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4-10-10 11:40:26
부모가 되면 생기는 또 하나의 마음
- <와일드 로봇>(2024)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해 이미 많은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이야기해왔다. 예를 들어, <니모를 찾아서>에서는 아버지 물고기 말린이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누비며 아들 니모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모로서의 사랑과 헌신을 그린다. <라이온 킹>에서는 무파사가 어린 심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심바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성장하며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배운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이야기는 보편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다. 그래서 어쩌면 이 주제는 새롭지 않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림웍스 스튜디오가 30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영화 <와일드 로봇>은 이 보편적인 이야기의 중심에 로봇을 배치해 색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로봇은 감정이 없고, 단지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를 향한 사랑을 느끼는 마음도, 따뜻함도, 고민도 없는 존재다. 이 로봇이 부모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감정이 생기고 변해가는 과정이 매우 따뜻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는 로봇이라는 존재를 통해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감정] 로봇 로즈의 무감정
로즈(목소리: 루피타 뇽오)는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서비스 로봇으로, 처음 등장할 때는 감정이 전혀 없는 기계적 존재로 묘사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로즈는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할 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며 동물들에게 여러 차례 도움을 주려 하지만, 동물들은 그를 경계하고 거부한다. 이 과정에서 로즈는 끊임없이 거절당하지만, 그에게서는 실망이나 슬픔 같은 감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명령을 따라 행동할 뿐인 로즈의 모습은 기계적으로 느껴지며, 감정이 결여된 그의 행동은 차갑게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로즈는 부모를 잃은 아기 새의 알을 발견하고 그것을 돌보게 된다. 하지만 그때도 로즈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단지 알을 보호하고 새끼 새를 키우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의 행동에는 사랑이나 애정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으며, 로즈는 자신이 왜 아기 새를 돌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입력된 지시와 학습된 내용을 바탕으로 행동할 뿐이다. 이 모습은 마치 우리가 부모가 되기 전, 아이에 대한 감정이 없는 상태와도 비슷하다. 아이를 돌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이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상태에서 로즈는 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다.
이런 로즈의 무감정은 영화 초반부에서 관객들에게 조금은 어색하고 낯설게 다가온다. 그는 자신이 왜 아기 새를 돌봐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기계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이 무감정의 상태는 로즈가 점차 변해가는 과정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준다. 관객들은 무감정의 로즈가 어떻게 변해갈지, 그리고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지켜보게 된다.
[두 번째 감정] 아기 새 브라이트 빌의 따뜻함
아기 새 브라이트 빌(목소리: 키트 코너)은 로즈에게서 깨어난 뒤, 그를 엄마로 인식하게 된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기 새의 입장에서 로즈는 세상의 전부였고,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게 된다. 브라이트 빌은 로즈에게 끊임없이 다가가며 얼굴을 맞대고, 그의 주변을 맴돌며 애정을 표현한다. 이런 아기 새의 행동은 로즈를 당황하게 만들고, 로즈는 왜 브라이트 빌이 자신을 따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로즈에게는 애정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브라이트 빌과 로즈 사이에는 추억이 쌓이기 시작한다. 브라이트 빌은 로즈에게 의지하며 성장하고, 로즈는 그런 브라이트 빌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성장 과정을 함께 한다. 이 과정에서 로즈는 비로소 브라이트 빌의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에게 따라오는 존재로만 여겼던 브라이트 빌이지만, 이제는 그의 존재가 로즈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어간다. 브라이트 빌의 따뜻한 마음은 로즈를 변화시키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로즈에게 새로운 감정을 심어준다.
브라이트 빌과 로즈의 관계는 단순히 로봇과 아기 새의 관계를 넘어선다. 그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가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서로를 통해 성장해 나간다. 브라이트 빌의 따뜻함은 로즈에게 감정을 가르쳐주고, 로즈는 그 감정을 통해 진정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배우게 된다. 이는 단순히 로봇과 새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감정] 부모의 사랑
시간이 지나며 로즈는 브라이트 빌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브라이트 빌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고, 나는 법을 알려주면서 점점 더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브라이트 빌이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마다 로즈는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느끼고, 그가 다칠까 걱정하며 지켜본다. 하지만 브라이트 빌이 스스로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로즈는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이 순간, 로즈는 자신이 브라이트 빌을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깨닫는다.
영화는 로봇인 로즈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는 과정을 매우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로즈는 이제 단순히 입력된 명령을 따르는 기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브라이트 빌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부모가 되었다. 로봇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하나의 시스템이 추가된 것처럼 표현하며, 그 감정이 어떻게 로즈의 행동과 사고를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로즈에게 생긴 이 새로운 감정은 기억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으며,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결국 이 이야기는 부모의 사랑과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로즈는 로봇으로서 감정이 없는 존재였지만, 브라이트 빌을 돌보며 사랑을 배우고, 부모로서 성장하게 된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감정의 변화와 성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모든 부모가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이다.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
<와일드 로봇>에서 로즈는 단순히 브라이트 빌을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단지 프로그램된 임무로서 브라이트 빌을 돌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로즈는 브라이트 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존재로 변해간다. 브라이트 빌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로즈는 자신의 몸을 던져 그를 보호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의 안전을 지킨다. 로봇으로서의 본래 목적을 넘어, 로즈는 이제 브라이트 빌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된 부모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로즈는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자신의 신체를 소모하면서까지 브라이트 빌을 보호하려 한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편안함과 안정을 포기하는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시간을, 에너지를,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꿈과 욕구까지도 희생하게 된다. 로즈가 보여주는 이러한 희생은 부모가 아이를 키우며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결국, 부모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희생할 줄 아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즈는 브라이트 빌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며, 이를 통해 진정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완성하게 된다. 