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2-10 21:49:46
마음과 시선의 방향
영화 <9월 5일: 위험한 특종> 리뷰
SYNOPSIS.
1972년 뮌헨, 올림픽 생중계에 도전한 ABC 방송국 스포츠팀은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선수촌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이고 있음을 알고 이를 생중계로 보도한다. 솟구치는 시청률과 9억 명의 시청자까지,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단독 특종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그들은 테러리스트들 역시 자신들의 방송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올림픽 사상 초유의 테러 인질극 생중계! 방송을 멈출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POINT.
✔️ 실화 기반이지만,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전개됩니다.
✔️ 그러나 잔인한 장면은 들어있지 않아요. 저는 이 지점이 좋았습니다.
✔️ 속도감 있는 전개 안에서, 방송국에서 일하는 언론인들의 책임감과 고민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 더불어 언론인들의 전문가다운 면모로 척척 손발이 맞는 장면들도 재미있었어요.
✔️ 그 장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다양한 배우들의 협연입니다. <퍼스트 카우>, <쇼잉 업>에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존 마가로, <티처스 라운지>에서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준 레오니 베네쉬가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 포스터만 보면 <스포트라이트>보다 10년 앞서 나온 영화처럼 보여요... 하지만 영화는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영화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버거워하고, 영화라 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테러를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건 존 마가로의 얼굴이 궁금해서였다. <퍼스트 카우>에서 소처럼 순박한 눈망울을 보여주었고, <쇼잉 업>에서 불퉁하게 세상과 불화하는 동생의 표정을 보여주었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그리고 나는 존 마가로를 못 알아볼 뻔 했다. 아니 존 마가로를 궁금해 할 겨를이 없었다. 빠른 전개 안에서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하느라.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영화관에 앉았지만, 극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언론의 생중계 현장을 담은 영화이다 보니 그들의 대화와 상황 설명을 통해 친절하게 정보가 전달되고, 방송을 만드는 과정을 척척 담아내어 그 설명이 늘어지는 법도 없다. LA 비평가 협회상에서 편집상을 수상한 이유를 알 것 같은 대목이다.
전개가 빠른 영화의 스토리라인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보고 나서 마음에 남은 생각들만 정리해 보고 싶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
영화 초반에 인물들이 서로의 국적을 인식하고 있음이 대사에서 수 차례 드러난다. 지네딘 수알렘이 연기한 캐릭터 자크의 경우, 자크라는 이름보다 프랑스인이라는 국적으로 더 많이 불리고 인지될 만큼 국적이 강조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상황을 조망한다.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세계, 세계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독일. 앙금은 남아있지만 이제 가장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이벤트가 펼쳐져야 한다. 국적에 따라 다른 입장은 개인의 감정에도 영향을 준다. 평화와 우호를 말하는 행사에서조차 국적을 고려하여 방영 우선순위를 결정할 만큼.
우리 각자의 자리는 과연 각자만의 자리인가. 독일과 프랑스, 미국의 관계 뿐 아니라 영화의 배경이 되는 테러 사건 또한 국적에 따라 다른 입장과 감정이 뒤얽힌 사건이다. 테러리즘 사건 하나만 놓고 가타부타 판단하기엔 너무 많은 사건과 역사가 줄줄이 얽혀 있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맥마흔 선언과 밸푸어 선언의 발화자였던 영국을 비롯해 여기 얽힌 국가들이 더 많이 있다.
과거는 온전하게 과거로만 존재하지 못하고, 타자는 철저하게 타자로만 존재하지 못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무언가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가능한가? 언론인이라면 다르게 답할 수 있겠지만... 시민인 나로서는 그저 연결되어 있는 서로를 감각하며 나의 자리를 확인하고 내 시각이 어느 방향에 서 있는지를 좀더 명확히 아는 것, 그리고 그만큼을 감안하는 것, 어쩌면 그게 최선의 균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 밖에서 조심스러워지는 마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영화를 보는 동안도 영화 바깥이 궁금했다. 그리고 보는 동안 혹시라도 이스라엘의 '피해자성'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올까봐 꽤나 긴장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 먼저 감독과 제작진이 유대인인지 다급하게 찾아보게 될까봐 긴장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영화의 안과 밖 또한 예외가 아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인질이 석방되고 군이 철수하고 있다. 그동안 사람을 말살할 것처럼 쏟아붓던 공격이 멈춘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 지구를 "장악"해서 "재개발"하곘다는 소리를 하고 있고, 휴전 협상 다음 단계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런 세상에서 팔레스타인 과격 단체가 이스라엘 대표단을 인질로 잡아 벌인 테러극을 담은 영화라면, 이 영화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그리는지 민감하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전혀 담지 않았고, 테러 사건의 전개는 전화와 전보를 비롯한 소식으로 전달되어 대사로 공유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본인 할 일을 하는 언론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 영화다운 선택이다.
영화 속 언론인들은 이제 막 도입된 위성 생중계라는 신기술과, 자신들이 정통한 각종 기술을 펼쳐 보인다. 옛날 텔레비전에는 저런 식으로 자막을 깔았던 거구나, 사진을 저런 식으로 확대했구나, 스튜디오 연결은 저렇게 하는구나... 같은 생각들을 하며 본 그들의 능숙한 손놀림 뒤에는, 지금 어디와 연결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선택해야 하는 언론인들의 본능이 있다. 역시나, 영화 밖에서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이다.

제작자의 마음과 시청자의 마음
능숙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판단을 내리는 언론인들의 모습은, 전문가처럼 보여 한편으로는 멋있으면서도... 동시에 징그럽다. 선택을 내릴 때 그들은 인간성을 우선순위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이 미칠 파장을, 그 경우의 수를 일일이 계산한다면 방송은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이 영화처럼 급박하게 굴러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뉴스 보도국이 아니라 스포츠국이지만 지금 상황을 곧바로 담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사명감과, 방송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과, 갑작스럽게 굴러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따라가는 데 분주한 마음은 이리저리 뒤엉킨다. 그 안에서 최소한의 윤리 준칙이 무너지기 너무 쉬워 보이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제작자의 마음보다 더 징그러운 것을 발견하는데, 내 안에서 발견한 시청자의 마음이다. 사건 전개를 궁금해 하면서 상황이 전개되기를 기다리는 기자의 마음, 또 나의 마음. 그건 어디를 향하고 있나. 심지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모두가 각자의 스크린을 각자의 알고리즘 안에서 보고 있는 세상이다. 더블체크되지 않은 정보 채널이 마구 난립하는 세상.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언론인들이 서로 논의하며 갈등하여 적정선을 찾아가는 결과물조차 뜻하지 않은 사고를 칠 수 있는데, 그 과정조차 생략된 '가짜 뉴스 채널'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실시간으로 본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한때 실시간으로 보면서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렸다. 거대한 참사가 일어나는 장면을 몇날며칠 우리가 가만히 보고 있었던 순간들. 정제되고 편집된 뉴스 영상이 아닌, 마구잡이로 찍힌 사고 현장을 조용한 방에서 핸드폰으로 들여다 보면서 '이걸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아?' 싶었던 순간들. 가슴이 쿵쾅거려 잠들기 어려웠던 밤들로 이어졌지만, 이런 날들이 길어지고 아득해지면 무뎌질 수밖에 없다.
