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2-10 21:49:46
마음과 시선의 방향
영화 <9월 5일: 위험한 특종> 리뷰
SYNOPSIS.
1972년 뮌헨, 올림픽 생중계에 도전한 ABC 방송국 스포츠팀은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선수촌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이고 있음을 알고 이를 생중계로 보도한다. 솟구치는 시청률과 9억 명의 시청자까지,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단독 특종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그들은 테러리스트들 역시 자신들의 방송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올림픽 사상 초유의 테러 인질극 생중계! 방송을 멈출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POINT.
✔️ 실화 기반이지만,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전개됩니다.
✔️ 그러나 잔인한 장면은 들어있지 않아요. 저는 이 지점이 좋았습니다.
✔️ 속도감 있는 전개 안에서, 방송국에서 일하는 언론인들의 책임감과 고민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 더불어 언론인들의 전문가다운 면모로 척척 손발이 맞는 장면들도 재미있었어요.
✔️ 그 장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다양한 배우들의 협연입니다. <퍼스트 카우>, <쇼잉 업>에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존 마가로, <티처스 라운지>에서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준 레오니 베네쉬가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 포스터만 보면 <스포트라이트>보다 10년 앞서 나온 영화처럼 보여요... 하지만 영화는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영화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버거워하고, 영화라 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테러를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건 존 마가로의 얼굴이 궁금해서였다. <퍼스트 카우>에서 소처럼 순박한 눈망울을 보여주었고, <쇼잉 업>에서 불퉁하게 세상과 불화하는 동생의 표정을 보여주었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그리고 나는 존 마가로를 못 알아볼 뻔 했다. 아니 존 마가로를 궁금해 할 겨를이 없었다. 빠른 전개 안에서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하느라.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영화관에 앉았지만, 극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언론의 생중계 현장을 담은 영화이다 보니 그들의 대화와 상황 설명을 통해 친절하게 정보가 전달되고, 방송을 만드는 과정을 척척 담아내어 그 설명이 늘어지는 법도 없다. LA 비평가 협회상에서 편집상을 수상한 이유를 알 것 같은 대목이다.
전개가 빠른 영화의 스토리라인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보고 나서 마음에 남은 생각들만 정리해 보고 싶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
영화 초반에 인물들이 서로의 국적을 인식하고 있음이 대사에서 수 차례 드러난다. 지네딘 수알렘이 연기한 캐릭터 자크의 경우, 자크라는 이름보다 프랑스인이라는 국적으로 더 많이 불리고 인지될 만큼 국적이 강조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상황을 조망한다.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세계, 세계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독일. 앙금은 남아있지만 이제 가장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이벤트가 펼쳐져야 한다. 국적에 따라 다른 입장은 개인의 감정에도 영향을 준다. 평화와 우호를 말하는 행사에서조차 국적을 고려하여 방영 우선순위를 결정할 만큼.
우리 각자의 자리는 과연 각자만의 자리인가. 독일과 프랑스, 미국의 관계 뿐 아니라 영화의 배경이 되는 테러 사건 또한 국적에 따라 다른 입장과 감정이 뒤얽힌 사건이다. 테러리즘 사건 하나만 놓고 가타부타 판단하기엔 너무 많은 사건과 역사가 줄줄이 얽혀 있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맥마흔 선언과 밸푸어 선언의 발화자였던 영국을 비롯해 여기 얽힌 국가들이 더 많이 있다.
과거는 온전하게 과거로만 존재하지 못하고, 타자는 철저하게 타자로만 존재하지 못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무언가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가능한가? 언론인이라면 다르게 답할 수 있겠지만... 시민인 나로서는 그저 연결되어 있는 서로를 감각하며 나의 자리를 확인하고 내 시각이 어느 방향에 서 있는지를 좀더 명확히 아는 것, 그리고 그만큼을 감안하는 것, 어쩌면 그게 최선의 균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 밖에서 조심스러워지는 마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영화를 보는 동안도 영화 바깥이 궁금했다. 그리고 보는 동안 혹시라도 이스라엘의 '피해자성'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올까봐 꽤나 긴장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 먼저 감독과 제작진이 유대인인지 다급하게 찾아보게 될까봐 긴장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영화의 안과 밖 또한 예외가 아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인질이 석방되고 군이 철수하고 있다. 그동안 사람을 말살할 것처럼 쏟아붓던 공격이 멈춘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 지구를 "장악"해서 "재개발"하곘다는 소리를 하고 있고, 휴전 협상 다음 단계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런 세상에서 팔레스타인 과격 단체가 이스라엘 대표단을 인질로 잡아 벌인 테러극을 담은 영화라면, 이 영화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그리는지 민감하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전혀 담지 않았고, 테러 사건의 전개는 전화와 전보를 비롯한 소식으로 전달되어 대사로 공유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본인 할 일을 하는 언론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 영화다운 선택이다.
영화 속 언론인들은 이제 막 도입된 위성 생중계라는 신기술과, 자신들이 정통한 각종 기술을 펼쳐 보인다. 옛날 텔레비전에는 저런 식으로 자막을 깔았던 거구나, 사진을 저런 식으로 확대했구나, 스튜디오 연결은 저렇게 하는구나... 같은 생각들을 하며 본 그들의 능숙한 손놀림 뒤에는, 지금 어디와 연결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선택해야 하는 언론인들의 본능이 있다. 역시나, 영화 밖에서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이다.

