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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5-05-23 08:04:57

속내 모를 괴물 CIA, 플롯의 손쉬운 알리바이

영화 〈브릭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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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CIA가 자신들의 비밀 활동을 비판, 추적해온 유럽의 저명한 기자들을 암살한다는 소문이 돈다. 그리스의 유력 정치인 코스타스는 기자 살해 사건의 배후를 밝힐 필요가 있다며 대중을 선동하고, 대중 사이에서는 반미 정서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정치적으로 응집된다. CIA에게 덧씌워진 혐의는 그럴듯하고, 이에 반발하는 유럽 대중의 분노는 정당해 보인다. 그리고 이 소동의 핵심에는 한때는 CIA의 협력자였으나 이제는 원한에 사로잡힌 적이 된 빅터 라덱이 있다.

 

 

 

전직 CIA 요원 스티브 베일이 다시 현장에 복귀해달란 요청을 받는다. 라덱은 베일이 현직일 때 가장 가까이 지낸 요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비즈니스를 넘어선, 우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CIA가 라덱에게 코스타스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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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덱은 CIA가 부여한 여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그가 위험천만한 현장을 떠나 가족과 안전한 곳으로 이주하는 날은 자꾸 미뤄지기만 했다. 정치인 코스타스 암살 명령이 떨어진 건 이때였다. 라덱은 이 일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며 거절한다. 그러자 CIA는 라덱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한다. 이 사건으로 ‘흑화’한 라덱은 CIA 내부의 배신자와 결탁해 거대한 공작을 벌이고,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CIA가 자신에게 요구한 임무인 코스타스 살해 명령을 뒤늦게 수행하려고도 한다. CIA가 코스타스를 죽인 것처럼 꾸며 복수하기 위해서다.

 

 

 

은퇴 후 벽돌공으로 일하던 베일은 신입 요원 케이트 배넌과 짝을 이뤄 유럽으로 가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 초반의 액션 몰입감은 꽤 괜찮은 편인데, 정작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힘이 달리는 듯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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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덱을 저지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두 사람은 모두 CIA를 떠난다. CIA가 보편적인 선악 기준이 작동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에, 즉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직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근육과 싸움 실력을 가진 베일의 직업이 하필 벽돌공(bricklayer)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벽돌공이 구체적인 삶에서 무언가를 차근히 쌓아감으로써 성취를 얻는다면, CIA는 추상적 조직 논리로 조직원을 추동한다. 베일과 배넌이 CIA와 합을 맞춰 라덱을 막는 데 나섰다고 해서 이들이 CIA의 논리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지향은 오히려 ‘타락’한 라덱의 분노, 울분에 가깝다.

 

 

 

첩보, 액션 영화에서 정보기관은 늘 이렇게 재현된다. 무지막지하고, 조직 논리가 최우선이며, 사람이 죽어 나가고 혼란이 초래되는 데 무심하다. 이를 벽돌공의 소박하고 투박한 이미지와 대조하는 건 진부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주제를 적나라하게 각인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방식의 대립 구도를 보고 싶다. 속내 모를 괴물이라는 CIA의 은유는 일정 부분 적확하겠지만, 첩보 액션 영화에서는 너무 오래 플롯의 손쉬운 알리바이로 활용되어왔다. 장르 문법을 탁월하게 반복할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새로운 서사의 모험이 유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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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베일 역의 아론 에크하트의 얼굴을 보며 내내 그의 대표작 〈다크 나이트〉가 생각났다. 〈다크 나이트〉에서 그는 배트맨의 재력과 초인적 힘이 아닌 법과 상식으로 세상을 구하려다 조커에게 휘말려 흑화했다. 그런 그가 이번 영화에서는 법이 아닌 주먹으로 흑화한 옛 동료를 눈물을 머금고 때려잡는다. 흑화와 정의 구현의 역할이 뒤바뀐 셈이다. 그에게 선한 얼굴과 선득한 얼굴이 공존하기 때문일 터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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