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0-08 08:01:45
[BIFF 데일리] 낙인의 틈새를 파고드는 한 노인의 묵직한 진심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 리뷰

아침바다 갈매기는/The Land of Morning Calm
뉴 커런츠
Korea/2024/114min/
*시놉시스
어느 밤 젊은 선원이 사라진다. 늙은 선장은 선원이 바다에 빠졌다고 신고한다.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선원의 어머니는 아들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부둣가를 지킨다. 이내, 선원의 베트남인 아내에게 보험금이 지급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평생을 고집불통으로 살아온 늙은 선장이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 있다.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박이웅 감독의 전작 〈불도저에 탄 소녀〉에서 김혜윤 배우(혜영)가 연기한 강렬한 캐릭터가 극을 추동했듯이, 두 번째 장편 〈아침바다 갈매기는〉도 윤주상 배우(영국)가 엄청난 묵직함으로 극을 견인한다. 두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각기 다른 감정이다. 혜영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층민 소녀의 강렬한 분노에 휩싸여 있고, 영국은 헤아릴 수 없는 책임감으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를 돌파한다. 두 사람은 깊디깊은 감정으로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
조그만 어촌 마을에 실종 사건이 발생한다. 영국의 배에서 일하던 젊은 어부(박종환 배우)가 바다에 빠져 실종된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남자는 바다에 빠진 게 아니라 보험 사기를 계획했다. 자신의 사망 보험금으로 베트남인 아내(카작 배우)와 어머니(양희경 배우)에게 보탬이 되고자 영국을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이다. 영국은 젊은 남자의 가족과 한 가족처럼 지내온 사이다. 늘 썩은 동태 눈깔처럼 의욕 없이 흐리멍덩하던 남자가 보험 사기를 계획할 때 눈이 반짝이는 걸 본 영국은 그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영국은 남자의 어머니와 아내에게까지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완벽한 일처리를 위해서다.
그러나 영국의 마음은 편치 않다. 동료 어부들, 해경이 차례로 수색을 멈추는 상황에서도 남자의 어머니는 바닷가에 의자를 놓고 우두커니 앉아 돌아오지 않는/돌아올 수 없는 아들을 기다린다. 베트남인 아내도 보험금이 얼마인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죽은’ 남편 대신 자신과 결혼할 생각은 없는지 등등 마을 사람들의 못된 관심을 마주한다. 그녀의 법적 지위에만 관심을 두고 그 외의 모든 맥락을 소거한 행정 관료들의 태도도 그녀의 어려움을 배가한다. 아들/남편이 죽은 줄로만 알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두 사람 앞에서 영국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린다. 영국은 남자의 아내에게 보험금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사라진 남자의 가족이 겪는 참혹한 현실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며, 한국이 그녀가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은 죽고 국제결혼한 여자는 본국으로 보험금을 갖고 떠난다’는 통속적이며 저열한, 편견에 가득 찬 악의적으로 뻔한 이야기가 가진 힘에 비밀을 숨겨 남겨진 사람들의 새 출발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마을 주민의 말마따나, 평온한 일상 이면에 피폐한 생활로 인한 갈등과 반목 그리고 오래된 폭력이 꽉 달라붙어 도사리고 있는 이 마을은 이미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은 과거 가족을 잃은 아픔을 통해 옆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새 삶을 ‘시작할’ 힘을 준다. ‘야반도주’한 베트남인 아내를 두고 혀를 차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홀로 바다로 향하는 영국의 뒷모습에는 ‘끝’에서 ‘시작’을 길어낸 어느 노인의 뚝심이 놀라운 광채로 빛나고 있다.
박이웅 감독은 전혀 다른 질감의 두 이야기에서 모두 취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관계망을 조명한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힘이 없는 인물에게 그 관계망을 지켜내라는 임무를 준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관계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에서 비롯한 감정뿐이다. 그리고 감정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상적 관계망이 소리소문없이 절벽으로 내몰리는 현실에서, 수동적으로 구원을 기다리는 대신 적극적으로 ‘함께 살길’을 모색하는 박이웅 영화의 주인공들은 형형한 존재감을 뽐내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스며든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힘과 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것이 박이웅 영화가 가진 미덕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 초청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 상영시간
10-06/09:00/영화의전당 소극장
10-07/10:30/CGV센텀시티 1관
10-08/15:30/CGV센텀시티 3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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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함의 이름으로 내리는 형벌
* <더 메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더 메뉴 (2022)
감독: 마크 미로드
출연: 랄프 파인즈, 안야 테일러 조이, 니콜라스 홀트
장르: 스릴러
상영시간: 107분
개봉일: 2022.12.07
순수함의 이름으로 내리는 형벌
참가비만 1250달러, 하루에 오직 12명의 고객만을 대접하는 외딴 섬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호손’. 그곳을이끄는 셰프 ‘슬로윅(랄프 파인스)’을 동경하던 미식가 ‘타일러(니콜라스 홀트)’는 연인 ‘마고(안야 테일러 조이)’와 함께 은밀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초대받게 된다. ‘슬로윅’이 유명해지는데 일조한 음식 평론가, 레스토랑에는 크게 관심 없어 보이는 유명 배우, 호손의 단골손님과 사업가 친구 무리들 등 공통분모라고는 상류층이라는 것 밖에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특별한 코스 요리를 즐기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외딴 섬에서 함께 합숙하며 새벽부터 출근해서 밤까지 일하는 직원들은 ‘슬로윅’에게 충성을 바친 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슬로윅’은 까탈스러운 고객들이 기대했던 음식들을 그만의 스토리와 함께 차례로 대접한다. 각자의 방식대로 음식을 즐기던 찰나 마치 하나의 쇼처럼 진행되는 코스 요리에는 섬뜩하거나 기이한 일들이 하나둘씩 동반되고, 레스토랑과 ‘슬로윅’ 셰프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순식간에 모두를 공포에 빠드린다.
