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2021-11-07 21:26:49
베스트 키즈
제이든 스미스, 성룡 주연의 액션영화이다.
타지로 이사온 주인공 드레가 쿵후를 배운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한 아저씨에게 쿵후를 배워 그 괴롭힌 아이와 쿵후 대회의 결승에서 붙게되고 이기는 성장, 액션영화이다.
일단 중국에 이민한 미국인이라는 소재가 처음에 신선하게 다가왔고, 주제를 중국의 문화로 잘 넘긴다. 그리고 대회를 준비하고 부터는 액션의 비중이 늘어나며 더 흥미로워 진다. 또한 이민인 꼬마가 쿵후를 배운다는 메인 스토리 라인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사랑, 한 아저씨의 과거 가족사 등 여러 흥미로운 점을 계속 주어서 좋았지만 마지막에는 그런 것들을 이어붙이기 위해 원래 엄청나게 엄격한 주인공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사과 편지 한번에 표정이 풀리면서 대회에 딸을 구경하러 보내는 것을 허락하거나, 한 아저씨의 과거 와이프와 말싸움을 하다가 차가 미끄러져 자신을 제외한 가족이 죽는다는 과거,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스토리가 너무 이해하기 어렵고, 빠르게 진행된다는 단점이 있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영화의 흥미를 위해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액션 또한 눈에 띄었다. 쿵후라는 특이한 무술의 액션을 카메라 무빙에 꽤 잘 담아낸 것 같았다. 특히 처음 한 아저씨가 드레를 괴롭히던 패거리를 상대할때 옷으로 다리를 빠르게 묶는 기술이나, 그런 연출들이 창의적이었고, 또한 서브스토리의 전개로 전체적인 액션의 완급조절이 아주 좋았다.
마지막에 웅장함을 더하면서 쿵후 대회를 이기고 영화가 끝나는 것 또한 깔끔했다고 생각한다.
출처 . 에디터_OREHFILL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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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서의 페이스
<헤어질 결심>(2022, 박찬욱)
<사막의 왕>(2022)
<그녀의 취미생활>(2023, 하명미)
<살인자ㅇ난감>(2024)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 포함.
3주 내리 <헤어질 결심>을 보러 극장으로 향하던 2022년, 나는 예감했다. 배우 정이서를 좋아하게 되리란 것을. 영화 속 하고많은 신스틸러 중 가장 눈에 밟혔던 이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망설임 없이 ‘일하는 경찰 미지’, 정이서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는 입체적일 필요가 없는 기능적 조연이었다. 고경표처럼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어필하지도 않았고, 김신영처럼 배우 자신의 이미지를 인물에게 그대로 덧씌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미지의 개성은 톡톡히 빛났다. 정이서는 작품이 인물에게 부여한 테두리를 철저히 지켰다. 테두리를 철저히 지키는 자, 그게 미지다. 눈치 빠르고 칼 같이 선을 긋고 제 할 일을 다하며 불쾌를 숨기지 않는. 능숙하게 일하는 제스처, 찰나의 눈빛, 독특한 효과음만으로 캐릭터가 파악되었다. 미지처럼 야무진 연기였다. 자잘한 디테일이 살아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가 깔끔했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다. 주변 인물들의 사연에 관심이 없는 영화 속에서, 미지는 사연 따위 없어서 더 매력적이었다. 화면을 벗어난 그에게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화면에 잡히면, 해준을 뚫어져라 보면서도 곁눈질로 미지의 움직임을 붙들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도 일하는 미지’ 초단편 외전 같은 것을 슬며시 그려보며, 스크린 속 정이서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유사하거나 색다른 톤의 조연도 고팠고, 제 1화자가 되어 내면을 모조리 꺼내는 역할을 맡아줬으면 싶기도 했다.
그해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사막의 왕>은 그 갈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정이서의 넘치는 재치를 비격식적이고 입체적인 모양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상한 회사에 떨어진 ‘앨리스’ '이서'. 그는 시청자가 픽션의 세계에 입장하도록 돕는 평범한 화자다. 면접관의 질문에 허허 웃으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라고 답했기에 회사에 최종으로 합격했다. 멍하고 느린 표현법은 뒤에서 다룰 <그녀의 취미생활> 초반의 정인과 닮은 데가 있으나, 그 기반이 다르다. 정인은 살아남기 위해 연기로 무장했다. '이서'는 특수한 상황에 던져졌고, 진심으로 얼떨떨해 하는 중이다.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물음표는 크기를 달리하며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서'는 연기를 잘 못하는 이다. ‘척’을 하면 다 티가 나고, 속마음도 대부분 읽힌다. 그것이 장면의 재미다. 알아들은 척 하는 함박웃음, 신나 날뛰는 실루엣. 은은하게 배어 있는 사투리가 맛깔나는 말투를 완성한다. 이름도 비슷한 ‘이서’는 작가가 점찍어 두고 쓰기라도 한 듯 정이서와 어울리는 캐릭터다.