제작자의 마음과 시청자의 마음
능숙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판단을 내리는 언론인들의 모습은, 전문가처럼 보여 한편으로는 멋있으면서도... 동시에 징그럽다. 선택을 내릴 때 그들은 인간성을 우선순위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이 미칠 파장을, 그 경우의 수를 일일이 계산한다면 방송은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이 영화처럼 급박하게 굴러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뉴스 보도국이 아니라 스포츠국이지만 지금 상황을 곧바로 담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사명감과, 방송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과, 갑작스럽게 굴러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따라가는 데 분주한 마음은 이리저리 뒤엉킨다. 그 안에서 최소한의 윤리 준칙이 무너지기 너무 쉬워 보이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제작자의 마음보다 더 징그러운 것을 발견하는데, 내 안에서 발견한 시청자의 마음이다. 사건 전개를 궁금해 하면서 상황이 전개되기를 기다리는 기자의 마음, 또 나의 마음. 그건 어디를 향하고 있나. 심지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모두가 각자의 스크린을 각자의 알고리즘 안에서 보고 있는 세상이다. 더블체크되지 않은 정보 채널이 마구 난립하는 세상.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언론인들이 서로 논의하며 갈등하여 적정선을 찾아가는 결과물조차 뜻하지 않은 사고를 칠 수 있는데, 그 과정조차 생략된 '가짜 뉴스 채널'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실시간으로 본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한때 실시간으로 보면서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렸다. 거대한 참사가 일어나는 장면을 몇날며칠 우리가 가만히 보고 있었던 순간들. 정제되고 편집된 뉴스 영상이 아닌, 마구잡이로 찍힌 사고 현장을 조용한 방에서 핸드폰으로 들여다 보면서 '이걸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아?' 싶었던 순간들. 가슴이 쿵쾅거려 잠들기 어려웠던 밤들로 이어졌지만, 이런 날들이 길어지고 아득해지면 무뎌질 수밖에 없다.
지난 15개월 동안 가자지구에서 얼추 추산하기로도 4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이 중 70% 가량이 여성과 어린이라는 UN의 분석이 있었다.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추측이, 카더라 통신이 아닌 의학 학술지에 실렸다. 병원과 학교는 의례적으로 마지막 안전지대지만, 전쟁 규칙을 무시하고 조준 폭격하기도 했다. 하루에 몇 명씩 죽었다더라, 그 중 아이들이 몇이라더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끔찍한 소식을 무수히 들으며 나는 이미 무뎌졌다.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괴롭게 하거나 무뎌지게 하거나, 둘 중 하나의 수순이 되기 쉽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이 의미있게 느껴졌다. 불 꺼진 스튜디오에서 제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 그곳은 유일하게 희미한 빛이 드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는 게시판이다.
우리의 시선은 계속해서 흔들린다. 상황 전개 소식을 듣고 복도에 선 언론인들을 비추는 카메라가 흔들렸듯. 물론 흔들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잡겠지만, 언론인도 흔들린다. (흔들렸을 때의 결과가 너무 끔찍하기에, 그들에게 남다른 균형 감각이 주어지길 간절히 바라게 되지만.) 시청자도 흔들린다. 시청자는 숫자가 되어 언론인에게 영향을 주고, 언론인들은 또 다른 숫자를 창조해낸다. 우리는 순환한다.
그러나 흔들림 끝에 우리의 시선이 희미한 빛 아래 사람의 얼굴에 머물 수 있다면. 결국 시선은 마음 가는 곳을 향하게 되어 있다. 95분을 빼곡하게 채우는 영화적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영화 바깥 나의 시선을 가다듬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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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보이는 자에서 보는 자로
시선의 방향
그리스로마신화에 아르고스(Argos)라는 이름의 괴물이 등장한다. 그는 온몸에 붙어있는 100개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자다. 아르고스는 제우스의 애인인 이오를 감시하다 제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헤라는 그 100개의 눈을 공작의 깃털에 붙여준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은 뛰어난 감시자를 뜻한다. 판옵티콘의 감독자들은 죄수들의 모든 것을 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 있는 자들은 결코 위를 볼 수 없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항상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관음되던 여성이 고개를 들고 관찰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곧 비난으로 이어진다. 은밀하게, 자기들끼리 관음하고 관찰하는 '보는 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다 한순간에 '보이는 자'의 위치에 서버린 관객들은 당황스럽다.
아시아단편 단편선은 아시아 여성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 중 경쟁에서 선정된 작품들을 모아둔 섹션으로, 단편선 1부터 4까지 나뉘어 있다. 단편선 1에 속한 몇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들에서 여성은 더 이상 '보이는 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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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싶지만(Crack)(2021)
감독 : 이현주
상영시간 : 23분
시놉시스 : 25년 동안 혼자 살아온 민영은 함께 살게 된 조카 연정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연정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잘 지내고 싶지만>의 민영과 연정을 보자. 민영은 연정이 오기 전 집을 깨끗이 닦고 연정을 맞을 준비를 한다. 연정의 약봉투를 세심히 살피고, 배탈이 난 연정을 위해 죽을 배달시켜 준다. 연정은 연정대로, 민영이 기침을 하자 쌍화탕을 먹어 보라고 권하고, 민영의 몫까지 삼겹살을 사온다. 민영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방도 한 칸뿐이지만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 주인으로서 객식구인 연정을 관찰하고 살핀다.
그러나 민영은 혼자 산 사람이다. 혼자 오래 살아온 사람이 느끼는 양가감정이 있다. 혼자 있으니 쓸쓸해서 누가 옆에 있었으면 싶은 감정과 누구도 내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을 지키고 싶은 감정. 홍성은 감독의 <혼자 사는 사람들>(2021)에서 혼자 밥 먹고 혼자 TV보는 진아처럼, 민영도 혼자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제가능한 삶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민영의 평화로운 삶에 조카 연정의 침입은 미세한 균열(Crack)을 만들어낸다. 호기롭게 '잘 지내보자'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 이제 민영의 집에는 연정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25년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타인의 눈. 그 눈으로 민영은 관찰당하기 시작한다.
