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2-12 17:51:36
1승 | 엉성한 토스와 힘이 부족한 스파이크
<1승>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도자 생활 내내 10%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적이 없는 배구 선수 출신 감독 '우진'(송강호). 아내와도 이혼하고 맡은 팀도 없던 그에게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 해체 직전의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의 감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 에이스 '성유라'가 이적하면서 오합지졸이 된 팀이지만, 우진은 기꺼이 감독 제의를 받아들인다. 1년만 버티면, 대학 배구팀 감독으로 옮겨주겠다는 이면의 약속과 함께.
의욕 없는 감독과 실력 없는 선수들이 만나 개막 후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한 핑크스톰. 하지만 자기 선수 생활을 망친 '문오성'(김홍파) 감독에게 조롱을 당한 뒤 우진은 마음을 고쳐 먹는다. 악연인 스승 앞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겠다고. 이에 발맞춰 안하무인 구단주 '정원'(박정민)도 핑크스톰이 1승을 하면 상금 20억을 풀겠다는 파격 공약을 걸자, 우진은 단 한 번이라도 이기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잘못된 비빔밥
대부분의 상업 영화가 그렇지만, 특히 스포츠 영화는 모범답안이 확실하다. 서사적으로는 전력이 약한 팀이나 선수가 기대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초반 훈련 과정은 유머로, 후반부에는 감동으로 풀어내는 식이다. 국내에서는 <국가대표>가 가장 대표적이다. 작년에 개봉한 이병헌 감독의 <드림>이나 장항준 감독의 <리바운드>도 비슷한 결의 영화다.
캐릭터는 감독과 선수가 핵심이다. 균형추가 한쪽으로 쏠릴 때도 있지만, 감독과 선수는 대체로 서로의 아픔과 상실감을 위로하며 한 팀으로 거듭난다. 근래에는 <머니 볼>이나 <스토브리그>처럼 단장, 구단주 등이 중요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스포츠 경기 대신 스포츠 산업 종사자의 이야기를 다룬 <에어> 같은 영화도 유사한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신연식 감독의 <1승>은 스포츠 영화의 공식과 트렌드를 모두 반영하고자 했다. 오합지졸 배구 감독과 선수를 묘사한 대목은 <드림>과 같은 웃음을, 그들이 한 팀이 되어 마침내 승리를 거두는 모습은 <국가대표>나 <우생순>과 비슷한 감동을 목표로 한다. 구단주가 새로운 목표에 맞는 팀을 재조직하는 과정은 <스토브리그>를 만화적으로 변형한 듯하다. 문제는 이 모든 요소가 따로 놀면서 서로의 맛을 해치고 있다는 점이다.
웃기 힘든 코미디 영화
<1승>의 초반부는 코미디를 지향한다. 구단주의 인수 사가, 단기 감독 임명, 의지 없는 선수의 조합만 놓고 보면 누가 보더라도 코미디다. 팀 내에서 쏟아져 나오는 갈등과 문제 역시 그 재료로서 적합하다. 코칭스태프와의 어떤 논의도 없이 에이스나 가장 안정적인 포지션 선수만 팔거나, 징계받은 선수를 대거 영입하고, 현금 트레이드를 하는 등.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기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런데 <1승>은 뻔뻔함이 부족하다. 코미디나 만화적인 전개로 빠지려는 찰나에 톤을 다운시키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우진의 서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1년만 프로 감독직을 맡은 후 대학 배구팀 감독으로 넘어가려는 속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영화는 우진과 스승과의 악연, 전처와 딸과의 미묘한 관계를 거듭 삽입하면서 웃음이 나오려는 분위기를 끊어버린다.
선수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폭행을 저질렀던 선수, 마흔이 된 베테랑 선수, 분노 조절 장애 선수, 일본 교포 출신 용병 등 각자 사연이 있는 문제아들은 훌륭한 유머 재료다. <드림>만 하더라도 노숙자 축구 선수들의 개인사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더욱 뭉클하게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1승>은 이 모든 선수들을 단지 과거 팀의 에이스였던 성유라와의 갈등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소비하면서 여러 가능성을 스스로 제약한다.
즉, <1승>은 만화적인 분위기를 밀어붙이는 뚝심이 부족하고, 다양한 캐릭터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했다. 꾸준히 비정상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정원 정도가 예외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나머지 인물들은 관객을 웃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성급하게 대사를 한다. 이는 코믹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도 장애물이 된다. 뻔한 유머 포인트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으니, 큰 웃음이 나오기 어렵다.
목적이 결여된 1승
중반부 이후에 톤이 완전히 바뀌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그토록 1승을 염원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 일반적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려면 감독이나 선수가 진심으로 1승을 원하게 되거나, 서로 다른 생각을 하던 그들이 한 팀으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국가대표>에서도 선수와 코치 모두 각자의 개인사나 비밀을 털어놓은 후에야 한 팀이 됐다. 그런데 <1승>에서는 그 전환점이 잘 안 보인다.
그래도 구단주와 감독의 목적은 유추할 수 있다. 정원은 일관적이다. 그는 문제아만 모이는 꼴등 팀이 1승을 챙겨서 반전 드라마를 썼다는 스토리텔링을 티켓 판매에 적극 활용한다. 우진의 변심도 어느 정도 근거가 보인다. 자리만 지키자는 생각을 하던 그는 고등학생 시절 선수 생활을 망쳤던 스승에게 패배한 후 조롱 섞인 비난을 듣는다. 이에 그는 어떻게든 1승을 챙겨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구로 무장한다.
문제는 선수들이다. 적당히 연봉만 받자는 태도를 보여주던 선수들은 우진의 일갈 몇 마디에 갑자기 훈련과 경기에 몰입한다. 그 계기는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기회를 받고 싶어하는 몇몇 유망주를 제외하면, 선수들이 왜 1승을 원하는지를 좀처럼 알 수 없다. 성유라 관련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결과 <1승>은 마지막까지도 각 캐릭터의 플롯이 하나의 목적지에서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스포츠 영화' 중 '스포츠'는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승>은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붙들어 매는 힘이 있다. 바로 배구라는 스포츠 자체의 힘이다. 실제로도 배구 경기 양상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구현하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 물론 초중반까지는 배구 경기가 흥미롭다고 하기 어렵다. 선수들 자체의 실력 문제가 있다 보니 경기 장면은 맥 빠지기 일쑤다. 하지만 후반부부터는 박력 넘치고, 쫄깃한 경기 장면이 등장하면서 보는 맛도 덩달아 살아난다.
