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1-15 16:19:17
2025년 푸른 뱀의 해! 영화로 뱀의 기운 얻어가세요
2025년을 버티게 해줄 힘찬 기운을 온몸으로 맞으러 가요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를 맞아 뱀의 기운을 잔뜩 얻을 수 있는 애니메이션들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특히 <우리 함께 아웃백으로! Back to the Outback>는 푸른 뱀이 주인공인 만큼 놓쳐서는 안되겠죠?
그럼 2025년을 버텨낼 힘찬 기운을 온몸으로 맞으러 가볼까요?
우리 함께 아웃백으로!
Back to the Outback

배드 가이즈
The Bad Guys

쿵푸 팬더
Kung Fu Panda

정글북
The Jungle Book

주토피아 2
Zootopia 2



Relative contents
-
- 영화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 리뷰
다비드 뤔 감독의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는 할리우드에서 그려내는 신세대 뱀파이어 -인간 흡혈을 거부하거나, 인간 사회를 동경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는-와 달리 고딕풍 유럽 전설의 냄새를 잊지 않은 작품이다. '노스페라투(Nosferatu)'라는 별칭까지 활용하며 지극히 전통적인지라 현대에 이르러선 오히려 잊히고 만 뱀파이어의 전승을 구현한다. 마늘을 기피하거나, 강박적으로 숫자를 세고 관 속에서 잠들며, 햇볕을 피해야 한다던가, 누군가의 장소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그러면서도 감독은 뱀파이어에게 숙명적으로 따라오는 '떠도는 자'의 운명을 삭제하고 범접 불가능한 초월자의 모습 대신 병적인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영화의 무게를 반감시켰다. 이에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가벼운 코미디로 즐기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뱀파이어 소재를 다룬 여타 다른 작품처럼 인간 존재/주체에 대한 인식론적 담론 위에서 이해해도 괜찮을 듯하다.
이미지 출처: IMDb이야기의 골자는 이렇다. 수백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 폰 쾨즈뇜 백작(토비아스 모레티)은 자신의 부인인 엘사(자넷 하인)와의 삶에 염증을 느낀 지 오래다. 백작부인은 스스로의 모습을 잊은 지 오래인지라 끊임없이 쾨즈뇜 백작에게 자신의 외모를 묘사해달라고 요구하는데, 그 한 두 마디조차 이젠 지겹기 그지없다. 그런 그가 햇볕에 스스로를 내맡겨 자살하지 않은 까닭은 그저 오래전 환생을 약속한 연인 나딜라 때문인데,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에 지친 그는 프로이트 교수(칼 피셔)에게 심리 상담을 요청한다.
프로이트 교수에게 찾아오는 환자는 여럿이지만, 그의 집에 드나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화가 빅토르(도미닉 올라이)다. 그는 프로이트가 상담하는 환자의 꿈을 들으며 화폭에 옮긴다. 그런데 늑대인간과 관계를 맺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는 인물의 모델은 동일한 인물이다. 바로 자신의 여자 친구 루시(코넬리아 이반칸). 빅토르는 눈을 감고도 루시를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지만, 정작 루시는 빅토르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못마땅해한다. 빅토르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즐겨 입는 루시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자신이 소망하는 구불거리는 금발과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IMDb전통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 영화/문학은 이분법적 구도 위에서 성립한다. 선과 악, 질서와 혼란 등이 그 간결한 예시다. 뱀파이어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상정하며 인간 존재가 꿈꿀 수 없는 극단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니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묘사하는 뱀파이어는 죽은 자의 귀환을 이끌며 혼란을 발생시키는 두려운 자로 인간과 대비되었고,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원작은 앤 라이스의 소설이지만, 이 글에선 영화에 한정하여 이야기하도록 한다- 에서 뱀파이어 루이와 레스타는 뱀파이어로의 삶을 선택하였음에도 끝없는 허무와 혼란에 방황하고, 클라우디아는 성장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고착화된 시간 속에서 참혹함을 느낀다. 이렇듯 뱀파이어 세계와 인간 세계의 뚜렷한 대비는 독자/시청자인 우리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이키게 되는 계기가 되곤 하는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그 궤가 다소 다르다. 뱀파이어가 사는 세계와 인간이 사는 세계의 레이어는 분명히 겹쳐있고, 그들이 영위하는 사회의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이러한 배경이 성립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영화를 이끄는 주요 동력은 뱀파이어/인간 세계의 대비가 아니라, 등장하는 주요 인물 각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욕망이란 사회를 꾸리는 종족이라면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무엇이지 않던가.
이러한 전략을 위해 뱀파이어는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로 설정되지 않았다. 물론 이슬람 광신도에게 사망했다는 연인 나딜라의 이야기나 성에 사는 귀족으로 이미지화된 쾨즈뇜 백작의 모습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며, 한 마리의 야생늑대처럼 빠르고 강하며 흡혈을 망설이지 않는 백작부인의 모습은 뱀파이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전설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나 뱀파이어의 능력은 위계질서를 만들 만큼 강력하지 않다. 물리법칙을 어기는 종족임에도 백작은 심리적으로 지쳐 상담을 필요로 하거나, 과거에 잃은 사랑을 기다렸으며, 백작부인은 자신의 모습을 잊어 인간 화가 빅토르를 찾아간다.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뱀파이어는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더군다나 영화는 뱀파이어의 흡혈 장면에서 선악을 논하지 않고, 범법을 무신경하게 저지르는 뱀파이어의 고뇌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영화 제목에 '뱀파이어'가 삽입되어 있고, 사건의 시작이 첫사랑을 잊지 못한 폰 쾨즈뇜 백작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대상화된 타자이다. 달리 말하자면, 감독이 주목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루시-혹은 루시의 욕망-다.
이미지 출처: IMDb위에서 말했듯 루시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입은 차림으로 등장하는데, 레스토랑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에 긍정하는 여성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겠다고 말했으면서도 은연중에 변화를 갈망하는 빅토르의 이중적 행태에 분노한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와 폰 쾨즈뇜 백작이 만난다. 프로이트 교수의 집에 놓은 루시의 초상화를 발견한 백작은 그가 자신의 옛사랑 나딜라와 놀라우리만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챈다. 빅토르가 캔버스 위에 상상 속 루시를 구현했다면, 폰 쾨즈뇜 백작은 기억 속 나딜라를 루시를 통해 복원하고자 한다. 두 남자는 모두 루시 앞에서 사랑을 논하지만, 루시라는 인물이 지닌 본연의 욕망(존재하는 그대로 사랑받고자 하는 소망)은 거듭 소외된다.
