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5-01-31 13:13:36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
세상이 다 미워질 때가 있다. 나에 대한 자책이 과해지고, 그에 따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리액션을 해주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말하자면, 아주 약한 번아웃이었을 수도 있고, 그냥 짜증이 반복되어 지쳤던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다 귀찮아질 때, 병원을 가는 게 좋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나에게 한 번씩 처방을 내린다. 과거의 해맑았던 내가 봤을 법한 영화로 다시 회귀하곤 한다. 정작 회귀를 실행할 때는 몰랐다가 그 시기를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 시기 내가 참 우울했구나 생각하곤 한다. 최근에도 그런 폭풍우가 한 번 지나갔는데, 그 때 나는 나의 어린시절에 항상 함께했었던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을 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며, 새로운 시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서, 잠시 생각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1. 언제쯤 사고를 안 치실 예정이십니까, 월레스
항상 느끼던 바였지만 이번에도 가장 큰 빌런은 월레스였다. 모든 시즌에 악역들이 등장하곤 했지만 나는 이 애니의 가장 큰 빌런은 월레스라고 생각한다. 어쩜 저렇게 캐릭터가 맹할 수 있을까. 사람도 너무 잘 믿고, 너무 머릿속이 꽃밭이다. 항상 그로밋을 하대하는 것도 사실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꼭 사건이 터지면 하대하던 그로밋의 도움을 꼭 받고 나서야 그로밋의 소중함을 깨닫는 금쪽이가 따로없다. 이번에도 역시나 원흉은 월레스였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미워할 수 만은 없어서 여전히 월레스가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는데, 기계에게 점령당한 삶을 살다가 강제로 아날로그의 삶을 살게 된 그가 버벅대는 걸 보는 것도 나름 하나의 오락적 요소였다. 월레스를 보고 있자면, 기계에 잠식될 현대 인간의 미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핸드폰을 포함한 기타 기계들에게 점점 삶을 의지하고 있다. 지식을 찾아볼래도 백과사전을 찾아볼 바에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이 더 편해진 세상에서 월레스가 차 하나 제대로 못 우리는 건 우스워보여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곧 저렇게 되려나 생각해보게 되었다.
2. 그로밋이 월레스에게 충성하는 이유가 뭘까.
보다보면, 월레스는 그로밋의 주인이지만 사실은 그로밋이 월레스를 케어한다. 모든 수상한 낌새는 그로밋이 다 채고, 가끔 자기 뽕에 취해 그로밋을 무시하기도 하는 월레스의 단점을 다 이해하는 그로밋의 마음은 무엇일까. 항상 그로밋은 도움을 주는 포지션에 있을 뿐, 그로밋의 속마음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로밋에게는 그 어떤 대사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을 보면서 그로밋이 월레스에게 충성하는 이유가 뭘지 궁금해졌다. 그저 자신을 친구로 인정해준 고마움 때문인가, 아니면 월레스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보는 걸까. 확실한 건 월레스는 그들이 친구 관계를 가장한 주종 관계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그들은 그냥 서로가 없으면 안되는 관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월레스는 그로밋이 없으면 안되는 건 누가 봐도 알겠지만 그로밋은 월레스가 꼭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대사로 표현된 바가 없어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해주는 월레스가 가끔 사고는 치고 다녀도 '사람은 착하다'는 마인드로 케어하는 것일까 싶었다.
세상이 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을 때, 가끔은 행복했던 내 과거로 회귀하는 것도 현실 도피로 나쁜 선택은 아니다. 어렸을 때 내 자신을 보면서 잠시 추억에 잠겼다가 킬링타임으로 봐야 할 내용을 가지고 그로밋이 월레스에게 충성하는 이유까지 생각해보며 딴 생각에 빠질 수 있어서, 그렇게 잠시 즐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이래저래 불평불만이 많았지만 나는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또다른 미래에 내가 지쳤을 때, 나를 위로해주는 시리즈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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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올드 오크' - 배타와 연대
시리아 난민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제69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이 90세 때 촬영한 작품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지만,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영화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터치한다. 난민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과 비록 선진국이지만 대도시에서는 그들을 원치 않는다는 것.
최근 모 영화배우가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들처럼 난민이 될 수도 있으니 그들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라 말했지만, 현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말을 수용할지는 아직 물음표이다.
1951년 난민협약과 1967년 난민의정서는 근대 난민보호의 초석으로, 이에 포함된 난민관련 법률적 원칙들은 난민의 처우를 규정하는 수 많은 다른 국제법과 지역법, 국내법과 관행의 뿌리가 되고 있다. 1951년 난민협약에 포함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난민이 "생명이나 자유가 위협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 추방 혹은 송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강제소환 금지원칙'이라 부른다. 난민협약은 국가가 난민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서도 명시하며, 누가 난민이고, 난민이 아닌지에 대한 정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비호국에서 난민의 권리를 명시하였다. 신분증명서를 받을 권리, 이동의 자유, 재산 이전의 자유 등이 명시되었다. - 출처 : 1951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유엔난민기구의 국제법적 기초
영화는 희망이 없는 영국의 폐광촌으로 들어 온 시리아 난민들과 자신의 우울을 자기보다 약한 존재에게 투영시켜 괴롭힐 만큼 삶에 의욕이 없는 자들을 비춘다.