특히 그래픽과 촬영분을 적절히 배합해 가능한 코트 위에서의 긴장감과 박진감을 재현하려 한 시도가 눈에 띈다. 특히 배구공에 카메라를 달은 시점에서 코트 양쪽을 10번 이상 오가는 랠리를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마치 <챌린저스>에서 테니스 공에 카메라를 단 시점으로 테니스 경기를 보여준 것을 연상시킨다. 배우들의 어설픈 움직임도 감출 수 있는 영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특정 배구 용어와 작전이 어떻게 코트 위에서 펼쳐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짚어주는 연출도 흥미롭다. 사실 해당 스포츠의 열성적인 팬이 아니라면 경기 도중에 전술, 전략적인 측면을 알아챌 눈썰미를 갖추기 어렵다. <1승>은 관객의 눈썰미까지 보충해 주면서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특정 선수 교체 타이밍, 서브 공격 작전, 후위 공격과 속공 활용 시점, 포지션 변경 이유 등을 짚어주는 식이다.
그 덕분에 드라마가 공감되지 않거나, 유머 포인트가 웃기지 않더라도 <1승>은 결말은 일정 수준 이상의 감동을 보장한다. 1세트, 1점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마지막 두 세 경기 양상을 쫓다 보면 승리를 향한 집념에 자연히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영화의 힘이라고 볼 수 없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퀸의 라이브 에이드 무대를 재현했을 때의 전율을 두고 영화보다는 퀸의 노래 덕분이라는 말이 나온 것과 비슷하다.
세대교체?
배우들 상반된 모습도 특이점이다. 박정민은 다시 한번 가치를 증명했다. 자칫 유치하거나 과장되어서 어색할 수도 있는 만화적인 캐릭터에 최소한의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배우 본인이 인터넷 방송에 익숙해서인지는 몰라도, 최근 한국 영화에서 개인 방송 화면이 등장할 때 느껴지는 위화감도 최소화했다. 만약 정원을 중심으로 더 유쾌하게, 끝까지 B금 감성을 유지했다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반면에 지난 20여 년 간 국민 배우였던 송강호의 선구안은 이제 의문스럽다. 물론 <1승> 속 모습만으로 그의 연기력을 비판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우진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인물이니까. 과거의 상처 때문에 속물처럼 살던 감독이 어릴 적 열정을 되찾는 서사는 스포츠 영화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클리셰다.
다만 <기생충> 이후 <나랏말싸미>, <브로커>, <비상선언>, <거미집> 등 송강호가 명성에 걸맞은 완성도를 갖추거나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디즈니+의 <삼식이 삼촌>도 다른 OTT 시리즈에 비하면 반향이 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승>은, 아무리 개봉일에 국가적 불상사가 겹쳤다 하더라도, 송강호가 믿고 보는 배우라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표를 남긴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Poor 형편없는
우격다짐, 뒤죽박죽으로 간신히 챙긴 승리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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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지역 소멸’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들
듣는 건 너의 책임/Listening to Us Is Your Duty
Korea/2024/92min/Documentary
‘한국경쟁 장편’ 섹션
‘듣는 건 너의 책임’.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 통영에서 활동하는 아마추어 인디밴드의 이름이다. 멤버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책방 ‘너의책임’에서 따왔다지만 어딘가 ‘뻔뻔해 보이는’ 이름이다. 나는 그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뿐이니 듣고 말고는 당신 책임이라는 데서 오는 ‘뻔뻔함’ 말이다. 괜히 호기심이 인다. 그리고 영화는 이 뻔뻔함을 너끈하게 초과해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가 소도시 통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서정적인 음악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지역‧청년‧음악‧영화가 자연스레 어우러져 상승 욕망만이 들끓는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다른 삶의 양태와 목소리가 구체화된다.
90분짜리 통영 올 로케 뮤직비디오의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통영 풍경과 밴드의 노래가 이어지는 이 영화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청량하고 따스하다. 그러나 동시에 첨예하다. 영화 말미, 밴드 공연장에 참석한 청년 관객은 말한다. “이렇게 많은 통영 사람들이 있다니!” 이 말은 각자의 이유로 통영에 살아가는 청년들의 네트워크가 취약함을 대변한다. 이들은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왜 이미 곁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지역 청년과 일상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만 연결되는 걸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역 소멸’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횡행하고,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 수도권으로 몰린다는 뉴스가 매일같이 쏟아진다. 필요한 분석이고, 일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종 함부로 유통되는 이런 말들은 지역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축시켜 움츠러들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옆의 또 다른 청년에게 다가가 관계를 형성하는 대신 지역에서의 삶을 음울하게 되돌아보게끔 추동하는 것이다.
밴드 멤버들은 자신에게 통영이 어떤 의미인지를 들려준다. 통영은 누군가에게는 아이를 키우기에 완벽한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잠깐 쉬러 들렀다가 정주하게 된 곳이며,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생계의 근간을 이루는 일터이다. 당연하게도, 멤버들의 사연은 고유의 결을 가지며 때로는 접속하고 때로는 독립적이다. 우리가 ‘지역 소멸’을 말할 때 놓치는 건 바로 이것이다. ‘지역 소멸’이라는 말은 이미 홀로 또는 함께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는 곳으로 밀어낸다. 그래서일 것이다. ‘듣는 건 너의 책임’의 노래가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은은한 감동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이유는. 아마추어 인디밴드가 결성되고, 노래를 만들고, 공연하는 과정을 정감 있게 담아낸 영화의 여정은 지역 청년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삭제된’ 목소리를 되찾는 분투이기도 하다.
멤버들이 통영에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항상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멤버들의 통영 서사에는 늘 서울과 대도시가 등장한다. 통영 생활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마찬가지다. 이는 지역에서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수도권 대도시에서의 삶을 경유해서만 가능하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주변’과 ‘중심’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지역에서의 삶이 독립적으로 오롯이 존재하지 못하고 ‘중심’을 통과한 이후에만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관계를 인지한 후 솟아나오는 지역의 역설적 자기 인정은 기존 위계를 질문하는 자원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기존 담론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서 자본주의 경쟁 문화가 포섭하지 못하는 ‘재미’를 추구하며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듣는 건 너의 책임’은 프로/아마추어, 중심/주변의 경계를 오가며 자기들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이 영화는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감동적이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음악의 힘을 체감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러나 밴드 멤버들이 청년이고, 밴드가 활동하는 곳이 소도시라는 점은 필연적으로 영화의 감동을 더 넓은 고민으로 확장시킨다. 유쾌한 도전을 ‘분투’로도 해석할 여지가 자꾸만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이 ‘다양함’의 범주와 경계는 질문하지 않는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듣는 건 너의 책임〉은 이 지점을 파고든다. ‘지역 소멸’을 말하기 전에 이 영화를 보자. 연결된 사람들이 무언가를 즐겁게 해나가는 모습에서, 지금과는 다른 삶을 빚어낼 ‘오래된 미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듣는 건 너의 책임〉 상영 정보 및 예매 페이지
-9월 6일(금)/19:00~20:32/세명대 태양아트홀
-9월 9일(월)/16:00~17:32/세명대 태양아트홀
-jimff.org/w4_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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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잘 자렴, 아가야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오|Seven winters in tehran
스테피 니더촐|Steffi NIEDERZOLL
Germany|2023|99min|DCP|Color|Documentary|15|Korean Premiere
시놉시스
2007년 이란, 열아홉 살 레이하네 자바리는 자신을 성폭행하려 한 남성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고, 이란 국경을 넘어 여성 인권과 저항의 상징이 된다.