시종일관 음침하고, 꺼림칙하며 극의 중반부부터는 소름이 돋는 순간의 연속이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과 천재 셰프라는 소재만으로 불쾌한 장면들과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생생하게 연출할 줄이야. 아무리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유능한 셰프가 아니라면 맛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보다는 어떻게 요리하는 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영화 자체적으로도 증명해주는 듯하다. 외딴 섬의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마치 ‘미드 소마’ 같은 광기 어린 스릴러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은 퍽 신선했다. 하지만 맛이 궁금할 정도로 화려함을 수놓은 요리들과 호손 레스토랑의 셰프와 직원들이 조성하는 서스펜스는 극에 내포된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도 했다.
호손 레스토랑의 음습한 코스 요리는 내면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감독과 ‘슬로윅’의 날카로운 일침과도 같다. 셰프는 자신의 음식을 맛보며 즐거워할 고객들을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요리하지만,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셰프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소수의 상류층 고객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야 하고 평론가들에게 깎이지 않기 위한 압박감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성공한 셰프의 요리를 맛보러 온 돈 많은 고객들은 계급상의 특별함에 한껏 취해 권력을 뽐내려 하고, 음식의 흠을 찾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씹고 뜯으며 요리를 분석하려 든다. 일명 음식 평론가라는 사람은 자신의 글 몇 자에 문을 닫은 레스토랑이 수 십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셰프는 어느덧 요리하는 걸 순수하게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렸다.
‘슬로윅’은 자신의 순수성을 무너뜨린 사람들에게 날릴 마지막 일갈을 준비했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요리가 무엇인지도 기억도 못하면서 열 번도 넘게 방문한 단골 손님, 요리라고는 할 줄도 모르면서 음식을 분석하는데 혈안이 된 남자, 권세에 취해 있는 음식 평론가와 같은 사람들은 그에게 있어 충분히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최대한으로 만족할 만한, 그리고 과오를 뼈저리게 느낄 만한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맛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반면 완벽한 코스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 죽임까지도 불사하는 ‘슬로윅’의 요리는 하나의 예술을 감상하는 듯하며 계급론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은 그가 단지 그럴싸한 비주얼로 포장할 줄만 아는 스타 셰프가 아님을 뒷받침한다. 그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빈민들의 주식이었던 빵을 ‘보통(Common)’ 사람들이 아닌 손님들에겐 대접할 수 없다며 ‘빵 없는 곁들임’을 내놓고, 그 마저도 예술이라며 떠받드는 고객들의 태도는 실소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완벽한 계획에도 언제나 변수가 발생하듯 ‘슬로윅’이 촘촘하게 짜 놓은 판에도 제멋대로 굴러가는 장기 말 하나가 상황을 뒤흔들어 놓는다. ‘타일러’가 데려온 ‘마고’는 원래 초대 받지 않았던 손님이고, 그에 대한 정보가 없던 ‘슬로윅’은 이 정체불명의 여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깐 곤혹스러워 한다. 확실히 ‘마고’는 식당에 초대받은 상류층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인물이다. 편하게 식사해야 할 공간을 긴장감과 섬뜩함으로 채우는 ‘슬로윅’에게 당당하게 불쾌함을 표출하고, 무지성으로 그를 추앙하는 ‘타일러’와 달리 원치 않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이런 ‘마고’의 독단적인 행동을 보며 ‘슬로윅’은 그가 남들처럼 추악함으로 뒤덮인 인간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본다. 초대 받은 손님들의 운명은 이미 바뀔 수 없도록 정해져 있지만, 마치 생존게임 속 깍두기와도 같은 ‘마고’만큼은 유일하게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키를 쥐고 있었다. ‘슬로윅’의 집에 몰래 잠입해 그의 과거를 들여다 본 ‘마고’는 영리하게도 정통 치즈버거를 주문하며 그의 상실된 순수성을 일깨운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법한 주문에 잠시 당황했던 ‘슬로윅’도 치즈버거를 만드는 동안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며 과거 순수하게 음식을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듯 하다. 고급진 코스 요리에 시종일관 인상을 찌푸렸던 ‘마고’는 그제서야 허기짐을 달랠 수 있었고, 패스트푸드라 할지라도 음식을 순수하게 즐길 줄 아는 그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 때문일까. 