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5-15 17:01:41
바이러스 | 사랑하는 법을 잊은 이들에게 보내는 격려
<바이러스>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는 현실에 지친 나머지 연애할 여유는 꿈도 꾸지 못하는 번역가 '택선'(배두나). 힘겹게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첫 만남에 청혼까지 하는 모쏠 연구원 ‘수필’(손석구)을 만난 택선은 늘 그랬듯이 수면제와 혼술로 밤을 보낸다. 그다음날, 택선의 세상은 돌연 분홍빛으로 물든다. 초등학교 동창 ‘연우’(장기하)의 영업용 단체 문자에 가슴이 설렌 그녀는 잘 꺼내지도 않던 화려한 원피스를 챙겨 입고 연우를 만나러 간다.
영문을 모르는 연우에게 쉴 틈 없이 플러팅을 하던 택선. 하지만 그녀 앞에는 구급차와 함께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다. 소개팅에서 만난 수필이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갑작스럽게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게 감염 증상이며, 그녀 역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 이에 택선은 수필이 죽기 직전 남긴 메시지대로 유일하게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연구원 ‘이균’(김윤석)을 찾아 나선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의 2020년대를 수식하는 어휘 중 하나다. 2030 미혼남녀 중 절반 이상이 연애를 하지 않거나 할 의향이 없다는 통계가 해마다 발표되는 실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원인으로 현실적 어려움을 거론한다. 과열된 경쟁과 취업난, 불안정한 거주와 같은 현실을 고려했을 때 사랑보다는 자기 취미나 휴식에 에너지와 시간, 돈을 투입하는 게 더 효율적이고, 큰 보상을 준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는 것.
다만 사랑하는 법을 잊은 이유는 개인 내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타인과의 사랑은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비로소 타인과 사랑을 나누는 법도, 그 과정에서 사랑이 증폭되는 행복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매년 낮아지는 한국의 행복 지수 순위, 나날이 증가하는 정신질환자 수는 그 전제가 채워지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강이관 감독의 <바이러스>는 이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한다. 개인과 공동체의 우울증을 영화적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재난 영화의 기본 틀 안에서 개인 차원의 사랑의 부재는 코미디로써, 공동체 차원의 문제는 SF와 멜로적인 분위기로써 승화하려 한다. 문제는 여러 장르와 플롯 사이에서 확실하게 교통정리를 해내지 못했다는 것. 그 결과 <바이러스>의 야심 찬 의도와 통찰은 미처 관객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현실을 축약한 남녀의 장르
두 주인공, 택선과 이균의 서사는 각각 한국인의 개인적, 공동체적 어려움을 대변한다. 택선은 사랑을 하지 못하거나 사랑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번역가로 일하는 택선은 우울증에 걸렸다. 그녀는 불규칙한 업무 환경으로 인해 수면제를 복용해야 할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나날이 혼술에도 익숙해지며, 항상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자도 토로한다.
이균은 택선과는 다르다. 나이도 더 많고, 사랑도 충분히 해 본 사람이다. 대신 그는 택선의 우울함 못지않게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린다. 그는 사랑하는 법을 잊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의 동생이 택선처럼 힘들어하다가 애써 내색하지 않고 버티다가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때, 그는 아무런 눈를 채지 못했으니까. 그가 회사 운영진과 싸우면서까지 부작용 없는 우울증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악을 쓰는 이유다.
<바이러스>는 이처럼 다른 듯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여러 장르의 문법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사랑할 여유가 없는 택선의 어려움은 코미디로써 극복하려 한다. 엉망진창이었던 소개팅에서 만난 손석구와의 재회,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장기하를 일방적으로 유혹하는 하룻밤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이균의 개인사는 치료제를 개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SF와 재난 영화의 틀과 클리셰에 녹아든다.
사랑이라는 바이러스의 힘
코미디, SF, 재난을 거친 끝에 <바이러스>는 멜로라는 종착역에 도달한다. 이균이 개발하던 우울증 치료제가 유출되는 사고를 계기로 만난 택선과 이균. 택선을 치료하기 위해 이균은 급하게 치료제 개발을 재개한다. 택선은 그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지만, 이균은 명확히 선을 긋는다. 미완성 우울증 치료제가 대량의 도파민을 분비하게 만드는 물질이기에 그녀가 느끼는 호감은 단지 바이러스 감염 증상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균의 생각과 다르게 발전한다. 택선의 플러팅이 계속되자 이균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치료제 개발의 계기였던 동생의 자살에 대해서도 털어놓고, 택선을 실험체로 사용하려는 음모로부터 그녀를 보호한다. 본인의 힘으로 그녀를 치료해 내는 데 성공하면서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도 마침내 덜어낸다.
택선도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순간까지 자신을 치료해 주려는 이균을 지켜보면서 마음 한편의 외로움을 비로소 떨쳐낸다. 그 과정에서 두 남녀 주인공은 서서히 사랑에 빠진다. 한쪽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다른 한쪽은 아픔을 털어놓는 법을 익히면서 비로소 상대방을 사랑할 준비를 마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여동생의 결혼식에서 건넨 이균의 축사가 인상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사랑이 바이러스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한 바이러스를 극복하고 나면 다른 바이러스에 걸리듯 이별의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고 나면 또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즉, 이균의 축사는 조금도 아플 여유가 없고, 마음의 흉터를 지워낼 힘조차 부족한 지금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바이러스>가 건네고 싶은 격려라고 할 수 있다.
코미디에 묻힌 서사
문제는 <바이러스>의 격려가 스크린 너머로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 여러 장르의 문법을 빌린 뒤섞다 보니 주인공들의 이야기나 메시지보다도 무너진 짜임새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택선만 보더라도 그녀의 마음 상처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수필과 소개팅을 하고, 연우와 하룻밤을 보내는 과정에서 그녀의 외로움이 단순히 코미디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이균의 자책도 코미디스러운 분위기와 연출에 가려진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택선과의 우스꽝스러운 상황과 에피소드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그의 개인사를 두 세 마디 대사로 처리해 버린 결과다. 결과적으로 두 주인공 사이에 특별한 유대감이 싹트는 계기도, 과정도 매끄럽게 설명되지 못한다. 택선이 자기 목숨이 걸린 실험을 이균에게 일임하거나, 그가 택선을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하는 후반부 전개와 감정선도 다소 부자연스러워진다.
