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3-05 12:35:55
빛나는 시간을 담아서 학교 배경 영화 -9-
새 학기 추천 영화
❣️ [Cinelab Curation] ❣️
이번 주에는 새 학기를 맞아 학교 배경 영화들을 큐레이션 해보려고 해요!
새 학기는 언제나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하죠.
어쩌면 익숙해진 환경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에 놓이는 일이 쉽지 않은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새로움에서 여러분만의 길을 찾기를, 즐겁고 빛나는 시간을 많이 쌓기를 바랍니다.
그럼, 씨네랩 큐레이션과 함게 첫 주 무사히 잘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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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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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당한 살인이 존재하는가?
정당한 살인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정당함과 살인이라는 단어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흉악범에 대한 공적 제재가 약한 현대 사회. 시민들은 사적 제재를, 심지어는 흉악범에 대해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의 사적 제재를 용인하는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다. 나라가 벌주지 못한 사람을 개인이 나서서 혼내주는 것. 이 얼마나 멋진가.
이러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건들고 있는 작품이 있다. [살인자0난감]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심한 대학생 이탕이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는 것에서 시작 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 중, 좋은 마음으로 말을 건 한 남성과 시비가 붙은 이탕은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다가 편의점에서 챙겨온 망치로 엉겁결에 살인을 저지른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은 목격자를 제거하기 위한 또 다른 살인으로 이어지고 두 살인을 저지를 이탕은 자신이 우연히 죽인 사람들이 죽어 마땅한 범죄자들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이탕의 정당한 살인이 시작된다.
이 작품은 악인을 벌주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과 이들을 잡기 위한 형사의 대립구조로 진행된다. 이탕과 이탕의 살인을 돕는 노빈, 악인에 대한 살인을 저지르는 또 한 명의 인물 송촌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믿는다. 악인들을 벌하고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살인은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을 쫓는 장난감 형사는 죽어 마땅한 사람을 왜 네가 정하냐고 반문하며 분노한다. 독특한 일이다. 형사의 역할은 범죄자들을 체포하고 위험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악인들을 죽이는 무리는 어찌 보면 형사에 의해 지지가 되어야 하는 인물들이 아닌가. 여기서,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보인다. 이탕은 사회의 악을 벌주는 정의로운 영웅이 아니라 심판되어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 정의로운 살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살인자0난감]은 죽임을 당하는 인물들을 잔혹하고 우리가 분노하는 범죄를 저지른 캐릭터로 그려낸다. 죽어 마땅한 인물로 그림으로써 주인공의 살인을 응원하고 한 순간에 작품을 보는 시청자들이 살인을 지지하도록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죽어 마땅한 사람을 왜 네가 정하냐는 장난감 형사의 외침에 자신도 모르게 살인을 지지하고 있던 시청자들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감독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게 아닌, 시청자들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러한 전개를 사용함으로써 가장 완벽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최근 들어, 악인들을 벌하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작품들이 많아지고 있다. 악인들을 벌할 때 통쾌함을 느끼는 시청자들이 그러한 작품들을 많이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아주 자연스럽게 정당한 살인을 인정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린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가 모두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아무도 확답할 수 없는 ‘정당한 살인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살인자0난감]은 용감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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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의 마음을 관통할 명대사, GOAT
어제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 보셨나요?
3시간에 달하는 입장발표는 예술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직장인의 애환이 서려있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그래서! 고통받고 있을 직장인들을 위한 혹은
공감되는 명대사. 할 말 다 하고싶은 사람 드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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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플리트 언노운 | 반골 음유시인의 시작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1년. 무명 뮤지션 '밥 딜런'(티모시 샬라메)이 뉴욕으로 향한다. 롤모델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스쿠트 맥네리)가 입원했다는 뉴스를 듣자마자 그를 만나기 위해 곧장 뉴욕으로 떠난 것. 우디를 만나고, 그를 위한 노래를 불러준 밥. 우디의 절친이자 우디 옆에서 밥의 노래를 들은 '피트 시거'(에드워드 노튼)는 밥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고, 그가 작곡한 노래를 선보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준다.
피트가 내어준 무대에서 펼친 밥 딜런의 공연은 '조안 바에즈'(모니카 바바로), '조니 캐시'(보이드 홀브룩)를 비롯한 뮤지션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더 나아가 뉴욕에서 만난 사랑 '실비 루소'(엘 패닝)의 응원 속에 작업한 앨범마저 성공을 거두자 밥은 새로운 포크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밥은 겉잡을 수 없는 관심과 유명세를 견디지 못하고, 그는 상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노래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반골 음악가, 밥 딜런
전기 영화가 관객의 사랑을 받으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인물 자체가 흥미로워야 한다.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이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자 그의 인생을 조명한 <스티브 잡스>와 <잡스>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바 있다. 본인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났다가, 회사가 위기에 빠지자 복귀해 회사를 살려낸 스토리는 그 자체로 극적이었기 때문.
