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8-30 09:51:51
혼자이기를 택해야 했던 이의 내면을 들여다보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리뷰
"근데 사실 저도 혼자 밥 못 먹는 것 같아요.
혼자 잠도 못 자고 버스도 못 타고 혼자 담배도 못 피우고.
사실 저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척 하는 것뿐이지."
홍성은 감독의 <혼자 사는 사람들>(2021)은 1인 가구 비율이 31.7퍼센트(2020,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가 된 세태를 중심으로 거기 속한 인물들의 군상을 조명하는 영화가 아니라 혼자 사는 사람(여성)이 마주하는 여러 종류의 불안감과 1인분의 삶을 소화해내느라 분투하는 이의 외강내유한 내면을 살피는 작품이다.
노아 바움백의 영화 <프란시스 하>(2012)에 대한 김혜리 기자의 평문 중 "일상을 열심히 전시한다고 그 사람이 반드시 자랑할 만큼 인생을 만족스러워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족하려고 열심히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라는 문장에 오래 머문 적 있다. 어쩌면 일상의 많은 부분들을 혼자 해결하는 사람에게도 이것은 비슷한 종류일 것 같다. 가령 혼자 식사를 하는 일은 그것이 좋거나 편해서이기보다 타인과의 식사가 불편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수 있다는 뜻이다. 혼자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이 불편해서.
'진아'(공승연)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곁에 사람이 아닌 기계적 장치로 '혼자가 아닌 것처럼 혼자 보내기'를 행한다. 거기에는 주로 이어폰과 같이 자신과 타인의 영역을 구분하는 수단이 자리 잡는다. 점심시간마다 홀로 찾는 국숫집에서, 혹은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진아'는 예능이나 먹방을 보고 있다.
그러니, 식사를 같이 하자고 살갑게 따라오는 신입 직원 '수진'(정다연)이나 자신에게 신입 교육을 떠맡기는 사수이자 팀장 '해나'(김해나)나 교회에 나오라고 별 용건 없이 전화하는 아빠(박정학)는 '진아'에게 불편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실도 아닌 방 안에 모든 살림을 밀어 넣은 '진아'가 혼자의 일상을 간신히 살아내는 동안 영화 안에서는 조금씩 그 일상을 뒤흔드는 일들이 일어나고, '진아'의 태도에도 일말의 변화가 생겨난다. 그가 누군가에게 "잘 가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라고 어떤 순간에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불과 90분밖에 되지 않는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은 섬세한 연출과 각본으로 (1인 가구라는 삶의 형태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혼자인 채로 사는 이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자신과 타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혹은 혼자이기를 택해야 했던 마음을 들여다본다. 어떤 장면에서 '진아'는 더 이상 이어폰을 꽂고 있지 않다. 그건 삶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의 일상을 좀 더 잘 보내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해나가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 '김동진'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에서 업로드한 게시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콜 (The Call) (2020), 광기 어린 스릴러, 질주하는 사이코드라마
콜 (The Call) (2020)
광기 어린 스릴러, 질주하는 사이코 드라마
콜(The Call), 광기 어린 사이코 드라마의 탄생
2020년을 한 달 남겨두고, 발전 없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들을 향해 강력한 펀치 한 방을 날리는 신선한 스릴러 한 편이 스크린에 등판했다. 언젠가부터 뻔해진 충무로의 흔한 남자 주연 캐스팅 하나 없고, 한 가지 장르에 정착하지 못하는 애매모호함, 지겨움의 끝을 연발하는 신파도 모두 한꺼번에 갖다 치웠다. 그 대신 두 명의 여성 캐릭터들을 앞세워 처음부터 끝까지 휘몰아치는 서스펜스로 단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지 못하는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자질구리한 스토리도 인물도, 장르의 분위기를 해치는 뜬금없는 코미디도 모두 없다. 오로지 '전화'를 매개체로 벌어진 서스펜스 단 하나에만 집중한다. 스피디한 연출로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이충현' 감독의 힘과 배우들의 시너지가 만들어낸 훌륭한 합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운명 같은 전화벨 소리,
잔인한 폭주와 악연의 서막
1999년의 '영숙(전종서)'과 2019년의 '서연(박신혜)'은 같은 집에 있는 전화를 매개체로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채 연락이 닿게 된다. 말도 안 되는 판타지로 시작된 둘의 인연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서연'은 '영숙'에게 99년 이후에 벌어진 사건들, '영숙'이 좋아하는 '서태지'의 음악들을 들려줬고, 무당인 '신엄마(이엘)'에게 억압 받는 '영숙'에겐 '서연'과의 통화가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숨통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영숙'이 살고 있는 99년도에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서연'이 살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고, '영숙'은 몰래 집을 빠져나와 '서연'의 아버지의 죽음을 막는다. 하지만, 시간의 역학을 건드리기 시작한 이 사건이 두 사람의 인연을 파국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시발점이었다. 두 사람이 바꾼 과거로 인해 '서연'은 현재 부모님과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부잣집 딸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서연' 역시 '영숙'에게 미래에 다가올 일을 알려줘 '영숙'의 죽음을 막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영숙'이 자신을 죽이려던 '엄마'를 살해하게 되고,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시공간을 초월한 두 사람의 우정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세상 밖으로 나온 사이코패스,
광기 어린 질투에서 시작된 파국
'엄마'를 죽이고 자유를 찾은 '영숙'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는 사이코패스의 광기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느새 가족과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느라 자신에게 소홀해져 버린 '서연'에게는 질투와 살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영숙'의 살인 행위를 나중에서야 알게 된 '서연'은 처음으로 '영숙'에게 반기를 들며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고, 이는 '서연'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던 '영숙'의 분노를 터뜨리는 기폭제가 되어 '영숙'은 본격적으로 '서연'의 주변을 잔혹하게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과거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서연'과 자신의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 폭주하는 '영숙'의 싸움. 어느 한 쪽이 죽어야만 끝날 것 같은 두 사람의 시간을 초월한 악연은 끝내 처절한 파국으로 이어진다.