SF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과정에서도 걸림이 된다. 코미디를 노리는 연출과 묘사로 인해서 SF 장르에 요구되는 정밀함이 실종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극 중 바이러스가 유출되는 과정과 그에 대처하는 당국의 어설픈 일 처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관객의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마치 <비상선언>을 보는 듯하다. 결국 바이러스 치료제를 만들려고 사투를 벌이는 이균의 모습도 충분히 절박하다는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마지막으로 재난 영화의 문법을 고수하는 지점에서 <바이러스>의 혼란은 정점에 달한다. 재난 영화, 특히 인재가 발생하는 영화에는 클리셰가 있다. 도덕성보다는 수익에만 초점을 맞춘 기업의 잘못된 실험으로 인해 대형 재난이 발생하고, 해당 기업은 그 와중에도 사고 해결보다는 이익 극대화에만 몰두한다. 유일하게 주인공만이 잘못된 상황을 막기 위해 악전고투한다.
<바이러스>는 이 클리셰를 답습한다. 이균은 환자들을 실험체로 활용하고 폐기하려는 백신 연구소의 잘못된 연구 지침 때문에 반목한다. 그런데 이 갈등과 대립 구도도 온전히 활용되지 못한다. 그저 이균과 연구소 간에 묵은 악연이 있었다는 언급이 있을 뿐, 구체적으로 그 내막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재난 영화의 클리셰는 도리어 전반적으로 코미디운 분위기만 깨트릴 뿐,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지는 못한다.
즉, <바이러스>는 발상과 의도만 좋았다. 정작 발상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는 실패했고, 어설픈 유머만 남겨버렸다. 너무 많은 재료와 여러 레시피를 섞은 나머지 맛을 알기 어려운 음식이 만들어진 셈이다. 배두나와 김윤석, 손석구와 장기하라는 화려한 캐스팅으로도 그 맛을 되찾기는 요원해 보인다. 그래도 '사랑은 바이러스와 같다'라는 이균의 대사 한마디만큼은 관객의 뇌리에 남을 듯하니 절반의 성공이지 않을까.
Poor 형편없음
코미디, SF, 멜로, 재난이 뒤섞인 난장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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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P.> - '갈 곳 없는 청춘을 쫓다.'
D.P. (D.P.,2021)
개봉일 : 2021.08.27 (넷플릭스 공개)
감독 : 한준희
출연 : 정해인, 구교환, 김성균, 손석구, 이준영, 신승호, 조현철
‘갈 곳 없는 청춘을 쫓다.’
웹툰 <D.P 개의 날>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D.P.>가 2021년 8월 27일, 높은 기대치와 많은 관심 속에 공개되었다. 주인공 안준호 이병과 한호열 상병 역을 맡은 정해인, 구교환 배우의 신선한 조합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이 높은 작품이었는데,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두 배우가 각자에게 꼭 알맞은 옷을 입고 내뿜는 케미가 상당해 이야기를 제외하고도 두 캐릭터의 파트너십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정해인, 구교환 배우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이 시리즈를 보다 보면 두 배우가 흘리는 매력에 금세 빠져버릴지도 모르겠다. (난 이미 그전부터 허우적대고 있던지라 더 할 말이 없다...)
<D.P.>는 어려운 가정 사정을 뒤로한 채 입대한 후, 헌병대로 차출돼 특유의 눈썰미와 센스로 탈영한 군인을 쫓는 군인. 'D.P'가 된 안준호 이병과 그의 파트너 한호열 상병의 이야기다. '군인을 쫓는 군인'의 이야기라 하여 추격극이 주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D.P.>는 단순한 추격, 액션극이 아니었다.
20살 초반, 갓 성인이 된 우리나라 남자들은 좋든 싫든, 어떻게든 국방의 의무란 것을 지게 된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국방부의 시계에 맞춰 청춘의 일부를 헌납하게 되는데, 이 의무에 대해선 항상 논란이 많다. 말도 안 되게 적은 월급, 계급제 아래 잔혹하게 이어지는 가혹행위, 군사 비리, 인권문제, 병사의 현실은 고려하지 않는 불합리한 판단 등등.. 군대란 것이 공개적이기보단 폐쇄적인 집단이다 보니 모두가 알면서도 쉬쉬하고 넘어가는 문제들이 너무도 많다. <D.P.>는 이 문제들을 준호, 호열이 쫓는 탈영병들을 통해 비춰낸다. 그리고 준호와 호열이 가진 트라우마들과 그를 조금씩 극복하는 모습, 타인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보여주며 안준호 이병과 한호열 상병이라는 인물에게 인간성과 입체감을 부여하며 몰입력을 끌어낸다.
탈영병들은 말한다. “더 이상 쫓아오지 마.” “내가 뭘 잘못했어.”
20대 초반의 남자들에겐 국방의 의무가 주어진다.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부대 밖으로 뛰쳐나가는 건 엄연한 군법 위반이다. 탈영병에겐 탈영이라는 죄가 있다. 하지만 탈영병에게만 죄가 있는 걸까?
호열은 이렇게 말한다.
“탈영병 잡아오면 뭐해. 안에서 이러는데 탈영을 안 하고 배겨?”
모두가 쉬쉬하는 가혹행위와 근절되지 않는 군사 비리, 병사들을 가족이라기보단 진급 수단의 하나로 보는 간부. 바뀌지 않는 현실들. 탈영병은 이 문제들에 떠밀려 벼랑 끝에 선, 연약하고 어린 청춘이다. 탈영병을 다시 군대로 끌어다 놓아도 가해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다른 곳으로 전입될 뿐이고, 탈영병에겐 상처 위에 ’탈영병‘이라는 딱지가 붙을 뿐, 아무도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지 않는다. 탈영의 결말은 탈영을 하게 만든 문제의 해결이 아닌, 탈영병이란 낙인과 영창뿐이다.
군인이라는 신분에 발 묶인 채로 흔들림을 견디지 못해 탈영병이 된 이들. D.P가 된 준호와 파트너 호열은 탈영병들의 이야기를 파헤쳐 가며 문제를 통감하고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성장한다. 반듯하고 거침없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숨기고 사는 인물 준호와 속옷 고무줄을 퉁-튕기며 극의 분위기를 띄우다가도 곧 색다른 얼굴로 돌변해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 호열.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두 인물은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며 달린다. '도망간 군인을 잡는다.'