아플 때 쌍화탕을 데워주었더라도, 밤에 시끄럽게 뭘 먹지 않았어도. 아침에 잠에서 깬 민영이 TV를 켰을 때 연정이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어도, 화장대 앞에 누워있는 연정의 다리를 치웠을 때 연정이 몸을 돌리지 않았어도 민영은 견디기 어려웠을 거다. 민영은 통제불가능한 연정의 눈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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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The Dress)(2022)
감독 : 스팡팅
상영시간 : 30분
시놉시스 : 리얼돌 호텔에서 일하는 원치는 어느 날 이상한 손님을 맞는다. 그는 매 방문마다 인형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 놓고 떠난다. 원치는 리얼돌이 되고픈 욕망을 난생처음 느끼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드레스>는 리얼돌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 호텔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눈으로 호텔을 관음한다. 호텔 청소부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봐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른 척, 호텔을 드나드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모른 척 해주는 사람이다. 사람일까? 어쩌면 NPC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다시 <프리 가이>의 가이를 소환해보자. NPC였던 가이는 자신이 살던 세상의 수상함을 깨닫고 세상 밖 현실의 진짜 사람과 소통하게 되면서 감정을 깨닫는다.
호텔이든 모텔이든 여관이든 묵을 일이 생기면 이따금 청소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내 눈에 보이는 자들이며 그들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못본 척 한다에 가깝지만). 리얼돌 호텔을 찾는 자들 역시 자신은 볼 수 있지만 인형은 절대 자신을 볼 수 없으므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무슨 짓이든 가능하다. 죽은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히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
청소부 원치는 리얼돌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놓고 떠나는 남자가 궁금해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원치는 보는 자다. 섹스돌에 드레스를 입히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남자를 훔쳐보는 자. 그는 원치의 존재를 모르고 보여지는 자로 전복된다.
호텔에 전기가 끊겨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된 날, 원치는 그의 예약을 취소하지 않고 그가 이용할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기다린다. 그는 보는 자로 들어갔으나 인형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이는 자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그는 호텔을 황급히 떠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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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중의 탑(The Top of the Tower)(2022)
감독 : 박은새
상영시간 : 22분
시놉시스 : 반지하에 살고 있는 지숙이네 가족. 어느 날 십자가에서 빛이 나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빛을 다시 보기 위해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침수피해만 겪은 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이 창문에다 대고 노상방뇨하고 구토하는 등의 일상적인 테러를 겪는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반지하 성범죄, 반지하 불법촬영 등의 뉴스기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권력을 가진다.
수험생인 지숙의 가족도 반지하에 산다. 지숙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갑자기 방에 걸어둔 십자가에서 빛이 나더니 천장으로 튀어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아! 드디어 성령을 본 것이다. 지숙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는 성령을 본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간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신도는 성령이 십자가에서 빛나다가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이후 아들이 연금복권에 당첨되었단다.
하지만 지숙은 반지하에 산다. 목사가 이르기를, 성령이 하늘로 올라가야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닿을 텐데, 지숙네 가족은 너무 낮은 곳에 있다. 이들이 반지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지숙이 잘 되는 것이다. 지숙은 서울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사실 택도 없지 싶다.
목사는 이 가족에게 옥탑방을 소개해준다. 엄마 아빠는 있는 돈 없는 돈, 친구 친척 사돈의 팔촌의 돈까지 끌어다가 무리하게 이사를 한다. 이삿짐 비용이라도 아껴보려고 세 가족이 죽도록 짐을 올린다. 이 집도 역시 엘베 없는 집이다.
마지막 매트리스만 올리면 이사도 끝인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지숙은 또 다시 성령을 목격한다. 지숙을 가여이 여긴 하나님의 은혜일까. 지숙은 성령의 빛을 따라 옥상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나 지숙의 눈 앞에는 거대한 고층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폭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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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단편 단편선1에는 위의 세 작품 외에도 <로봇이 아닙니다.>와 <거미>까지 총 다섯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거미>는 에도시대에 강도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동생의 복수를 하는 여자 이야기이고, <로봇이 아닙니다.>는 자율주행자동차가 백인이 아닌 여성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여 발생한 사고를 다룬다. 서두의 아르고스 이야기는 <로봇이 아닙니다.>에서 가지고 왔다. 연구에서 과소대표되고 비표준화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선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묶어보기로 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아시아단편 단편선1을 상영하던 날, 영화제 현장에서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아마 동시간에 나와 함께 영화관에 있었던 분들이 계실 것이다).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제법 큰소리였다. 양손으로 성기를 쥐고 흔드는 짓을 몇십 분은 한 것 같은데(하필 나는 그 남자 근처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여자들이 꺅 하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당하게 성기를 흔들고, 놀란 여성들을 보는 자로 군림하고 싶었겠으나 딱하게도 현장에서 그는 보이는 자, 아무리 봐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그 누구도 대꾸해주지 않는 자가 되어 있었다.
자동차 창문 열고 따라오며 똑같은 짓을 하던 성인 남성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던 교복 입은 어린 여자 아이도, 그런 사람을 보니 딱하더라는 글을 쓰는 어른 여자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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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년 8월 27일 14:00~15:4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년 8월 29일 16:30~18:1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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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감독 홍원찬이 낯설어서 영화를 보고 나와 찾아봤다. 이 영화는 세 번째 감독 작품이지만, 이미 '추격자', '작전', '황해'를 각색한 경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은 검증된 것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목을 끌고 다니는 듯한 격렬한 감정이 이어졌다.
하드보일드 액션 느와르.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단어다. 나중에 봤지만, 포스터에도 '하드보일드 추격 액션'이라고 써 있는 걸로 봐서, 감독은 '하드보일드'한 연출에 특히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것이, 주인공 인남(황정민)과 레이(이정재)는 영화에서 웃지 않는다. 아니, 웃을 수 없다. 이들이 놓여 있는 상황은 결코 웃을 만큼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예정된 결말을 향해 직진하는 두 사람의 운명은 그들이 살아온 과거의 집적이며, 스스로가 만든 비극의 결말이기도 하다.
영화는 훌륭하다. 재미있고, 잘 만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한국영화의 작품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생각도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라면, 제작비, 연출, 배우의 연기, 미장센, 시나리오, 영화의 미학적 수준 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을 거론할 수 있는데, 제작비는 헐리우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예산이지만, 연출, 배우의 연기, 시나리오 등은 거대 자본을 들인 영화보도 뛰어나다는 점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다.