프로그램 노트
2007년, 열아홉 소녀 레이하네 자바리는 전 이란 정보부 직원이었던 사르반디라는 중년 남성을 죽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자바리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그를 칼로 찌르기는 했지만 그를 죽인 것은 집 안에 있던 다른 남자였다고 진술했으나 이란 당국은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고, 자바리는 2009년 사형을 선고받는다. 자바리의 가족은 사르반디의 유족과 합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여러 곳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자바리는 2014년 10월 25일에 사형당하고 만다. 이 다큐멘터리는 자바리가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수감되어 스물여섯에 처형되기까지 7년 동안의 기록이다. 최근 이란에서 일어난 히잡 시위처럼 자바리의 죽음 역시 이란 인권 문제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그래서 그녀가 남긴 유언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를 위해 검은 옷을 입지 말고, 내 괴로운 날들은 온 힘을 다해 잊고,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오”(전진수)
여성 인권을 위해 고군분투한 그녀에게 바치는 영화
성폭행 당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 달린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칼을 휘둘렀던 레이하네 자바리의 모든 목소리는 묵살되었다. 2007년,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이란 여성 레이하네 자바리는 자신을 빈집으로 유인해 성폭행하려던 남성인 사르반디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2009년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녀의 억울한 상황을 위해 국제사회의 구명운동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서명한 석방 탄원서 등 여러 노력이 이어졌다. 하지만 2014년, 이란 정부는 결국 사형을 집행했고, 그녀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이란의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자바리는 교도소에 갇힌 후에 가혹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여성 인권을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이러한 그녀의 말과 행동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성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은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 같은 여성들을 통해, 그리고 이 문제를 인식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진정한 자유는 교도소 담장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담장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바리가 원했던 세상은 여성들이 강간 당하지 않는 세상, 약한 사람이 약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또다른 여성들을 위해, 이란의 여성 인권을 위해, 그리고 이란의 무자비한 사형제 폐지를 위해 싸우고 있다.
해당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자바리와 그녀의 가족들이 겪고 헤쳐나가야 했던 당시 이란의 현실들,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란의 여성 인권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바리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가, 우리 사회가, 전 세계가 해야 하는 일들을 알려준다. 우리는 억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싸워나가야 한다.
아래는 자바리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남긴 유서 중 일부이다.
"엄마가 슬퍼하는 게 저한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세요? 엄마 아빠 손에 입을 맞출 기회를 어째서 주지 않은 걸까요.
…
엄마가 나에게 사랑을 쏟아 준 이란이라는 나라는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취조관에 심하게 심문을 받고 울고 있을 때도, 혹독한 말을 들을 때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여성성의 마지막 상징인 머리를 밀릴 때 비로소 보답을 받았습니다. 11일간 독방에 들어갔습니다.
…
나의 사랑하는 엄마, 당신은 제 인생 이상으로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저는 흙에 묻혀 헛되이 사라지고 싶지 않아요. 제 눈과 아직 젊은 심장이 땅으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아요. 내가 처형된 직후 저의 심장과 눈, 뼈, 그리고 이식 가능한 모든 것을 꺼내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세요.
(생략)
저를 위해 무덤을 만들지 마세요. 엄마가 울거나 괴로워할테니까요. 상복도 입지 말아주세요. 제가 겪은 일상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열심히 잊어 버려요. 나머지는 바람에 맡겨요."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사랑했고, 또 어머니를 사랑해서 어머니가 슬퍼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딸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던 자바리는 바람이 자신을 데려가게 해주길 바랐다. 이런 딸의 부탁에 부응하듯 그녀의 어머니는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용감하게 그녀의 딸을 위해 싸워나가고 있다. 그리고 꽃다운 나이에 세상으로부터 보호 받지 못한 그녀의 딸에게 인사를 건넨다.
"잘 자렴, 아가야."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오> 상영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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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종류의 눈물
네 가지 종류의 눈물
<위대한 개츠비>, <토니 타키타니>, 그리고 <여수의 사랑>, <성경>
어떤 눈물은 느닷없이 흐른다. 다 잠근 줄 알았던 수도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처럼,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속을 이미 적셔놓고 밖으로 흐르는 눈물이 우리 삶에는 있다. 그런 눈물을 삶의 누수라고 하면 좋을까. 그런 눈물은 그야말로 새어 나오는 것이어서, 눈물이 흐른 흔적만큼 우리 삶에 빈 공간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리둥절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린다. 내 삶이 이만큼 비어있던 것이구나. 이 공간만큼 내가 결여를 느꼈던 것이구나. 흘려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내 삶의 여백을, 눈물은 증거한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그는 앎(knowledge, 지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건 ‘스스로를 알고 있는 앎’과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앎’이 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 ‘알고 있는’ 앎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는’ 앎이 있다. 삶의 누수 같은 눈물을 라캉 식의 구분법으로 해석해보자면, 그건 단연 후자다. 나는 내가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다. 그 순간만큼 나는 그동안 (알면서도) 몰랐던 삶의 진실을 마주했고, 그랬기 때문에 눈물이 흘렀다는 것을.