백작부인의 욕망 역시 영화 내에서 소외당하는 듯 보이나, 이는 백작부인 개인으로서의 소외라기보단 뱀파이어 종족 자체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 보아야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백작부인은 '여성 뱀파이어'로서 영화 내에서 전통적인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 그는 폰 쾨즈뇜 백작보다 더 야성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사회가 관습적으로 요구하는 남녀의 역할을 전복하는, 완전한 괴물로서 기능한다. 둘째, 그럼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라고 백작에게 요구하고, 루시와는 달리 치장에 매달림으로써 언뜻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다움을 잃지 않은 존재로 나타난다. 즉 백작부인은 한 명의 독자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문화 속 '여성 뱀파이어' 그 자체의 현현이기에 어떤 수를 써도 자신을 볼 수 없는 종족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자아의 욕구(박일아)'를 끊임없이 소망한다. 백작부인은 그러하므로, 최은주(2010)의 표현과 같이 "결코 존재가 가능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개인이었고, 욕망을 이뤄내지 못한 육체는 끝내 소멸한다.
이미지 출처: IMDb반면 루시는 기나긴 여정 끝에 자신의 욕망을 성취한다. 굳이 '기나긴 여정'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루시가 뱀파이어가 되는 일이 적지 않게 고달팠기 때문이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물린 이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프로이트 교수의 침대에 놓인다. 그곳에서 흡혈 충동을 느끼고, 인간과는 다른 힘을 얻었다는 우연한 깨달음을 통해 자신이 뱀파이어로 변했음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루시는 자기 존재에 대해 조금도 섬뜩함을 느끼지 않는다. 낯섦에 방황하지 않고 루시는 오히려 자신의 힘을 긍정한다.
루시가 느낀, 기존의 정체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루이가 한 선택과는 결이 다르다. 루이가 허무를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도피성 선택을 하였다면, 루시는 뱀파이어로서 더욱 삶을 풍성하게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뱀파이어 되기'와 '뱀파이어로 살기'를 선택한 셈이므로. 특히 뱀파이어로 변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피를 수혈하면 돌이킬 수 있다는 옵션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루시의 '뱀파이어 되기'는 일종의 선택지에 불과할 뿐 운명론적 관점에서 벌어지는 유일하고도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루시가 뱀파이어로 변했던 첫 번째 순간은 어떠한 정보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두 번째 순간, 루시는 쾨즈뇜 백작에게 선언한다. 뱀파이어로 살고 싶으며, 나딜라도 루실라도 아닌 루시로 살 것이라고.
이미지 출처: IMDb
많은 영화에서 뱀파이어로 변한 인간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윤리를 손쉽게 저버리고, 욕망을 발현하곤 한다. 그런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다르다. 이 영화는 뱀파이어를 사회의 거부, 개인의 불순응, 종족의 본능 등의 사유로 '떠도는 존재'라기보다는 일부분 '정착이 가능한 존재'로 묘사했다는 점에서도 한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루시의 욕망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진 않았을까?
강정구, 김종회 (2011)는 뱀파이어라고 하는, 현실에 부재하는 종족을 상상하고 창작물을 자아내는 일은 곧 "타자를 경유하여 인간 그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빌어 전달하고 싶었던 인간/인간사회의 단면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관람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루시가 힘을 얻었을 때, 공포로 가득한 세상을 열어젖히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든다고. "‘나’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는 너(이혜정, 2020.)"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은 것이 좋다고.
★★★
참고문헌
강정구, 김종회 (2011). 뱀파이어라는 타자에 대한 상상. 비평문학(40), 7-30
박일아. (2013)."내면화를 통해 장르개념을 탈피한 새로운 유형의 뱀파이어 영화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이후 변화를 중심으로-" 현대영화연구 9.1 pp.32-56
윤은애 (2010). 라캉(Jacques Lacan)과 여성의 히스테리적 글쓰기. 우리문학연구, 29, 327-363.
이혜정 (2020). 내러티브 윤리학과 여성주의 주체 – 내러티브 윤리학은 여성주의 주체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 철학연구, 127-148.
최은주 (2010). 「성별화된 몸, 그 의미와 잉여의 두께-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영미문화 제10권 3호 한국영미문화학회 275-296.
-
-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 The Suicide Squad, 2021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실패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의 평가에 대한 것이고, 상업적으로는 이상하게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영화가 거둬들인 총 수익 $746,846,894는 "DCEU"로는 4번째로 가는 수익이며, 특히 연말 할로윈은 모두 "할리 퀸"으로 가득 채우게 만들었죠. (여기에 "아카데미 분장상"을 수상하며 "슈퍼히어로"장르로는 '첫 아카데미 수상'도 챙겼습니다)
곧바로 속편을 만드는 것이 맞지만, 해당 영화의 각본 작업이 6주만에 끝냈을 만큼 "워너의 개입"에 이미지가 개판이라 그렇게 시간만 흘러가게 되었습니다.갑작스러운 "제임스 건"의 선임에 많은 팬들은 놀랬습니다.
그가 경쟁사 "MCU"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성공적으로 론칭한 인물이자 차후 "조스 웨던"을 이어받아 <어벤져스 3·4편>의 감독으로 거론될 만큼 능력은 크게 인정받았지만, 이런 그는 "디즈니"로부터 막 해고를 당했거든요.
그 이유에는 과거 그가 불미스러운 트윗(아동 관련) 때문이기에 "워너"의 선택은 마치, "독이 든 성배"로 보였거든요. (이후 "디즈니"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의 감독으로 재선임했지만...)
그렇기에 많은 팬들은 욕을 하면서도, 그가 맡을 "DCEU"의 영화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영화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협업 무비"인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인데요.
'과연, 기대에 충족시켰는지?' -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영화는 알다시피, 악당들만 재소 되어있는 감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곳의 국장 "아만다 윌러"는 수감자 가운데 "로버트 뒤보아", 일명 "블러드 스포트"를 필두로 또 다른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조직합니다.
그렇게, 이들은 자신의 형량을 거래하고 임무를 받게 되지만 적들의 거센 반항에 하나둘씩 쓰러지는데...기대만큼 보여줄까?
1. 딱하지만 어떡하겠니...
먼저,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관객들에게 책정한 132분의 분량은 아무리 보아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개, 영화들이 120분 만에 '기승전결'을 완성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힘을 빼고 본다는 건 사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이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에게 많은 분량은 마음 한 편으로 안정감을 주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해당 영화의 제목 "스쿼드(squad)"가 "팀"이라는 의미로 통하니 이에 소속된 개인들의 소개만으로도 꽉 찰 테니 오히려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영화에서는 "정리"를 잘해야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습니다.말도 못 하게 보내주마!
무엇보다 자유로움을 표방한 영화이니 "정리"와 같은 통제는 어불성설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그의 전작 <가디언즈 오브 갤력시>시리즈도 이런 과정으로 아직도 기억되는 협업 영화인만큼 이는 이번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게도 필요한데요.
이에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단어에 걸맞은 화끈한 처리 방식을 보여줍니다.