‘전종서’의 재발견, 미친 연기력 폭주
<콜>의 연출과 스토리, 출연 배우들의 호연 모두 훌륭하지만 이 작품을 이끄는 힘의 8할은 '전종서'에게 있다. 한국 영화사에 유례없는 여성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캐릭터를 연기하며 혼신을 다해 미친 연기력을 쏟아냈다. 각성하는 순간부터 보여주기 시작한 '영숙'이라는 캐릭터가 주는 공포와 긴장감, 그리고 후진 없이 질주만 하는 공격적인 모습이 주는 임팩트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콜>은 '전종서-박신혜'의 호흡보다는 오로지 '전종서'의 약이라도 빨은 듯한 광기 어린 연기력에 시선이 쏠린다. <버닝>에서의 신비로운 소녀는 온 데 간 데 없이 살아지고, 당장이라도 상대방의 목숨을 앗아갈 것 같은 맹수 같은 눈빛을 지닌 사이코패스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솔직히 중반부부터는 강강강강만 있는 캐릭터라 과유불급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전종서'의 연기력이 그러한 우려들을 곧바로 불식시킨다. '써니'에서 '천우희'의 신들린 연기력을 접했을 때의 느낌을 9년만에서야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
최고의 명장면은 20년 전의 '서연'과 '아빠'가 '영숙'의 집을 찾아왔을 때, '영숙'이 뒤돌아 살아 있지도 않은 '엄마-!'를 부르며 스산한 미소를 띠는 장면이다. 배우의 표정 변화만으로 공포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속도감 있는 전개, 긴장감 넘치는 연출
비현실적인 스토리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간 중간 설정에 대한 구멍을 발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스피디한 전개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넘치는 연출이 영화의 허점들을 금세 메꿔준다. 극적인 장면에 사용하는 음악의 활용도 굉장히 신선했다. 대표적으로 '영숙'이 처음 집안에서 탈출했을 때, 슬로 모션과 함께 강렬한 록 음악을 삽입하며 고삐 풀린 연쇄살인범의 새로운 시작을 공격적으로 알리는 효과를 줄 수 있었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아무래도 시공간의 변화가 많은 작품이다 보니 신비로움을 유발하는 형태로 CG 기법을 많이 사용했는데, 가진 기술과 자본력에 비해 욕심을 부린 게 느껴진 부분이었다. 판타지스러움을 유발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극중 CG 장면은 극히 일부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야기한 비극
'서연'과 '영숙'의 인연이 어긋나게 된 계기는 '서연'이 '영숙'으로 하여금 과거 사건의 결과를 바꾸게 한 것에서 출발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사람의 통화는 단순히 과거의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고, 이 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우정에 균열이 갈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과거와 현재를 바꾸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서로의 행동이 각자 다른 공간에 있는 자신에게 점점 영향을 주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당연히 깨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연'이 시공간의 역학이 주는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다가오는 비극의 그림자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의 '영숙'에게 다가올 미래를 알려줄 수 있는 '서연'과 달리 '서연'은 과거의 '영숙'의 행위로 현재의 자신에게 생길 변화를 알 방법이 없다. 제 아무리 '서연'이 발버둥쳐 봤자 무조건적으로 '서연'이 불리한 입장인 것이다.
예상을 뒤엎는 스토리, 묵직한 펀치 한 방
어찌 보면 익숙한 스토리다. 전화를 매개체로 과거와 현재의 인물이 교신을 한다는 것은 드라마 <시그널>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익히 봐온 소재다. 그렇기 때문에 <콜> 역시 전개상 예상 가능한 스토리가 상당 부분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콜>은 익숙한 소재가 주는 예상을 뒤엎는 스토리를 부분 부분 첨가시켰다. 극 초반부에 '영숙'에 대한 학대를 일삼는 무당 '신엄마'는 누가 봐도 악역 같았지만, 따지고 보면 '영숙'의 사이코패스 기질을 알고 이를 억제시키기 위해 자신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고, 악령에게 씌었다는 프레임을 '영숙'에게 걸어놓은 셈이었다. 중간 중간 복선들을 깔아 놓아 '영숙'이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암시하긴 했지만, '신엄마'의 행동들은 분명 처음부터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은 아니었다.
결말부 역시 예상을 뒤엎으며 한국 영화의 고질병과도 같은 신파 엔딩을 겨냥한 묵직한 펀치 한방을 날려준다. 1999년 '영숙'과 '서연의 엄마(김성령)'의 혈투, 그리고 2019년 '서연'과 '영숙'의 싸움에서 극적으로 '서연의 엄마'가 몸을 날려 '서연'을 구하고, '영숙'의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함께 죽은 줄만 알았던 '서연의 엄마'가 마지막 시퀀스에 등장하며 '역시 어머니의 힘은 강하다'와 같은 K-영화의 전통적인 메시지를 날리며 갑자기 용두사미로 끝나는 듯한 실망감을 던져준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내려가는 순간, 멀티 엔딩으로 마지막 반전을 선사하며 통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어찌 보면 한국영화의 피날레가 지향해야 할 점을 알려줬다고도 볼 수 있는 엔딩이었다.
극장 개봉 실패에 대한 아쉬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극장개봉에 실패한 작품들이 넷플릭스로 향하고 있는 가운데, <콜>은 <사냥의 시간>에 이어 올해 두번째로 넷플릭스 단독 공개를 택한 국내 영화였다. 혹평 일색이었던 <사냥의 시간>과 달리 <콜>은 오히려 이 작품을 극장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크나큰 아쉬움을 남긴다. TV 스크린으로 봤을 뿐인데도, <콜>이 가져다 준 전율은 대단했고, 수작을 만났다는 흥분이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는다. 이 작품이 '이충현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라는 것 자체도 매우 충격을 준 사실이었다. 극장 개봉 실패는 아쉽지만, <콜>의 제작진과 배우들이 보여줄 앞으로의 모습에 상당한 기대를 걸 수 있을 것 같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겔겔겔스타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야?