영화의 미학적 측면으로는 한국영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서사구조가 있는데, 이미 홍원찬 감독이 이전에 참여한 작품들 '추격자', '황해' 같은 영화만 봐도 서사와 인물의 특별한 개성이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영화가 '세계화'하고 있다는 증거를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분명 한국영화지만, 주요 배경은 태국 방콕이다. 주인공은 모두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주인공들은 방콕에서 만나게 된다.
기존의 한국영화에서도 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많지만, 이 영화는 방콕이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구체적, 물적 토대로서 작동하고 있으며, 방콕의 최대 조직폭력배와 연결되면서 갈등의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고, 서로의 이해관계를 비틀며,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효과를 보인다.
두 사람은 '악한'이지만, 각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인남과 딸의 관계는 '레옹'과 '아저씨'에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그건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다. 레이의 폭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그에게서 '터미네이터'의 흔적이 보이는 것 역시 우연일 뿐이다.
하드보일드는 그 자체로 비극이다.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하드보일드'가 아니다. 따라서 주인공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으며, 다만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끝낼 것인가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영화에서 하드보일드는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서사, 다른 하나는 연출이다. 영화에서 장르로서의 하드보일드를 말하려면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성립해야 한다. 비극으로 치닫는 서사와 미장센으로서의 하드보일한 연출. 이 영화는 두 가지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영화다.
물론, 트렌스젠더(아니면 여장남자) 유이(박정민)의 등장이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고 있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유이의 모습은 게이의 전형성, 통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 그것이 영화의 분위기와 겉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이 캐릭터에 대한 두 가지 설정이 가능한데, 지금처럼 겁 많고, 여성스러운 '유이'의 모습으로 등장해 인남을 돕는 것과 하드보일드한 설정에 걸맞게 냉정하며 잔인한 인물로 변하면서 두 주인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방식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희망'을 보이는 것이 하드보일드한 분위기와 전혀 다르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관객에게 최소한의 숨구멍이라도 틔워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인남의 바람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연출은 미장센의 전부라고 할 수 있지만, '촬영감독'이 따로 있을 만큼, 촬영은 감독의 전적인 재량권에서 벗어나 있다. 홍경표 감독은 하드보일드한 장면을 위해 극적인 장면에서 빠르거나 느린 화면을 만든다. 홍경표 감독이 기존의 영화 - 설국열차, 곡성, 버닝, 기생충 등 - 에서 분위기에 어울리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솜씨를 보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내는 촬영 기법을 매우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좁은 골목에서, 실내에서 벌어지는 격투가 자주 일어나는데, 액션은 과장되지 않되, 관객이 보기에는 역동적인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속도를 느리게 혹은 빠르게 조절함으로써, 폭력의 강약과 충격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악한이 악당을 상대로 싸운다. 영화에서 평범한 사람이 죽는 경우는 딱 한 번, 인남의 애인 영주의 죽음 뿐이다. 그 외 모든 죽음은 악한이 악당을 죽이는 것이다. 정부 특수요원이었던 인남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살인청부업자로 살고, 재일동포 조폭 레이는 일본에서 태어난 한인 동포이며 이들은 제3국 태국 방콕에서 만나 어쩔 수 없이 방콕 최대 범죄조직을 상대로 싸운다.
인남의 삶은 자기 의지와 관계 없이 비틀렸기에, 그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고, 숨을 쉬고, 밥을 먹어도 그의 삶은 마치 무덤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럽다. 반면 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정'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그의 과거가 그를 '백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불우하고, 불행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인남은 딸 유민을 구하기 위해 방콕 최대 폭력조직의 중심으로 뛰어들어가고, 레이는 인남을 잡기 위해 그 뒤를 쫓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방콕 최대 폭력조직과 맞닥뜨린다. 이 과정에서 방콕의 폭력조직은 와해 수준으로 망가지고, 태국 전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한국사람의 등장으로 들썩거린다. 만약 주인공의 추격전을 국내에서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차이는 무엇일까.
기존의 액션 영화에서는 배경 공간을 익숙한 곳으로 한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국내의 크고 작은 도시, 누구나 알고 있는 장소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편하다는 장점과 함께 낯익어서 식상하다는 뜻도 된다. 배경 공간을 외국으로 옮기면서, 외국인, 외국사회 속으로 주인공이 들어가는 방식은 낯설지만 신선한 모험이고, 비슷한 이야기라도 '낯설게 하기'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낯설게 하기'는 서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다. 공간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인물의 생각과 행동 역시 낯설게 보이고, 관객은 공간과 인물의 낯선 모습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영화에서 방콕 시내와 태국 배우들이 단지 배경이나 소재로 등장하지 않고, 서사에 개입하는 구체적 역할을 통해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영화는 추격과 액션을 느와르로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중요한 요소를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경이 되는 태국 방콕에서 주인공들은 태국 최대 폭력조직과 만나게 되는데, 이 폭력조직이 벌이는 '사업'이 상상을 초월한다.
불법 마약판매, 성매매, 인신매매, 장기매매, 경찰 뇌물 공여, 아동 노동 등 최악의 범죄를 다 저지르고 있다. 따라서 방콕 범죄조직과의 싸움은 인남, 레이 모두 조금의 거리낌 없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특히 인남은 딸 유민을 구출해야 하는 절박함과 그들의 잔혹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기 마련이지만, 인남을 바라보는 시선은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묻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인남의 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한 때 국가의 비밀요원으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버려진 개인, 그것은 국가의 폭력이며, 인남은 그 폭력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최근 한국영화가 선전하고 있다. '강철비2'도 훌륭하고, 이 영화 역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팬으로 매우 행복한 경험이다. 홍원찬 감독이 각색한 기존의 영화들 - 추격자, 황해 등 - 도 한국영화에서 빛나는 영화였듯이 이 영화도 최고의 영화 목록에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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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면서 남, 남이면서 가족.
누군가를 잃었다는 상실감도 잠시 현실 앞에 가로막힌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분명히 힘을 들여 돌보았지만 ‘돌봄’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자리인 만큼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조금 힘들었다. 물거품과 같은 0인 상태에서 순영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발걸음을 내밀고 혼자 해낼 준비를 한다.