이 영화는 로즈의 희생을 통해 부모가 되면서 얻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마음, 즉 아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랑을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는 부모와 아이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 특별한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영화 <와일드 로봇>은 부모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로즈는 브라이트 빌을 돌보며 다른 동물들과 함께 아이를 키워낸다. 이는 아이를 키울 때 부모뿐 아니라 주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옛말처럼, 이 영화에서는 숲속에 사는 모든 동물들이 브라이트 빌의 성장과 독립을 위해 힘을 모은다. 그들은 브라이트 빌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그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돕는다. 이러한 공동체적 지원은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며, 영화는 이를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로즈의 변화 과정은 우리가 부모가 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아이를 향한 마음, 조바심, 그리고 그 모든 행동들은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처음에는 감정이 없던 로즈가 브라이트 빌과 함께하면서 점차 감정을 배우고,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며,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며,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부모라면 아이와 함께 이 영화를 꼭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의 연출을 맡은 크리스 샌더스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로봇과 동물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들 간의 관계를 매우 따뜻하게 그려냈다. 루피타 뇽오와 키트 코너, 페드로 파스칼 등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도 훌륭하여 캐릭터들에게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이 영화는 드림웍스 스튜디오의 30주년 기념작으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감동적이고 의미 있는 작품이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관람하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성장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이 영화는 많은 가족들에게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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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탐정 포와로의 심리 추리극
돈은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직장이나 사업을 해서 돈을 번다. 어느정도 기본 생활이 해결될 정도로 돈을 벌면 거기서 조금 더나아가 부를 축적하는 단계를 지향한다. 그렇게 축적된 부에 따라 각자의 생활 수준이 달라지고 결국에는 빈부격차라는 아주 작은 틈이 점점 커지게 만든다.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격차는 점점 더 돈을 지향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돈에 얽매이고 그것 때문에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삶의 목적이 돈을 벌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다르게 말하면 돈에 종속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면 그 상황이 정말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돈이 많으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생기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업의 기회도 생긴다. 처음에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돈이 많은 곳에 자연히 몰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가 사람보다 돈을 중시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엄청난 부 주변에 몰린 돈에 종속된 사람들은 사람 때문이 아니라 단지 돈 때문에 몰려든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그 주변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사람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 지난한 과정에서 진심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큰 부를 상속받은 여성과 그 주변인물 사이의 살인사건을 그리는 영화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은 엄청난 부를 상속받은 여성인 리넷(갤 가돗)과 그 주변 인물들을 담은 영화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추리 스릴러지만 부자인 리넷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담는 영화이기도 하다. 다양한 인물들이 리넷 주변에 있는데, 가장 가까운 인물은 약혼자인 사이먼(아미 해머)이다. 직전에 리넷의 친구인 재클린(에마 매키)과 연인관계였던 그는 리넷의 옆에서 정열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돈에 대한 관심보다는 리넷의 마음에 더 신경쓰면서 리넷이 가진 부담감을 지워주려 애쓰는 인물이다. 반면에 재클린은 리넷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사이먼이 리넷과 교제하게 되면서 질투와 배신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인물이다. 그가 영화 속에서 리넷의 옆에 등장할 때마다 영화의 긴장감은 높아진다.
그 외에도 부크(톰 베이트먼)과 그의 엄마 유페미아(아네트 베닝), 리넷의 옆에서 재정 관리를 하는 친척 앤드류(알리 파잘), 루이즈(로즈 레슬리), 살로메(소피 오코네도)와 그의 딸 로잘리(레티티아 라이트), 베스너 박사(러셀 브랜드), 마리(제니퍼 샌더스), 바워즈 부인(돈 프렌치) 등이 리넷과 사이먼의 약혼 파티에 초대되어 호화 유람선에 탑승하게 된다. 영화 초반 이들의 모습과 행동을 찬찬히 보여주게 되는데, 각자가 가진 사연이 조금씩 소개되면서 각 인물들이 가진 서사와 이해관계를 알 수 있게 된다.
모든 인물이 리넷을 중심으로 모인 인물인데, 전혀 관계 없는 인물인 포와로(케네스 브래너)가 그 배에 탑승하게 되면서 영화는 포와로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가 주변을 살피고 인물들을 세심히 살피게 되는데, 영화의 시선도 그대로 포와로와 같이 움직인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작은 비밀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포와로는 이런 인물들의 특성이나 비밀을 파악하게 되는데 그 과정자체가 추리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등장인물의 서사를 긴장감있게 보여주는 심리 추리극
실제로 영화에서 살인 사건은 중반부에서야 등장하게 되는데 그 전까지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부자인 리넷 주변의 인물들이다. 초반에 그렇게 세심하게 이들 각자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건, 모두를 의심할 수 있게 하는 동기를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마치 추리소설을 영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물들의 서사를 접하고 나서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누가 살인자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포와로와 함께 머리를 굴리게 된다.
영화 속 리넷은 불행하고 불안해 보인다. 그는 결국 살해당하게 되는데, 그 주변 인물들 모두 리넷을 죽일 수 있는 살인 동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리넷이 죽은 이후에 먼저 보이는 건, 리넷의 안타까운 죽음보다 그가 가지고 있던 거대한 목걸이의 행방과 리넷이 가진 돈이 어디로 갈 것인지다. 그러니까 리넷의 죽음의 안타까움보다 돈이 먼저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주변에 모인 인물들에 정을 붙일 수 없다. 다들 안타까운 개인 사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건, 영화의 훌륭한 각색대로 이야기가 구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리넷 옆에 누군가는 돈에 종속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는 그것을 추리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리넷을 죽인 범인, 그리고 그 이후 누군가를 계속 살해해나가는 범인이 누군지, 그 동기가 과연 돈이었는지는 영화에 끝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감독인 캐네스 브래너는 직접 포와로를 연기하면서 훌륭하게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연출했다. 이 이야기 안에서 유일하게 이해관계가 없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건을 추리해가는 탐정 포와로는 이번 영화에서 그가 가진 과거 트라우마도 드러낸다. 그렇게 원작에는 없는 포와로의 새로운 개인사를 추가하면서 조금 더 할 이야기가 많은 풍부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워낙 등장인물이 많은데 특히 인상적인건 재클린을 연기한 에마 매키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 출연한 그는 이 영화에서 등장할 때마다 영화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생동감있게 영화를 극적으로 만드는 인물을 꼽으라면 바로 재클린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아네트 베닝이 연기한 유페미아도 인상적인 캐릭터다. 아들 부크의 결혼에 반대하는 엄마 역할인 그는 자유분방한 예술가처럼 보이지만 아들의 여자친구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며 고집을 피우는 연기로 극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영화 중반 이후에 그로 인해 만들어진 영화적 긴장감은 살인사건과 함께 극을 더욱 고조 시킨다.
