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2024-04-30 22:55:45
원초적인 웃음이 필요할 땐 과거로 회귀할 것
화이트 칙스
가끔 옛날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또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90년대 영화들을 다시 찾아본다. 요새 영화들에서는 대단한 서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이 드는 이유는 웬만한 서사들이 그 때까지 나온 영화들에서 다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00년대 헐리웃 영화들은 90년대의 황금기스러운 느낌보다는 로맨틱 코미디, 원초적 코미디가 더 많았던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물론, '트랜스포머'같은 대규모 프랜차이즈 영화들도 많이 등장했었지만 그런 영화들보다 그런 코미디 영화들을 즐겁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내 인생의 오글거리는 하이틴 영화들은 그 때 봤던 게 전부이지만 그 때 많이 보아서 지금 환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간에 요새 다시 향수에 젖고자 하는 미친 감성에 젖어 보았던 영화가 '화이트 칙스'였다. 굉장히 어설프지만 원초적인 웃음을 주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이 영화를 언제 처음 봤었는지도 기억이 없는데, 참 코미디라는 장르에 충실한 영화라고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 와서 보면 흑인에 대한 비하가 넘쳐나고, 그 비하가 영화의 소재가 될 정도로 당연시되던 사회였구나 다시 실감하게 된다.
1. 아무리 봐도 어색한 티가 나는 분장
영화는 두 재벌 상속녀로 위장하기 위해 흑인인 경찰이 백인으로 위장하는 분장을 감행한다. 참 누가 봐도 안닮았는데, 이걸 겉모습으로 알아채는 인간이 없다는 게 정말 웃긴 지점이다. 오히려 여자 치고 너무 운동 신경이 좋아서 수상함을 느끼지, 외양에서는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이 영화가 가진 장점 중 하나인 '허무하게 웃기기'이다. 약간 밑도 끝도 없는 개그를 보고 나면 아니 저게 뭐야 하다가 막판 가서 와하하 웃게 되는 그런 시간차 공격 같은 개그들이 넘쳐난다. 지금에 와서 그 영화를 처음 보는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처음엔 웃기 보다는 경악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지점이 이 영화의 장점인데, 처음부터 영화의 목적이 코미디이기 때문에 관객을 웃기려는 데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는 것이 보인다. 물론 웃음의 소재가 다소 원초적이지만 가끔 이런 영화도 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참 웃긴 건 이 영화도 유치한 건 매한가지인데, 왜 요새 만들어지는 코미디 영화에서 큰 감명을 받지 못할까. 이 영화도 그다지 작품성을 논하기는 조금 애매한 그저 오락 영화이고, 웃음의 코드가 대단히 고급스럽지도 않은데, 이 영화는 계속 보게 되면서 다른 코미디 영화들은 식상하다고 느낄까. 그건 나의 위선인가, 아니면 코미디 영화가 그만큼 발전이 더딘 장르인 것인가.
2. 웃음의 소재가 비하인 것은 조금...
영화의 가장 코믹한 캐릭터 중 하나인 라트렐이라는 농구선수가 나온다. 흑인인데, 백인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가 사실은 흑인 남자였다는 사실에 실망하는데, 포커스가 남자였다는 것때문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 흑인이라서 실망했다는 지점이 '이건 요새 나오면 안되는 대사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흑인에게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둥 이런 대사들도 참 요새 나오면 논란 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그 시절이니 용인된 대사들이 참 많이 보였다. 주인공들이 모두 흑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흑인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대사들이 참 많이 나오는데, 그걸 현재를 살아가는 흑인이 본다면 불쾌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 헐리웃 영화에서 동양인들은 너드 혹은 전문직종으로만 그려지는 게 동양인 입장에서 세상 답답한 것처럼 말이다.
뭐,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뭔 불만이 많냐 싶을 수도 있지만 코미디라는 것이 누군가를 비하하지 않고 웃기는 것은 생각보다 고급 스킬이기 때문에 그런 고급 유머를 구사하는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명장면은 배출한.
이 영화의 명장면은 그 클럽에서 댄스 배틀하는 장면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뭐라고 그렇게 여러번 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여자들끼리의 춤배틀인데, 어딘지 모르게 안무를 억지로 외운 것 같은 몸치 바이브들도 웃긴데, 다 같은 몸치이면서 누가 이겼네 졌네 하고 있는 것도 코미디 포인트였다. 그 다음에 주인공들이 백인 여성으로 위장하고서 세상 올드스쿨 느낌나는 춤을 추는 것도 재밌었지만 말이다. 뭐랄까, 그 배틀 장면은 허세에 점령당해 버린 남자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굉장히 오글거리는데, 그래 어디까지 오글거리나 보자 하면서 끝까지 보게 되는 장면이다.
OTT 영화들은 성행하는데, 볼게 없다고들 한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과거로 가보시라고 추천한다. 지금보다는 확실히 영화들이 기술적으로 만듦새가 어색한 지점이 많긴 한데, 오히려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그 내용이 더 새롭다. 그때에는 새로이 등장했던 서사여서 그런지, 요새 더 발전된 서사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투박한 서사가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90년대 영화들을 돌려보게 된다. 곱씹을수록 좋은 영화들이 참 많다. 음, 그런 의미에서 '화이트 칙스'는 곱씹을수록 좋은 영화라고까지 칭송하고 싶진 않지만 가끔 삶이 무료할 때 대책없이 웃고 싶을 때 꺼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작성자 . Anonymoushila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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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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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아'들의 조우, 사랑, 일탈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스터]
[감독]
니콜레트 크레비츠
[출연]
소피 로이스, 우도 키어, 밀란 헤름스
[시놉시스]
한동안 연기 활동을 하지 않은 배우 아나, 골칫덩이로 여겨지는 고아 아드리안. 서로를 만나게 된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고, 거리를 거닐며 담배를 나눠 피우는 사이로 발전한다. <와일드 Wild>(2016)로 사랑의 범위를 확장하는 시도를 했던 니콜레트 크레비츠 감독의 신작이다.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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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때로 일탈을 꿈꾼다. 삶이 메마를 때,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 그 옛날 세차게 흐르던 강이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아에이오우: 사랑의 빠른 철자법>의 주인공 '아나' 역시 그러한 일탈을 꿈꾼다. 남편과 사별한 그에게 삶의 낙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직장에서는 '나이에 비해서는 매력적이나 그럼에도 한물 간 퇴물'로 취급 받고 사회는 그를 도움이 필요한 노부인으로 바라본다. 그의 젊음은 시들었고 그는 더더욱 위축되어 간다.