지난 15개월 동안 가자지구에서 얼추 추산하기로도 4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이 중 70% 가량이 여성과 어린이라는 UN의 분석이 있었다.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추측이, 카더라 통신이 아닌 의학 학술지에 실렸다. 병원과 학교는 의례적으로 마지막 안전지대지만, 전쟁 규칙을 무시하고 조준 폭격하기도 했다. 하루에 몇 명씩 죽었다더라, 그 중 아이들이 몇이라더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끔찍한 소식을 무수히 들으며 나는 이미 무뎌졌다.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괴롭게 하거나 무뎌지게 하거나, 둘 중 하나의 수순이 되기 쉽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이 의미있게 느껴졌다. 불 꺼진 스튜디오에서 제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 그곳은 유일하게 희미한 빛이 드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는 게시판이다.
우리의 시선은 계속해서 흔들린다. 상황 전개 소식을 듣고 복도에 선 언론인들을 비추는 카메라가 흔들렸듯. 물론 흔들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잡겠지만, 언론인도 흔들린다. (흔들렸을 때의 결과가 너무 끔찍하기에, 그들에게 남다른 균형 감각이 주어지길 간절히 바라게 되지만.) 시청자도 흔들린다. 시청자는 숫자가 되어 언론인에게 영향을 주고, 언론인들은 또 다른 숫자를 창조해낸다. 우리는 순환한다.
그러나 흔들림 끝에 우리의 시선이 희미한 빛 아래 사람의 얼굴에 머물 수 있다면. 결국 시선은 마음 가는 곳을 향하게 되어 있다. 95분을 빼곡하게 채우는 영화적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영화 바깥 나의 시선을 가다듬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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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우성 감독의 새로운 시도, 관객에겐 이질적인 시도
다시 또 혼자
뚜벅뚜벅 걷는 길. 수혁에게 혼자는 낯선 것이 아니다. 정확히 딱 10년 만에 나왔다. 만기출소일. 누군가가 두부를 들고 교도소 입구 기다렸으면 했지만 수혁에게 혼자는 익숙하다. 가족? 딱히 없다. 조직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헌신했지만 돌아오는 건 쓸쓸한 수혁 그 자체였다. 혼자 차를 탄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타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질렸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사랑했던 사람을 찾아가는 수혁.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수혁에게 민서는 냉담하다.
민서의 냉담한 반응은 당연하다. 갑자기 민서의 곁을 떠났던 수혁.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가 수혁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아프기만 한 건 아니다. 수혁을 어떤 사람에게 데려가는 민서. 민서와 수혁에겐 딸이 있었다. 발레를 배우고 있는 인비. 수혁에게 많은 것이 떠나갔지만 이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인비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 됐다 싶으면 돌아와” 지금 당장 수혁이가 딸 인비에게 가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 조금씩 시작하면 되겠지. 평범한 삶을 다시 꿈꾸는 수혁.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전에 일했던 조직에서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과연 수혁은 응국과 성준을 피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난 응원했어
지금의 충무로를 생각할 때 ‘정우성’이란 이름은 어느 정도 과소평가 된 감이 있다. <비트>라는 영화로 일약 청춘스타로 등극한 정우성. 지난 몇 년 동안 정우성이라는 이름은 해사하게 빛나던 청춘이었다. 정우성이 갖고 있는 청춘스타로서의 카리스마는 많은 작품에서 시너지를 냈다. 이 청춘스타로서의 이미지가 데뷔 이후부터 꾸준했던 탓에 이 배우를 두고 연기력 논란이 일부 있었다. 실제로 정우성 배우의 퍼포먼스가 아쉬웠던 작품이 몇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성수 감독의 <무사> 같은 영화를 보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톤이 변화가 없다. 캐릭터의 입체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던 아쉬운 퍼포먼스였다. 비교적 최신작인 <아수라>에서는 욕하는 대사가 많았다. 이 영화에서 정우성 배우가 나쁘지 않은 감정연기를 보여주는 것과는 별개로 욕설 대사가 어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후에 <증인>이나 <헌트>로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긴 했다. 그동안 정우성이라는 배우는 액션 연기만 뛰어나지 예술가로서, 연기자로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정우성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 좋은 연기를 보여준 작품 많았다. 일례로 <증인>에서의 변호사 연기로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으로 수상한 바가 있다. <아수라>에서도 이야기의 템포를 황정민, 곽도원 두 배우가 끌고 간다. 광기 어린 에너지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아수라>. 두 베테랑에 밀리지 않게 한도경이라는 역할을 잘 수행한다. 욕설이 어색하다는 지적도 오히려 그 영화의 톤 앤 매너에 어울렸다. ‘강철비’ 시리즈에서의 연기는 두 캐릭터가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어디에 방점을 둬야 할지를 분명히 조준한 퍼포먼스였다. 정우성 배우는 최민식, 송강호 배우처럼 화려하게 테크니컬 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연기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객관적인 능력치가 있어서 그걸 매 작품마다 일정치만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정우성 배우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있다. 그리고 그 카리스마를 가장 뛰어난 액션연기로, 또 마스크로 소화한다. 이런 점에서 정우성 배우는 좋은 배우다. 최근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나 <헌트>에서 연기자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다.
이 정우성 배우가 이번 작에서는 연출을 맡았다. 정우성 배우에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이 분이 오래전부터 연출에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감독 정우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이정재’의 <헌트>다. 이정재 감독이 처음 메가폰을 잡아 칸에 초청됐다는 기사가 나올 때도 (글쓴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말고 감조차 잡기 어려웠다. 뚜껑을 열어본 <헌트>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장르적으로 피 말리는 액션/스릴러물이다. <헌트>가 손익분기를 넘김에 따라 다음 해에 <보호자>가 개봉한다는 사실에 시선이 집중됐다. 정우성 감독이 그 나름대로 만들 액션스타로서의 장르물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유수의 국제문화제에 초청받았던 것과는 별개로 이 작품이 정우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캐릭터들의 퍼포먼스도 훌륭했다. 그에 상응하는 단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정우성의 필모그래피
이 영화는 캐릭터로 승부하는 영화다. 일반적으로 빌런 vs 주인공의 대결구도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다. 한 명의 주인공이 나머지 악당 무리를 상대한다. 이 대결구도는 지난 5월에 개봉했던 <범죄도시 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 마석도와 주성철, 리키가 각자 대립하며 극에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서도 두 스파이더맨이 등장하지만 다른 빌런들도 그에 상응하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린 고블린’이 영화의 메인 빌런이면서 ‘닥터 옥토퍼스’가 입체적인 캐릭터를 맡은 것이 극의 이야기를 이끄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 영화는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과 <범죄도시 3>이 취했던 연출 방식과 유사한 태도를 취한다. 주인공 수혁과 대립하는 빌런은 네 명이다. 우진/응국/진아/성준이다. 이 네 명의 캐릭터들은 영화에서 나름의 입체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스스로 치고받고 갈등도 일으키며 이야기의 중심으로 기능한다.
