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롬2021-04-11 15:25:43
괴물이라는 활로 쏘아올린 사회비판의 화살
<괴물> ⭐⭐⭐⭐
촬영
<괴물>은 주로 수평과 수직 관계가 많이 등장한다. 주로 등장하는 장면들이 괴물이 살고 잇는 하수구나 지하는 수평의 촬영으로, 높은 빌딩이나 괴물이 등장하는 다리 사이의 공간을 촬영할 때는 수직의 촬영을 이용하여 보는 이가 괴물의 위압감이나 등장 전의 긴장감을 이어가는 중요한 포인트를 촬영이 짚어준다.
비
'비' 라는 존재는 어떨까 생명의 힘이 깃들고 차분해지는 이미지도 있다마는 이 영화에서는 신비롭고 영롱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어둡고 잔잔한 분위기에서 괴물이 깜짝 등장했다고 생각해보자. 공포나 긴장감이 두 배로 나올 것이고, 괴물이라는 소재에 은연히 드러나는 사회 비판에 대한 어두움을 표현하기에 비 만큼 어울리는 배경은 없을 것이다.
사회비판
처음에 봤을 때는 그냥 괴물에 맞써 싸우는 가족들의 사투와 애환에 관한 내용일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유쾌하면서도 묵직하고 예민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걸 영화를 다 보고 깨닫게 되었다. 한강에 독극물을 타는 초반 시퀀스는 실제로 2000년에 있었던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을 생각내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밖에도 정부의 미흡한 대처능력과 괴물이라는 소재가 아니라도 충분히 갈등이 벌어지는 문제들을 <괴물>에서 표현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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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콜라이트 | 옛것을 버리고 쌓은 공허한 탑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은하 제국 수립 100년 전, 수백 년간 평화를 유지한 제다이 기사단과 은하 공화국. 하지만 제다이 마스터 '인다라'(캐리앤 모스)를 순식간에 죽인 암살자가 등장하면서 평화는 곧장 깨지고 만다. 제다이 마스터 '솔'(이정재)의 제자였던 파다완 '오샤'(아만들라 스텐버그)가 암살자라는 증거가 나온 것. 이에 솔은 제자 '제키'(다프네 킨), 제다이 기사 '요드'(찰리 바넷)와 함께 직접 오샤를 찾아 범행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수사에 돌입한다.
어렵지 않게 오샤의 신원을 확보한 솔.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제다이 마스터 '톨빈'(딘찰스 채프먼) 또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진짜 암살자는 오샤가 아님을 깨닫는다. 솔은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오샤의 쌍둥이 자매 '메이'의 소재를 찾아 나서고, 그 과정에서 오샤와 메이 쌍둥이를 조종하는 흑막, '낯선 자'(매니 자신토)의 존재와 음모를 깨닫는다.
어설픈 온고지신
디즈니의 루카스필름 인수 후 <스타워즈> 시리즈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중 특히 '신(新)'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인다. 시리즈의 상징인 제다이, 광선검, 스카이워커 가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 제다이도 아니고 포스도 못 다루는 평범한 이들이 주인공인 <안도르>가 대표적이다. <오비완 케노비>나 <아소카>처럼 제다이가 등장한 작품에서도 시리즈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정재가 제다이 마스터 '솔'로 캐스팅되어 화제를 모은 디즈니+ 드라마 <애콜라이트>도 마찬가지다. 프리퀄 시리즈 이전 시간대를 배경으로 삼아 세계관을 확장했다. 비록 외견상으로는 제다이 대 시스라는 익숙한 구도를 답습했지만,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절대 선과 악이었던 제다이와 시스를 새롭게 해석했다. 작품 외적으로도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인다. 동양인과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등장시키며 변화의 의지를 강조했다.
하지만 <애콜라이트>의 시도는 반쪽짜리다. '스타워즈스럽지 않은'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지만, 정작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스타워즈다운'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 괴리의 중심에는 흥미로운 장르, 소재와 주제를 선택하고도 이를 풀어낼 역량이 없음을 증명한 어설픈 서사와 캐릭터가 위치한다.
서스펜스도, 반전도 없는 미스터리
<애콜라이트>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장르다. 드라마의 메인 플롯은 예상과 달리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한다. 암살자 메이는 네 명의 제다이 마스터를 죽이려 하고, 제다이 마스터 솔과 그의 과거 제자였던 오샤가 그녀의 뒤를 쫓는다. 그 과정에서 메이와 오샤의 관계, 그들과 솔의 악연, 제다이를 무너뜨리려는 시스의 음모가 모습을 드러낸다. 심지어 절대 선이었던 제다이의 어두운 이면까지도.
