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0-15 17:06:32
10월 셋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10월 셋째 주 극장가, 한국 영화들이 몰려온다!

다소 한산했던 극장가가 한국 영화들로 풍성하게 채워질 예정입니다.
독특한 제목만으로 관객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부터 설경구, 김희애 등 베테랑 배우들의 앙상블로 화제를 모은 <보통의 가족>, 2024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던 <6시간 후 너는 죽는다>까지 줄줄이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잠자리 구하기>, <페이퍼맨> 등 다양한 한국 독립영화도 관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1편 개봉 당시, 국내에서도 약 10만 명의 관객을 모았던 독특한 소재의 공포 영화 <스마일>도 속편으로 돌아왔습니다. 전편과 동일한 감독이 연출을 맡아 더욱더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10월 셋째 주 개봉 PICK!
시작합니다.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
DIRTY MONEY

개요: 범죄 | 대한민국 | 100분
감독: 김민수
주연: 정우, 김대명, 박병은, 조현철
개봉: 2024.10.17.
배급: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줄거리
수사도, 뒷돈 챙기는 부업도 늘 함께 하는 생계형 형사 ‘명득’(정우)과 ‘동혁’(김대명). 우연히 범죄 조직의 검은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두 사람은 인생 역전을 위해 신고도, 추적도 불가한 돈을 훔치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했던 현장에서 잠입 수사 중이던 형사의 죽음으로 사건은 꼬여만 간다.
“어차피 우리가 저지른 일, 수사하는 것도 우리야”
살인으로 번져버린 사건을 ‘명득’과 ‘동혁’이 직접 수사하게 되고 ‘명득’과 악연으로 얽힌 광수대 팀장 ‘승찬’(박병은)이 수사 책임자로 파견된다. 그리고, 은폐하려 했던 현장 증거까지 두 사람을 점점 압박해 오는데… 목숨 걸 자신 없다면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
보통의 가족
A Normal Family

개요: 드라마 | 대한민국 | 109분
감독: 허진호
주연: 설경구, 장동건, 김희애, 수현
개봉: 2024.10.16.
배급: ㈜하이브미디어코프, ㈜마인드마크

줄거리
물질적 욕망을 우선시하며 살인자의 변호도 마다하지 않는 변호사 ‘재완’(설경구)과 원리원칙을 중요시 여기는 자상한 소아과의사 ‘재규’(장동건) 성공한 프리랜서 번역가로 자녀 교육, 시부모의 간병까지 모든 것을 해내는 ‘연경’(김희애)과 어린 아기를 키우지만, 자기 관리에 철저하며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가족들을 바라보는 '지수'(수현). 서로 다른 신념을 추구하지만 흠잡을 곳 없는 평범한 가족이었던 네 사람.
어느 날, 아이들의 범죄 현장이 담긴 CCTV를 보게 되면서 사건을 둘러싼 이들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그리고 매사 완벽해 보였던 이들은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데…
신념을 지킬 것인가 본능을 따를 것인가 그날 이후, 인생의 모든 기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마일 2
SMILE 2

개요: 공포 | 미국 | 127분
감독: 파커 핀
주연: 나오미 스콧, 루카스 게이지, 카일 갈너, 로즈마리 드윗
개봉: 2024.10.16.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줄거리
“넌 죽음을 목격했어. 그게 이제 너를 따라다니는 거야”
월드투어를 앞두고 자신의 눈 앞에서 기괴한 미소와 함께 끔찍한 죽음을 맞은 친구를 목격한 팝스타 ‘스카이’. 그 날 이후 공연 리허설과 팬 미팅 행사 등 그녀의 삶 곳곳에서 끔찍한 일들이 잇따라 발생한다. 화려한 스타의 삶을 뒤덮은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스카이’는 자신이 죽어야만 전염처럼 번지는 저주가 끝난다는 사실을 듣게 되는데…
“이번엔 너도 같이 웃게 될 거야”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You Will Die In 6 Hours

개요: 스릴러 | 대한민국 | 91분
감독: 이윤석
주연: 재현, 박주현, 곽시양
개봉: 2024.10.16.
배급: (주)트리플픽쳐스

줄거리
“지금부터 6시간 후, 당신 죽어”
서른 살 생일을 하루 앞둔 ‘정윤’은 길에서 만난 낯선 남자 ‘준우’에게 죽음 예고를 듣는다. 믿을 수 없는 예언이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어가면서 ‘정윤’은 자신을 죽이려는 범인을 찾기 위해 ‘준우’와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예고된 죽음 정해진 미래와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Relative contents
-
-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둘째가 태어나고 일년쯤 지났을까? 다정한 누나였던 첫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어.”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둘째의 임신이후 각오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게다가 둘째의 탄생이 후 첫째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동생을 꽤나 예뻐하고 잘 돌본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어느날 툭 내던진 한마디에 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행동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울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이 작은 아이는 일년이 넘는 동안 어떤 감정으로 동생을 대해 왔던 걸까? 나는 우선 말없이 꼬옥 안아주었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를 보며, 내가 자주 눈물이 났던 것은, 클레오의 모습에서 나의 첫째아이를 보았기 때문일 것 이다.