온갖 산해진미를 내놓았던 그 어떤 고급 코스 요리보다도 ‘마고’가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던 치즈버거가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음식을 즐길 줄 모르고, 평가하고 분석하는데 꽂혀 있는 사람들을 향한 풍자는 곧 예술을 순수하게 즐기려 들지를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단지 가벼운 오락의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데, 눈에 불을 켜고 흠집을 찾아내고 구조를 해체하여 분석하는데 열중하는 시네필들은 언제나 순수함과는 가장 거리가 먼 태도로 작품을 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가 돈을 내고 소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음식이건 영화이건 평가를 하는 것도 그들의 자유다. 다만 분명 비평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고, 영화를 볼 줄 안다는 혹은 비싼 요리를 즐기며 서슴없이 유명 셰프의 음식을 평가할 수 있다는 일종의 과시 욕구를 누리고자 한다. 예술가들의 언저리에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는 것도 이들이지만, 동시에 예술가들에게 가장 해로운 것 또한 그들이라는 모순적인 생태계를 거침 없이 돌려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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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의 색을 말하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포스터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 2017)
제작 : 미국, 드라마 │ 감독 : 션 베이커
출연 : 브루클린 프린스(무니), 브리아 비나이트(핼리), 윌렘 대포(바비)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1분" 꿈과 환상의 나라 옆에는 빈민가가 있다네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미국의 남동쪽 플로리다 주에는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월드가 있다. 여느 관광지나 그렇겠지만 디즈니월드의 주변에도 관광특수효과를 노리며 화려한 외양의 숙박시설들이 지어졌다. 예닐곱 살쯤 된 아이 '무니'가 사는 곳도 그런 곳의 일부다. 이름하야 '매직캐슬'. 몽환적인 연보라색 페인트로 뒤덮인 이곳은 동화 같은 분위기나 이름과는 달리, 홈리스(homeless)들이 모여 장기투숙을 하는 싸구려 모텔이다. 무니는 스물두 살 엄마 '핼리'와 함께 그곳에서 살고 있다.
아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영양가 없는 와플이나 피자로 끼니를 때우고, 길거리에서 향수를 팔아 힘겹게 방세를 치르는 등, 무니의 엄마 '핼리'는 아이를 키우기에 너무나 무지하고 가벼워 보인다. 무니를 둘러싼 열악한 환경도 문제다. 방세를 못 내면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는 허름한 모텔에는 투숙자들의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고, 공용으로 쓰는 수영장에서 가슴을 내놓고 선탠을 하는 할머니가 사는가 하면, 아이들 곁에 얼쩡거리며 성범죄의 기회를 노리는 남성도 있다. 하지만 무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이므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그저 즐겁고 흥미로울 뿐이다.
" 관여하지 않고 보여주어 드러내는 휴머니즘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사실 영화 초반부까지만 해도 '핼리'에게 엄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런 엄마와 함께 저런 환경에서 쭉 큰다면 어쩌면 아이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교육이나 복지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엄마처럼 길거리를 전전하며 사는 빈민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니 모녀의 이 미래 없는 삶에도 그들 나름의 일상과 사랑이 있다는 걸 서서히 영화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핼리는 정기적 일거리가 없지만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방세를 내려고 노력하고, 스물둘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를 거부하는 남자와는 데이트하지 않는 엄마이다. 아무리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핼리는 핼리 나름대로 딸 무니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매직캐슬의 매니저 '바비'도 그런 의외성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바비는 겉으로는 방세를 내지 않으면 쫓아낼 듯 구는 딱딱한 관리인이지만, 실제로는 무니와 핼리가 처한 상황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도우려고 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알게 모르게 그에게 의존하는 무니와 핼리는,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무심한 척 하지만 바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의 막장 라이프인 듯해도, 카메라는 그 안에 우리가 모르는 구석을 샅샅이 들추어 따스함을 발견한다. 그런 카메라의 시선에는 섣부른 동정이나 비난이 없다. 그저 매직캐슬의 투숙자들이 겪는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자 나는 이 무심한 듯 비추는 이 휴머니즘적인 이야기에 완전히 젖어들었다.