당연하게 믿었던 것들에 의한 배신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던 순영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사막을 헤매듯 처음 시작은 너무 어렵고 벅찼지만 길을 찾아 나아가면서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새로운 곳에서 겪게 되는 사소한 오해와 편견에 지쳤지만 순영의 상황에서 가장 지치고 힘들게 하는 건 가족이라는 존재였다.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남이었고, 남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가족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겉만 이름만 가족인, 붕괴된 가족의 구성을 적나라고 차갑게 드러내는 영화였다.
이젠 문을 열고 같이 땀을 같이 흘려줄 사람과 함께 할 순영의 미래를 응원하고 싶었다. 잇따른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순영의 모습을 보면서 따뜻한 영화가 한편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쉽지 않은 길에서 쉽지 않은 일을 해내가는 모든 이들에게 힘이 될 영화를 추천한다. 단편영화 순영은 도봉구 성평등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퍼플레이에서 온라인 상영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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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란 | 해학으로써 얼기설기 묶은 임진왜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 본래 양인으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노비였다는 이유로 노비가 된 천영은 마침내 양인이 될 기회를 잡는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무예 재능을 활용해 무술 실력이 좀처럼 향상되지 않는 종려를 훈련시키고, 그 대가로 면천을 요구하겠다는 것. 그렇게 천영과 종려는 매일 같이 몸을 부대끼고, 노비와 양반 사이에서는 우정이 꽃피운다.
하지만 시대는 그들의 우정을 허락지 않았다. 천영은 종려 대신 무과 시험에 합격하지만, 종려의 아버지는 약속대로 천영을 면천하는 대신 도리어 그를 창고에 가둔다. 그러나 한양에 왜군이 들이닥치자 종려의 노비들이 그의 일가족을 죽인 후 집에 불을 지르고, 천영은 그 틈에 탈출한다. '선조'(차승원)를 호종해 의주로 향하다가 뒤늦게 소식을 접한 종려는 천영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오해하고, 복수심에 불타 그를 죽이겠다고 결심한다.
임진왜란의 재해석
한국 사극의 지향점은 크게 두 방향이 있다. 사료로부터 신선한 사건이나 인물을 찾아내는 게 하나다. 관심이 크지 않은 고구려 초기를 재구성해낸 <우씨왕후>가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기존에 잘 알려진 사건이나 인물을 재해석하는 방법이다. 한때 수많은 버전의 장희빈이 등장했던 것처럼. 근래에는 여말선초를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의 시점에서 제각기 관조하는 작품이 많았다.
임진왜란 시기를 다룬 <전,란>은 후자다. 사실 임진왜란을 다루는 방식은 정해져 있었다. 선조, 이순신, 류성룡, 광해군처럼 유명한 인물의 시점에서 전쟁을 조명하거나 잘 알려진 전투와 사건을 제각기 영상화하는 경우가 잦았다. <전,란>은 다르다. 임진왜란을 철저히 배경으로만 삼으면서 기존 접근법과는 다소 다른 길을 선택했다. 임진왜란 그 자체보다는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전,란>은 전쟁 전후로 변화한 사회상을 민속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추임새로써 공들여 표현한다. 이를 토대로 격랑을 헤쳐 나가야 했던 두 주인공의 감정선에 집중한다. 그 덕분에 <전,란>은 신선하게 일정 수준 이상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 단지 짜임새가 '전쟁'과 '반란'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더 다듬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전쟁은 곧 기회
<전,란>은 오프닝에서부터 '정여립의 난'을 묘사며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한다. 붕당의 갈등과 선조의 권력욕이 유발한 정쟁 정도로만 치부되던 사건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주목한다. 정여립은 '대동(大同)'이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왕통이 아니어도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란>의 오프닝은 그의 사상이 선조와 조선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지를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그 이후의 전개 역시 대동의 기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임진왜란의 묘사가 대표적이다. <전,란>은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전쟁보다 신분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낸다. 왜군이 한양 코앞까지 도달하자 종려의 가노들이 그의 부모와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도망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백성들이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과 광화문, 육조거리가 불태우는 시퀀스가 전투 장면보다 큰 스케일로 공들여서 연출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란>은 사회적 혼란을 개인적 차원의 이야기로 치환해 과연 대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묻는다. 천영은 면천되어서 본래 신분을 되찾으려 하고, 종려는 그런 천영에게 신분을 넘어서는 마음을 준다. 왜군의 침입은 이 우정을 어그러뜨리고, 두 친우는 갈라선 채로 자기가 믿는 가치와 신념을 위해 검을 든다.
두 주인공의 서사는 캐릭터가 강렬히 대조된 덕분에 특히 인상적이다. 플래시백 기법을 활용해 같은 사건도 서로 다른 시점에서 조명해 캐릭터성을 구축하는 게 대표적이다. 푸른 철릭을 입은 천영과 붉은 단령을 입은 종려를 대비시키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천영이 왜군을 벨 때, 종려는 임금을 호종하며 도리어 백성을 벤다. 이 장면은 시각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확실한 대비를 이루며 경복궁 화재만큼이나 뇌리에 각인된다.
보기 드물게 해학이 가득한 사극
물론 두 주인공을 대조하려다 보니 고증은 다소 실망스럽다. 임진왜란 초반 이후에는 관군 편제로 인계된 의병이 종전 때까지 남아 있고, 선조가 경복궁 재건에만 매달리는 묘사가 대표적이다. 특히 후자는 오히려 광해군의 모습과 흡사하다. 더 나아가 제아무리 사노비라 해도 어린아이를 회초리 쳐 죽이는 묘사 등은 조선 사회상을 악의적으로 왜곡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구조를 고려하면 <전,란>의 고증은 왜곡이라기보다는 의도된 과장처럼 보인다. <전,란>이 마치 한 편의 탈춤 같기 때문. 단순히 <전,란>의 시작과 끝은 봉산탈춤이 장식하거나, 중간중간 판소리의 소리가 삽입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란>은 두 악역의 행보를 탈춤 속 반동인물의 행적과 일치시키면서 탈춤에 녹아있는 해학의 정서를 살려내려고 노력한다.