이렇게만 보면 긴장감과 몰입도를 높이기에 최적화된 소재다. 특히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제다이가 갖는 위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제다이는 압도적인 무력과 지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 제다이를 손쉽게 제압하고 죽이는 암살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반면에 <애콜라이트>는 기대와 다르다. 템포는 전반적으로 느슨하고, 스토리텔링의 긴장감도 부족하다.
그 이유는 미스터리에서 찾을 수 있다. 마지막까지 숨긴 결정적인 사건의 진상이 메시지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애콜라이트>의 핵심 주제는 제다이의 과오다. 그간 절대선으로 묘사된 제다이도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고, 오히려 그들로 인해 악이 탄생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극 중 등장한 시스, 오샤와 낯선 자 모두 제다이 출신으로 밝혀진다. 즉, <애콜라이트>는 평면적인 제다이 대 시스의 구도에 균열을 내려했다. 그 일환으로 드라마는 솔과 그의 동료들이 마녀 집단과 충돌해 집단 인명 살상을 초래한 사건을 제다이의 과오로 제시한다.
그런데 정작 후반부에서는 이 사건이 제다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들이 마녀 집단을 경계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들이 포스를 남용해 생명체를 직접 창조했다는 증거도 찾았고, 어린아이에게도 포스를 활용한 위험한 의식을 행했기 때문. 즉, 사건의 진상을 알면 알수록 제다이들의 행적에 개연성이 생기고 전체적인 극의 설득력은 오히려 낮아진다.
무너진 캐릭터
장르적 쾌감을 못 살린 각본은 캐릭터의 매력도 함께 무너뜨린다. 사건에 관련된 제다이들은 극도의 죄책감을 호소한다. 톨빈은 명상에만 몰두하고, 켈나카는 고향 행성에 몸을 숨긴다. 솔도 오샤와 메이 자매에게 거듭해서 용서를 구한다. 그런데 상술했듯이 극 중 묘사만 놓고 보면 그들의 행동이 그 정도 잘못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정재를 비롯한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제다이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는 이유다.
무엇보다도 극의 중심을 맡아야 할 오샤와 메이마저 일관성이 부족하다. 이들은 제다이와 마녀, 제다이와 시스 사이에서 방황한다. 제다이의 이면과 어두움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인 셈이다. 그런데 정작 이들의 서사는 진행될수록 극의 완성도는 낮아진다. 평면적이고, 개연성도 부족하고, 설득력마저 부족하기 때문.
우선 오샤는 밝은 겉모습으로 애써 감췄던 좌절감과 분노가 폭발하자 시스에 합류한다. 아버지처럼 따랐던 스승 솔이 가족이자 친구였던 마녀들의 죽음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문제는 그녀가 솔을 비롯해 요드나 재키 등 여러 제다이를 죽인 낯선 자의 설득에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 6화에 걸쳐 과거의 인연과 애틋한 감정을 보여주다가 불과 한두화 만에 그녀의 변심과 타락을 그려낸 까닭이다.
이야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메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제다이와 마녀들이 대립한 원인 중 하나였다. 제다이가 마녀들을 몰살했다는 오해의 씨앗을 심은 인물이었고, 더 나아가 낯선 자와 시스가 오샤에게 접근할 기회도 제공했다. 하지만 정작 메이의 목적은 명확하지 않다. 그녀는 어머니와 마녀 일족의 복수를 일관되게 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확고하게 시스로 타락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 <애콜라이트>는 응집력마저 잃는다.
옛 것을 태우는 온고지신?
이처럼 장르적 쾌감도, 캐릭터의 매력도 살리지 못하다 보니 <애콜라이트>의 방향성에도 덩달아 물음표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스타워즈>라는 프랜차이즈의 핵심은 제다이와 시스라는 명확한 선과 악의 충돌이다. 이때 선악의 대립은 인간적인 감정의 유무도 포함한다. 즉, 제다이와 시스는 단순한 선과 악을 넘어서서 인간적인 감정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를 내포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프리퀄 시리즈에서 팰퍼틴이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다스 베이더로 타락시킬 때, 그는 온갖 모략과 속임수를 동원했다. 아내 파드메를 향한 아나킨의 사랑마저도 그를 조종하기 위한 지렛대에 불과했다. 반면에 클래식 시리즈에서 아나킨의 아들이 루크는 아버지를 향한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그를 다시 제다이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애콜라이트>는 이 구도를 무너뜨렸다. 시스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더했다. 낯선 자는 자기를 배신한 메이를 처단하는 대신 오히려 이해심과 관용을 발휘한다. 심지어 그와 오샤는 마치 연인 같이 보인다. 이제 시스 군주와 제자의 관계는 팰퍼틴과 다스 베이더처럼 비인간적이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애콜라이트>의 재해석은 지난 수십 년간 시리즈를 지탱한 근간과 설정을 간과한, 다소 과한 시도 같다.