" 그 엄마가 틀렸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이런저런 사정으로 더 이상 방세를 내기 힘들어진 핼리가 결국 성매매에 발을 들였을 때에도, 마냥 그녀를 욕할 수 없었던 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방세를 내야만 무니와 함께 살 수 있고 밥을 먹일 수 있다는, 엄마 핼리의 일념이 느껴졌으니까. 단칸방인 그곳에서 몸을 팔며 돈을 받는 동안, 무니는 엄마가 크게 틀어놓은 힙합을 들으며 오랜 목욕을 한다. 욕실 밖에서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른 채, 매일 그렇게 목욕이 반복된다. 핼리는 잘못된 일을 하고 있으며, 어린 무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카메라는 모녀의 삶을 우리에게 알리되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의 신고로 아동보호국에서 결국 무니를 데리러 왔을 때, 그 복잡한 심경은 피크를 쳤다. 절대로 아이를 뺏기지 않으려는 핼리의 발악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무니의 몸부림은 너무도 슬펐다. 그러나 이 열악한 환경에서는 아이가 분리되는 게 맞다는 어른으로서의 판단도 내 안에 존재했다. 핼리가 나쁜 엄마여서가 아니라, 핼리가 처한 환경이 아이를 해칠 것을 알기에. 이 모든 감정이 얽기고 설켜 마음속에서 싸움이 일었다. 이런 환경에서라도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와 두는 게 맞는가, 아니면 더 좋은 환경으로 아이를 보내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답은,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영화가 어느 한쪽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사실만을 비추는 까닭은 아마도 그런 이유였을 테다. 자본주의의 가난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기 때문에. 어린 딸을 두고 성매매를 하는 핼리에게 잘못이 있음을 알면서도, 가난한 모녀에게 별다른 구제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던 사회를 탓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지 개인의 무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홈리스 현상 역시 같은 선상의 문제다. 그러니 동정을 하면 핼리의 잘못된 선택을 지지하는 꼴이 되고, 비난을 하면 사회의 불평등을 외면하는 꼴이 된다. 영화는 그저 적절한 리얼리즘을 통해 관객이 이 양가감정을 충분히 느끼게 하고 싶었으리라.
" 수많은 '무니'와 '핼리'가 진짜 퓨처랜드에 이르기를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영화의 마지막. 아동보호국으로부터 분리되기를 거부하며, 무니는 단짝 '젠시'에게 찾아간다. 젠시는 근처의 모텔 '퓨처랜드'에 살며 무니와 매일매일을 함께했던, 마찬가지로 홈리스의 딸이다. 가난을 대물림받을 미국 극빈층의 아이들. "이제 너를 못 볼지도 몰라"하며 무니가 울먹이자, 젠시는 무니의 손을 와락 잡고 있는 힘껏 뛰어 디즈니월드로 향했더랬다. 디즈니월드 옆에 살면서도 가난해서 정작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그곳에, 숨기 위해 뛰어들어간 아이들. 그 모습은 너무나 귀엽고 발랄했지만, 한편으론 슬프고 미안했다. 아이들에게 펼쳐질 현실이 동화가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눈부신 연보라색 건물 외벽, 매직캐슬이니 퓨처랜드니 하는 웅장한 이름들. 그러나 그 안에는 당장 이번 주 방세로 걱정하는 여러 삶들이 모여있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르는, 막연한 동정이나 막연한 비난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삶이.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다소 무력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세상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은 가져봐야 되겠지. 아이들이 디즈니월드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플로리다에 있는, 또는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많은 무니와 핼리들의 안녕을 막연하게나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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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르>, <할로우맨>, <블랙북> 폴 버호벤 감독의 화제작 <베네데타> 영화리뷰
작품명 : 베네데타
감독 : 폴 버호벤
출연 : 비르지니 에피라, 샬롯 램플링 등
어린 베네데타는 부모님과 함께 수녀원에 간다. 평생을 주님의 신부로 살기로 결심한 베네데타는 올곧은 믿음과 자신감을 지녔다.
왠지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 같은 원장 수녀를 비롯해 수녀원의 냉랭한 분위기가 조금 섬뜩하기는 하지만, 베네데타는 열심히 기도해 이곳에서 잘 적응한다.
성인이 된 베네데타는 어느 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쫓기다 수녀원으로 달려 들어온 바르톨로메아라는 여성과 마주친다.
바르톨로메아는 아버지의 학대와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녀가 되고자 한다. 베네데타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정착한 바르톨로메아는 모범적인 수녀 베네데타를 은밀하게 자극한다.
서로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낀 둘은 당시의 온건한 가톨릭에서 금기시된 사랑을 시작한다.
한편 베네데타는 뜻 모를 환각과 환시에 시달리게 된다.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보게 되는가 하면, 다른 수녀들과 함께 미사를 위해 찬송가를 합창할 때도 별안간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점차 베네데타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성흔을 얻게 되고, 신부와 수녀들은 이 성흔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논박하면서, 베네데타는 수녀원에서 토론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관객 또한 베네데타의 불가해한 경험들을 마주하는 동시에, 평생을 섬겨온 성직자로서와 숨겨진 사랑의 행위자로서의 그의 삶에서 어떤 곳에 방점을 두고 바라봐야 할지 의문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로써 <베네데타>는 기록되지 못하고 발견된 적 없었던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게 되는 영화가 된다.