왜군이 숨긴 보물을 찾아 경복궁을 재건하려 한 선조. 그는 항왜 '깃카와 겐신'(정성일)을 등용해 충신과 의병을 죽이면서까지 보물 궤짝을 찾는다. 하지만 간신히 찾아낸 보물함을 연 순간, 그의 주변에는 왜군이 잘라갔던 조선 백성의 코가 쏟아진다. 겐신의 행적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를 저주한 무당을 비웃으며 죽이지만, 본인은 정확히 무당의 저주대로 최후를 맞이한다.
즉, <전,란>은 왕이 챙기지 않은 백성의 고통과 침략자의 만행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면서 웃음을 자아내고, 민심까지도 어루만진다. 이는 양반 등이 나사가 하나 빠진 비정상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그들의 어리석음과 무식함을 풍자하는 탈춤의 흐름과 정확히 부합한다. 더 나아가 비록 그 정도는 달라도 <전,란>이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이나 <평양성>처럼 해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에 잡아먹힌 '란'
그러나 <전,란>의 야심을 온전히 평가하기는 어렵다. '전(戰)', '쟁(爭)', '반(反)', '란(亂)'으로 나뉜 구조와 이야기가 미묘하게 불협화음을 낸 나머지 짜임새가 야망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과 '쟁'은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을 통해 대동이라는 가치를 실감하게 만들고, 사회의 혼란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내 백성과 노비가 왜 한양과 집에 불을 지르냐는 반문에 담긴 양반과 기득권층의 안일함과 불합리성을 드러내는 단계다.
그렇다면 '반'과 '란'에서는 천영과 그의 동료들이 왕실과 양반, 그리고 종려에게 반기를 들게 되는 과정이 펼쳐져야 했다. '반'은 불만이 터지는 계기를 보여주고, '란'은 방점을 찍어야 했다. 문제는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 영화는 깃카와 겐신을 활용해 변주를 준다. 당연히 민란으로 이어지겠구나 싶은 순간마다 그가 등장해 갈등 구도를 늘린다. 예상과 다른 전개를 통해 긴장감을 고조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선택은 도리어 역효과를 낸 듯 보인다. 깃카와 겐신, 천영, 종려 사이에 갈등선이 중첩되다 보니 정작 절정에 달한 천영과 종려의 갈등이 해소되는 후반부 전개의 응집력이 부족해진다. 자연히 스토리텔링이 전체적으로 허술해진다. 천영이 자기 가족을 몰살한 줄 알고 복수심에 가득 찬 종려에게 천영이 말 몇 마디로 해명하자 그대로 오해가 풀려 버리는 허무한 전개가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더 직관적인 쾌감을 추구하면 어땠을까 싶다. 깃카와 겐신은 천영과 의병의 활약상을 강조하는 도구로써 '쟁'이 일단락될 때 퇴장시키고, '반'부터는 천영과 종려와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다면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전개가 더 깔끔했을 테니까. 그만큼 '전', '쟁', '반'에서 착실히 쌓아 올린 복수심과 원한, 그리고 분노가 '란'에서 확실히 분출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함께 무너진 액션
구조와 이야기의 괴리는 액션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우선 규모가 애매하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정작 전쟁의 스케일이 느껴지는 시퀀스는 없다. 거리에서 펼쳐지는 소규모 난전을 제외하면 의병의 활약상도 볼 수 없다. 제목에 '전'이 적혀 있고, 의병들의 존재감이 적지 않은 이상 의병의 활약상을 강렬하게 보여줬다면 액션과 개연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검술 액션도 명암이 분명하다. 칼코등이로 칼몸을 받아내거나 칼등을 손바닥으로 미는 식의 구성은 색다르고 흥미롭다. 다만 천영이 왜군을 도륙할 때처럼 롱테이크로 촬영한 장면에서는 합을 맞추는 듯한 느낌이 들기에 박진감이 다소 부족하다. 이전 작품에서 강동원이 도포를 흩날리며 검을 휘두르는 액션이 익숙해진 만큼, 그 이상의 특별함은 없는 셈이다.
클라이맥스도 다르지 않다. 해변에서 세 주인공이 검술 액션을 펼친다는 콘셉트 자체가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을 연상시킨다. 셋이 각자 다른 이유로 서로를 적대한다는 관계성도 유사하다. 기시감을 없애려는 노력이 눈에는 띄지만,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해무를 활용해 시각적인 요소를 제한하는 식으로 차별화를 시도했지만, 화면상으로 충분히 구현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종합하면 <전,란>은 야심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기존 사극과 다른 방향성으로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을 재해석하려는 참신함이 돋보이기 때문. 특히 '한국적'이라는 표현을 의상, 배경, 세트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의 정서에도 녹여냈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밸런스를 잡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물론 넷플릭스라서 이 정도 규모의 사극도 시도할 수 있었겠지만, 소재의 가능성과 엿보이는 잠재력에 비하면 평범한 OTT용 영화로 마무리된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적지 않다. 결국 천영의 반란처럼 <전,란>도 미완의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Acceptable 무난함
변주를 주려는 강박만 덜어냈다면 더 와닿았을 해학의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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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의 강박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이거 재판받는 거 맞지
이 영화의 시점은 두 가지다. 컬러파트인 ‘핵분열’ 흑백파트인 ‘핵융합’이다. 컬러파트의 시점은 1954년이다. 원자력 협회 건물의 어느 방 안.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이유는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때문이다. 오펜하이머가 국가기관에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접근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냥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승인에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그동안 어려운 선택지만 골라왔다. 세계 2차 대전을 끝내는 데에 두 번의 항복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나치였고 두 번째는 일본이었다. 나치보다 먼저 원폭을 만들었고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는데 큰 기여를 한 오펜하이머. 전쟁영웅이라고 봐도 무방한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첩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영화는 컬러 파트를 통해 ‘왜 오펜하이머에게 이런 위기가 들이닥쳤는가’를 보여준다.
