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2025-03-28 17:53:13
담담했던 영화 그러나 임팩트있던 작품
스승이 제자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애초 넷플릭스용으로 만들어졌던 영화 '승부'는 2년여 만에 스크린에 걸렸다. 출연 배우에 관한 이슈에서부터 실화라는 점까지 관객들이 관심을 가져볼 만한 포인트가 여럿 있던 작품이다.
어쩌면 영화보다 당시 상황이 더 극적일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있었다.
승부는 조훈현 9단이 제자 이창호를 기르는 과정과 둘 간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조훈현 9단은 우리나라 바둑계에 한 획을 그은 자로서 넘사벽의 수준이었지만, 그의 모든 것을 배워간 제자 이창호는 청출어람의 정수를 보여준다.
스승은 제자의 수준을 '이 정도'라고 가늠했지만, 숨죽인 잠용은 그보다 몇 수 더 나아가 있었다. 비록 스승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너는 나의 자부심이었다는 말.
네 바둑을 두라는 말.
내 자식처럼 키워온 제자를 그렇게 스승은 세워준다.
누군가는 그러한 스승을 두고 제자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고도 비난하지만, 결국 제자는 스승을 능가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그 누구도 스승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것이 스승에게 배운 제자의 마땅한 도리일 터.
입단만 시킬 마음으로 데려온 게 아니라는 말은 스승은 제자에게서 수많은 것을 보았다는 뜻일 거다.
그것이 스승이 제자에게 거는 기대이며, 그것까지 만들어주는 것이 스승일 거다.
내게 있어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스승과 제자였다.
스승은 자신의 스타일로 가르치지만, 제자가 그 모든 것을 빨아들인 뒤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가져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한 바램과 달리 혹여나 제자가 잘못 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모두 자신이 키운 제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겠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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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외설적 돈키호테가 쟁취한 표현의 자유
7★/10★
이 영화는 어느 찢어지게 가난한 산골 집안에서 밀주를 팔던 소년 래리 플린트가 세계적 성인 잡지 《허슬러》를 창간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자수성가 성공 스토리는 아니다. 영화에는 래리 플린트가 법정에서 무수한 시련을 겪는 과정과 그의 조력자인 변호사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법정 영화인 것도 아니다. 〈래리 플린트〉는 어느 외설적 돈키호테가 표현의 자유를 주창하며 법, 체제, 규범의 경계선에서 줄타기하며 질문을 생산하는 영화다.
동생과 함께 허접한 스트립 바를 운영하던 래리는 가게를 홍보하기 위한 뉴스레터를 제작하다 성인 잡지 시장의 틈새를 발견한다. 그 영역의 절대 강자라 할 수 있는 《플레이보이》는 선정적이긴 했지만 ‘고급’스러웠다. 외설적인 사진과 수준 높은(혹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기사를 함께 배치하는 전략이었다. 래리는 확신했다. 《플레이보이》를 사는 사람 중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를 읽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그래서 사진과 어울리는(그러니까 ‘저속한’) 글을 실은 잡지 《허슬러》를 만들었고, 금세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대놓고 ‘외설’을 표방한 래리는 무수한 법적 시비에 휘말렸다. 음란물 유포 조직 범죄를 비롯해 법정 모독죄로 처벌받는 등 감옥신세를 졌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것에 대한 일종의 괘씸죄였다. 나중에는 수백만 명의 신도를 가진 유명 목사 제리 폴웰을 풍자하는 글을 실었다가 천문학적인 명예훼손 소송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폴웰과의 소송이 중요했는데, 일부 진보 언론의 지지가 있긴 했으나 당시 언론은 이 재판을 두고 ‘성직자 대 포주, 하나님 대 악마’의 재판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래리는 끝내 승리했고 표현의 자유의 수호자가 되었다. “수정헌법 1조가 저 같은 쓰레기를 보호한다면 모든 국민을 보호하겠죠.” 래리 플린트는 음란과 외설의 모호한 기준,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위계,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을 지배하는 도덕 규범의 정치적 허점 등을 파헤치며 무수히 많은 유의미한 논쟁을 촉발했다. 설령 쓰레기 같은 방법을 통해서일지언정.