이 빌런 캐릭터들을 다수 등장시켜 캐릭터에 개성이 분명하다는 점은 영화의 분명한 장점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이 어디서 다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단점처럼 느껴진다. 캐릭터를 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응국은 ‘끝판왕’, 성준은 자격지심, 진아는 외유내강, 우진은 광기다. 각자 다 다른 톤으로 연기한다. 이 각기 다른 개성들은 정우성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봤던 것들이다. 응국과 성준은 <아수라>에서, 진아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나 <감시자들>에서, 우진은 <태양은 없다>에서다. 이 위에 나왔던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의 내면 묘사가 본작에 이어진다. <헌트>가 견지한 처절함이 이야기의 개성이 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이렇게 기원과 결말이 어디에 향할지 예상이 된다는 점은 신선하지 않은 영화 대사들 덕에 더 두드러진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인물이 ‘이런 대사를 할 것 같아’라고 예상하게 되는데, 타율이 낮지 않다. 이렇게 인물이 핵심이 되어 자기들끼리 싸우고 화해하고 이야기를 이끌어야 할 캐릭터들이 식상해진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누수가 생기는 이유가 된다.
액션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이 영화가 액션영화로서 장르에 충실한가? 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 영화는 액션영화이자 누아르영화다. 후자 ‘누아르영화’적인 측면은 박성웅 배우가 제 몫을 해 장르 구색을 맞춘다. 누아르영화 특유의 끈적하지만 처절한 분위기가 작품 내면에 잘 깔려있다. 더 큰 문제는 무려 정우성이라는 액션스타가 주인공이자 메가폰을 잡았음에도 장르적인 쾌감이 덜하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 자체의 액션 시퀀스들은 아이디어가 빛난다. 이 장면 자체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왔다. 하지만 이 장소의 특성과 이 도구를 활용했다는 점이나 이후 인물 대 인물의 액션신은 충분히 영화 내적으로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을 보면 이 액션이 영화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서사에서 이 액션 신들을 장르로서 보여줘야 하니까, 숙제로 풀어야 하니까 넣었다. 똑같이 정우성 배우가 출연한 <헌트>에서 5 공화국 시절 자유에 대한 갈망을 처절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박력이 극의 서스펜스가 된다는 점이 대비되니 더 단점으로 느껴진다. 액션은 좋다. 그런데 ‘액션 만’ 좋다. 이 예술은 서사라는 영화라는 종합예술이다.
또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신을 보면 이 작품의 기획의도가 궁금해진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기대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쓴다면 후반부 전개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자세히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시퀀스들의 구성이 영화 전체적인 흐름과 어긋난다. 영화 전체적으로 누아르, 액션물이라고 초반부부터 드러내고 있다. 그럼 적어도 그대로 가는 게 좋지 않았을까? 전개 흐름이 이 그대로라면 이 영화가 굳이 주인공이 수혁일 이유가 없다. 반대로 우진-진아 커플이 광기에 찬 인물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응국 캐릭터는 영화에서 이렇다 할 위기를 주지 않는다. 이 영화의 구멍을 각본 스스로가 이미 만들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단순히 몇 이미지만을 피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가 액션물로 기획됐다면 감독님의 판단 착오라고 보인다. 진부한 이야기가 후반부액션에 힘이 들어가면 분명히 영화가 가진 장점이 됐을 것이다. 영화의 기획력에 아쉬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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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 밖의 세상에 나온 수학 천재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다.
1742년, 독일의 수학자 골드바흐(Goldbach)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수학적 추측입니다.
골드바흐는 알았을까요? 자신의 추측이 2세기가 훌쩍 넘도록 증명되지 않고, 먼 미래에도 '골드바흐의 추측'이라는 미해결 문제로 남는 것을요. 그리고 이 추측을 소재로 하는 성장 로맨스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을요. 해결되지 않은 수학적 추측을 둘러싼 성장과 로맨스를 그린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마거리트의 정리>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마거리트의 정리>는 2024년 6월 27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마거리트의 정리
Marguerite’s Theorem
Summary
명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수학 천재 ‘마거리트’는 세계 난제 ‘골드바흐의 추측’에 관한 연구를 증명하는 세미나에서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날 이후 충격에 빠져 학교를 그만둔 ‘마거리트’는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안나 노비옹
출연: 엘라 룸프, 장 피에르 다루생, 줄리앙 프리종
'마거리트'는 연구교수를 꿈꾸며 대학에서 수학을 탐구하는 여성 수학자입니다. 그의 수학적 사명은 바로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것. 수학 천재 '마거리트'와 기자의 대담이 담긴 오프닝 시퀀스에서, '골드바흐의 '정리'를 연구하고 있지 않냐'는 기자의 말에 '골드바흐의 '추측''이라고 정정하는 '마거리트'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이처럼 수학자에게 증명을 거치지 않은 문제는 완벽하게 정리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에, '마거리트'는 3년째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대한 사명을 갖고 연구해 온 증명을 발표하는 세미나 자리에서 오류가 발견되고 맙니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루카'에 의해서 말이죠. '마거리트'는 그간의 연구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허탈함, 다른 주제, 다른 지도교수를 찾아보라는 스승에 대한 배신감, '루카'를 향한 질투심에 휩싸이며 제2의 집과 다름없었던 학교를 제 발로 뛰쳐나갑니다. <마거리트의 정리>는 이렇게 시련을 맞닥뜨리고 수학 밖의 세상에 발을 내디딘 '마거리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 ⊙
낯선 너드 걸의 매력
공부만 잘하고 세상 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드 보이의 이야기는 많지만, 너드 걸의 이야기는 흔치 않습니다. <마거리트의 정리>는 그 희귀한 포지션을 딱 낚아채는 영화입니다. 수학이 삶의 전부였던 '마거리트'는 수학 밖의 세상에 뛰어들면서 너드 걸의 고군분투를 보여줍니다.
너드 캐릭터의 매력은 엉뚱하면서도 어리숙한 면에 있지만, 이 너드 걸의 매력은 조금 다릅니다. 수학만 보고 살아온 너드지만, 세상을 알아가는 데 한 치의 망설임이 없죠. 추론을 시도하며 사실을 증명하고, 문제가 있으면 즉시 해결하며, 언제나 새로운 길을 탐구하는 게 익숙한 수학자의 습성이 발휘된 걸까요? '마거리트'는 수학을 대할 때처럼 거침없이 세상을 알아갑니다. 쭈뼛거리는 것 없이 옷 가게에서 일해보고, 클럽에도 가보고, 남자도 하나 골라잡아보고, 흥미로워 보이는 마작판에도 뛰어들어 보죠.
그렇게 나 홀로 연구하는 수학의 세계에서 살던 '마거리트'는 비로소 수학 밖 '함께'의 세상을 배웁니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고, 질투심을 느꼈던 '루카'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하고, 수학보다 더 신경 쓰이는 사랑까지 경험하죠. 그리고 그러한 변화 속에서 다시 한번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할 길을 찾아 나섭니다. 모르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경험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수학을 어려워하지만, 어찌 보면 '사실 - 추론 - 증명'으로 구성된 수학은 복잡다단한 21세기의 세상보다는 훨씬 더 간결해 보입니다. 21세기는 말이 되지 않는 설문조사도 답만 나오면 통계의 근거로 쓰고, 집세로 건네준 돈을 룸메이트가 홀라당 써버리기도 하는 비논리적인 세상이니까요. 이처럼 혼잡한 세상에 파묻혀 사는 우리들이기에, 처음으로 간결한 수학 속 세상에서 복잡한 수학 밖 세상에 나온 '마거리트'의 성장을 더욱더 응원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 ⊙
청출어람을 견디는 자세
영화에서는 사제지간도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극 중 '마거리트'는 증명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도 오랜 시간 같은 주제를 연구해 온 지도교수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더 분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대학을 떠난 후, 다시 골드바흐의 추측에 도전하는 것도 지도교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치죠. 결국 '마거리트'는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데 한 발짝 다가가는 성과를 냅니다.