인간은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다양한 종족이 생겨나고 국가라는 집단이 만들어지면서 인간은 같은 인간을 속이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 왔다. 그건 역사적으로 무수히 벌어진 일이고, 거짓과 정치적인 전략이 늘 존재해 왔다. 그래서 인류는 그런 위험성을 대비하고 방어할 수 있는 정보들을 전달해 왔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진심으로 믿는다. 그 싱대방을 위해 어떤 것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인간들끼리 가족이 되거나, 특정 집단을 형성하여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서로 공통점이 있거나 같은 생각을 하는 부류다. 그런 걸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인간들은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는 첫 번째 사례와 충돌한다. 인간은 믿을 수도 있고, 믿을 수 없기도 하다.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결론인가.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영화는 지난 세 편의 시리즈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100년 이상이 지난 시기를 다룬다. 인간은 지능이 거의 없는 존재로 소수만 살아남아있고, 지능을 가지게 된 유인원이 언어를 구사하면서 생태계의 최강자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에게 인간이란 지능이 낮은 동물이면서 믿을 수 없는 존재여서 접근을 피하고 있는 존재다.
첫 번째 감정 - 노아의 의심
영화의 주인공 노아(오원 티그)는 한 부족의 젊은 청년이다. 성인식을 해야 할 정도로 성장한 노아와 친구들은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받는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높은 절벽 위에 있는 독수리 둥지에서 알을 하나씩 가져온다. 노아와 친구들은 맨 처음 등장부터 높은 절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특히나 노아는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독수리 둥지까지 올라간다. 무사히 알을 가지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노아는 인간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이후 인간을 추적하던 다른 유인원 집단에 의해 부족의 공간이 모두 파괴되고 만다.
부족의 대부분이 납치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기절했다 뒤늦게 깨어난 노아는 곧바로 다른 부족원을 찾아 나선다. 이 과정에서 노아는 다른 유인원 라카(피터 메이컨)와 인간 메이(프레이아 앨런)를 만난다. 처음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난 노아는 메이를 무척 경계한다. 노아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인간은 위험하고 교활해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정보는 부족의 나이 든 장로로부터 교육받은 정보이고, 그것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과의 첫 만남부터 의심으로 시작한 노아는, 메이가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지능이 있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더 크게 의심하게 된다. 물론 노아의 부족 사람들이 갇혀있는 곳과 메이가 가고자 하는 곳이 같고 목적이 같기에 힘을 합하지만, 노아의 마음속에 자리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의 말미 노아와 그의 부족에게 한 메이의 행동은 노아의 의심을 더더욱 부정적인 쪽으로 만들어간다. 이 영화 내내 노아의 의심은 조금 작아질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 감정 - 메이의 두려움
그럼 반대로 유인원인 노아를 보는 메이의 감정은 어떨까. 메이의 진짜 생각은 영화 후반부가 되면서 더 크게 드러나게 된다. 영화 초반 메이가 처음 노아와 라카의 앞에 등장했을 때, 메이는 자신이 지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숨겼다. 지능이 낮은 존재처럼 행동해 먹을 것을 얻어내고, 따뜻한 담요까지 얻어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준다. 그렇게 지능을 가진 유인원들이 안심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금씩 메이는 자신의 똑똑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위기가 더 커지고 머리를 써야 하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온다. 바로 ‘노아’ 다. 마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주인공 시저가 유인원으로써 처음 입 밖으로 내뱉었던 ‘NO'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메이는 유인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거의 멸망직전에 있고, 인간보다 강력한 존재가 된 유인원은 인간에게 믿을 수 없는 존재다.
메이는 노아와 그 부족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은 모든 유인원들을 향하고 있다. 그 두려움은 메이가 가진 비밀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노아가 나쁘지 않은 유인원의 리더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그 두려움을 거두지 못한다. 그녀는 노아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권총을 숨긴 채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노아와 그 부족을 속였다. 이 영화 안에서 메이는 그 두려움에 완전히 종속된 인간이라고 느껴진다. 그 유인원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인간이 가진 지식과 기술들을 완전히 숨기는 행동으로 귀결된다.
세 번째 감정 - 프록시무스의 욕망
이 영화의 빌런인 프록시무스(케빈 듀런드)는 적어도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안에서 만큼은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목표가 뚜렷하다. 바다 옆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사용했던 벙커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여러 지식과 정보 그리고 무기들을 차지하는 것이 목표다. 그의 욕망은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한 번쯤 욕심낼만한 것들이다. 그는 영화에 등장해서 다른 유인원들을 향해 이야기한다. 힘을 합치면 강하다. 그 말을 토대로 조금은 강압적이지만, 다른 유인원들의 힘을 이용해 낸다.
그 말은 사실 과거 시저가 살아있을 때 유인원 집단이 가진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일종의 정치적 용어다. 과거 시저의 말이 모든 유인원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프록시무스의 그 말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의 목표대로 벙커를 열어 인간의 지식을 이용하게 되었을 때, 다른 유인원들도 잘 살게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프록시무스의 몫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프록시무스는 두려움과 의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모든 유인원을 통제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고, 지능이 있는 인간들까지 차지함으로써 못하는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타입인 그는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적어오 이 영화 안에서 목표가 드러나는 건 프록시무스와 노아뿐이다. 프록시무스는 자신의 욕망, 노아는 부족의 부활이 그 목표다. 개인의 목표와 집단의 목표가 충돌하고, 그것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 메이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건 이 영화가 끝까지 숨기다가 이야기가 끝나기 직전에 털어놓는다. 그건 인간의 생존욕망과 메이의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표출된다. 그 모든 설명을 보고 나면 맨 처음 메이가 등장했을 때부터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목표 역시 노아와 마찬가지로 인간 부족의 부활이다. 당연히 유인원 노아와 인간 메이의 목표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다시 시작되는 이 시리즈의 동력은 바로 그 목표의 충돌이다.
영화는 끝나기 전 다시 묻는다.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질문을 더한다.