영화는 이 과정에 그가 겪은 개인사적 어려움을 더한다. 래리는 총격을 받아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이 통증으로 한때 마약성 진통제 남용 문제에 시달렸다. 자기가 운영하던 바에서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만난 아내이자 래리가 가진 외설적 상상력의 원천인 알시아 역시 마약 문제에 시달리다 에이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래리가 법정에서 도발을 이어가자 판사는 그의 정신 건강을 의심하며 구속복을 입어야 하는 정신병동에 넣었다. 래리는 이 모든 시련 속에서도 자신을 압박하는 것들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와 마찬가지로, 래리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미국식 자유를 체득한 ‘자유인’이었다.
굴복하지 않는 래리의 정신을 그의 남성성과도 연계해볼 수 있겠다. 하반신 마비 후 래리는 성적 기능을 상실한다. 래리가 더한층 투사가 되는 건 이 이후부터다. 그의 캐릭터는 일관됐다. 하지만 이전에는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경제적 성공, 젊고 아름다운 아내, ‘외설’과 화제성의 정점에 있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식 능력을 상실한 후에 그의 지위는 조금 애매해진다. 무려 《허슬러》 발행인이 발기조차 되지 않는 남자라니? 그의 ‘투쟁’은 어쩌면 꺾여버린 자기 남성성의 일부를 여전히 빳빳하게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존 인물 래리가 지미 카터의 시대와 레이건의 시대를 모두 거친 인물이라는 점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는 래리가 종교 생활에 열중인 카터의 누나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카터의 시대에 래리는 소송에 시달렸을지언정 삶이 위태로운 상태까지 몰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이건의 시대에는 달랐다. 그가 마주한 모든 투쟁의 수준이 더한층 심화되었다. 그를 표현의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만든 건 역설적으로 래리를 지워버리고자 했던 성적 보수주의, 엄숙주의자들이 득세한 세상이었다. 1960~70년대의 페미니스트 해방운동에 대한 반동이 뜻밖에도 래리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래리 플린트라는 인물을 통해 한 사회의 성 문화와 규범, 도덕과 법의 모순을 폭넓게 살피는 이 입체적인 영화의 유산은 2024년 베니스영화제 상영작 〈디바 푸투라〉로 이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건 ‘포르노/외설 혁명가’의 얼굴이 왜 늘 여성을 착취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성애자 남성 포르노 제작자인가 하는 점이다. 앞선 두 영화뿐 아니라 션 베이커의 〈레드 로켓〉 등 포르노/외설 제작자 혹은 스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에서는 개별 주제 의식과 완성도를 떠나 ‘포르노-자유-(이성애) 남성’의 상관관계가 굳건하다.* 왜 성을 ‘착취’하는 것도, ‘해방’하는 것도 모두 포르노/외설 제작자 남성인가? 고민해볼 일이다.
*물론 포르노/외설 소재 영화가 늘 그런 건 아니다. 미국 사회와 포르노 스타의 흥망성쇠를 연계한 〈부기 나이트〉, 어느 남성 스트리퍼가 자신과 일을 긍정하는 과정을 그린 〈매직 마이크〉, 게이 포르노 스타를 주인공으로 한 〈킹코브라〉, 여성 스트리퍼들의 이야기를 담은 〈허슬러〉, 여성 성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아노라〉 등의 영화도 있다. 그러나 이들 영화에서 주인공은 성과 자유의 구원자라기보다는 그 한가운데에서 휩쓸리며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존재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남성) 포르노 제작자는 ‘해방’과 ‘자유’의 아이콘인데 반해 포르노 스타는 성별과 성적 지향을 막론하고 어딘가 스산한 결말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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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탈리스트 | 위로, 또 앞으로 나아가는 건축가의 삶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사촌 '아틸라'(알레산드로 니볼라)의 집에서 지내며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던 찰나, 그는 아틸라의 아내 '오드리'(에마 레어드)의 모함에 빠져 쫓겨난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냉혹한 현실을 견뎌내던 라즐로. 그런 그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야심 찬 건축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
건축가로서 재기할 기회를 잡은 라즐로는 열성적으로 프로젝트에 임하고, 빛의 경계를 넘나들며 브루탈리즘 양식이 돋보이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건물 설계안을 완성한다. 이에 더해 유럽에 있던 아내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조피아'(래피 캐시디)도 미국으로 건너올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자 라즐로는 찬란한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 주변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라즐로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환상과 허상을 딛고 우뚝 서다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는 개봉 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과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고,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여우주연상을 포함해 10개 부문 후보로 선정됐으니까. 영화 내적으로는 근래 보기 드문 15분 간의 인터미션을 포함한 3시간 34분 51초짜리 장편 영화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키웠다.