바로, 죽이는 것이죠. - 새로운 캐릭터들의 퇴장은 분량으로 그렇다 쳐도 "할리"를 포함해 "캡틴 부메랑"과 "릭 플래그"와 같이 전작에서 이어진 캐릭터들은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이런 편리함을 생각하면, 살려서 이번 이야기에 쓰면 되겠지만 영화는 "전관예우"는 모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긴장을 놓칠 수가 없더군요.2. 시리즈가 아님라고 부정하지만...
이에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할리 퀸"이 잘 나간다고 해서 분량을 더 주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등하게 배분해 각자의 매력을 이끌어내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선택만 된다면 관객들에게 이름을 남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선택된 캐릭터들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자신의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오브"를 두고서 서로의 동상이몽을 보여주다가 "동료"를 넘어서 "가족"이 되어갔던 것처럼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형량 감소'의 차이만을 보여줄 뿐 신나는 사운드트랙까지 모든 것이 똑같아 이를 지우기는 어렵습니다.똑같이만 만들었어도 좋았을지도?
그렇다면,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관객들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라는 기성품의 맛을 기대해봐도 좋겠지만 이는 또 완벽하게 빗나갑니다.
이런 이유에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부족한 설명으로 쌓아올린 반전의 불균형으로 보입니다.
전작과 차이를 두려 하지만, 결국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16년에 나왔던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이야기를 연결시킵니다.
극 중 "할리"와 "캡틴 부메랑", 그리고 "릭 플래그"가 서로를 알듯이 전작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습니다.3. 이 익숙한 내음은?
결국, "시리즈"라는 말은 해당 작품을 보는데 이전 작품들을 봐야 하는 수고로움이 생기는 것인데요.
이런 점에서 극 중 "릭 플래그"가 추후 "피스메이커"와의 대립에서 '비밀을 숨기느냐에 공개하느냐?'의 차이를 보여주는데요.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만, 여기서 "플래그"의 대사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이젠 지긋지긋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전작에서 "플래그"가 자신의 여자친구(인챈트리스)때문에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들어갔던 일이 오늘날의 대사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는 것이죠.결국, 그 영화를 보고 오라는 거군요...
그렇게, "플래그"는 전작으로 설명을 미뤘다고 해도 "피스메이커"는 이번 영화에서 딱히 설명이 없습니다.
분명히 선택되었다고 한들 그의 신념은 설명한 적이 없으니 "반전"은 도리어, 독으로 적용돼 후반부 전개를 무너진듯한 인상을 부여합니다.
이외에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똑같으려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이 빠져서는 안되는데요.
본 영화는 "블러드 스포트"와 "랫캐처2"를 이에 내세우나 이들을 서로,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바라보기에 부족했고, 무엇보다 이들이 마지막에 "스타로"와의 대결에 있어 동기도 존재하지 않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기대하기에는 어려울 겁니다.4. 자극적인 맛에 취했던 영화와 관객들...
이런 이유에는 얇디얇은 캐릭터의 두께도 있겠지만, "청소년 관람불가"라고 쓰여있는 해당 영화의 관람등급으로 보입니다.
극 중 "스타로"의 기생이라든지 "킹샤크"의 액션을 비롯한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액션은 피가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화끈하게 보입니다.
근데, 화끈하게 보이던 영화의 초반부 액션이 후반부로 갈수록 무덤덤해져 자극이 덜하는 것도 문제이나 정작 이는 "액션"에만 제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지면...
분명히, 132분이라는 시간이 결코 부족하지 않지만 캐릭터들의 소개만으로 부족하다고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리"를 잘해야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다고 이어서 말을 했죠.
그런 점에서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빼먹은 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실망스럽게 받아들인 건 당초 기대치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수위의 완급조절"입니다.
초반부터 화끈하게 몰아붙이는 액션은 이야기보다 부각되니 관객들에게 이는 전혀 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관객들의 관심을 이끌지 못한 이야기를 후반부에 풀어야 하는데, 이에 아는 바도 없고 액션의 자극도 덜하니 당연히 주목을 이끌지 못한 건 당연하겠죠.※ 이렇게, 말했지만 이번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전작보다는 확실히 낫습니다.
※ 쿠키 영상은 영화가 끝나고 바로 나타나는 것과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서 나오는 것으로 총 2개입니다.
-
- You are alone, but you are not lonely.
Enola Holmes, 이름만 들어도 누구와 관련있을지 알만한 이 소녀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서 범죄만을 탐닉한 염세주의자 탐정 셜록 홈즈의 여동생이자, 마이크로프트 홈즈, 셜록 홈즈 두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두 형제를 키워낸 엄마에게서 철저히 교육받은 막내딸이다. 하지만 이 소녀, 이름이 좀 특이하다. Enola, 거꾸로 줄이면 Alone. 그 시절, 남자에게 사랑받으며 안전하게, 우아하게 살아가라고 여성스러운 이름을 지어줘도 모자랄 판국에 이 소녀의 엄마는 딸이 혼자 살라고 아주 고사를 지내려는지 아예 혼자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런 딸을 본인만의 교육 철학으로 집에서 홈스테이식 교육으로 가르치던 그녀의 엄마가 소녀가 16살이 되던 생일 날 증발했다. 아무도 모르게. 엄마의 실종 소식이 전해지자, 어렸을 때 말고는 얼굴 코빼기도 안보이던 두 매정한 오빠, 셜록과 마이크로프트가 납셨다. 두 오빠는 소녀를 정숙한 여인으로 거듭나게끔 교육할 기숙학교에 보내려고 하는데, 소녀는 기숙 학교는 가기 싫고, 엄마는 찾아야 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소녀는 엄마가 자신을 훈련시켜온 여러가지 방법들을 모두 동원해 엄마를 찾는 여정에 뛰어든다. 과연 이 소녀, 무사할 수 있을까?
관습을 거부하고, 허를 찌르는 아이, 에놀라 홈즈.