네 편과 내 편을 나누며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것을 종용하는 주민과 난민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
폐광촌이 되기 전에는 의욕을 갖고 서로 연대하며 음식을 나누던 이들이 이제는 낯선 땅에서 슬픔을 맞이한 이들과 다시 연대하며 일어설 힘을 얻는다.
이들에게 있어 무엇인가를 이루고자하는 애씀은 늘 중도에 그만두는 허무함으로 끝나지만, 다시 한 번 희망의 끈을 잡으며 시작이란 단어를 꺼내든다.
영화는 난민에 대한 편견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그들을 연민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늘어가며 우리와 별반 다를 바없는 존재로 대우한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는 슬픔 가운데 있는 이를 위로하며 따듯한 환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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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어느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이야기: <나사렛 예수>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비교
영화「Jesus of the Nazareth」와 「Jesus Christ Superstar」비교 분석하기
영화「Jesus of the Nazareth」(1977)와 「Jesus Christ Superstar」(1973)는 모두 신약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전자는 예수의 전 생애를 다루고 있으며, 후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7일 전부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이 두 편의 영화는 예수의 공생애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형식, 그리고 성서와 성서 속의 인물들에 대한 해석의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말하자면 고전에 현대적 입맛을 약간 가미한 현대 클래식 음악과 고전을 철저하게 현대적 관점에 따라 과감하게 변용한 록 음악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두 작품은 성서라는 하나의 원형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를 각각 영화의 의도와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었다는 점에서 썩 재미있는 비교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영화를 감상함에 있어 중점을 두었던 것은 성서 속의 인물들이 각각의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달리 해석되었는가, 였다. 두 작품 모두 아주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수십 세기에 걸쳐 사랑받아온 예수와 온 세상 사람의 미움을 한 몸에 받던 갸롯 유다였다.
Jesus: 신의 아들이냐, 비극적 인간 영웅이냐!
먼저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해보자. 「Jesus of the Nazareth」의 예수는 성서 속 인물과 꽤 일치한다. 그는 거룩하고 자애로우며 자비심이 넘친다. 고통 받는 이를 위해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고 가르침을 설파한다. 제자들을 비롯한 백성들은 그의 숭고함에 매료된다. 이를테면 그는 ‘신적 존재’로서의 예수다.
반면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그려진 예수는 이와 닮아있으면서도 다르다. 그는 보다 ‘인간적’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린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열중한다. 그러나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많은 비탄 속의 백성들이 몰려들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권세와 소임을 버거워한다. 몰려드는 환자들에게 ‘Heal yourselves!’라고 외치는 예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하기 만한 성자로서의 예수와는 썩 다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러한 막대한 책임에 고통스러워한다. 창녀인 막달라 마리아의 무릎에 누워 유일한 위안을 청한다. 다소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도리어 그에게 인간적인 공감과 연민, 심지어는 친근함마저 느껴진다. 이를 통해 예수라는 존재와 관객 혹은 신자와의 거리는 더욱 좁혀진다.
예수는 또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하늘을 향하여(하나님에게) ‘왜 제게 독잔을 내리시나이까!’하고 원망한다. 죽음 앞에서 갈등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비극의 주인공과도 같다. 그는 예정된 죽음이라는 비극에 고통스러워하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비극을 내리는 주체인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결국에는, 자신의 운명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야기한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그의 이러한 모습들은 죽음과 삶 속에서 갈등하던 햄릿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Jesus Christ Superstar」에서의 예수는 단순히 인간의 껍질을 쓴 신적인 존재로서의 예수가 아닌, 신성성과 인간성이 양립하는 어떤 비극적 영웅으로서 재탄생한다.
Judas: 어느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이야기
한편 2천여 년의 세월에 걸쳐 악인으로 기록되어온 갸룟 유다에 대한 두 영화의 해석 역시 흥미롭다.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유다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성서 속에서 은전 30닢에 눈이 멀어 스승을 적에게 팔아넘긴 도적이었던 유다는 영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악인의 길을 택해야만 했던 실패한 이상주의자로 탈바꿈한다.
「Jesus of the Nazareth」에서의 유다는 예수의 신실한 제자로, 예수를 진심으로 따르고 사랑했던 인물이다. 어쩌면 그는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을지도 모른다.
극 중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장면을 보면 유다의 예수에 대한 갈망이 잘 드러난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다가, 이내 베드로가 "당신은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예수는 '네가 가장 복이 있구나'하고 베드로를 껴안는다. 이때 유다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베드로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 중 다른 누구도 아닌 유다가 말이다. 이후 카메라는 점점 그들을 멀리 비추고, 스크린 너머에는 예수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유다, 오른쪽에는 베드로라는 극명한 대비가 보여 진다. 하나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죽어서도 예수의 뜻을 이어받은 가장 거룩한 성인으로, 다른 하나는 예수를 배반한 배신자, 다시 말해 가장 사악한 악인으로 기록되니 무척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예수에 대한 유다의 시선은 흡사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의 그것과 닮아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스승인 예수를 향한 유다의 순수한 숭배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을까? 필자는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의 원인을 유다의 예수에 대한 ‘유아적인’ 애정과 지나치게 순진했던 이상에서 찾았다. 앞서 이야기했듯 유다는 예수에 대한 어떤 어린아이 같은 애정을 품고 있다. 그는 예수가 설파한 평화롭고 이상적인 세계 속에서 앞으로의 유대가 나아갈 방향을 찾았고, 그를 통해 이룩될, 해방된 유대를 그린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에 더욱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훌륭함과 거룩함을 증명해보이기를 바란다.