영화 외적인 뉴스도 <브루탈리스트>를 향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제작 과정에서 AI를 활용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 주연 배우인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펠리시티 존스의 헝가리어 발음을 보정하는 데는 AI 음성 변조 기술을 사용됐고, 건축 도면 생성에도 AI 기술이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AI 기술로 인해 촉발된 미국의 작가 조합 파업과 배우 조합 파업 여파가 남아있는 가운데 논쟁에 불을 붙이는 뉴스였다.
하지만 <브루탈리스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제목 그 자체였다. 215분의 러닝타임이 '브루탈리즘'이라는 과거의 건축 사조에 어떤 의미와 서사를 부여하고 쌓을지 의문이었으니까. <브루탈리스트>는 위로, 또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한 건축가의 품위 있는 서사시를 통해 호기심을 완벽히 충족시켜 준다.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과 허상의 폐부를 찌르는 고전을 펼쳐 보이기 때문. 단지 약간의 과욕이 옥에 티일 따름이다.
위로, 또 앞으로 나아가기
<브루탈리스트>는 프롤로그, 제1막, 인터미션, 제2막, 에필로그로 나뉘어 있다. 그중 프롤로그와 제1막 '도착의 수수께끼'는 라즐로가 미국에 정착하는 시기를 다룬다. 전반부는 이미지 두 개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이미지다. 뉴욕에 도착한 배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라즐로. 이때 카메라는 그의 시점에서, 아래에서 위로 자유의 여신상을 비춘다. 자연히 여신상은 거꾸로 뒤집혀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오프닝 크레디트를 장식하는 직진의 이미지다. 라즐로는 버스를 타고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향한다. 이때 카메라는 버스 안에서 밖을 비추되, 버스 전면부로 보이는 풍경을 고정적으로 보여준다. 그 덕분에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미지와 움직임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이 둘을 합치면 제1막의 서사,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자는 미국에 건너온 이민자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상징한다. 나치의 압제에 시달리다가 자유의 땅에서 새출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눌러 담은 셈이다. 이 이미지는 여러 형태로 변형된다. 해리슨의 의뢰로 라즐로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 설계를 맡는다. 이때 그는 유독 높이에 집착한다. 그에게 하늘에 가까워지는 것은 그 자체로 구원에 다가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처음 본 미국 하늘에서 자유의 여신을 만났듯이.
후자는 이민자의 진취성을 상징한다. 희망이 현실로 이뤄지려면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라즐로가 사촌에게 배신당한 후에도 기어코 건축가로서 재기한 것처럼. 이는 라즐로가 설계한 커뮤니티 센터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이 건물은 그의 수용소 생활을 상징하는 작은 방들 안에서 높은 천장을 올려다볼 때 하늘이 드러나는 구조가 핵심이다. 과거를 주춧돌 삼아 현재로 나아가고, 그 위에서 미래를 꿈꾸는 직진과 상승의 이미지로 가득한 셈이다.
인터미션이 만든 고전
이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현실에서 이룰 듯한 제1막의 감흥은 인터미션 직전에 정점에 달한다. 라즐로는 모두에게 잊혔던 자기 커리어와 명성을 되찾고, 자신을 신뢰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기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고, 유럽에서 떨어져 지내던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딸 조피아도 미국으로 데려올 연줄까지 갖춘다. 삶이 원래 궤도로 돌아와 비상하는 바로 그 순간 인터미션이 주어지기에 그의 감격과 환희는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다.