교수는 오류가 발견되자마자 세미나 자리를 박차고 나선 '마거리트'를 미성숙한 학자라며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패한 '마거리트'의 연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증명을 세상에 선보이는, 다소 쩨쩨한 짓을 하죠. 그러나 학교를 박차고 나선 '마거리트'가 자신이 평생을 도전해 왔던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오묘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청출어람, 스승보다 나은 제자를 뜻하는 말이죠. 어쩌면 교수는 학자로서 '마거리트'에게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을 바쳐 연구한 증명을 향해 자신보다 먼저 나아가는 제자를 보면서요. 하지만 종국에는 '마거리트'가 정리한 증명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학자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학의 진보이며, 그 진보를 이끌어 낸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저도 모르게 뿌듯했기 때문이겠지요. 교수는 진정한 스승의 표정을 내비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쟤가 내 제자야'를 시전합니다.
성장 로맨스 영화에서 사제지간에 자꾸만 눈길이 간 것은 마음속에서 던진 '나였다면?'의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과연 청출어람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교수의 심경 변화를 유추해 보며, 언젠가 나에게도 제자가 생긴다면 스승에게 청출어람보다 더한 성공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섣부른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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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에 굴하지 않고 수학적 증명이라는 목표를 이뤄가는 '마거리트'의 성장과 귀여운 로맨스가 담긴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 지금까지 '메디컬 로맨스 코미디' 같은 장르는 들어봤지만, '매스매틱 로맨스 코미디'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재치 있는 연출과 대사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육성으로 터지는 웃음을 참아가며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수학을 소재로 얼마나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마거리트의 정리>를 감상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One-Liner
수학 밖의 세상을 당차게 헤쳐 나가는 너드 걸의 매스매틱(Mathematic) 로맨스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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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사람들은 삼시 세 끼도 귤로 때운다고 하지 왜
분노 조절 못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노조절장애 경찰 조수광(곽시양)이다. 소리를 지르며 범죄자에게 다가가는 수광. 갈고닦은 무술 실력으로 범죄자들을 때려눕힌다. 그리고 들어가는 레슬링 기술. 암바를 걸었다. 다리가 부서진 용의자. 범죄자들을 잡는 열정이야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 다리를 부러트리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다. 제주로 좌천되는 조수광. 어디 수학여행 때나 갈법한 제주에 유배된다는 건 조수광에게 낯선 일들 투성이었다. 애 먼 곳에 혼자 사려니까 웬만한 인맥 없이는 방 구하기도 힘들다. 투덜대는 조수광. 하지만 이런 조수광에게도 구원자가 있었다. 후배 경찰 이수진(정유진)에게 도움을 받아 유 회장(예수정)의 집에 셋방살이를 시작한 조수광. 무탈히 경찰 생활만 잘하면 될 것 같았는데 조수광의 레이더에 새로운 범죄자가 등장한다. 그건 바로 전설적인 사기꾼 김인해(박성웅)와 흑사회의 일원 주린팡(윤경호)다. 죽기 직전까지 쫓는 수광의 추격이 시작된다.
의외로 놀란 것
글쓴이가 이 영화를 보고 예상외로 좋았던 건 액션이다. 첫 번째로 이 장면이 좋았던 이유. 나름 액션영화로서의 당위성을 나름대로 챙겼기 때문이다. 전반부까지 사건만 나열하던 이야기 전개가 중반부에 변곡점을 찍으며 정돈된다. 목적이 불분명하던 영화에 추진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생긴다. 구체적으로 영화의 전반부를 (선해하자면) 조수광의 일상을 보여준다. 후반부는 특정 목표를 바탕으로 인물들이 대립한다. 단순히 액션을 눈요깃거리로 보여주는 게 아니다. 인물이 빠져나가야 하거나 / 이걸 빼앗아야 하거나 / 캐릭터 간의 관계성을 보여주기 위해 꼭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 외의 나머지가 겉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해도 그게 중요해? 뭐가 됐건 장르를 고른 이유는 충실히 구현했으니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액션의 내실도 잘 챙긴 편이다. 어설프게 합을 맞춰서 때리는 척 티가 난다던가 하지 않다. 나름의 생동감을 살리려는 노력이 보이는데, 이 영화가 고른 것은 테이크 길이를 늘리는 것이다. 사실 이런 연출에 있어 오마주를 따온 작품이 있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 영향을 받은 듯한 촬영 구도가 있다. 구도가 비슷해서 ‘아이 이거 따라 하겠네’ 싶었지만 살짝 다르다. 기본적인 틀은 비슷한 것 같아 보이지만 액션에 사용되는 무술이나 캐릭터의 개성도 잘 살린 액션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들이 도구를 사용하는데, 이 장면은 이 영화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고 기획됐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왠지 모르게 MCU 히어로 중 하나가 생각나기도 하고 어디서 본 이미지를 차용한 것 같다. 하지만 일반적인 중년 관객들이라면 이런 걸 다 알리가 없으니 마음을 사로잡기엔 충분하다.
보여줄 것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웃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웃기지 않을까'에 천착해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가 아무렇게나 대충 움직이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에겐 고유한 행동 패턴이라는 게 있다. MBTI로 치면 P쯤 되는 인간들도 가지고 있는 습관이란 게 있고 자주 가는 곳이 있다. 이 영화는 그런 행동 양태를 띄지 않는다. 풀어써보자면 어떤 걸 보여주려고 했는지가 장면마다 종잡을 수 없다. 시퀀스들이 대부분 길다. 그 시퀀스에서 플롯을 위해 보여줘야 할 정보가 있다. 그 정보는 시퀀스의 길이에 비해 대게 짧다. 그 나머지는 안 웃긴 개그다. 그래서 초반부를 넘어 초중반부 이후 플롯부터 이야기가 늘어진다. 이야기가 늘어지니까 이 영화에서 그 어떤 드립을 치고 슬랩스틱을 해도 몰입이 안 된다. 이 무질서한 리듬이 초반부터 시작되는데, 그래서 초반부 한 1시간을 봐도 남는 것이 ‘조수광이 제주살이에 있어 애를 먹는다’ 말곤 없다. 안 그래도 안 웃긴 개그감각이 더 지루하게 느껴지고, 이야기의 밀도를 떨어트린다.
대표적으로 만복(손종학)이 이끄는 이야기는 줄거리가 루즈해지는 주요 원인이다. 이 인물은 유 회장 옆에서 얼쩡거리는 인물이다. 이 얼쩡거리는 일이 일단 웃기지 않아서 영화에 거슬리는 건 둘째 문제다. 이 인물을 잘 생각해 보면 단지 그 캐릭터의 욕망만 돋보일 뿐 영화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다. 이 사람이 큰 갈래가 되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아니다. 단지 플롯을 한 번 뒤엎기 위해 존재할 뿐. 중반부가 넘어가면서 이 인물을 설명해 주지만 이 장면이 연출을 통해 쾌감이 느껴지는 형태가 아니다. 다른 영화면 길게 설명했을 부분을 단적인 장면으로만 보여주니 맥이 빠지고 이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중에 어디서 본 것들
이 영화가 그나마의 독창성도 챙기지 못한 이유. 기존의 특정 한국영화 시리즈를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어떤 관객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예고만 봐도 우리가 20년 전즈음에 봤던 코미디/스릴러물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그 내실을 열어보면 또 다르다. 분노조절장애 형사라는 캐릭터 설정만 읽고 유추하기는 어렵다. 사연 있는 주인공들이야 이 지구상에 널렸다. 하지만 이 인물은 영화 팬이라면 잘 알고 있는 특정 캐릭터를 그대로 차용했다. 단순히 오마주일 수도 있다. 가령 귤 작업하고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몸싸움 장면을 보면 그렇다. 이 오마주가 이 장면 하나에만 사용됐으면 납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답습은 후반부에 다시 반복된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보면 이야기의 끝마무리를 낸다는 쪽에 있어 조악하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다.