하지만 인물이 전부는 아니다. 두 작품의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호평은 전자에게, 혹평은 후자에게 집중됐다. 취사선택의 차이가 원인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미니멀한 형식으로 잡스의 인생을 재구성했다. 세 번의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에만 집중했다. 주변 인물 간의 대화와 갈등을 통해 잡스의 인간됨과 성장을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잡스>는 과유불급이었다. 애플 설립부터 복귀까지의 여정을 영화 한 편에 무리해서 밀어 넣었다.
두 영화의 차이는 전기 영화의 매체적 한계에서 기인했다. 한 인물의 생애를 모두 보여주기에는 분량과 형식이 애초에 부적절한 것. 따라서 전기 영화는 확실한 주제나 아이디어에 닻을 내린 채 그 외의 내용은 과감히 생략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영화의 의도가 관객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다. 일례로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핵무기 개발과 청문회에만, <링컨>은 링컨의 수정헌법 제13조 발의 및 통과에만 집중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밥 딜런 전기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취사선택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사실 밥 딜런의 인생을 영화 한 편에 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시대를 노래한 음유시인', 밥 딜런은 60여 년 동안 정규음반만 40개를 발표할 정도로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했기 때문. 그래서 맨골드는 1961년부터 65년까지의 밥 딜런을 요약하는 한 단어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눠서 보여주는 데 열중한다. 바로 '반골'이다.
반골의 음악
가장 먼저 돋보이는 층위는 밥 딜런의 음악이다. 이는 <컴플리트 언노운>의 오프닝 시퀀스가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전기 영화치고 이 작품의 오프닝은 이상하다. 밥 딜런의 전기 영화인데 그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등장하기 때문. 영화는 '우드 거스리'라는 포크 가수가 출연한 방송과 함께 그의 음악을 들려주고, 그다음에는 '피트 시거'라는 가수가 포크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재판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컴플리트 언노운>을 밥 딜런의 반골 기질을 압축한 작품이라고 보면 이보다 밥 딜런을 잘 소개하는 오프닝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초창기 음악 세계를 지탱한 저항 정신의 겉뜻과 속뜻을 모두 들려주기에 최적화됐기 때문. 더 나아가 전체 영화 내용에 대한 요약, 암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초창기 음악 세계는 물론, 그의 음악 스타일과 활동 영역이 돌연 달라진 이유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으니까.
우선 거스리가 출연한 TV 방송은 초창기 밥 딜런 음악 정체성을 알려주는 장치다. 미국 포크 음악의 전설인 그는 사회 운동 메시지를 노래에 담았다. 밥 딜런은 그로부터 노래에 저항 정신을 담아내는 법을 배웠다. 밥 딜런이 "그로부터 나는 가장 위대한 교훈을 배웠네"라고 노래했고, 그를 음악적 아버지로 부를 정도였다.
피트의 재판 장면은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포크 음악은 단순히 한 음악 장르가 아니라 사회 저항 운동을 이끄는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의 노래에 담긴 변화에 대한 열망은 포크 음악을 만들고 듣던 음악가와 팬들에게 직관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이는 밥 딜런이 데뷔와 동시에 포크 음악의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 두 장면 덕분에 빕 딜런이 스타덤에 오르는 과정은 전형적이지만, 깊다. 밥 딜런, 거스리, 피트와의 만남이 군수산업에 대한 비판을 담은 ‘Masters of War'나 자유와 평등을 꿈꾸는 'Blowin’ in the Wind’ 등의 노래 가사에 담긴 저항 정신을 음미할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밥 딜런이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 삽입된 흑인 민권 운동, 쿠바 핵 미사일 사태, 케네디 대통령 암살 뉴스 등도 가사의 의미에 집중할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반골의 앙시앵 레짐
흥미롭게도 그의 반골 기질은 음악과 가사로만 표출되지 않는다. 그는 특정 도그마에 갇힌 채로 규정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타고난 예술가였으니까. 그래서 피트가 그에게 포크 가수냐고 물을 때, 그는 그저 포크를 좋아하고 포크를 할 뿐이라고 대답한다. 이 문답은 그의 반골 기질 중 또 하나의 층위를 보여준다. 바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외부의 권위와 교의를 거부하고 맞설 줄 아는 용기다.
포크의 스타가 밥 딜런. 피트와 동료들은 그가 상징적 존재로서 민중 운동과 사회 운동을 계속 이끌어야 한다고 압박한다. 이에 밥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마지막 날 일렉기타를 든 채 그 유명한 'Like A rolling Stone'을 답가로 불러준다. 포크의 저항 정신은 사회 운동의 도구여야 한다는 교의와 레짐 앞에서 포크 록 음악을 연주하며 공개적으로 맞선 것. 설령 자신을 향한 기대와 유명세가 파괴되더라도, 곧 '완전한 무명(Complete Unknown)이 되더라도 자기 정체성과 음악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이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안타깝다. "당신의 낡은 길은 빠르게 낡아가고 있어/새로운 길에서 비켜나 주세요"라고 노래한 밥 딜런의 ‘The Times They Are a-Changin’에는 열광하던 이들이, 정작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이를 비난하는 모습이 한국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기 때문. 본인이 기득권인 걸 인지하지 못한 채 저항과 혁명을 논하는 이들에게 맞서는 쾌감, 그 변화를 스크린에서 만나야 한다는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는 이유다.