산업 혁명 시기, 영국에서 여자의 존재는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을 잘 가는 것이 여자의 인생의 꽃이라고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좋은 여자가 된다는 것은 정숙함을 지닌 여성이 됨을 의미했고, 정숙한 여성이 되어서 신사적이면서 부자이기까지 한 남자에게 시집 가는 것이 여자의 인생의 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놀라의 엄마는 결혼 생활 속에서 내조의 여왕의 비결이 될 바느질, 요리 등은 일절 가르치지 않았다. 그녀의 엄마가 허구헌 날, 가르치던 것은 퍼즐 맞추기, 체력 훈련의 일환인 펜싱, 싸움의 기술 등이었다. 그 시대에서는 여자에게 가르치기엔 상당히 마초적인 교육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두 오빠가 와서 여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관습적인 교육을 받도록 강요하는 부분은 그녀에게는 일종의 폭력이었을 것이고, 그녀가 오빠들을 골탕먹이고, 도망가는 장면은 그녀가 얼마나 사회에 관습에 물들지 않은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집 안에서 오빠 셜록보다 더 빨리 엄마가 남겨놓은 힌트를 이해한 그녀는 수많은 변장을 거쳐 런던으로 향한다. 그녀가 변장에 특출난 능력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마초적인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놓은 틈을 비집고, 관습이 주는 안정감을 탈피했을 때, 관습적인 누군가는 허를 찔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무슨 그렇게 대담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한 그 시대 남자들의 오만이 그녀를 도망갈 수 있게 게속 틈을 만들어 줬던 것이 아닐까. 그녀가 셜록 홈즈의 비서라고 둘러대며, 귀부인처럼 입고 나오거나, 남자 옷을 입고 돌아다니던 이쁘장한 소녀가 갑자기 요조숙녀 복장을 하고 나타나기만 해도 쉽게 알아채지 못할 만큼 여성의 능력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낮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21세기의 평범한 여자가 얻는 교훈이 있다면, 그녀에게는 탐정의 능력인 추리력, 대담한 행동력 등으로 산업 혁명 시기 영국 사회에 도전장을 던졌다면, 평범한 나에게도 뭔가 무기가 될만한 독특한 알맹이가 있을 텐데, 그 알맹이가 뭔지 알게 되기만 한다면, 나도 이 사회의 관습이 만들어놓은 허점을 뚫고, 나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그녀가 정숙함을 거부했듯이, 나도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여성스러움에 대한 관습에 협조할 생각이 없고, 내 길이 뭔지 아직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처럼 홀로 외로이 조금 불안하더라도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해결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소녀의 영리함
영화 속 에놀라의 엄마는 여성의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테러를 계획하고 있었다. 비밀여성혁명 집단의 리더였던 그녀는 과격한 방법으로 여성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그 계획의 일부를 딸에게 들켰다. 그 엄마의 그 딸이라서 딸은 엄마의 계획을 퍼즐맞추기로 추리해 내었다.
고향에서 런던으로 도망나올 때부터, 자신과 우연히 마주친 귀족 툭스베리 둘 다 쫓아다니는 자객의 존재를 수상히 여기던 찰나, 엄마의 계획이 실행되려면, 이 연약한 귀족 남자의 의회에서의 한 표가 중요함을 깨닫고, 툭스베리와 한 패가 되어 툭스베리가 죽임을 당하지 않게끔 그를 죽이라고 사주한 사람이 누군지 추리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약자를 구하는 강자의 포맷을 사용하고 있기는 한데, 그 강자가 여성이다. 남자보다 여성이 더 싸움을 잘하고, 남자는 연약하고, 순박하다.
이 영화는 이 순박한 툭스베리를 에놀라가 지키는 포맷이고, 이 남자를 지킴으로써 그녀의 엄마의 계획이었던 여성 참정권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게 되었다는 포맷을 선보이고 있다.
에놀라의 엄마는 남성들의 마초적이고 관습주의적인 모습을 뚫을 방법은 테러, 폭력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에놀라는 애초에 엄마가 떠나기 전까지는 관습에 물들지 않았던 인물이므로 엄마와 문제 해결 방법이 달랐다고 볼 수도 있다. 두 여자의 해결 방법의 차이는 그 시대의 영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꼬집을 여성 세대의 세대 교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성으로서 좋은 대접을 받으려면 결혼이 필수였던 우리 엄마의 세대와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을 외치는 우리 세대의 차이를 통해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불만들이 물밀듯이 제기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린 에놀라 엄마 세대와 에놀라 세대의 중간 어디쯤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폭탄까지 쓰지는 않지만 에놀라 엄마 세대처럼 여성에 대한 강한 권리 주장과 추리 능력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한 에놀라처럼 여성의 기본적인 지적인 능력의 향상으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기에 남자의 그늘이 필수적이지만은 않은 요즘 시대의 여성들의 모습들이 이 영화에 모두 밀집되어있는 듯 하다.
그녀의 조력자들
끝으로, 에놀라는 모든 것을 혼자 해내었다. 아니, 혼자 해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을 버린 줄 알았던 엄마는 딸에게 독립심을 가르쳤고, 특히, 오빠인 셜록은 자신의 동생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의 계획이 성공되기까지 도움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녀의 성장을 응원하고 있었고, 특히, 툭스베리는 그녀의 행보에 걸림돌의 형태로 사실 그녀의 성장에 가장 기여했다. 인생에 걸림돌이 없다면, 누구도 성장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영화 속에서 툭스베리 캐릭터는 로맨스 라인을 형성하는 데에 의의를 두는 것보다 편견에 맞서 혼자 모든 것을 헤쳐나가고 있는 한 소녀의 삶에 계속 걸리적거리면서 그녀의 성장에 일조한다. 남자에게 기대어 살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며 살기 바랐던 그녀의 엄마에게는 딸 길들이기 프로젝트에 등장한 툭스베리의 존재는 오히려 딸에게 위기를 선사함으로써 딸이 한 단계 성장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매개체와도 같았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고 그 관계가 모두 로맨스는 아님을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고, 영화 말미에 두 남녀가 어떻게 동반자적인 관계로 발전할 지 아주 기대가 되기도 했다.
-
- 공포의 이반
공포의 이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1984년 4월, 미국 클리블랜드 세븐힐즈 마을에서 포드 공장에서 오래 일하고 퇴직한 한 백인 노동자가 경찰에 체포된다. 그의 이름은 존 뎀얀유크.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었다.
그의 혐의는 나치 부역자이면서 전쟁범죄자, 유대인 수용소에서 학살을 실행한 살인자였다. 평온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던 이웃 주민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사람 좋고 이웃들과 잘 지내고, 공장에서도 동료들 사이의 평판이 좋고, 가족들에게도 존경받는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던 사람이 입에도 담기 어려운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자라니.
1940년대 폴란드에는 독일이 만든 유대인 수용소가 여러 곳이 있었고, 이곳에서 무려 17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다. 그리고 뎀얀유크가 있었던 소비보르 수용소와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만 65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미국 사법부는 존 뎀얀유크의 전쟁범죄 가담에 대한 재판을 통해 유죄를 선고하고, 미국 추방령을 내린다. 미국 내부에서는 나치 전쟁범죄를 재판할 수 있는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추방령과 동시에 이스라엘에서 뎀얀유크를 전쟁범죄자로 체포했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게 된 뎀얀유크는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가 확실한 '공포의 이반'이라고 주장했다. 생존자들이 말하는 '공포의 이반'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칼과 몽둥이로 유대인을 찔러죽이고, 때려죽이고,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공포의 이반'으로 지목된 존 뎀얀유크는 모든 혐의를 부인한다. 자신은 '공포의 이반'이 아니며, 잘못된 정보로 억울하게 잡혀온 피해자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존 뎀얀유크를 변호해 줄 변호사를 구하기 어려웠는데, 그 가운데 변호를 자처한 이스라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이 있었다.