처음엔 '설렁설렁하다 만약 못잡으면? 또 나와서 잡으면 돼-'(해당 보직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같은 느낌으로 가볍게 시작된 탈영병 체포는 극이 진행될수록 죄책감, 책임감 같은 감정과 새로운 문제와 무게감이 더해지며 시즌 1의 마지막쯤엔 상당히 묵직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 일을 해도, 어떤 사고를 쳐도 결국 변하는 건 없는 시스템 속에서 끝까지 내몰린 청춘에 공감하며 눈물짓는 건 그들과 똑같이 아픈 청춘뿐이다. 예상보다 훨씬 무겁고 아픈 이야기였다. 이렇게 내쫓긴 탈영병들의 청춘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매화 반복되는 오프닝 영상을 보면서 생각했다. 울음을 토해내는 갓난 아이가 나오고, 아이가 자라나는 순간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된 아이(준호)가 입대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는 화면 너머에 앉아있는 우리를 바라보듯 뒤를 돌아 어딘가로 시선을 던진다. 그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당신은 탈영병들과 같은 아픔을 가진 청춘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묵인하거나 그들을 괴롭힌 방관자 또는 가해자인가. 준호의 시선은 <D.P.>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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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오늘부터 군인입니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 불안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준호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 어머니와 동생을 사랑하고 동정하지만 이 가족을 떠나고 싶었기에 더 이상 거리를 좁힐 수 없었던 준호는 가족들을 두고 홀로 연병장으로 향한다.
2014년 선진 병영이 도입되기 전, 지금보다 폭행과 가혹행위가 더욱 심했던 시절. 준호는 군인이 된다. 민간인이 아닌 군인. 민간인에게 'Touch My Body'가 즐거운 노래 가사라면 내무반에서 'Touch My Body'는 말 그대로 폭행 또는 몸을 더듬는 성추행을 의미한다.
준호가 머무는 내무반의 고참 황장수와 류이강은 가까운 기수 몇 명을 제외한 후임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선임이다. 준호의 가장 가까운 선임 조석봉 일병은 황장수, 류이강과 다르게 후임인 준호를 챙기며 “우린 나중에 애들한테 잘해주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가혹행위와 성폭력은 봉디(석봉+간디)라는 별명을 가진 착한 청년마저 미치게 만든다.
모두 알고 있지만 쉬쉬하고 있는 가혹행위들. 석봉과 탈영병들은 이와 같은 이유로 점점 망가지고 끝내 넘어선 안될 선을 넘어 도주한다. 하지만 이들은 잡히면 안 되기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옥 같은 군대로 돌아갈 수도 없다. 대부분의 탈영병들은 집이 아닌 길거리 어딘가를 헤매다 다시 군대로 돌아간다. 무슨 짓을 해도 바뀌지 않을 지옥 같은 그곳으로.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앉아있으면서도 “여기가 편하다”고, “갈 곳이 없네요”라고 말하는 탈영병의 한마디에 그간 그가 겪었을 아픔과 고통이 묻어난다. 준호와 호열은 탈영병들을 잡으며 그들의 아픔에 함께 젖어든다. 하지만 준호와 호열은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 탈영병을 다시 부대로 인도하는 순간, 이들의 영향력은 끝이 나고 윗선에서는 진급에 영향이 간다는 이유로 가혹행위를 최대한 쉬쉬하고 덮으려고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이기심과 잔혹함은 석봉이 탈영한 후 더욱 여과 없이 드러난다.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전우를 가차 없이 쏘라 명령하는 부대장 앞에서 박범구 중사와 임지섭 대위는 서로에 대한 경쟁심을 내려놓고 석봉을 살리려고 노력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
좁고 폐쇄적인 군대라는 사회에서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 사람이 나에게 선을 넘는 행동과 가혹행위를 반복한다면, 계급제라 반항 한 번 할 수 없다면, 윗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방관하고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목숨을 끊는 것 또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하는 것밖에 없다. 뭐라도 바꾸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탈영을 결심한 탈영병 신우석, 허기영, 허치도, 조석봉. 이들의 필사적인 탈출과 죽음은 과연 무엇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가혹 행위로 탈영을 했던 허기영 일병의 어머니가 답답해하며 묻는다. “어떻게 책임지는 사람이 없냐”고. 피해자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가해자도 분명한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 그리고 수많은 피해자를 봐왔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썩은 부분들. 총을 든 석봉 앞에서 “우리가 바꾸면 되지”라고 말하던 호열의 대사가 무색할 만큼 이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석봉은 수통마저도 6.25 때 쓰던 것인데 어떻게 바뀌냐며,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을 선택한다. 착한 선생님이었던 석봉, 친하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였던 석봉,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었던 석봉, 준호에겐 가장 의지가 되던 선임이었던 석봉이란 청년은 이제 없다. 그는 '선임을 납치한 뒤 자살 시도한 탈영병'으로 뉴스에 오르내릴 뿐이다. 사람 때리는 걸 못해서 유망주로 주목받던 유도마저 관뒀다는 선한 마음씨의 석봉이 칼을 휘두르고 미친 듯이 뛰어가는 모습과 자살을 감행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르겠다. 칼과 총을 든 탈영병이기 이전에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어린 청년이었을 뿐인데.
석봉의 자살시도와 함께 6화가 끝난 후 나오는 부가 영상은 이 먹먹한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든다. 석봉의 친구가 석봉처럼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라고 말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선임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는 장면에서 선임들과 변하지 않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 원망이 가득 느껴진다. 결국 총기를 난사한 병사가 되고 자살한 탈영병이 되는 건 피해자들뿐이다. 가해자들은 무사 전역을 하거나 심해야 영창과 전입, 며칠간의 반성. 그게 죗값의 전부다. 돌아갈 곳 없는 지친 청년들의 마지막 선택지 탈영. 그리고 그를 쫓는 또 다른 청춘. 탈영과 일들은 벌어졌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피해자의 눈물과 죽음 앞에서 책임감을 느끼는 건 또 다른 청춘(준호,호열)이 유일하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조금 날카롭게 말하자면 <D.P.>를 보는 시청자들 중에서도 분명 황장수와 류이강처럼 군 시절 누군가에게 가혹행위를 하거나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프닝 영상에서 시청자 쪽을 바라보는 준호의 눈빛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황장수처럼 자신의 죄를 전혀 알지 못하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겠지?