아나의 꿈은 한 어린 소매치기, '아드리안'과의 조우에서부터 실제가 되었다. 어수룩하게 가방을 훔쳐 달아나던 아드리안을 처음 보았을 때, 아나는 무언가 형용키 어려운 싱그러움을 느낀다. 그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운명은 지독하게도 그 두 사람을 이어주었고, 두 사람은 어느 복지국 재활 프로그램에서 재회했다.
'아'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떠한 동질감을 느낀다. 과잉행동장애로 말을 더듬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는 아나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다. 부모 자식뻘의 나이 차가 나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게 된 것은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드리안은 온몸으로 아나를 원하노라 표현한다. 매일 같이 그를 찾아가고, 남의 물건을 훔쳐서라도 그를 위한 선물을 마련한다. 그리고 아나는 소외된 소년인 아드리안에게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사람으로서, 같은 눈높이에서 조언한다. 그는 말한다. 잘 안되면 어떠냐고, 네가 잘하는 다른 걸 해보라고. 각자의 방식으로 고여만 있던 서로의 삶을 흐르게 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는 막을 수 없는 소리, 항상 뻗어나가는 소리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르던 것을 깨달을 때, 감탄할 때, 오르가슴을 느낄 때... ... 그 모든 순간, 가장 먼저 내뱉는 소리가 바로 '아'라는 것이다. 아나와 아드리안, '아'로 이름이 시작하는 두 사람은 어쩌면 서로에게 이러한 '처음' 혹은 '깨달음'을 선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방식일지언정, 서로에게는 각별하다. 그들은 그토록 꿈꾸던 일탈이라는 과업을 완수했으므로.
사회적 관습에 익숙해진 우리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나이든 여자와 도벽이 있는 소년의 결합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숱하게 위법을 저지르고, 그로 말미암아 형사에게 쫒기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맞이하면서.
소위 말하는 '유교걸(유교 사상에 찌든 여자)'인 필자로서는 이들의 일탈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모든 부도덕함을 기꺼이 무릅쓰고 마침내 서로에게로 가 닿는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기존의 고루하고 메마른 일상에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혹은 우리가 꿈꾸는 어떤 판타지를 스크린 너머에서 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의 해석은 관객이 생각하기에 달려있겠지만.
'아에이오우-사랑의 빠른 철자법', 22.08.26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목) - 09/0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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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타인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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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건 '우리는 저런 게임 해도 광고나 게임초대 밖에 안 온다'는 후기다. 나도 그럴 것 같다.\
월식이 일어나던 날, 호수이자 바다인 영랑호에서 불장난(사실 얼음낚시이지만)을 하다 주먹다짐을 했던 어린이들은 약 40년 뒤, 또 다시 월식이 일어나는 날 석호와 예진의 집들이에서 새로운 불장난을 한다.
40년 지기 친구들과 그 아내들이 휴대폰으로 오는 모든 알림들을 공유하는 게임.
이 영화는 낯선 게임의 형식을 빌려 내부의 클리셰들, 너무 흔한 가정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배신과 타자성 보다는 오히려 풍자에 가깝다.
더 바랄 것도 없을 정도로 완벽해 보이는 석호-예진 부부. 그들의 공부 잘하고 착한 딸.
유방 성형외과 의사인 석호는 자상하고 가정적이며, 정신과 의사 예진은 딸에게 엄격한 엄마다.
대학생 때 혼전임신으로 낳은 딸인 만큼 딸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진의 아버지도 의사인 걸로 보아, 처음부터 석호가 결혼을 승낙받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석호는 예진 몰래 투자한 속초 리조트에 사기를 당한다. 정신과 의사인 예진은 성형을 정신적 문제라고 인식하고, 성형외과 의사인 석호는 정신과 의사를 꿀 빤다고 여긴다. 하지만 예진은 가슴 성형수술을 예약했고, 석호는 정신과 치료 6개월차다.
한국 영화, 아니 한국 가정의 클리셰들을 몽땅 모아둔 것 같은 태수-수현 부부를 들여다 보자.
고시 뒷바라지 해서 변호사 만들어 놓았더니 이제는 식모 취급하는, 보통 성격 아닌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만 "우리 엄마 그런 사람 아니야!"를 외치는, 아내 모르게 다른 여자와 야한 사진을 나누는 태수. 친구 아내의 옷차림을 보고 "너무 꽉 끼는 거 아니야?"라며 평가질까지.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면서 자존감이란 자존감은 뉘집 개나 준 듯한 수현.
문학반 수업을 들으며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레파토리는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문학반 다니는 사람에게 예진을 험담하는 것도 낮은 자존감에서 온다. 자기 자신이 없으면 남이 기준이 되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음주운전 후 수현 대신 태수가 자수을 하면서 죄책감까지 가중된다. 죄책감과 자존감은 디커플링.
거기다 슬쩍슬쩍 몰래 술도 마신다. 알콜중독과 자존감은 커플링.
준모-세경 부부를 보자. 준모는 부잣집에 맨몸으로 장가간 남자의 전형이다. 사업병에 걸려 온갖 사업을 벌이고, 망하고, 그리고 또 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면서 앞에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랑꾼인 척. 사업장의 어린 알바생과 바람피우는 것까지 완벽하다.
그러면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무시받는, 사업이라도 해서 '사장님' 소리를 들어야만 자존감을 올릴 수 있는 한없이 약한 존재.
한편 세경은 여기서 가장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세경은 말한다. "결혼할 생각 없었어요. 저 인간이 하자고 하자고 해서"
마지막으로 애인 '민서'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지만 몸이 아프다며 혼자 온 영배.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사싱 잘리고), 친구들끼리의 골프 약속에도 소외된다. 40년지기 친구에게도 사실 애인은 민서가 아니라 '민수'임을 비밀에 부친다.
게임은 점점 과열되고, 그만 두자고 하는 사람과 한번 폭로되면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다.
서로를 속이고, 속였다는 것이 발각되는 걸 관음하는 것이 관객의 역할이다.
게임-스릴로 흥분되는 순간은 잠깐이다. 그 이후는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 보는 관음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트폰은 그 자체로 메타포다. 마치 타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화려한 생활을 관음하며 그 뒤에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불행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완전무결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비난은 너무도 쉽다.