납득하기 힘든 일을 반복하던 '이서'는, 팀장에게 언어폭력 섞인 질책을 듣는다. 그 순간 정이서의 신체 표현이 압권이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내 잘못인 것 같고, 억울한데 까닭을 모르겠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데 내 의지로는 불가능하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안 나오는’ 상태. 머리 꼭대기부터 혀, 발끝까지 얼어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움츠러들어 쭈뼛거린다. 정이서는 <사막의 왕>이 다크코미디임을 잊지 않는다. 속내를 겉으로 다 드러내면서도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연기는 지양한다. 그 덕에, 월급 액수를 보고 필터없는 감탄사를 토하며 기뻐하는 씬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쯤 ‘이서’의 인물됨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는 ‘세계’에 혼입되어 안주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의미없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없음’의 정체를 깨달았다면, 참을 수 없다. 태도가 달라지니, 진정으로 정인이 겹쳐 보였다. 북받치는 분노와 모멸감을 다 터트리는 대신 꾹꾹 누르며 표출한다. 그의 결심이 ‘순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서'가 “사막”을 밟고 당당하게 오피스를 퇴장하며 1화가 끝나고,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이서는 작품의 장르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면, 연기 톤을 바꾸어 장르를 뒤집어 놓는 데에 한몫을 한다.
<사막의 왕>은 원톱 주인공을 둔 장편 시리즈보단 리미티드 연작에 가깝다. 라스트 에피소드에서 대놓고 말해주듯- (대부분) 돈을 둘러싸고 갈등하다 언젠가 엇갈렸던 자들의 이야기다. 개중 가장 평범해 보였던 ‘이서’는, 돈을 버린 자이기에 특별했다. 그는 3화의 엔딩 무렵 자그마한 회오리를 몰고 재등장한다. 쫓아오는 엄마를 피해 낯선 차에 덥석 올라 고개를 한껏 숙이고 ‘빨리 출발하라’고 하는 이 인간을 어찌할 것이냐. 그 다급함은 진심인 것을. 그의 꽁트 같은 끼어듦과 이후의 능청스러운 태도는 서은과 해일 사이 흐르던 불안한 코미디의 기운에 안정감(?)을 불어넣는다. 얼떨결에 ‘강원도로 일출을 보러 가는 핵가족’의 그림을 구성하게 된 젊은이 둘과 어린이 하나. 그 기이한 동행을 마지막으로 셋 모두 카메라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서은과 닮아 있는 ‘이서’의 눈빛을 보며, 이번엔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 <사막의 왕>을 통해 정이서의 꾸밈없고 다채로운 표정들을 목격했고, 거대한 가능성을 확신했다.
<사막의 왕>(2022)
이듬해, <그녀의 취미생활> 포스터를 본 나는 곧 극장으로 가야만 함을 깨달았다. 저리도 사연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니. 본격적으로 좋아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인물을 한계까지 몰아가 폭발을 유도해 관객을 빠르고 시원하게 만족시키지 않는다. 정인이 제 페이스대로, 즐기고,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도록 돕는다." 당시 리뷰에 적었던 내용을 옮겼다. 정이서는 서두르거나 과시하지 않았다. 작품에 어울리는 저만의 페이스(face/pace)를 찾아 신중하게 자리 잡았다. 드라마틱한 ‘각성’ 연기가 요구되었다면 그또한 가능했을 터이나, 정인에게 안 맞는 옷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작품과 배우는 클리셰의 울타리에서 탈출했다.
오프닝은 정인의 뒷모습이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곧 땅으로 꺼지기라도 할 것처럼 터덜터덜 밤길을 걷는다. 몸의 피로와 더불어 과거와 생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걷는 방법을 고민해 결정한 최선의 결과물이라기보단 체화한 인물이 자연스레 발현된 걸음걸이일 테다. 정인에게 실려 있던 그늘의 무게는 날이 밝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상적인 질책과 조롱에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반응하거나 들릴 듯 말 듯 ‘에’라고 답하는 정도로 존재감을 지우며 살아남았다. 조용해 보이는 그의 내면엔 톡 건드리면 터질 듯한 울분이 있고, 커다란 가위를 옆에 두고 선잠을 자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 만큼의 불안과 공포가 있다. 그 원인은 그가 위치하는 공간과, 그곳을 채운 특정한 타인들이다.