인터미션 동안 라즐로의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는 연출도 여운을 극대화한다. 이 사진은 아내와 조카딸의 이민 작업에 필요한 서류다. 라즐로의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할 가족이라는 마지막 조각인 셈이다. 그래서 인터미션은 감질난다. 거의 현실이 된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 보여줄 제2막이 궁금하니까. 이는 절반만 봐도 <브루탈리스트>를 고전으로 확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인물의 삶에 푹 빠지는 '시네마'다운 경험은 흔치 않기 때문.
다른 의미로도 인터미션은 인상적이다. 인터미션 덕분에 라즐로의 감정선은 제1막의 끝과 제2막의 시작에서 극명히 대조되며, 아메리칸 드림의 그림자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밝은 미래를 확신한 라즐로. 하지만 아내와 조카딸을 기차역에서 재회한 순간 그의 기대는 부서진다. 하체가 마비된 아내와 실어증에 걸린 조카딸은 그가 상상한 가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 그가 애써 외면하던 현실이 가족의 모습으로 등장한 셈이다.
환상 뒤에 숨은 허상
제2막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은 라즐로가 목도한 현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구체화한다. 허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이중성이다. 미국인은 이민자를 환영하는 듯하나, 그들이 주류 사회에 동화되지 않으면 차별한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라즐로가 겪는 고초가 방증이다. 일례로 커뮤니티 센터 내에 교회를 짓기로 합의한 후에도 지역 사회는 라즐로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의도를 불신한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횡포다. 라즐로와 해리슨의 관계 변화가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라즐로가 해리슨보다 우위에 있다. 라즐로는 해리슨이 애걸한 끝에 그가 제안한 커뮤니티 센터 프로젝트를 수락한다. 하지만 건설 프로젝트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선의로 시작된 후원자와 수혜자 관계는 점진적으로 수직적인 위계 관계로 비틀린다. 그렇게 해리슨은 돈을 목줄 삼아 라즐로를 통제하려 한다.
왜곡된 관계는 다른 영역에서 갈등을 초래한다. 라즐로 가족은 해리슨 가족으로부터 인격적 모욕을 당한다. 라즐로는 만찬 자리에서 해리슨에게 구두닦이 취급을 당하고, '해리'(조 앨윈)는 조피아에게 추근거린다. 가치관도 충돌한다. 철로 사고로 인해 부상자가 발생했을 때, 라즐로는 예술가로서 프로젝트를 강행하려 한다. 그에 반해 해리슨은 회사 이미지가 악화될 것을 우려해 공사 현장 직원을 모두 해고하고 프로젝트를 중단한다.
환상 뒤에 숨은 허상은 건축적으로도 암시된다. 제1막에서는 빛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중점이었다. 커뮤니티 센터에 교회를 설계할 때 라즐로는 햇빛을 어떻게 십자가 모양으로 다듬을지를 고심했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의 빛을 보여주는 듯하다. 반면에 제2막에서는 건물의 그림자 안에 깃든 추악함이 두드러진다. 공사가 재개된 후, 채석장 동굴 안 터널에서 해리슨은 술과 마약에 취한 라즐로를 강간한다. 그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라즐로와 제1막 끝에서 환희에 찬 그를 비교하면 이보다 극적인 추락도 없다.
브루탈리즘이 마련한 구원의 길
아메리칸 드림의 이중성이 밝혀지는 과정을 쫓다 보면 제목 '브루탈리스트'의 의미도 서서히 분명해진다. 사전적으로 브루탈리즘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재건 과정에서 등장한 건축 사조를 뜻한다. 이전의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기능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게 특징이다. 적은 수의 창문과 기하학적 구조를 외장 없이 노출된 콘크리트 건축물로써 표현하는 양식이다.
극 중 라즐로는 브루탈리즘 양식의 특징을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는 위양을 꾸미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특성을 솔직함의 미덕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재개된 커뮤니티 센터 건축에 열과 성을 다한다. 자신의 상처와 절망, 구원을 향한 희망, 그의 탈선과 집착까지도 숨기지 않은 채로. 아메리칸 드림의 '잔인함(brutal)'에 '브루탈리스트(brutalist)'답게 맞서는 셈이다.