그렇기에 밥 딜런과 거스리의 만남이 장식하는 결말은 특히 감동적이다. 대부분의 동료들에게 배신자라고 비난받은 밥. 그는 과거 거스리가 선물한 하모니카를 돌려주려 하지만, 거스리는 밥이 계속 하모니카를 간직하라고 부탁한다. 밥의 변화가 배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본질을 표현하는 방식임을 거스리만큼은 이해한 것. 이 만남 덕분에 우디 거스리를 보여준 오프닝과 결말은 의미심장하게 수미상관을 이룬다.
반골의 사랑과 상처
반골이라서 포크 가수로 스타덤에 오르고, 또 반골이라서 과감하게 음악적 도전과 변화를 추구할 수 있었던 밥 딜런. 하지만 반골 기질이 언제나 그에게 따스한 빛만 비쳐주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털어놓기 힘든 상처와 그림자도 안겨주었으니까. <컴플리트 언노운>은 반골의 이면이라는 세 번째 층위를 두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밥의 반골 기질은 실비와 조안, 둘과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실비는 여러 시위 현장에 그를 데려가면서 그의 음악 세계가 확장되고 깊어지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피트 시거, 우드 거스리와 같은 결의 포크 가수였던 조안도 그가 반골이기에 그와 사랑에 빠졌다. 시대의 기득권을 비판하는 그의 노랫말을 들으면서 유망한 뮤지션 정도로 여겼던 그를 다시 본 것.
하지만 밥은 반골이라서 그들과의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다. 고정된 관계성을 견디지 못한 그가 떠나고 되돌아오기를 반복했기 때문. 이때 두 여성은 각자 밥의 인간적인 상처를 하나씩 상징한다. 실비는 유명세에 짓눌려 고통받는 밥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열광하는 대중이 두려운 밥은 공포가 커질 때마다 실비를 찾는다. 하지만 실비는 그의 자유로움을 이해할지언정, 그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들의 관계는 진전되지 못한다.
조안은 예술가로서의 상처를 상징한다. 그와 조안은 항상 음악 때문에 싸운다. 합동 투어에서 신곡을 부르려다가 조안과 다툰 후 공연을 포기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밥의 반골 기질, 새로움에 도전하는 그의 음악 스타일이 동료들과의 더 큰 갈등을 유발할 것이라는 암시나 다름없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동료들을 향한 원망과 실망이 조안과의 연애에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불친절하지만, 끝까지 읽게 되는 시집
다만 <컴플리트 언노운>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는 밥 딜런의 별명답게 영화도 한 편의 시와 같다. 압축적이고 간결해서 설명이 많지 않다. 그래서 불친절하다. 당시 좌파 진영, 사회운동가들의 갈등 양상이 짧은 뉴스 장면 등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 보니 그가 동료들과 갈등을 빚게 되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 밥 딜런의 과거를 잘 모르는 관객이라면 갑작스럽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 결과 클라이맥스인 뉴포트 페스티벌 공연은 덜 직관적이다. 설명이 부족하다 보니 그가 부른 노래에 담긴 의미도, 좌파 진영과 운동가들이 그에게 원한 역할을 그가 거부하는 쾌감도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라이브 에이드 공연으로 프레디 머큐리의 인생 역경 극복 서사에 방점을 찍은 것과 비교하면 심심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다만 오히려 그래서 음유 시인의 전기 영화다워 보이는 게 아이러니다.
그래도 배우들의 역량이 설명의 공백을 일부분 채워준다. 5년 간 작품을 준비했다는 티모시 샬라메는 숱한 남우주연상 수상의 이유를 증명한다. 특히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 이어 재회한 엘 패닝과의 비슷한 듯 다른 호흡은 영화의 감성을 극대화한다. 모니카 바바로도 <탑건: 매버릭> 속 '피닉스'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 노래 실력과 매력을 자랑한다. 그 덕분에 <컴플리트 언노운>이라는 시집을 도중에 덮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Acceptable 무난함
밥 딜런을 깊이 알면 알수록 배가되는 감동과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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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싹 속았수다 | 남녀노소 모두를 울린 구전의 위력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모두 울린 힘의 원천
솔직히 말해서 <폭싹 속았수다>를 볼 계획은 없었다. <우리들의 블루스>와 같은 드라마를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기 때문. 기대도 크지 않았다. 과거를 배경 삼아 펼쳐지는 박보검과 아이유의 청춘 로맨스 드라마 정도로 보였기 때문. 그렇지만 4막이 공개될 즈음에는 뒤늦게 몰아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궁금했다. 어떤 매력이 있길래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는 파급력을 보여주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첫인상은 예상대로 특별하지 않았다. 물론 '광례'(염혜란)의 모성애는 서글펐다. '애순'(아이유/문소리)과 '관식'(박보검/박해준)의 발칙한 로맨스도 귀여웠다. 딸의 인생을 지켜주려는 모성애, 가족을 책임지는 부성애, 가족을 못 지켰다는 죄책감이 한 데 모이면 눈물을 안 흘릴 수 없었다. 하지만 새롭지는 않았다. 전후 세대, 산업화 세대의 희생과 헌신을 조명한다는 점에서는 주인공 성별이 바뀐 제주도 버전 <국제시장> 같았다.