언뜻 그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보이나 사실 이는 무척 단편적인 발상이다. 어린아이가 제 아버지의 유능함을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만하다. 그의 시야는 좁았고 마음은 급했다. 한시바삐 유대의 평화적 해방을 도모하고 싶은데, 예수는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만 갔으니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그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학자 출신이었던 것은 이러한 견해에 박차를 가한다. 그가 극 중에서 이야기했듯 그는 ‘목수와 어부의 일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태어나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하는 예수의 범인류적 차원에서의 뜻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비단 유대백성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예수의 장기적인 안목을 유다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라’던 예수의 말씀은 유다의 그러한 사정을 여실히 드러낸다.
성서 속 유다의 악인으로서의 면모는 실제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제라’라는 새롭게 창조된 인물을 통해 대변된다. 「Jesus of the Nazareth」에서는 이러한 교활한 제라라는 인물을 통해 유다가 선인이었으며 제라를 비롯한 유대 제사장들의 음모에 넘어간 불쌍한 인물로 나타낸다. 예수가 잡혀가 채찍질 당하는 것을 본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은전 30닢을 돌려주겠으니 예수를 풀어달라고 간청하자 그를 조소하는 제사장들의 모습은 그가 철저하게 이용당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Jesus Christ Superstar」의 유다 역시 「Jesus of the Nazareth」에서 마찬가지로 유다를 동정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유다는 「Jesus of the Nazareth」에서보다 자신의 이상에 반하는 예수를 더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유다는 예수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몸을 닦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예수를 질책하는 한편, 예수의 존재로 인해 유대의 백성들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등, 다소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예수의 태도와는 대비되는 이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신적 존재가 인간적으로 그려지고 인간(그 것도 예수를 배신한 악인으로 알려져 있는)이 이성적으로 그려지는 아이러니는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앞서 「Jesus of the Nazareth」에서 유다가 선인으로 표현되기 위해 ‘제라’라는 인물이 삽입되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유다는 ‘신(Jesus)의 뜻에 의해’ 예수를 죽이게 된 운명을 타고난 불쌍한 인물로서의 자신을 어필한다. 으레 다른 성서를 기반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예수를 죽이게 된 죄책감으로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이때 "Poor Judas!"라고 외치는 앙상블이 울려 퍼진다. 이와 같이 영화의 전반에 울려 퍼지는 유다의 고뇌와 (배신의)결단, 그리고 후회 혹은 신에 대한 원망의 노래는 이러한 유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잘 보여준다.
막달라 마리아: 진실된 사랑을 행한 여성제자
이 밖에 성서나 「Jesus of the Nazareth」의 내용과는 달리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비중이 크게 다루어진 것 또한 인상 깊었다. 전자의 작품에서 다소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마리아는 후자에서 예수에게 가장 진심어린 위로와 위안을 주는 사람이자, 그에게 가장 진실 된 사랑을 느끼는 여인으로 승격된다. 그녀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사람이자, 여느 열두 제자보다도 예수를 믿고 따랐던 여성제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녀의 예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는데, 마리아가 수행한 여러 가지 역할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애정은 아마 신에 대한 신앙과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과 인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사랑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리라고 사료된다. 단순히 하나의 구체적인 감정으로 해석되기에는 그녀의 행동들은 다각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비교: 클래식과 록 오페라
두 작품의 형식적인 차이는 이러한 각기 다른 관점의 해석에 걸맞게 나타난다. 「Jesus of the Nazareth」는 기독교 문화를 전도함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성서의 내용을 살려 표현하고자 애썼다. 그리하여 영화는 장장 6시간에 걸쳐 다소 엄숙하고 거룩한, 그러나 예수의 위대함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려냈다. 이때 무조건적으로 성서의 내용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나서기 전에 약 하루 간 갈등하는 장면, 영화를 위해 창조된 인물인 제라, 선한 인물로서의 유다 등 영화적 장치와 현대적 재해석에 의한 약간의 변용이 나타난다.
한편, 「Jesus Christ Superstar」에서는 록 오페라의 이색적인 형식을 차용하여 보다 대중이 성서에 접근하기 쉽도록 성서의 내용을 각색했다. 흥겨운 노래와 춤들, 그리고 현대적 복장과 소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리로 가게끔 한다. 이 과감한 시도는 성서 속의 인물들에 대한 과감한 재해석과 맞물린다. 이때 「Jesus Christ Superstar」에서의 현대적 요소들(건축물, 소품, 복장 등)은 스크린 속에서 그려지는 세계가 현대의 이야기인지 과거의 이야기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데, 이는 분명히 의도된 장치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 흰옷의 입은 유다는 예수의 존재와 희생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이는 비단 예수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관객인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어떤 존재였으며 그가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닌 인물인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두 작품에서 나타난 예수와 유다에 대한 색다른 시각은 놀랄만하다. 두 작품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선과 악의 차원에서의 평면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성서의 이면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한번 상상해보자. 또 다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밖에도 성서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것은 서양 문화권에서 그만큼 기독교 문화가 깊게 뿌리 박고 있음에 기인한다. 수 많은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예수가 되기도 하고, 유다가 되기도 하며, 때론 막달라 마리아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 혹은 성서 그 자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은 서양 사회 전반을 즐겁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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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녀 관계의 렌즈로 섭식장애를 비출 때 열리는 세계
8★/10★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동안 늘 같은 거리에 있는다. 만약 인간관계가 평행선이라면 어떨까? 소중한 누군가가 늘 옆에 있다는 느낌에 안정감이 들까, 아니면 멀어지고 싶은 누군가를 떨쳐낼 수 없어서 답답함이 들까? 대개의 인간관계는 이 둘 사이를 오가며 권태를 조정하고 지속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평행선의 관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 좋든 싫든 늘 서로의 존재를 감각하고 버텨내야 한다. 상옥과 채영, 엄마와 딸이 그러하듯이.