전체적인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줄이고, 이번엔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D.P.>의 주인공 안준호와 한호열은 겉으론 강하거나 유머러스해 보이지만 각자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준호는 대체적으로 ‘죄책감’과 연관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는 영창 근무를 서는 날, 영창 안에 갇힌 죄책감들과 마주한다. 첫 근무 날 구하지 못했던 탈영병 신우석의 환영, 아버지에게 맞고 있는 어머니가 “왜 도와주지 않냐”며 묻는 환영과 같은 것들 말이다.
준호는 술 먹고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있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돈을 빼앗기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고 그래서인지 가정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준호는 3화에서 탈영병 정현민을 검거하며 만난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여자 ‘영옥’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고 그녀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술 먹고 폭력을 일삼는 남자에게 갖고 있는 모든 걸 다 팔아가며 돈을 바치는 영옥과 어머니. 준호는 영옥을 도우며 어머니를 돕지 못한 죄책감의 일부를 극복하고 뒤이어 ‘밥은 먹었냐’는 시답잖지만 따뜻한 인사를 담은 전화를 한다.
또 하나의 죄책감은 ‘탈영병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 죄책감은 차후에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변한다. 준호는 석봉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끈질기게 석봉의 뒤를 쫓지만 석봉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자살한다. 석봉의 죽음 앞에서 가장 크게 비명과 울음을 토해내던 준호의 모습이 마음에 깊이 박힌다. 그는 석봉의 죽음 이후 첫 근무 당시 구하지 못했던 탈영병 우석의 납골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일 없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의 누나를 보며 쓰린 표정을 짓는다. 열을 맞춰 걸어가는 병사들과 반대로 걸어가는 준호의 뒷모습엔 이 말도 안 되는 시스템 속에서 죽어간 청춘들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진다.
호열은 준호의 파트너이자 D.P 조장이다. 꽤 오래 D.P 생활을 한듯한 그는 내무반과 크게 엮이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영향력을 챙겨온 꽤 센스 있는 인물로 보인다. 국군 병원에서 흡연을 하는 다른 아저씨들에게 페브리즈를 팔며(?) PX 냉동을 뜯어내는 그의 능청스러운 장사 솜씨와 복귀가 결정되자마자 “얘네 담배 피웠어요”라며 모든 걸 폭로해버리는 한마디에서 그의 성격이 단박에 드러난다.
능청스럽고, 유연하면서도 선을 알고 내 몫은 확실하게 챙기는 인물. 굳어있는 준호에게 “네가 내 아들이구나?(아들 군번)”라고 물으며 자연스레 다가가는 모습과 황장수가 후임들을 말도 안 되게 갈구는 걸 발견했을 때, 중간에서 준호를 채간 후 황장수가 만든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따뜻하고 영리한 면을 볼 수 있었다.
호열이 가진 트라우마는 이전 활동에서 만난 칼을 휘두른 탈영병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세히 나오진 않았지만 무심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있겠다. 정현민을 잡으러 갈 때 호열은 준호에게 “칼침 놓는 탈영병도 있다”며 가볍게 말을 던지는데, 이후에 마주친 호열의 동기 ‘김규’를 통해 우리는 이 말이 호열의 경험담임을 알게 된다. 호열은 이런 트라우마를 겉으로 전혀 티 내지 않고 준호와 D.P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영화관에서 마주한 칼을 든 석봉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호열은 시리즈의 초반부에 ‘과호흡과 불안한 상태’ 때문에 병원에 검사를 하러 갔었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이 불안감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호열의 다른 트라우마는 ‘무심한 부모님’이다.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호열은 꽤 잘 사는 집안의 외동아들로 보인다. (정현민을 잡을 때 쓴 김규의 300만 원을 바로 이체해 주는 걸 보면) 하지만 호열이 부모님과 통화를 하거나 부모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호열과 준호가 함께 포상 휴가를 나왔을 때, 호열의 집엔 아무도 없었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는다. 라면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던 호열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부모는 왜 나를 낳았을까?”
이 말과 사진 한 장으로 속단할 순 없지만 교복을 입은 호열과 부모님의 사진에선 왠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이런 모습을 봐서일까, 호열이 연락을 받지 않는 준호의 집에 찾아가 준호의 어머니, 동생과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하는 장면에선 왠지 호열이 ‘이런 분위기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일 시즌 2가 제작된다면 한호열 상병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원작 웹툰을 보지 않고 바로 감상했는데, 시리즈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 자연스레 원작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원작을 먼저 보고 시리즈를 감상한 시청자들의 의견은 어떨지 궁금해지는 시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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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사랑의 시작부터 마침표까지, 변화하는 삶의 궤적 속 찾아오는 감정을 잘 표현한 영화 <여름날 우리>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면 본 영화 <여름날 우리> 하지만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고, 청량함 속에서도 삶의 변화와 감정을 고스란히 잘 담아낸 작품이었다.
영화 <여름날 우리> 시놉시스
처음이었다, 사랑이 싹트는 기분. 너에게 풍덩 빠져버렸던 17살의 여름. 너를 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21살의 여름. 그리고 몇 번의 여름이 지나고 다시 만난 너, 이젠 놓치지 않을 거야. “널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고등학생 수영선수였던 저우 샤오치의 눈에 들어온 요우 용츠. 요우 용츠는 중국어로 수영장과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자우 샤오치는 매일같이 가는 수영장을 갈 때마다 그녀 생각이 떠오른다.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쓰던 저우 샤오치는 수영반의 1등 샤크와 수영대결을 하게 된다. 샤크와의 수영대결에서 졌지만 이를 계기로 저우 샤오치는 용츠와 더욱 가까워진다. 그렇게 친해지나 싶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전학가게 된 용츠를 떠나보내고 다시 활력을 잃었던 샤오치는 용츠가 대학에 입학했음을 알고 사력을 다해 공부를 시작한다. 같은 대학에 입학한 저우 샤오치, 과연 사오치는 용츠와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해당 내용은 네이버 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여름날 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나의 기대와 다른 상대방, 하지만 그런 상대방도 존중하는 배려
저우 샤오치는 상당히 순수하다. 요우 용츠를 만나기 위해 공부에 뜻이 없었지만 그리고 수영에 딱히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요우 용츠가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을 했고 입학에 성공한다. 그런 저우 샤오치는 요우 용츠 역시 자신을 만나면 좋아할 것이라는 빗나가는 센스를 발휘하고 요우 용츠 앞에 나타나지만 요우 용츠는 이미 남친이 있기에 그런 저우 샤오치를 조금은 부담스러워한다.