하지만 4막까지 보고 나니 비로소 <폭싹 속았수다>의 진가를 엿볼 수 있었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었다. 특히 아이유가 맡은 내레이션이 핵심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점이자, 남녀노소 모두를 울린 힘의 원천이었다. 애순이가 아니라 금명이가 맡은 내레이션 덕분에 <폭싹 속았수다>는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풍부한 이야기와 의미를 구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명이의 구전 동화
보통 영화나 드라마의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내심을 들려주는 독백인 경우가 많다. <데드풀>처럼 주인공이 관객과 속마음을 공유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또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돌이켜 보는 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 <폭싹 속았수다>의 내레이션은 이질적이다. 온갖 고생 끝에 시인이라는 어릴 적 꿈을 이룬 애순이 인생을 회고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오히려 금명이의 목소리로 애순의 인생을 들려준다.
이 이질감은 4막까지 다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해소된다. 그제야 금명이의 내레이션이 필요했던 이유가 보인다. 1막에서 금명이는 부모님, 관식이와 애순의 로맨스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엄마, 고모와 치킨을 먹는 장면만 봐도 관식과 애순이 서로의 첫사랑이라는 사실, 자기 태명이 다이아인 이유를 전혀 모르는 눈치다. 자기 본적이 부산이라는 농담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금명이는 관식이 입원한 후에야 부모의 사연을 깨닫는다. 관식은 딸에게 아내를 잘 부탁한다면서 밤을 새워 가며 그들의 로맨스와 인생사를 들려준다. 이 장면을 금명이의 내레이션과 연결 지어서 보면 <폭싹 속았수다>라는 이야기의 본질을 재발견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일종의 '구전'이라는 것. 극 중 내레이션은 금명이 본인이 겪은 일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시청자에게 전해주는 장치로 활용되었으니까.
사실 구전은 오래된 만큼 부정확한 기록 방식이다. 화자가 내용의 일부를 잊거나, 자기 뜻대로 왜곡하면서 원형과는 다른 결과물을 전달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구전은 특별하다. 이야기를 듣는 청자도 화자가 될 수 있고, 화자가 자기 나름의 해석과 견해를 덧붙이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율성 또한 구전의 본질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뻔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신파
금명이의 내레이션도 마찬가지다. 금명이는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를 시청자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을, 특히 딸의 입장에서 부모의 인생을 관찰할 때 느낀 바를 섞는다. 애순이 금명이의 딸과 함께 출근하는 금명이를 베란다에서 배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금명이는 이 상황을 두고 딸이 손녀를 볼 때 어머니는 딸만 보고 있었다거나 엄마에 대한 기억이 어색한 표정의 사진으로만 남을지 몰랐다고 언급한다.
윗 세대의 이야기를 딸의 시점에서 읊는 구조는 다소 뻔한 <폭싹 속았수다>의 이야기를 되려 특별하게 만든다. <폭싹 속았수다>는 유독 세대를 뛰어넘는 접점과 연결고리를 강조하는 연출과 편집을 자주 선보인다. 임신한 채로 돈을 빌리러 다니는 애순과 금명이 오버랩되는 식이다. 또 상견례에서 예비 시부모에게 찌개를 떠주느라 바쁜 금명이와 시댁 아궁이 앞에서 하루 종일 음식하느라 바빴던 애순이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구성은 자칫 인위적으로 느껴지고, 반복될수록 감흥이 덜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금명이의 목소리는 자칫 눈물을 짜내는 신파처럼 느껴질 수 있었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내레이션을 통해 딸의 시점에서 보는 부모님의 이야기라는 전제를 마련해 두었기에, 모녀의 인생 중 유독 공통점이 자주 부각되어도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셈이다.
잊히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다
구전이라는 형식은 <폭싹 속았수다>의 메시지도 뒷받침한다. 이 드라마는 할머니, 어머니 세대의 희생에 대한 헌사이자, 그들이 포기한 꿈을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라 할 수 있다. 이 메시지는 구전의 본질과 친연성이 있다. 구전은 망각의 동물인 인간이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고안한 전통적인 기록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구전의 형식미에 내포된 망각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곧 <폭싹 속았수다>의 메시지로 이어지는 셈이다.
임상춘 작가는 서서히 잊힐 수 있는 할머니와 어머니들의 인생을 보상의 형태로 기억하려 한다. 실제로 드라마는 그들이 포기했던 꿈을 끝내 이뤄내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일례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대에 태어나서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애순은 뒤늦게 보답받는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도 이뤘고, 딸에게는 다른 인생을 주고 싶다는 희망도 현실이 됐다. 금명이는 결혼도 취직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여성으로 거듭났으니까.