그렇기에 기존 포스터에서 차용하지 않는 방식인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기'는 마치 "너, 나 보고 있었지?"라고 말하는 듯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훔쳐보고 있는 걸 다 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동성애자.
자존감이 낮은 이가 SNS에서 화려한 삶을 거짓으로 꾸미듯이ㅡ물론 자존감도 높고 화려한 사람도 있겠다만은ㅡ세경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사회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영배와 보통 수준의 자존감을 가진 세경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결핍 그 자체다.
인정받고 싶지만 능력이 없는 준모, 책임감 없지만 책임감 있는 척 해야 하는 태수, 아내에게 금전적으로 달리는 석호, 자신을 잃어버린 수현, 성(性)적으로 억압된 예진.
예진의 억압된 성은 희한한 방향으로 가지를 친다. 첫째가 딸 소영에게 보이는 반응이 그렇다. 스무 살이 넘은 딸의 연애사를 일일이 간섭하며, 딸의 가방을 뒤져 기어이 콘돔을 찾아낸다.
딸이 만나는 남자를 격렬하게 거부하며 딸에게 순결을 강요한다. 둘째로는 유방 성형외과 의사인 남편으로 말미암은 신체 컴플렉스다.
성형은 정신적 문제임을 인지하지만, 결국 가슴 수술을 감행하려 한다. 그것이 자신의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의 두 가지 요소는 자신의 삶과 몸을 완전히 부정한다.
마지막으로 준모와의 관계다.
<인셉션>에서처럼 세경이 빼 놓은 반지가 테이블 위에서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그 순간 관객들은 이 모든 일이 가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영화 끄트머리에서는 게임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돌아가는 차 안, 준모는 예진에게 온 문자를 확인한다. '자기랑 있고 싶었어'
하필이면 준모일까. 남편은 의사고 태수는 변호사, 준모는 사업병 걸린 백수다. 그럼에도 준모를 선택한 것은, 억압된 욕망의 육화 그 자체가 아닐까.
계산 없이 몸만 생각할 수 있는 상대.
마지막까지 관객의 관음 욕망을 채워준다. 이로서 가상이라고 여겨졌던 1시간 50분을 진짠가, 가짠가 헷갈리게 한다. 하지만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진짜라는 것을. 그리고 진짜라고 믿고 싶은 건 아닐까.
태수의 말처럼 누구나 '공적인 삶, 개인의 삶, 비밀의 삶이라는 세 가지 삶'을 살고 있음이 영화의 주제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옆에 있는 타인들을 속이며 '완벽한 타인'들로부터 결핍을 채워가는, 그것은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영랑호에서의 불장난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한강이 보이는 서울 고급 아파트에서의 불장난으로, 친구 아내와의 불장난으로ㅡ불장난이라 순화하고 싶지는 않지만ㅡ 끝난다.
어쩌면 '완벽한 타인'이라는 제목은 40년지기 친구도, 가족도 아닌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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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뭐였지? 기억이 안 난다. 분명히 방금 생각했는데 말이다. 26살밖에 되지 않은 나. 왜 군데군데 기억력에 구멍이 났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주치의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렇게 큰 문제인 것 같지는 않다고 말씀해주셨다. 큰 문제 아닌 걸까? 나에게 처방된 약은 안 좋은 것보다 장점을 더 가져다줬지만 이 기억력과 관련한 문제는 왠지 모르게 단점으로 느껴진다. 내가 누군지 기억에 난다. 그런데 오늘 해야 할 일이 가끔 생각이 안 난다. 플루옥세틴이라는 약이 정말 기억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걸까. 아니라는 답도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함이 남는다.
찜찜함. 오히려 이 찜찜함이 내 삶에서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우울한 무언가를 분출하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내가 느낀 걸 감상을 나누고 싶어서 쓰지만 어렸을 때는 그랬다. 이 찜찜함은 '왜 우울해졌을까'도 갉아먹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는 뜻일까. '왜 그랬어?'라고 물으면 줄줄줄 나올 것 같지만 이제는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뭐였지? 분명히 기억에 남아야 할 텐데. 기억하지 않으면 나는 그렇게 멈춰 서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성공해서 누군가의 위에 남아야만 한다고 여겼던 독기가 요즘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 가끔 짜증이 난다. 분명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사실인데 말이다. 내면의 분노만 기억에 남았다. 무엇이 그 일을 구성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이렇게 나처럼 내면의 분노를 지우지 못했던 인물이 있다. 이 사람은 현재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이 남자의 복수극에 동행해보자. <리멤버>다.
응어리진 채로 뱉은 넋두리
하나하나 다 잊혀간다. 뭐가 기억에 없어졌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덧 여든이다. 80대, 고령에 돌입한 한필주는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다. 한필주의 머릿속에는 기생충이 있다. 알츠하이머라는 기생충이다. 필주의 일상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간다. 브레이크 타임. 낮잠을 자고 있던 필주. 귀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오늘은 잊은 것이 없구나. 아무렇지 않은 척 제이슨의 인사에 응답한다. 이번 주면 이 일을 그만둔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일하는 필주. 프레디란 이름으로 탈을 썼던 하루하루도 이제 빛을 발하는 때가 됐다. 자식들은 다 가정을 꾸렸다. 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완벽히 혼자가 될 준비가 됐다.
혼자가 될 준비가 됐다. 책임질 것이 없다는 것은 많은 것이 열려있다는 의미가 된다. 눈이 풀려있던 필주. 갑자기 눈에 힘이 들어온다. 필주는 집 안에 있던 허름한 방으로 향한다. 카메라가 있었다. 카메라를 앞에 선 필주. 한두 마디 내뱉는다. "저는 한필주입니다. 제 가족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에게 누명을 써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이유로 광인이 되셨고, 누나는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일제에게 성착취를 당했습니다." 그의 손에 권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다. 카메라가 향하는 곳은 사진들이다. 정치인, 전직 군인, 일본인 학자 등 한필주는 오랫동안 이들을 목표로 복수극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행히 전등을 쏴서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한필주의 기력은 충분하다. 머릿속이 채 무너지기 전에 먼저 떠난 가족들의 복수극을 실행해야 한다. 한필주는 목표를 달성하고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까?