하지만 실망은 접어두고 저우샤오치는 자신 나름 요우 용츠에게 최선을 다하며 남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여학생회에 들어가고, 함께 치어리딩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계속 각인시킨다. 이런 저우샤우치의 모습을 보면서 남성성만 부각하는 것이 아니어서 좋게 다가왔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 때때로 등장하는 후회의 감정들
영화 <여름날 우리> 속에서 주인공들의 사회적 위치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고등학생이던 용츠와 샤오치는 공부를 잘하는 용츠와 공부에는 뜻이 없는 샤오치로 등장한다. 대학에 진학해서까지 비슷하게 유지되다가 대학 졸업 후 촉망받는 수영선수 샤오치와 디자이너라는 꿈을 접고 모델일을 해야만 했던 용츠로 그 관계는 역전된다. 그간 어리광을 부리던 샤오치를 받아주는 누나같은 용츠였는데 졸업 후에는 어느샌가 듬직한 샤오치로 성장하고 용츠가 여기에 기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부상을 겪은 샤오치는 더이상 선수생활이 힘들어지고 그 과정에서 용츠는 디자이너로서 차근차근 장해가며 다시금 관계가 역전된다. 이렇게 변화하는 지위 속에서 등인물들은 후회를 하게 된다. 내가 만약 그 때 안그랬으면 어땠을까? 혹시 그냥 시합에 나갔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면서 이 후회의 감정은 두 사람을 갈라놓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 언제나 성공을 할수도 그리고 언제나 실패 속에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그러한 삶의 과정들을 특히 20대에 겪을 수 있는 과정을 영화 여름날의 우리는 잘 표현해주고 있었고, 그 속에서 사소하게, 그리고 관계를 뒤흔들 수 있는 후회라는 감정을 잘 녹여낸 작품이었다.
단 한 끝차이, 너를 위해서와 너 때문에
영화 <여름날의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도 변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게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잘 던진 작품이었다. 용츠가 꿈을 향해 한걸을 내딛을 때 샤오치는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좌절을 경험한다.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면서 상대방이 잘못한 것은 없지만 연인을 '위해서' 한 과거의 행동을 연인 '때문에' 했다며 책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점점 자신의 세계와 멀어져 가는 듯한 상대방을 보면서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을 같기는 어렵다. 더욱 노력을 해야하고 배려를 해야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다. 자신의 환경이 변화하면서 그 원인의 화살을 남으로 돌리는 이 이기적인 마음이 연인 뿐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큰 상처로 다가갈 수 있는지, '너를 위해서'와 '너 때문에' 라는 이 한끗차이가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 <여름날 우리>는 가벼운 풋사랑 같은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그 속에서 굉장히 다양한 감정과 변화하는 삶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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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살과 13살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5월은 푸르른 나무들이 싹을 틔우는 계절이고, 12월은 잎을 거두고 추위를 견디는 계절입니다. 영어권에서는 'May-December'가 5월과 12월의 간극처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커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는데요. 영화 <메이 디셈버>는 관용어를 사용해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소재를 내걸고 시작하는 작품입니다. 5월의 남자와 12월의 여자, 그들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의 사랑은 정말 '사랑'일까요?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메이 디셈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메이 디셈버>는 2024년 3월 13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메이 디셈버
May December
Summary
신문 1면을 장식하며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충격적인 로맨스의 주인공들인 ‘그레이시’와 그보다 23살 어린 남편 ‘조’.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영화에서 그레이시를 연기하게 된 인기 배우 ‘엘리자베스’가 캐릭터 연구를 위해 그들의 집에 머물게 된다. 부부의 일상과 사랑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엘리자베스의 시선과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그의 잇따른 질문들이 세 사람 사이에 균열을 가져오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나탈리 포트만, 줄리안 무어, 찰스 멜튼
강렬한 스캔들을 둘러싼 세 인물
: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갇힌 사람
이 영화의 'May-December' 커플은 60살이 다 된 아내 '그레이시'와 36살 남편 '조'입니다. 23년 전, 유부녀였던 '그레이시'는 자신이 일하던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이자 아들의 친구였던 13살 '조'의 아이를 가집니다. 감옥에서 아이를 출산한 '그레이시'와 '조'의 이야기는 뉴스 1면을 장식하는 희대의 스캔들이 되었죠. 강렬한 그들의 사랑은 이십여 년이 지나 영화화가 결정됐고, 연기 인생의 또 다른 한 획을 그을 작품을 찾던 배우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 역을 맡습니다. <메이 디셈버>는 'May-December' 커플의 이야기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엘리자베스'가 부부의 집을 찾으면서 시작됩니다. 영화는 세 인물을 가까이에서, 또 멀리서 바라볼 수 있도록 시점을 조금씩 바꿔가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리고 이십 년 전의 스캔들을 중심에 둔 세 사람을 각각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갇힌 사람으로 정의하죠.
말하는 사람은 과거의 스캔들을 '엘리자베스'에게 들려주는 '그레이스'입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그레이스'에게는 부끄러운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36살 유부녀가 13살 소년과 사랑을 나눠 아이를 가졌는데도, 아들 친구와 바람이 났는데도, 심지어 아들의 생일 전날에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는데도요. 손자와 자식이 같은 날 졸업하는 진 광경의 자리에도 당당하게 '엘리자베스'를 부릅니다. '그레이스'는 진실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더 중요시하는 인물로 비칩니다. 그래서 언제나 태연하고 뻔뻔할 수 있었죠. 그는 자신이 순진한 사람이길 원하고,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사랑을 완벽한 사랑으로 보길 원하며, '조'가 영원히 이 관계를 사랑으로 보길 원합니다.
듣는 사람은 완벽한 연기를 위해 부부를 취재하는 '엘리자베스'입니다. 그는 '그레이시'와 '조' 사이에 자리 잡은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합니다. 이를 빌미로 부부의 과거를 헤집고, 진실에 더 가까운 이야기를 들으려 애쓰죠. 그런데 단순히 취재라고 포장하기에 '엘리자베스'의 취재 여정은 다소 기만적입니다. '그레이시'와 '조'의 딸이 있는 자리에서 "배역을 선택할 때는 '도덕적으로 모호한 인물'에 매력을 느낀다"라고 말하거나, 13살에 '그레이시'를 유혹한 '조'의 매력을 가늠하기 위해 그와 잠자리를 갖는 것도 마다하지 않죠. 어느새 진실 찾기는 핑계가 되고, '엘리자베스'의 눈빛에는 야심만이 이글거립니다.