시즌 2는 기다리겠지만...
다행히도 <애콜라이트>에게는 시즌 2를 기대할 수 있는 확실한 장점이 하나 있다. 바로 액션이다. 사실 루카스필름이 디즈니에 인수된 이후로 <스타워즈>의 상징인 라이트세이버 액션이 예전 같지 않다는 비판은 지속되어 왔다. 본편인 시퀄 시리즈뿐만 아니라 <오비완 케노비>나 <아소카>처럼 제다이 비중이 높은 드라마에서도 라이트세이버 액션 연출이 20년 전 프리퀄 시리즈보다 퇴보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애콜라이트>는 다르다. 광선검이라서 가능한 화려한 움직임을 살려 오랜만에 <스타워즈> 명성에 걸맞은 액션 시퀀스를 만들었다. 마지막 화에서 솔과 낯선 자가 1 대 1로 겨룬 결투 장면이 대표적이다. 절제하면서도 유려한 움직임을 보여준 솔과 쌍검을 휘두르며 변칙적인 수를 두는 낯선 자의 차이점이 보는 재미를 극대화했다. 5화에서 낯선 자와 제다이들이 펼친 전투도 놓칠 수 없다.
예상치 못한 카메오의 등장도 시즌 2를 향한 기대감을 간신히 유지시킨다. 팰퍼틴의 스승으로 알려진 다스 플레이거스가 <스타워즈> 시리즈 역사상 처음으로 영상 매체에 등장했고, 가장 유명한 제다이 중 하나인 요다의 뒷모습도 나왔다. 과연 실망스러웠던 각본과 캐릭터의 완성도를 두 인기 캐릭터의 합류로 해결할 수 있을지. <애콜라이트> 시즌 2의 관건이다.
Poor 형편없음
진정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은 '고'를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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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추억은 어떻게 사람을 살게 하는가? <로봇드림>
살다보면 차마 잊히지 않는 인연들이 있다. 지나가버린 세월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각별한 사람과 그와 공유했던 시간들은 우리 뇌리에 오래도록 남는다. 추억 속에서 그들은 눈부시고, 우리는 때때로 '그'가 아니면 다시는 누리지 못할 행복을 가늠하곤 한다. 우리는 그때와 같은 경험을 다시는 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그게 우리를 아쉽게 한다.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우리는 어쨌거나 새 인연을 만나 새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나가 버린 추억은 무가치한 것인가? 그저 흘러가버린 인연은 우리 안에 무엇으로 남는가? 영화 <로봇 드림>은 우리가 흘려 보낸 수많은 인연과 삶의 단편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개'는 번화하지만 외로운 대도시에 사는 시민 중 하나다. 그는 외롭다. 그 많은 시민들 중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외로우신가요?'
어느날 텔레비전 광고는 그에게 묻는다. 그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반려 로봇을 들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연인은 조각한 피그말리온처럼 '개'는 반려 로봇을 조립한다. 로봇은 완벽하다. 그는 가장 순수한 눈으로 '개'를 바라보고, '개'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보다 더 절묘한 파트너는 없을 것만 같고, 둘에게 찾아온 찰나같은 여름은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나 운명은 잔혹하고, 둘의 행복은 지속되지 못한다. 바다에서 논 것이 무언가 잘못된 걸까? 즐거운 물놀이 후 로봇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개'는 고철로 된 친구를 해변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로봇을 되찾아오겠노라 다짐하지만, 여름철이 지난 해변은 입구를 걸어 잠갔고, '개'와 로봇은 단절되고 만다. 나중에 다시 여름이 오고, 해변이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로봇은 자취를 감춘 후다. 영원할 것만 같던 우정이 한순간에 스러지고 만 것이다. 이별은 예고없이 들이닥친다. 둘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운명이란 으레 그런 것이므로.
이별은 괴롭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도록 둘은 끝없이 서로를 그린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자꾸만 어딘가 삐걱거리는 것만 같다. 그럴수록 서로가 보고 싶다. 재회의 기쁨을 상상할수록, 오늘의 고독은 선명해진다. 다시는 그런 인연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도 싹튼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 야속하게도 그렇다.
결국 새로운 인연은 오고 만다. 로봇은 그저 고철로 마감될 수 있었던 그의 삶을 구원한 새로운 가족을 만났고, 개는 새로운 반려 로봇을 들인다. 그러는 사이 둘은 참 많이 변했다. 이별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삶도 저마다의 길을 따라 나아가버린 탓이다. 다시 봄이 왔고, 로봇은 스쳐지나가는 옛 인연을 알아보지만, 그의 손을 잡는 대신 그를 떠나 보낸다. 그와 함께 들었던 노래 한 곡과, 그 언젠가 나누었던 진실한 감정을 되새기면서.