애순을 지킨 광례의 삶은 환생으로써 보상받는다. "책상머리에서 일하며 떵떵거리고 있나"라는 애순의 대사 직후 염혜란이 1인 2역을 맡은 편집장이 등장하는 것, 그녀가 애순의 원고를 읽고 "장하다"라고 말하는 것 모두 그녀가 광례의 환생임을 암시한다. 특히 그녀가 애순의 첫 시집을 출판해 주는 대목은 딸의 꿈을 마침내 이뤄주는 순간이자, 가장 감동적인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비현실적인 양관식 캐릭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거에는 사랑꾼인 관식보다 ‘부상길’(최대훈)처럼 가부장적인 아버지, 남편이 더 많았다. 즉, 관식의 존재는 과거에 상처 입은 어머니들을 위한 영화적 보상인 셈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상길이 악역으로 남는 대신 가족에게 다가서고, 가족들이 그의 변화를 받아주는 전개도 흥미롭다. 현실의 많은 아버지, 남편에게 안 늦었다며 변화를 촉구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함께 살면 살아진다
망각될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구전의 위력은 공동체 차원에서도 발휘된다. 제주도의 해녀들을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정하고, 그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다. 소실되어 가는 제주도 특유의 삶의 양식을 기록으로 남겨둠과 동시에, 4.3 사건처럼 제주도에서 발생했으나 장기간 조명받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아도 환기하는 효과도 거뒀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전의 형식미는 <폭싹 속았수다>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가 교조적이지 않고, 감동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이 드라마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베풀었던 친절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되돌아오는 따뜻한 우연으로 가득하다. 애순과 관식이 가출 중에 베풀었던 호의는 20여 년 후 금명이의 절도 누명을 벗겨주고, 관식이 수십 년 전 목숨을 구해준 인연이 말년에 돈복이 되어 돌아온다.
드라마 대사를 빌리자면, 함께 살면 살아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초코파이 포장지 아니면 보기 힘들어진 '이웃의 정'이라는 표현이 겉보기에는 하찮아도 실상은 위대하다는 것. 생활고 때문에 쓰려지려는 사람이나 아이를 일고 죽을 것 같은 사람도 살릴 만큼. 동업자 때문에 누명을 뒤집어쓴 채 찹쌀떡과 메밀묵을 파는 '은명이'(강유석)를 아버지와 장인, 이웃들이 함께 도와주는 모습에서 이 메시지는 더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의도치 않게 잊힌 이야기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폭싹 속았수다>가 의도치 않게 잊어버린 이야기도 있다. 전작 <쌈, 마이웨이>, <동백꽃 필 무렵>이 증명했듯이 임상춘 작가는 특히 딸의 시점에서 가족을 묘사하는 역량이 탁월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엄마의 갱년기 호르몬과 딸의 임신 호르몬 중 후자가 이겼다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언제나 자기편이던 아빠가 처음으로 화를 내자 금명이의 얼굴이 삽시간에 서운함으로 가득해지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반면에 아들의 관점에서 가족을 그려내는 방식은 다소 투박하다. 일례로 <폭싹 속았수다>는 은명이의 입대를 혼전임신과 결혼이라는 해프닝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으로 유머러스하게 짚고 넘어간다. 이는 어머니와 아들의 인생에서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면 다소 단순한 묘사처럼 느껴진다. 군대를 접하지 못한 어머니들이 아들의 입대를 지켜볼 때 모자 관계가 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포착하지 못하거나, 안 한 셈이다.
이는 더 나아가면 이상적이거나 획일적인 가족상만 부각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드라마가 철저히 '가족’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전개되는 것에 비하면 가족의 다양한 형태와 구성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입체적인 갈등까지는 다루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잊히지 않을 드라마
그렇지만 유일한 옥에 티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화자와 청자 모두에게 자율성이 있는 구전의 형식을 차용한 덕분에 시청자가 드라마의 빈 공간, 부족한 지점을 알아서 채울 수 있으니까.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아도, 가족 관계나 사연이 비슷하지 않더라도, 화면 속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누나, 남동생으로부터 공통점이나 접점을 찾아낼 수 있는 자율성이 주어진 셈이다.
이러한 독특한 경험 덕분에 <폭싹 속았수다>는 단순히 애절하고 감동적인 가족 드라마를 뛰어넘어서 한 공동체를 아우르는 서사시로도 격상될 수 있다. 한국 현대사를 경험한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집단적 경험, 원형적 심상을 들려주는 구전 동화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폭싹 속았수다>는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들 못지않게, 잊을 수 없는 드라마가 된 것만 같다.
과장하자면 현시대의 <토지>처럼도 보인다. 물론 한민족의 파란만장한 근세사와 당대 사람들의 일상을 총망라한 <토지>의 방대함, 생동감, 완성도를 따라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점에서는 <토지>의 역할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전쟁 이후로 반 세기가 넘는 기간을 경험한 현시대의 시청자에게는 <폭싹 속았수다>가 <토지>보다 친숙하고, 더 큰 울림을 줄 테니까.