삶에서 그런 순간은 느닷없이 찾아오므로, 나는 대신 영화와 책에서 그런 사례를 추려봤다. 네 종류의 눈물이 있다. 네 가지 눈물이 흐르게 된 상황적인 요인, 맥락은 제각기 다르지만, 근원은 같다. 그들은 그 순간 자신의 삶에 진실했고 또 그래서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그런 눈물은 주체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영화에서 두 편, 문학에서 두 편이다. 영화에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2013)와 마찬가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치카와 준 감독의 <토니 타키타니, Tonu Takitani, 2004>가 있고, 문학에서는 한강의 <여수의 사랑, 2012>과 오래된 책인 <성경>의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위대한 개츠비>
먼저 <위대한 개츠비>. 첫사랑인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가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부자가 되어 나타나 다시 사랑을 고백하지만 개츠비의 사랑도, 자신도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토록 바라던 데이지와 재회한 개츠비는 자신의 집에 그녀를 데려와 구경하게 한다. 데이지의 감탄이 터질 때마다 그는 속으로 자신 스스로가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개츠비는 복층 위로 올라가 자신의 영국제 셔츠 수십 벌을 꺼내 장난스럽게 데이지에게 건네는데, 그녀는 셔츠들을 보면서 돌연 울음을 터뜨린 것. 데이지는 왜 울었을까.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번역한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요컨대 데이지는 인간 개츠비가 아니라 영국제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다. 개츠비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아니, 그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김영하,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009, 241쪽) 그러니까 데이지의 눈물은 그야말로 허영에 가까운 눈물이었다는 것. 마치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의 무구한 반응처럼 데이지의 눈물은 그런 반응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허영으로 자신 삶의 허망을 견디고 있으니까.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끔찍한 고독에서 건져내 준 아내를, 사고로 잃은 토니는 아내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대신 입어줄 사람을 구한다. 간신히 찾은 여자(히사코)에게 아내의 드레스룸을 보여주는데, 그녀는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소리를 들은 토니가 방으로 들어가 왜 우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이렇게 많은 옷을 처음 입어봐서 그런가 봐요.” 이 눈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데이지의 경우에서처럼, 허영이 깃든 무구한 반응의 극치인 걸까. 무수한 오해로부터 그녀를 구할 길은 먼저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토니가 찾은 여자는 실직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곤란에 처해있었다. 하루 먹고사는 고민으로 하루를 버티던 그녀가, 한순간 거대한 아름다움과 대면했던 것이다. 자기 삶의 남루함과 세상의 거대한 아름다움 사이의 차이로부터 오는 기묘한 정서,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많은데 내 삶은 이토록 남루하구나 라는 쓸쓸한 자기 인식. 그러니까 속에서 얼음처럼 차갑던 감정들이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고는 이윽고 응결되어 새어 나온 것은 아닐까.
<토니 타키타니>
굳이 새삼스럽게 적지 않아도, <위대한 개츠비>와 <토니 타키타니>의 유사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다가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한강의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을.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또 고향이 어딘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여러 도시들을 떠돌던 자흔은, 다만 명료한 증거 하나만을 토대해 유추할 뿐이다. 자신이 2살 때,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때부터 보호기관에서 자랐다는 것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고향은 여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그녀는 하는 중이다. 그녀는 ‘나’에게 언젠가 자신의 고향(이라 추측되는) 근처를 갔을 때의 일을 말한다.
“여수 앞바다의 해안을 따라 한없이 동쪽으로 가면 소제라는 이름의 시골 마을이 있어요. (중략) 그때가 저녁 무렵이었는데…… 완만한 뒷산 등선에는 해가 지고 있었고 그 주위로 새 깃털 같은 구름이 노다지처럼 노랗게 번쩍이고 있었어요. 그 풍경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 봤지요. (중략) 마을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둥그런 만과 다도해 섬들이 파란 바다를 둘러싼 모양이 꼭 가느다란 푸른 실 하나하나를 촘촘히 엮어놓은 것 같이 잔잔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자흔은 왜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걸까. 자흔은 이어 이렇게 말한다. “……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흔의 눈물은 자신의 고향에 왔다는 아늑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그 아늑함의 이면에는 단순히 고향에 왔다라는 차원을 초월해, 불분명했던 ‘자기 정체성’이 그제서야 비로소 명료하게 인식되는, 자기 존재의 의미마저 거기 배어 있었을 것이다.
<토니 타키타니>
세 가지 목록에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성경>의 ‘이사야서’다. 세 종류의 경우처럼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지만 정서상의 감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사야서 6장에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이사야에게는 하나님이 계신 성전과 앉으신 보좌, 그리고 둘러싼 천사들의 모습이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표준새번역 <성경>, ‘이사야서 6장 5절) 이사야는 눈물 흘리지는 않았지만 세 종류의 눈물만큼이나 선뜻 헤아리기 어려운 종류의 반응을 한다. 어째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과 신성에 감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탄식한 걸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그는 경이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마주한 것이라고. 그래서 난감한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이렇게나 누추하고 얼룩처럼 죄가 묻어있는데,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이가 내게 찾아오다니. 두 번째의 눈물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반응이다.
나는 네 종류의 반응이, 우리가 예술을 대할 때 대체로 보이던 반응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예술을 허영으로 여기기도 하고(데이지), 또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이 각인시켜주는 자신의 남루한 처지를 쓸쓸해하면서(히사코), 누군가는 예술이 나 자신의 존재의 결핍을 깊이 헤아려준다는 느낌에 위로와 안도감을 감각하기도 하면서(자흔), 눈부신 경이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절망하기도 하던(이사야), 저마다 흐른 삶의 누수들. 우리는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몰랐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대체로 알고 있던 이유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라캉의 말이 옳다.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겨우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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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1994년에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다행히 2년 전, 산본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아 입주한 것이 30년 동안 살아온 보람이자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산동네 빈민촌에서 월세, 전세를 전전하다 어렵게 집을 마련했으니 큰 짐은 덜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랜서 활동을 하며 출판사, 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이러저러한 책을 만들고 있었는데, 수입은 적었고, 그나마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수입으로 생활은 어려웠다. 마침 이 무렵 써 놓은 일기가 있어서 찾아봤더니, 이 영화에 나오는 사건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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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18일 토요일
아침에 월드컵 축구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가 있었다. 2대 2로 비긴 경기. 나라가 온통 월드컵 열풍에 휩싸여 있다.
1994년 7월 9일 토요일
김일성 주석 사망.
1994년 12월 19일 월요일
연말이 되면서 나날이 바쁘기만 했다. 주위를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만 집에서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에는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를 보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숫한 상념들이 나의 감정을 흔들었다. 이제 일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우리의 삶은 연속되고 있다. 오늘은 사무실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짧은 글이라도 내 마음을 정리하고 깊은 생각 속에서 나온 글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기능적인 글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저기 걸리고 널린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은 때로 위안을 얻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제 서서히 1994년을 정리할 때도 되었다. 꼭 정리를 하지 않아도 힘겹게 달려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숨을 고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신문의 활자를 키운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있다. 가끔 그 속으로 나타나는 햇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대형 사건과 사고가 줄을 이어 터지고 김영삼 정권은 무능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나라의 정치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만큼 저질이다.