존 뎀얀유크 사건은 1961년 같은 이스라엘 법정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과 비교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재판 참관과 그 결과를 책으로 엮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내면서 '악의 평범성'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한 '아이히만 재판'은 확실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62년 5월 31일, 사형집행으로 전쟁범죄자를 처형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 자신이 직접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하고 싶다고 '뉴요커'에 요청했고, '뉴요커'가 받아들여 특파원 자격으로 이스라엘에서 머물며 재판을 참관하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으로 재판 과정을 책으로 펴냈으며, 그 내용에 '악의 평범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즉, 아이히만은 독재, 관료주의 체제에서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관료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 아이히만이라는 '개인'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정체를 몰랐거나, 속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이히만은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다양한 증거 자료로 확인되고 있다. 즉, 아이히만은 히틀러 독재, 전체주의 체제에서 단순히 주어진 명령에 충실한 관료가 아니라, 그 자신이 유대인 말살에 확신을 갖고 실행한 확신범이라는 것,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믿었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절멸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했으며, 자발적, 능동적으로 학살을 지휘했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이동기 교수는 학살자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략)전체주의 체제든 아니든 독재와 억압은 단순히 지배 이데올로기나 관료제 또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인식 전제다. 그것에는 지배 구조의 억압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의 능동적인 집단적 자기 형성의 과정이 항시 존재한다. 억압과 폭력의 가해자들 또는 가해 가담자들은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관료제적 구조하에서 ‘선이냐 악이냐’ 식의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지배는 익명의 체제나 관료제적 기제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지배는 항상 집단적 실천을 전제하고 폭력은 항상 구체적 가해자를 필요로 한다. 그 실천과 가해 행위는 대개 명령과 지시를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이들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넘어 점차 자신의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심지어 관료제나 위로부터의 명령을 초월하고 경계를 뛰어넘는 행위자들에 의해 더욱 광폭하게 이루어진다.(후략)
즉,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살 행위를 하는 인간이 반드시 존재하며, 나치 학살자들이 바로 그런 신념을 가진 자들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존 뎀얀유크도 아이히만과 같은 인물이다. 존 뎀얀유크는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그는 독일군 부대에 들어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운 인물이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존 뎀얀유크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모두 같은 증언을 했고, 재판 과정에서 존 뎀얀유크의 나치 당시 사진과 나이 들어서의 사진을 분석한 전문가의 견해, 쏘련에서 나온 2차 세계대전 당시 존 뎀얀유크의 신분증 원본, 미국 이민국에서 작성한 존 뎀얀유크의 인터뷰 내용 등 존 뎀얀유크가 '공포의 이반'이라는 증거는 충분했다.
하지만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은 생존자 로젠베르크의 증언을 뒤집는 문서를 제출한다. 로젠베르크는 '공포의 이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며, 그가 저지른 만행을 고발했고, 그의 눈을 보고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지목한 사람이었는데, 1947년에 작성한 문서에서 1943년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공포의 이반'이 살해당했다고 자필로 쓴 내용이 나온 것이다.
로젠베르크는 딜레마에 빠졌다. 증언대에서는 분명 존 뎀얀유크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지목했으나, 그가 1947년에 자필로 쓴 진술서에는 '공포의 이반'이 폭동의 와중에 살해당했다고 썼으니 말이다. 로젠베르크는 그 진술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쓴 것이며, '공포의 이반'이 살해되었기를 바라는 희망을 담은 것이었다고 진술한다.
결국 1988년 4월 18일, 이스라엘 법원은 존 뎀얀유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존 뎀얀유크와 변호사들은 즉각 항소하고, 그 사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이 역사적 사건으로 쏘련 KGB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비밀문서를 공개하는데,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은 모스크바와 키에프를 다니며 KGB 담당자를 만나 트레블링카 수용소와 관련한 비밀문서를 받아낸다.
요람 셰프텔이 받은 비밀문서에는 트레블링카에서 유대인 학살에 부역했던 부역자들이 남긴 진술서가 많았는데, 그 진술서에 '공포의 이반'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들의 진술에 의하면 '공포의 이반'과 존 뎀얀유크는 닮지 않았다. 요람 셰프텔은 이 문서를 증거자료로 법원에 제출했고, 1993년 7월, 항소법원은 존 뎀얀유크와 그의 변호사 주장을 받아들여 존 뎀얀유크를 석방한다.
이 항소심 재판의 문제점은, 검사 쪽에서 제출한 수많은 증거자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가 제출한 나치 부역자들이 남긴 진술서를 증거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 나치 협력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생존한 유대인의 증언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항소심 재판부가 매우 무능했거나, '미국시민'을 사형시키는 것에 크게 부담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무려 8년을 끈 이 역사적 재판에서 존 뎀얀유크는 전쟁범죄 가담 여부와 상관 없이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 볼 수 없다는 판단으로 풀려난다. 이 재판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은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국민의 비난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유대인 학살자로 지목된 돈 뎀얀유크의 변호를 자처했고, 항소심에서 결국 무죄를 받으면서 크게 성공한다. 그는 변호사 수임료를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략 50만달러 이상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며, 이 재판과 관련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큰 돈을 번다.
존 뎀얀유크는 미국으로 돌아와 평온한 일상을 보내지만, 미국 법무부는 그가 '공포의 이반'은 아닐지 모르지만, 독일 전쟁범죄,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증거는 확실하므로,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아닌, 독일 법정에 세울 계획을 세운다.
1999년 미국법무부와 이민국은 증거자료를 통해 존 뎀얀유크가 전쟁범죄 혐의가 있다고 판단해 독일로 추방한다. 그리고 2009년 독일 뮌헨 법정에서 전쟁범죄, 유대인 학살에 단순가담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는다.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는 항소를 결정하고, 존 뎀얀유크는 감옥에 가지 않고 법정에서 풀려난다.
그리고 2012년, 항소심이 열리기 전에 독일에서 사망한다. 항소심 판결이 나지 않았으므로 존 뎀얀유크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무죄인 상태로 죽은 것이다.
미국에 전쟁범죄자가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서류가 1973년에 드러났는데, 미국 이민국은 나치, 나치부역자,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자들이 미국으로 이민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즉, 미국 정부가 독일의 전쟁범죄를 눈감아 준 것이다.
나치는 '반공주의자'라는 이유에서 미국 정부는 오히려 공산주의자와 투철하게 싸울 수 있다는 이유로 나치와 전쟁범죄자들의 이민을 묵인하고 허용했다. 존 뎀얀유크도 이민국 서류를 작성할 때, 자신이 소비보르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을 기록했고, 자기의 이름이 존 뎀얀유크이기도 하지만, 전쟁 당시에 '이반 마르첸코'라는 이름을 썼다고 자필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반 마르첸코'는 나치 협력자들이 모두 동일하게 진술한 기록에 '공포의 이반'이라는 자의 본명이었다. 즉, 존 뎀얀유크와 이반 마르첸코는 같은 인물인 것이다.