홀로 풀숲에 숨거나 사람들 가운데 섞여 말없이 관찰하는 정인, 그의 응시는 자체로 그의 언어다. 흐엉에게 달라붙는 재순을 정인은 먼발치에서 노려본다.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준다. 목표물에게 효과적으로 가닿는 감시와 경고의 응시다. 창수는 어떤가, ‘응시하지 못함’에 가깝다. 산속에서 그를 마주치자 정인은 필요 이상으로 놀란다. 상대가 몸을 기울이거나 손을 들 때마다 소스라치고, 극도로 움츠러들어 겨우 견딘다. 다음, 그다음 조우에서도 그렇다. 불투명한 창문을 사이에 두고도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고, 입보다 눈물샘이 먼저 열린다. 창수는 정인의 숨을 틀어막고 피를 굳히는 인간이라고, 정이서가 말해주고 있었다. 관객은 정인의 수많은 사연 중 하나가 거기 얽혀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혜정에겐 자꾸 시선이 간다. 상대가 알아챘으면 하는 마음으로 훔쳐보는 듯하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건 매한가지이나, 창수에게 보이던 두려움 대신 조심스러운 호의와 관심이 감지된다. 만남 후엔 여운을 돌이킨다. 순수한 호기심과 동경, 그리고 앞으로 풍부한 정서들로 채워질 빈칸이 느껴진다. 영영 벗어난 줄 알았던 고향에 붙들린 정인에게 혜정은, 지긋지긋한 공간에 신선한 공기를 끌고 온 존재다. 웃는 둥 마는 둥, 긍정을 하는 둥 마는 둥. 그건 익숙한 가면이다. 느릿하고 분명한 말투, 배시시 흩어지는 미소는 정인의 캐릭터다. 혜정과 함께 생계 외 삶에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며 정인의 얼굴에선 점점 그늘과 주저가 걷힌다.
작품은 종종 혜정의 대사로 정인을 묘사한다. “다 알고 있는” 사람,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 혜정은 정인을 구하는 자 보다는 정인이 스스로를 구하도록 돕는 자다. 정인은 원래 품고 있던 강함을 꺼내는 법을 배운다. 혜정과 가까워지기 전 시작된 첫 번째 ‘행동’은 충동적이지만 계획적이기도 했다. 가위를 툭 떨어뜨리는 차분한 손놀림, 서늘하게 다물린 입과 내리깔린 눈꺼풀. 후에 일련의 복수를 실행하고 참을성 있게 지켜볼 때도 유지되는 온도다. 느닷없이 내려앉은 온도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나 전남편 광재를 대하며, 정인은 무표정 아래 켜켜이 쌓인 응어리 사이로 차가운 혐오를 언뜻 내비치곤 했다.
정인의 응어리는 원인을 제공한 대상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뜨겁게 터지기도 한다. 부녀회장이 집에 찾아왔을 때, 한계에 다다른 정인은 불덩이를 내뿜는다. 정이서는 인위적으로 발산하려 애쓰기보단, 최대한으로 눌러담아 저절로 폭발하도록 유도한다. 이후 정인은, 다시는 그렇게 터져 버리지 않는다. 창수와의 독대에서 다시금 분노를 표출하나, 이번 덩어리는 서릿발 같다. 오래된 가해자를 내려다보며 열 여섯 살에 느꼈던 그대로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수 년 동안 압축된 무게를 얹어서. 모조리 쏟아내는 대신 저쪽이 알아들을 만큼만, 눈물이 흐르고 몸이 떨려도 무너지지는 않을 정도로. 그것은 상대를 겨냥한 독백, 복수의 마무리였다. 이와 같이 복수의 단계들은 대개 차갑고, 한 치의 어긋남이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불안과 공포는 필연적이다. 혜정이 재순을 ‘실종’되게 만든 것이 그러했듯, 정인이 광재에게 독을 먹이고 총을 쏘는 행위는 적극적인 자기방어다. 작품과 정이서는 그역시 놓치지 않았다.