사무실을 얻기는 8월부터 얻었지만 출근은 9월부터 했다. 사무실 출근이 하루를 규칙성있게 하는 면이 있어서 좋다. 매달 지불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지만 그것은 일을 하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오지 않았던가. 사무실 유지는 그런대로 잘 되고 있는 편이다. 함께 지내고 있는 이00 씨와 00희 씨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조금 성격의 차이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약간의 양보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도 많고 참여했다 떨어져나오는 모임도 수없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반복은 줄어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른글을 정리하고 새해에는 사람을 정리하고 맺는 관계를 보다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정리를 잘 하는 편이지만 조금이라도 걸리고 널린 관계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힘들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나 지켜온 원칙이 '양보다 질'이었다. 친구는 적게 사귀되 깊이 사귄다. 무릇 사람의 관계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과의 관계도 잘 정리를 해야 하겠지만 일과 관계된 것도 잘 정리를 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쓰는 실용서 단행본 작업을 그만둘 수는 없지만 빨리 소설로 돌아서야 한다. 결국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언제나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것은 마음뿐일까.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열악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마음 속에 생각하고 떠오르는 것들이 거의 모두 작고, 말초적이고, 표피적인 내용들 뿐이다. 출퇴근을 하면서 보게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행동이 나의 감정에 분노와 짜증을 일으킨다.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교양이 없고 무식하며 질이 낮다. 또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런 주장으로 전당포 노파와 딸을 도끼로 살해한다.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정말 인간은 교양이 있는 사람과 무지한 사람으로 갈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론적으로 이미 나와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존재는 경제적 토대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질적인 수준은 결국 경제문제에 달려있다고 본다. 계급이 없고 착취가 없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교양있게 살아갈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주장을 믿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저열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례하지는 않다. 다만 사회의 제도, 교육, 빈부의 격차, 권력의 억압, 착취, 계급제도 등 각가지 모순들이 인간들을 기형으로 만들어 갈 뿐이다.
현상은 왜곡된 인간성의 발현일 뿐이다. 이기적인 인간, 조잡스러운 인간, 한심한 인간, 사악한 인간, 더러운 인간, 비참한 인간, 음흉한 인간, 불쌍한 인간, 교활한 인간 등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독버섯으로 키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조건 희생자인가.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품성은 어떤 사회에서든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 품성이란 결국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품성의 미덕은 분명 있다. 권력을 소수가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에 대항하는 주체는 결국 민중일 수 밖에 없고 그 민중은 권력자와 자본가를 대상으로 언제나 대립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민중의 단결되지 못한 현실을 이용하여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를 만들고 서로 경쟁하도록 만든다. 산업예비군, 실업율, 대학의 경쟁, 학력중시, 심지어는 지방색까지 만들어서 가능하면 민중들의 단결이 안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구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극도의 이기주의가 번지는 것은 자본주의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경쟁을 최우선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권력자들은 민중의 삶을 피폐하고 메마르게 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이러한 제도는 국가의 경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50년대와 60년대는 국가 전체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여 모든 노력을 경제부흥에 쏟았다. 경제발전 속에서 최소한의 인권이나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이 단지 이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80년대 이후, 경제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자본가와 권력자는 민중을 계속 파편화하고 우매하게 묶어두기 위해 '성'과 '스포츠'를 도입했다. 초기의 권력도 파쇼이고 80년대의 권력도 파쇼임에는 갖지만 경제의 발전정도에 따라 민중을 분열시키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노동악법과 국가보안법 등 탄압과 착취를 강제하는 채찍은 언제나 동일했다.
'개발독재'로 불려진 70년대 파쇼의 시절을 지나 대외 수출이 호황을 맞이하던 80년대와 90년까지 경제의 토대는 성장했다. 대중이 누리는 물질의 풍요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이었고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한 증거이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민중의 기본 삶은 조금 나아졌지만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 소외는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이 나아진 만큼 씀씀이도 커지고 경제의 개념이 소비 위주로 바뀌면서 생활 문화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일정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시간을 노동에 바쳐야 한다. 직장과 직위,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며 갑작스러운 변수, 이를테면 질병, 사고와 같은 변수가 생기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회의 복지제도가 기본으로 지원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는 분명한 일이다. 또한 일정한 수입은 소비문화를 따라가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범죄의 유혹을 받고 있다. 공무원의 범죄가 전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그래서 너무 당연한 것이다. 공무원 뿐 아니라 몫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이라면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한탕주의에 빠져든다. 마약의 밀매, 매춘, 인신매매, 성을 파는 모든 서비스업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격은 경제력으로 대체된다. 아파트 평수와 고급 승용차, 월 수입 등이 지위와 권위를 대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무차별하고 단순한 비교로 심한 박탈과 소외를 느낀다. 경쟁을 부추기고 인간성을 물질로 대신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하지 않고 평등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근본에서 잘못된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나와 우리 가족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무시되고 필요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가족 이기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든 가장 성공한 분열방법이다. 사회에 범죄가 극성이고 온갖 사고, 사건, 위험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가족끼리만 다정하고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단위는 경제단위의 중심이기도 하다. 부(물질)의 승계가 가부장제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자본가가 대대로 이어받을 수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이런 경제단위는 소비문화의 주체이기도 하다. 가족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소비문화가 대중을 유혹하고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실하게 확인하도록 만들고 있다. 가족(주로 가부장)은 고급 주택, 아파트를 구입하고 외제 승용차를 사고, 외제 의류를 철마다 사 입고, 고급 백화점에서 날마다 쇼핑을 하고 자녀를 외국에 유학시킨다. 한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보다 결국 자본가이겠지만 가부장의 존재가 가족을 대상으로 이러한 소비를 촉진시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다른 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없다. 엄격히 말하면 가족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최소한의 경제단위일 뿐이다. 가족은 부모와 피를 이어받은 자식으로 구성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혈연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는 단적인 몇 개의 예만 들어도 충분하다. 비록 자본가라 할지라도 그들이 풍요롭고 넉넉한 물질생활을 누리는 것이 가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 고유한 의미에서 혈연공동체나 평등한 관계의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 아침이면 뿔뿔히 흩어져 공장이나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에 잠을 자기 위해 들어오는 가정을 어떻게 가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돈이 없어 생활이 궁핍하면 가족은 해체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지만 가족의 모습 역시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가족의 문제는 가족 구성원의 성격, 이해관계, 희망, 욕심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자본주의 제도, 경쟁, 수입원 등 경제적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 부모가 넉넉한 수입이 없다면 자녀는 제도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제도교육을 일정하게 받지 못하면 좋은 취직자리를 얻을 수 없으며 이것은 결국 수입의 한계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만 거의 모든 민중들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가난한 가족은 가난함때문에 가족이 갖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살며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 단칸방에서 서너 식구가 끼어 자야하는 주거생활이 그렇고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일상생활이 그렇다. 여기에 가족 구성원이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면 그 가족은 거의 궤멸에 이른다. 당장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치료비며 생활비 등 들어가야 할 돈은 평소보다 몇 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대책이 없다면 빚을 짊어져야 하고 이 빚은 그 가족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올가미가 된다.