존 뎀얀유크는 확실하게 '이반 마르첸코'이며 '공포의 이반'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존 뎀얀유크의 반인륜범죄를 부인하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은 결국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역사에 묻히게 되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유대인의 처참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 참혹한 장면은 그러나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어떻게 저렇게 참혹하게 학살할 수 있을까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절멸하겠다는 발상도 비현실적이지만,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나치의 만행은 문명사회라는 20세기를 순식간에 야만의 시대로 만들었다.
유대인이 독일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며, 세계 역사에서 뼈아프게 기록해야 할 중대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세워 독립하면서 그들이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 국가에게 저지른 만행은 유대인의 고통에 연민과 동정을 갖던 마음을 사라지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더 참혹하게 학살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힘을 갖게 되자, 약자를 짓밟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피해자였던 유대인이 가해자로 탈바꿈하고, 자신들이 당했던 탄압과 학살을 그대로 팔레스타인에게 저지르는 착란적, 도착적 상태에 빠진 것이 마치 광기에 빠진 정신병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엽기적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 양가감정이 들긴 하지만 다시 보고픈 아름다운 영화 <신데렐라>
신데렐라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지만 동화 속 이야기를 어떻게 실사화 했을지 궁금해서, 그리고 디즈니는 워낙 좋아하다보니 얼마나 화려할까 라는 기대감에 보기 시작한 영화 <신데렐라>. 그런데 정말 예뻤다. 현대 여성상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을 만큼 영상미가 굉장히 아름다웠던 작품이었다.
영화 <신데렐라> 시놉시스
“착한 마음과 용기를 가지렴. 꿈꾸던 일이 이루어질 거야.”
어렸을 적 어머니를 여읜 엘라는 아버지가 재혼한 미모의 새엄마와 그녀의 두 딸과 함께 살게 된다. 무역상인 엘라의 아버지마저 타지에서 돌아가시자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은 엘라에게 재투성이라는 뜻의 신데렐라라고 부르며 온갖 구박을 일삼는다.
착한 마음씨와 용기를 가지라는 엄마의 유언을 지켜나가던 엘라는 숲 속에서 왕궁의 견습생이라는 키트(왕자)를 만나 마침내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느끼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신데렐라>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충실히 따르다
영화 <신데렐라>를 지금에야 봤을까? 후회가 됐던 순간이었다. 영화가 원작을 너무나도 잘 따라서 이렇게 불편해도 되나 싶으면서도 너무 예쁜 영상미에 넋을 놓고 보게 되는 이 모순된 양가감정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어서 굉장히 오묘했다.
차라리 이걸 개봉했던 2015년에 봤더라면, 아니 기술이 발전을 해서 초등학생 때 이 영화가 개봉했더라면 이 작품을 볼 때 불편한 감정이 없지 않았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신데렐라 이야기가 먹었던 장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는 2021년이고 신데렐라의 컨셉은 잘못 다뤘다가가는 욕먹기 쉬상인 장르이기 때문에 이게 너무 예쁜데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현실에 안타까웠다.
다른 작품들은 원작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해서 욕을 먹는데 신데렐라는 왜 하필 이런 때 실사화를 해서 원작을 충실히 따라도 답답한 감정을 들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잘 만들었다. 이 양가감정 속에서도 신데렐라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영화 자체는 정말 잘 만든 것이 틀림없다.
화려함으로 모든 것을 무마시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 <신데렐라>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구현을 너무나도 잘했기 때문이다. 디즈니가 작정이라도 한 듯이 2015년에 개봉을 하면서 원작을 충실히 따랐기에 현대 여성상과 너무나도 불합치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지 그 지점들이 최대한 부각이 되지 않도록 화려함으로 관객들을 홀려놓았다.
사람이라면 저 신데렐라 드레스 한번쯤은 입어보고 싶다. 입혀주고 싶다 이 감정이 들게끔 표현을 해서 디즈니가 정말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에 방점을 찍다
답답한 부분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현대 사회에도 유효한 신데렐라의 감성이 있었다. 바로 내면을 가꿔야 한다는 것이다. 계모와 새언니, 신데렐라의 이항대립 구조 중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바로 외면과 내면 중 어디에 공을 들이느냐다. 아버지가 일을 하러 떠날 때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계모와 새언니들은 자신의 외모를 치장할 소품들을 사와달라 부탁하지만 신데렐라는 첫 여행지에서 스치는 나뭇가지를 가져와달라 부탁한다. 그 나뭇가지를 들고 다니며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자신을 생각해달라 말한다.
이러한 신데렐라의 내면 가꾸기에 방점을 찍다보니 원작 신데렐라의 한계점이었던 백마 탄 왕자만을 기다리는 여성이라는 캐릭터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원작에서 도대체 왜 백마 탄 왕자는 많고 많은 여성 중에서 신데렐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나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할 개연성이 부재했다면 영화 <신데렐라>에서는 내면 가꾸기에 포기를 하지 않았던 신데렐라의 심성을 보고 왕자가 그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사람은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 내면이 건강한 사람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영화 <신데렐라>가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원작을 유지하면서도 현재에 시의성이 있는 주제로 방점을 찍으려 한 디즈니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
- 어쩌니, 태어난 이상 너희들은 다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이다. 한 여자가 벼랑 끝에 서 있다. 아니 배 위에 있다. 삶의 희망을 잃은 여자. 그 배 아래로 뛰어내린다. 여자를 다시 살린 건 독거노인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다. 얼굴이 기괴한 과학자 갓윈. 외모를 보고 성격을 판단하면 안 된다. 하지만 갓윈 박사는 어림없다. 성격마저 괴팍한 갓윈. 그에게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그건 진실이다. 다시 태어난 여자 벨라 벡스터는 뭔가 특별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벨라. 벨라는 마치 남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건 죽어가는 여자의 뇌에 그녀가 임신 중이었던 아이의 뇌를 이식해서 살려냈기 때문이다. 벨라는 아이의 뇌로 다시 태어났다. 이 말은 즉슨 벨라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의미와 통한다. 이런 벨라에게 남자 한 명이 접근한다. 남자는 갓윈의 제자 맥스(레미 유세프)다. 벨라를 짝사랑하는 남자 맥스. 소심하게 고백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소심하게 청혼을 건넸던 벨라와 바람둥이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이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 맥스. 카메라는 벨라와 함께 리스본 찍고 여기저기 모험담을 펼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기괴함이라는 정서에 있어 도가 튼 아티스트다. 스타일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란티모스'하면 떠오르는 장면부터 이야기해 보자. 굳이 마이너 한 예술영화의 세계까지 파지 않더라도 <킬링 디어>에서 배리 키오건이 파스타를 먹는 장면 정도는 오며 가며 사람들이 봤을 클립이다. 키오건이 훌륭한 연기자라는 사실에는 여지가 없다. 연기를 잘하니까 임팩트를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할리우드를 주의 깊게 본 영화팬들이라면 '란티모스에게 이 장면만 있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괴함의 정점은 란티모스가 국제적으로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영화 <송곳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곳니>를 보면 신체 노출부터 시작해서 폭력묘사까지 이 세상 기괴함은 다 가져다 놨다. 갑자기 이 감독에서 봤던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더 떠오른다. <더 랍스터>에서 갑자기 총을 쏴서 직원을 죽이는 장면, <킬링 디어>에서 초반 심장 수술 장면, 니콜 키드먼이 맡은 안나가 길쭉하게 뻗어있는 모습이 그렇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임팩트를 주는 방법을 아는 감독이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파스타를 징그럽게 먹는 것이나 <송곳니>에서의 가족에 대한 비유 같은 것들은 일상적인 것에서 조금 비틀어서 '인위적인 것'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쉽게 다들 알고 있는 '불쾌한 골짜기'를 영화의 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볼 수 있는 <킬링 디어>와 <더 랍스터>에서 영화 이야기의 형식과도 이어진다. <킬링 디어>에서 영화는 어떤 대상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하다. 그냥 알고도 당하라는, 전지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물들과 관객들을 괴롭힌다. 실제로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를 위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부감 숏(천장에서 바닥으로) 찍는 것 같고 사운드는 관객을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그냥 일반적인 카메라와 사운드로도 이 영화가 가진 인간의 굴레를 묘사할 수 있는데 내내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비튼다. <더 랍스터>도 사랑에 실패하면 동물이 된다는 설정은 곧 '사랑이 억지로 되는 일인가'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이것 역시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영화가 인간이 어떻게 사랑에 빠질까?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억지로' '근거를 들어서'사랑에 빠지지 않는 인간의 단면을 잘라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해 보면 그는 인위적이라는 속성을 시각적으로, 또 플롯의 핵심으로, 장면 연출로 소화하는 아티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 <가여운 것들>은 그 모든 것들이 고농도로 함유되어 있는 영화다.