채영의 섭식 장애는 15살 무렵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딸의 섭식 장애에 엄마 상옥은 무수한 감정을 느꼈고, 무수한 생각에 빠졌다. 우리 딸이 왜 저럴까를 고민하며 수백 개의 시나리오를 상상해봤다. 그러고는 죄책감에 빠졌다. 상옥은 힘겨운 청년 시절을 보냈다. 자기 인생이 너무 무거웠던 탓에, 자신이 딸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들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삶을 잃은 패잔병과 닮았다고 느꼈다는 그는 서른여덟이 되어서야 딸이 자신의 삶에 들어왔다고 회고한다. 뒤늦게나마 딸에게 단단한 토대가 되어주고자 결심했을 때, 채영의 섭식 장애가 시작되었다. 상옥은 딸의 섭식 장애가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다.
채영은 바쁜 엄마 때문에 종종 불안감을 느꼈다. 이웃집에서 엄마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엄마를 기다렸고, 엄마가 대안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는 엄마가 자신만의 엄마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를 향한 채영의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자신이 엄마의 마음에 들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자신을 이렇게 키운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가 동시에 일었다. 무엇보다 채영은 엄마가 자신의 섭식 장애를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채영은 극심한 거식증을 앓던 시절에도 단 한 번도 무서운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채영은 생애 처음으로 ‘내가 내 삶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다’로 느꼈다. 사람들은 채영이 ‘안 먹는다’고 말했지만, 채영은 자신이 ‘계획적으로 먹는다’고 생각했다. 병원 입원은 이런 채영의 자율성과 자기 확신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채영은 엄마가 더는 자신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닫고 입원에 동의했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거식과 폭식의 시간을 보냈다.
“한 번도 접점이 없었구나.” 채영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말한다. 섭식 장애를 앓는 채영의 곁에서 그 누구보다 딸을 오랫동안 보듬어온 엄마 상옥은 모녀 관계가 평행선일 수밖에 없음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지난 세월의 모든 고민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데서 허탈함을 느꼈다는 듯 채영 앞에서 큰 소리로 웃는다.
채영과 상옥의 이야기에서 ‘잘못’한 사람은 누구일까? 엄마로서 돌봄을 제공하지 않은 상옥이 문제였을까? 힘든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리감을 느낀 채영이 문제일까? 영화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배치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영화는 상옥의 남편이자 채영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남편/아버지가 처음부터 부재했다는 듯이.
상옥과 채영의 이야기는 오히려 또 다른 여성의 서사와 접붙일 때 더 선명한 색채를 얻는다. 상옥과 채영은 상옥의 엄마, 즉 채영의 외할머니와 함께 산 적이 있다. 상옥과 채영 모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 상옥은 사랑스러운 딸이 자신의 엄마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다며 몸서리쳤고, 채영은 할머니를 보며 그래도 우리 엄마가 할머니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고 웃으며 말한다. 그러나 그런 할머니는 채영과 닮은 데가 있다. 할머니 역시 40년 이상 토하는 삶을 살았다. 젓가락과 나뭇가지로 식도가 상하도록 몸 안을 헤집어 토를 했다. 상옥은 엄마의 자해적 구토가 자기 몸을 통제하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해온 세 세대의 모녀는 분명 혈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무언가에 묶여 있다. 이 묶여 있음은 지금껏 대개 그녀들이 자기 삶이 괴롭다고 느끼는 근거였다. 그러나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의도하지 않은 묶여 있음의 상태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지난한 과거를 품으며 딸의 미래에 버팀목이 되어주고자 하는 상옥과 앞으로 엄마와 함께 살기는 싫다면서도 상옥에게 자기 속내를 천천히 털어놓는 채영. 평행선을 닮은 둘은 만나지는 못할지라도, 떨어지지는 않은 채 함께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사적’이면 거대한 모녀의 화해가 만들어갈 궤적은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모녀 관계에 별 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우리사회에는 아직 그 변화를 예측할 언어가 없다. 하지만 가부장제가 잠식해온 관계망을 뚫고 나오는 동력의 핵심이 동시대 모녀 관계에 있음을 감각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부대끼며 만들어낼 구체적 미래 궤적이 또 다른 모녀 서사와 만나 서로를 두텁게 만들어주기를 고대한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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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전쟁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전쟁은 언제나 지배자의 논리에서 발생한다. 소시민들은 언제나 그들의 논리의 희생양이 되어 왔다. 보스니아는 각기 다른 민족, 종교가 혼재되어 공존했던 곳이었는데 항상 그런 곳들은 정치인들이 분쟁을 만들어내기 적합한 환경이라, 보스니아는 별안간 세르비아인들의 공격을 받는다. 그렇게 그들은 4년간 고립되었다. 이 이야기는 고립된 환경 속에서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1.소련이 지나간 자리에
소련이라는 나라는 어떤 지점에서 대단한 나라인 것이 다른 민족, 인종, 종교들을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해왔다. 그 말은 즉슨 그들의 이득에 따라 국가의 경계선이 그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배자의 논리이기에 일반 소시민들은 매일 밥을 먹고 학교나 직장에 다니는 것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그저 지배자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어놓은 경계선들이 해제되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꼭 독재자들이 등장한다.