클레오는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여섯살 여자아이다. 엄마가 아장아장 걸을 때쯤 세상을 떠나 아빠와 살고 있는 클레오는 서아프리카 카보베르데에서 온 보모 글로리아의 보살핌과 돌봄을 받고 있다. 엄마의 부재를 모두 채워주고 있는 사람. 클레오가 유치원에서 나와, 다른 학부모들 사이에서 글로리아를 보고 활짝 웃으며 글로리아를 반긴다. 둘은 다른 엄마와 딸처럼 함께 병원을 가고,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목욕을 한다. 클레오에겐 아마도 글로리아가 엄마같은 존재일 것이다. 온 세상의 전부.
어느 날, 글로리아에게 카보베르데에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오고, 안전하고 따듯해 보였던 둘만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슬픔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아이를 챙기는 글로리아의 모습에서 글로리아의 세상의 많은 부분에도 클레오가 차지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글로리아는 클레오가 모르는 글로리아의 세상 카보베르데로 돌아가야 하고, 클레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글로리아가 떠나는 날 , 인사 대신 숨어서 지켜 보며 우는 클레오를 보며, 내가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서로를 위해 슬픔의 감정을 눌러 담은 클레오와 글로리아.
글로리아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클레오는 마음이 텅 비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글로리아가 클레오의 아빠에게 부탁한 대로 카보베르데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 곳은 클레오가 몰랐던 글로리아의 세계가 있다. 임신중인 딸 페르난다와 프랑스에서 클레오를 돌보는 동안 할머니 손에 자란 아들 세자르가 있다.
클레오가 도착한 순간 위태롭게 클레오를 지켜 보는 글로리아의 아들 세자르, 클레오는 상관없이 글로리아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어하지만, 페르난다가 출산을 하여 갓난아이가 태어나 글로리아가 손주를 돌보는 일에 마음을 쓰자, 클레오는 또 다른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아기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클레오의 세계는 조금씩 무너지고, 클레오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마도)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집밖으로 내 달려 절벽의 바다로 뛰어든 순간 , 클레오는 어쩌면 다른 세계로 알을 깨고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클레오가 ‘아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감을 느꼈다. 영화의 처음 창문 밖으로 숨어 울던 클레오에게, 질투와 분노 부정적인 감정들 까지 표현하게 되어서, 더 꽉 안아 줄 수 있구나.
이제 둘은 깊이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새롭게 쌓고 있는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한발 물러서 지켜봐주어야 하는 때 임을 알아간다. 공항에서 클레오를 떠나 보내며 우는 글로리아를 보며, 이 영화는 클레오의 성장기이며, 글로리아의 성장기이며, 이는 돌봄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품에 안고 있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영원처럼 사랑했고 또 멀리 스스로 설 수 있게 떠나보내야 하는 그런 관계는 보모와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와 아이도 마찬가지니까. 두 아이를 육아하며, 이리 저리 흔들거리는 나에게 돌봄을 하는 사람이란, 그렇게 한 사람의 세계를 이루어 만들도록 돕고 지켜보며 또 응원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
- 새롭게 만난 시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단 하나의 선택
컨택트 (Arrival, 2016)개봉일 : 2017.02.02 (한국 기준)
감독 : 드니 빌뇌브
출연 : 에이미 아담스, 제레미 러너, 포레스트 휘태커, 마이클 스털버그
새롭게 만난 시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단 하나의 선택
2021년 하반기, 최대 기대작 <듄>의 개봉을 한 달쯤 앞두고 앞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작품을 찾아보던 중, 이 영화를 만났다.
<컨택트>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 <블레이드 러너 2049>, <그을린 사랑>등 언젠가 관람해 봤거나 화제작이라는 소문을 한 번쯤 들어봤을 커다란 존재감을 가진 작품들로 가득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드니 빌뇌브 감독의 색다른 시선이 담긴 작품이다. 외계 생명체가 등장한다는 소재만 생각한다면 SF 장르처럼 보이지만 SF 장르의 큰 특징인 환상적인 비주얼과 쾌감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조금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SF보단 드라마<컨택트>는 다소 잔잔하고 느리게 흘러가며 처음 미지의 외계 생명체를 마주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시각적 자극은 크게 없는 편이다. 인물들이 격렬한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도 없으며 살 떨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마주하는 장면도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 아주 천천히 말려들어갔다. 주인공 루이스의 결단과 함께 나도 외계 생명체에 대한 경계를 한 꺼풀 내려놓고 나니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선 이것이 선물인지 재앙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컨택트>의 원래 제목과 뜻
이 영화의 원제목은 도착, 도착한 자, 도입 등의 뜻을 갖고 있는 Arrival다. 이야기는 어느 날 전 세계 곳곳에 커다란 비행 물체가 도착하며 시작된다. 위협을 느낀 지구인들은 이것이 어디서, 왜 나타났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비행 물체에 접근한다. 지구인들과 다른 행성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온 외계 생명체들은 짐승과 같은 소리를 내며 지구인들의 물음에 답한다. 지구인들은 외계 생명체들이 내는 소리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연구하기 위해 언어학 전문가 루이스와 과학자 이안에게 도움을 청한다.