가족이 단단히 결속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고 살아가야 할 일이 막막해지면 빠르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어느 사회에서도 빠르고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편법과 불법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 범죄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며 여성은 매춘을 한다. 3차 산업의 발달은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서비스 산업은 성을 상품화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여기에 투여되는 여성의 인력은 언제나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유흥업이나 각종 서비스업에는 매매춘이 허용(?)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건전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오게 된다. 여성의 경우 매매춘을 통해 인간성의 황폐화와 경제적 이익을 바꾸게 되고 남성은 극심한 노동이나 범죄의 방법을 찾게 된다. 가족은 결국 경제적인 이유로 흩어지게 되며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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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은희의 가족에게 변곡점이 된다. 은희 개인에게도 가족의 문제와 함께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은희를 둘러싼 세계는 무겁고 답답하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는 일하느라 바쁘고, 학교는 성적 위주로 학생을 평가하고, 어디 한 곳 편하게 마음을 내려 놓을 곳이 없다.
부모는 아들 대훈이 학교 전교회장을 하고, 서울대학교를 들어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은희와 은희의 언니 수희에게는 살뜰하지 않다. 수희는 남자 친구와 어울리느라 학원에 가지 않고,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소리나 지른다.
가족이라고 해도 다섯 명 모두 자기 삶을 사느라 바쁘고, 함께 모이는 시간은 아침 밥먹을 때 잠깐이다. 은희가 '왜 우리 가족은 모래알 같을까'라고 묻는 마음은, 그 이유를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서글프다.
은희는 한문 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을 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오빠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대학을 다니던 은지 선생님은 다른 어른들이 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학교가 재미있니, 성적은, 어느 대학 가야지, 같은 뻔하고 지겨운 질문이 아닌, 좋아하는 게 뭐지, 왜 좋아하지, 요즘 무슨 생각해, 같은 자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질문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른, 청소년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영지 선생만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은희가 놓여 있는 상황을 공감하고 있는 인물이다. 영지 선생은 서울대학교를 휴학한 상태인데, 그가 부른 노래, 그의 책장에 있던 책으로 보아 '운동권 학생'으로 보이고, 어쩌면 수배 당한 상태였을 수 있다.
은희의 부모는 90년대 한국 부모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아버지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이고, 엄마는 가게 일과 집안 일을 하느라 남편, 아이는 물론 자기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다. 언니는 학업보다 남자 친구 만나며 노는데 신경을 쓰고, 오빠는 부모의 기대로 심한 부담을 진 채 학교를 다닌다. 은희는 아직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어린 영혼이지만,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는 관찰자 역할을 한다. 그의 세계는 아직 좁고, 부모, 학교, 학원 그리고 친구들이 세계의 전부인데, 은희가 세계를 깨고 나오게 되는 계기가 영지 선생의 죽음이다.
은희는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은희가 살고 있는 대치동은 지금이나 그때나 강남의 중심이고,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여서 은희는 가난한 집 아이였고, 공부도 탁월하게 잘 하지 못하는 아이라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다.
한국 자본주의 욕망이 응집된 강남에서 제한 없는 경쟁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으로 진입하려는 부모와 그 부모의 욕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학생들의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지만, 이런 지옥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또한 한국 사회의 특성이다.
영화에서 은희를 비롯해 왼손을 쓰는 인물이 여럿 있다. 주인공이 왼손을 쓰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왼손잡이는 소수라는 점에서, 이들이 이 사회의 소수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걸 드러낸다. 은희와 그의 가족은 강남에서 오히려 소수에 속하고, 은희는 학교에서 소수이며, 영지 선생도 한국사회에서 소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은희와 영지 선생이 여성이라는 점 또한 사회적 소수이자 약자라는 점에서 이들이 바라보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이렇게 영화는 1994년의 한국사회 속에서, 중학생 은희가 바라보는 세상과 만나는 사람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은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악한 사람은 없지만, 악한 행동을 하고, 선한 사람도 때론 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인간의 다면성은 의도가 필요 없는 삶 그 자체에서 나오는 모습이며, 은희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부장적이고 때로 폭력을 휘두르는 은희의 아버지도 은희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울음을 터뜨리고,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 때, 은희를 때리던 오빠 대훈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수희를 보고 눈물을 터뜨린다. 이들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기득권을 공기처럼 가지고 살아가지만, 자신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체와 본질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같은 해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이 한국사회의 계급성을 폭력적으로 드러낸 영화라면, 이 영화는 그 폭력성을 내재한 채, 체제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중하층 가족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계급성'을 드러내는 장면은 두 장면이 나오는데, 떡집에서 강남 '사모님'이 은희 아버지가 만드는 떡이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에 반박했다는 은희 아버지의 말과, 은희가 남자 친구와 시완과 함께 있을 때, 시완의 엄마가 나타나 시완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시완의 아버지가 의사라는 사실은 딱 한 대사에서 나타나고, 그것이 부르주아와 중하층 상인의 가족을 가르는 선으로 드러난다.
어떻든, 은희의 가족은 '생존'한 가족이다. 수희가 성수대교 붕괴에서 살아온 것도 생존이지만, 강남에서 떡집을 하며 어렵게 세 명의 아이를 가르치는 부모의 열성 덕으로 은희, 수희, 대훈 모두 살아남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은희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1995년에는 강남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한다. 성수대교 붕괴보다 이 사건은 은희에게 더욱 직접적 충격과 트라우마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강남에 살고 있고, 삼풍백화점에 갔을 확률이 높았을테니,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다.
더구나 은희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1997년 말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고, 수많은 사람이 파산하게 되는데, 이 가족이 과연 그때도 무사히 생존하게 될 지는 모를 일이다. 이렇게 1994년 이후, 한국, 특히 강남에 불어닥치는 사고와 불행으로 은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영화는 1994년, 은희의 수학여행에서 끝나지만, 영지 선생의 죽음으로 은희는 조금씩 변할 것으로 보인다. 평생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꺼지지 않는 불을 간직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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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민 영웅의 탄생
바다와 사막 위의 인간을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을 때, 그 안의 피사체는 작디작다. 극도로 작아진 그의 형태로 인해 그가 어떤 고난을 겪는 중인지, 몸과 마음의 상태는 어떤지, 그의 운명이 얼마나 가혹한지는 사소해진다. 파도와 모래의 흐름만이 장관처럼 펼쳐져 점처럼 작은 사람과 그의 고통스러운 현재는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데서 익스트림 롱숏의 역설적 미학이 도출된다. 카메라 속 그들은 수많은 다른 고통받는 인간처럼 어려운 시기를 겪는 중일 뿐이지만, 고통받는 인간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개별적 고난은 그리 쉬이 제쳐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네갈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난민 세이두와 그의 사촌 무사의 이야기가 그렇다. 성공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 가족 몰래 고향을 떠나는 두 청소년은 유럽, 즉 ‘낙관적 미래’를 향한 여정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겪는다. 국경을 넘는 과정에는 내내 돈을 뜯어내려는 온갖 브로커들만 득시글거리고, 불안정한 정세의 틈새를 파고들어 먹고사는 경찰과 반군 역시 두 사람의 생존을 위협한다. 몸값 요구, 고문, 노예 시장에서의 거래……. 탈락하는 순간 죽는 이 가혹한 여정의 목표는 이제 유럽이 아닌 생존 그 자체다.