영화는 포와로가 처음부터 각 인물을 하나씩 만나고, 한자리에 모이면서 벌어지게 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포와로는 많은 인물들 사이에서 관계를 조율하고 관찰하면서 리넷의 배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정확하게 캐치해낸다. 결국 그는 '돈'에 종속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면서 '사랑'때문에 벌어지는 인물들의 행동들도 들춰낸다. 그러니까 그는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이자,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치유하는 계기를 만드는 심리 분석가이기도 하다. 이런 포와로의 활약이 담긴 영화는 아름답고 웅장한 영상과 함께 훌륭하게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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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렬히 응원하고 싶은 '우정'과 '사랑'
내 인생에 윤슬처럼 반짝반짝 빛났던 그 시절, 모든 걸 나눠주며 나를 빛나게 해 주던 나의 '1번'이 있다면 얼마나 부러운 일일까.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사랑스럽게 담아내면서 동시에 열렬히 응원한다.
박상영 작가가 집필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 삼은 '대도시의 사랑법'은 원작에 포함된 단편들 중 '재희' 챕터만 따로 떼어내 영화화하였다. 그래서 주인공 재희(김고은)의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고, 영은 흥수(노상현)로 바뀌었다.
원작 소설처럼 성소수자인 흥수의 시선으로 20살부터 33살까지 13년 간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흥수의 연애사와 커밍아웃 고충, 흥수의 비밀을 다루는 방식 때문에 재희와 벌어지는 갈등, 수많은 남자들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을 겪으며 성숙해지는 재희의 성장 서사들을 118분에 담아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돌아서고, 화해하고, 의지하면서 더욱 단단해지고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린다.
영화 속에서 수위 높은 장면들이나 불편한 상황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억지스럽지 않고 매우 현실적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사회적 관념을 깬 두 청춘의 성장 과정은 아슬아슬하며 때로는 거칠다. 연출을 맡은 이언희 감독은 이를 담백하고 용기 있게 정면승부를 펼친다. 상업적 측면에서 리스크가 될 수도 있는 면면들을 타협하지 않고 우직하게 표현한다. 그 과정을 겪었기에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색깔을 유지하면서 무사히 완주한다.
영화로 공개되기까지 원작 독자들이 궁금해하고 상상해 봤을 재희 캐릭터를 김고은이 연기하면서 통통 튀는 러블리한 캐릭터로 발전됐다. 제멋대로지만 미워할 수 없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캐릭터 본연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미소와 개성 있는 스타일링으로 입체감을 더했다. 자칫 작위적으로 보일 법한 캐릭터성이나 에피소드도 김고은의 연기가 더해지면서 몰입도를 높인다.
애플 TV+ '파친코' 시리즈로 눈도장받은 노상현 또한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관객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아픔이 있는 흥수의 내면 및 감정선은 물론이며, 김고은과의 앙상블까지 매우 훌륭하다. 백이삭을 잇는 새로운 인생캐릭터 갱신이라고 해도 좋다.
두 배우의 현실 연기를 바탕으로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서사에 과몰입하다가 하이라이트인 재희의 결혼식에서 폭발한다. 축가를 맡은 흥수의 어딘가 모르게 뻣뻣한 댄스가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울컥하게 만든다. 미스에이의 'Bad Girl Good Girl'이 이렇게 눈물버튼을 누르는 노래일 줄이야.
원작 소설이 퀴어 작가가 쓴 퀴어물로 잘 알려져 있으나, 홍보 단계에선 퀴어 요소는 쏙 빠진 채 '사랑법'이라는 중의적인 표현으로 소개되다 보니 잘 모르는 관객들은 김고은, 노상현 주연의 청춘 러브스토리로 오해할 수 있다. 심지어 예고편까지 우정과 사랑 사이에 놓인 남녀 캐릭터처럼 표현해 낚시성 아니냐며 온라인에서 논란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퀴어 요소가 아직까지 국내에선 대중적이지 않다 보니 헤테로 마케팅으로 미끼를 던졌을 것이다. 그 미끼에 낚여서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 영화를 접하면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존중을 충분히 무게감 있게 담아냈고, 동성애의 비밀을 나눈 두 친구의 우정과 성장 서사도 함께 버무려져 있으니 '퀴어 지우기' 아니냐는 오해는 넣어두고 극장에 오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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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여름 개봉 예정, 숨겨진 기대작 5편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2020년 겨울 극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여, 역대급 박스 기록을 갈아치울 거라 전망되었는데요. 특히 1월, 최고의 골수팬을 지닌 시리즈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 이어, 전쟁 영화 <1917> 그리고 윌 스미스 주연의 <나쁜 녀석들: 포에버>까지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였고, 2월에도 역시 DC의 <버즈 오브 프레이>, 짐 캐리의 <수퍼 소닉>, 그리고 공포 스릴러 <인비저블맨>까지 박스 기록을 이어나가며 2019년 대비 10% 정도 높은 매출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국내를 비롯한 전 세계 영화 시장이 역대급 불황 속에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요. 그러던 4월, 한국의 윤여정 배우가 <미나리>로 오스카 시상식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극장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윤여정 배우의 수상 소식에 CGV를 비롯한 크고 작은 극장에서 곧바로 기획전을 진행하는 등 확실히 활기차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그리고 드디어, 오래 기다려온 액션 블록버스터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가 5월 19일 개봉을 확정 지으며 극장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고, 뒤이어 공포 스릴러 <콰이어트 플레이스 2>와 팝콘무비 <킬러의 보디가드 2> 그리고 디즈니의 <크루엘라>까지 개봉을 확정 지었지만, 아직 국내 대작들은 개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연중 가장 높은 관객 수를 보이는 여름 시장에서 국내 상업 영화의 빈자리를 숨겨진 기대작들이 채우며 극장을 다채롭게 해줄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올여름! 극장을 찾아줄 다양성 영화 중,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숨은 기대작들을 씨네픽이 엄선하여 준비해 보았습니다!
잇츠 CINE PICK!!