가령 이 영화의 미술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이 영화의 세트장과 조명, 의상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란티모스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영화는 란티모스가 구축한 거푸집 아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응당 당연하게 골라야만 했던 선택지다. 그럼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무엇일까 따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핵심을 '시스템'이라고 본다. 영화는 벨라와 그녀를 둘러싼 세상을 다룬 것이다. 기득권이 지배하는 세상을 다루고 싶어 하는 영화가 그 안의 세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나사가 빠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반대측면에서 질서를 깨는 인물들의 모습을 스크린 안으로 갖고 오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이 인위성에 대한 부분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방식과도 이어진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면서 후반부를 제외하고 다들 인형의 집처럼 뚝딱거린다고 느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도가 있다.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을 비판하는데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문법으로 연기한다면 그 고지식함과 완고함이 체감이 안 될 수도 있다. 세계에 대한 인물의 대응을 자연스러움으로 표현해서 이질감을 키우는 선택지를 둔 것이다. 공간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가 기괴한 동화로 연출한 이유가 분명하다. 왜 이 영화는 일종의 성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을까? 영화가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기의 톤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걸 보여준 것처럼 공간과 미술로도 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자의 속성이 전적으로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뇌'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섹스신이 적나라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두 소재라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핵심에 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뇌와 섹스라는 소재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큰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 아니다. 왜? '뇌'를 이식한 인간의 실험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체다. 매춘 그러니까 성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역시 생명체다. 마찬가지로 갓윈 박사의 실험체는 그 나름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내가 어떤 세상에 태어날지 고를 수 없다는 점에서 시스템에 일조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두 소재가 이야기의 맥락에서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벨라는 두 인위적인 행위를 직접 겪는 개체이기도 하다. 영화도 이 구분선을 일부러 흐린 것이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시스템에 대해 표현한 부분이 보인다. 이 영화의 사운드 중 몇 음악은 거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시그니처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광각렌즈를 활용한 촬영방식도 이 영화의 기괴하고 독특한 에너지만을 강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시스템에 대항하는 영화가 기존의 영화 만들기 관습에 편승해서 제작된다면 뭔가 모순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촬영이나 사운드보다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하게 시스템을 강조하는 것은 편집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섹스신이 들어가는 방식은 뭔가 이상하다. 구체적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갈 때 맥스가 "나는 벨라가 무사하길 바란다"라고 말하는 장면 바로 다음으로 덩컨과 벨라의 성관계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나름대로 블랙코미디를 구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장면들과 비교했을 때 위 두 가지 사운드와 촬영을 활용한 것과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전형적인 연출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전개에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섹스신을 느닷없이 보여주거나, "뜨거운 뜀박질"이 대사에 전면으로 나오더라도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나는 장면이 벨라가 어디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 후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벨라가 덩컨에게 "우리 뜨거운 뜀박질을 해요!"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여운 것들>이 이전에 수도 없는 섹스신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영화는 벨라가 신체를 노출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이 부분을 생략해 버린다(편집에 대한 부분은 아니지만 이후 벨라가 매춘을 하는 장면에서도 벨라가 노숙자에게 "갑자기 들어가면 안 된다"식의 대사를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것은 영화가 이야기의 리듬을 섹스신을 활용해 변화를 준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기존 영화들이 유지해 온 흐름을 사운드와 편집, 촬영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거부하는 형태는 곧 영화의 플롯과도 이어진다. 영화는 일부러 두 명의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왜? 이야기에서 벨라의 내적 성장을 이끄는 인물들이기도 하지만 이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보도 영화에서 어떤 것들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흑인 남자는 옆에 앉아있는 백인 아줌마에게 "섹스를 안 한 지 20년 됐다니 딱하네요"라고 대놓고 면박을 준다. 글쓴이는 이 대사가 가스라이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후 이 흑인 남성 캐릭터가 하는 대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코멘트를 보고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틀이 넓다는 걸 느꼈다. 영화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다루며 정체성에 대해 다루지만 사실 이 틀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보여주는 건지를 암시하는 설정이라고 봤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인물과 인물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건 '니체'에 대한 짧은 지식이었다. 니체가 인간의 몸을 조명했고 영화가 섹스를 다룸에도 이유가 있다. 하지만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벨라 / 세상을 구분 짓는 구분선이 니체의 개체론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건 그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내가 알고 있는 니체의 개체론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이 여기서 근거하지 않나?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 <가여운 것들>이 다루는 흑인 남성 캐릭터는 사실상 벨라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면서 '섹스 20년 동안 못한 여성을 비웃는'것이 인간이고 이 세상인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 캐릭터도 이 니체의 사상 하에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흑인 여성 캐릭터는 벨라에게 공감한다. 바로 정서적인 유대를 나누는 듯하다. 하지만 이 인물 역시 벨라에게 성적 행동을 한다. 단순히 이 흑인 여성 캐릭터가 무슨 목적으로 벨라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덩컨이나 매춘 노숙자들도 벨라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흑인 여성과 노숙자는 동격에 놓이는 듯하고, 이 흑인 여성 캐릭터 역시 이 영화의 세상을 이룬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흑인 남성 캐릭터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거시적인 개념을 건드렸다면 반대로 여성 캐릭터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유대감과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다룬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개체를 가지고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루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줬다.