Outstanding 특출남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구전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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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모성에 관해
- 케빈은 왜 그런 선택을 하고 말았을까.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대도 관객이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케빈과 어머니인 에바와의 유대감이 부족했다는 점 하나로 이 영화를 부족한 유대감이 만들어낸 파멸을 묘사해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뭉스럽다. 보통 부모와 유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멸적이거나 극도로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지만은 않기 때문이겠다.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 그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케빈에 대하여>를 거꾸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애초 영화는 이야기를 뒤집어 서사를 전개한다. 영화는 케빈의 어머니인 에바가 케빈을 낳기도 전, 즉 결혼 그 이전의 시간부터 현재 자신이 마주하는 현실의 순간까지를 계속해서 돌아보는 구조를 보여준다. 영화 속 서사로 봤을 때는 이 영화의 종반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핵심적 사건이 가장 먼저 삽입되어야 한다는 시선을 거둘 수는 없다. 보통은 큰 줄기에서 시작해 곁가지를 뻗어 내는 구조가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재미있는 지점은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이지만 이 영화를 서술해 내는 주역이 케빈이 아니라 에바라는 점이다. 지극히 어머니의 시선에서 케빈과 그를 둘러싼 상황들을 전개한다. 이쯤에서 질문을 꺼내어볼 수 있다. 케빈의 시선에서 서사를 전개했다면 관객은 그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지. 아마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케빈이 어렸을 때부터 보인, 어쩌면 이상행동이라 부를 수 있을 그런 행동들을 보이는 것을 대부분의 관객은 에바의 시선으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결국은 어머니의 시선으로 보는 케빈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어머니의 시선으로 케빈을 생각하도록 한다. 에바는 이 영화 속에서 어떤 감정 상태를 보여주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크게는 영화 속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하는 구조를 보인다는 점과 영화가 강조하는 ‘색’의 의미를 파악해 보아야 한다.
에바는 행복해 보일 수 없다. 남들과 같은 평범하거나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대뜸 그녀의 뺨을 후려칠 수 있다. 또는 그녀가 사는 집 외관과 승용차에 빨간색 페인트를 흩뿌려 버린다. 장을 보기라도 하는 날이 되면, 그녀가 사려고 담은 달걀 한 판을 모두 박살 내야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는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에바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낙인과도 같은 화살들을 담담히 지고 나아가려고 한다.
어느 곳을 가든 자신을 감시하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집에 마구잡이로 뿌려진 붉은 페인트를 벗겨내려고 하는 것조차 감시하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는 케빈이 그녀의 아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들이 케빈을 증오할 수는 있어도, 그 부모와 가족까지 증오하고 그들의 삶마저 모두 이 세상으로부터 들어내려고 하는 전복적 시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케빈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재활하게 됐지만 우연히 에바를 만났을 때 밝은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한 소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케빈에게 해를 당했음에도 에바를 증오할 마음 없는 그 당사자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결국은 모성만이 남는다. 모성의 형태가 어떻다고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자식을 위하는 마음과 어떤 일이 있든 그를 이해하려 하는 마음 자체를 모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의도치 않았지만 찾아온 케빈이라는 존재를 결국 낳았고, 후회했지만 결국 길렀다. 그 과정에서 여러 난관이 찾아왔지만, 에바는 포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저버리고 감옥에 수감된 케빈이지만 에바는 그를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에바는 케빈에게 묻는다. 대체 왜 그랬으며,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그렇지만 케빈은 여전히 에바에게 명백한 답을 전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닐까.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아야 이 영화가 완성될 수 있다고. 그렇게 흐릿한 마음과 시선을 안았지만, 모성을 숨기지 않으며 에바는 살아간다. 모험가로서 책을 출판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 과거의 경험을 살려 여행사에 취직한다. 예전의 호화로운 저택은 더 이상 없지만 작은 주택에서 케빈을 다시 맞이하고자 한다. 이웃들이 자신에게 찍은 낙인을 지워내기 위해 조금씩 그 흔적들을 지워낸다. 영화는 에바를 주인공으로 선정함으로써 그렇게 ‘이해 불가능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시선으로 서사를 읽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모성에 관한 서사를 에워싸는 빨간색이 있다. 모험가이던 시절, 토마토 축제에 가서 자유를 만끽했던 순간의 빨강. 섣부른 판단으로 남편과 관계하고 아이를 가지게 됐던 순간 디지털시계가 시간을 알리던 그 빨강. 케빈이 에바의 개인 공간을 물감으로 더럽혔던 순간의 빨강. 그리고 케빈이 학교 친구들을 학살했던 그 순간을 목격한 에바를 감싼 빨강. 그 순간을 회상하고 모든 죄를 자신이 지고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빨간색이 있다.
빨간색은 후회와 불안정한 과거에 대한 에바가 ‘속죄해야 할 것’들이다. 에바는 케빈을 낳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후회는 계속해서 에바 자신을 칭칭 감아버린다. 후회에 둘러싸인 에바는 케빈이 일으킨 사건을 회상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화살을 맞고 죽는 것처럼 붉은빛 속에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케빈에게는 그런 붉은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케빈은 후회하고 속죄하지 않기 때문일까. 모든 죄를 에바가 짊어지기로 선택했기 때문인 것일까.