트립 투 그리스 (The Trip to Greece, 2020)
코미디, 드라마 | 영국, 그리스 | 103분 | 15세 관람가
감독 : 마이클 윈터바텀 | 출연 : 스티브 쿠건, 롭 브라이든
IMDB : 6.6/10 | Rotten Tomatoes : 87%그리스에서 맛있는 음식과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각자의 인생철학을 공유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두 남자의 여정을 그린 로드 무비
씨네pick :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에 이은 그리스 미식여행. 시리즈 지속이 어려운 다양성 영화임에도 꾸준히 관객을 유지하며 무려 11년을 이어온 작품인 만큼 기대되는 영화인데요. 유서깊은 그리스의 역사부터 오감자극 음식은 물론, 가슴 뻥 뚫리는 자연 풍광까지. 역시 시리즈 피날레는 놓치면 안 되겠죠?팜 스프링스 (Palm Springs, 2019)코미디, 멜로/로맨스 | 미국 | 87분 | 등급 미정
감독 : 맥스 바르바코우 | 출연 : 앤디 샘버그, 크리스틴 밀리오티, J.K. 시몬스
IMDB : 7.4/10 | Rotten Tomatoes : 95%‘팜 스프링스’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한 남녀 ‘나일스’와 ‘세라’가
매일이 반복되는 타임루프에 갇히면서 벌어지는 로맨틱 코미디
씨네pick : 믿고 보는 “선댄스 영화제" 진출작이자 <기생충>의 북미 배급을 맡은 제작사 Neon의 작품입니다. ‘폭력과 외국어, 그리고 논픽션에 대해 반감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설립 목적에 맞게 다양성 영화 중에서도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배급해왔는데요. 타임 루프 로맨스물을 절대 뻔하지 않게 만들어낸 올해 가장 통통 튀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웬디 (Wendy, 2020)드라마, 판타지 | 미국 | 111분 | 등급 미정
감독 : 벤 제틀린 | 출연 : 데빈 프랑스, 야슈아 막
IMDB : 5.7/10 | Rotten Tomatoes : 38%어른이 되기 싫어했고 언젠가 피터팬이 찾아와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었던 벤 제틀린 감독의 어린 시절 추억과 어느 순간 이미 어른이 된 것을 깨닫게 되며 순수했던 동심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색다른 판타지 영화
씨네pick : 믿고 보는 '선댄스' 작품이 또 있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환상 동화 <웬디>는 명작 [피터팬]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데뷔작부터 칸 영화제 '카메라상'을 수상한 감독 특유의 색채가 아주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유명 배우가 아닌 아이들을 주연으로 내세웠기에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레타 툰베리 (I Am Greta, 2020)다큐멘터리 | 스웨덴 | 101분 | 등급 미정
감독 : 나탄 그로스만 | 출연 : 그레타 툰베리
IMDB : 6.7/10 | Rotten Tomatoes : 79%기후 변화 법안 마련 촉구를 위해 금요일마다 학교를 결석하며
의회 앞에서 홀로 시위를 시작한 15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
그녀가 쏘아 올린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데…
평범한 10대 소녀에서
어른들의 무감각한 환경 의식에 일침을 가하는
세계적인 청소년 환경운동가가 되기까지! 700만을 움직인 그녀의 외침에 주목하라!
씨네pick : 2019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10대 환경 운동가 '그레타'의 다큐멘터리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 추천 기대작이기도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인물과 문제를 다룬 극인 만큼 더욱 기대되는 작품입니다.너의 결혼식 (가제) (My Love, 2021)멜로/로맨스 | 중국 | 115분 | 등급 미정
감독 : 티안 한 | 출연 : 허광한, 장약남
IMDB : 5.3/10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공식에 관한 영화로, 한 남자와 여자의 첫 만남부터 15년 간의 이야기를 다룬 로맨틱 코미디 영화
씨네pick : 한국에서 대히트를 거둔 첫사랑 멜로 영화 <너의 결혼식> (2018)의 중국 리메이크작으로, 요즘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배우 [상견니]의 배우 '허광한'이 주연을 맡은 작품입니다. 개봉과 동시에 예매율 1위를 달성하고, 노동절 연휴 5일 동안 1100억의 매출을 올렸다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는 작품입니다.다섯 편 중 특히 기대되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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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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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난 기억 너머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것들
애프터 양 (AFTER YANG, 2021)
"파편난 기억 너머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것들"
등급 : 전체 관람가
장르 : 드라마, SF
러닝타임 : 96분
감독 : 코고나다
출연 : 콜린 파렐, 조디 터너 스미스, 저스틴 H. 민
개인적인 평점 : 4.5/5
쿠키 영상 : 없음
애프터 양 줄거리
함께 살던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어느 날 작동을 멈추자 제이크 가족은 그를 수리할 방법을 찾는다. 그러던 중, ‘양’에게서 특별한 메모리 뱅크를 발견하고 그의 기억을 탐험하기 시작하는데… 무엇을 남기고 싶었어,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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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가 됐던 애플 TV <파친코(1,2,3,7편)>의 연출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 된 코고나다 감독의 신작 <애프터 양>이 전주 국제영화제를 거쳐 국내에 정식 개봉한다. 제23회 전주 국제영화제의 개봉작으로 선정된 <애프터 양>은 매 상영마다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애프터 양>은 알렉산더 와인스틴의 단편 소설 [양과의 안녕]을 각색한 작품으로, 테크노 사피엔스라 불리는 안드로이드가 각 가정에 보급된, 언젠가 다가올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영화다. 주인공 제이크 가족은 입양한 딸 미카의 고향인 중국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안드로이드 양을 구매한다. 양은 미카에게 선생님이 되어주기도 하고, 하나뿐인 형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미카 또한 양을 오빠라 부르며 그에게 의지하고 함께 마음을 나눈다.
어느 날, 수명이 다된 것인지 양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자 제이크는 공식 서비스 센터와 사설 센터를 오가며 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딜 가든 양은 다시 움직이지 못할 거라는 부정적인 답만 돌아올 뿐이다. 제이크는 양을 차 뒷좌석에 앉힌 채 이곳저곳을 헤매다 마지막 보루로 테크노 사피엔스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박물관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양의 중심부에 저장되어 있던 그의 기억 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 양의 짧은 추억들을 함께 되짚으며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감정인 사랑과 행복했던 기억, 소중한 것의 상실과 회복, 나의 뿌리(정체성)와 인생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 하나의 아쉬웠던 점? 취향의 차이
개인적으로 <애프터 양>은 상당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사심이 가득해서 더 좋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미리 말하자면 이번 리뷰에선 영화의 장단점을 비슷한 비율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나에겐 이 영화가 상당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마친 후, 남아있는 감정에 푹 젖어있다가 다음 상영을 바로 예매했을 만큼 이 영화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마 이 글의 90%는 영화의 장점과 내가 느꼈던 영화의 메시지들로 채워질 예정이라 아주 작은 아쉬웠던 점 하나를 먼저 던지고 가려고 한다.