영화가 몇 소재를 인위성이라는 모티브와 함께 다뤘다는 것은 영화의 맥락과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인위적으로 벨라의 분신을 만들어 여성 서사로서의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벨라의 분신들이 여럿 등장한다. 동물과 동물을 이어 붙인 형태에 대한 부분이다. 개랑 닭을 이어 붙인 모습이나, 학과 얼룩말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여러 장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벨라부터가 여성의 몸에 남자의 뇌를 결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런 분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건 펠리시티(마가렛 퀄리)다. 이 펠리시티가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이 펠리시티는 영화의 핵심인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해 중요하게 작동한다. 우선 돌연변이 동물들이나 펠리시티나 누가 만들었을까? 의 측면에서 그 근원을 따져야 한다. 이들을 만든 인물은 아마 갓윈으로 보인다. 갓윈은 영화 안에서 대놓고 '창조주'라 불리며 이 시스템을 만든 인물로 묘사된다. 남성 캐릭터가 세계관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었는데 그 생명체가 주인공이다라는 점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벨라는 세상이 규정한 여성의 정의를 온몸으로 부수며 질주하는 캐릭터라는 점은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여운 것들>이 인위성을 여성 영화로서의 맥락을 갖추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생명체를 만든 인물은 갓윈이고 남성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벨라는'상위 계층이 지켜야 할 윤리'에 전면으로 부딪히는 인물이다. 그럼 여성 해방 서사로 읽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성매매업자와 펠리시티, 그 옆의 하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매매업자는 여성이다. 이 캐릭터는 벨라에게 "누구와 성매매를 할지 넌 고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펠리시티와 하녀는 벨라에게 "몸 파는 여자"라며 극언을 입 밖에 낸다. 심지어 하녀는 벨라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성 안의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 둘은 여성의 주체성을 방해하는 인물인 것이다. 여성의 자유를 방해하는 3의 시선을 공고히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이다. 여성을 둘러싼 고압적인 시스템을 묘사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런 요소들을 영화에 넣지 않을 것 같다.
이 페미니즘 영화의 틀을 반쯤 탈피한 것은 엔딩에서 더 크게 강조된다. 엔딩을 보면 블레싱턴 장군의 몸에 동물의 뇌가 이식된다. 뭐 여성에게 고압적이었던 인물이 응당 맞이해야 할 벌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글쓴이는 살짝 다르게 봤다. 사실상 블레싱턴 장군과 벨라는 동격이 된 것이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의 이야기를 영화가 보여주지 않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벨라가 훨-씬 아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 자체만을 보면 '다른 개체의 뇌'가 이식됐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벨라가 유사 아버지였던 갓윈의 직업을 물려받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벨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갓윈처럼 세계의 기득권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버전의 <가여운 것들>이 블레싱턴을 주인공 삼아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단순히 1차원적인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영화가 남근주의적인 시대상만 조롱하는 것이 아닌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기득권에 서는 것'이 얼마나 따분한 짓인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남/녀)의 구분선을 흐린 선택은 벨라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따져봐도 다시 읽을 수 있는 맥락이다. 벨라는 자신의 몸을 팔았던 것, 그러니까 욕망에 직설적이었던 사실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인물에서 더 나아가 영화도 이런 벨라를 부정하지 않는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 어떤 인물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연출부터 빅토리아보다 벨라의 편을 든 것이다. 이 연출에는 여성의 몸에 남성의 뇌가 이식된다 한들 이 사회를 이루는 시스템은 여전할 거라는 조소가 담겨있는 듯하다. 이는 가족이라는 소재로 당시 그리스의 기득권을 비판한 <송곳니>에서도 느껴졌던 서늘한 조롱이었고, '란티모스의 영화다!'라고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에 단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본인이 쓴 모든 글의 내용에 대해 '영화는 그런 게 아냐!'라고 비판하는 평자가 있다면 그 나름대로 맞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고?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 <가여운 것들>과 저 멀리 반대편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자연스러운 것'을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죄다 인위적인 것투성이다. 그리고 영화가 전면에 성적인 소재를 등장시키고 있어서 어떤 관점에 있어서는 '여성해방이 곧 모험이고 섹스냐'라는 비판도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작을 안 읽어서 이 문장에 확신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후반부의 각색에 대해서는 원작 팬들이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이 광범위한 이야기를 펼친 것에 비해 후반부 문제를 해결하는 규모가 좀 작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재밌었다. 이렇게 다층적이면서 선명하게 주제를 강조한 란티모스의 역량은 현재 최고의 폼을 구가하는 예술가 다웠다. 휘황찬란한 미장센에 눈이 즐겁고 기괴한 사운드에 청각적인 쾌감까지 느끼는데 이야기가 깊기까지 하니 보는 동안 '이 아침에 극장에 오길 잘했다' 싶었다. <추락의 해부>가 청각과 시각이라는 인지체계를 활용한 각본으로 우리에게 재미를 주고 <오펜하이머>에서 핵폭탄을 플롯처럼 만든 것 그리고 <바튼 아카데미>가 이야기를 고전적으로 만든 것처럼 연출과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지는 섹시한 영화가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색상은 <오펜하이머> 여우주연은 <플라워 킬링 문>의 릴리 글래드스턴, 작품상은 <오펜하이머>가 받을 것 같다. 아마 상 받아도 미술상이나 의상상이 가능성 있을 것 같다.
-
-
-
- 영화 <휴먼 보이스> 메인 예고편
떠난 연인과 함께 살던 집에서 그의 마지막 전화를 기다리는 여자.
드디어 전화가 울린다.
조심스럽게 대화가 오가고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기만을 바라며
여자는 행복했던 추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랑이 식은 남자는 그녀에게 이별을 고하고,
여자는 그의 대답을 받아들일 수 없다.
-
- 넷플릭스 <바이킹스 : 발할라> 공식 예고편
《바이킹스: 발할라》는 1,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간 11세기 초를 배경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바이킹들의 영웅적인 모험담을 그린다. 그 주인공은 전설적인 탐험가 레이프 에릭손(샘 콜릿)과 불같은 성격의 완고한 여동생 프레이디스 에릭스도테르(프리다 구스타브손), 그리고 야심 있는 노르웨이 왕자 하랄드 시구르드손(리오 수터). 바이킹과 잉글랜드 왕실 사이의 긴장이 핏빛의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바이킹 내부에서는 기독교도와 이교도의 충돌로 싸움이 벌어지면서 이 세 바이킹의 장대한 여정이 시작된다. 그렇게 세 사람은 생존과 영광을 위해 싸우면서 바다와 전장을 넘나들며 카테가트에서 잉글랜드, 그리고 그 너머로 나아간다. 《바이킹스: 발할라》: 넷플릭스에서 곧 공개 예정. 《바이킹스: 발할라》를 시청하세요,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