정인처럼 절제의 미학을 체화한 영화, ‘광재의 최후’는 그것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장면 중 하나다. 정인은 공격적으로 죄다 발산하는 대신, 뿌리깊은 분노와 삶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총 끝에 단단히 드리운다. 광재는 엉망으로 망가지기보단, 그저 늘어져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다. 정이서와 우지현, 대단한 집중력을 지닌 두 배우가 곤조 있는 연출과 만나 완성한 씬이다. 주연 배우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늠해보(지조차 못하)게 하는 작품- 우지현에게 <더스트맨>이 있다면 정이서에게는 <그녀의 취미생활>이 있다. 정이서는 능히 홀로 극을 이끌며 상대 배우와 화면을 나누거나 포커스를 적절히 넘겨주기도 했다. 거세게 덮쳐오는 파도가 되기도, 고요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흩어지는 물결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취미생활>(2023)
싱그럽다. 티없이 활짝 웃는 정인을 보니 그 표현이 절로 적혔다. 비슷하게 씩 웃는데, 선여옥은 징그럽다. 한 번 더 우지현과 나란히 두어 보자. 우지현이 <그녀의 취미생활>을 통해 해냈듯, 정이서는 <살인자ㅇ난감>으로 ‘빌런력’을 증명한다. 빗물과 핏물로 범벅이 된 골목, 원피스를 입고 부드럽게 안내견을 이끄는 선여옥의 목소리는 이질적이다.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입체적이라기보단 반전을 숨긴 인물, 그의 꿍꿍이가 드러나며 정이서가 보였다. 출연진을 훑어보지 않고 시청한 내게 있어서는, 하상민의 첫등장과 더불어 일종의 서프라이즈적 모먼트였다. 선여옥은 단순히 이기적인 것을 넘어 선악에 무관심하다. 제 욕망에만 충실하며 타인을 도구삼는다. 뻔뻔하고 염치없고 눈치는 있다. 괜찮은 사람인 척할 생각도 없어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정이서 특유의 미소는 음흉하게 발현된다. 딜리셔스하고 분명한 말투는 주인공과 시청자의 신경을 긁는 방향으로 던져진다. 문장을 새되고 짧게 끊어 뱉으며 분리된 음절을 효과음처럼 사용하는 정이서. 다른 인물이었다면 매력포인트로 작용했을 디테일은 선여옥과 만나 비호감의 요소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기생충>에서 거리를 두고 화면을 공유했던 최우식과의 재회다. 최근 정이서의 필모그래피에서 ‘피자 사장’을 발견한 후 해당 클립을 검색했고, ‘아!’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게 당신이었구나. 여러 해가 지난 현재, 밀접한 긴장감을 주고받으며 훌륭한 다이내믹을 형성하는 두 배우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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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쯤 나는 배우로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나의 이상과 실제 내 그릇의 차이가 크게 느껴져 몹시 불안했다. 그럴 때 <그녀의 취미생활>이 내게 왔다. 정인으로 사는 동안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한 인물에게 집중하다 보면 느릴지언정 조금씩 나갈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 작품이 정말 소중하다.” - 정이서, [씨네21]
세 해에 걸쳐 있는 네 작품을 다루며 정이서의 일부를 담아보려고 시도했다. 정이서는 천연덕스럽고 능숙하다. 바른 중심 주위로 자잘한 디테일을 자아내, 군더더기 없는 짜임으로 완성한다. 모호하게 머물러야 한다면 그렇게 하며, 그 얼굴에 관객의 시선이 머무르게 한다. 이해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배우인 그는, 매번 작품의 결을 찾아내 적절하게 녹아들거나 성공적으로 엇갈렸다. 그 개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정 반대의 모습을 꺼내며 손끝에서 빠져나갔다. 그 잠재력을 엿보았다고 여기자마자, 아직 보지 못한 깊이가 어마어마함을 깨닫게 했다. 흰 원피스와 장총이 각각 또 함께 어울리는 정이서. 그는 마치 정인처럼, 자신의 페이스대로 신중하게, 범상치 않은 걸음을 떼는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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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엘라 (2021)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주인공이 필요하다.” 영화를 소개하는 이 문장처럼, 영화 <크루엘라>의 주인공은 디즈니가 다룬 과거의 순수하고 결백하며 완전하게 선하기만한 주인공들과는 다르다. 영화 <크루엘라>는 디즈니가 자사의 작품인 <101 마리의 달마시안개>에서 달마시안의 모피를 호시탐탐 노리는 악역 크루엘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전 작품과의 접점은 많지 않아 보인다. <크루엘라>는 전작의 악역인 크루엘라라는 캐릭터의 설정을 그대로 쓰되 캐릭터를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전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입장에선 전작과의 연결고리가 어찌되었든 별로 신경쓰지 않고 봤다. 전작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봐도 영화 <크루엘라>는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고,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악당을 잡기위해 악역이 된다는 설정이나 복수담과 성장담을 담은 스토리, 주인공의 출생부터 시작되는 순행적인 플롯. <크루엘라>의 전반적인 이야기는 평이한 편이다. 특별히 부족한 점도, 특별히 뛰어나다고 말할 부분 역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가치없는 영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스토리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과감한 컷연출과 엠마 톰슨과 엠마 스톤의 불꽃튀는 대립구도, 1970년대의 런던, 러닝타임 내내 쉴새없이 파괴와 혁명을 부르짖는 헤비메탈과 락 사운드의 음악들, 크루엘라가 자신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에 적합한 창조적 파괴의 펑키룩,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격하고 파괴적인 영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간중간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가미된 깨알같은 개그코드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절대 다수의 컷들이 높은 밀도를 갖고 있는 영화로, 그 과함탓에 피로를 느낄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꽉찬 영상으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속박하는 금기라면 얼마든지 깨부수고, 한껏 열망하라.