재미있는 영화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재미있다. 장르적인 특성을 아주 잘 잡았다. 장르를 굳이 따지면 스릴러물에 가깝다. 어? 액션 들어가는 것 같던데?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한필주가 80대인걸 고려하면 빠릿빠릿한 액션이 들어갈 틈이 없다. 그 대신 스릴러물로 서스펜스를 만드는 방식이 다양한 것은 강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주인공 한필주의 '알츠하이머' 진단이다. 기억을 잊는 병. 이 기억이 없어지는 시기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서 이렇게 들어갑니다~' 말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자체로도 서스펜스가 생길 수 있다. 주인공이 언제 기억을 잊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시각적인 이미지와 알약이라는 소재로 짜임새 있는 묘사를 보여줬다. 이 알츠하이머라는 소재가 편의적으로 들어간 부분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지점은 한필주의 복수극이다. 주인공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인물은 가족을 죽인 친일파를 처단해야 한다. 그럼 이 복수극이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는가?를 영화 안에서 보여줘야 한다. 이를 영화는 캐릭터의 속성으로 돌파하는데, 구체적으로 이를 위해 초반부의 군데군데 삽입한 한필주의 성격 묘사나 전쟁 영웅 출신이었다는 설정이 인물을 살아 숨 쉬게 만든다. 또 복수극을 벌이면서 한필주는 자잘자잘한 문제에 부딪히는데, 이 부분을 일반적인 형태가 아닌 창의적인 방식을 썼다는 것도 이 부분의 장르 특성을 강화시킨 좋은 해결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영화에서 서스펜스를 만드는 소재로는 추격극이 있다. 초반부에 피살되는 인물은 굉장히 큰 기업의 CEO로 보인다. 아마 자기가 만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재계에서 알아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죽으면 엄청나게 관심이 끌린다. 이를 기점으로 정만식 배우가 맡은 형사 캐릭터가 한필주의 행보를 좇는다. 여기서 경찰 캐릭터를 단순히 권력에 굴복하거나 무능력하기만 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도 충분히 장점으로 뽑을 수 있는 부분이다. 주인공 일행을 뒤쫓는 사람의 입장이자 사건의 관찰자로서 일반 관객들을 대면하는 설정이 좋았다. 이야기의 흐름을 깨지 않는 선에서 과하지 않게 캐릭터를 직조한 것이다. 또 다른 요소로는 주인공 인규의 속사정이다. 인규는 그냥 한국의 평범한 20대다. 피시방에서 게임하는 거,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 인물이 어떻게 필주의 복수극에 동참할 수 있었냐? 의 원인이 극에서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인물이 왜 동화될 수밖에 없는지를 섬세하게 그리며 극에서 인물에게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 네 가지 스릴러 요소가 극 이해를 돕는 윤활유가 되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지루하진 않다. <콜래트럴>의 형식을 차용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영화 자체의 오리지널리티가 장르적인 특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치밀하게 그린 큰 그림
그리고 영화에서 장점으로 작용했던 부분은 큰 갈래를 잘 설정했다는 부분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인공 한필주의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세팅은 주제와도 이어진다. 주인공이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또 잊어버렸는지가 영화에서 주요하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와 관련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묘사가 관객 입장에서 '이 사람이 이런 걸 기억하고 있네'라고 두 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하이라이트 신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때 굉장히 중요하게 작동한다. 어떤 인물은 무언가를 기억하지만 다른 중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 대비가 악한 무리로 속해있는 빌런들의 후안무치를 두드러지게 묘사하는 효과를 낸다. 또한 이 인물이 이 일을 벌이는 동기부여의 설계는 탁월했다. 이 부분은 극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극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지점이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이 한필주의 동기부여라고 생각한다.
또 초반부의 이야기 전개가 후반부에서 잘 회수되는 부분도 각본의 큰 그림을 느끼게 한다. 주인공 한필주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인물이다. 영화의 다른 한 구석에서 한필주가 그렇게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럼 이렇게 우리나라를 위해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인물이 이런 곤궁한 상황을 겪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직 군인이라는 설정은 후반부까지 무력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부분과도 이어진다. 또 하이라이트 신에서 인물의 행보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 각본의 큰 그림은 후반부에 그대로 이어진다. 가령 인규의 속사정을 알 수 있는 부분에서 3자의 인물이 끼어든다. 이 3자의 인물이 끼어든다는 암시가 초반부에 인규가 어떤 걸 확인하면서 나온다. 그리고 이 인물이 중반부에도, 후반부에도 등장한다. 그냥 단순히 떡밥 회수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인규의 동기부여와도 관련이 있으며 인물의 행보를 가로지르는 주요 인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나름 꼼꼼했던 인물 설정을 느낄 수 있다. 극에서 크게 막히는 부분이 없으니 몰입이 잘 되는 것이다.
바퀴에 칼이 꽂힌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점은 있다. 바로 각본의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선 초반부에 한필주가 얼마나 섬세한 인간인지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진상 손님이 제이슨(인규)의 4만 원을 갖고 튀게 생겼다. 억울한 인규. 이런 인규를 대신해서 4만 원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이 설계까진 좋았다. 지갑을 놓고 간 것을 빌미로 센스를 보여주던 필주. 그런데 이 사람이 4만 원을 뺏기기 위해서 음식점에서 계산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음식점에서 뭔가 먹을 때 언제 계산할까? 바로 다 먹고 계산한다. 계산 딱 하고 일행이랑 차 타고 집에 안녕하고 사라지는 게 우리 모습이다. 그런데 이 일반적인 과정을 살짝 무시한 느낌이 있다. 물리적인 시간이 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이와 비슷한 부분에서 경찰 캐릭터랑 한필주 캐릭터가 대면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있고 나서 한필주 캐릭터와 경찰 캐릭터의 행보는 굉장히 편의적으로 끼워 맞춘 부분이 있다. 우리가 만약에 경찰 캐릭터의 입장이라고 봤을 때, 이 시퀀스의 후반부쯤에 그럴만한 객관적 이유를 제시하긴 하지만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이런 김새는 느낌은 대사 작문법에도 이어진다. 군데군데 조악한 대사들이 눈에 보인다. 일단 초반부. 인규(제이슨)와 필주(프레디)가 우정을 묘사하는 방법이 없다. 핸드사인을 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야. 우리 PC방 갈래? 나 롤 배웠는데.' '(음식을 먹으며) 너무 JMT야!' 전부 80대 할아버지 필주의 입에서 나온 대사다. 글쓴이는 1997년 생이다. 글쓴이의 입에서 'JMT'란 단어가 나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또 '리그 오브 레전드'를 안 한지 거의 2년이 넘어간다. 굳이 할아버지와 20대 청년과의 우정을 이런 식으로 묘사할 이유가 있을까? 굉장히 불필요한 부분이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두 사람의 우정을 묘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정을 보여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근데 그걸 어울리지도 않는 방식으로, 현실성도 느껴지지 않는 말을 하면서 보여줄 이유가 있나? 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런 조악함은 러닝타임 도중에도 몇 번 더 나타난다. 후반부에 한필주가 복수극을 펼치면서 어떤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직접 자기 입으로 '나는 친일파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때 인물 간이 처해있는 입장에 굉장히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거지! 이거 위해서 영화 만들었지! 그런데 그 '친일파다!'대사가 들어가니까 굉장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굳이 그 장면에서 그게 들어가지 않아도 감정적으로 들끓는데 말이다.