‘유인원과 인간은 같이 살아갈 수 있는가’.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그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아마도 다음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놓을 것 같다. 이 영화를 연출한 웨스볼 감독은 영화 <메이즈러너> 3부작을 완성하면서 액션이나 CG연출을 매끄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도 수많은 유인원들의 모습을 화면에 자연스럽게 펼쳐놓는다. 특히나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이 바닷가 절벽에서 펼쳐지는데, 이 영화에 딱 맞는 완벽한 로케이션이었다. 노아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상승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절벽 그리고 바다에서 들이치는 수많은 난관인 거센 파도, 댐의 붕괴로 인한 홍수는 노아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화면으로 펼치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야기 구조도 노아가 한 부족을 살리는 이야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서사의 구조에 그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는 건,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다. 영화관람을 모두 마친 관객에게 영화는 묻는다. 인간을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철학적 질문을 블럭버스터의 형식을 빌려 최첨단의 기술력으로 훌륭하게 던지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
- 프로이트, 루이스도 불완전한 사람이었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S. 루이스도 우리와 같은 불완전한 사람이었어!’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두 인물이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설전을 통해 밝혀지는 이들의 민낮에 집중한다. 지난한 삶과 사회적 편견, 그리고 죽음의 공포 앞에 너무나 나약하고 불완전한 두 지성의 모습은 낯설음과 측은함을 오고가며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흡사 전쟁을 앞둔 이의 모습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 9월 3일, C. S. 루이스(매튜 구드)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프로이트(앤서니 홉킨스)의 초대로 런던에 위치한 그의 집을 방문한다. 도착 전 거리에서 만난 프로이트 딸 안나(리브 리사 프라이스)가 건투까지 빌 정도이니 세기의 대결이나 마찬가지. 무신론자인 프로이트와 유신론자인 C.S. 루이스는 만나자 마자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토론을 펼친다. 전혀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의 거리는 수면 아래에 있던 각자의 죽음이란 공포를 내보이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꿈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실화처럼 보이지만 실제 둘은 만난 적이 없다. 원작인 연극 <라스트 세션>을 집필한 희곡 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은 M. 니콜라이의 저서인 ‘루이스 vs. 프로이트(THE QUESTION OF GOD)’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했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이 작품의 특성상 극 중 설전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쳐내며 토론의 장보다는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C.S. 루이스를, C.S. 루이스의 관점에서 프로이트를 바라보고 탐구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프로이트는 C.S. 루이스를 환자처럼 대한다. C.S. 루이스가 앉은 의자가 환자들이 앉는 의자라고 하는 등 보기보다 복잡한 삶과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가 된 이유는 캐묻는다.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얻은 공포증은 물론, 전장에서 죽은 친구의 부탁으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사는 이유, 그리고 신을 믿고 성서를 연구하는 이유 등 무신론자인 프로이트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를 만난다.
반대로 C.S. 루이스는 기독교 변증론자로서 인간의 본성과 신앙을 함께 연구하듯 ‘꿈의 해석’을 내놓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를 탐구한다. 과거 자신과 남동생을 돌봐 주지 않았던 아버지의 존재, 모든 인간은 동성애적 관점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말하지만,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딸 안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 신은 믿지 않지만, 온갖 신을 모시는 아이러니한 태도 등 학자의 관점에서 그의 이론의 시작점과 실제 삶의 오류를 발견하는 데 중점을 둔다.
감독은 이런 두 인물의 극 중 위치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이들의 어둡고 다른 면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지만, 그들 또한 우리처럼 오류를 범하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들의 민낯을 더 견고하게 다지는 건 바로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죽음의 공포다. 신을 믿던 안 믿던 간에 죽음의 공포는 두 인물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프로이트는 나치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했고, 전쟁의 공포와 구강암의 고통은 날로 심각해진다. C.S. 루이스 또한 참전 당시 얻었던 공포와 전우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등 그에게 죽음은 먼 일이 아니다. 이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둘은 인간에게 고통과 악은 왜 존재하는지, 신이 있다면 전쟁 등 참혹한 세상을 방관하는지, 죄는 무엇이고, 사랑은 존재하는지 등 날이 선 대화를 통해 우리가 모르는 삶의 진리를 파헤친다.
서로 극단에 위치한 이들이 만나 설전을 벌이는 이야기는 안소니 홉킨스, 조나단 프라이스 주연의 <두 교황>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다. 이 영화 또한 신을 섬기는 이들임에도 실수를 하는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공감과 위로를 전했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또한 <두 교황>과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지만, (안소니 홉킨스가 나온다는 점 등) 생각보다 유쾌한 유머가 적다.
원작인 연극에서도 유머는 첨예한 대립과 논리 정연한 토론에 무거워진 공기를 환기시키는 작용으로서 큰 역할을 했는데, 영화에서는 그 부분이 약하다. 두 인물에 대한 관심도가 많지 않다면 이들이 나눈 내용 자체가 딱딱하게만 느껴지는데, 실없는 농담과 유머가 적어 다소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창과 방패를 휘두르는 듯한 이들의 설전은 단순한 영상 구성에 의해 긴장감이 덜하다. 플래시백을 통해 두 인물의 심리와 전사를 보여주는 건 중요하지만, 토론이 고조되어 진검승부가 이뤄지는 찰나에 등장하기 때문에 몰입감을 저해한다.