핵융합 파트의 주인공은 루이스 스토로스다. 1959년. 루이스 스토로스는 상무부 장관 취임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루이스 스트로스. 형식상의 절차라는 보좌관의 말이 들리기는 해도 왠지 삶을 재판받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뭐 장관 뽑는 게 쉽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긴장되는 마음이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이렇게 떨리는 스토로스에게 변수 하나가 생겼다. 익명의 과학자가 증언을 앞투고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선택지만 골라온 삶이라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것이다. 스토로스의 청문회에서 그의 삶에 가려져있던 어떤 음모가 드러난다.
플롯의 마술사
‘플롯의 마술사’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의 장기를 활용해 작가의 인장이 쾅 박힌 신작을 발표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플롯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자기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다(플롯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다루는 영화 용어다). 놀란이 ‘플롯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은 각자의 필모그래피가 갖고 있는 다양한 전달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메멘토>는 흑백/컬러의 색채가 대비되는 장면들을 병치시켜 사건의 진실을 쫓는다. <덩케르크>는 ‘전쟁 반대’라는 테마 아래 액션장면을 거진 다 지워버리는 승부수를 뒀다. 전쟁영화에서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설득시키기 위해 살아 돌아가는 과정의 어려움을 플롯으로 삼은 것이다. sf 영화인 <인터스텔라>에서 가족영화라는 테마와 블랙홀의 심연은 사실상 동격이다. 이 일종의 멀티버스 세팅은 ‘아버지가 딸을, 반대로 딸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형태가 우주의 모습과도 같다는 점이 유사점을 갖는다. 최근작 <테넷>은 초기작 <메멘토>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난해한 구조를 보여준다. 기점 찍고 전후반의 사건관계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는 ‘주인공이 운명의 주연으로 어떻게 똑바로 서 걷는가’에 대한 이야기 전개방식을 시간관계를 뒤틀어서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 플롯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고유의 연출법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우선 영화가 색채대비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은 전작 <메멘토>가 연상된다. 이 <메멘토>에서 인물이 처절하게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했던 것과는 반대의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본작이 이런 방식을 쓰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가 갖고 있는 내면의 모순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미국의 한 행정부 장관이 되는 일은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이다. 또한 원자폭탄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세계사에 기록될 만큼 큰 이벤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관계에 서툴러서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다. 오펜하이머나 스트로스의 서사 하나만을 콕 찝어서 전개하기보다 대칭되는 두 사건을 보여줌으로서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에 집중한 것이다.
위대하면서도 끔찍한
이 영화의 컬러 부분인 ‘핵분열’ 파트는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고 이는 영화에 작동하는 핵심 모티브다. 이 파트에서 다루는 가장 큰 줄기는 오펜하이머가 중심이 되어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이다. 오펜하이머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로브스를 위시한 군사전문가들과 과학자들에게 원자폭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장면이나 과학자들 앞에 서서 연설하는 장면은 '거대한 일은 이뤘지만 사소한 건 놓친' 한 인물의 입체성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에게 아이러니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우리가 오펜하이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명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TV 앞에서 한 유명한 대사가 있다(자료화면으로도 남아있다). ‘난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한 인물과의 사랑이 가장 정점일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원자폭탄을 발명해 전쟁을 멈춘 한 사람의 서사가 사랑이 가장 불타오를 때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화가 이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은 20세기 당시 미국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는가 대한 암시로 보인다. 영화에서 중요한 시간적 배경은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이다.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매카시즘’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 ‘반공주의의 극단’이다. 한국전쟁 및 소련과의 냉전으로 인해 미국 내에 공산주의에 대한 비호 여론이 들끓었다. 매카시라는 미국의 상원의원이 자국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비열한 방식을 사용한다. 이를 '매카시즘'이라고 하는데,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광풍을 정통으로 맞은 오펜하이머를 주인공으로 뽑았다.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정한 것이 소모적이지 않게 감독은 부지런할 정도로 시대적인 배경이 어떻게 한 인간을 괴롭히는가를 후반부에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핵분열 파트의 청문회 부분은 '너 공산주의자지?'를 정해놓고 조사위원들이 오펜하이머에게 질문한다.
아날로그 변태
기존의 필모그래피와 유사한 측면에서 감독은 폭발 효과를 직접 구현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 <테넷>에서 중고 비행기를 직접 구매해 실제로 부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인셉션>에선 촬영 도중에 직접 세트장을 뒤집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작중에서 제시되는 폭발을 직접 구현했다. 이 폭발은 단지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적 기교를 부리기 위해 이런 연출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폭발을 눈으로 보여주고 폭발음을 몇 초 있다가 들려준다. 이는 연쇄작용이 서서히 일어나는 오펜하이머 개인 서사의 은유처럼 보인다.이 영화의 음향과 촬영이 인물의 드라마를 보여준 것이다.
교과서 찢고 나온 듯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관객들이 어디서 들어봤던 사람들이다. 일단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연이자 세계사에서도 족적을 남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그렇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데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단지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똑같이 구현하는 것 자랑하려고 이 인물을 이렇게 보여준 것이 아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영화에서 스트로스/오펜하이머의 차이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이 분기점을 보여주려고 감독이 어떤 선택을 뒀는지 주의깊게 본다면 흥미롭다. 그 외에도 어니스트 로렌스, 리처드 파인만, 닐스 보어, 아이도어 아이작 라비 등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특히 베니 샤프디가 맡은 에드워드 텔러는 배우 개성과 과학자의 캐릭터 세팅을 높게 흡착시킨 예시가 될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 역을 맡은 캐릭터는 놀랍다. 글쓴이는 솔직히 못 알아봤다.