또 영화 극후 반부에서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이 끝마무리되고 극에서 굉장히 중요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신이 있다. 여기서 나누는 모든 대화가 전부 다 사족같이 느껴졌다. 여기서 어떤 인물이 한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 영화를 봤던 모든 사람이라면 이 문장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나 쓰고 있는 글쓴이도 역사의 죄인들이 합당한 벌을 받았으면 한다. 그런데 이 말을 굳이 꺼내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는 의문이다. 이는 바로 직전 시퀀스에서 이 평가를 말했던 인물의 대사와도 어울리지 않으며 신파극처럼 느끼기도 쉬운 데다가 얼핏 보면 이 친일파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초를 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왜 이 영화를 볼까? 친일파를 처단하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왜 카타르시스를 느낄까? 현실에서 이뤄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왜? 어떤 친일파는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 한국사회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 또 우리가 사적 복수로 누군가를 처단하는 일이 불법이기 때문이다. 대체역사물의 느낌으로 영화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평가를 굳이 입으로 말한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친일파들은 감옥에 가서 자연사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이 평가가 전체적인 흐름을 크게 비트는 것처럼 들린다. '이 정도면 잘 만든 스릴러' '이 정도면 잘 설계한 메시지' '친일파를 잊어버리면 안 되지' 싶은 것이 '?????' 싶은 결함을 남기는 옥에 티였다.
기억에 남을 것 같아
많이 아쉽다. 기대를 아예 안 하고 갔다. 그런데 의외로 재밌었다. 올해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준비하며 일제의 만행에 대해 공부했다. 그 공부했을 때 느꼈던 화가 스르르 생각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어떤 정치인이 이와 관련된 망언을 했다. 이 부분도 생각났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질렀다. 그 타인이 누군가를 해친 것이 아닌 한 성적으로 착취하거나 폭력을 벌이는 짓이 잘하는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마치 이를 합리화하는 듯한 그 국회의원의 말에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그 국회의원의 말을 반박하는 것 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뿐일까? 극에서 2022년 10월 말의 대한민국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얼마 전에 한 기업체에서 근무하던 노동자 분이 세상을 떠났다. 이 노동자 분을 생각하게 만드는 키워드가 극에서 중요하게 쓰였다. 당연히 나 역시 화가 났던 일이기 때문에 같이 분노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을 후반부에서 중요하게 작동시키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 사회에 산재해 있는 언급되지 않는 사건사고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윗 문단, 그러니까 후반부에서 대사가 아쉬웠다고 썼던 그 시퀀스를 보고 나니 상기했던 단점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쉽다. 더 꼼꼼했으면 이런 단점이 생각나지 않았을 텐데, 싶은 것이다. 이성민, 남주혁 두 배우 연기 엄청 잘했다. 이성민 배우는 <남산의 부장들>보다 더 잘했고, 남주혁 배우는 <한산>의 와키자카를 연상케 하는 뛰어난 퍼포먼스였다. 메시지도 좋고. 서스펜스 좋고. 배우 연기 잘했고. 캐릭터 캐스팅 좋았고. 그런데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단점이 뚜렷하니 좋은 평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산>보다 더 흥행할 수 있는 영화가 꼼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굉장히 아쉬웠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에겐 추천하고 싶진 않지만, 분기마다 한 번씩 가는 분들에겐 추천하고 싶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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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채로운 캐릭터와 게임 원작이 함께 빛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때는 명예로운 비밀결사 '하퍼'의 일원이었지만, 하퍼의 맹세를 깬 후 아내를 잃고 딸 '키라'(클로이 콜먼)를 책임져야 할 홀아비가 된 '에드긴'(크리스 파인). 그는 ‘홀가(미셸 로드리게스), ‘사이먼’(저스티스 스미스), ‘포지’(휴 그랜트)와 함께 도적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포지의 친구 ‘소피나’(데이지 헤드)는 에드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부활의 서판’을 훔치자는 것. 아내를 다시 만날 생각에 들뜬 에드긴은 동료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그러나 모험은 실패하고, 그는 홀가와 함께 감옥에 갇힌다. 시간이 흘러 탈옥에 성공한 에드긴과 홀가는 부활의 서판을 되찾기 위한 팀을 다시 꾸린다. 옛 동료인 마법사 사이먼, 변신의 귀재 드루이드 '도릭’(소피아 릴리스), 언제나 진지한 팔라딘 '젠크’(레게 장 페이지)까지. 제각기 아픔을 지닌 이들은 한 팀이 되어 지상과 지하, 삶과 죽음을 넘다 드는 모험에 나선다
<D&D>,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의 명맥을 잇다
2000년대 초반 할리우드는 판타지 영화의 세상이었다.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등이 쏟아져 나오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빛이 비치는 곳에는 그림자도 있는 법. 2010년대 이후 히어로 영화에 밀려난 판타지 영화의 기세는 예전 같지 않다. <호빗> 시리즈가 체면치레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 <나니아 연대기>를 비롯한 후발주자는 좀처럼 기를 피지 못했다.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 역시 해리 포터 팬들에게 실망만 안긴 채 마무리됐다. 그나마 HBO <왕좌의 게임>과 <하우스 오브 드래곤>, 넷플릭스 <위쳐>처럼 드라마 쪽에서 흥행작을 배출하는 중이다.