그럼에도 이 110분의 토론을 계속해서 보게 되는 건 두 배우의 열연 덕분이다.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는 말이 필요 없다. 극의 심도를 조율하는 듯한 그는 연기 텐션을 통해 분위기를 좌지우지한다. 특히 3주 후 운명을 달리하는 가운데에서도 지적 대화와 토론을 통해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프로이트의 열정적인 모습, 딸 안나의 성정체성에 흔들리는 그의 불안한 눈빛은 빛난다. 매튜 구드의 이에 지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기억에 함몰되는 가운데에서도 신을 믿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심지 굳은 C.S. 루이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우린 오류를 오가며 온전한 진실을 발견한다.” 극중 프로이트가 C.S. 루이스에게 남긴 말이다. 이 세상 완전한 것은 없다는 것처럼, 극 중에서 만난 두 지성은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와 다른 게 하나 있다. 바로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했다는 것. 온전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목적 아래 이들이 행한 마지막 행동(클래식 듣기, 컴컴한 밤 지켜보는 시선)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사진제공: ㈜트리플픽쳐스
평점: 2.5 / 5.0
한줄평: 첨예한 구강 액션이 빠진 심심한 110분 토론
-
- [DMZ Docs]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빅 데이터의 축 The Axis of Big Data
감독: 저우타오 Zhou Tao
러닝타임: 58분
시놉시스: 〈빅 데이터의 축〉은 중국 귀주성 산악 지대에 위치한 대규모 데이터 센터의 주변 환경을 탐험한다. 이 영화는 데이터 센터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이 시설을 품고 있는 산악 지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풍경의 본질을 포착하며, 데이터 센터 인근과 그 너머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
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매일 인공지능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을 듣곤 한다. 특이점에 도달했다, 학습하지 않은 내용을 스스로 깨달아 새로운 능력을 함양했다,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지배될 것인가, 기타 등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인공지능이라면, 그 재료는 아마 데이터가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한다. 빅 데이터는 그 이름처럼 어마어마한 데이터일진대, 그 데이터를 보관하는 데이터 센터 역시 엄청난 전력을 소비한다.
2022년 카카오 데이터 센터 화재 사건을 떠올려 보면, 데이터가 인간을 얼마나 지배하는지를 알 수 있다. 고작 카카오가 잠시 멈추었을 뿐인데 큰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스러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금, 누군가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최첨단을 달리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태어나서 스마트폰이라고는 만져본 적이 없다. 이는 증기기관이 발명되었는데도 걸어서 또는 가축을 타고 이동했던 사람들이나, 전기 시스템이 만들어져도 촛불을 켜고 살던 사람들이나, 컴퓨터의 전원도 켜 본 적 없는 사람이 존재함과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 괴리가 이상하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세대와 아예 그것을 만져본 적도 없는 세대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저우타오가 카메라에 담은 세계도 비슷하다. 데이터 센터 주변의 풍경을 섬세하게 탐방한다. 데이터 센터의 풍경으로 시작한 시선은 데이터 센터 밖을 향한다. 카메라는 가치 판단이나 평가 없이 그저 귀주성의 사람과 자연, 동물을 따라 횡단한다.
나무토막과 포대를 든 노인, 등이 굽은 노인, 허수아비, 일하는 노인, 사진을 찍는 관광객, 담배를 피우는 남자, 우비를 입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 가족, 잡초를 태우는 남자, 물가의 닭, 물고기, 흑염소....... 패치워크처럼 기워진 풍경이다.
푸른 농촌의 풍경과 희뿌연 안개, 그 속에서 점멸하는 데이터 센터의 불빛이 기이한 이질감을 만들어낸다.
챗GPT 등 인공지능은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의 시늉을 한다. 물어보는 말에 재깍 대답하고, 답이 풀리지 않는 문제의 답을 알려 준다. 이제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그림을 그려 달라 하면 그림을, 노래를 만들어 달라 하면 노래를 만든다. 모르는 문제도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연 기계만의 일일까. 모든 것의 뒤에는 사람이 있다. 챗GPT의 데이터를 걸러내는 작업은 케냐의 노동자가 시간당 2달러도 받지 못하고 처리했다. 최첨단 데이터 센터가 필요한 줄은 알지만, 그 데이터 센터가 건설된 주변에 마을이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우리가 누리는 혜택은 어쩌면 누군가를 착취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쉽게 잊힌다.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좋았던 부분은, 비극장 상영 프로그램이었다. <빅 데이터의 축>은 극장 상영도 했지만, 상영관이 아닌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빅 데이터의 축> 역시 레이킨스몰 2층의 전시공간에서 상시상영되어 오며가며 관람하게끔 설치되었다.
다큐멘터리가 어떠한 서사나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의 균열, 일상적 풍경에서의 낯설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지점에서부터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
상영일정
9/28(토) 17:30-18:28
9/30(월) 14:00-14:58
그 외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9/26-10/2) 동안 레이킨스몰 2층 마리나갤러리 연속 상영
-
- 섬세한 화법은 어디 가고 두루뭉술 넘기기로?
청천벽력
이 영화의 주인공은 승무원 정인(배수지)이다. 멀지 않은 미래. 끔찍한 사고가 있기 전까지 정인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던 남자친구 태주(박보검)가 사고가 일어난다. 뜨겁게 사랑했던 두 사람. 혼자가 됐다는 외로움에 정인은 '원더랜드' 서비스를 알아본다. 원더랜드 서비스는 간단하다. 일종의 멀티버스에 사랑하는 사람을 구현시켜 그 인물과의 영상통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서비스를 관리하는 사람은 (정유미)와 (최우식)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고고학자 바이리(탕웨이)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딸을 잃은 바이리. 바이리는 딸이 살아있다는 일념 하에 원더랜드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간절한 그리움에 있는 사람들.
SF적 상상력으로 만들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건 질문이다. 어떤 질문? 이 영화가 나누는 세 가지 챕터에 따라 각기 다르다. 첫 번째 질문은 정인과 태주의 서사에서 읽을 수 있다. 기본적인 설정. 정인과 태주는 서로 알콩달콩 예쁜 연애 중이었다. 하지만 사고가 나 태주가 식물인간이 된다. 정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원더랜드를 통해 가짜 태주를 만든다. 이 말은 곧 ‘사랑하는 사람을 같은 존재로 대체하겠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네’ 같은 노래가사 같은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람의 빈자리를 그 사람으로 메울 수 있을까?라는 사랑의 난제에 도전한 것이다. 이 <원더랜드>는 전적으로 영화 같은 정인의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 글쓴이 생각엔 이 질문 던지기가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다. 왜? 이 질문이 정인의 입장에서 딜레마가 되는 데 있어 SF적 상상력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진짜/가짜 태주 사이의 갈등은 (보통의 sf가 다루는) 철학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뭐가 진짜 사랑이야?’라는 로맨스적인 요소가 된다. 이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가 로맨스, SF장르 모두를 꿰뚫는 좋은 수가 됐다. 인간을 복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와 사랑을 같은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를 동시에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덕에 <원더랜드>는 이 장르를 고른 당위성을 어느 정도는 챙겼다.