선악과를 먹지 말란 금기를 어긴 아담, 아벨을 죽인 카인 등. 예로부터 죄의 낙인은 언제나 금기를 어긴 자들에게 주어졌다. 영화 <크루엘라> 또한 수많은 금기(-을 하지말라)를 받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거의 모든 금기(맨 마지막, 바로네스를 죽여선 안된다는 금기는 깨지 않았다)를 깨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금기를 깬다는 것은 에스텔라에겐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선 그녀를 빌런(악당)으로 만드는 모순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금기를 깨고 자신이 열망하는 것을 추구하는 작중 주인공인 크루엘라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금기를 깨는 인물로서 크루엘라가 이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늦은밤, 리버티 백화점 점장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크루엘라가 술을 발견하고 술을 들이키고 취기에 쇼윈도를 꾸미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내겐 아담이 선악과를 따서 먹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크루엘라는 금기된 장소에서 탐해선 안될 것(리버티 상표가 붙은 와인)을 기꺼이 탐한다. 금기를 깨트린 그녀에겐 분명히 죄인의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고, 그 이유로 그녀는 빌런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사회가 정해놓은 금기를 깨서라도 세상이 정해놓은 자신의 한계와 위치를 넘어서고자 한다.
금기를 깨트린 그녀에겐 분명히 죄인의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고, 그 이유로 그녀는 빌런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에스텔라가 와인을 꺼내어 마시는 행위는 신과 같이 군림한 절대적인 체제와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한 종속적인 여성의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며, 취기에 쇼윈도를 자신의 재능으로 장식해 놓는 것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세계에 자신의 재능으로 되묻고 있는 것이다. 마치 카인의 죄를 물으려는 신에게 왜 신께선 아벨만을 찾으시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처럼, 에스텔라는 내게도 이만한 재능이 있는데, 왜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적극적으로 반항하고 기꺼이 원죄자가 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에스텔라는 쇼윈도에 전시된 마네킹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거는데, “너를 이 꼴로 둘 순 없어. 그건 너무 잔인해.” 이 말은 에스텔라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취기에 자신의 재능을 해방하는 에스텔라. 그녀는 자신이 열망하는 바를 위해 사회가 정해놓은 한계와 금기 따위라면 얼마든지 깨고, 넘어서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곧 사회가 정해놓은 종속적인 위치에서 해방되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여성, 내 포효를 들어라.” 영화 <크루엘라>의 곳곳에서 울려터지는 크루엘라의 포효는 열망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사회의 금기를 넘어서서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의 목소리 말이다.
크루엘라, 잔혹한(Cruel) 세상에 맞서다.
금기를 깨는 인물로서 크루엘라가 싸우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인물이 아닌, 금기로 가득 차있는 세상이다. 물론, 이 영화는 바로네스와 크루엘라의 명징한 대립구도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대립구도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본다면 크루엘라와 바로네스의 갈등은 단순히 개인간의 다툼이 아니라, 변화를 요구하는 신세대로 상징되는 크루엘라와 고유명사인 동시에 남작부인이라는 구시대의 권위적인 이름이 의미하듯이, 권위적이며 잔혹한 구세대로 상징되는 바로네스의 대립으로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크루엘라>는 영화의 초반에서 자신이 싸우고자 하는 대상이 엄마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크루엘라>의 대립 구도는 미래와 과거 각각 크루엘라(futuer)와 바로네스(남작 부인이라는 구시대의 권위적인 이름이 의미하듯이)로 상징되는 부정한 기득권 세력과 기성 사회에 저항하는 신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정의로워 보이는 싸움에는 한가지 덫이 있다. 부정한 세계를 향해 똑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저항한다면, 그러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복수를 행한다면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에스텔라가 이미 사회의 높은 곳에서 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로네스를 상대로 정당하게 싸우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에스텔라는 자신이 갖고 있는 폭력적이고 과격하며 킬러같은 잔혹한 본성(Cruel)으로 바로네스와 맞서고자 한다. 에스텔라는 복수를 다짐한 순간, 그녀의 어머니가 예의바르고 착한 아이가 되라며 붙여준 이름인 에스텔라를 버리고, 자신의 진짜 본성을 상징하는 이름, 크루엘라가 되어 복수를 위해 바로네스와의 긴 싸움을 시작한다.