지구인과 외계 생명체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루이스는 그들에게 지구의 언어를 학습시키며 소통하려 노력하고, 이안은 루이스의 행동에 힘을 싣는다. 루이스는 보호막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외계 생명체를 조금씩 이해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을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외계 생명체들에게 지구의 언어를 가르치는 건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서툰 언어의 전달 중에 생긴 오해는 지구인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모양새의 언어가 다른 문명을 이해하는 초석이 될 수도 전쟁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루이스는 이해를 택하고,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 시간을 통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끝을 안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외계 생명체가 가져온 변화는 선물인가, 또 다른 고통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컨택트 시놉시스
12개의 외계 비행 물체(쉘)가 미국,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 상공에 등장했다. 웨버 대령(포레스트 휘태커)은 언어학 전문가 루이스 뱅크스 박사(에이미 아담스)와 과학자 이안 도넬리(제레미 레너)를 통해 외계 비행 물체(쉘) 접촉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18시간마다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는 외계 비행 물체(쉘) 내부로 진입해 정체 모를 생명체와 마주하게 되고, 이들은 15시간 내 그들이 지구에 온 이유를 밝혀내야 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생명체를 경계하며 방호복을 입는 지구인들과
지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벽을 친 외계 생명체들
12개의 외계 비행 물체가 지구 상공에 나타났다. 그들은 어떠한 물질도 전파 같은 것도 뿜지 않고 아주 조용히 그 자리에 떠있다. 그리고 마치 지구인들을 환영한다는 듯 18시간마다 문을 열고 유리 벽 앞에서 그들의 방문을 기다린다.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꽤나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지구인들은 유리벽을 보며 어쩌면 외계 생명체들이 외계 공기를 내뿜지 않기 위해 쳐놓은 ‘지구인을 위한 보호막’이 아닐까 추측한다.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며 지구인들에게 줄 선물을 들고 왔다는 외계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유리벽의 존재는 외계 생명체들을 위한 게 아닌 지구인들을 위한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외계 생명체들과 반대로 지구인들은 처음 보는 물체와 생명체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고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면역 주사를 맞고, 여러 겹의 방호복을 껴입는다. 경계와 불신, 긴장감 등으로 가득 찬 방호복은 퍽 무거웠고, 그 무게는 비행 물체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어색하게 만든다.
벽으로 막혀있는 우주선의 밑부분에서 이뤄지는 만남. 외계 생명체에게 질문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루이스는 그간 사람들이 하지 않았던 대범한 선택을 한다. 그는 “날 보여줘야 돼요.”라고 외치며 망설임 없이 방호복을 벗고 지구인의 그대로의 모습으로 외계 생명체들을 마주한다. 외계 생명체들과 지구인 사이에 있는 경계의 막(방호복)한 겹이 사라지고, 루이스는 처음으로 유리벽에 손을 맞대고 외계 생명체들과 인사를 한다.
경계를 내려놓고 이해를 시작하다
루이스는 미지의 생명체를 경계하기보단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문명, 언어를 이해하려 한다. 그는 이안과 함께 아직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생명체들에게 애봇과 코스텔로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루이스와 이안은 반복적으로 지구의 언어를 교육하고, 애봇, 코스텔로가 내뿜는 단어들을 기록하고, 이름을 부르며 그들에 대해 알아간다.
대화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코스텔로의 손을 통해 언어를 직접적으로 전달받은 루이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억에 시달리다가 이내 코스텔로가 남긴 말을 이해하고 자신이 보고 있는 건 기억이 아닌 미래의 일이란 걸 깨닫게 된다. 외계 생명체들은 문장의 앞, 뒤 규칙이 없는 특징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처럼 앞, 뒤 구분이 없는 시간을 살아간다. 원하면 미래를 볼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이들은 3000년 후 지구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며 지구인들에게 이 특별한 능력을 선물하기 위해 지구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의 시간을 선물받다
유일하게 선물을 받게 된 루이스는 딸 한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보게 된다. 눈물 나게 행복한 시간들이 이어지고, 행복했던 만큼 버거웠던 이별의 순간까지. 루이스는 결국 때 이른 비극으로 끝날 미래를 알면서도 한나를 만나기 위해 이안과 가정을 이루는 선택을 한다.
HANNAH. 앞부터 읽어도, 뒤부터 읽어도 똑같은 대칭어 한나. 코스텔로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선물한 첫날부터 시작된 한나와의 기억. 루이스는 행복했던 기억의 끝에서 다시 첫날로 돌아와 똑같은 선택을 반복한다. 그는 시간의 끝에서도 한나를 선택할 것이고, 기억이 시작된 시점(영화의 마지막)에서도 한나를 선택한다. 시작과 끝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루이스는 당연하게도 똑같은 미래를 선택한다. 이르고 슬프게 끝날 걸 알면서도 행복을 위해 커다란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사랑이고 인생인 걸까.