글쓴이가 이 영화에 개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강력한 근거는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다. 뭐 분노조절장애가 있을 수도 있다. 그 병에 직업적으로 장애물이 생길 수도 있다. 정말 중요한 건 경찰 내부에서나 조수광 본인이나 분노조절장애에 대해 별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게 뭐가 문제냐. 분노조절장애라는 성격 때문에 벌어지는 여러 장면들이 생길 당위성이 만들어진다는 점이 이 캐릭터를 조악하게 만드는 점이다. 이 장면에 있어 고유의 개성이 넘치지 않는다. 이렇다면 영화가 무기를 가졌다고 봐도 무방한데, 어떤 영화를 답습했으니 얕은 깊이가 영화를 겉돈다.
<게이샤의 추억>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단어는 '오리엔탈리즘'이었다. 이 용어는 서구권 사람들이 동양을 경외심과 공포,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의미한다. 미국과 유럽이 동양을 묘사하려 할 때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오리엔탈리즘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게이샤의 추억>이다. 이 <게이샤의 추억>이란 영화는 게이샤라는 직업과 일본 사회를 왜곡하며 동양 문화를 오해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구체적으로 이 <게이샤의 추억>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국적은 중화권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배우들이 일본어로 대화하지 않고 영어로 대화한다. 이 설정 자체가 근본이 없는데, 더 중요한 건 영화 플롯에 있다. 게이샤를 성적으로 소비하는 연출, 기모노와 쪼리, 게이샤라는 직업적 특성을 저속하게 이해했다는 점까지 영화는 남자가 주체가 되어 여성을 억압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낭만적으로 그리는 패착을 저질렀다. 이 당시 이런 폭력적인 시각 때문에 <게이샤의 추억>은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이 영화 <필사의 추적>이 제주라는 지역을 보여주는 방식은 <게이샤의 향기>과 유사했다. 일반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의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그러니까 타문화에 대한 낮은 이해가 기반이 됐다는 점이다. 글쓴이가 <게이샤의 추억>을 비판하면서 쓴 첫 번째 근거. 언어다. 제주는 사투리가 다른 지역에 비해 특이하다. 역설적이게도 특이한 만큼 덜 알려졌다. 왜? 다른 지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상상도 못 할 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사투리의 두 특성이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정체성이 된 건 맞다. 글쓴이가 제주에서 나고 자라면서 제주라는 지역이 닫혀있는 지역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거기에 언어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거랑은 별개로 일상적으로 대화할 땐 표준어 쓰고 다 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경찰이 조직 내부에서 사건 브리핑할 때 제주 사투리 안 쓴다(그 경찰 조직 구성원들이 다 제주도민인 게 말이 되냐는 건 둘째 치기로 한다). 제주가 그렇게 도시화가 덜 된 지역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택시 운전사가 승객 태울 때 '혼저옵서예'라고 안 하고 바가지도 안 씌운다. 아니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아서 '이 사람은 육지에서 온 사람'이라고 정확히 맞춘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 영화는 한 번에 그걸 맞춰버린다. 단지 공항에서 사람이 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택시 안의 장면을 보여준다. 누구는 이런 장면들이 별 것 아닌 거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글쓴이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왜? 영화 전반부에 중국 자본이 제주에 침투했다는 상황과 마약 유행이라는 사회적인 맥락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 두 맥락이 영화 안에 들어간 이상, 육지 사는 사람들이 이 대사가 가진 허점을 체감할 수 있을까? 셋 다(마약/중국 자본의 침투 / 외지인들 향한 텃세) 우리 근처에 있는 맥락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또 이 영화에서 마약만큼 중요한 소재인 집에 대한 부분도 현실적이지 못한 전개다. 일단 이주민이 집을 쉽게 못 구한다는 설정 자체도 무리수다. 그러나 그 이면에 '외지인이라서 쉽지 않다'라는 전제조건도 이상하게 들린다. 글쓴이가 지금 당장 '제주시 평대(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 중 몇은 구좌읍 평대리였다)리 월세'라고 치면 결과물이 나온다. 요즘은 이렇게 온라인상으로 전, 월세 구하는 시스템이 잘 되어있다. 2020년대를 사는 우리는 이 현상에 올라타기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굳이 오프라인에서 도움을 받아 '선주민들은 외지인이라면 공인중개사 일도 제대로 안 한다'란 장면을 보여준다. 이 설정이 특정 캐릭터를 위해 들어갔다는 걸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만 글쓴이는 이것이 '굳이 필요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의 취지를 떠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보기 충분하다. 문제는 이런 불필요한 것들이 영화 곳곳에 숨어있다는 점이다. 중후반부 반동인물에 해당하는 캐릭터는 혼자만 괸당을 빗겨나가는 것처럼 행동해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차라리 괸당문화를 묘사할 거라면 영화 덕지덕지 붙여놓을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장면에만 등장하는 방식으로 연출했을 것 같다). 이런 연출이 왜 일어났을까. 글쓴이는 낮은 이해에 온다고 봤다. 한 지역의 병폐가 24시간 모든 구성원들에게 적용된다는 게 말이 되나? 더 깊게 이해했다면 단 한 장면으로도 많은 걸 보여주지 않았을까? <존 오브 인터레스트>처럼? 글쓴이의 이런 지적이 의미 없지 않다는 걸 보여주듯 '감귤'이라는 소재도 영화 안에서 맥없이 소비된다. 제주는 귤만 팔아서 지역사회를 유지하는 곳인가? 일반적으로 직장 다니는 직장인은 없나? 이런 허점들이 영화가 자신이 없으니 과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제주에 며칠 살고 주위 사람들에게 몇 마디만 들었다고 해서 제주 그 자체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이 영화는 단지 그대로 따랐다.
드 팔마가 정색해
전체적인 총평. 낡았다. 제주에 사는 글쓴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제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나왔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그럴 것이 없다. 기껏해야 윤경호 배우의 연기가 훌륭했다는 것 정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나머지 배우들이 그렇게 속 시원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건 아니라 전체적인 연기를 보면 좋았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깔깔깔 웃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최근 제주에 있었던 '비계 오겹살 논란'을 언급할 수 있다. 제주에 실제로 그런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영화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윤리가 있고 이해해야 할 리듬이란 것이 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다 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영화에서 사건만 짠하고 보여준다고 해서 충격적이지 않다. 또 빌런이 사회통념상 악랄한 짓을 한다고 해서 나쁜 놈이 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장르를 얕게 이해하듯 제주라는 지역도 조금만 안 티가 난다. 낮은 이해도가 어떤 허점을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예시가 되는 그런 작품이었다. 제주에 사는 팬으로서 이야기의 완성도로 승부하는 제주 영화가 만들어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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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얼굴의 다른 인생을 산다면
여기 미지와 미래,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일란성 쌍둥이가 있다. 너무 닮아서 엄마도 누가 누군지 분간을 못하는 쌍둥이. 첫째인 미지는 조용한 성격에 모범적인 공기업 회사원이고, 둘째인 미래는 활발한 성격의 오늘만 사는 아르바이트 인생이다. 미래가 자신의 인생이 너무 버거워서 튕겨나가려는 그 순간, 미래와 미지는 오로지 둘만 할 수 있는 인생을 바꾸는 치트키를 사용한다.