<애프터 양>은 느린 속도를 좋아하지 않는 관객들에겐 추천하지 않는 영화다. 오프닝 신을 제외하면 스피드가 느껴지는 신이 거의 없고, 양의 기억이 짧게 파편 난 채로 재생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영화 전체가 마치 아름다운 비디오 일기처럼 흘러가는 느낌이 있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외적으로 감정을 많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다이나믹한 감정선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또 SF영화라 하여 상상력으로 가득한 세상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도 비추! 조용한 영화기 때문에 피곤한 상태로 관람하는 것 또한 비추다.
객관적으로 본 아쉬운 점은 이 정도가 있겠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단점도 아니고 그냥 취향 차이 정도가 아닐까? 오히려 난 이 천천히 흘러가는 화면들이 좋았다. 빠르지 않은 속도 덕분에 푸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연하게 느껴지는 바람 같은, 그 순간에 담긴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오늘부터 나의 최애 주머니에 담긴 저스틴 H. 민 배우
이 영화에 처음 띠용-했던 건 코고나다 감독의 이름 때문이었고, 죽어도 꼭 봐야겠다!! 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저스틴 H. 민’이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올해 초, 나는 뒤늦게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통해 이 배우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애프터 양>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해사한 미소와 조곤조곤한 말투, 밝은 성격과 내 취향을 저격하는 매력적인 외모. 거기에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 보여준 발랄함과 따스함이 뚝뚝 떨어지는 연기까지… 저스틴 H. 민은 내 눈에 쏙 들어오는 매력적인 배우였다. 그리고 나는 <애프터 양>을 보자마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저스틴 H. 민을 최애 주머니에 담아버렸다.
저스틴 H. 민 배우는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양’이 되어 스크린에 나타났다. 그는 언젠가는 로봇처럼 딱딱하고 어색하게, 언젠가는 따스한 오빠처럼, 언젠가는 든든한 부모님처럼, 또 다정한 연인처럼 느껴지는 여러 결의 눈빛을 흘리며 나의 마음을 완벽히 홀리는 데 성공했다. 사실 저스틴 H. 민 배우는 단편 영화들을 제외하면 아직은 필모그래피가 많지 않은 배우인지라, 다양한 연기를 보지 못했었는데 <애프터 양>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어 정말 기뻤다. 나는 섬세하고 정갈한 그의 호흡에 속절없이 빨려 들었고 '이 배우는 지금도 엄청난 스타지만… 앞으로 더 잘될 배우가 확실하다!’고 외치며 그에게 뼈를 묻기로 다짐했다.
세련된 연출
<애프터 양>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정확히 몇 년인진 알 수 없어도 왠지 멀지 않을 것 같은 미래로 보인다. 코고나다 감독은 익숙한 현재의 모습에 미래의 모습을 자연스레 녹여낸다. SF영화라 하면 정말 상상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배경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정말 곧 다가올 것 같은 미래의 모습을 담았다. 안경과 닮은 판독기, 낯설지 않은 차의 구조,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익숙한 카메라와 집, 가구들. 그래서인지 정말 이런 가족이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 더욱 몰입이 됐던 것 같다.
그리고 인물들의 의복이나 음식, 차를 우려먹는 문화를 통해 영화 곳곳에 동양적인 요소들을 가미함과 동시에 깔끔한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건축물과 가구들을 배치함으로써 흠잡을 곳 없는 깔끔하고 안정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 영화의 세련됨은 오프닝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먼저 얘기하면 장면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으니 자세히 언급하진 않겠다.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 배우의 만남.
그들이 던지는 "~다운 건 무엇일까?" 하는 질문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 배우. 각자 떨어뜨려 놓아도 충분히 이슈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이 있는 두 사람이 만난 작품이라니.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영화에서 양과 가까운 사이였던 에이다는 양이 교육용 안드로이드로서 미카를 가르치기 위해 중국의 문화와 아시아인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한다. 양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시아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프로그램에 정보가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 문화를 해박하게 알고 있지만 사실 중국에서 살아본 ㄴ적이 없는, 그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는 양은 미카를 가르치면서도 아시아인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제이크와 차를 마실 때도 그렇다. 차의 기원과 종류는 다 알고 있지만, 양은 차 한잔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그것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다운 것이란 무엇일까?"
하나 더 예를 들자면 제이크의 찻집이 있다. 제이크는 잎이 그대로 살아있는 차를 판매한다. 영화의 첫 장면, 제이크의 찻집에 들어온 손님은 가루로 된 차가 없냐고 묻더니 "차 가루가 없는 찻집도 있냐"고 말하며 찻집을 나간다. 차 가루가 없는 찻집은 찻집답지 못한 걸까? 찻집 다움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제이크는 손님의 말을 마음에 담아뒀는지 차 가루를 내 양과 함께 차 한잔을 마셔보지만 가루로 된 차가 주는 맛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시아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차를 즐긴다는 건 무엇일까?", "안드로이드다운 것은, 인간다운 것은 무엇일까?", "가족이란 건 무엇일까?" <애프터 양>은 무언가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애프터 양>을 만나기 전, 저스틴 H. 민 배우의 <애프터 양>이란 영화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터뷰를 읽고 가서인진 몰라도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 배우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끊임없이 던져야 했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온전히 느껴지는 듯했다.
차에 대한 기억이 없고 지식만 있어도 나는 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중국에 대한 기억이 없고 역사에 대한 지식만 있어도 나는 아시아인이 되는 것인가?
저스틴 H. 민 배우는 자신 또한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분명 나는 한글을 배웠고, 한인 교회에 갔고, 한국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것이 나를 한국인답게 만들 수 있는 걸까?"하는 고민 말이다. 코고나다 감독 또한 이 영화를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들어간 영화라고 언급했다.