루이스는 새로운 모습의 언어로 전한 시간의 흐름을 통해 미래를 보고 섕 장군을 설득해 커다란 전쟁을 막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나와의 비극적 마지막을 함께 보게 된다. 외계 생명체가 전해준 시간의 흐름은 선물일까 아니면 슬픈 미래를 미리 알게 만드는 새로운 저주일까.
-
- 이름이 지워진 모두를 호명(號名)하는 영화 <갈매기>
[감독: 김미조 | 출연: 정애화, 이상희, 고서희, 김가빈, 김병춘 등 | 제작: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 제작지원: 롯데엔터테인먼트 | 배급/투자: ㈜영화사 진진 | 러닝타임: 74분 | 개봉: 2021년 7월 28일]
극의 초반부, 상견례장에 먼저 도착한 오복네 가족의 모습이 나온다. 그들이 앉아 있는 원형의 테이블은 가족을 떠나지 못하고 빙빙 맴돌아야만 하는 ‘오복’의 처지를 미리 일러두는 듯하다.
영화 <갈매기>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놀라운 성취를 거뒀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시장 상인 ‘오복’은 재개발 시위에 함께하는 사람들과 밤늦게 술을 마시다 성폭행을 당한다. 기묘하다. 흔히 재개발에 의해 삶의 터전이 빼앗길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약자로 도식화되는데 여기서는 그 안에서 또다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뉜다. 이는 젠더적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착취와 젠더적 착취를 이중으로 겪는다. ‘오복’ 역시 영화에서 개발논리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착취구조를 온몸으로 견뎌내는데, 여성에게는 그의 삶이 보편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또한 <갈매기>가 성폭력 피해를 이야기하는 방식의 윤리성은 다른 영화와 차별화된 지점이다. 영화는 ‘오복’의 성폭력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10초도 되지 않는 블랙아웃 화면이 전부다. 관객은 블랙아웃 화면 이후의 전개를 통해서만 성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오복’을 무기력한 피해자의 정형화된 모습으로 가두지 않는다. 평생을 가족에 헌신한 어머니 ‘오복’이 성폭력 피해를 당한 후 이를 오히려 자신을 돌보는 계기로 여기고 의연하게 결단을 하는 모습은 어머니 세대에 용기를 건넴과 동시에 성폭력 피해 경험자에 대한 보다 나은 영화적 묘사를 제시한다. 더욱이 가해자인 동료 상인 ‘기택’에게 별다른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영화는 ‘기택’의 가해 행위와, 행위 이후 시장 상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오히려 기세등등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는 그동안 성폭력 가해자에게 유독 너그러웠던 사회 인식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성범죄 이후를 바라보는 문제의식 역시 명확하다. ‘오복’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동료 상인들을 설득하고 회유한다. 그러나 증인으로 나서는 상인은 아무도 없고, 경찰도 ‘오복’에게 확실한 증거를 마련하라고 한다. 여기서 이상한 점을 느낀다. 다른 범죄의 경우 기소가 되면 가해자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유독 성범죄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의 삶까지 저버리지 않았던가. 또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드러난다. 특히 남편이 “성범죄는 여자가 응해야만 성립된다. 그것이 진리다.”라는 말을 툭 뱉는데 이런 사회의 잘못된 인식이 그간 여성을 성범죄 피해로부터 가두는 역할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집을 나서는 첫째 딸에게 ‘오복’의 남편이 옥상에서 인사를 하는 장면. 탁 트인 꼭대기에서 웃으며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는 가장의 밑에는 사각형의 창문에 포획된 채 어두운 표정을 한 ‘오복’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첫째 딸의 시선으로 부모를 올려다보는데 이것은 종합적으로 가부장제 자체를 상징한다. 이밖에도 서늘하게 표현된 ‘오복’이 김치를 써는 장면. 롱테이크를 적극 활용하여 현실감을 높인 점 등 촬영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은 ‘오복’이 가해자의 가게 앞에서 ‘나는 주오복 입니다’라고 적힌 호소문 피켓을 들고 1인시위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자신의 실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생각나는 엔딩이다. 삶의 한 축인 경제 공동체 ‘수산시장’과 그가 헌신으로 일군 ‘가족’이라는 운명 공동체 속에서 '오복'은 저마다의 필요에 의해 취해지고,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그는 이제 '나'를 챙기기 시작한다. 육지를 빙빙 돌던 갈매기 '오복'이 기어코 바다를 향하는 모습은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모두를 향한 생생한 호명(號名)이다.
-
- 유다: 어느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이야기: <나사렛 예수>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비교
영화「Jesus of the Nazareth」와 「Jesus Christ Superstar」비교 분석하기
영화「Jesus of the Nazareth」(1977)와 「Jesus Christ Superstar」(1973)는 모두 신약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전자는 예수의 전 생애를 다루고 있으며, 후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7일 전부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이 두 편의 영화는 예수의 공생애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형식, 그리고 성서와 성서 속의 인물들에 대한 해석의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말하자면 고전에 현대적 입맛을 약간 가미한 현대 클래식 음악과 고전을 철저하게 현대적 관점에 따라 과감하게 변용한 록 음악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두 작품은 성서라는 하나의 원형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를 각각 영화의 의도와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었다는 점에서 썩 재미있는 비교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영화를 감상함에 있어 중점을 두었던 것은 성서 속의 인물들이 각각의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달리 해석되었는가, 였다. 두 작품 모두 아주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수십 세기에 걸쳐 사랑받아온 예수와 온 세상 사람의 미움을 한 몸에 받던 갸롯 유다였다.