미지의 서울은 평생 아픈 할머니를 돌보며 시골에 살던 미지가 순탄하기만 한 것처럼 보이는 미래의 인생을 서울에서 대신해 살기로 하며 시작된다. 미래는 미지를 또 미지는 미래를 흔히 "편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쉽게 보지만 뒤로 갈수록 어려운 난관들에 부딪힌다. 특히 미래의 삶을 사는 미지는 미래를 대신해 회사의 안 좋은 소문으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회사에서 문제 많은 프로젝트를 떠넘겨지기까지 한다. 엎은데 덮친 격으로 낯선 서울에서 첫사랑이었던 호수까지 만난다. 미래를 연기하며 미지는 몰랐던 미래의 일상을 조금씩 알게 된다.
<미지의 서울>의 기획 의도처럼 미지와 미래는 서로의 인생을 대신 살면서 단순하게만 보였던 타인의 인생이 저마다의 아픔과 고난을 가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미지가 왜 "오늘"만 사는 사람이 되었는지, 미래는 왜 아픈 것을 티 내지 않고 꾹 참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저마다의 아픔은 미지와 미래에서만 지나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캐릭터 중 하나가 미지의 첫사랑 상대인 "이호수"이다. 잘나가는 변호사이고 다정한 성격과 잘생긴 외모 덕에 인기가 많지만 사실은 과거 교통사고로 왼쪽 귀와 몸이 거동이 힘들다. 그리고 어린 호수의 힘든 순간을 지켜준 것은 바로 미래다. 보통 드라마의 남주라고 한다면 여주가 이해를 못 할 만큼 쾌남이거나 능글맞기 마련이지만 호수는 타인의 영역에 이상할 정도로 발을 안 들이는 캐릭터다. 좋게 말하면 다정한데 나쁘게 말하면 방어적이다.
호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왜 변호사가 되고 싶어?라는 질문에 다른 드라마처럼 정의나 옳음을 답으로 대지 않고 그냥 좋은 직업이라서? 하고 얼버무린다. 호수는 자신의 상사에게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라는 약점이 당신의 강점일 수 있다 얘기하면서도, 자신의 약점은 누군가의 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보면 미래와 데칼코마니다. 미지가 동경하는 미래와 호수의 좋은 직업과 덤덤한 태도가 화려한 이유보다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미지는 미래의 인생을 살며 직접 겪게 된다. 드라마 전반적으로 호수는 남주답지 않게 답답하고 회피적이지만 드라마를 보다 보면 호수도 저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그저 "사람"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맨스 드라마에서 보이는 남자 주인공의 클리셰적 면모를 탈피한 그저 한 사람으로.
그 뿐만 아니라 로사 식당의 감로사 할머니도, 미지의 친구인 경구도, 미지의 엄마와 호수의 엄마도. 점차 회차가 지나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인생이 어떤 과거를 딛고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다. 그들의 이야기 또한 한결같이 사실은 우리 모두 아픔을 숨기면서 사는 거라고 얘기한다. 엄마는 딸을, 딸은 엄마를. 친구를, 연인을. 그들은 서로는 아픔 속에서 서로를 통해 치유받는다.
방어적이고, 소문에 시달렸던 미래는 이미 새로운 선택을 한 세진을 만나서 앞으로 나가는 법을 배우고, 남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호수는 엄마와 미지를 만나서 남에게 기대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에게 다정한 소리를 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미지의 엄마는 자신을 그렇게 가르쳤다던 미지의 할머니를 통해 다시금 다정해지는 법을 배운다. 12화 내내 사람이 사람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고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당신도 못할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 드라마는 반전이나 서스펜스, 스릴이라는 것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힐링과 공감 그리고 이해로 똘똘 뭉쳐있다. 모든 것이 사람이 사람에게 치유받고 다가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이 타인의 삶을 살아가며 "네가 이렇게 힘들었구나" 말해주는 몇 마디에 삶을 위로받는다. 어느 누구의 삶이라도 쉬운 것은 없다고.
드라마의 막바지 무렵의 미래와 미지는 남들이 보기에는 의아한 길을 걷는다. 가기 쉬운 길, 갔다 왔던 길, 익숙한 길을 제치고 새로운 길을 걸으면서 이런 "헛수고"도 결국 의미 있다고, 또 이런 "헛수고"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믿어주는 다른 이가 옆에 있어서라고 말한다. 미지와 미래처럼 아직은 어린 사회초년생들도 미지의 엄마와 로사 할머니처럼 이미 나이를 어느 정도로 먹은 경험자들도 남들은 모르는 저마다의 헛수고와 아픔을 겪는다. 날씨와 달리 차갑고 쌀쌀한 우리 사회에 그런 헛수고와 아픔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미지의 서울>은 시청자들을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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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국열차: beyondness
“제자리를 지키고 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모든 게 합쳐서 무엇이 되나? 열차야. 각기 있어야 할 자리를 엄격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합치면? 그게 인류야. 열차는 세계 우리는 인류야”
“이제 자네는 전 인류를 이끄는 성스러운 임무를 얻었어. 자네는 저들을 구원할 수 있어.”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사회
온난화를 막기 위해 살포한 CW-7으로 인해 지구는 빙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얼어붙은 세상을 17년 동안 달리는 긴 열차가 있죠.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에는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앞 칸과 꼬리 칸으로 나누어 살아갑니다. 앞 칸은 표를 구입해서 열차에 오른 사람들, 꼬리 칸은 혹독한 추위를 피해 표 없이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격차는 17년 동안 크게 벌어졌습니다. 달리는 열차라는 사실만 빼면 얼어붙기 전 세상에서 살던 것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앞 칸 그리고 그런 앞 칸을 꿈꾸며 살아가는 꼬리 칸은 먹는 것부터 매우 차이가 납니다. 스시도 먹을 수 있는 앞 칸과 다르게 꼬리 칸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단백질 블록만을 먹고살죠.
꼬리 칸 사람들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7인의 반란, 맥그리거 폭동 등 밖으로 나가거나 앞 칸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이 있었죠. 그들의 끊이지 않는 도전은 영화의 주인공 커티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이미 실패한 전례가 있기에 그들은 더욱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앞 칸에서 그들을 돕는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단백질 블록 안에 메시지를 써 보내주니 더욱 철저하게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경비병들의 총에 총알이 없다는 걸 알아챈 커티스가 반란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반란은 시작되었고 반란이 혁명으로 번지기까지 촛불을 휘두르며 쉬지 않고 뛰어갔지만 그들이 가는 길에는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급수 칸 앞에서 폭도 진압을 위해 모인 복면인들과의 전투는 매우 잔혹하고 그들의 죽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울려서 싸우는 동안 열차의 간부 메이슨은 히죽 거리며 마치 재미있는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마냥 구경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커티스를 잘 따르던 에드가도 죽었습니다.