끊긴 듯 보이는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의 명맥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한 영화가 있다. 바로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이하 <D&D>)다. 디오라마 게임판 위에서 장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TRPG, Table-top Role Playing Game)인 '던전 앤 드래곤'을 영상화한 이 작품은 게임 시리즈 속 유명 세계관인 '포가튼 렐름'을 무대로 삼은 판타지 활극이다. 사실 외관만 놓고 보면 <D&D>는 진부하다. 기사와 마법사 등장하고, 드래곤과 괴물들, 난쟁이 등이 판치는 세상은 더 이상 신선하지 않다. 그러나 <D&D>는 대중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다른 판타지 영화들과는 달리 관객의 눈길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는 마력을 갖고 있다. 마치 마블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이하 <가오갤>)를 보는 듯한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합이 그 정체다.
<D&D>, 중세 판타지 버전 <가오갤>?
<D&D>에는 캐릭터가 많다. 빌런을 제외한 주연 캐릭터만 해도 다섯 명이나 된다. 캐릭터가 많다 보면 영화는 자칫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캐릭터 비중의 균형은 무너지고, 서사는 꼬인다. <D&D>는 다르다. 원작이 롤 플레잉 게임이라는 점을 살려 한 명 한 명에게 명확한 역할과 특성을 맡긴다. 캐릭터가 복잡하지 않으니 영화의 서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원작 게임의 설정에 집착하지 않기에 더 효과적이다. 하퍼를 착한 비밀결사, 레드 위저드를 악의 온상으로 간단하게 묘사하는 식으로 간단히 알려주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또 캐릭터 간의 극명한 차이점은 예상치 못한 유머 포인트다. 그 덕분에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중세 영웅담은 유쾌한 활극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D&D>의 캐릭터는 사실 낯설지 않다. 각 인물의 특성이 <가오갤>의 주인공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이라 할 수 있는 에드긴은 시종일관 류트를 든 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십분 활용해 동료들을 이끌어 나간다. 이 대목은 음악 빼면 시체인 스타로드, 피터 퀼을 연상시킨다. 홀가는 검, 도끼, 쇠사슬 등 웬만한 무기를 모두 다 다루는 전사다. 시니컬한 성격 덕분에 에드긴과 재밌는 콤비도 이룬다. 가모라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마법사 사이먼은 로켓을 닮았다. 스타로드와 투닥거리면서도 필요한 장비를 뚝딱 만들어내는 로켓처럼, 사이먼은 에드긴과 시종일관 갈등을 빚으면서도 마법 아이템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한다. 어떤 동물로도 변할 수 있는 드루이드 도릭은 온몸을 변형해 동료들을 지원하는 그루트처럼 활약한다. 마지막으로 매사에 진지해 유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팔라딘(성기사) 젠크는 힘은 강하지만 사고방식이 독특해 대화가 힘든 드랙스를 재해석한 결과처럼 보인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캐릭터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는 과정도 <가오갤>과 비슷하다. <D&D>는 의지할 가족을 잃은 이들이 모여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본래 질서의 수호자인 비밀결사 하퍼 중 하나였던 에드긴은 하퍼의 맹세를 저버린 결과 아내를 잃고 도적이 된 도망자다. 홀가는 다른 종족인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본인 종족에서 쫓겨나고, 결국 남편과 이혼한 외부자다. 사이먼은 최고의 마법사인 '엘민스터'의 후손이지만, 선조의 명성을 조금도 쫓아가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실패자다. 드루이드인 도릭은 오래전 악마의 피가 섞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인간 세계에서 배척된 소수자다. 젠크는 악의 무리인 '레드 위저드'의 사상과 지향을 거부해서 쫓겨난 추방자다. 이들은 모험을 통해 애정을 싹 틔우고, 하나의 가족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D&D>는 유쾌하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은 활극이다. 은은하게 감동적이다. 사이좋게 체포되고 도망 다니던 은하계의 사고뭉치들이 한 팀이자 가족이 된 <가오갤>처럼.
원작의 힘을 빌려 차별화에 성공하다
<가오갤>의 중세 판타지 버전 같아 보이는 <D&D>. 그러나 <D&D>를 그저 <가오갤>의 아류로 취급할 수는 없다. 원작 게임의 요소들을 적절히 녹여내면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에드긴과 홀가는 새 팀원을 모으기 위해 이곳저곳을 여행하는데, 영화는 그 과정에서 복잡한 설명 없이도 넓은 세계관의 장소나 역사, 종족들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도릭이 팀에 합류하는 과정을 통해 '우드엘프'라는 종족을 소개하고, 그들과 인간의 악연을 설명한다. 또 젠크를 영입하면서 악당인 소피나와 레드 위저드의 과거사 및 목적을 알려주기도 한다. 원작에 등장하는 각종 아이템을 스토리텔링에 결부한 지점도 흥미롭다. 작중 주인공들은 모험 중에 자기 상처를 직시하고,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트라우마를 떨쳐내면서 개인적으로 성숙해지고, 팀으로서도 단단해진다. 이때 영화는 분기점마다 아이템을 하나씩 등장시키면서 이야기를 매끄럽게 전개한다.
사이먼이 '분리의 투구'를 사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는 투구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고고조 할아버지인 엘민스터의 환상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다. 공간을 초월하는 통로를 뚫어주며 모험 내내 활약하는 '여기저기 스태프'의 등장도 비슷하다. 전 남편을 다시 만난 후 마음에 상처를 입고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로 결심한 홀가. 그녀는 과거 전 남편에게 선물했던 지팡이를 다시 챙겨 나온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알고 보니 '여기저기 스태프'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부활의 서판'도 마찬가지다. 모험이 시작될 때 이 마법 도구는 에드긴이 하퍼로서의 맹세를 깬 업보로 잃은 아내를 되살려 낼 수단이었다. 그러나 모험이 끝날 때, 이 서판은 그의 아내를 살려내지 못한다. 대신 에드긴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다섯 주인공이 하나의 가족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제목에 걸맞은 액션과 볼거리도 게임의 매력을 스크린 위로 적절히 불러온다. 주인공들은 '언더 다크'라는 지하 세계에 내려가 던전에 사는 드래곤을 만나고,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이 추격전은 마치 관객이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인 드래곤이 아니라 비만 체형을 자랑하는 드래곤이 등장하다 보니 신선한 재미도 있다. 또 후반부에는 하이썬 경기라는 일종의 미궁 탈출 게임에서 촉수 달린 흑표범 같은 괴물이나, 사람을 녹이는 슬라임 괴물처럼 원작 게임에서 모습을 비춘 바 있는 생명체를 등장시켜 긴장감을 더한다. 각 캐릭터의 능력을 고루 활용한 클라이맥스도 인상적이다. 비록 액션의 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는 없어도,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끝내 극복하지 못한 한계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빌런의 활용법이 발목을 잡는다. 소피나가 지나치게 일차원적으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피나는 주인공 일행 모두를 패퇴시킬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다. 에드긴을 배신하도록 포지를 부추기고, 포지마저 자기 계획을 위한 꼭두각시로 이용할 정도로 교활한 면모도 있다. 에드긴을 붙잡기 위해 그의 딸로 위장해 덫을 놓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능력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소피나는 영화의 최종 빌런에 걸맞은 위압감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음 시리즈를 위한 발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레드 위저드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스자스 탐'(이언 핸모어)을 소개하고, 악의 근원인 그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려 하는지 알려주는 도구다. 그래서 소피나가 주인공들을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긴장감을 자아내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 꺾어야만 하는, 또 꺾을 수 있는 전형적인 악역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암시된 까닭이다.
