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지2024-11-20 12:54:50
내가 그렇게 미쳤나요?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
<해시태그 시그네>의 시그네를 지켜보는 것은 불편하다. 시그네의 행동이 때로는 혐오스럽고, 나 같아서 수치스럽다가도 ‘나는 저렇게까지는 안 하지’라며 안도한다. 그러다 때때로 일상의 어느 지점에서 난데없이 시그네를 떠올리곤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서, 인정받지 못해서, 나 빼고 다들 잘만 사는 것 같을 때 나는 스스로를 시그네와 동일시한다. 심지어 시그네의 기행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시그네를 설명하자면 어떤 자리에서든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함, 유머 감각은 형편없고, 예술가로 주목받는 남자친구를 질투하며, 남자친구에게 향하는 주목을 곧바로 자신에게 돌리고자 견과류 알레르기까지 지어내는 나르시시스트. 이쯤이면 귀엽게 봐줄 만도 하지만 시그네는 관심받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위험까지 무릅쓴다. 피부병을 일으키는 불법 약물을 오남용해 주위의 걱정과 관심을 사려는 계획이다. 붉은 발진으로 얼굴이 뒤덮이고 괴사가 진행됐지만 시그네는 만족스럽다.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은 셀카를 찍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이제 시그네는 새로운 관객을 찾는다. SNS에 셀카를 올리고, 기자인 친구 마르떼에게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렸다는 거짓말로 인터뷰 기회를 얻어낸다. 시그네는 가짜 불행을 극복한 서사를 통해 인플루언서가 되는 꿈에 부풀었다. 동시에 시그네는 평소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사람들을 단죄하는 상상을 한다. 그 대상은 이혼 이후로 줄곧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와 병문안을 오지 않았던 친구, 그리고 토마스다. 시그네의 상상 속에서 그들은 유명해진 시그네에게 거절당하고, 애원하고, 사과한다. 나는 시그네의 진짜 욕망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면 주변 사람들도 날 좀 다르게 쳐다봐 줄까? 내 고통에 귀 기울여줄까? 내 가치를 인정해 줄까? 나는 환대받을 수 있을까?
한편 여성 청년의 고립과 그 사회적 맥락을 살핀 책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괜찮을까>의 저자는 기존의 ‘은둔’에만 한정되었던 고립 청년의 정의를 확장해 다양한 고립의 양상을 드러낸다. 현실의 고립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외출을 하더라도, 가족과 함께 살아도, 일을 하면서도 고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고립뿐만 아니라 배제와 차별, 소외의 경험 또한 일상에서 겪는 고립이다. 시그네의 기행이 그저 미친 짓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시그네의 삶에서 고립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지만 일터에서 열정을 느끼지도 유의미한 관계를 맺지도 못한다. 성장 과정 내내 아버지는 무관심했고, 어머니와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친구들에게는 공감을 받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토마스 또한 자기 커리어 띄우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토마스는 절도한 가구를 전시하는 행위 예술가로 주목받는데, 항상 시그네의 도움을 받아 절도를 했지만 영광은 혼자 차지하며 예술계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시그네를 여자 친구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토마스의 곁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인 시그네가 인정에 목마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어디서든 소외된 시그네가 관심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뿐이었다. 자기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 나쁜가, 타인을 도구처럼 이용하며 자신을 아티스트로 포장하는 토마스가 더 나쁜가. 물론 시그네 또한 거짓말을 반복하며 타인을 기만한다. 그러나 시그네의 주변인들 모두 정도만 다를 뿐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로 타인을 조금씩 이용하는 건 마찬가지다. 마르떼가 기자의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시그네를 인터뷰한 것은 화제성 있는 기사를 씀으로써 커리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또 다른 고립 청년인 스티안이 시그네에게 불법 약물을 구해다 준은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시그네와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다. 신체 다양성을 강조한 의류 브랜드는 시그네를 모델로 기용하는데, 이 역시 시그네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수준’의 질병과 외모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그들은 시그네가 가진 질병의 이미지만을 차용할 뿐이다.
시그네가 그렇게 미쳤나? 내가 나를 해하지 않은 것은 시그네보다 삶의 안전망을 아주 조금 더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을 보살펴주는 가족이나, 열정을 쏟을 만한 일, 건강한 식단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도 있다. 토마스의 경우처럼 (포장된 것일지라도) 우연히 가진 재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지탱해 주는 안전망은 누구에게나 가변적이다. 누구든 시그네보다 덜 미쳤다면 단지 시그네보다 운이 조금 더 좋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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