Jesus: 신의 아들이냐, 비극적 인간 영웅이냐!
먼저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해보자. 「Jesus of the Nazareth」의 예수는 성서 속 인물과 꽤 일치한다. 그는 거룩하고 자애로우며 자비심이 넘친다. 고통 받는 이를 위해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고 가르침을 설파한다. 제자들을 비롯한 백성들은 그의 숭고함에 매료된다. 이를테면 그는 ‘신적 존재’로서의 예수다.
반면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그려진 예수는 이와 닮아있으면서도 다르다. 그는 보다 ‘인간적’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린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열중한다. 그러나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많은 비탄 속의 백성들이 몰려들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권세와 소임을 버거워한다. 몰려드는 환자들에게 ‘Heal yourselves!’라고 외치는 예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하기 만한 성자로서의 예수와는 썩 다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러한 막대한 책임에 고통스러워한다. 창녀인 막달라 마리아의 무릎에 누워 유일한 위안을 청한다. 다소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도리어 그에게 인간적인 공감과 연민, 심지어는 친근함마저 느껴진다. 이를 통해 예수라는 존재와 관객 혹은 신자와의 거리는 더욱 좁혀진다.
예수는 또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하늘을 향하여(하나님에게) ‘왜 제게 독잔을 내리시나이까!’하고 원망한다. 죽음 앞에서 갈등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비극의 주인공과도 같다. 그는 예정된 죽음이라는 비극에 고통스러워하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비극을 내리는 주체인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결국에는, 자신의 운명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야기한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그의 이러한 모습들은 죽음과 삶 속에서 갈등하던 햄릿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Jesus Christ Superstar」에서의 예수는 단순히 인간의 껍질을 쓴 신적인 존재로서의 예수가 아닌, 신성성과 인간성이 양립하는 어떤 비극적 영웅으로서 재탄생한다.
Judas: 어느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이야기
한편 2천여 년의 세월에 걸쳐 악인으로 기록되어온 갸룟 유다에 대한 두 영화의 해석 역시 흥미롭다.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유다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성서 속에서 은전 30닢에 눈이 멀어 스승을 적에게 팔아넘긴 도적이었던 유다는 영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악인의 길을 택해야만 했던 실패한 이상주의자로 탈바꿈한다.
「Jesus of the Nazareth」에서의 유다는 예수의 신실한 제자로, 예수를 진심으로 따르고 사랑했던 인물이다. 어쩌면 그는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을지도 모른다.
극 중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장면을 보면 유다의 예수에 대한 갈망이 잘 드러난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다가, 이내 베드로가 "당신은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예수는 '네가 가장 복이 있구나'하고 베드로를 껴안는다. 이때 유다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베드로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 중 다른 누구도 아닌 유다가 말이다. 이후 카메라는 점점 그들을 멀리 비추고, 스크린 너머에는 예수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유다, 오른쪽에는 베드로라는 극명한 대비가 보여 진다. 하나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죽어서도 예수의 뜻을 이어받은 가장 거룩한 성인으로, 다른 하나는 예수를 배반한 배신자, 다시 말해 가장 사악한 악인으로 기록되니 무척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예수에 대한 유다의 시선은 흡사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의 그것과 닮아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스승인 예수를 향한 유다의 순수한 숭배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을까? 필자는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의 원인을 유다의 예수에 대한 ‘유아적인’ 애정과 지나치게 순진했던 이상에서 찾았다. 앞서 이야기했듯 유다는 예수에 대한 어떤 어린아이 같은 애정을 품고 있다. 그는 예수가 설파한 평화롭고 이상적인 세계 속에서 앞으로의 유대가 나아갈 방향을 찾았고, 그를 통해 이룩될, 해방된 유대를 그린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에 더욱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훌륭함과 거룩함을 증명해보이기를 바란다.
언뜻 그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보이나 사실 이는 무척 단편적인 발상이다. 어린아이가 제 아버지의 유능함을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만하다. 그의 시야는 좁았고 마음은 급했다. 한시바삐 유대의 평화적 해방을 도모하고 싶은데, 예수는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만 갔으니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그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학자 출신이었던 것은 이러한 견해에 박차를 가한다. 그가 극 중에서 이야기했듯 그는 ‘목수와 어부의 일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태어나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하는 예수의 범인류적 차원에서의 뜻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비단 유대백성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예수의 장기적인 안목을 유다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라’던 예수의 말씀은 유다의 그러한 사정을 여실히 드러낸다.