<베네데타>는 <토탈 리콜> <할로우맨> <엘르> 등을 연출한 폴 버호벤 감독의 신작이다.
제74회 칸영화제에서 소개된 후 여러 논란이 된 바 있을 만큼 주제와 묘사에 있어 강렬한 폴 버호벤 감독의 스타일이 여일하게 이어진다.
두 여성의 성애는 물론이고 고문이나 자학 등 폴 버호벤 감독이 오랫동안 탐구해온 말초적이면서도 가학, 피학적인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감독이 여러 번 언급한 대로 <베네데타>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
모두가 부정하고 싶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베네데타>는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비롯해 가부장중심적이면서 이성애중심적인 세계의 관습에 전복적으로 대항하는 영화이다.
폴 버호벤은 이전에도 폭력적인 세계에서 여성이 느끼는 경험들을 극한으로 치달아 보여준 바 있다.
<블랙북>의 레이첼(캐리스 벤허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유대인으로서 겪는 엄혹하고 살벌한 시대의 풍경을 홀로 견디는 여성이며,
<엘르>의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어느 날 정체 모를 남성의 침입에 성폭력 피해자가 되는 동시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살해 전력으로 살인자의 딸이라는 눈초리를 얻으며 살아온 여성이었다.
물론 폴 버호벤은 이들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피해자의 위치에 놓거나 또는 정확한 답을 준비해두기보다는 그들이 겪어오고 또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거의 정답이 없다는 듯 우리의 눈앞에 실행시키는 데 초점을 둔다.
그래서 폴 버호벤의 영화가 더욱 입체적이고 풍부하면서 때로는 논란을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영화<엘르>
영화<블랙북>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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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짝 맛만 보여준, 그래서 다음이 기대되는 영웅 서사시
dune, 모래 사막이라는 뜻이다. 푸릇푸릇한 생명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듄, 아라키스는 그 곳의 원주민인 프레멘들에게는 생존해야만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다른 민족들에게서 지켜내야만 하는 생활 터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라키스는 다른 민족들의 정복 전쟁의 중심에 서있는데, 그 이유는 아라키스에 우주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물질인 신성한 환각제 스파이스가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라키스의 새로운 주인, 아트레이디스의 후계자인 폴은 자신이 보는 것이 그저 꿈인지 아님 미래인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자신의 예지 능력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와중에 자신이 이른바 선택된 자, 메시야라는 예언을 듣는다. 과연, 혼란 속에서도 그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아라키스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는 아트레이더스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1. sf영화에 투영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
이 영화는 시간적 배경이 10191년이고, 공간적인 배경은 범우주인 만큼 외계의 존재들이 비일비재하게 등장한다. 주인공인 폴도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외계인이다. 하지만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간 관계에서 비롯된 여러 사건들은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막을 두고 정복 전쟁을 하면서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는 모습, 전쟁을 치르느라 자연의 섭리는 그저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탐욕, 큰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집단과 동맹을 맺는 모습, 이 모습은 인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해, 이 영화의 거시적 메시지를 담은 대사가 있다면, 어찌할 수 없는 모래바람을 컨트롤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자연을 컨트롤해 인간의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인간들의 욕심을 꼬집은 듯한 대사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협조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 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기술의 발전으로 밀어붙여 무시하는 현생의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메시지로 보여진다. 결국, 배경만 sf일 뿐이지, 이 영화는 인간의 세력 다툼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탐욕적인 모습, 그 과정에서 무시되는 자연에 대해 수려한 비주얼적 배경으로 자연은 결코 무시당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설명하는, 생태주의적 관점도 엿보이는 영화라고 보면 될 것 같다.
2. 두려움을 극복하는 폴에게서 나의 두려움을 보다
폴은 아트레이디스의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선택받은 자로 자신이꾸는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예언이라는 말을 듣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선택받은 자로서 미래에 있을 정복 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의 미래를 보고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지게된다. 그가 두려움에 빠질 때마다 나오는 대사,
두려워하지말라, 두려움은 정신을 죽이고 , 세계를 소멸시키는 작은 죽음이다
이 대사가 이 대서사시의 파트 1을 관통하는 대주제이다. 선택받은 자로 태어나고, 알게 모르게 트레이닝 받아왔지만 그는 아직 자신의 능력도 제대로 모르고, 실전에 내던져진 경험이 없었기에 나약한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나약함은 곧 자신이 짊어질 책임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전하는데, 이 두려움을 극복해내어 생존 전사로 성장을 하는 것이 이 파트 1의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모습에서 난 내 자신이 계속 투영되는 걸까. 시간적배경, 공간적 배경 모두 낯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를 들으면, 누군가 나에게 힘내라고 외쳐주는 것 같아서 묘하게 위로가 되고, 나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내 모습이 보이는 폴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 인물이 생존 퀘스트를 하나씩 깨어갈때마다 내 자신감까지 올라가게 되어, 이 인물을 계속 응원하게 된다.