실제로 제2막의 후반부는 솔직한 고백의 향연이다. 라즐로는 아내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로 숨겨왔던 마약 투여 사실을 고백한다. 에르제벳은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저지른 만행을 그의 가족과 사업 관계자들 앞에서 폭로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 앞에서도 솔직해진다. 환상과 허상을 모두 거두어 내고 현실만 직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조피아가 이민 간 이스라엘로,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그들의 선택은 종교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특히 라즐로와 해리슨의 대비가 눈길을 끈다. 유대인이라서 배척받은 라즐로는 구원받지만, 해리슨을 비롯해 그를 배척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으니까. 라즐로는 자신의 건축물이 그랬듯이 신 앞에서 떳떳해졌다. 그 솔직함은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릴 정도로 높아진 명예로 보답받았다.
반면에 독실한 개신교도라던 해리슨은 죄악을 숨기려다가 파멸했다. 그는 라즐로를 강간했다는 진실이 밝혀지자 커뮤니티 센터 교회의 그림자 속으로 실종된다. 그 순간 햇빛 대신 달빛으로 만들어진 역십자가는 그의 비극적 최후를 암시한다. 이 대조적인 결말에 다다르면 <브루탈리스트>를 호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민자라는 보편성과 유대인 건축가라는 특수성의 접점을 이렇게까지 깊고 다층적으로 파고들기는 어려울 테니까.
시대의 반영 또는 과욕
다만 에필로그는 옥에 티다. 이민자 서사와 유대인 서사 사이에서 절묘하게 잡았던 균형을 잃어버리기 때문. 라즐로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열린 본인 회고전에 조피아와 함께 참석한다. 그 자리에서 조피아는 라즐로의 건축세계를 설명하는 연설을 한다.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의 디자인은 라즐로가 지냈던 강제수용소를 재현한 것이고, 그의 건축 세계에서는 과정보다는 목적지가 중요했다고.
얼핏 듣기에는 조피아의 연설이 라즐로가 추구한 건축 세계의 핵심만 짚어주는 듯하다. 하지만 화자가 라즐로가 아닌 조피아라는 점을 생각하면 연설의 뉘앙스가 미묘해진다. 극 중 조피아는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게 신의 사명이라고 믿는 강성 시오니스트로 묘사됐기 때문. 그녀의 신념은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의 이민을 강행할 정도로 굳건하다.
이 맥락에서 조피아의 연설은 다양한 종교적, 역사적, 예술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던 <브루탈리스트>의 이야기를 유대인 정체성과 시오니즘 이데올로기 안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진다. 구원을 원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시오니즘을 추구하는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셈이다. 특히 영화의 시작과 끝에 라즐로가 아니라 조피아가 등장하기에 시오니즘 메시지는 더욱 강조된다.
물론 주인공을 유대인으로 설정한 이상 시대상을 반영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추구한 시오니즘이 2025년에도 끝나지 않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유발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에필로그는 <브루탈리스트>의 유일한 오점이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에서 욕심 한 숟갈만 덜어낼 수 있었다면 보편성까지 갖춘 명작이자 고전으로 기억되리라는 점에 두말할 여지가 없을 테니까.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유대인 이민자의 과거와 현재가 지어 올린 아메리칸 드림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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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모든 사랑을 불태워
<내 모든 사랑을 불태워>
제12회 스웨덴영화제 상영작감상평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혼을 하고 행복하고 평온하게 보내는 분도 많지만, 이 영화를 보고 떠오른 건 한국 영화 제목이기도 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였다. 서로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 그 부부의 모습을 닮는 후손.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등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순간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카린과 스벤, 울라프를 연기한 배우들의 매력에도 푹 빠질 수밖에 없다.