갇힌 사람은 스캔들의 또 다른 주인공인 어린 남편 '조'입니다. 영화 초반부의 '조'는 공동체의 기억 속에 남은 강렬한 이야기와는 달리 더없이 다정하고 화목한 가정의 가장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상 '조'는 그때 그 이야기 속에서 조금도 크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죠. "네가 나를 꼬신 거야", "나는 순진해"라는 '그레이시'의 함정에 빠져 죄책감과 부도덕함을 느끼고, 속죄와 책임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원한 삶이라고 굳게 믿으면서요. 나비의 알을 주워다가 성체로 키워 날려 보내는 것만이 유일한 감정의 배출구였습니다. 이러한 삶을 평화로운 일상으로 여겨왔던 '조'에게 '엘리자베스'의 등장은 균열이었습니다. 진실을 찾는 '엘리자베스'로 인해 마음속 물음표가 떠오른 '조'는 외면해 왔던 진실에 향한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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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모호한 회색의 스펙트럼
영화를 만든 토드 헤인즈 감독은 <메이 디셈버>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거대한 거부감"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세 인물의 공통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 '자기 자신'이라는 진실을 대하는 방식 말입니다. 세 인물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진실을 바라보길 거부합니다. '그레이시'는 원하는 대로만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가렸고, '엘리자베스'는 남의 이야기를 파헤침으로써 자기 자신을 덮었으며, '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숨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잘못이 있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기꺼이 들여다보려 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그랬듯이, 함부로 직시하죠. 이렇듯 세 인물의 도덕성과 옳고 그름에 관해 끝없이 생각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이런 생각에 가닿습니다. 극 중에서 나오는 '도덕의 회색지대'라는 말처럼, 바로 그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모호한 회색의 스펙트럼이 곧 인간의 본질이구나.
<메이 디셈버>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이 인간의 모호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샘솟는 질문들도 모두 비슷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 36살 여인은 정말 13살 소년을 사랑했을까?
- 13살 소년은 정말 36살 여인을 사랑했을까?
- 13살 소년을 사랑한 36살 여인의 잘못은 무엇일까?
-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 도덕이 먼저일까, 사랑이 먼저일까?
- 타인의 진실을 향한 '엘리자베스'의 열망은 인간으로서의 도덕인가, 배우로서의 야심인가?
- '엘리자베스'의 선을 넘는 야심과 '그레이시'의 순진한 가면 중 어느 것이 더 부도덕한가?
질문의 답을 고민하다 보면 머릿속은 계속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정확한 답 하나 없이 모호함만이 두둥실 떠다닙니다. '누가 옳은가?', '누가 그른가?', '옳은 사람이 있긴 한가?', '옳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아, 하지만 복잡하고 모호한 인간처럼 흥미로운 것이 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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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디셈버>는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의 맛을 크게 살렸습니다. 가히 연기 대결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었는데요. 줄리안 무어의 '그레이시'를 완벽하게 내재화해 연기하는 나탈리 포트만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름 돋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조'를 사랑의 감옥에 가두는 '그레이시'의 순진한 얼굴을 그려낸 줄리안 무어의 얼굴은 또 어떻습니까. 여기에 이 작품으로 연기상 21관왕을 휩쓴 찰스 맨튼의 활약도 빼놓으면 섭섭하지요. <리버데일>의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만나 기뻤습니다. 쉽지 않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그에게 손바닥에 불나도록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One-Liner5월과 12월, 알과 나비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나, 인간만은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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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생 로랑은 ‘생로랑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패션 영역을 넘어 영화계에도 발을 들이고 있는데요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는 “나는 수년간 나에게 영감을 준 모든 훌륭한 영화계
인재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고 그들에게 플랫폼을 제공하고 싶었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왕가위 감독 뿐만 아니라 <네이키드 런치>와 <크래시> 등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유스> <그레이트 뷰티> 등으로 유명한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과 작업을 함께한다고 합니다.
‘생 로랑’과 거장 감독들의 조합, 어떤 시너지를 보여줄지 너무 기대가 되는데요?
드웨인 존슨 상습적 태만 논란
더 랩(The Wrap) 기사에 따르면 드웨인 존슨의 아마존 프라임 영화 <레드 원>의 예산이 최근 몇 달 동안 2억 5천만 달러로 급증했다고 하며, 이에 대한 책임은 존슨에게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드웨인 존슨은 평균 7-8시간 촬영장에 늦었고, 때때로는 나타나지 않아 5천만 달러의 비용을 증가시켰다고 합니다.
<범죄도시4> 500만 관객 돌파
영화 <범죄도시4>가 일주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올해 개봉작 가운데 가장 빠른 흥행속도를 기록하고 있으며 올해 최고 오프닝 스코어, 시리즈 최다 일일 관객수, 최단기간 500만 관객 돌파 등 올해 개봉작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우고 있습니다. 특히 오는 4~6일 어린이날 연휴를 앞둔 만큼 <범죄도시4> 흥행세는 더욱 거세질것으로 보입니다.
왕가위 신작 X 생 로랑과 협업
최근 장편 영화 제작 배너를 시작한 프랑스 쿠튀르 ‘생 로랑’이 왕가위 감독의 차기작과 함께한다고 합니다.
줄거리와 캐스팅 등 세부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왕가위 감독은 전작 <일대종사> 영화 이후 10년만에 영화를 선보이게 됩니다.
김윤석 X 구교환 <폭설>
영화 <소리도 없이>로 제 41회 청룡영화상에서 신인 감독상을 차지한 홍의정 감독이 배우 김윤석과 구교환이 캐스팅된 영화 <폭설>에 합류합니다. 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룬 심리 스릴러 <폭설>은 박선우 감독이 연출을 맡다가 최근 영화 제작사 ‘루이스 픽처스’에서 홍의정 감독을 공동감독으로 선정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개막
전주국제영화제가 1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개막식을 열었습니다.
민성욱 전주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은 환영사를 통해 "전주국제영화제는 매년 독립과 대안이라는 가치 아래 많은 영화를 관객에 선보이고 있다"면서 "영화에는 우리 삶의 다양한 모습과 감정을 담고 있다. 이런 영화를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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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진 평론가 만점 영화 리스트
입추가 지나자, 마법같이 선선해진 요즘. 밤 산책을 다니기 좋은 날씨죠.
