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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_Rec2025-10-10 01:45:28

끝내 ‘선’을 모른 채 살아갈 악인들에게

영화 <백조> 리뷰

[백조] (2023)

 

감독: 웨스 앤더슨

 

 

 

시놉시스

 

덩치 크고 무지막지한 두 소년이 왜소한 모범생 소년을 잔인하게 괴롭힌다. 

 

로알드 달의 소설을 각색한 웨스 앤더슨의 단편 영화 4편 중 하나.

 

 

 

(출처: 넷플릭스)

 

 

 

--------------

 

 

 

폭력이 나쁜 이유에 대해 굳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문득 인지했다.

 

신체적·물리적 고통을 주고 부조리를 낳는다는 이유야 익히 알려져 있고, 부연 설명이 필요 없겠다만,
이 영화를 통해 그 1차적인 고통 너머에 있는 폭력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폭력이 남기는 트라우마, 그리고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무력감에 대하여 말이다.

 

 

 

영화는 또래보다 왜소하고 어수룩해 보이지만 똑똑하고 선한 소년 ‘피터’가 덩치가 크고 잔인한 ‘어니’와 ‘레이먼드’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크게 두 가지 괴롭힘 사건이 등장하는데, 그 첫 번째는 두 소년이 피터를 기찻길에 묶어두는 사건이다. 피터는 다가오는 기차에 치이지 않기 위해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철로에 밀착한다. 기차가 다가오며 철로를 타고 전해지는 진동과 소음, 성인이 된 피터의 나레이션과 그날의 어린 피터의 재현이 겹쳐지며 그날의 공포가 생생히 되살아난다. 폭력과 그로 인한 극도의 공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는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두 번째 사건은 백조 사냥이다. 어니는 생일 선물로 라이플총을 받고 친구 레이먼드와 함께 사냥을 즐긴다. 피터는 두 소년에게 제발 백조를 쏘지 말라 애원한다. 말을 더듬을지언정, 백조는 보호종이고 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또박또박 지켜달라 말한다. 이전의 피터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묵묵히 싸웠다면, 이번엔 타자의 생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맞선다. 피터의 선함은 폭력에 맞서는 무기이자 용기의 근원지다. 하지만 두 소년은 피터의 간청을 무시하고, 결국 백조를 쏘아 죽인다.

 

 

 

어니와 레이먼드의 잔혹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은 백조의 날개를 잘라 피터에게 붙이고, 버드나무 위로 올라가 날개짓을 하며 뛰어내리라고 강요한다. 피터는 반항심에 뛰어내리기를 거부하지만, 결국 다리에 총을 맞아 중심을 잃고 떨어진다. 

 

 

 

1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피터는 두 번의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두려움 속에서도 분노와 용기, 그리고 선함에 대한 믿음을 지켜낸다. 시체를 들고 오라는 두 소년에게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너희가 죽었어야 했어”라는 말을 기어코 해내고마는 용기, 시체 밑에 새끼가 있냐는 질문에 거짓말로 2차 가해를 막는 현명함.

 

 

 

 

 

 

영화 속 로알드 달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들은 궁지에 몰려 더 감내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그대로 꺾이고 무너져 포기한다. 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 어째선지 절대로 꺾이지 않는 이들도 있다. 어린 피터 왓슨도 그런 사람이었다.

 

 

 

피터를 보며 다시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선함’은, 그리고 선하고자 노력함은 곧 강인함을 뜻한다는 것이다.

 

폭력 앞에 무력해질 수는 있어도, 순응하지 않을 용기는 분명 존재한다.

 

그 용기를 선택지로조차 갖지 못하는 악인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불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성인이 된 피터의 나레이션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그 안에는 여러 겹의 레이어가 존재한다. 로알드 달의 작가적 시선, 성인이 된 피터의 회상, 어린 피터의 구현이 겹겹이 쌓인다. 그럼에도 혼란스럽지 않은 이유는 이 다층적인 구조가 자연스럽게 리듬을 이루기 때문이다. 마치 무대 위에서 나레이터가 상황을 설명하고, 배우들이 그 장면을 재연하는 연극을 보는 듯했다. 문학, 영화, 연극 - 세 분야 고유의 요소가 얽혀 새로운 몰입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독특한 경험이었다.

 

 

 

성인이 된 피터가 자신의 과거를 타인의 이야기처럼 회상하는 나레이션은 영화의 서늘하면서도 동화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러한 전개 방식 덕분에 영화는 1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속에서도 풍부한 정보를 밀도 있게 전달한다.

 

 

 

또한 아이들의 잔혹함을 마냥 직접적으로 잔인하게 그리지 않고, 웨스 앤더슨 감독 특유의 미학으로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 점도 인상 깊다. ‘피터 래빗’을 떠올리게 하는 파스텔톤 색감과 정교한 구도, 서정적인 동화책 같은 질감이 잔혹한 이야기와 대비를 이루며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개인적으로 ‘컬러 팔레트’라는 개념을 처음 체감하게 해준 것이 바로 이 감독의 작품들이었고, 그 이유를 다시금 실감했다.

 

 

 

소설 기반 영화나 공연 실황 등, 여러 예술 매체가 뒤섞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프로젝트가 더욱 반가웠다. 영화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압도적인 몰입감과 예술적 완성도만으로도 충분히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작성자 . Cine_R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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