줄거리 (스포 있음)
<내 모든 사랑을 불태워>의 원작《내 모든 편지를 불태워라》(Bränn ala mina brev)는 스웨덴의 유명 팟캐스터이자 작가 슐만이 2018년에 출간한 반자전 소설이다. 1930년대 슐만의 외조부의 이야기, 할머니 카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할머니 카린은 젊은 시절 당시 유명 작가인 스벤과 결혼했지만 같은 재단에서 지원을 받으며 같은 숙소, 같은 층에 지내고 있는 올로프와의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 영화의 초반에는 알렉스가 부인에게 자기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스벤이 카린에게 하던 질투와 강압적인 태도를 하는 모습을 그대로 하는 모습이 나온다. 알렉스의 부인은 이에 질릴 대로 질려서 알렉스를 잠시 떠나고, 알렉스는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고 꽁꽁 묻어두었던 외조부모의 과거 이야기를 파헤친다.
그렇게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카린을 중심으로 서사된다. 스벤과 카린의 첫 만남은 로맨틱했고,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상상하며 서로의 평생의 짝이 되길 약속한다. 하지만 이상과 달랐던 결혼과 스벤의 모습은 카린이 다른 남자를 찾게 만들었고, 스벤은 그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하지만 팜므파탈의 카린을 힘들게 얻어낸 그이기에 그녀를 쉽게 놔주지 못하고, 그녀의 상처를 이용하여 본인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카린은 자신의 아픔과 잘못을 이용하는 그에게 질려버린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구토가 나올 정도로. 카린은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평생 동안 벌을 줄 것처럼 자기를 옥죄여오는 스벤과 달리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올라프에게 깊이 빠져버린다. 둘의 은밀한 연애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숙소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벤도 눈치를 챈다.
카린의 외도, 상간남의 아이를 임신, 또 다른 남자와의 외도는 상식적으로 보면 욕을 먹어 마땅하다. 하지만 카린은 완벽주의와 나르시시스트, 일밖에 모르는 스벤에게 이미 마음이 떠났고, 여러 번 이혼을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벤은 가스라이팅을 시전 하며 그녀를 옥죄이고, 죄책감으로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런 상황에 올라프는 카린이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카린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죽고 싶은 상황에 본인을 다시 사람처럼 살아가게 해 줄 사람이 있다면.. 또 스벤의 폭력적인 태도와 그녀를 놓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고 (영화가 끝나고도 여주가 잘못했다, 남주가 이상하다는 의견이 반반 들렸다) 신체적 폭력은 없지만, 스벤의 모습에서 예전 한국의 아버지들의 폭력적인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둘 사이의 딸, 아니 스벤이 딸이 아닐 수도 있는 아이가 생기며 부부는 스벤이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카린이 모아둔 올라프의 편지가 발견되며 두 부부의 조금은 귀여운(?) 부부싸움이 나오는데, 한국의 부부들이 보이기도 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다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공감 가는 부분이 있어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세 사람이 같은 숙소, 층을 쓰고 식사와 여가 시간까지 보내는 장면들이 꽤 있는데 두 남자의 은근한 신경전과 그 상황을 조금은 즐기는 듯한 카린, 스벤의 옆에서도 서로를 탐하는 카린과 올라프, 카린의 미묘한 감정 표현들이 재밌었다. 배우들 각각의 매력이 넘쳐서 더 재밌게 봤다. 정말 문제적 남자 그 자체의 연기를 보여준 스벤 역할의 빌 스카스가드는 그 유명한 스카스가드 집안이라고!
*사진 출처 : 아트하우스 모모, 주한스웨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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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이 추는 칼춤
강아지 한 마리 죽음으로 발생한 나비효과는 과연 어디까지 퍼지는가. <존 윅> 시리즈는 액션 장르의 고점을 갱신하는 액션 영화라고 치부한다. 후속 편이 나올수록 화려하고, 고도화되는 액션의 질은 고혹하기까지 하다. 검은 방탄 슈트를 입으며 적들을 피로 물들게 하는 모습이 마치 피어오른 붉은 꽃이 그려진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하게 한다. 바바야가, 존 윅, 조니, 조나단, 부기맨 등 별명도 참으로 많은 사신(死神) 존 윅이 추는 라스트댄스 <존윅 4>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존 윅 4> 스틸컷
<존 윅 4>라는 제목이 다가오는 느낌은 <존 윅> 시리즈를 끝맺는 수미상관을 보여준다. 1편 제목이 <존 윅>이었던 반면, 후속작 2,3편은 각각 '리로드', '파라벨룸'이라는 부제가 있었다. 킬러들의 세계관에서 최고 회의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아무도 얻지 못할 자유를 통해 '헬렌'의 다정한 남편이 되고자 한다. <존 윅 4>는 <존 윅> 시리즈의 끝맺음이다. 애초에 영화가 끝맺음을 짓기 위해 흘러간다. 이들도 아무리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 사람을 죽이고, 최고 회의 간부를 몇 차례 죽인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도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 속에서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 보여줄 수 있는 액션 장르를 있는 힘껏 선사한다.