두 번째 질문. 이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해리와 현수의 서사로 읽을 수 있는 질문이다. 이 두 인물은 이 영화에서 돋보여야만 하는 캐릭터다. 왜? 이 두 사람의 속성 때문에. 이 인물들을 거칠게 말하면 '복제인간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 설정은 해리와 현수가 영화 안의 인물들의 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설정이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원더랜드 안의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키면 두 캐릭터가 해결책을 고심하는 장면이 있고, 이 부분은 두 사람의 서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이런 행보가 윤리적으로 옳은가?라고 질문한다. 또 인간이 인간에게 개입할 수 있는 선이 실재하는가?라고도 묻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질문을 구현하는 것이 할머니와 손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이 연애하는 것을 그릴 수도 있고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애로사항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굳이 이 사건을 골랐다. 할머니와 손자 간의 사건에 개입하는지를 고민하는 모습을 중요하게 보여준다. 이 고민은 영화 안에서 강조되다 해리와 현수가 후반부에 고른 선택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데,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인간의 내면에 도전하는 난제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장르를 잘 골랐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세 번째 질문. 바이리의 서사에서 읽을 수 있는 질문은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을 정말 사람이라고 인식해도 될까?'에 대한 부분이다. 바이리는 죽은 사람이다. 해리와 현수가 프로그래밍을 통해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가상세계를 뒤흔드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뒤흔든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영화가 정말 중요하게 밑줄 그은 부분은 딸 바이지아의 리액션이다. 바이리만 일방적으로 뒤흔들지 않는다. 바이지아도 이 행보에 호응하는 형식으로 플롯이 짜여 있다. 두 사람이 선을 직접 넘어드려고 노력한다는 것. 이 의미는 영화가 이 선에 대해 응시하고 싶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더 나아가 바이리와 함께 등장하는 성준(공유)의 캐릭터는 이 선 그 자체를 암시하는 인물이다. 후반부에 이 인물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 인물의 동선으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가로지르며 이야기를 연결하고 있다. 이 SF의 장르적인 특성을 살린 선택은 두 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가족드라마적 특성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바이리라는 인물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SF적 상상력으로 구현하면서, 장르가 가진 윤리적인 부분도 건드리는 것이다.
맥 빠지는 전개
하지만 영화의 축을 이루고 있는 세 이야기 전부 뒷심을 보여주지 못한다. 첫째. 태주와 정인의 로맨스와 관련된 부분에는 각본 상 결함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태주가 오랜 시간 동안 식물인간이었다고 하는 건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설정에 지나치게 기대 영화의 무리수로 돌아오는 장면이 몇 있다. 가령 영화 안에서 정말 태주의 행동인지 아닌지 관객에게 묻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태주라는 인물의 추후 행보가 가능한가?라는 점에서도 의문이고 이게 두 사람의 사랑과 뭔 관련이 있는가?라는 점에서도 단점으로 돌아온다. 정인의 내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줌과 동시에 더 나아지는 것을 애초에 포기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인물의 방향성을 초반부터 딱 정해놓고 외부가 끼치는 영향을 전부 차단했기 때문에, 정인이는 옛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인물인 것처럼 묘사된다. 두 사람의 로맨스가 여운을 만들며 사랑영화가 가진 힘을 보여줘야 하는데 '쟤 왜 저래'만 남는 것이다. 로맨스와 SF의 공존에 대해서만 연구하고 정작 자세한 부분을 채우지 못한 패착이 느껴졌다.
둘째. 바이리와 현수/해리의 서사에 관한 부분이다. 두 서사는 결합하지 못하고 서로 붕 떴다. 이 부분은 다양한 예를 들어 쓸 수 있겠지만 글쓴이는 바이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시놉시스에도 언급됐듯이 바이리는 복제인간이다. 실제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캐릭터가 실제 인간과 차이점을 더 부각하는 연출이 이 영화의 핵심과도 이어진다는 의미다. 왜? 실존이라는 조건이 아니더라도 가족의 유대감을 ai가 구현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토의를 자유롭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이 캐릭터는 인간과 다를 바 없어요'라고 강조하고 있는 듯했다. 이건 두 사람 현수/해리에게 몰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왜? 이 연출은 영화가 가진 모순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AI로 만든 세상이라고 공언했는데 이 인물이 이렇게 행동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프로그래머가 만든 프로그램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현실성이 있을까? 글쓴이가 이런 의문이 든 이유는 감독이 '바이리의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라고 생각한다. 그 무엇보다 바이리의 숭고한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오히려 현수와 해리의 개성을 납작하게 만드는 악수처럼 느껴졌다.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윗문단의 연장선상에서 성준, 해리, 현수의 캐릭터 세팅은 끝마무리가 이상하다는 점에서 과연 기획의도를 잘 살렸을까? 의문이 들게 만든다. 우선 해리와 현수는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다. 영화 안에서 뭐 이렇다 할 그게 없다. 큰 문제는 '이렇다 할 그게 없다'는 점에서 온다. 이 둘은 가족이 원더랜드와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실제로 분량도 크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나열에서 그치고 플롯의 선후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후반까지 가면 이 무의미한 설정들이 더 크게 다가오는데, 영화 안에서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남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 <원더랜드>는 그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대사를 넣기도 했다. '우리 잠깐만 사귈래요'같은 대사가 있었는데 이 문장이 이후에 두 사람 간의 관계에 유효타를 끼치지도 못했으며 현수와 해리 사이의 로맨스의 ㄹ자도 없었다는 것이 부실한 서사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악수였다.