3. 총평
영화는 우선 스케일이 크고, 내용도 미완성 상태의 주인공의 각성을 담은 대서사시의 극히 일부만 본 것이라 긴 호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지점들이 있었는데, 오히려 영화의 집중도가 올라가 지루하다고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폴이 꿈인지 예지인지 모를 이미지를 볼때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슬로우가 걸린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음악이 주는 사운드 임팩트가 영화를 집중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막에 내던져졌을 때에는 더이상 첨단 기술로 무장한 외계인이 아닌, 그저 생존에 목마른 피난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막벌레에게 쫓기고, 하코넨 일당에게서 쫓기는 장면 등에서 충분히 속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의 속도감이 느려졌다 빨라졌다가 반복되니, 2시간반의 러닝타임이 걱정한 것 보단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폴이 나약함에 벗어나 위대한 자가 되는 과정에서 프레멘과 어떤 관계를 구축할지 파트2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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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쟁을 피해 무난하고 안전하게 실패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07년, 분쟁지역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탈레반에게 납치된다. 이에 외교부는 교섭 전문가인 외교관 '재호(황정민)'을 현지로 파견한다. '테러범과의 협상은 없다' 그리고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살린다'는 두 원칙을 지닌 채 카불에 도착한 재호. 그러나 언제든 입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아프가니스탄 정부 관료 때문에 재호의 교섭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다. 한편, 초유의 피랍 사건에 국정원도 요원 '대식(현빈)'을 아프가니스탄으로 급히 파견한다. 요원으로서의 실력은 확실하나 원칙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일하는 데 익숙해진 대식은 매뉴얼을 따르는 재호와 계속해서 갈등을 빚는다. 그 사이, 어느새 탈레반이 정한 살해 시한이 다가오자, 재호와 대식은 나날이 성공 가능성이 작아지는 교섭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묻어둔 채로.
실화를 소재로 삼은 영화에게는 언제나 같은 과제가 주어진다. 실화라는 수많은 이야기 중 무엇을 영화에 담고 무엇을 담지 않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또 실화를 빌어 이 영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도 명확히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은 말처럼 쉽지 않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는 실제 사건에 매몰되어 자기 개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빼야 할 부분을 빼지 못해 영화가 난잡해지기도 하고, 전체 주제 의식이 흐려지기도 한다. 애초에 영화의 지향점이 공감을 사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임순례 감독의 신작 <교섭>도 다르지 않다. 영화가 선택한 실제 사건부터 범상치 않다. 온갖 논란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소재를 골랐다. <교섭>은 2007년 23명이 탈레반에 납치되어 그중 2명이 살해된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다룬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피랍 인질의 책임부터 정부의 대응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국가의 관계라는 범주에 속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달리 말해 선택과 집중이 잘못되면 영화가 실화 속에 파묻힐 위험이 크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교섭>은 다분히 원론적인 길만 골라 걷는다. 제목에 충실하다. 탈레반과 협상을 진행하는 외교부 직원과 국정원 요원에게 초점을 맞춘다. 국민을 살려야 한다는 그들의 사명감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그 덕분에 예상할 수 있는 논란은 영화 속에서 거의 부각되지 않는다. 상업 영화로서의 재미를 갖추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대목도 엿보인다. 하지만 그 대가로 영화는 무색무취하다. 장르적 특색, 감독만의 색채는 사라졌다. 그렇게 <교섭>은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한 채로 무너져 내린다.
<교섭>은 안전한 길을 택한다. 한국 영화에서 익히 볼 수 있는 버디 무비, 형사 영화의 형식을 차용한다. 교섭 전문가 재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그에게 국민은 국가가 무조건 책임져야 할 존재다. 하지만 국가는 원칙적으로 테러 집단과 일대일로 협상을 할 수 없다.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만으로도 테러 집단에게 국가가 굴복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 테러 집단이 다른 국민을 납치해서 몸값을 요구하는 안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지원과 협조 하에서 사건에 원론적으로 접근한다. 국정원 요원 대식은 정반대다. 낯선 중동 지역에서 감옥에 갇힐 정도로 험하게 굴러가며 임무를 수행하던 그에게 명분이나 원칙은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대식은 온갖 루트로 탈레반과 접촉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족에게 접근하고, 사기당할 것을 각오하고서 외국 브로커에게 접근한다.