독재자들이 으레 그렇듯 민족주의를 들고 나타난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를 봉쇄하고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보스니아에 이슬람만 사는 것도 아니었고,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한순간 위험에 처했다. 어디든 정치인들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위치에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일부 사람들의 이기심을 건드려 분란만 만드는 사람들이 더 많다. 굳이 같은 민족들끼리 함께 살던 사람들의 땅을 자의적으로 나누어 이산가족을 만들어내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일개 사람들의 불만이 학살로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2.U2의 등장, 지옥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은 있다
사라예보 시민들은 오늘도 지상도로에서 총을 맞을 수도 있었는데 그 지옥 속에서도 음악을 듣고 클럽을 만들고 결혼식도 연다. 지배자들이 만든 세상 속에서 고통받고 있지만 그들에게 휘둘리지만은 않는다. 인간이 그저 인간의 목숨이 경시되는 전쟁터 속에서도 그들은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위한 음악을 놓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U2가 등장하는데, U2라는 그룹에 대해 잘 몰랐음에도 이런 그룹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웠다. 문화예술인이 일반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가장 선하게 사용한 그룹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술인들이 자신만의 정치적 이슈를 예술에 녹아내는 데에 백 프로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학살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류애를 놓치지 않도록 희망의 끈을 쥐어주는 것은 결국 예술, 음악이었던 것이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도 음악과 영화에 검열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부가 이렇듯 문화예술을 신경썼던 것은 지배자의 논리를 무시하고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화합하게 만드는 매개체라는 것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어 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예술은 그저 추상적인 영역으로만 여겨지지만 감동, 사랑, 애정, 실망, 분노 모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효과를 일으킬지 알 수 없어 더 강력하다. U2가 사라예보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던 것은 희망이자 기쁨이요, 외부 사람들의 관심이었을 수도 있다. 그 관심 덕분에 그들이 4년이란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제 정치는 외면했지만 예술계는 그들의 저항을 승화시켜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3. 전쟁이란
전쟁은 하등 쓸모가 없다. 그저 지배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지배자들은 언제나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다른 나라가 불공평하게 내 나라를 뺏어가지 않는 한 현대 사회에서 전쟁이 발생하는 이유는 상당수가 지배자들의 명분을 견고히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들을 희생시키고 대의라고 포장된 작은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간다. 소규모의 기득권층을 위해서 존재하는 개념이 전쟁이고, 인간의 이기심의 바닥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 사람들의 의지가 빛나는 것은, 그들은 서로와 음악에게 의지하면서 그들의 삶을 유지했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더라도 클럽을 가고, 미인대회도 열면서 그들의 윤택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점이 존경스러웠고, 다양한 문화가 결집된 도시가 처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정답을 찾았던 것 같다.
총평
다큐멘터리라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도 극의 흐름이 지루하지 않았다.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봐도 좋을 것 같고, 무엇보다도 U2라는 유명한 밴드에 대해서 새로이 알게 되는 점이 있어 좋았다. 마지막 인터뷰이의 말 중에서, 그 떄, U2의 공연에서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화합이 지금도 다시 되살아나야 하지 않나 라는 말에 격한 공감을 표하고 싶다.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더 혼란해졌으면 혼란해졌지 더 안정적인 화합을 보여주고 있진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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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그림자, 왕과 왕을 만드는 자. 영화 <킹메이커>
영화 <킹메이커> 포스터
킹메이커(Kingmaker, 2022)
장르 : 한국, 드라마 │ 감독 : 변성현
출연 : 설경구(김운범), 이선균(서창대), 유재명(김영호), 조우진(이실장)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23분
메인 예고편영화 <킹메이커> 스틸컷
빛과 그림자는 함께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왕관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다수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영화 <킹메이커>는 그 빛과 그림자, 왕과 왕을 만들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영화 <킹메이커> 스틸컷
김대중과 엄창록이라는 실존인물
우선 이 영화가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재해석된 이야기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이야기 자체는 픽션이지만, 영화를 보자마자 배우 설경구가 연기한 ‘김운범’이 어떤 정치인을 모티브로 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구수한 전라도 억양, 카리스마 있는 눈빛, 그러나 한없이 국민을 위한 애정을 겸비한 정치인. 바로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을 지낸 故김대중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의 곁에 머문 ‘서창대’라는 인물은 다소 낯설었다. 그 역시 실존인물을 모티브 한 캐릭터다. 바로, 4수 끝에 김대중 대통령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며 선거판의 여우로 불렸던 ‘엄창록’이라는 인물.
영화 <킹메이커> 스틸컷
왕을 만드는 사람, 그 그림자에 대한 조명
사람들은 주로 빛을 본다. 무엇보다 당선된 정치인의 능력과 자질을 높이 평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이 당선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뒤를 받쳐주는 전략가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건, 빛과 함께 그 그림자를 조명했다는 점이었다. 영화 속 ‘창대(이선균)’는 운범의 그림자였다. 그는 운범을 존경했으며, 같은 이유로 운범을 돕고 싶어 했다. 계속해서 낙마하는 운범의 곁에서 자신의 전략을 총동원해 그를 당선시키고 싶어 했다.