곳곳에 뿌려지는 피와 날선 도끼에 맞아 눈을 부릅뜬 시체, 꼬치 꿰듯 꽂힌 꼬리 칸 사람들의 비명 없는 외침을 보며 그들의 전투가 잔혹하다는 걸 무척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한 생각이 들게 하죠. 서로 죽고 죽이는 이 싸움이 누굴 위한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싸울 뿐입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꼬리 칸과 앞 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복면인들은 각자의 신념이 있지만 그 신념을 유발하는 ‘차이와 차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질서를 지키려는 자와 무너뜨리려는 자
앞 칸의 주요 인물들은 질서(order)를 중요시합니다. 질서는 영화 속 영문 표기에도 나온 것처럼 order, 다른 의미로는 명령이며, 이 명령은 신성한 엔진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오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영화 초반 메이슨이 “앞 칸이 머리면, 꼬리 칸은 신발이다.”라며 신발을 가리키며 이건 ‘무질서’ 또는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질서는 ‘생명’이 되죠. 즉, 질서(명령)는 열차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명시하는 겁니다. 그런 메이슨의 신념은 앞 칸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윌포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황홀감에 눈을 부르르 떠는 교사와 그를 따라 노래를 부르며 ‘윌포드는 위대하다! 엔진은 영원하다!‘고 외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릴 때부터 광기 어린 ’절대적인 명령(질서)‘을 주입하는 독재자의 그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 절대적인 명령은 ‘열차가 달려야 한다.’는 명제입니다. 이 명제 안에서 누구나 역할이 바뀔 수 있습니다. 길리엄을 추억하던 윌포드의 모습은 자신도 길리엄도 열차를 수호하기 위한 같은 역할임을 말하는 듯합니다. 이는 그들의 역할이 열차를 위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죠. 윌포드가 자신의 자리를 커티스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윌포드 역시 열차를 달리도록 해야 하는 자신의 위치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앞 칸 사람들 역시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지만 그 자리가 차이와 차별을 만들고 차별로 꼬리 칸과 앞 칸의 대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앞 칸 사람들은 단지 꼬리 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멸종된 열차의 부품 대용으로 사용해버리죠.
부품을 대체하는 꼬리 칸의 모습은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에 자신이 없어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나이가 들고 쓸모가 없어지면 더욱 젊고 튼튼한 부품으로 바꿔 버립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소위 말해 갈려나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앞 칸은 늘 권리를 누려왔고 꼬리 칸은 권리를 얻기 위해 늘 투쟁해야 했습니다. 그 온도 차이를 볼 수 있는데, 앞 칸 사람들은 생존이 아닌 보다 높은 삶의 질에 대해 고민(커티스와 일행이 열차를 지나가면서 보는 모든 장면들이 그렇습니다)하지만 꼬리 칸 사람들은 늘 단백질 블록 하나만을 먹으며 매 순간 생존을 위해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꼬리 칸 사람들은 앞 칸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꿈꾸며 그들을 향해 반란의 횃불을 들게 되는 거죠.
그러하기에 앞 칸은 더욱더 꼬리 칸을 강하게 억압합니다. 그리고 그 억압을 열차 내 무질서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죠. 윌포드는 늘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동안 실패했다던 7인의 반란, 맥그리거 폭동은 그들의 작품이었고, 영화의 주 내용이 되는 꼬리 칸의 반란 ‘커티스 대혁명’마저도 윌포드와 길리엄이 합작해서 만든 큰 계획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늘 변화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겨나는 겁니다. 윌포드와 길리엄 그 누구도 작은 변수들이 모여 질서를 어지럽히게 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변수는 커티스 대혁명에서 조금씩 쌓여서 큰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횃불을 들고 싸우거나 니느웨를 구원한 인물과 같은 이름을 가진 요나의 신비한 능력, 내내 골칫거리였던 크로놀이 폭탄으로 사용된다거나 자신의 팔이 잘리는 걸 무서워했던 커티스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팔을 희생하는 행동 등 변칙적인 요소들이 묶여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연 같았던 모든 변수들이 결코 우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꿈꾸었기에 변수들을 발생시킬 수 있었던 거죠. 예로 남궁민수는 감옥에 갇히기 전부터 열차 밖을 상상했습니다. 마약 하는 것처럼 하면서 크로놀을 챙겼고, 그중 좋은 질의 크로놀을 골라내 폭탄을 제조했죠. 그 결과 열차는 무너지고 비로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열차 안 또는 열차 밖
윌포드는 열차를 세계라고 했지만 그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대가 잉태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아담과 이브처럼 아무것도 없는 하얀 열차 밖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죠. 그들이 비교적 차별받는 황인과 흑인의 조합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요. 그들의 조합은 하나의 거대한 질서인 열차를 벗어나게 되었고 북극곰을 보며 열차 밖에도 사람이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열차 밖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면 좀 더 쉽게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거대한 사회의 질서를 벗어나게 된다면, 거대한 흐름에서 튀어나간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열차 안의 삶과 열차 밖의 삶.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할까요? 새하얀 설원에서 엔딩을 맞은 영화처럼 그 답은 스스로 내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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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뒤섞인 난맥상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법정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승패를 가리는 장소라고 믿으며 각종 꼼수와 편법에 능통한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그는 감옥에서 암에 걸린 아버지의 가석방을 약속받자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 대령의 변호를 맡기로 결정한다.
군인 신분 때문에 재판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는 박태주. 하지만 그는 변호인에게 쉽사리 협조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인 그의 눈에 정인후는 양아치니까. 그가 내란을 사전에 공모했는지, 아니면 위압에 의해 명령을 따랐는지가 재판의 쟁점인 가운데 박태주는 거짓 혹은 편법 증언을 요구하는 정인후와 거듭 부딪힌다.
한편, 10.26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어 권력을 잡겠다는 야욕을 품은 합수부장 '전상두'(유재명). 박 대령 재판을 자기 발판으로 삼기로 결정한 그는 실시간으로 재판관에게 쪽지를 전달하고 재판을 도청 및 녹음하며 정인후의 노력을 물거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무위에 그친 역발상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경호원들은 박정희 대통령 외 5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의 재판을 다룬 <행복의 나라>는 시간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어중간하다. 사건의 전후사정이 이미 영화화돼 대성공을 거뒀기 때문.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의 동기를, <서울의 봄>은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을 영화화했다. 심지어 둘은 장르도 달랐다. 전자는 누아르를, 후자는 전쟁 영화의 속성을 강조했다.
이에 <광해, 왕이 된 남자>와 <7년의 밤>을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역발상을 했다. 10.26 사태나 주동자인 김재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은 공범 박흥주 육군 대령과 그를 변호한 태윤기 변호사에게 주목했다. 특히 그들의 인생사를 각색해 극명하게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게 되는 과정을 법정물로 포장해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행복의 나라>는 역발상의 힘을 스스로 포기했다. 신념과 규칙에 충실한 삶 대 생존을 위해 유연해야 하는 삶이라는 대립 구도를 깊게 파고드는 대신 쉬운 길을 간다. 무조건적인 악역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워 스케일을 키우고 군사 정권과 민주 시민의 대립을 강조한다. 문제는 같은 이야기로 천만이 넘는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 선배들이 있다는 것. 결국 노선을 바꾼 순간 <행복의 나라>는 자기 자리를 잃고 말았다.