영화는 다양한 변수를 더하면서 상반된 두 캐릭터를 뒤흔들기 시작한다. 탈레반의 인질 기한은 나날이 다가오며 그들을 압박한다. 아프가니스탄 외교부는 합의를 뒤집으면서 인질 협상을 엉망으로 끌고 간다. 피랍된 인질이 선교사라는 사실이 방송국 뉴스로 유출되어 기껏 만든 합의안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탈레반과 실질적으로 접촉하는 줄 알았던 외국 브로커는 사기꾼으로 밝혀진다. 그 사이 두 명의 인질은 살해되고, 국내외적 압력은 높아져 간다. 이 과정에서 재호와 대식은 서로 인정하지 않던 상대방의 접근 방식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점차 변한다. 즉, <교섭>은 <공조>, <의형제> 등이 보여줬던 버디캅 무비의 전형을 따른다. 재호는 보고 체계를 무시하고 외교부 장관에게 직접 연락한다. 지금껏 피해 오던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성사하기 위해. 한편 외교부의 교섭 지침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던 대식도 철저히 매뉴얼을 따르며 재호를 돕기 시작한다. 이렇게 재호와 대식은 점차 닮아 간다.
문제는 관객이 <교섭>의 브로맨스에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을 삭제한 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샘물교회 피랍사건이 현시점까지도 회자되는 결정적 원인은 명확하다. 당시 샘물교회 선교단은 국가에서 금한 여행 금지 국가로 이동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입국하지 말고 가급적 남부 지역으로 이동하지 말라는 외교부의 권고를 모두 무시했다가 변을 당했다. 즉, 이 사건은 세월호 사고나 이태원 사고처럼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건이 아니었다. 국민 개개인이 국가의 보호와 도움을 먼저 무시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 등장한 선교단은 무고한 피해자다. 탈레반이 그들을 납치하는 오프닝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갑작스레 납치당한다. 그 이후로도 영화는 인과관계와 잘못은 지운 채 그저 객관적인 현상만을 묘사한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 싸늘한 주검. 여기에는 국가가 구해야 할 불쌍한 사람 외에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가 없다. 선교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교섭이 어려워지니 그들을 자원봉사자로 위장하자는 재호의 계획도 건조하게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그려낼 따름이다. 이 모든 묘사가 '국가는 국민을 어떻게든 보호해야 한다'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영화가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관객들의 뇌리에 이미 각인된 인질들의 잘못과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는 연이은 의문점을 자아낸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면, 국민은 국가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 '자기 잘못 때문에 피해를 본 동료 시민과 다른 공동체 구성원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적절할까?'와 같은.
그래서 관객은 재호라는 캐릭터와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가 없다. 재호는 국가를 대변한다. 어떻게든 국민을 살려야 한다는 그의 사명감은 국가의 존재 이유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접하거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명한 국가의 의무와 역할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인이 먼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국가는 그 개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또 그 개인은 다른 공동체 구성원과 어떻게 대화할지가 궁금하다. 이때 관객에게 필요한 답을 주지 못하는 재호라는 인물은 결국 공중에 붕 떠 버린다. 심지어 재호와 관객을 연결할 최소한의 개인사도 두드러지지 않다 보니 그는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진다. 오히려 대식에게는 공감하기가 쉽다. 그의 사명감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라크에서 작전에 실패해 인질이 죽어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바 있다. 그러다 보니 대식의 절실함과 필사적인 노력은 자연스럽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그저 나 홀로 있는 게 좋다는, 그래서 중동에 남아 있고 싶다는 그의 심경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두 주인공 간의 균형이 무너진 버디물, <교섭>의 결과물은 실패나 다름없다. 두 주인공은 갈등을 빚다가 서로에게 배우면서 성장해야 하는데, 관객은 한쪽의 입장에만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는 재호가 중심이 될 때와 대식이 중심이 될 때 묘하게 영화의 톤이 어긋나는 이유다. <교섭>의 주된 포인트는 인물 간의 호흡과 대화, 협상의 심리전이라 할 수 있다. 재호가 아프가니스탄의 외교부 장관과 갈등을 빚거나 탈레반 수장을 직접 만나 협상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국민을 살려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대원칙을 강조한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감정선이 터져 나오는 대목은 하나밖에 없는 액션 시퀀스다. 인질 몸값을 가로채 간 외국 브로커를 쫓는 대식의 오토바이 추격전에서는 그의 절실함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액션 시퀀스는 영화의 전반적인 스타일과 따로 논다. 결국 논란을 피하기 위한 안전한 선택이 오히려 장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영화의 완성도를 낮춘 셈이다.
이에 한국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몇몇 디테일까지 더해지자 <교섭>은 더욱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노골적으로 웃음을 겨냥한 '카심(강기영)'과 같은 캐릭터는 전반적으로 건조하고 차분한 극의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이 짙다. 막바지로 향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규모가 커지는 지점도 부자연스럽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힘을 준 듯이 느껴지기에 유달리 톤이 이질적이다.