영화 <킹메이커> 스틸컷
이기기 위해서라면 대의만큼 전략도 중요한 법
대의만 있으면 통할 거라고 믿던 우직한 운범과는 달리, 창대는 셈이 빠르고 영리했다. 상대 당의 수와 선거판의 흐름을 읽을 줄 알고, 상대 당을 교란시키거나 민심을 얻는 방법을 그는 알았다. 때로는 이겨야 한다면 마타도어식 술수까지 펼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지금에야 선거캠프를 꾸려 이기기 위한 책략들이 활발히 논의되는 시대지만, 6-70년대 그 시절에 어디 그런 게 있었겠는가. 실제 ‘창대’의 모티브가 된 ‘엄창록’이라는 인물은, 점조직을 도입하고 피켓을 이용하는 등 당시로써는 매우 기발한 전략으로 故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에 큰 힘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어찌나 대단한 전략가였는지, 박정희 정권에서도 탐내던 인물이었다고.
두 가치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운범과 창대는 같은 목적을 가졌으나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너무 달랐다. 그런 서로의 차이점이 시너지를 빚어 눈부신 성공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그런 만큼 더 강렬히 부딪히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공세도 마다않는 창대의 욕심이, 때때로 운범이 지키려는 가치를 훼손하려 하기 때문이다.
영화 <킹메이커> 스틸컷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하는 대의
나는 굳이 따지자면 창대에 가까운 사람이다.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약간의 꼼수쯤은 필요하다고 믿는 얄팍한 인간. 하지만 그런 이유로 늘 운범과 같은 우직한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 덜 확실하고, 더 느리게 돌아가더라도, 진심과 떳떳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운범의 모습을, 창대도 그래서 존경했던 게 아닐까.
물론 때때로 창대 같은 마인드는 분명히 필요하다. 대의를 펼치기 위해서는 일단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하는 것이 먼저니까. 하지만 운범을 통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아니었을지. 운범의 모티브가 된 故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 역시 그 메시지를 꼭 담고 있다. 편법과 술수를 쓰지 않더라도, 돌고 돌아 아주 느리게 실현되더라도, 언젠가 정의는 반드시 빛을 발한다고 말이다.
영화 <킹메이커> 스틸컷
변성현의 스타일리시한 연출
변성현 감독의 영화 <불한당>에 한참 동안 빠져있었던 적 있었다. 그의 미술적 감각을 특히 좋아했다. 색감을 이용해 달리 연출하는 분위기, 빼어난 미장센, 흥미로운 편집 등은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돋우는 그만의 마법 같았다. <킹메이커>에서도 그 감각은 여전했다. 그에 의해 구현된 60-70년대 풍경은 작은 소품부터 의상, 전체적 색감과 분위기까지도 그만의 특유의 스타일리시함이 묻어나,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이에게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느낌이었다.
영화 <킹메이커> 스틸컷
믿고 보는 명배우들 라인업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운범을 향한 존경, 이기고자 하는 전략가의 야망을 모두 담아낸 이선균의 섬세한 연기는 늘 그렇듯 안정적이다. 각각 청와대의 이 실장과 유망한 야당 국회의원을 연기한 조우진, 유재명 배우의 연기 역시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 대단한 배우들의 앙상블 그 중심엔 설경구가 있다. <불한당>에 이어 <자산어보>까지 매번 색다른 연기를 보여주며 남자 배우 3대 트로이카에서 빠지지 않는 설경구의 연기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을 만큼 탄탄하다. 전라도 억양과 표정 연기는 일품이었고, 연설 장면에서는 뜨거운 정치적 신념이 묻어나 너무도 뭉클했다. 그의 관록은 정말이지 언제 보아도 놀랍다.
* 해당 포스팅은 시사회 초대 및 소정의 비용을 지원 받아 작성하였으며, 내용은 주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글쓰는 우두미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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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위도우> 마블이라서 더욱 실망스러운 마지막 인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벤져스가 분열한 후 '로스 장관(윌리엄 허트)'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도망친 ‘나타샤 로마노프/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어느 날 오래간만에 휴식을 취하던 그녀 앞에 16년 전 위장 가족으로 첩보 작전에 함께 투입되었던 가짜 여동생 '옐레나(플로렌스 퓨)'가 나타난다. 그녀는 나타샤가 과거에 제거한 줄 알았던 소련 첩보조직 레드룸의 수장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가 건재하며, 레드룸이 여전히 많은 위도우들을 세뇌해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나타샤는 상대의 능력을 복제하는 빌런 ‘태스크마스터’와 새로운 위도우들의 위협에 맞서 레드룸을 제대로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레드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한 때 옐레나와 함께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첩보활동을 했던 옛 동료 '알렉세이(데이빗 하버)'와 멜리나(레이첼 와이즈)'를 찾아간다.
어벤저스 원년멤버 중 홍일점이자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죽음을 맞이한 블랙 위도우의 첫 솔로 영화인 <블랙 위도우>는 겉보기에 풍성한 선물 보따리 같다. 국내에서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이후 2년 만에 만나게 된 마블 작품이기에 MCU의 팬이라면 격하게 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타샤의 가족을 쫓는 쉴드부터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속 공항 전투 직후 나타샤를 쫓는 로스 장관, 또한 직접 등장하지는 않아도 깨알같이 언급되는 어벤져스의 존재감은 관객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이미 선보인 <팔콘 앤 윈터솔져>와 하반기에 선보일 드라마 <호크아이> 간의 연관성을 부각하는 쿠키 영상도 앞으로 이어질 MCU의 페이즈 4에 대한 기대감을 키운다.