거대한 사건 속 개인적인 이야기
장르만 놓고 보면 <행복의 나라>는 <변호인>과 비슷해 보인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법정물이니까. 하지만 두 영화의 지향점은 전혀 다르다. <변호인>은 분노를 연료로 삼아 달리는 작품이었다. 무고한 피고인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그에 맞서는 변호인의 투쟁. 이 명확한 선악 구도에 송강호라는 배우의 연기력을 더하니 마치 들끓는 불과도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행복의 나라>는 다르다. 선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성이 핵심이다.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두 주인공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인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을 꿈꾸며 판검사가 되려다가 실패한 변호사다. 법정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곳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곳이라는 대사에는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박태주 대령이 앉아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인데도 판자촌에 집이 있을 정도로 청렴한 군인이다. 요직에 있지만 권력을 마다하고 최전방 전출을 거듭 요청한 참군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10.26 사태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두 삶을 충돌시킨다. 배경은 대한민국의 향배를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지만, 정작 내용은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감독의 전작인 <광해, 왕이 된 남자>와도 유사하다. <광해>도 중심 사건은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극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된 내용은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충(忠)으로 무장한 유학자 '허균'(류승룡)이 광해군으로 위장한 광대 '하선'(이병헌)과 지내면서 자기 신념과 사상의 문제를 깨닫고 새 나라와 새로운 왕을 꿈꾸게 되는 티키타카야말로 천만 관객을 휘어잡은 원동력이었다. <행복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두 인생의 충돌로 빚은 법정극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신념을 지녔다 보니 정인후와 박태주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정인후는 철저한 원칙주의자 군인 박태주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관등성명, 상명하복이 권위주의의 발현에 불과하다며 비웃는 사람이니까. 박태주도 다르지 않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법정에서 온갖 편법을 써가며 승리를 추구하고, 정의가 아니라 돈과 이익을 위해 변호를 맡는 정인후는 단지 변호사일 뿐, 신뢰할만한 변호인이 아니다.
1차 공판만 해도 정인후는 자기 의도대로 재판에 임한다. 군인이니 군법에 따라 단심제 군사 재판을 받겠다는 박태주. 정인후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군사 재판은 받지만, 단심제는 3심제로 바꿔달라며 위헌심사요청을 한다. 위헌심사요청이 기각되자 재판관을 교체해 달라며 재판을 여론 싸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2차 공판부터는 다르다. 정인후는 점차 피고인의 입장과 신념이 녹아든 전략을 수립한다. 군인에게 명령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저 명령을 따른 박태주의 책임을 부정하는 식이다. 대통령을 살해한 후 정보부가 아니라 육군본부로 가자는 의견을 박태주가 냈다는 진술에 착안해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태주도 정인후를 만나 변한다.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재판을 포기하려던 그. 그는 군인이고 원칙주의자면 규칙대로 재판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서 책임을 지라는 정인후의 일갈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는 법정극 특유의 쾌감으로 이어진다. 감정 호소로 일관한 <변호인>과 달리 <행복의 나라> 속 재판씬은 판세가 거듭 뒤집히다 보니 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에 더해 흐름을 가져오려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변호인과 피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 팀이 되는 이야기가 병행되니 복합적인 재미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인권변호사가 되어가는 정인후를 보면서 박 대령이 웃음과 하이파이브로 화답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익숙한 맛으로 돌파하는 고구마
정인후와 박태주가 한 팀이 되어가는 과정은 자칫 고구마일 수 있다. 비록 역사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나, 박태주라는 캐릭터가 다소 과하게 올곧은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 자기는 죽고, 아내와 두 아이만 남아 험난하게 살아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 신념을 좀처럼 꺾지 못한다. 상관도 못 버리고, 명령에 충실한 군인이라는 자부심도 저버리지 못하고, 대통령을 살해했지만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도 내려놓지 못한다.
추창민 감독은 고구마를 익숙한 맛으로 뚫어버린다. 정인후의 아버지와 박 대령을 겹쳐 보이게 한다. 개척 교회 목사로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돕다가 수감되고, 가족을 돌보지 못한 아버지. 정인후는 자기 신념대로 살아야 하는 아버지를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가슴으로 이해해 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가 박태주를 만나는 장면과 이어진다. 그 덕분에 자칫 답답할 뻔한 전개는 가족애로 변환되어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다소 양식적인 스토리텔링이기는 하다.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통해 시대적 사건에 접근하면서 특히 감정선을 자극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유발하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화법이니까. 야매 변호사였다가 사건을 맡은 후 진정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는 정인후나 <변호인>의 송우석이나 다를 바 없다. 또 정인후와 아버지의 관계성도 이러한 맥락에서는 신파를 의도한 구조 배치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욕과 함께 무너지다
하지만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나라>는 이내 본연의 색을 잃는다. 의외로 초중반부까지 이 작품은 10.26 사태의 배경이나 실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김재규의 결단 정도로 언급할 뿐이다. 애초에 핵심 플롯 자체가 정인후와 박태주 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이는 의도적인 공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12.12 군사반란을 필두로 실제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역사적 맥락의 공백이 서서히 두드러지면서 영화의 만듦새도 무너진다. 배경이어야 할 사건이 돌연 주인공이 되다 보니 묻어 두었던 의문점이 한 번에 터져 나오기 때문. 일례로 중반부까지만 해도 매력적이었던 입체적인 인물상은 중심점을 잃고 흩어진다. 정인후의 경우 단지 박태주를 살리려는지 민주주의 투사가 되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박태주도 명령에 의한 피해자인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투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가 청렴한 군인이고 신념에 맞는 명령을 따랐으니 민주주의 투사로 여겨야 하는지, 군사 정권에 협력한 군인을 살리는 게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10.26 사태의 본질과 맥락을 외면한 채로 시작한 미시적인 이야기를 무리하게 거시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장르적으로도 균형을 잃는다.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서울의 봄>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서울의 봄>처럼 쿠데타 과정을 자세하거나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10.26 사태는 지우고 12.12 군사 반란을 부각한 선택은 법정극이라는 장점도 희석시키고, <행복의 나라>만의 개성을 깎아먹는 악수가 되고 만다.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지막으로는 극 중 전상두, 곧 전두환을 다루는 방식도 <서울의 봄>과 비교를 피할 수 없다. 황정민의 전두광과는 달리 유재명의 전상두는 상대적으로 일차원적이다. 전자는 들끓는 성공욕,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보스 기질, 위기 때마다 빛나는 간교함이 어우러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반면에 전상두는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절대악으로만 묘사된다.
그 결과 전상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영화는 편의적으로 느껴진다. 전두환이 의문의 여지없는 악역이기는 하나, 그를 덮어두고 비난하면 메시지가 뻔해지고 재미도 덜해지기 때문. 정인후가 전상두 면전에서 욕을 하는 골프장 시퀀스가 통쾌하거나 희열이 느껴지는 대신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슈퍼맨처럼 압도적인 힘을 지닌 히어로를 잘못 활용해 액션의 긴장감과 쾌감을 모두 놓친 <저스티스 리그>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행복의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유독 짙다. 악명 높은 한 인물 대신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의 서사에 우직하게 집중했다면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이전 시대극들과는 또 다른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조정석과 이선균,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두 주연의 연기도 함께 빛이 바래기에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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