그러나 세이두는 이 과정에서도 같은 처지의 난민을 포기하지 않는다. 경찰에 붙잡힌 무사를 구하기 위해 먼저 유럽에 갈 기회를 마다하고, 수많은 난민을 태운 배를 직접 운전하여 우여곡절 끝에 아무도 죽지 않은 채로 이탈리아에 도착한다. 난민 영웅의 탄생이다. 각자도생을 강제하는, 죽음과 맞닿은 꿈(생존)을 향한 여정에서 세이두는 같은 처지의 난민을 버리고 혼자 생존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 역시 이 여정에서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 생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목숨 빚을 갚는 소박한 행위는 그 행위가 놓인 처참한 현실에서 영웅의 조건으로 거듭난다.
영화가 종종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활용해 연결된 존재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세이두의 죄책감을 위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침내 도달한 유럽은 아마도 세이두가 기대한 모습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사막과 바다 위에서 방치된 생명으로 근근이 생존한 삶은 유럽에서도 별다르지 않게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라고 환희에 젖어 외치는 세이두의 마지막 얼굴은 이 청소년 난민 영웅과 그가 관계 맺은 사람들의 운명에 다른 가능성을 싹틔운다. 극우가 득세한 유럽과 난민에 대한 반감이 점점 커지는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상상하고 그러모아야 할 것은 바로 이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주조한 극한의 생존 여정에 대한 존중, 그리고 난민을 양산하는 기울어진 글로벌 정치 경제의 맥락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영화의 제목 IO CAPITANO는 ‘나는 선장입니다’의 이탈리아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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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여운 것들 | 섹스라는 잉크로 새로 쓴 프랑켄슈타인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사고방식이 다소 비뚤어진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 그는 자기가 실험을 통해 새로이 되살려낸 피조물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를 키우고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다. 갓윈의 보살핌 속에서 말과 에티켓을 배우고, 갓윈의 조수 '맥스'(라미 유세프)와 약혼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벨라. 그러나 그녀 마음 한 편에서는 집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벨라는 약혼을 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집을 방문한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을 만난다. 벨라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함께 리스본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고, 그와의 섹스가 마음에 든 벨라는 갓윈과 맥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선다. 자기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른 세상과 사람을 마주한 벨라. 그렇게 그녀는 모험을 통해 한 인간으로, 한 여성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새 시대의 새로운 '프랑켄슈타인', <가여운 것들>
'프랑켄슈타인'. 이 이름을 들으면 흔히 유니버설의 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을 떠올린다. 그런데 평평한 머리와 목에 볼트를 박은 거인은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자기가 만든 창조물에게 복수당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알려진 괴물에게는 이름이 따로 없다. 그저 '피조물'이라고 불린다.
괴물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일까?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는 사실 또한 종종 간과된다. 그는 혐오스러운 외모 때문에 창조주로부터 버려졌고, 사회적으로도 배척받았다. 그는 자기가 타인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했으며, 비뚤어진 정체성은 그의 복수로 이어졌다.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악행이 약간의 안타까움마저 자아내는 이유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도 같은 궁금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피조물의 외모가 흉하지 않았거나, 창조자가 피조물을 외면하지 않았거나, 세상이 피조물을 다르게 받아들였다면?' 알라스데어 그레이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상화한 <가여운 것들>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란티모스 감독은 여성과 섹스라는 잉크로 자기만의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을 써내려 갔다.
두 피조물의 분기점
자연히 <가여운 것들>은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과 벨라 백스터 간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먼저 두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띈다. 프랑켄슈타인은 혐오스러운 외모를 견디지 못하고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버렸다. 아내를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살겠다는 피조물의 요구도 끝내 거절했다.
벨라의 창조주는 다르다. 갓윈은 그녀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다. 그는 그녀에게 언어와 에티켓을 알려줬고, 전담 가정부 '프림 부인'(비키 페퍼바인)도 붙여줬다. 벨라에게 유일한 취미도 알려줬다. 일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벨라는 갓윈과 함께 시체를 해부하곤 했다. 집을 떠난 후에도 벨라가 시체 해부 참관을 즐길 정도로. 또 갓윈은 직접 남편감을 찾아 벨라의 약혼도 주선했다.
또 다른 차이는 그들의 외모다. 외모는 그들이 전혀 다른 세상을 마주한 결정적인 원인이다. 인간보다 시체에 가까웠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그 때문에 그는 자기 의도와는 무관하게 적대적인 세계를 경험해야 했다. 반면에 아름다운 여성인 벨라에게는 세상이 호의적이다. 그녀가 괴상한 실험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겪지 않은 존재라는 걸 눈치챈 사람도 스르륵 사랑에 빠질 정도다.
모든 아이는 부모를 떠난다
<가여운 것들>은 두 차이점을 도화지 삼아 괴물로 변하는 대신 인간으로 변해가는 새로운 피조물, 벨라의 이야기를 그려 나간다. 그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자식의 성장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를 되찾는 여성의 이야기다.
우선 영화는 갓윈의 보살핌에 담긴 이중적인 면모를 번갈아 보여주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고찰한다. 갓윈이 자기 피조물을 아끼고, 애정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애정은 마냥 순수하지 않았다. 자기 피조물인 벨라의 성장과정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겠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 따라서 그의 보살핌은 통제에 가까웠다.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창문을 잠가서 벨라가 못 나가게 하고, 외출을 하더라도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았다. 맥스와의 약혼을 주선해 벨라를 평생 관찰하려 했으며, 벨라가 던컨과 함께 리스본 여행을 떠나려 하자 극렬히 반대한다. 벨라가 끝내 집을 나가자 그녀보다 순종적인 새 피조물을 만들어 그녀를 대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갓윈의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그가 딸을 통제하려 발버둥 칠수록, 딸은 그의 손아귀를 빨리 벗어난다. 자기에게 호의를 표하는 바깥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연다. 바로 이 지점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즉, <가여운 것들>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을 풀어내려 한다.