초반에 등장하는 사막에서 말을 타고 추격하는 장면과 마지막 플롯에서 케인(견자단)과 권총 한 자루로 자웅을 겨루는 일대일 장면은 웨스턴 장르에 자주 등장하는 액션을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리고 <존 윅:파라벨룸>에서도 등장했던 동양 무술을 이번 영화에도 선보이는데, 오사카 콘티넨탈 호텔이라는 장소에 맞는 일본식 검술도 등장하여 동양 무술 액션에 폭을 넓혔다. 심지어, 이번 등장인물에 동양 무술영화의 대가인 '견자단'까지 등장하니 깊이까지 더한다. 배우 견자단이 맡고 있는 '케인'은 존 윅(키아누 리브스)과 비슷하듯 비슷하지 않다. 케인(견자단)은 장님인데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절제된 움직임으로 적들을 소탕한다. 칼과 총, 주먹으로 해결하는 케인이지만, 존 윅은 이번 편에도 다양한 무기를 사용한다. 특히, 쌍절곤을 활용한 액션이 기억이 남는데, 이소룡이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이자 동양 무술의 폭을 넓혔다는 취지에 어울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윅> 시리즈는 장소에서 가져올 수 있는 특징을 액션으로 활용할 줄 안다.
그러나 <존 윅:리로드>부터 장소의 특징뿐만 아니라 화려한 색감과 조명이 가미된 장소에서 선보이는 액션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감각적인 색채와 조명을 배경으로 벌이는 고도화된 액션 장면들은 오직 <존 윅>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미장센이 돼버렸다. 그러나 감각적인 색채와 조명을 배경으로 벌이는 액션이 재미는 더하지만, 자칫 관객 눈을 더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 <존 윅 4>는 로테이션 액션 촬영에 더 비중을 중요시했다. 후반부 프랑스 시내에서 벌어지는 액션 장면은 또 한 번 신선함을 선보인다. 프랑스 이름 모를 시내 내부와 개선문, 사크레쾨르 대성당과 성당까지 가기 위한 222 계단 등에서 펼치는 액션은 장소 특징을 살린 것과 동시에 자연광이 비치는 풍경의 미학까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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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의 날숨만큼 미미한 희망일지라도
희망은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 현재의 어려움을 자신의 힘으로 돌파하려는 의지와 노력 없이 운, 신의 은총, 불가사의한 우주의 기운 같은 막연한 기대에 의지하는 희망은 오히려 맹독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뭔가 해야 한다.