<크루엘라>의 대립구도는 미래와 과거 각각 크루엘라(futuer)와 바로네스(남작 부인)로 상징되는 부정한 기득권 세력과 기성 사회에 저항하는 신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구시대의 유산은 버리고.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의의 경쟁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에스텔라는 저 높은 곳에서 군림하고 있는 악인을 추락시키기 위해서 크루엘라라는 이름의 악인이 된다. 유산을 되찾는 것에서 복수로 목표가 바뀌었을 때, 크루엘라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행동을 취한다. 우선, 미래를 상징하는 그녀가 구시대 유럽 귀족들의 단장(短杖)을 들고 나타나서, 재스퍼와 호레이스의 아침 식사를 엎어버리고 자신이 할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어딘지 불편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복수를 다짐한 크루엘라에게서 보여지는 이 불편한 기시감은 크루엘라가 뒤엎으려는 부정한 기득권인 바로네스의 모습과 닮아 있는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크루엘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후로 그녀는 마치 자신의 진짜 친모인 바로네스처럼, 얼마든지 타인을, 힘든 유년기 시절을 함께 보낸 자신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호러스와 재스퍼마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크루엘라는 바로네스가 그러했듯이 한동안은 자신의 재능과 카리스마로 주변 사람들을 사로 잡는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바로네스의 부정한 면들까지 닮아가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결국 킬러의 본능을 가진 바로네스에게 뒤를 잡히고, 죽음의 위기에 놓인다.
유산을 되찾는 것에서 복수로 목표가 바뀌었을 때, 크루엘라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행동을 취한다.
“이 목걸이(유산)때문에 나는 죽게 될 거야.”
영화가 시작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에스텔라의 말처럼, 그녀는 결국 유산(가보인 목걸이)을 되찾는 과정에서 좌절하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때의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유산이란 바로네스로부터 물려받은 잔혹한 킬러의 본능, 즉 정신적인 유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에스텔라가 맞이하는 이 첫번째 죽음은 바로네스의 재능은 물론, 킬러의 본능이라는 사악한 유산까지 물려받은 크루엘라의 상징적인 죽음이다. 이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서 크루엘라는 새롭게 태어난다.
부정한 세상에 반발하여, 부정한 구시대를 무너뜨릴 신세대라면 당연히 부정한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크루엘라는 여전히 폭력적이고 과격하지만, 이젠 자신에게 유산을 물려준 이와 똑같은 형태의 악당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가 새롭게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엄마를 비롯한 자신의 가족들의 마음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거칠게 저항하고, 열망하며, 꿈꾸지만, 타인을 해치지 않고 타인들의 마음을 돌아본다. 이렇게 정리한다면 다소 순진해보이지만, 그 영악한 순진함이 크루엘라라는 캐릭터의 매력이고, 순진하면서도 영악한 그 본성으로 세계를 뒤흔드는 인물인 크루엘라가 디즈니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로 하는 새로운 주인공이다. 덧붙여, 영악한 순진함이란 말은 모순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태도를 실현하기 어려울 뿐이다.
이 죽음은 바로네스의 재능은 물론, 킬러의 본능이라는 사악한 유산까지 물려받은 에스텔라의 상징적인 죽음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주인공이 필요한 법.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진 크루엘라는 자신의 가족과 동료,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유산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이때, 크루엘라는 유산을 되찾는 과정에서 순진하게 금기와 권력을 따르는 여성상인 에스텔라에게 죽음을 준다. 그리하여 새롭케 태어난 크루엘라는 바로네스의 잔혹한 유산을 물려받은 인물도 아니며, 캐서린의 금기를 따르는 순진한 인물도 아니다. 크루엘라는 이전 세대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이름과 정체성 모두를 죽이고, 자신만의 이름과 정체성을 선택한다.
이 악당의 성공담 또는 성장담은 디즈니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도 해치지 않되, 영악하게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여성,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거침없이 드러내는 한편, 기성세대가 유산으로서 물려준 이름과 잔혹한 본능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이름과 자신만의 능력과 열정을 발휘하는 여성. 영화속 크루엘라의 성격을 이렇게 풀어본다면, 디즈니가 새롭게 해석한 빌런 크루엘라는, 그동안 디즈니가 지켜온 전형적인 주인공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주인공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 이상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주인공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낡은 시대의 주인공을 두 번 죽인다. 그 첫 번째 죽음은, 바로네스로부터 잔혹한 구시대의 정신을 이어받은 크루엘라의 죽음이며, 두 번째의 죽음은 권력이나 환경에 기대어 순진하게만 살아가는 여성 에스텔라의 죽음이다. 이 두번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크루엘라는 온갖 사회적 금기들로 속박되고 억압된 여성상에서 해방되어 낡은 금기를 깨부수고, 영악하게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디즈니는 구시대적인 인물에게 두 번의 죽음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주인공인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는, 디즈니가 1970년대의 런던을 지나 우리시대, 즉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공”으로 제시하는 인물상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영화 <크루엘라>는 과거의 속박되고 억압된 여성상에서 해방되어 거침없이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발휘하는 현대적인 여성상을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공”으로써 제시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캐릭터의 성격을 한층 더 살리는 <크루엘라>의 미술과 음악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서 바로네스와 맞서는 크루엘라의 퍼포먼스는 굉장히 과격하고, 기존의 세계를 흔들 정도로 파격적이다. 파격적이고 과격한 <크루엘라>를 장식하는 음악과 패션도 이 영화에 굉장히 잘 어울린다. 영화에서 쉬지않고 들려오는 1960년대 ~ 1970년대 런던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헤비메탈 / 하드락 사운드의 음악들하며,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공 크루엘라를 장식하는 펑크풍의 패션은 이 영화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리고, 크루엘라의 개성을 더욱 강조한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주인공이 되기위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영화 <크루엘라>의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해방과 혁명을 부르짖는 과격한 헤비메탈 사운드는 영화속의 낡고 부정한 세계를 뒤흔든다.