성서 속 유다의 악인으로서의 면모는 실제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제라’라는 새롭게 창조된 인물을 통해 대변된다. 「Jesus of the Nazareth」에서는 이러한 교활한 제라라는 인물을 통해 유다가 선인이었으며 제라를 비롯한 유대 제사장들의 음모에 넘어간 불쌍한 인물로 나타낸다. 예수가 잡혀가 채찍질 당하는 것을 본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은전 30닢을 돌려주겠으니 예수를 풀어달라고 간청하자 그를 조소하는 제사장들의 모습은 그가 철저하게 이용당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Jesus Christ Superstar」의 유다 역시 「Jesus of the Nazareth」에서 마찬가지로 유다를 동정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유다는 「Jesus of the Nazareth」에서보다 자신의 이상에 반하는 예수를 더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유다는 예수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몸을 닦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예수를 질책하는 한편, 예수의 존재로 인해 유대의 백성들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등, 다소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예수의 태도와는 대비되는 이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신적 존재가 인간적으로 그려지고 인간(그 것도 예수를 배신한 악인으로 알려져 있는)이 이성적으로 그려지는 아이러니는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앞서 「Jesus of the Nazareth」에서 유다가 선인으로 표현되기 위해 ‘제라’라는 인물이 삽입되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유다는 ‘신(Jesus)의 뜻에 의해’ 예수를 죽이게 된 운명을 타고난 불쌍한 인물로서의 자신을 어필한다. 으레 다른 성서를 기반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예수를 죽이게 된 죄책감으로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이때 "Poor Judas!"라고 외치는 앙상블이 울려 퍼진다. 이와 같이 영화의 전반에 울려 퍼지는 유다의 고뇌와 (배신의)결단, 그리고 후회 혹은 신에 대한 원망의 노래는 이러한 유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잘 보여준다.
막달라 마리아: 진실된 사랑을 행한 여성제자
이 밖에 성서나 「Jesus of the Nazareth」의 내용과는 달리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비중이 크게 다루어진 것 또한 인상 깊었다. 전자의 작품에서 다소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마리아는 후자에서 예수에게 가장 진심어린 위로와 위안을 주는 사람이자, 그에게 가장 진실 된 사랑을 느끼는 여인으로 승격된다. 그녀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사람이자, 여느 열두 제자보다도 예수를 믿고 따랐던 여성제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녀의 예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는데, 마리아가 수행한 여러 가지 역할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애정은 아마 신에 대한 신앙과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과 인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사랑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리라고 사료된다. 단순히 하나의 구체적인 감정으로 해석되기에는 그녀의 행동들은 다각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비교: 클래식과 록 오페라
두 작품의 형식적인 차이는 이러한 각기 다른 관점의 해석에 걸맞게 나타난다. 「Jesus of the Nazareth」는 기독교 문화를 전도함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성서의 내용을 살려 표현하고자 애썼다. 그리하여 영화는 장장 6시간에 걸쳐 다소 엄숙하고 거룩한, 그러나 예수의 위대함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려냈다. 이때 무조건적으로 성서의 내용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나서기 전에 약 하루 간 갈등하는 장면, 영화를 위해 창조된 인물인 제라, 선한 인물로서의 유다 등 영화적 장치와 현대적 재해석에 의한 약간의 변용이 나타난다.
한편, 「Jesus Christ Superstar」에서는 록 오페라의 이색적인 형식을 차용하여 보다 대중이 성서에 접근하기 쉽도록 성서의 내용을 각색했다. 흥겨운 노래와 춤들, 그리고 현대적 복장과 소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리로 가게끔 한다. 이 과감한 시도는 성서 속의 인물들에 대한 과감한 재해석과 맞물린다. 이때 「Jesus Christ Superstar」에서의 현대적 요소들(건축물, 소품, 복장 등)은 스크린 속에서 그려지는 세계가 현대의 이야기인지 과거의 이야기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데, 이는 분명히 의도된 장치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 흰옷의 입은 유다는 예수의 존재와 희생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이는 비단 예수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관객인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어떤 존재였으며 그가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닌 인물인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두 작품에서 나타난 예수와 유다에 대한 색다른 시각은 놀랄만하다. 두 작품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선과 악의 차원에서의 평면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성서의 이면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한번 상상해보자. 또 다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밖에도 성서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것은 서양 문화권에서 그만큼 기독교 문화가 깊게 뿌리 박고 있음에 기인한다. 수 많은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예수가 되기도 하고, 유다가 되기도 하며, 때론 막달라 마리아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 혹은 성서 그 자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은 서양 사회 전반을 즐겁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
- 땅덩어리로 파헤친 가족의 양면성
종종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 소재라서 그런지, 몰입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완성도가 훌륭하다 할 순 없지만, 넷플릭스 드라마 '선산'은 시청자들이 중도하차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기엔 괜찮은 작품이다.