저스틴 H. 민은 양을 닮았고, 양은 저스틴 H. 민과 닮았다. 나는 과연 누구이고,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나다운 것인가. 저스틴 H. 민 배우는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양의 여정이 곧 자신의 여정이기도 하다고 언급했다.
양의 이름 + 뿌리와 정체성에 대하여
Yang이라는 이름은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이 항상 고민했던 '이민자(한국계 미국인)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는 매개체다. 우리는 Yang을 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화 속 제이크의 가족은 Yang을 양이 아닌 '얭’에 가까운 발음으로 부른다.
저스틴 H. 민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코고나다 감독과 양의 이름에 대해 함께 고민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은 양의 발음을 실제 버전(양)으로 할지 미국화 된 발음(얭)으로 할지 신중히 고려해 '얭’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양인 부모들이 "Yang을 원래 발음에 가깝게 발음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코고나다 감독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아시아와 서양이라는 두 개의 문화의 중간에서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양의 잘못 발음되는 이름을 통해 은유적으로 나타냈다고 한다. 아마 서양, 아시아의 문화 사이에서 정확히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는 이민자들의 모습을, 서양 부모들에 의해 '양’이 아닌 대충 '얭’으로 발음되는 그의 이름으로 비유했다고 생각하면 될듯하다.
다양성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한 "~다운 것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은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주인공인 제이크의 가족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영화엔 다양한 모습을 한 가족들이 나온다. 제이크의 가족은 백인 남성, 흑인 여성, 아시아인인 딸, 안드로이드로 구성되어있고 그의 옆집엔 복제 인간 아내와 아이를 둔 이웃이 살고 있다. 오프닝 신에 나오는 가족 댄스 대회의 참여 가족들 또한 피부색, 성별, 인간/복제 인간/안드로이드의 구분 없이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같은 인종인 부부가 이루는 것인가?, 또는 사회 통념상 정해진 보통의 연인들이 이루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핏줄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그 무엇도 정답이 될 수 없다. "~ 다운 것"은 타인이 함부로 정할 수 없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이고, 그 답을 찾고, 정의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인것이다.
댄스 대회를 하면서 제이크의 가족들은 "우리가 한 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이들은 하나의 온전한 가족이 되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한 팀이 되어 살아간다. 백인 아빠와 흑인 엄마, 입양된 아시아인 딸, 딸의 오빠 역할을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혹시 이들을 감히 '가족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내가 아주 조금만 혼내주려고 하니 어디 한번 그렇게 말해보길 바란다…)
새로운 안드로이드
나는 지금껏 안드로이드, 로봇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사뭇 건조할 것이라 생각했고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는 순간, 높은 확률로 슬퍼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은 달랐다. 그는 제이크의 가족에게 심어진 곁가지가 아닌 든든한 뿌리였고, 인간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건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진짜 인간들보다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아온 존재였다.
영화의 초반, 인간들의 눈으로 본 양은 딱딱한 로봇 같은 모습이다. 그는 미카와 대화를 나눌 때도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어딘가 어색한 모습으로 비친다. 하지만 양의 기억 속 양의 모습과 양이 느낀 감정들은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더 '인간다웠다'. 옆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소중히 간직하는 따뜻한 마음, 사랑한 사람을 잊지 않고 그의 주변을 맴도는 지고지순함, 거울을 보며 빙긋 웃어보는 모습까지. 수많은 기억을 저장하며 순수하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양의 모습은 아름다운 인간 그 자체였다.
여담으로 저스틴 H. 민 배우는 GV를 통해 양의 기억을 언급하며 양은 일상의 순간들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며, 관객분들도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길 바란다고 전했다. 생각해보니 내 일상을 단조로운 것이 아닌 매일 다른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본 날이, 일상에서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본 날이 언제였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엔 왜 양이 주인공인지, 왜 그가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양의 기억을 여는 순간 확실히 알게 됐다.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애프터 양>인지. 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옅은 흔들림과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기억들은 나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선물했다. 이런 사랑스럽고 복잡한 안드로이드 같으니…
양의 소중한 기억 속을 함께 유영하며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96분. 이 시간의 일부는 나의 '아름다웠던 순간' 중 하나로 고이 저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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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살 생일에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은 오늘부로 75세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생겼습니다. 당신은 과연 죽음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물론, 반드시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권리란 어떤 일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자격이니까요. 다만, 여러분은 앞으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고, 그러므로 돈을 벌 수도 없고, 그래서 집도 구하지 못합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저였다면 궁지에 몰린 기분으로 죽음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을 과연 권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일본의 근미래를 그린 영화 <플랜 75>의 세상으로 떠나보겠습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플랜 75>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플랜 75>는 2024년 2월 7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플랜 75
Plan 75
Summary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발표한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 가족의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 ‘플랜 75’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하야카와 치에
출연: 바이쇼 치에코, 이소무라 하야토, 카와이 유미 외
노인을 위한 정책, 노인 혐오를 위한 정책
피가 낭자한 바닥에 널브러진 휠체어와 지팡이들, 그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한 청년. 그의 손에는 산탄총이 쥐여 있습니다. <플랜 75>는 노인 혐오 범죄가 일어난 사건 현장을 묘사하는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로 영화의 막을 엽니다.
가까운 미래의 일본에서는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죽음의 권리를 제공합니다.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인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입니다. '플랜 75'를 신청한 노인에게 정부는 10만 엔의 준비금을 지급합니다. 제휴 화장터를 이용한 합동 장례 서비스도 무료로 지원합니다. '플랜 75' 홍보영상에 등장하는 한 할머니는 "이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죽음을 선택할 것을 권합니다.
노인의 존엄한 죽음을 지원하는 서비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정책 안에 노인의 존엄을 위한 혜택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죽기로 결정하면 지급되는 준비금 10만 엔부터 그렇습니다. 자유롭게 쓰라고는 하나, 곧 죽음을 앞둔 노인들에게는 큰돈을 쓸 만한 곳이 없습니다. 평소 먹어보지 못한 특대 초밥을 시키는 것이 고작이죠. 합동 장례 서비스도 그저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효율적으로 처리하겠다는 말을 무료 서비스인 양 홍보할 뿐입니다.