글쓴이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단점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성준 서사다. 이 영화에서 성준이가 왜 필요했을까? 글쓴이는 단지 바이리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서 단지 바이리의 존재만을 부각하기 위한 것 말고는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왜? 성준이 바이리에게 그 어떤 존재도 되지 못한다. 대신 다른 주인공과의 공통점은 있는데, 이 공통점도 이야기에서 핵심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설정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인물이 겉돈다. <가족의 탄생>에선 1인 2역으로 구현하던 캐릭터의 생동감이 본작 <원더랜드>에선 죽은 것이다.
조악한 시각화
이야기에서 몰입감을 잡지 못하다 보니 CG의 상태에 대해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사실 극후반부 전까지는 시각화를 따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이 영화는 윤리적인 문제를 장르적인 특성과 결합시켜서 관객에게 던지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비판하고 싶다면 작품이 던지는 화두에 대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라고 맞는 게 적절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 영화가 그 부분은 나름대로 제 구실을 하고 있으니 최무성 배우의 캐릭터가 속해있는 세계가 풍기는 이질감이나 가짜 태주가 있는 우주의 어색함을 일일이 따지지 않는다면 보는데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시각화의 퀄리티가 영화의 엔딩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글쓴이가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든 생각. <가족의 탄생>과 지나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가족의 탄생>의 엔딩을 생각해 본다. 그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가족의 탄생>이 그린 가족 구성원과 유사하게 닮아있다. 그리고 엔딩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그 영화의 플롯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탐탁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정을 주고받는 가족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 <원더랜드>는 뭘 추구했을까? SF와 가족드라마의 접합을 시도했다. 어떻게? <가족의 탄생>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핵심은 '어설프게'라는 점이다. 이야기의 구조를 엔딩에서 집약시킨 것도 아니고, 어설픈 VFX로 시각적인 설득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며 가족영화로서의 감동도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엔딩에서의 사건이 치밀한 핍진성을 통해 구현된 것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1차원적으로 보면 그 사건 자체는 합리적이지만 인물의 내면을 촘촘하게 묘사하지는 못했다는 점과 성준의 동선이 꼬인다는 점에서 마무리를 잘 짓지 못했다. 반대로 바이리가 그 장면에서 특정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서 영화가 핍진성이 무너진다는 보장이 있을까? 글쓴이는 아닌 것 같다. 영화 전체적인 아이디어 '결핍을 SF적 상상력으로 채운다'라는 것을 해치지도 않는 것 같다. 어차피 이 '원더랜드' 서비스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못한 채 진부한 방식으로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부분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극의 몰입을 깬다. 전반부야 그럴 수 있다지만 후반부에서는 확실하게 힘을 줬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억에 남는 건 바이리 역의 탕웨이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다.
적당히 잘 만든걸 기대할리가
어떤 관점에선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보는 박보검 배우의 해사함이나 이제 베테랑이 된 배수지 배우의 경험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관람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이 김태용이라는 이름이 한국영화에 <만추>와 <가족의 탄생>이라는 선물을 두고 갔던 것 치고는 너무나도 부실한 결과물이다. 솔직히 감독 이름 가리고 냈으면 누군가의 입봉작일 거라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한 것이 이 <원더랜드>다.
-
- 아카데미에 올라갔어야만 했다
봄에 피어나는 벚꽃만큼이나 극장을 자주 드나드는 관객들에게 이 시기는 대작들이 개봉하는 여름 극장가 부럽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는 "아카데미"에 이름이 올라간 영화들 때문입니다.
대개, 시상식에 이름이 올라간 이유에는 그만한 기준에 충족했기에 올라간 것이라는데 관객들은 이 영화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왜, 이 영화가 올라갔지?"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서 극장으로 가 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오게 됩니다. 이런 진부한 패턴이 영화 <모리타니안>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작년이라면, 이미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는커녕 결과까지 나왔지만 이번에는 "코로나19"로 모든 일정들이 연기되며 이제서야 "골든글로브"가 끝났습니다.
아시다시피, <미나리>의 작품상 후보 지명 불발이 가장 큰 논란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나리>의 "윤여정"분의 후보 지명 불발도 화제였습니다. 다른 시상식에서는 다 휩쓰는데,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면서, 관객들에게는 자연스레 "윤여정"분이 빠진 "여우조연상"을 받을지에 관심이 쏠렸고 이는 오늘 소개할 <모리타니안>의 "조디 포스터"분이 수상했습니다. 이에 일부 팬들은 "호랑이가 없는 곳에 늑대가 왕이다"라고 하지만, 이미 <피고인1989>과 <양들의 침묵1992>로 여우주연상만 2번 받은 분이라 늑대로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특히, 이를 30대 이전에 다 받으신 거라...)
이외에도 여기에 출연하는 "타히르 라힘"은 "남우주연상"에 이름을 올려 무슨 영화인지는 몰라도 연기 보는 맛은 쏠쏠하거라 생각했습니다.
'과연, <모리타니안>은 어떤 영화이었는지?' -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9·11테러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갑작스레, 집안에 경찰이 오자 "슬라히"는 어머니에게 '잠깐만 다녀오겠다'라는 말로 진정시킨 후 집을 나섭니다. 그리고 인권 변호사 "낸시"는 지난 3년간 재판도 없이 "콴타나모 수용소"에 구금된 "슬라히"에게 관심이 생깁니다. 아무리 중한 범죄라고 해도 재판 없이 감옥에 수감된 것에 궁금한 "낸시"는 그의 변호를 맡게 되고, 숨겨져 있던 사실에 충격을 받는데...
낯선 영화에 익숙한 배우들이 나온 이유는?
1. 클리셰를 깨버리는 이 과감함, 뭐지?