평이한 플롯과 스토리는 아쉽지만.
영화 <크루엘라>의 플롯과 이야기는 전형적이고 평이한 편이다. 따라서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듯한데,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섞인 복합 예술인 영화를 두고 메세지나 스토리, 플롯만 두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평가가 아닌가 싶다. 요컨대, 두 엠마의 불꽃튀는 신경전만 해도 충분히 볼 만한 영화가 아니었던가? 물론, 사람에 따라 무엇을 중요시 여기느냐는 저마다 다르고 존중해야겠지만, <크루엘라>와 같은 작품은 일단 플롯은 간결하니 플롯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고, 스토리상으로는 논리적 오류만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크루엘라>와 같은 장르 영화의 매력은 스토리 역시 중요하지만 이야기 자체보다는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시 · 청각적인 요소(배우들의 연기력, 컷 연출, 미술, 음악 등)들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그냥 쉽고 간결하게 질문하고 대답하면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재밌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대답을 하자면, 이 영화는 분명 흡입력있는 재밌는 영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평가는 다르기야 하겠다만(아마 영상 전체에 흐르고 있는 과한 에너지 탓에 피로를 느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캐릭터의 매력이 강렬한, 재밌는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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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하고 폭력적인 사회, 그 속에서 시끄럽게 서로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원작, 이언희 감독
김고은, 노상현 주연* 해당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웃어주지 않는 곳에서
영화의 주인공, 재희(김고은)와 흥수(노상현)는 대도시를 살아가는 20대 청년들이다. 인구 밀도 과다, 남에게 관심 많은 사람들 사이 끼어 살아가야 하는 두 남녀. 어느 누군가는 도시가 '시끄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도로에 꽉 끼어 클락션을 울리는 차들, 좁은 길을 지나다니며 떠드는 사람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각종 사건사고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끄러운 것이 당연하다는 듯, 바깥은 소음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시끄러움으로 무장한 도시의 이면에는 조용한 폭력이 있다.
재희와 흥수, 그들이 살아가는 대도시는 조용하고, 폭력적이다. 자유로운 영혼, 재희는 대학교에서 홀로 다니는 동안 여러 동기들의 소문에 시달린다. 눈에 띄는 빨간 니트로 코디한 '유러피안 스타일',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 눈치도 보지 않는 과감한 행동들. 동기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그리고 눈에서 눈으로, 귀에서 귀로, 재희는 '옷이 저거밖에 없는' 애가 됐다가, '유출된 누드 사진의 주인공'이 됐다가, 문란하다는 소문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이 과정 내내, 누구도 재희에게 다가와 알려주거나 직접 부딪히지 않는다. 그저 등을 돌리고 속삭일 뿐이다.
주먹을 쥐지 않고도 가닿는 조용한 폭력. 재희는 그래서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 채 자꾸만 밀려난다. 해명할 기회도, 설명할 시간도 없이, 재희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폭력적인 시선들이 '재희'라는 여성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쉽게 정의내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웃어주지 않는 곳. 그곳에서, 재희는 자신과 너무도 다른, 그러나 어딘가 비슷한 것만 같은 흥수를 만난다.
두려움을 마주하는 법
재희가 온갖 소문과 관심에 시달리는 비밀스러운 인물이라면, 흥수는 비밀을 들키고 싶지도,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아하는 인물이다. 재희와 흥수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자신의 엄마조차 애써 외면하려 하는 성정체성을 이유로 남들 앞에 떳떳하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는 흥수, 헛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시험을 보고 나오다 강의실 앞에서 직접 옷을 벗고 해명하는 재희.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사람과,스스로 말할 수 있는 무대에 오르기를 꺼리는 사람.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희와 시선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흥수.