극 중 '미치'는 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을 찾습니다. 부동산에서는 집을 구하려면 2년 치 월세를 미리 내거나 일자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미치'는 노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은 상태였죠. 백방으로 일자리를 수소문해 보지만, 결국 일도 집도 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랜 75'를 신청합니다. 만약 정부가 10만 엔을 죽음의 준비금이 아닌 삶의 준비금으로 지급했다면, '미치'는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미치'를 일자리에서 내쫓지 않았더라면, 그는 집을 구해 계속해서 살아갔을 겁니다.
우리는 여럿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는 것을 선택이라 부릅니다. '플랜 75'는 언뜻 삶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노인들 앞에는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후보가 하나뿐인 선택은 더는 선택이라고 할 수 없죠. 그저 강요와 압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순간 관객은 '플랜 75'가 오프닝 시퀀스에 담긴 노인 혐오 범죄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총으로 노인들을 잔혹하게 쏴 죽이진 않았지만, 그보다 더 잔인하게 노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깨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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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곧 개봉을 앞둔 영화 <소풍>의 언론배급시사회에서 나문희 배우가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영화에 노인네들만 나온다고 하니까 투자자가 없었어요." 언론배급시사회 영상이 게시된 유튜브 채널 아래엔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안 본다, 다 늙어서 웃겨."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노인 경시 문화가 만연해졌습니다. 마치 노인은 젊음과 함께 인간의 존엄과 가치까지 잃은 것처럼 대하죠. 하지만 극 중 노인들의 모습은 꼭 청년들과 같습니다. 간소하게 밥을 차려 먹고, 친구들과 맛집을 가고, 수다를 떨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일하고, 촌스러운 건 싫고,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자고 갔으면 좋겠고, 누군가와 함께 자는 밤은 덜 무섭죠. 영화 초반부에 한 할머니는 동료들과 모양이 조금 망가진 간식을 나눠 먹으면서 이런 대사를 뱉기도 합니다. "모양은 달라도 맛은 다 똑같아."
영화 <소풍>이 위대한 배우들의 출연에도 투자에 난항을 겪었듯이, 자본은 슬프게도 사회적 권력을 따라 흐릅니다. 그 때문에 지배 권력과 떨어져 있는 소수자들은 <플랜 75>의 타이틀 디자인처럼 그 존재가 흐려지기 쉽죠. 존재가 명확하지 않은 만큼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쉽습니다.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자신은 평생 장애인, 성소수자, 난민, 비정규직 등의 사회적 약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지요. 최근에는 이러한 태도가 표현의 자유와 이기심을 만나 극도의 혐오로 표출되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노인 혐오 역시 그중 하나이고요.
그런데 여러 소수자 차별 문제 중에서도 노인 혐오는 어쩐지 조금 더 무섭습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늙어가는 운명을 타고났으니 말입니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두면 "나와 너는 다르다"에서의 '나'는 금세 '너'가 됩니다. 자신이 흔적을 지우는 미래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 셈이죠.
영화는 '플랜 75'라는 가상의 정책을 통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는 미래를 경고합니다. 이미 망가져버린 세상이 더는 무너지지 않길 바라며, <플랜 75>의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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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황혼을 비추며 끝맺습니다. 단 한 번도 황혼 이후의 시간이 없는 하루를 상상해 본 적 없습니다. 오로지 새벽, 아침, 오후뿐인 나날을 살아야 한다면 아마도 삶은 불행으로 가득하겠지요.
One-Liner
선택지가 하나뿐인 질문 앞에서 선택의 '권리'를 주겠다는 어폐. 혐오는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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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종된 순수에 대하여
이 글은
영화 [9명의 번역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남겨주세요.
코로나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던 불과 1년 전 그때.
많은 국민들은 코로나로 인해 불철주야 일하던 의료진들을 향한 <덕분에 챌린지>를 펼쳤었다.
터진 댐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방대한 물을 맨몸으로 막는 듯한 불가항력을 느꼈던 의료진들에게, 이 수줍지만 진심을 담은 챌린지는 아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 챌린지의 뒤에는 간접적으로 코로나의 종식에 힘쓰고 있지만 그 어떤 혜택이나 칭찬에서도 한 발짝씩 멀어져 있었던 연구원들도 있었다.
냉정한 잣대를 들이밀자면 의료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의 기세를 꺾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늘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보다는 그림자 안이 더 편하다며 씁쓸하게 웃어야만 하는 연구진들의 알 수 없는 섭섭함은 지금도 풀지 못한 숙제처럼 마음속에 쌓여있을 것이다.
영화 [9명의 번역가]들은 출판업계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원색적인 모욕을 많이 들으면서도 늘 영광의 중심에서는 슬그머니 멀어진. 마치 영화처럼 벙커 속에 있는 듯한 번역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지어 그런 푸대접을 받는 것도 억울한데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신간의 원고를 누출시켰다는 누명까지 쓴 채로.
해커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은 고전적인 밀실 추리 방식을 지니고 있고. 9명의 용의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다.
2인자의 삶;숨어 있는 것들을 향해.
사진출처:다음 영화번역가들은 신간 <더덜리스>의 번역을 완성할 때까지 계약서의 비밀유지 조항 때문에 벙커 밖으로 나올 수 없다.이 갑갑한 벙커 안에서 번역가들이 받아야 하는 대우는 사실 사는 데는 아무 지장 없지만, 한편으로는 참 서운하고 비참하다 불러도 할 말은 없어 보인다.
절대 빛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벙커(지하)에서 영원히 2인자의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은 번역가들의 처지는 그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숨겨놓은 욕망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 욕망이 헬렌의 경우는 작가가 되는 것이고. 카테리나(올가 쿠릴렌코)는 작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로즈메리에게는 아름다운 문학의 정점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알렉스(알렉스 로더)에게는 에릭의 멸망.
이들 마음속에는 자신 안의 욕망이 벙커에서 빠져나와 빛을 보기를 바라면서도. 자격 미달이라거나. 혹은 아직 때가 아니었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최소한의 선은 지키려 하지만. 에릭(램버트 윌슨) 만은 다르다.
에릭은 이 영화를 통틀어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속과 겉이 같고. 스스로의 모습을 숨기는데 가장 적은 힘을 들이는 사람이므로. 번역가들이 안전하게 숨겨 놓은 마음속의 비밀스러운 욕망을 맘껏 비웃는다.