'선산'은 교수 임용을 앞둔 윤서하(김현주)가 존재조차 잊고 지내던 작은아버지의 죽음 후 남겨진 선산을 상속받게 되면서 불길한 일들이 연속되고 이와 관련된 비밀이 드러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1년 전 이맘때 넷플릭스 영화 '정이'를 선보였던 이야기꾼 연상호 감독이 기획 및 각본을 맡았고, 연상호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했던 민홍남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방법', '괴이', '지옥' 등 한국형 오컬트로 두각을 드러냈듯, '선산' 또한 초반부에는 무속신앙을 앞세워 오컬트 뉘앙스를 풀풀 풍기며 보는 이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여기에 미스터리함을 몇 스푼 추가하며 분위기를 확실하게 조성했다. 윤서하 주변인들이 괴이하게 죽어나가고, 접신한 것인지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이복동생(김영호)의 존재, 그리고 피칠갑이 된 윤서하 집 현관문이 그랬다.
하지만 오컬트는 '선산'의 포장지에 불과했고, 포장지를 벗겨낸 뒤 드러난 진짜 알맹이는 '가족'이다. 인간이 세상으로 태어나 가장 먼저 마주하는 '사회'가 가족인데, 평소에는 안정적이지만 상속 등으로 인해 갈등과 분쟁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가족의 양면성과 상반된 모습을 본격 풀어낸다.
주인공인 윤서하는 유년시절부터 불안정한 가족 구조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가족'에 대해 끊임없이 갈구해 왔던 인물이다. 남편 양재석(박성훈)의 부도덕한 일을 알면서 감내했던 것도, 생전 처음 보는 이복동생과 상속 분할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음에도 그를 끝까지 밀어내지 못했던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이와 맞물려 이복동생 김영호의 가족사, 윤서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을 쫓는 형사 최성준(박희순)의 가족사까지 연이어 뻗어 나오면서 가족 이야기를 강화한다. 이번 작품을 통해서도 연상호 감독은 장르를 불문하고 '가족'을 이야기 주제로 삼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잘 모르는 '가깝고도 먼 가족' 이야기를 전달한다.
주제의식은 분명하나, 초중반에 비해 후반부에 다소 힘이 부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선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화를 입을 거라는 김영호의 기행이 반복될수록 호기심보다는 질리는 느낌이 강했고, 후반부 반전 카드로 숨겨둔 '금기' 패를 꺼내 보이는 방식을 등장인물의 구전으로 흘려 맥이 풀린다.
뒷심이 부족한데도 완주할 수 있었던 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과 여러 인물들의 숨은 사연, 자연스레 이어지는 메시지까지 세련되진 않아도 우직하게 틀을 잘 유지하면서 전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생동감 있게 불어넣는 배우들의 연기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중 극 전체를 잡아끌고 가는 김현주의 존재감은 믿음직스럽고, 특별출연이긴 하나 초반부 몰입도를 끌어올린 박성훈도 인상 깊었다.
★★★
-
- 계속 살아가겠습니다.
<그래비티>를 영화관에서 본 경험은 제겐 잊을수 없는 여러 경험들 중 하나입니다. 객관적인 영화의 완성도로 보자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작품들 중 <로마>를 넘을 수 있는 작품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 마음은 언제나 <그래비티>를 향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압도적인 롱테이크라던가 비유적인 이미지들과 같은 영상미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알폰소 쿠아론 감독 특유의 생명을 존중하는 카메라의 시선과 아픔을 딛고 새로이 태어나고자 분투하는 영화속 라이언 스톤 박사의 모습이 특히나 와닿았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던 그 시절의 저에게 용기를 준 소중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 자체에 대해서 할말이 많아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에 대한 감독론을 써보고 싶다는 소소한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지금 이 글에서는 <그래비티>만을 다루게 되겠지만요.
과거는 놓아주고, 다시 앞으로.
허블 우주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를 탐사하던 맷 코왈스키의 팀은 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위성의 잔해에 휩쓸려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탐사선은 망가지고, 맷 코왈스키와 라이언 스톤을 제외한 다른 탐사원들은 목숨을 잃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주복의 연료도 산소도 모두 부족한 상태. 살아남은 맷 코왈스키와 라이언 스톤은 지구로 되돌아갈 방법을 찾아봅니다. 수다쟁이인 맷 코왈스키는 긴장을 풀어줄 목적인지 라이언 스톤에게 끈질기게 말을 거는데, 그덕분에 라이언 스톤은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게 됩니다.
라이언 스톤은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게 됩니다.
“딸이 있었어요...4살이었죠. 학교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미끄러져서 머리를 부딪쳤죠.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어요. 연락을 받았을 땐, 운전중이었어요. 그때부턴 그것만 해요.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운전만 해요.”
라이언 스톤 박사에게 딸의 존재는 그녀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지구에서 발을 딛고 서있도록 만들어주었던 ‘중력’이었을 겁니다. 그런 딸을 잃은 라이언 박사는 더이상 지구에 발을 딛지 못하고, 무중력 상태의 우주로 떠나온 것이겠죠. 여기에서 눈여겨 볼만한 점은 라이언이 딸을 잃은 상실감에 빠져 있긴 했지만, 그 이유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공포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다
코왈스키마저 떠나보내고, ISS(우주정거장)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지칠대로 지친 라이언 스톤은 우주복을 벗고 몸을 웅크리는데 그 모습은 마치 태아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렇죠, 영화는 바로 이 장면을 통해서 라이언 스톤이 과거의 기억들을 놓아주고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상징적인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과 회한을 놓아주고, 라이언은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제 그녀는 삶을 부정하지 않고, 그 누구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 지구락 해도 다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Letum non omnia finit.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는다.)