어찌 보면 <교섭>의 실패는 예정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간 임순례 감독은 가장 최근작인 <리틀 포레스트>처럼 따스한 위로를 담은 느림의 미학을 전하는 작품을 많이 선보여 왔다. 그에 반해 <교섭>은 소재의 성격으로 보나 장르의 지향점으로 보나 감독의 장점이나 개성이 살아나기에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결국 <교섭>은 요르단 현지 로케이션 촬영이 선사한 황량하면서도 아름다운 영상을 제외하면 깊은 아쉬움만 남긴 채 막을 내린다. 흥미롭고 매력적인 소재에 왜 이토록 단순하게 접근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P(Poor, 형편없음)
과연 이토록 무난하게 만들 영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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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텔링은 이렇게 하는 것
<행복의 노란 손수건>, 담백한 스토리텔링의 정석
오는 4월 2일,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 재개봉한다. 1977년 개봉한 야마다 요지 감독의 이 작품은 당시 일본 아카데미에서 8개 부문을 석권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근 과거 명작들의 재개봉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작품 역시 그 흐름에 합류했다.
세 인물의 교차된 서사, 그리고 중심이 되는 유사쿠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세 인물, '하나다 킨야(타케다 테츠야)', '오가와 아케미(모모이 카오리)', '시마 유사쿠(타카쿠라 켄)'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서사는 킨야가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홧김에 신차를 몰고 홋카이도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유쾌하면서도 한심한 모습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아케미는 열차 내에서 간식을 파는 일을 하는 도중에 남자친구의 배신을 알게 된다. 배신의 상대가 자신의 지인이었으며, 그 사실조차 또 다른 지인을 통해 듣게 된다는 점에서 그녀의 상처가 더욱 두드러진다. 충격에 빠진 아케미 역시 홋카이도로 향한다.
한편, 유사쿠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자신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영화 역시 관객에게 전지적 시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유사쿠의 서사는 점진적으로 전개되며, 이를 통해 관객은 캐릭터와 함께 정보를 습득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세 인물의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전개되다가 홋카이도라는 공간에서 조우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결합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킨야의 서사가, 이후 아케미의 서사가 더해지며, 마지막으로 유사쿠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서사의 무게는 유사쿠에게 집중되며, 킨야와 아케미는 비교적 가볍게 그려진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다. 코믹한 장면을 통해 극의 분위기를 조절하고, 유사쿠의 서사가 전개될 수 있도록 보조 역할을 한다.
특히,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러한 구조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한다. 유사쿠가 먼저 들어간 음식점에 킨야와 아케미가 들어오고, 카메라는 이들의 대화를 포착하다가 자연스럽게 유사쿠에게 시선을 옮긴다. 인물 간 관계성을 구축하는 동시에, 유사쿠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연출이 돋보인다.
아케미의 서사 부족, 그리고 시대적 한계
그러나 아케미의 서사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는 그녀를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한 여성'이라는 틀 안에 가둔 채, 이후 그녀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지 않는다. 극 중 아케미는 유사쿠의 과거를 듣고 공감하며, 그의 용기를 북돋우는 역할에 머문다. 그녀의 이야기가 보다 주체적인 서사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영화 초반부부터 여성에 대한 경멸 어린 시선이나, 성적 불쾌감을 유발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이러한 요소가 코믹한 장면으로 소비되었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적 요소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아케미는 극의 후반부에서 유사쿠의 서사를 지탱하는 인물이 된다. 그는 유사쿠의 행동과 선택을 평가하고, 그의 변화를 돕는다. 그러나 정작 아케미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그녀가 유사쿠에게 공감하는 이유와, 그의 변화에 동참하는 과정이 보다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면 영화는 더욱 힘 있는 서사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사쿠의 서사와 자기연민의 문제
이러한 아쉬움을 지적하는 이유는, 결국 영화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 유사쿠의 자기연민과 이를 정당화하는 서사에 있기 때문이다. 유사쿠는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극 중 인물들은 그의 변화에 힘을 실어준다. 킨야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유사쿠의 연민이 강조될수록 아케미의 역할이 단순한 조력자로 축소된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만약 영화가 그녀의 서사를 보다 깊이 다루고, 그녀가 유사쿠를 이해하는 과정에 대한 서사적 근거를 제공했다면, 결말은 더욱 강한 울림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기회를 놓쳤다. 그 결과, 극의 후반부는 다소 공허하게 느껴진다.
담백한 스토리텔링, 완급 조절이 돋보이는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담백한 스토리텔링과 뛰어난 완급 조절을 통해 높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다. 세 인물의 이야기는 하나의 점에서 만나고, 그 점에서 출발한 선은 '노란 손수건'을 향해 나아간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치밀하다. 캐릭터를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 노란색을 활용한 색채 연출, 감정을 과하게 조율하지 않는 플롯의 전개 방식 등은 이 작품이 왜 명작으로 평가받는지를 보여준다.
재개봉 이후, 이 작품이 현대의 관객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것인지 궁금해진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결국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오는 4월 2일, 그 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초청받은 시사회를 다녀온 뒤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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