My thoughts are with you
Holding hands with your heart to see you
Only blue talk and love
Remember, how we knew love was here to stay
Now December found the love that we shared in September
Only blue talk and love
Remember, the true love we share today
난 늘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과 한 마음이 되어서.
진한 농담과 사랑 뿐이었지만
기억하세요, 사랑이 지속될 거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제 12월이 되었고 저는 우리가 9월에 나누었던 사랑을 찾았어요.
진한 농담과 사랑 뿐이었지만
기억하세요, 오늘 우리가 나누는 진정한 사랑을.
지나간 추억은 오즈의 마법과도 같다. 그것은 찬란하지만, 우리가 추억하는 방식 그대로 재현되지는 못한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의 속성이 본디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나가버린 세월과 시간들은 무가치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그 향그러운 추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보다 성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중 로봇과 개가 그랬듯, 우리는 그 찰나 같은 기쁨으로 말미암아 살아갔을 것이다. 그 기쁨을 알기에 우리는 그것을 나눌 줄도 알게 되었을테고, 그 지나간 인연과 함께 하며 저질렀던 몇몇 실수들은 우리를 더욱 조심스러워지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인연을 만났을 때, 그를 더 소중히 여길 줄도 알게 되었으리라. 그러니, 이미 지나가버린 옛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유의미하다. 로봇이 개를 더는 붙잡지 않고 그를 그저 떠나보낸 것은 그가 이러한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이 이야기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경험과 정서를 생생하게 담음으로써 보편성을 가진다. '개'를 통해 드러나는 ;지독한 고독에 시달리며 나의 완벽한 이해자를 그리는 개인'의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또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언젠가 매스컴을 타던 강아지 로봇 '아이보'를 떠올렸다. 부품이 절판되어 다시는 회생시킬 수 없어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는 그 반려 로봇들 말이다. 나는 또한 로봇과 개의 관계를 통해 우리 세계의 개와 인간의 모습을 연상했다.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개가 근원적인 고독을 이기지 못해 반려 로봇을 들인다는 설정은, 우리 인간이 개에게서 애정과 위안을 받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작중 반려 로봇들이 그 사회에서 받는 취급 역시 우리 사회의 '반려 동물'이 처한 현실과 닮아 보였다. 결코 우리 사회에 주류가 되지 못하는 소수자들의 삶도.
작중 '개'는 250불짜리 연 대신 70퍼센트 할인되는 연을 사야하며, 싸구려 맥앤치즈로 끼니를 떼우고 단칸방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의 주머니 사정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그는 또한 친구를 사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는 보통 사람들 사이에 쉽게 섞여들지 못하고 스스로 친구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의 평안과 행복은 스스로 만든 ' 갈라테이아'에 의해서만 영위된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사리 찾은 인연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단절되고 만다. 개가 아닌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로봇은 그저 고철에 불과하고, 로봇은 토끼, 악어 등의 타인에 의해 처절하게 이용당하고 만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들에서 수많은 현실적인 장벽에 의해 와해되고 무너져 내리는 성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 마이너리티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비극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둘은 서로가 아닌 인연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새 사람은 온다. 흔치는 않지만, 어떤 사람은 온전히 고립된 또 다른 개인에게 기꺼이 손 내밀기도 한다. 그것은 가장 소박하지만 견고한 연대이자, 사랑이다.
사람은 참 외롭다. 오늘날처럼 개인과 개인의 삶이 단절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사리 만난 인연이 더 소중하고, 그래서 이미 지나쳐 버린 인연에 대한 미련도 쉽사리 버리지 못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외로운 삶은 끝없는 부침을 맞는다.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사이 우리는 때때로 행복하고, 때때로 비참하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삶의 속성이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제의 좋았던 날들에 너무 빠져들 것도 없고, 조금 전의 나쁜 일에 잠겨들 필요도 없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오늘과 내일은 온다. 우리는 우리가 맞이할 그 많은 순간들을 어떻게 하면 충실히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그렇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오늘 좀 덜 충실하면 어떤가? 내일 조금 더 충실하면 된다. 내일이 영 시원찮으면 모레에는 그보다 올라갈 길이 많으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부침 속에서, 자꾸만 밀려드는 그 파도와 해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요트를 타고서 돛을 올릴 뿐이다. 요트가 없으면 뗏목이라도 타면 된다. 그게 없으면 헤엄이라도 치는 것이다. 그러다 힘들면 남의 배 좀 얻어 타고, 가끔 외딴 섬을 만나면 거기서 몸도 좀 말리고, 나처럼 외롭고 처량한 사람에게 기꺼이 손도 내밀고. 그런 좋은 추억과, 소박한 연대가 서로 엮이다보면 인연은 오고, 해는 떠오른다. 우리는 다시금 그 햇발 아래 살아가게 된다. '개'와 '로봇'이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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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연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내가 빠져든 건 네 찬란함일까, 젊음일까”
1950년대 멕시코시티, 미국에서 도망친 뒤 마약과 알코올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작가 리. 함께할 수 있는 상대라면 누구든 상관없었던 리는 태양아 마지막 열기를 태워내며 타오르는 오후에 아름다운 청년 유진을 만나 첫눈에 빠져든다.