영화의 다른 주인공인 '루이스 스트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탁월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야기의 반쪽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영화의 긴장감, 서스펜스를 혼자 이끌고 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이 모든 이야기의 잔상이 밝혀질 때 목소리 톤에 변주를 둔 장면은 배우의 해석능력이 돋보인다.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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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각보다 더 컸던 내 맘 속 너의 자리
너는 내 세상이었어
레오와 레미는 둘도 없는 단짝친구다. 매일 붙어 다니는 레오와 레미. 넓은 세상으로 나 아길 길이 없다. 당연하지. 매일 학교 다니고 집에 오는 일상의 반복인데. 둘은 둘에게 세상을 만들어준 사람이다. 그러나 애들이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면 애들아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관심이 너무 많은 아이들. 같은 반 친구들은 툭툭 한 마디씩 던진다. ‘너희 둘 사귀어?’ 발끈하는 두 사람.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이 둘을 멀어지게 한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흠집이 간다. 13살인 레오와 레미. 인생의 10%는 함께 쌓아온 셈이지만 사이가 깨지는 건 이렇게나 쉽다. 원래 서로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각자를 기다렸던 레오와 레미. 레미는 어느 날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 레오의 얼굴을 확인하고 서운한 감정을 토로한다. 서서히 멀어지는 두 사람. 두 사람은 다시 가까워(close) 질 수 있을까?
각본의 섬세함
<클로즈>는 두 아이의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다. 레오와 레미가 서로의 관계를 겪으며 감내하는 일들을 영화의 중심 서사로 삼은 것이다. 퀴어 코드가 영화의 핵심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묘사하는 데 있어 무조건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이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에 대한 것이다.
영화를 지켜보는 시선은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레오-레미를 영화가 어떻게 바라보는가? 와 두 주인공을 다른 인물들이 어떻게 바라보는가? 에 대한 것이다. 글쓴이는 둘 다 영화의 강점으로 뽑고 싶다. 첫째. 레오와 레미 사이에 불필요한 장면이 없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느닷없이 볼에 뽀뽀하는 신이 없다. 여기서 두 사람이 스킨십을 하면 영화의 핵심인 선 타기가 무너진다. 우정과 사랑 사이 자기 자신도 모르는 마음이 영화에서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미스터리가 유지되어야 2부의 이야기전개에 감정전달이 성립한다. 이 선 타기는 단순히 스킨십을 들어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절묘하게 친구사이와 사랑사이의 간극을 타는 듯 보인다. 여기서 뭐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보이고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해피 투게더>나 <우리, 둘>같이 기존에 나왔던 퀴어 로맨스의 방식이 일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레시피로 맛없게 만드는 경우는 허다하다. 이 영화가 다른 퀴어 로맨스/성장서사와는 살짝 다른 지점은 여기에서 온다. 두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과 나이에서 오는 특성은 한 세트처럼 느껴지는데, 이 부분이 관객에게 있어 강렬한 여운과 설득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 레오와 레미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도 영화에서 강점으로 뽑을 수 있다. 이런 영화를 볼 때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라 빌런 유형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몇 있다. 대표적으로 <파벨만스>에서 새미를 괴롭히던 아이들이 몇 있었다. 물론 <파벨만스>에서 빌런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영화의 핵심과도 닿아있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들아가야 하는 연출이다. 대신 이런 10대 성장서사에서 자극적으로 퀴어를 소비하거나 폭력적인 시선이 들어갈 법도 하다. 비단 퀴어 소재를 다루지 않았더라도 <7번 방의 선물>같이 자극적인 소재에서 최대한 인물을 깎아내리는 연출방식이 기억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이들이 레오와 레미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센 단어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센 한방을 때리는 듯하다. 진짜 이걸 염두하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 것들로만 대사를 구성한 것이다. 각본 역량이 빛났다. 뭐 이외에도 인물들이 등장하고 퇴장한 다음 다시 나타나는 형태도 섬세한 터치로 구성되어 있다.
무너지다
영화 자체가 소담한 작품이다. 거리 이동이 별로 없는 느낌? 뭐 13살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엔딩 와서 느끼는 여운은 아주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왜일까? 영화는 장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장소를 활용하는 방식이 눈에 띈다. 장소를 어떻게 활용했나? 바로 반복이다. 영화는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두 상황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일례로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인물들이 '왜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근거가 된다. 또 이 장소는 후반부에 다시 돌아와 인물의 정서를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스포일러가 돼서 자세히 쓸 수 없지만 영화의 두 장면에서 그렇게 엄청난 무언가가 없음에도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이 장면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반복이 안 됐다? 그러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사실 사랑이란 건 그런 게 아닐까. 익숙했던 것들이 색다르게 다가오는 것. 그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 이런 사랑의 속성을 장소로 표현한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이를 돋보이기 위해서 인물들의 리액션에 집중한 촬영 방식이 영화의 미장센이라는 측면에서도 나름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영화는 비움과 채움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제목이 왜 'close'인가를 생각해 보면 되는 문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왜 이 인물이 앞으로의 삶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작품 자체가 처연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그러니까 그땐 왜 몰랐을까? 에 괜한 것들이 사람을 앞으로 살아가게 만든다는 아이러니를 잘 담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런 영화에도 아쉬운 지점은 있다. 잘 만든 영화고 여운도 길게 남지만 영화의 이야기 전개가 전형적인 느낌이 좀 있다. 사실 영화 보기 전에 포스터 보고 대충 예상한 바가 있다. 아. 이거 아마 섬세한 화법으로 이야기 전개할 거야. 퀴어 소재인 것 같으니 자극적이지도 않겠지. 아마 인물들 이렇게 될 듯. 촬영으로 임팩트 딱 주겠지? 정확히 그대로 흘러간다. 대신 후반부에 어떤 장소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이 인상 깊긴 했지만 영화가 약간 강박적으로 짜여있다는 느낌은 아쉽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도 봤었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우리, 둘>의 감정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에 따라서는 좀 지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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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를 타고 대한민국에 죽음을 몰고 온 살인무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그들의 사투.
증발된 범인, 피해자는 증발되지 않았다!
영화라는 매개의 특성상 결국 극적인 연출과 전개를 끝끝내 놓지 못해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영화를 리뷰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작고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들에 조금더 마음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공기살인]같은 작품들의 개봉을 응원하고, 또 미디어의 선한 영향력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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