하지만 기다림이 너무 길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나타샤의 마지막 인사는 반가움만큼이나 실망도 크다. 실망감이 가장 먼저, 그리고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은 액션이다. 한 편의 007 시리즈를 보는 듯한 오프닝 크레디트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블랙 위도우>의 액션은 다양한 첩보 영화를 닮았다. 실제로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태스크마스터와 펼치는 추격전과 이어지는 지하철 역에서의 액션의 구성이나 전개는 <007 스카이폴>을 연상시킨다.
또한 엘레나가 모로코에서 해독제를 쫓는 장면에서는 <제이슨 본> 시리즈의 그림자가 유독 진하게 느껴진다. 부다페스트의 한 아파트에서 자매가 부엌칼부터 커튼까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펼치는 액션을 격렬한 핸드헬드로 촬영한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블랙 위도우>가 <본> 시리즈의 액션을 오마주한 것은 과거 자신의 잘못을 되돌리려고 한 제이슨 본처럼 나타샤도 스스로를 짓누르는 죄책감을 떨쳐내려 하는 것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액션의 질은 여러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 눈사태를 배경으로 삼거나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등 스케일이 커진 것과는 별개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같은 전작들에 비해 블랙 위도우의 액션은 동선이나 편집의 측면에서 박진감이 부족하고 밋밋하게 연출되었다.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를 강조할 한 끗을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크다. 빌런인 태스크마스터의 활용법이 대표적이다. 상대의 기술을 복사하는 그는 분명 짧은 순간에도 캡틴의 방패술, 호크아이의 궁술, 블랙 팬서의 발톱, 블랙 위도우를 닮은 움직임까지 모두 보여준다. 하지만 다리 위에서 나타샤와 잠시 대치할 때를 빼면 그에게는 자신의 능력과 존재감을 뽐낼 분량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인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에서 윈터솔져가 매 액션씬마다 캡틴 아메리카를 위기에 빠뜨리며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드라마의 비중을 높이는 대신 액션의 분량이 줄어든 점도 문제다. 예고편에서 보여준 장면들을 제외하면 추가된 장면이 없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액션의 분량을 줄인 만큼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거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블랙 위도우>의 드라마는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가족 영화 서사와 레드룸에 세뇌된 다른 위도우들을 해방하는 여성 영화 서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플롯 모두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선 네 명의 주인공이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그 과정이 너무 빠르고 간편하다. 나타샤, 옐레나, 알렉세이, 그리고 멜리나가 만나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날카로운 감정과 아픈 경험, 시간이 흐른 만큼의 오해가 쌓여 있다. 위장 가족을 진짜라 믿었던 옐레나는 배신감을 호소하고, 나타샤는 레드룸에서 비윤리적인 연구를 진행한 멜리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위장 가족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알렉세이와 멜리나는 자매의 태도에 당혹스러워한다.
그런데 영화는 16년의 세월 동안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단칼에 잘라버린다. 알렉세이와 옐레나는 그들이 오하이오에서 자주 듣던 'American Pie'를 함께 흥얼거리면서 서운함을 말끔하게 씻어낸다. 멜리나는 작전을 위해 찍은 가짜 가족 앨범을 보던 나타샤가 자신이 그녀에게 남긴 말을 일종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레드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두 장면을 제외하면 작중 네 식구가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장면은 전무하다. 곧장 영화가 레드룸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끈끈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의 화해와 결성 과정을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이 직접 영향받았다고 밝힌 엑스맨 시리즈의 <로건>과 비교해보면 그 분량과 비중이 확연히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나타샤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혈연을 찾는 것, 그 과정에서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함께한 세월과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일 때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두 가족이 남아있음을 깨닫는 것은 MCU의 세계관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다. 나타샤가 어벤져스라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모두가 아는 미래에 개연성을 더하고, 그녀의 뒤를 이을 옐레나의 행보에 당위성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러한 가족 드라마를 영화가 다루는 방식은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도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 다른 축인 여성 해방 서사도 마찬가지다. 물론 옐레나로부터 레드룸의 존속을 알게 된 나타샤가 다른 위도우들을 해방시키는 플롯 자체는 자연스럽다. 나타샤가 레드룸에서 학대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그 기억과 관련해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이미 밝혀진 만큼, 히어로인 그녀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영화 외적으로도 뜻깊은 선택이다.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는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전 CEO인 아이작 펄머터가 여성 캐릭터의 완구 판매량이 적다는 이유로 블랙 위도우의 완구 판매를 중지시키는 등의 수난을 겪은 바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뇌에 걸려서 조종당하고 목숨이 걸린 상태로 현장에 투입되는 등 극심한 억압을 받는 위도우들을 구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할 여지를 주지 않고 급하게 목적지를 향해 뛰쳐나간다. 예를 들어 나타샤는 그녀가 부다페스트에서 죽인 줄 알았던 드레이코프의 딸 안토니오와 재회한다. 