누가 '가여운 것들'인가
이는 벨라가 목격하고, 파악한 세상이 갓윈의 세계와는 정반대인 이유다. 리스본, 알렉산드리아, 파리를 거치는 기이한 세계 여행 끝에 벨라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 누구도 그저 악하거나 선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은 각자의 시점에 따라 여러 맥락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
집으로 돌아온 벨라가 갓윈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렇다. 죽기 직전인 갓윈과 재회한 벨라. 그녀는 자기 몸과 뱃속의 아이를 마음대로 이용한 갓윈의 실험에 분노한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한 과거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한다. 이는 자기 세상과 렌즈 안에 사람을 가두려고 하던 갓윈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 지점에서 제목이 복수형인 이유도 유추할 수 있다. 처음에는 실험체로 살아야 하는 벨라가 가엽다. 하지만 끝에 이르러서는 갓윈도 가엽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실험체로 사용했다는 언급을 고려하면, 그는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인물이다. 달리 말해 그는 죽을 때까지 벨라처럼 살아볼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가여운 것들>은 누구라도 일생 중 한 순간에는 '가여운 것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자유와 섹스의 상관관계
이에 더해 벨라의 성장 서사에서는 여성주의 메시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가 바깥세상에서 얽히는 대부분의 인물이 남성이고, 그들은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세기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던컨과 '알피'(크리스토퍼 애봇)가 대표적이다. 둘은 전혀 다른 성격, 직업, 사회적 지위를 지녔다. 그러나 공통점은 확실하다. 그들은 벨라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녀의 일부만을 소유하고 이용하려 든다.
던컨은 벨라와의 섹스만을 탐닉했다. 그녀의 정신적 성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벨라가 읽는 책을 바다에 버리기도 하고, 그녀가 몸을 팔아 돈을 마련하겠다고 하니 불같이 화를 낸다. 알피 역시 벨라의 외모와 사회적 지위만을 탐했을 뿐, 그녀를 한 인격체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의 비인간적이고 속물적인 태도는 벨라가 만들어진 시작점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영화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로써 제시한다. 억압 앞에서 낙담하는 대신, 타인과 연대로 극복하는 동화를 쓴 셈이다. 일례로 그녀만을 기다린 약혼자 맥스는 다른 남자와는 달리 벨라의 주체성을 존중한다. 그녀가 던컨과 외도를 떠나고, 매음굴에서 일해도 그녀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크루즈와 매음굴에서 만난 친구 '스위니'(캐스린 헌터)와 '펠리시티'(마가렛 퀄리)도 벨라의 버팀목이 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가여운 것들>에는 독특한 일면이 있다. 터부시되기 쉬운 대상인 섹스를 스토리텔링 도구로 적극 활용한다. 특히 섹스의 본질에 주목했다. 성욕은 인간의 3대 욕구 중 유일하게 타인과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 즉, 원할 때마다 이뤄지는 벨라의 섹스는 그 자체로 억압적인 남성과의 관계 안에서 여성의 자유와 주체성을 점진적으로 되찾는 행위나 다름없다. 이는 성적인 엄숙주의가 강조되던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기에 더 의미심장하다. 높은 노출 수위에도 불구하고 외설적이라는 인상이 강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기괴함 속에 숨은 역사
란티모스 감독다운 삐딱하고 자극적인 스타일 덕분에 벨라의 서사는 더 눈길을 끈다. 흑백과 컬러의 전환이 대표적이다. 란티모스는 초반부를 흑백으로만 보여주다가, 벨라가 여행을 떠나고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스크린을 색칠한다. 그렇게 벨라의 변화는 시각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뒷받침된다.
빅토리아 시대를 재현하되, 당시의 분위기는 거부하는 세트 프로덕션도 인상적이다. 극 중 런던 타운하우스, 파리 광장, 유람선, 리스본 거리는 모두 세트다. 바다, 태양, 노을도 세트와 인공조명으로 만들어냈다. 그 결과 일반적인 시대극에서 느껴지는 고전미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비틀린 건물 사이로 비행선이 돌아다니는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피어난다. 그 덕분에 당대의 엄숙주의는 자연히 모습을 감춘다.
의상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벨라는 프림 부인이 골라주는 헐렁하고 편한 옷만 입는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는 몸에 딱 맞는 드레스를 입기 시작한다. 이때 의상의 의미는 직관을 따르지 않는다. 불편해 보이는 드레스일수록 오히려 벨라 본인이 섹스에 눈을 뜨고 세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골라 입는 옷이기 때문. 편한 옷과 불편한 옷의 속뜻을 맞바꾸면서 눈도 즐겁게 만든 영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가여운 것들>은 호불호가 필연적인 영화다. 란티모스 감독의 스타일은 본래도 강한 매력과 불쾌함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 누군가에게는 장점인 대목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부 단점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섹스를 바라보고 묘사하는 영화의 관점에 대해 반응이 엇갈릴 가능성도 적지는 않다.
다만 모두가 동의할 만한 대목도 있다. 벨라로 분한 엠마 스톤의 연기 덕분에 2시간 21분은 결코 아깝지 않다. 그녀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특히 뇌 이식 수술 직후 엠마 스톤과 영화 말미에 책을 읽는 엠마 스톤의 표정 차이가 압권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이 시대의 프랑켄슈타인과 피조물에게 필요한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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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핫도그로 잃어버린 몸찾는 액션 스릴러!
윤계상 배우가 주연을 맡은 유체이탈자가 개봉했습니다.
12시간 마다 유체가 이탈하여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는 신기한 설정인데요.
게다가 다른 사람을 옮겨다니는 사람이 기억을 잃은 상태라 더욱 긴장감을 높이죠.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긴장감은 높습니다.
핫도그와 노숙자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가게 되는데요.
근접액션, 차량 액션, 총기 액션 등 다양한 액션이 포함되어 있어 볼거리도 많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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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walke starring actor Yoon Kye-sang has been released.
It's a strange setting that the fluid escapes every 12 hours and enters another person's body.
In addition, it raises tension even more because he who move around people have lost his memories.
The movie lead the story with limited space and limited characters, but the tension is high.
the main character track clues through hot dogs and homeless people.
There are many things to see as it includes various actions such as close action, vehicle action, and gun action.
Please refer to the video for detailed re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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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헬로, 굿바이,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것> 공식 예고편
대학에 들어가기 전 헤어지기로 약속한 클레어(탈리아 라이더)와 에이든(조던 피셔)은 연인으로 보내는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데이트에 나선다. 첫 만남부터 첫 키스, 그리고 첫 다툼까지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는 두 사람.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결정적 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 우리 계속 연인으로 남아야 할까, 아니면 영원한 작별을 고해야 할까. 제니퍼 E. 스미스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바탕으로, 인기 시리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제작진이 만든 매력적인 로맨틱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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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 티저 예고편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런던 소호로 온 '엘리'는 매일 밤 꿈에서 1960년대 소호의 매혹적인 가수 '샌디'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매료된다. '엘리'는 '샌디'에게 화려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꿈은 점점 악몽이 되어가고 '샌디'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유일한 목격자가 된 '엘리'. '샌디'를 죽인 범인은 '엘리'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