결국 에바는 속죄하기를 택했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쏟아낸 혐오와 증오를 받아내고, 집과 자동차에 뿌려진 낙인과도 같은 페인트를 긁어내고 이내 파란색으로 그 흔적을 덮어낸다. 그 과정에서 케빈을 만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것도 멈추지 않는다. 종반부에서 그 대화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결정적인 것은 여전히 에바는 이해하지 못하고 케빈은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그 일말의 여지마저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고 에바는 케빈을 포기하지 않는다. 집의 한편에 있는 방을 과거 케빈의 방과 똑같이 꾸미고, 케빈의 옷을 다려 가지런히 캐비닛에 넣는다. 케빈이 어떤 행동을 하고 모습을 갖던, 에바는 있는 그대로 케빈을 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에바는 모성애가 강한 인물이다. 케빈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에바가 그를 너무 사랑했기에 감싸지 못한 것이다. 사랑했기에 자신의 관심으로 그를 덮으려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집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지만 너무나 쉽게 망쳐버린 케빈의 흔적을 쉽게 뜯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에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할 수 있다. 작 중에서 에바 자신마저도 그런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자기 자신을 ‘그 현장’으로 다시 소환시킨다. 그리고 고통스러워 한다. 케빈을 자식으로서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케빈이 영원히 에바가 납득하지 못할 행동을 이어간대도 에바는 그 자리에 서서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에바가 케빈을 ‘섣불리’ 낳았던 것에 대한 참회일 것이며 ‘서투르게’ 케빈을 교육했던 것에 대한 나름의 속죄다.
그러나 에바에게 그 속죄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게 하는 것이 옳은지는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사회에서 흔히 중범죄의 가족은 ‘연좌제’의 개념으로 낙인찍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제는 고루한 개념이 돼 사라져 버린 그 연좌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정말 납득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에바가 짊어질 수 있는 그 정도는 어느 정도라고 보아야 할까. <케빈에 대하여>는 미스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미스터리를 다시 한번 전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겠느냐고. 그렇다면 생각해 볼 때다. 우리는 에바와 케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케빈이 악한이 된 것에 대해 에바에게 그 짐을 모두 짊어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에바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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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패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2024년에 쓴 글을 포스팅한 것이다.)
12.12 사태에 대해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을 봤다. 한국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파서 보기를 망설이곤 했지만, 그럼에도 극장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어떤 분노는 기억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재미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고, 연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2시간 반이나 되는 짧지 않은 러닝 타임 동안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면서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탁월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감상할 때면 언제나 '역사를 왜곡하거나 악인을 지나치게 미화하지는 않을까?'하는 우려를 하곤 하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 한해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불필요한 자극 없이 그 당시의 무력함과 분노를 충분히 끌어내는 힘도 있다. <서울의 봄>의 탁월한 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전두환'(극 중 이름은 '전두광')이 묘사된 방식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 부패는 어디서 싹트는가?
전두환과 같은 독재자에 대해 다룰 때, 우리는 부패에 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부패란, '정치, 사상, 의식 따위가 타락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타락이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을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할까? 흔히 사람들은 타락이 아주 거창한 계기에 의한 것이라고 상상하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타락은 대개 아주 사소한 이기심에서 자란다. 내 것, 내 밥그릇, 내 사람을 챙기고자 남의 희생에 눈감는, 그런 종류의 욕심 말이다.
'전두광'과 '노태건', 그리고 그들이 세운 '하나회'도 다르지 않다. 거창한 명분이 있을 것만 같지만, 그들이 그토록 활개를 쳤던 이유는 손 쉽게 힘과 지위, 명예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소위 그 당시의 '엘리트'를 자처하면서, 비슷한 욕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손을 잡고 삼삼오오 모여다니면서. 질나쁜 깡패들이 그러했듯이. 그건 '정석적이고 도덕적인' 길보다 훨씬 쉽고 간편했을 것이고, 이것이 그들이 기꺼이 타락했던 이유이리라. 그들이라고 어디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몰랐으랴마는, 어쨌든 그들은 그 모든 불의에 눈을 감다 못해 그것을 직접 이끌어 나가길 택했다.
하나회라는 카르텔에 대한 충성심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 집단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떡고물'이 먹음직스러웠을테니까. 다가올 이익에 대한 어떤 기대 혹은 약속은 마치 마법처럼 소속된 사람을 홀리곤 한다. 나치당과 히틀러에 현혹된 옛 독일의 국민들처럼, '우리'를 챙기고 '남'을 배척하는 사이 사람은 도덕과 정의에 무감해지고, 잔혹해진다.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를 챙기는 그들의 지극히 이기적인 이타심 속에 부패의 씨앗이 자라난 것이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는 말이 있듯, 부패의 씨앗은 쉬이 자란다. 부패는 그것에 눈감거나 당연시 여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힘을 얻고, 빠르게 몸을 부풀린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다다라서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고 만다. 이 사소한 부패가 모이고 자란 결과가 바로 전두광과 하나회다.
부패와 불의에 대해 논한다면 정의에 대해서도 논해야 마땅할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를 말한다. 다시 말해, 정의는 개인 간의 관계와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른 길'을 말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들에 의해 사람들은 너무나 손쉽게 이 '바른 길'을 벗어나고 만다. 정의를 지키는 것이 어려운 건 이 때문이다.