여러분, 이동진 영화 평론가를 아시나요?
영화가 개봉하면 모두가 주목하는 이동진 평론가가 만점을 준 영화들만 모아왔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무슨 영화를 볼지 고민되신다면
씨네랩이 추천하는 영화 리스트를 참고하시길 바라면서 이동진 평론가 만점 영화 리스트, 함께보시죠!
1.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 (2011) - 사라 폴리
Synopsis : 결혼 5년차인 프리랜서 작가 마고(미셸 윌리엄스)는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남편 루(세스 로건)와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다. 어느 날, 일로 떠난 여행길에서 그녀는 우연히 대니얼(루크 커비)을 알게 되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설상가상으로 대니얼이 바로 앞집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된 마고. 자신도 모르게 점점 커져만 가는 대니얼에 대한 마음과 남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녀의 삶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순도 100%의 사랑 영화, 마음의 기척을 응시하다.
by. 영화 평론가 이동진
2. 살인의 추억 Memories Of Murder (2003) - 봉준호
Synopsis : 1986년 경기도. 젊은 여인이 무참히 강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2개월 후, 비슷한 수법의 강간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일대는 연쇄살인이라는 생소한 범죄의 공포에 휩싸인다.수사진이 아연실색할 정도로 범인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살해하거나 결박할 때도 모두 피해자가 착용했거나 사용하는 물품을 이용한다. 심지어 강간사 일 경우, 대부분 피살자의 몸에 떨어져 있기 마련인 범인의 음모 조차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후임으로 신동철 반장(송재호 분)이 부임하면서 수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박두만은 현장에 털 한 오라기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 근처의 절과 목욕탕을 뒤지며 무모증인 사람을 찾아 나서고, 사건 파일을 검토하던 서태윤은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범행대상이라는 공통점을 밝혀낸다. 선제공격에 나선 형사들은 비오는 밤,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히고 함정 수사를 벌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돌아오는 것은 또다른 여인의 끔찍한 사체. 사건은 해결의 실마리를 다시 감추고 냄비처럼 들끊는 언론은 일선 형사들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형사들을 더욱 강박증에 몰아넣는데...
한국영화계가 2003년을 자꾸 되돌아보는 가장 큰 이유.
by. 영화 평론가 이동진
3. 옥희의 영화 Oki's Movie (2010) - 홍상수
Synopsis : 영화과 학생 옥희는 자신이 사귀었던 한 젊은 남자와 한 나이 든 남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아차산이란 곳에 만 일 년을 사이에 두고 각 남자와 한 번씩 찾아왔던 경험을 영화적으로 구성해본 것이다: 그 산에서 각기 다른 두 남자와의 경험을 공간별로 짝을 지어놓고 보여준다. 주차장, 산 입구, 정자 앞, 화장실, 목조 다리 앞, 산 중턱 등의 공간에서 각자 다른 행동과 대화들, 그들과의 모습이 짝지어 보여지면서 우린 두 경험 사이의 차이와 비슷함을 구체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린 옥희와 두 남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어떤 총체적 그림을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구조와 공간 대신 정서와 시간을 바라보는 홍상수의 새 경지.
by. 영화 평론가 이동진
4.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Pan's Labyrinth (2006) - 기예르모 델 토로
Synopsis : 1944년 스페인, 내전은 끝났지만 숲으로 숨은 시민군은 파시스트 정권에 계속해서 저항했고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이 곳곳에 배치된다. ‘오필리아’는 만삭의 엄마 ‘카르멘’과 함께 새아버지 ‘비달’ 대위가 있는 숲속 기지로 거처를 옮긴다. 정부군 소속으로 냉정하고 무서운 비달 대위를 비롯해 모든 것이 낯설어 두려움을 느끼던 오필리아는 어느 날 숲속에서 숨겨진 미로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산이고 숲이자 땅”이라 소개하는 기괴한 모습의 요정 ‘판’과 만난다. 오필리아를 반갑게 맞이한 판은, 그녀가 지하 왕국의 공주 ‘모안나’이며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세 가지 임무를 끝내면 돌아갈 수 있다고 알려주면서 미래를 볼 수 있는 “선택의 책”을 건넨다. 오필리아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현실 속에서 인간 세계를 떠나 지하 왕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이보다 깊고 슬픈 동화를 스크린에서 본 적이 없다.
by. 영화 평론가 이동진
5.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 (2001) - 허진호
Synopsis :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아버지,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어느 겨울 그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를 만난다.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은수는 상우와 녹음 여행을 떠난다.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어느 날, 은수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낸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상우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빨려든다.그러나 겨울에 만난 두 사람의 관계는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하면서 삐걱거린다.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상우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부담스러운 표정을 내비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상우에게 은수는 그저 "헤어져" 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이 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어찌 할 바를 모른다...
허진호와 이영애와 유지태, 그들 각자의 최고작.
by.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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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와 애정의 관계에 관하여
영상 언어에서 등장 인물들의 입을 통해 사용되는 언어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봉준호 감독이 1인치의 자막을 넘어 다양한 영화에 접근해달라고 영어권 관객에게 부탁했을 만큼 귀에 들리는 언어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막강하다. 때문에 영미권 관객과 시청자들은 자막을 선호하는 한국 관객과는 달리 더빙을 선호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헐리웃 영화와 영국 영화가 상대적으로 흥행하기 쉬운 이유는 유명한 배우들이 등장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똑같이 자막을 보더라도 상대적으로 귀에 익은 영어권 영화가 선호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번역가 황석희는 최근 관객들은 영어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편이기 때문에 잘못 번역하기라도 하면 항의가 들어오기도 쉽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렇듯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는 관객의 모국어, 그리고 구사 가능한 언어와 불가분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홀연히 등장한 <페르시아어 수업>은 국가조차 생소한 페르시아어를 다룬다. 물론 실제 페르시아어는 영화의 끝에 가서야 등장하고, 주로 사용되는 언어는 독일어와 약간의 프랑스어 그리고 질(혹은 레자 준/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이 만들어낸 가짜 페르시아어다.