영화 <모리타니안>은 제목만 봐서는 어떤 영화인지 좀체 감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출연하는 배우들에 "베네딕트 컴버배치", "조디 포스터", "쉐일린 우들리", 그리고 <샤잠!>의 "제커리 레비"를 보아도 역시, 감이 안 잡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포스터에도 있듯이 "재판"이라는 단어로 낯선 영화에게 "법정극"이라는 갈피가 잡히는데요. 근데, 영화 <모리타니안>에게 법정에서 주고받는 증언에 증언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곳은 "법정"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해도 되나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재판"이라는 단어로 "법정극"이라는 갈피가 잡힌 <모리타니안>의 초반 전개는 이와 비슷하게 흘러나갑니다. 마치 변호하는 "낸시"는 선역, 그에게 사형을 내리려는 "스투"는 악역으로 보이는 <모리타니안>의 시작은 뻔하게 흘러갑니다. 근데, 영화는 여기서 하나의 변곡점을 제시하는데 그게 "플래시백"입니다. 대개, "플래시백"은 직접 짜 맞추는 것과 다르게 해당 캐릭터의 시점에서 흘러가 설명보다는 감정을 먼저 제시합니다. 특히, "법정극"이라는 장르가 논리와 논리의 상충이 주되기에 이런 방법은 가급적 피해야 하는데요. 근데, 영화는 "클리셰"와 같은 규칙을 깸으로 오히려 관객들의 관심을 이끌어냅니다.
2. 이러니까, 아카데미에 이름을 올라가겠지.
앞서 말했듯이 영화 <모리타니안>은 이야기의 중간마다 "플래시백"을 삽입함으로 해당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해 이야기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이외에도 부족한 설명을 채워주는 역할도 하지만 가장 큰 역할은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죠. 근데, 영화는 굳이 이런 몰입을 깨버립니다.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물아일체"의 상태를 깨기까지 한 영화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정에 치우치면 본질이 흐려지는 것도 있지만, 두 번째 <모리타니안>이 법정극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야심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를 영화는 '반전'이라는 카드로 위장하여 보여주기도 하고요.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리, "플래시백"을 경계한다고 해도 관객들에게 "슬라히"는 속내를 모르는 대상이 아닌 그저, 불쌍한 대상으로 보입니다. 근데, 텍스트로 적혀진 보고서에는 이런 설명들을 부정하니 관객들에게 인지부조화가 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진짜 틀린가?'라는 마음으로 1차적인 반전을 일으켰다면, 영화는 곧장 2차적인 반전을 연쇄적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잠시, 영화를 떠나 글을 쓰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객관적인 자료로 주관적인 감정으로 끝을 짓는 것입니다. 근데, 순서를 바꿔 주관적인 감정을 객관적인 표현으로 정리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요.
비슷한 재료인데도 순서가 틀리면, 완전히 달라지는 영화 <모리타니안>은 1차 반전으로 '전자', 2차 반전은 '후자'로 보여주여 더 깊게 빠지게 만듭니다.
3. 방법은 틀린 것이 없다. 쓰는 이에 달라질 뿐.
보통 "피해"를 입은 캐릭터를 소개하는데, 가장 기피해야 하는 것은 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 장면 자체만으로도 "고문 포르노"와 별반, 다르지가 않거든요. 그렇기에 <아이 캔 스피크2017>에서는 이를 재현하기보다는 연설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몸에 새겨진 낙서와 같은 문신으로 이를 관객들의 상상에 맡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모리타니안>은 세련된 방법은 아닌데도 이에 대한 충격을 받은 이유에는 이를 쌓아올린 누적된 설명들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구식과 클래식이 나눠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낸시"는 선역, "스투"는 악역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낸시"가 "테리"에게 "슬라히"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듯이 "스투"에게도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영화는 "낸시"에게 "슬라히"의 편지를 읽음으로 그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면, "스투"는 관객들에게 그가 어떤 곳에 있었는지를 직접 가서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낸시"가 주관적인 감정이라면, "스투"는 객관적인 관찰인데,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나 영화는 이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데요. 그리고 극과 극에 서있던 "낸시"와 "스투"가 "슬라히"가 보여주는 재연으로 합쳐지니 "고문 포르노"였던 방법은 "현실 고발"이라는 있어 보이는 방법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죠.
4. 옳고 그름이 아닌 모두를 아우르는 메시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 <모리타니안>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영화는 아닙니다. 예상했던 "법정극"으로 생각하기에는 대상자의 감정에 좌지우지하는 전개는 장르를 제외하더라도 그리 좋지만은 않고요.
그럼에도 <모리타니안>은 앞서 말한 "아카데미 영화"를 보는 삼단 논법의 마지막 단계, 고개를 끄덕이며 나오는 결과에는 문제없이 도출되는 영화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말하려는 '법은 상황에 맞게 짜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적용되어야만 한다'라는 메시지는 극히, 이성적이니까요.
-
- 커피 오어 티 영화 후기 / 중국영화 맞아?! / 대만 로코인줄 ㅎㅎ / “스물” 느낌의 유쾌한 코믹 드라마
영화직관하는남자 영직남의 "커피 오어 티"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과 함께 윈난의 아름다운 풍경과 흥겨운 OST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중국영화, #코미디, #드라마, #팽욱창
-
- 새로운 헐크버스터가 온다!
#왓이프 #아이언맨 #마블레고
2021. 06. 08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https://www.epidemicsound.com/*영상 타임라인*
00:00 왓이프 아이언맨!
00:41 유출된 레고
02:32 왜 사카르에?
03:06 레고가 페이크라면?
03:55 접점이 없는 둘
-
- 영화 <스피릿> 메인 예고편
어릴 적 엄마를 잃고 ‘코라’ 고모와 할아버지 손에 자란 호기심 많은 소녀 ‘럭키’는
방학동안 ‘코라’ 고모와 함께 아빠가 홀로 살고 있는 미라데로에 머물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의 서먹한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던 ‘럭키’는
우연히 에너지 넘치는 야생마 ‘스피릿’을 만나 특별한 교감을 나누게 되고,
새로 사귄 친구 ‘아비게일’, ‘프루’와 함께하며 두근거림과 자유로움을 경험한다.
어느 날, ‘스피릿’과 그의 야생마 가족이 악당들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되고
‘럭키’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과 두려움을 무릅쓴 모험에 나서는데…
-
- 티빙 <유미의 세포들 시즌2> 티저 예고편 2
오래 기다렸어요? (네!!!) 더욱 강력한 심쿵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