“그렇게 다정하게만 대해줘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나에게 내린 저주
리는 자신이 퀴어인 것은 ‘저주’라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 화면, 조각처럼 전시된 여성의 신체를 바라보며 되뇌는 환상, “나는 퀴어가 아니야.”. 어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유랑한다. “이제 갈게”는 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다. 리는 같이 하룻밤을 보내고, 곁에 있어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퀴어, 남들과 다르다는 자신의 ‘이상함’을 견디지 못한 채 고독 속을 버텨낼 뿐이다. 그리고 그 고독함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때문에 알코올 중독, 아편 중독으로 범죄가 되는 국가에서 도망쳐 살아간다.
육체적 접촉 행위가 아니라면, 타인과 연결된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리는 성관계에 집착하고, 그 이외의 시간은 술과 약물로 버텨낸다. 그 고독한 삶 속에서 리의 바람은 단 하나, ‘텔레파시’이다.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다. 말이 아닌 존재 자체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리의 꿈이다. 그래서, 신비의 약물 ‘야헤’를 찾아간다. 진정한 연결 찾아서. 그렇게 리는 유진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모든 비용을 대줄 테니 자신과 함께 야헤를 찾아 여행을 떠나자고. 그리고 단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다정하게 대해달라고. 유진이 없으면, 완전히 무너질 준비가 된 리는 마지막 희망에 매달린다.
진정한 연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둘은 야헤와 의식을 통해 ‘텔레파시’ 그 이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리는 알고 있음에도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유진의 고백을 듣는다. “나는 퀴어가 아니에요.” 유진은 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알아.”라고 담담히 말하는 리. 리의 사랑은 일방적이다. 유진은 리를 사랑할 수 없다. 어쩌면,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는 부유한 중년 남성을 통해 스스로는 닿을 수 없는 자본주의적 세계를 경험을 해보려는 것뿐이다. 여행을 제안한 순간부터, 아니 사실은 첫날밤에서부터 리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는 유진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유진에게 빠져든 건 그의 젊음도, 그의 찬란함도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마지막 희망일 것이다. 결국 리는 죽을 때까지 유진을 지켜보고,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옭아매던 유진의 형체에 권총을 겨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리를 보며, 관객은 두 겹의 감정 사이 놓인다. 노인이 될 때까지 유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리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죽음을 통해 마침내 정서적 해방에 도달했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영화는 말한다. 텔레파시를 넘은 진정한 연결, 그곳은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고.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도 고독과 공허는 결국 채워지지 못한다고. 그리고, 나 자신이 퀴어라는 감정은 성 정체성에 관계없이 모든 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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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K-콘텐츠 시대, 어린이는 어디있나>
날이 갈수록 전세계에서 K-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 오징어게임,웹툰 등 전세계인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들어
많은 영향을 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게 있다.
내가 가본 문제적 포럼에서는 어린이들이 혐오받지 않고 앞으로의 선정적인 미디어의 대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나 보호받는 사람들을 회화화 하거나 웃음거리로 대두되지 않게 어린이들이
배워야할 미디어 교육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인터넷에서 잼민이,노 키즈존,맘충같은 혐오 표현으로 인해 아이들이 또 다른 혐오 표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해외에는 백인 중심으로 돌아가던 미디어 매체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디즈니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인종과 성적 취향이나 남녀 구분을 떠나서 최근에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사회적 약자나
성 소수자 그리고 흑인이나 동양인을 주인공이나 캐릭터로 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남녀 갈등이나 차별과 혐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도라에몽에 나오는 노진구를 괴롭히는 퉁퉁이부터 힘쎈 남자의 우월감을 돋보이게 만들듯이
남자는 힘이 쎄야 한다,울거나 약하면 안된다는 인식으로 대중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고
여자는 무조건 보호받아야 하고 가련해야 된다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단순히 PC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지향하자는게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아이들도 미래에는 성인이 되고 자신이 추구하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나오는 사회적 약자들을 비하하는 유튜버들의 모습에서 어린이들이
과연 혐오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길 수 있을까?
스마트폰 이용시간이 많은 아이들에게 콘텐츠는 새로운 학습방식을 배우고 표현하는 곳이다.
미래에는 아이들이 자신이 접한 미디어 콘텐츠들을 어떻게 활용할까?