자신의 위치가 물리적인 장소인 벙커 안의 번역가들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생각과 동일하게. 그들의 꿈마저도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해 무차별적 폭언을 일삼는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곰곰이 들여다볼 장소가 없었던 에릭의 행동은 그 누구보다도 성급하고 깊이가 없었으며 예측 가능했기에. 악인에게 허락된 예정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꿈은 실패할 가능성도 많지만.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도 많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자신이 그렇게 무시해 마지않던 알렉스의 꿈은 보기 좋게 에릭을 추락시켰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순수한 것들은 모두 죽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영화에는 크게 두 부류의 집단이 등장한다.
한 집단은 문학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에릭의 비서이자 책임감 외에는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볼 수 없는 로즈메리와,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책 속 인물인 레베카처럼 꾸미고 다니는 카테리나. 번역가로서의 삶 이외에도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며 몰래 소설을 쓰던 헬렌이 이 집단에 속한다.
악, 혹은 속세로 대변되는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에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존재하는 순수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거나 해를 가한다.
충실한 로즈메리는 에릭을 결국 가장 필요한 순간에 떠났고. 헬렌은 에릭의 차가운 말에 스스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벙커 안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카테리나의 생사는 에릭의 총알에 의해 알 수조차 없게 된다.
거침없는 에릭만큼이나 참을성이 없는 총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더덜러스> 원작자의 가슴팍에도 한 발의 총알을 명중시킨다.
카테리나보다도 먼저 사경을 헤매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위치였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가슴팍에 품었던 책으로 인해 목숨을 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알렉스의 목숨을 구해준 책은. 알렉스에게도. 또한 <더덜러스>의 창조주에게도 마지막 순수를 상징하는 책(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었다.
결국 에릭은 자신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있는 순수의 존재를 모조리 말살시켜 버렸다.
결말에 대하여;처벌은 합당한가.
사진출처:다음 영화표면적으로 봤을 때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쪽은 에릭이다. 첫 장면에서 강렬하게 타오르는 서점의 살인마저도 에릭의 짓인 것이 자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벌이라는 면에서 보면 알렉스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단지 두 사람의 처벌이 그들의 처지와 살아온 모습에 맞게 변형된 것일 뿐이다.
에릭에게 내려진 처벌의 형태는 그 어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세속적이며. 벗어날 수 없고. 또한 적절하다. 에릭은 감옥에서 소위 하는 말처럼 썩게 될 것이고. 자신이 한없이 견고하다 생각하며 쌓아올린 명성은 녹슬다 못해 삭아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스에게 내려진 처벌은 이에 비하면 형태가 없어 보이지만. 오히려 더 가혹해 보인다.
작가로서의 삶으로 본다면, 이 가명을 쓰는 작가는 두 번 다시는 <더덜러스>같은 책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 말해도 좋다. 이 베일 속의 작가는 늘 숨어 있을 누군가가 필요했고. 자신에 대한 용기가 없었다. 그는 스승의 뒤에 숨어있을 때야 자신의 모습을 겨우 드러낼 수 있었고. 그 뒤에서의 삶에도 겨우 만족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위한 방파제가 사라진 지금. 글을 쓸 베짱이 있었다면.이라는 말이 평생 그의 벙커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것은 명약관화하듯 뻔하다.
또한 알렉스로서의 삶도 비참하다.
알렉스의 가장 큰 자부심이자 스스로를 감추는데 적합했던 투명 망토인 <더덜러스>의 원작자라는 사실은. 에릭의 총알 한 발에 의해 숨통이 끊어져 버렸다. 그는 이제 맨 얼굴인 채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만. 이미 불법 번역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경찰서에 출입한 경력이 있고. 이번 사태로 인해 경찰의 의심을 일정 기간 동안은 받으며 살아야만 한다.
멀고 먼 인생의 종점을 바라보며 현재의 알렉스 상태를 진단해 본다면. 에릭의 미래보다도 암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면서
많은 반전을 두고 있는 영화는 좋다. 관객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좋다.
에릭에게서 원고를 뺏기 위해 벙커에 갇히기 전부터 계획을 세워왔다는 설정이 기발하긴 하지만. 그 후반부는 전반부의 정통 추리와는 결이 달라 많은 감정을 깨뜨린다.
또한 해커의 이메일에 대한 설정 추리도 조금 아쉽다. 물론 에릭의 바보 같음, 혹은 후반부의 결이 달라지는 장면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 상황에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외부밖에 없으므로 가장 먼저 의심했어야 한다.
또한 에릭의 경우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있어서는 모조리 처벌을 받았지만(혹은 이제 받겠지만) 알렉스의 경우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진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다른 번역가들을 모두 이용했다는 점에서 보면. 주인공도 결국은 번역가들을 가장 앞장서서 도구로 사용했음에는 틀림이 없고. 이것이 과연 에릭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알렉스가 울컥이며 외롭게 길을 걷는 모습을 비춘다.
그 복잡한 표정에 담긴 감정은 다행이라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에릭의 여생을 성공적으로 감옥에 저당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뉘우침과 참회의 감정이 지배적이다. 알렉스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에릭의 총알이 책에 박혀 목숨을 구했을 때. 분명 자신은 살았다고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자신의 비극이 시작될 것이란 걸 알았을까.
에릭의 형벌과 함께 스스로의 형벌도 그의 생을 관통하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렉스는 그 길을 걸으며 어렴풋이 느꼈으리라.
[이 글의 TMI]
1. 보는 내내 속도감이 꽤 빨라서 긴장이 많이 되었음.
2. 두 시간짜리 영화가 귀해지는 마법이라니.
3. 이제 추워져서 슬슬 가을 옷 정리도 해야 할 듯.
4. 친구랑 보러 가기로 했는데 얘 늦잠 자서 인생 하직할 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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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감독: 드니 빌뇌브
각본: 에릭 로스, 존 스페이츠, 드니 빌뇌브
원작: 프랭크 허버트의 듄(1965)
제작: 드니 빌뇌브, 케일 보이터. 메리 페어런트,조 카라치올로 주니어
주연: 티모시 샬라메, 제이슨 모모아 외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기간: 2019년 3월 18일 ~ 2019년 7월 26일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워너브라더스
수입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2020년 12월 18일#듄 #듄영화리뷰 #듄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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