유대인을 말살하던 시절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질은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코흐 대위(라르스 아이딩어 분) 덕분에 총살당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 때까지 관객은 질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실제 페르시아어 구사가 가능한 인물인지 알기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절대 다수의 관객이 페르시아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가 선택한(놀랍게도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지만) 언어인 페르시아어는 지구상 관객의 절대 다수를 상대로 너무나 손쉽게 심리 게임을 시작한다. 영화 초반이 질이 실제 페르시아인인가 아닌가로 관객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면 이후부터는 질이 만들어내는 가짜 페르시아어가 서스펜스를 담당한다. 스스로 페르시아인이라고 지칭하지만 영화 내에도 페르시아어 구사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코흐 대위는 질의 페르시아어가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길이 없다. 때문에 질로부터 페르시아어를 배우면서도 의심하고,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닌 걸 아는 병사들은 이를 증명하려 하지만 이들도 페르시아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증명할 길이 없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서스펜스가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은 질이 실수로 같은 단어를 다른 두 의미에 갖다붙였을 때다. 이미 사용한 '라지'라는 단어를 '나무'에 재사용한 질은 코흐 대위로부터 의심을 사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기지로 살아남는다.
희한한 것은 질이 만들어낸 가짜 페르시아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질과 가짜 페르시아어로 대화하는 코흐 대위에게서 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질의 거짓말을 거의 잡아냈을 때 코흐 대위의 분노는 사기당한 자의 배신감보다는 애정을 거절당한 배신감에 가깝게 보일 정도다. 병사들에게 자신의 식량조차 잘 나눠주지 않을 만큼 차갑고 무뚝뚝한 코흐 대위는 유독 질에게만큼은 애정을 보인다. 겉으로는 페르시아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질에 대한 편애는 같은 병사들조차 이상하게 볼 정도다. 질이 전출되지 않도록 해서 계속 곁에 남겨두거나 귀한 고기 통조림을 나눠주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알아서 도망치려는 질을 쫓아가 붙잡아 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질과 코흐 대위의 가짜 페르시아어 대화는 마치 사랑의 밀어처럼 들린다. 코흐 대위는 독일어로는 결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지만 가짜 페르시아어로는 가족사를 털어놓는다. 질은 결코 의도적으로 코흐 대위를 조종하려 하지 않지만 그도 모르는 사이에 질에게 코흐 대위는 사랑의 인질이 된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가짜 페르시아어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질이 창조한 언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관객도 뉘앙스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한할 만큼 가짜 페르시아어에서는 질에 대한 코흐 대위의 애정이 드러난다. 가짜 페르시아어는 오로지 의미만이 전달되는데도 전세계 모든 관객이 동등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랑의 밀어가 된다. 더 재미있는 점은 극중에서 가짜 페르시아어가 가짜라는 걸 모르는 건 코흐 대위뿐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질과 함께 잡힌 유대인들도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대다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병사들조차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진짜 페르시아인은 이 과정에서 조용히 사라지기까지 한다. 흔히들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고 하는데 코흐 대위는 그야말로 눈과 귀가 멀어 가짜 페르시아어로만 진실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상태다. 영화의 메인 언어인 독일어의 권력을 가졌어야 할 코흐 대위는 가짜 페르시아어라는 언어 하나로 권력의 위치를 잃지만 그걸 모르는 건 본인뿐이다.
질이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언어의 자연발생 과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최초에는 적당히 단어들을 만들어 내던 질은 한계를 느끼고 단어의 소스를 찾아 헤매다가 유대인의 명단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이름으로부터 수많은 단어를 생성하기 시작한다. 이름은 영화에서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맥거핀으로 작용하는데 질은 극중에서 본명이 아닌 페르시아식 가명 레자 준으로 훨씬 많이 불린다. 코흐 대위가 이 서사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질의 본명을 알지 못하고 가명으로만 부르는 데서 기인한다. 사물의 이름이 다양한 서사에서 갖는 함의를 생각해볼 때 누군가의 본명을 안다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지는데 코흐 대위는 질로부터 가명과 가짜 언어밖에 선사받지 못하고 스러진다. 반면 질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한다. 단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외우고 명단이 부족해지자 마주치는 유대인마다 이름을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로부터 단어를 생성해내 코흐 대위에게 전달한다. 텅 빈것만 같은 가짜 언어는 유대인인 질에게 나치 대위인 코흐를 상대하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변환된다.
이름과 애정의 관계에 대해 영화가 암시하며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도와준, 말 못하는 유대인과 옷을 바꿔입은 질은 코흐 대위에게 붙잡혀 온다. 코흐 대위는 왜 이름도 없는 사람이 되려고 했냐고 묻는데 질은 이 우문에 현답으로 대답한다.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 이름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질의 현답은 사실은 영화 전체를 꿰뚫는 날카로운 답변이다. 질이 살아남은 이유는 코흐 대위에게는 애정이 없는 가명을 알려주는 대신 그 자신은 진짜 이름들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나치 장교들은 역사를 지우기 위해 명단부터 태워버리지만 그 명단이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질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억한 이름들은 생존의 수단이자 그 자체로 역사의 증거로 기능하며 관객에게 짜릿함을 선사한다.
코흐 대위는 영화 내내 질(레자)를 향한 애정공세를 퍼부었지만 그를 결코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코흐 대위의 애정은 집착에 가까웠으며 시혜적이었기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서사다. 반면 질은 자신이 먹기에도 모자란 음식을 나누고 그 보답으로 생존을 돌려받는다. 그리고 지옥과도 같은 애증의 서사가 마무리될 때 진정으로 살아남은 건 진실한 애정을 갖고 이름을 기억했던 질이었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관객과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가지고 서스펜스를 주고받고, 등장인물들과는 애증관계를 가지고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며 이름과 언어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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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주 최신 개봉영화(강릉,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1984 최동원, 뉴오더, 아담스 패밀리2)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1월 2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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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태양은움직이지않는다 #1984최동원 #뉴오더 #아담스패밀리2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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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4차 예고편 - 끝의 시작 편
“시작은 막차였다”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친 스물한 살 대학생 ’무기’와 ‘키누’는
첫차를 기다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좋아하는 책부터 영화, 신고 있는 신발까지 모든 게 꼭 닮은 두 사람은
수줍은 고백과 함께 연애를 시작하고 매일매일 행복한 시간을 쌓아간다.
“내 인생의 목표는 너와의 현상 유지야!”
하지만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 준비에 나선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 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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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티켓 투 파라다이스> 메인 예고편
한때는 미치게 사랑했지만 지금은 나를 미치게 하는 원수와 지상낙원에서 다시 만난 썰 푼다.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