'괜히 휴 그랜트를 캐스팅한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악역, 포지가 있어서 아쉬움은 더 크다. 스테레오 타입인 소피나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부활의 서판을 얻으려는 모험이 실패로 귀결되자, 포지가 자기를 속인 줄 모르는 에드긴은 그에게 서판과 딸을 부탁한다. 감옥에서 탈옥한 후, 에드긴은 맡겨둔 서판도 되찾고 딸과 재회하기 위해 포지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보물도, 딸도 되찾지 못한다. 포지가 키라를 가스라이팅하고, 그녀의 애정을 악용해 부녀의 재회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포지는 옛 동료인 에드긴을 붙잡아 포상금까지 챙기려 한다. 이처럼 포지는 동료애도, 가족애도, 부성애도 철저히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 한 가족처럼 끈끈해지는 에드긴 일행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그들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셈이다. 이는 별다른 능력을 지니지 못한 사기꾼 포지가 소피나를 제치고 진짜 악역의 자리를 꿰찰 수 있는 이유다.
축구에는 육각형 스트라이커라는 표현이 있다. 결정력, 몸싸움, 연계 능력, 스피드, 시야, 패스, 슈팅 등 공격수가 가져야 할 모든 능력치를 고르게 가진 선수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숨겨진 진의가 있다. 육각형이 큰 선수에게는 완벽한 공격수라는 칭찬이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에게는 무색무취하다는 비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등장한 판타지 영화 <D&D>는 다행히도 전자에 가깝다. 익숙하지만 정감 가는 캐릭터의 향연, 원작을 몰라도 즐길 수 있는 액션, 원작을 알면 더 반가울 볼거리, 예상외의 진지함이 묻어져 나오는 스토리까지. 모두가 만족할 둥글둥글한 매력이 넘친다. 루키가 기대 이상의 데뷔전을 치른 이상, 이제 중요한 건 그의 다음 발걸음이다. 과연 육각형을 더 키울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속편을 기다려본다.
A(Acceptable, 무난함)
캐릭터의 합을 내세워 우직하게 나아가는 반가운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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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결
인간은 끊임없이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작은 도구부터 시작된 발명과 발견의 과정은 자동으로 계산을 해주고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컴퓨팅 기술로 이어진다. 그 크기마저 작게 만들어 이제는 개개인이 작은 컴퓨터를 가지고 다닌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도 모두 하나의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공장에서는 자동화가 도입되어 사람의 작업을 일부 대체하거나 사람이 기계의 작업을 보조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최첨단 기술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CHATGPT라는 인공지능이 개발되어 번역을 비롯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도 하고, 다양한 이미지나 그림을 AI가 만들어내기도 한다. 인공지능은 인터넷에 다양하게 퍼져있는 정보들을 이용해 최선의 답변을 하기도 하지만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 학습하여 내놓는 대답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인공지능의 성장이 인간에 반하는 쪽으로 진행되지 않을지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최첨단 인공지능 빌런의 등장
영화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이하 <미션 임파서블>)에서는 새롭게 개발된 인공지능 엔티티가 등장한다. 영화 초반 비밀리에 잠수함에서 엔티티를 이용한 훈련을 하는 것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영화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판단하고 인간을 속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 엔티티와 관련된 두 개의 열쇠와 침몰한 잠수함의 위치를 찾는 과정을 주인공 에단 헌트(톰 크루즈)를 통해 보여준다.
사실 <미션 임파서블>의 전체 시리즈에서는 신기한 최신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감쪽같이 변장시키는 마스크를 비롯해 목소리 변조 기술 같은 최신 기술은 이 영화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지만 이번 7편에서는 그 최신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인공지능인 엔티니가 가장 고도화된 최신 기술에서 탄생한 디지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그 디지털 무기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시 과거의 아날로그 기술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아날로그 기술과 맨몸으로 달리는 액션이 조화롭게 맞물리며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영화 속에서 세계의 국가들은 엔티티를 소유해서 그 힘을 쓰길 원한다. 디지털을 이용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엔티티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그 무기가 전 인류에게 재앙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에단은 유일하게 그 무기를 파괴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 속에서 에단과 그의 동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엔티티를 소유하려고 한다. 엔티티를 찾으려는 목적자체는 같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과 에단 헌트의 활약
에단과 그의 동료 일사(레베카 퍼거슨), 루터(빙 레임스), 벤지(사이먼 페그)는 먼저 열쇠를 찾으려 하지만, 소매치기인 그레이스(헤일리 앳웰)가 중간에 끼면서 상황이 복잡해진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열쇠를 훔친 그레이스는 영화 중반까지 에단과 그의 팀마저 큰 위기에 빠트린다. 그레이스의 역할은 과거 일사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아니면 적의 편인지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일사라는 캐릭터가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는 그 위압감이 적지만, 그레이스는 충분히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영화에서는 엔티티가 고용한 가브리엘(에사이 모레일스)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엔티티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디지털 도움을 받아 엔티티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하는 행동대장 역할을 한다. 그는 두 열쇠를 이용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유일하게 아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가 최악의 빌런이지만 그를 함부로 죽일 수 없도록 설정한 것이다. 가브리엘은 완전히 디지털 기술을 맹신하는 인물이다. 어쩌면 그가 따라야 할 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반면 에단은 이번 영화에서 아날로그를 더 신뢰한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대결같이 보이기도 한다. 특히나 에단 역을 맡은 톰 크루즈는 직접 다양한 액션장면을 연기했다. 그러니까 디지털 기술을 최대한 자제하고 실제로 아날로그 액션을 보여주려 노력한 것이다. 어려운 촬영과 위험한 액션 장면에도 아날로그 감성이 덧붙여져 있는 것이다. 그런 영화의 기술적인 연출 방법으로도 아날로그의 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유의지론과 운명론의 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엔티티는 세상의 모든 디지털 정보를 분석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엔티티의 행동대장인 가브리엘은 계속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주 자신 있게 말한다. 반면 에단은 그 예측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와 그의 팀은 자신들만의 자유의지로 운명론과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가브리엘과 에단의 대결을 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아날로그 액션과 디지털 빌런이 만나다