죄책감의 발로로 나타샤는 해독제를 뿌려 아버지에게 조종당하던 그녀를 세뇌에서 풀어주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녀의 존재와 정체성을 회복시켜준다. 그렇게 나타샤는 용서를 빌고 안토니오는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아무리 기계적으로 세뇌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이유로 자신을 죽일 뻔했던 사람의 말 한마디를 듣고서 그 어떤 적대감도 없이 순순히 그녀를 용서하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다. 피해자의 심리가 전혀 묘사되지 않은 채 나타샤의 감정선만이 일방적으로 전개되기에 더욱 그렇다. 16년이 넘도록 레드룸을 위해 일하던 멜리나가 나타샤와의 짧은 대화만으로 마음을 돌리는 장면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는 영화의 의도와 메시지에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을 끼워 맞추는 작위적인 전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토니오나 다른 위도우들을 세뇌당하고 조종당하던 다른 캐릭터의 사례와 비교하면 <블랙 위도우>의 문제는 더욱 명확해진다. 사실 <블랙 위도우>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 두 히어로 모두 자신의 과거에 의해 고통받는다. 캡틴은 가장 절친한 전우인 버키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나타샤는 어린아이였던 안토니오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죽였다. 그 죄책감의 대상이 한때 자신이 제거했다고 믿은 적(하이드라와 레드룸)에게 세뇌당한 상태로 재등장하는 것, 두 히어로 모두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세뇌를 푸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 그 과정에서 자신의 후계자(팔콘과 옐레나)를 찾는다는 것도 동일하다. 세뇌 피해자인 윈터솔져와 안토니오 모두 자신이 속한 집단과의 권력관계에서 철저히 을의 입장에 있었던 것도 같다. 단지 세뇌 대상자가 여성과 같은 특정한 정체성에 속하는 맥락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안토니오가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순식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과 달리 윈터솔져(버키)는 세뇌의 여파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 이후로도 3편의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에서 치열하게 스스로와 싸워야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윈터 솔져>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블랙 위도우>의 여성 해방 서사는 더욱 의아하고 어색하다. <윈터솔져>와 달리 안토니오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다. 그녀가 내적으로 주도권과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옐레나 역시 빨간 해독제를 맞은 뒤 곧장 세뇌에서 풀려날 뿐, 그 과정에 본인의 의지는 개입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을 내리찍고 있는 억압과 폭력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고, 여성 간의 연대와 해방이라는 메시지에도 의도한 만큼의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극 전개의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 한 번 맞으면 모든 세뇌를 단번에 풀어내는 빨간 해독제의 존재는 간편한 스토리텔링을 상징하는 도구로 보일 정도다.
이처럼 드라마의 완성도가 기대 이하인 것은 <블랙 위도우>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미션이 주어진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블랙 위도우>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와 <인피니티 워> 사이의 공백을 메우고, 그간 암시만 되었던 나타샤의 과거사를 들려주고, 여성 해방 서사를 풀어냄과 동시에 후계자인 옐레나를 소개해야 했다. 각각 영화 한 편으로 만들어도 충분할 여러 플롯을 한 작품에 모두 담아내야 했기에 자연히 액션의 분량은 줄고, 전개도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다. 당장 주인공 쪽에서 할 이야기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너무 많다 보니 빌런의 존재감은 찾을 수 없다. 또한 가족 영화의 드라마도 여성 해방 서사에 종속되어있다 보니 내실을 충분히 기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위장 가족을 다시 찾고 만난 것은 어디까지나 나타샤와 옐레나가 레드룸을 공격해 위도우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영화 전체에서는 곁가지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수많은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내기 위해서 <블랙 위도우>는 너무나도 손쉬운, 그래서 영화의 완성도를 더욱 망가뜨리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바로 나타샤의 조력자인 메이슨의 등장이다. 그는 못하는 일이 없다. 나타샤가 숨어 지낼 은신처, 헬기, 각종 무기와 유니폼, 제트기에 이르기까지 말만 하면 다 구해준다. 나타샤가 은신처에서 <007> 영화를 보는 것을 고려하면 <007> 시리즈 속 제임스 본드의 장비를 담당하는 조력자인 Q를 오마주한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전 마블 영화에서 한 번도 등장한 적 없고, 작중 쉴드 혹은 다른 국가 정보부 소속 요원이라는 설명도 없다 보니 그의 행적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존재는 어떻게든 플롯을 전개시키려는 편의적인 두구와도 같고, 영화의 설득력을 한 번 더 떨어뜨린다.
결국 <블랙 위도우>에게 남는 것은 서두에 언급했듯이 앞뒤 시리즈와의 연관성을 확인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소개하고, 다가올 시리즈들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옐레나 비긴즈>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 MCU는 마치 이스터에그를 넣기에 바빴던 페이즈 1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이미 20편이 넘는 작품들을 보면서 마블이 영화를 얼마나 잘 만들 수 있는지 그 능력과 가능성을 충분히 아는 입장에서 세계관이 갓 시작되던 시기 작품들과의 비교는 그 자체로 아쉬움을 남긴다. 이렇게 <블랙 위도우>는 마지막 인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MCU에서 퇴장한다.
P(Poor, 형편없음)
독창성도 설득력도 없이 관성만 남은, 현시점 가장 실망스러운 MCU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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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블랙 위도우> 마지막 선택 예고편
‘어벤져스’ 군단에서 강력한 전투 능력과 명민한 전략을 함께 겸비한 히어로 ‘블랙 위도우’ 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