라이언 스톤 박사는 이제 새롭게 태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필사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장난이라도 치듯이 어떤 기회를 보여주었다가 없애버립니다. 압도적인 공간, 불확실의 공간인 우주안에서 인간은 너무도 무력합니다. 우주뿐만아니라, 저 지구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력하여, 라이언 스톤의 딸처럼 정말 허무하게 죽어버리기도 하죠. 이 세계는 정말로 운명같은 것이 처음부터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것처럼, 인간이 원하는 바를 쉽게 이루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마침내 라이언 스톤은 삶의 장난과 같은 짓궂음에 지쳐버리고, 그녀는 어떤 거대한 운명앞에서 굴복하고, 탈출선안에서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포기한채로 죽음을 결심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앞에서 굴복하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탈출선의 해치가 열립니다.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알수없지만, 기적처럼 맷 코왈스키가 나타나서 보드카를 건네며 라이언에게 조언을 남겨주고 떠납니다.
자식 잃은 슬픔만한 게 어디있다고. 하지만 계속 가기로 했다면 끝까지 가 봐야지.
“알아. 여기에 영원히 남고 싶을 거야. 조용하니 혼자 있기에 좋고. 눈을 감으면 세상 모두가 잊혀지지. 여기엔 상처 줄 사람도 없고. 계속 살아봐야 뭐 별 거 있겠어? 자식 잃은 슬픔만한 게 어디있다고. 하지만 계속 가기로 했다면 끝까지 가 봐야지.”
라이언 스톤이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삶을 등지려는 순간. 기적처럼 나타난 맷. 라이언은 진정한 죽음앞에서 다시한번 삶을 생각하고 다시 삶을 향해 모험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다음 걸음을 내딛습니다. 라이언 스톤이 그녀의 다음 걸음에 예상되는 결과가 삶이든 죽음이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순간 삶도 죽음도 다시 그녀를 환대합니다.
삶은 언제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동반하고.
버튼 하나만 잘못 눌러도 죽을수 있는 상황입니다. 라이언은 그 아슬한 경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데, 사실 우리의 일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운전중 살짝 손이 미끄러지기만 해도 곧 큰 사고로 직결되고, 길을 걷다가도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위험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언제나 우린 다음 걸음을 예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다음 걸음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희망을 품고 다음 걸음을 계속해서 내딛는 것이기도 하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바에야,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 편이 나을테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바에야,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 편이 나을테니까요.
“내가 보기에 예상되는 결과는 두가지다. 무사히 착륙해서 멋진 모험담을 들려주거나 앞으로 10분 안에 불타 죽거나 어느 쪽이든 밑져야 본전이다! 어떻게되든, 엄청난 여행일 거다.”
텐공에 도착하여 착륙선을 찾아 간신히 언도킹에 성공한 라이언 스톤. 지구의 중력은 무자비하게 라이언 스톤이 탑승한 착륙선을 끌어당깁니다. 이제, 그녀의 말처럼 예상되는 결과는 상반된 두 가지의 결과입니다. 라이언은 웃으면서 이 상황을 받아 들입니다. 그녀는 무사히 지구에 도착하여 비로소 지구의 중력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라이언 박사는 지구에 무사히 도착하고 후련하게 웃으며 자신을 붙잡아주는 대지에 감사의 인사를 속삭입니다. 이윽고 당당히 중력에 맞서서 일어서는 라이언 스톤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며,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 새로이 태어나는 여정을 그린 영화 <그래비티>는 이렇게 끝납니다. 영화 <그래비티>는 태아가 세상밖으로 나오기 위해 애쓰는 것만큼이나 강렬하게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면 언제나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때때로 삶의 중력이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게가 무겁긴하지만, 그래도 그 중력덕분에 우리가 서있을 수 있고,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데미안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 [영화흥신소-아이스라떼극장] 심령사진촬영전문 사진작가 '셔터'
영화 흥신소 -(아이스)라떼극장 EP.05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공포영화를 보며 무더위를 날려버리자
뺑소니 교통사고를 저지른 후 카메라에 찍히는 귀신
어깨와 목이 뻐근한 게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데....
움짤 귀신등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던 태국산 호러영화 '셔터'
-
- 넷플릭스 <지옥> 공식 예고편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세상이 지옥이 되었다 이것은 살인인가 천벌인가 《지옥》 11월 19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
- 넷플릭스 <뮌헨 : 전쟁의 문턱에서> 공식 예고편
로버트 해리스가 집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원작의 영화. 1938년 가을, 전쟁의 위기에 내몰린 유럽.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준비하고, 네빌 체임벌린 정부는 절박한 심정으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중이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 뮌헨으로 향하는 영국 공무원 휴 레것과 독일 외교관 파울 폰 하르트만. 협상이 개시되자 두 오랜 대학 친구는 자신들이 얽히고설킨 정치적 음모와 거대한 위협의 정중앙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전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대가는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