우리는 답을 모르기 때문에 애매모호하게 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콘텐츠의 중요성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21세기는 스마트폰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렇기에 한번쯤은 지금의 수많은
콘텐츠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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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나 있을 법한 현실적인 가족 이야기, 영화 '남매의 여름밤'
“빨리 내 방으로 와 봐! 급해!”
“왜?”
“불 좀 꺼줘^-^”
남매들의 밤은 항상 치열하다. 서로 아웅다웅 괴롭히고 못 살게 군다. 사실 남매라는 관계는 형제나 자매에 비해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해님 달님' 속 오누이 같이 다정한 사이가 있는 반면, 좋아하는 게 달라서 서먹서먹하거나 얼굴만 봐도 으르렁 거리기도 한다. 때론 자신의 남매보다 ‘엄마 아들’ 혹은 ‘아빠 딸’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릴 때도 있다. 제목부터 이렇게 복잡한 단어를 넣은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그들을 어떤 관계로 그리고 있을까?
영화 ‘남매의 여름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아빠(양흥주)와 함께 작은 지하방에서 살던 남매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는 할아버지(김상동)가 계시는 2층집에서 방학을 보내게 된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고모(박현영)까지 같이 지내게 되며 한 지붕 아래 두 남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제24회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감독 조합상, 시민 평론가상, 넷팩상, KTH상을 수상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이후 제49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밝은 미래상 수상,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상 수상, 제8회 무주 산골영화제의 대상으로 불리는 뉴비전상을 연이어 휩쓸었다. 평론가의 선택이 반드시 관람할 이유가 되지 않지만,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관객들이 공감할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현실적인 가족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보면, 흠칫 놀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느 집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 법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가족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관계를 현실감 있게 묘사했다. 연로하신 할아버지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아빠, 가출한 고모, 질풍노도의 시기가 시작된 ‘옥주’, 세상 물정 모르고 해맑은 막내 동주’까지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대화하고 행동한다.
영화 속에서 여러 차례 밥 먹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수저를 건네는 모습이나 ‘콩국수 동주한테 덜어줘.’, ‘이거 맛있다,’ ‘포도가 햇빛을 많이 받아서 달아요.’ 등의 대사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인물 위주가 아닌 식사 장면 전체를 촬영해서 실제 가정의 식사시간을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사용된 할아버지의 생신 축하 장면은 핵심 장면으로 꼽힐 만큼 가족 간의 소중한 순간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남매의 여름밤’의 윤단비 감독은 영화의 첫 시사회에서 식사 장면에 대한 질문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식사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고, 말 그대로 가장 일상적인 식사 장면을 담고 싶었다. 옥주의 가족이 처음 할아버지의 양옥집에 왔을 때는 주방에서 고모가 왔을 때는 거실에서, 동주와 옥주는 2층에서 식사를 하는데 가족들이 어떤 위치에서 식사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라고 답했다.
영화의 배경인 할아버지의 2층 집도 현실적이다. 담금주와 각종 살림살이가 쌓여서 창고가 된 작은 방과 오래된 재봉틀은 그곳의 세월을 가늠케 한다. 인천에서 어느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을 빌려 촬영했으며, 영화의 시나리오도 집에 맞춰 일부 수정했다고 한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할아버지 집 마당은 관리 안 된 텃밭이 있는 걸로 설정했지만, 촬영 장소에 맞춰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추억을 쌓는 하나의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시간적 설정인 ‘여름’의 분위기가 한층 강조되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선 14살 ‘옥주’
영화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자체는 극적이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자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처럼 영화의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정리된다. 화면도 감성적인 색감을 사용해서 따뜻한 느낌을 준다. 담담하게 그린 가족의 일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공감을 느끼게 하고 잔잔한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이 담백한 표현 방식에는 주인공 ‘옥주’의 영향이 크다. 주요섭 작가의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서 어른들의 복잡한 관계를 순수한 아이의 시선에서 담아낸 것처럼 ‘남매의 여름밤’도 마찬가지다. 14살 ‘옥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어른들의 현실적 어려움이나 불편한 상황이 많은 부분 생략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옥주’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있다.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마냥 즐거운 아이이자 또래 친구들처럼 외모와 이성에 관심을 갖고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한 사춘기 소녀다. 하지만 어른들의 미묘한 관계를 눈치채고 그들의 대화를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옥주’는 어른의 세계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몰랐던 진실이 밝혀지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변화를 겪으며 관계와 감정에 혼란을 느낀다.