영화 <토리와 로키타>의 주인공 '토리'와 '로키타'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아프리카의 모국을 떠나 벨기에로 왔다. 그러나 선진국이라는 벨기에에서도 두 사람은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실처럼 어둡고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공황 장애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하는 로키타와 로키타보다 더 어리지만 굉장히 셈에 밝고 긍정적인 토리는 낙담하고 주저앉아 타인의 도움이나 구원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토리에겐 로키타가, 로키타에겐 토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한 발 앞으로 내디딜 용기를 얻는다. 두 아이는 함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닌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취약한 아이들은 강력한 자석과 같아서 못돼먹은 어른들을 끌어당긴다. 나쁜 어른들은 토리와 로키타에게 마약을 팔게 하고, 로키타의 성을 착취하며, 두 아이의 불안한 신분을 지렛대로 활용하여 둘을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영화 초반, 토리와 로키타가 함께 부르는 노래의 멜로디는 밝고 경쾌하지만 "아버지가 동전 2개로 산 생쥐를 잡아먹은 고양이를 문 개를 몽둥이로 때리는 사람"이라는 가사는 두 아이를 괴롭히는 어른들처럼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영화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신뢰는 점점 아스러진다. 마침내 한 줌도 남지 않은 희망이 한여름 뙤약볕 아래 웅덩이의 물처럼 기화되어 모두 사라지려 할 때, 영화는 한 번의 날숨만큼 미미한 희망과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아직 우리 곁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우리의 부단한 관심과 보살핌 없이 희망은 그저 한갓 아지랑이에 불과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끝)* 지난 5월 4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토리와 로키타> 시사회에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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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뮤지컬영화 추천 인생은 아름다워
뮤지컬 영화 좋아하시나요?! 보통 뮤지컬 영화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라라랜드가 아닐까 싶어요! 아니면... 위대한 쇼맨? 레미제라블?!
근데 보통 외국영화가 가장 먼저 떠오르잖아요? 이제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를 보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한국의 뮤지컬 영화가 이거지? 라며 떠오르게 되실겁니다!
오늘은 한국의 뮤지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줄거리 결말 살펴볼게요~
기본 정보장르 : 뮤지컬, 드라마감독 : 최국희출연진 : 류승룡, 염정아, 박세완, 옹성우개봉일 : 2022년 9월 28일평점 : 8.32스트리밍 : 쿠팡, 티빙, 웨이브기획 의도내 생에 가장 빛나는 선물 모든 순간은 노래가 된다!무뚝뚝한 남편 '진봉'과 무심한 아들딸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세연'은어느 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자신의 생일선물로 첫사랑을 찾아 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한 아내 마지못해 그녀와 함께 전국 곳곳을누비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게 된 남편과 흥겨운 리듬과 멜로디로 우리의 인생을 노래하는국내 최초의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여담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기존의 유명한 가요를 다수 활용하여 비주류의 장르를 조금이나 상쇄시켰지만 초반에 약간의 오글거림이 있지만 흥겨운 노래와 함께 감상하기 좋은 영화라는 평이 대다수였다.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는 코로나로 인하여 개봉이 2년 전이나 미뤄졌지만, 입소문에 힘을 입어 1위까지 올랐으나, 아쉽게도 흥행에는 실패하였다.후기 및 결말인생은 아름다워 결말을 살펴보자면 세연의 경우 첫사랑을 찾긴 찾았으나 사실을 알고 봤더니 내가 아닌 내 친구를 사랑했고, 그걸 안 진봉은 호탕한 웃음을 맞이하며 이 영화의 관람 포인트 중 하나이다. 영화 후반부에는 결국 세연은 죽고 난 후에 진봉은 세연이 하던 집안일을 하면서 세연의 마음을 이해하며 예전에 사망신고서를 작성하며 최 씨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며 영화는 마지막 진봉과 세연이 처음 만난 서울극장에서 노래를 마무리로 영화는 끝이 난다.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주크박스 영화로 이야기를 하면서 뮤지컬을 하는 영화이다. 처음에는 약간 진짜 이게 뭐지?! 하며 오글거리지만! 한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노래가 나오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몰입하는 묘미를 가진 영화다.맨날 해외에서 멋진 뮤지컬 영화도 흥행하는 것처럼, 한국 노래로 만든 이런 영화도 많이 흥행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 추천하고 싶다! 집에서 노래 따라 부르면서 팝콘 먹으며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 한편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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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공삼칠> 메인 예고편
모두 놓치지 않을거에요! [7번방의 선물]을 잇는 웃음과 감동! [이공삼칠] 메인 예고편 대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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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손오공5: 대신후> 예고편
최후의 결전이 다가온다!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로 세상에 대화재가 일어나고
손오공은 의문의 사내에게 받은 상자로 인해 10년의 시간을 거슬러 미래에 도착하게 된다.
변해버린 동료들과 요괴들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
그곳에서 손오공은 10년 후의 자신을 만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