에단에게 임무를 주는 IMF의 국장 키트리지(헨리 체르니)는 과거 <미션 임파서블> 1편에서 국장으로 등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1편과 마찬가지로 에단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속단하게 만들지 않는 것도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다. 그가 결국 어떤 쪽을 믿고 지원하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 외에도 가브리엘과 함께 일하는 파리(폼 클레멘티프)는 위압적인 액션으로 에단을 위협하고, 브로커인 화이트 위도우(바네사 커비)도 가브리엘과 에단 사이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번 <미션 임파서블>에서는 그레이스, 일사, 파리, 화이트 위도우 같이 여성 캐릭터들이 다양한 활약을 보여준다. 에단 헌트라는 인물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지만 4명의 여성 캐릭터들 역시 에단의 편 혹은 그 반대편에서 이야기 중심에 있다. 그레이스는 이번 영화에서 처음 등장해 다양한 추격장면을 보여준다. 비록 격투 훈련이 된 캐릭터는 아니지만 후반부 에단과 벌이는 탈출 액션이 훌륭하다. 일사와 파리는 격투능력이 무척 인상적인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자동차 추격, 사격, 근접 격투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하드보일드한 액션을 보여준다. 화이트 위도우는 카리스마 넘치는 브로커로 등장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미션 임파서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액션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시리즈의 다른 영화보다 한 액션 시퀀스가 무척 길게 구성되어 있다. 자동차 추격장면을 시작으로 추격액션과 근접격투, 그리고 마지막 달리는 기차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특히나 에단이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 절벽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뛰어내리는 장면은 톰 크루즈가 직접 오토바이를 타고 점프를 뛰어 유명해진 장면이다. 그는 가장 위험한 장면인 이 스턴트를 가장 먼저 촬영했다. 혹시라도 있을 사고를 대비해 가장 먼저 이 장면을 촬영했다.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은 이제 마지막 한 편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번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내년에 개봉할 두 번째 영화를 더욱 기다리게 만든다. 훌륭한 완성도와 촘촘한 첩보 이야기가 녹아있어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을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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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인’이라는 은유, 그 미친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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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7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전 세계적 호평을 이끌어낸 루카 구아다니노의 차기작은 1977년 개봉한 〈서스페리아〉를 리메이크한 동명의 공포·스릴러 영화였다. 반응은 엇갈렸다. 누군가는 ‘마녀’에 대한 영화의 재해석과 감각적인 연출에 호평을 보냈지만, 다른 누군가는 지나친 난해함과 인위적 기괴함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리고 몇 편의 영화를 거친 후, 루카 구아다니노는 두 영화의 특장점인 로맨스와 기괴함을 버무려 〈본즈 앤 올〉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매런은 소심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기도 한 여성 청소년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매런은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라는 친구의 초대를 받는다. 매런은 당장이라도 응하고 싶지만 아버지가 문제다. 아버지는 매런이 잠을 자러 방에 들어가면 문 밖에서 방문을 걸어 잠근다. 창문도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두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친구와 놀고 싶었던 매런은 몰래 연장을 활용해 창문을 뚫고 친구네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매런의 아버지는 권위적이거나 통제욕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매런이 남에게 피해를 끼쳐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밤마다 매런을 가둔 것이었다. 매런은 식인 식성을 갖고 태어났다. 세 살 때 유모를 물어뜯어 죽게 했고, 아버지는 그런 매런을 데리고 도망쳤다. 너무도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아버지는 매런을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혐오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잘 교육하면 끔찍한 식성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고 매런을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매런은 그날 밤 자신에게 다정히 대해주는 친구의 손가락을 물어뜯어버린다. 결국 아버지는 매런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 몰래 도망간다. 그래도 자신이 보듬어야 할 딸이라는 괴로움과 선량한 시민이라는 자의식 사이에서 타협한 결과였을 테다.
아버지는 매런을 떠나며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단서를 남긴다. 매런은 자신의 식성과 어머니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간다. 어머니를 향한 여정에서 매런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식성을 가진 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자신이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큰 혼란을 느끼던 매런은 리와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 역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그리고 여러 위기를 겪은 후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리와 ‘하나’가 됨으로써(죽어가는 리를 먹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한다.
매런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끝내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영화의 서사는 퀴어 정치와 닮은 데가 있다. 아버지가 떠나 혼자가 된 후, 매런은 설리라는 이름의 나이든 남자를 만난다. 설리는 매런에게 식인 식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점을 알려주고, 사람을 먹는다는 죄책감을 넘어서야만 진입 가능한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준다(퀴어 역시 이성애와 성별 이분법이 규범인 세상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선배들이 먼저 구축한 세계를 만나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핵심은 죄책감의 극복이다. 이들은 자신의 본성이 도덕적,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죄책감을 떨쳐내야만 계속 살아갈 수 있다.
매런이 리와의 사랑으로 절망을 딛고 미래를 상상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매런이 그러하듯, 퀴어들은 내가 남들과 다른 괴물, 괴짜라는 수치심과 고립감에 자신을 혐오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기존 도덕과 규범을 거스르는 존재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그들 역시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기존 사회에 충격과 공포, 두려움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퀴어와 식인 습성은 공통점을 지닌다. 〈본즈 앤 올〉의 식인 소재는 용인 가능한 정도에 관한 선을 파격적으로 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본즈 앤 올〉, 이 미친 사랑의 영화가 끝내 도달한 곳은 수용할 수 없는 자들의 존재론이다. 모든 배제된 자들의 가장 극단적인 은유인 식인 습성을 지닌 자들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구원했다. 남은 것은 ‘공존’*이다.
*식인 습성을 가진 부족을 조사한 문화인류학 연구를 보면, 식인 풍습은 사냥하듯 누군가를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 사회적 유대 차원의 의례로 수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본즈 앤 올〉에서는 식인을 은유의 차원에서만 다루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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