극중 이태신은 이러한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부패는 너무나 하찮은 이유에 기인하고, 그래서 쉽게 눈감게 되니까.
2. 참, 멋없는 부패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탁월한 점은 '부패'의 멋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는 많은 영화 속 '매력적인 악역'에 열광하곤 하지만, 실상 악당은 '멋있지 않다'. 그들은 치졸하고, 추악하고, 저열하다. 전두광은 그 모든 멋없음을 아주 탁월하게 표현한 캐릭터다.
극 중 전두광의 '쿠데타 계획'을 한번 살펴보자.
전두광은 자신의 부패에 가담하지 않은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 없는 혁명은 결코 인정받을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를 모함하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살해 공모자로 만듦으로써. 그러나 참모 총장은 그보다 지위가 높았고, 그를 체포하려면 더한 공권력이 행사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의 승인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또 대통령의 승인을 받으려면 일정한 절차를 통해 올려야 하므로 참모 총장이 그 사실을 모를 수 없게 되고, 그가 이 모든 일에 대비하게 되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그래서 전두광이 선택한 것은, 그 모든 절차와 상식을 무시하고 참모 총장과 대통령 승인을 동시에 받는 것이었다. 자신과 하나회의 인맥과 군대를 활용해서!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우악스럽고, 폭력적인 발상이었다.
계획만으로도 기가 막히는데, 계획을 이행하는 과정도 엉망진창이다. 한밤중에 대통령을 세 번이나 찾아가 떼를 쓰지 않나, 강경하게 나오는 이태신의 작전에 일희일비하질 않나. 치밀하지 못하게 세워진 계획 위에 하나회는 우왕좌왕하고, 학연, 지연, 혈연 따위로 끌어모은 권력과 병력으로 뚫린 구멍을 땜질하기에 바쁘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게 '먹혔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망설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이 전두광의 길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그 부패와 악의를 묵인한 대가는 처참했지만, 그때 그들은 그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알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나. 또 한편으로는 전두광의 악의가 너무나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시민과 아군을 기꺼이 인질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 '사람'보다 '정의'를 우선시하지는 못하리란 것을 알았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 전두광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며 승리에 고취된다. 그것은 그가 벌인 그 모든 일이 그 개인의 '배설된 욕망'에 기인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추저분스러운 환희였다.
3.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는 웰메이드 영화
영화는 노골적인 폭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폭력의 위압과 위협을 보여준다. 우리는 인물의 대사와 상황, 미장센을 통해 '평화와 친선'을 가장한 씬들의 이면에 강압적이고 우악스러운 폭력이 자리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면서 그 폭력을 미화하지 않고, 하찮고 추악한 것임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심각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 곳곳에서 활약하는 재치있는 유머들도 눈에 띈다. 악당들의 하찮고 치졸한 면면들을 풍자하는 그 장면들은 단순히 웃기려고 넣은 것이 아니라, 상당히 고심해서 넣은 영화적 장치로 보인다.
몇몇 반복되는 대사들을 포착하는 것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재미있는 방법일 것이다. 가령 아래 두 대사는 전두광과 이태신, 둘 모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대사는 같지만 그것이 내뱉어지는 상황과 경위, 인물들의 생각이 달라 극적인 대비를 준다.
'니편 내편이 어디있습니까. 대한민국 육군은 모두 한 편입니다'
'가려거든 여기서 나를 쏘고 가라' / '쏠 거면 쏴라. 갈 길이 바쁘다.'
위 대사는 전두광과 이태신 모두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다르다. 전두광이 말하는 '우리(육군 등)'는 언제나 '나(전두광)'을 향해 있지만, 이태신의 '우리'는 그가 소속된 집단, 나라를 지키고 시민들을 보호하는 군 전체를 향한다. 같은 말을 해도 전두광은 과장되고 꾸며낸 거짓을 말하지만 이태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이 두 인물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러 의미에서 아주 잘 만든 영화다. 여러 번 곱씹으며 생각하게 된다. 내가 속한 곳에는 어떤 불의와 부정이 있을까? 나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혹시라도 내가 그것에 동조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같은 것들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둘러보고, 더 바른 길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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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시실리 2km"를 보며 소중한 추억을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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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협조적인 마을 주민, 예상치못한 귀신과 만나며 일은 점점 꼬여만 가는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조폭들이 했던 게임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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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울림, 강렬한 여운! 배두나, 김시은 주연의 새해 가장 뜨거운 화제작! [다음 소희] 티저 예고편 전격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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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메인 예고편
- 시를 엮은 책을 만드는 유쾌하고 솔직한 ‘그레이스’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조용하고 신중한 ‘에드워드’
그리고 감정 표현이 서툰 하나뿐인 아들 ‘제이미’
성격은 다 다르지만 평범하게 29년을 함께 한 가족.
어느 날, ‘에드워드’가 아내를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사랑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진 ‘그레이스’는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슬픔에 빠진다.
한편 멀어져가는 부모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제이미’는
각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감정을 이해해가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