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중에서 특히 케냐에 많이 몰려왔던 데에는 이 기후도 한몫했을 듯하다. 영화 원작 소설의 작가이자 실제 주인공인 카렌의 농장이 위치했던 지역도 케냐에서 가장 서늘하고 커피 농사에 좋았다고 한다. 덕분에 이 곳에서 살던 원주인들은 유럽인들에 쫓겨나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카렌이 케냐를 떠나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면서 영화가 끝나기 때문에 제목을 Out of Africa라고 지은 걸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제목처럼 유럽인들은 결국 아프리카에서 떠나야(Out)했다. 삶의 터전을 뺏긴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포기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케냐와 아프리카에 무엇을 남기고 갔을까.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서로 다른 부족을 인위적인 국경선으로 하나의 국가로 묶어놨기 때문인데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이런 상흔만을 남기고 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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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이어트 플레이스 2]리뷰: 드디어 돌아왔다! 1편에 비해 아쉽지만 너무 재밌는 영화/약 스포
#콰이어트플레이스2#존크래신스키#콰플2
00:00시즌 1 이야기
02:28시즌 2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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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광대 : 소리꾼> 30초 예고편
#광대_소리꾼 이 오늘 개봉이로구나!? 우리의 소리와 장단 구경하러 오지 않겠소? 극장에서 기다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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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적 : 도깨비 깃발> 30초 예고편
자칭 고려 제일검인 의적단 두목 '무치'와 바다를 평정한 해적선의 주인 '해랑'. 한 배에 운명을 함께하게 된 이들이지만 산과 바다,
태생부터 상극으로 사사건건 부딪히며 바람 잘 날 없는 항해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왜구선을 소탕하던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왕실의 보물이 어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적 인생에 다시없을 최대 규모의 보물을 찾아 위험천만한 모험에 나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라진 보물을 노리는 건 이들뿐만이 아니었으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역적 ‘부흥수’(권상우) 또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데...!
해적과 의적, 그리고 역적
사라진 보물! 찾는 자가 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