당신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앞으로도 ‘옥주’네 가족은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옥주’와 ‘동주’는 계속 싸울 거고 아빠와 고모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껄끄러운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러면서 괜한 자존심과 미안함에 부끄러운 모습을 숨길게 분명하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그들은 같은 식탁에 앉아 별 거 아닌 이야기에 함박웃음을 지을 것이다. 내면의 민낯까지 솔직하게 보여주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지내던 여름밤처럼 말이다. 어느 가족의 현재이자 추억할 과거, 견뎌야 할 미래인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보며 가족의 의미를 고민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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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의 속도로 걷다 보면
스물한 살, 휴학계를 내고 삼십만 원 정도 하는 자전거를 샀다. 다이소에서 대충 물건을 사들고 나와 어설프게 장비를 꾸려 길을 떠났다. 5개월 정도 이어진 전국 자전거 여행의 야심 찬 출발은 이렇게 허술했다. 6월 말, 장마의 시작과 함께 30킬로 가까운 짐을 이고 바퀴를 굴릴 수 있었던 것은 스무 살의 패기와 에너지로만 가능했던 무모한 도전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내리쬐는 태양, 올라오는 아지랑이에 수십 번 돌아갈까 고민하며 느릿느릿 무거운 공기를 뚫고 작은 마을을 지나갈 때였다. 저기 멀리서 어떤 사람이 걸어오길래 동네 분인가 생각하며 무심코 지나가는데, 서서히 한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게 그을린 팔다리, 흰 민소매를 입고 씩씩하게 걷는 청년의 까만 백팩 위에 ‘국토대장정’이라고 쓰인 빨간 깃발이 작게 휘날리고 있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엄지를 치켜세우자, 그 청년도 밝게 웃으며 ‘엄지척’으로 인사를 되돌려주었다. 알 수 없는 기쁜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한동안 서로의 인사를 되새기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발을 굴렀다.
하루에 길게는 120킬로 이상까지 자전거를 타고, 도저히 발이 떼어지지 않아 엉엉 울면서 억지로 끌기도 했던 날들. 폭우를 뚫고 초등학교 운동장 정자에서, 공원 화장실에서 말 그대로 지붕만 있으면 짐을 풀고 하룻밤을 보내던 당시의 기억들. 그때의 영상들은 희미해지지도 않고 여전히 나의 몸 어딘가 남아, 장마가 시작되면 다시금 눈앞에 펼쳐지곤 한다. 그럴 때면 그 청년의 하얀 건치 미소가 함께 떠오른다. 자전거에 의탁해 그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나아갔겠지만 나는 항상 필요 이상으로 무거운 짐에 휘청거렸기에, 그때 그 모습이 살짝은 부러웠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그 청년도 나를 보면 그랬겠지..) 악명 높은 한계령과 미시령을 넘으며 어느 순간 무거운 짐을 하나둘 덜어내고, 제주도에 도착해서 동고동락한 자전거를 내려놓으면서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며 걸을 수 있었다. 목적지까지 다 오고 나서야, 나만의 속도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행복의 속도>는 잠시 10년 전의 사진을 들춰보도록 한다. 자전거의 속도로 담지 못하는 절경이 아까워 멈춰 서야 했던 그때의 나처럼, 감독 역시 자신이 담아낼 장소가 숨 쉬는 매 순간을 아쉬워한 듯하다. 그곳을 가장 느린 속도로 걷는 이의 눈으로 ‘오제 국립공원’의 사계를 담은 것을 보면.
이곳을 매일같이 걷는 이들은 봇카 <ぼっか>라고 불린다. 생소한 일본어 직명에 궁금해져 사전을 찾아보니, ‘걸음 보(歩)’에 ‘멜 하(荷)’자를 써, 도보로 짐을 지고 운반하는 사람, 특히 일본 중부 산악 지대의 산장에 물자를 운반하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한다. 이들은 많게는 70킬로 이상의 짐을 메고 해발 1500m에 위치한 372㎢ 달하는 자연공원의 유일한 통행로인 목도(木道)를 지나 자신들을 손꼽아 기다릴 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일찌감치 겨울이 찾아오고 또 느리게 물러가는 오제의 설원. 그 위에 가장 먼저 발자국을 남기는 이도, 또 등 뒤로 잠시 멈춰있을 그곳에 안녕을 전하는 이도 봇카들이다. 그들의 삶의 주기는 다채롭게 변하며 생명력을 뿜어내는 오제의 숨결과 함께 일궈진다.
이곳을 매일같이 걷는 이들은 봇카 <ぼっか>라고 불린다. 생소한 일본어 직명에 궁금해져 사전을 찾아보니, ‘걸음 보(歩)’에 ‘멜 하(荷)’자를 써, 도보로 짐을 지고 운반하는 사람, 특히 일본 중부 산악 지대의 산장에 물자를 운반하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한다. 이들은 많게는 70킬로 이상의 짐을 메고 해발 1500m에 위치한 372㎢ 달하는 자연공원의 유일한 통행로인 목도(木道)를 지나 자신들을 손꼽아 기다릴 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일찌감치 겨울이 찾아오고 또 느리게 물러가는 오제의 설원. 그 위에 가장 먼저 발자국을 남기는 이도, 또 등 뒤로 잠시 멈춰있을 그곳에 안녕을 전하는 이도 봇카들이다. 그들의 삶의 주기는 다채롭게 변하며 생명력을 뿜어내는 오제의 숨결과 함께 일궈진다.
이곳을 매일같이 걷는 이들은 봇카 <ぼっか>라고 불린다. 생소한 일본어 직명에 궁금해져 사전을 찾아보니, ‘걸음 보(歩)’에 ‘멜 하(荷)’자를 써, 도보로 짐을 지고 운반하는 사람, 특히 일본 중부 산악 지대의 산장에 물자를 운반하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한다. 이들은 많게는 70킬로 이상의 짐을 메고 해발 1500m에 위치한 372㎢ 달하는 자연공원의 유일한 통행로인 목도(木道)를 지나 자신들을 손꼽아 기다릴 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일찌감치 겨울이 찾아오고 또 느리게 물러가는 오제의 설원. 그 위에 가장 먼저 발자국을 남기는 이도, 또 등 뒤로 잠시 멈춰있을 그곳에 안녕을 전하는 이도 봇카들이다. 그들의 삶의 주기는 다채롭게 변하며 생명력을 뿜어내는 오제의 숨결과 함께 일궈진다.
오제를 향한 사심이 가득 담긴 4k 영상을 넋 놓고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감독이 왜 봇카의 속도로 오제를 바라보고자 했는지 느껴진다. 감독은 봇카의 삶을 통해 숭고한 노동의 가치라는 다소 거창한 의미를 강조하지 않는다. 이제는 이곳의 베테랑이 된 ‘이가라시’가 15년 전 작은 술집에서 통기타를 치며 자신을 소개하는 홈비디오로 오프닝 시퀀스를 대신하며, 감독은 그들의 삶이 그저 하루하루를 ‘쓸모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소소한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넌지시 일러둔다.
봇카들은 10년 이상을 걸어온 길이라도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차곡차곡 걸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며 짐을 나른다. 자신의 속도로 좁은 목도를 천천히 걸어가는 이들의 하루하루가 쌓이는 속도로 오제는 변화한다. 그렇게 그 매일의 -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무겁고 지루한 일상일지라도 - 변화를 체득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것. 만약 영화를 보며 그들의 삶이 숭고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단순히 그들이 고된 육체노동을 한다거나, 위용을 뽐내며 순식간에 몇 배 되는 짐을 옮겨버리는 헬기가 곧 그들의 자리를 대체한다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켜내서가 아니라, 바로 모든 변화를 음미하며 "단 한순간도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게 끝에 달려 있는 '이가라시'의 카메라에는 그의 걸음으로만 담아낼 수 있는 화원의 일기가 쓰여있다. 계절이 순환하고 오제의 수호신인 할미새가 어느덧 가까이에서 소식을 전한다. 앞으로 커나갈 아이들과 생계를 걱정하면서도 다시 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그들의 발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자면, 오제의 목도를 그 속도로 나란히 걷고 싶어 진다. 글로는 다 담아내지 못할 그곳을 당신도 꼭 함께하길 바라며.
PS)
인도와 네팔 여행에서 만난 봇카들의 속도도 느껴보시길 바란다. 먼지 쌓인 외장하드의 소리까지 꺼내 들게 만드는 <행복의 속도>의 영상미를 더욱 확인하고 싶어질 것이다. :D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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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NEPICK 특별 콘텐츠 #3 ? 올여름 다양성 영화 기대작에 투표하면 푸짐한 상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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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 나의 마리아> 메인 예고편
50살, 순결함을 깨고 다시 태어나다!
곧 50을 앞둔 마트 캐셔 마리아.
집착하듯 성모 마리아상을 모아 마리아의 집은 성모 마리아상으로 가득하다.
50번째 생일 하루 전 날, 이상한 증상을 느껴 산부인과를 찾는 마리아.
무례한 의사는 “여전히” 경험이 없는지 질문하며 비웃듯 갱년기를 진단한다.
처방받은 호르몬 패치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어딘가 이상해지는 마리아.
불쑥불쑥 찾아오는 마리아의 조카 헬레나는 단번에 이모의 변화를 눈치채는데…
모든 감각과 머릿 속 공상이 생생히 살아나며 그동안과 다른 자유를 맛보게 되는 마리아.
그녀를 가두었던 순결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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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드 원> 1차 예고편
🚨속보🚨 산타💪 납치! 사라진 산타를 찾아 크리스마스를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