그런 흥수에게, 재희에게 비밀을 들켰다는 사실은 또 다른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소문을 만들어내던 동기들의 의심의 타깃이 된 순간 재희가 흥수를 구해주면서, 흥수는 재희에 대해 두려움 대신 조금의 신뢰와 흥미를 가진다. 선입견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함께하자고 내미는 손. 새학기에 '너는 무슨 아이돌 좋아해?' 를 묻듯, 재희와 흥수는 '술이나 마시러 가자.'는 말로 관심사를 공유하고 함께 이태원으로 향한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랑법
서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사랑을 응원해 줄 수는 있다. 영화 내내 흥수와 재희는 대도시의 사람들과 '사랑'을 한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더 시끄럽고 반짝거리는 클럽으로 향하면서, 신나게 웃고 싶어서 술에 취해보려 들면서. 그러나 그들이 이어가는 '사랑'은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재희의 애인은 재희를 숨기려 들다 애인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흥수는 당당히 성정체성을 밝히고 싶다는 애인의 뜻을 응원해주지 못하고 화를 낸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랑, 무게가 달랐던 관계. 그 속에서 이 젊은 주인공들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함께 공유하는 작은 집, 하나의 공간으로 모인다. 이들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다른 이들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못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애인도 아닌 남녀가 동거한다는 사실, 서로의 연애사, 성정체성까지. 남들이 들으면 웃어주지 않을지도 모를 사실들이, 재희와 흥수가 공유하는 집에서는 그저 공기처럼 당연하게 녹아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준다. 각자의 사랑을 응원하면서, 서로에게서 '사랑법'을 배우면서.
상처가 난 뒤에는 성장을 향해서
영화가 흘러가는 동안 각자에게 상처를 주는 사회 속에서 서로를 응원해주던 두 주인공이 서로 상처를 주는 장면이 있다. 재희가 믿었던 애인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날, 그리고 흥수와 재희의 동거를 재희의 애인이 알게 된 순간 재희가 흥수의 성정체성을 '아웃팅'한 날. 재희는 안정적이고 온전한 사랑을 원해온 인물이며, 흥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재단하고 함부로 말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재희와 흥수도 서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폭력보다 서로가 '알면서도' 그랬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더 큰 상처로 다가오게 된다.
재희가 흥수에게 상처를 준 날, 그리고 흥수가 재희에게 상처를 준 날. 그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지키고 싶어서, 숨고 싶지 않아서. 사랑을 위해 우정이 잠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서로에게 일 순위가 아니라 이 순위가 되는 순간. 두 주인공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균열은 금방 사그러든다. 싸웠지만, 서로의 말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서운함보다는 상대의 다친 얼굴이, 속상함보다는 상대의 우는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이. 서로 화를 내고 나서도 해장 라면 하나를 나눠먹고 나면 다시 이전처럼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 그리고 애인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 그건 이들이 '애인'이 아닌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서로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성장한다. 재희는 안정적인 사랑을 찾아 나아가고, 흥수는 엄마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백한다. 취업 준비를 하고, 군대를 가고, 다시 그 집에 모여 변한 서로를 바라본다. 술에 취해 이태원 클럽을 돌아다니던 그때와, 멀끔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지금. 누군가는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어느 한 쪽을 깎아내릴지도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그 순간도, 지금도, 모두 청춘일 뿐이다.
조용한 사회 속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를 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옆에 재희가 있다면, 그리고 내 옆에 흥수가 있다면, 나는 저렇게 대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재희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흥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쉽게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떳떳하게 '나는 누군가에게 폭력적이게 굴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재희와 흥수는 각각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재희와 흥수의 동거 사실을 안 재희의 애인이 재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을 막아서던 흥수가 흥수의 애인 대신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장면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폭력을 마주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과장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은.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폭력들.
하지만 뺨에 손이 닿아야만, 얼굴에 상처가 나야만 폭력이 아니다. 조용하게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말들, 밤이 되면 내 성정체성을 부정하며 조용히 기도하는 목소리, 맞는 말을 해도 예민하다며 궁시렁대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대도시의 '폭력법'이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용한 폭력 가운데 이들은 더 크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재희는 자신을 '예민하다'거나 '시끄럽다', '튄다', '문란하다' 등으로 깎아내리는 대신 '멋있다'고 말해주는 직장 동료와 사랑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시선을 두려워했던 흥수는 엄마에게 성정체성을 고백하고 재희의 결혼식 축가로 당당히 걸그룹 노래를 선곡해 춤을 춘다. 앞으로 이들에게 또 다른 폭력이 다가올지라도, 이들은 가만히 앉아 스스로를 파먹고 울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고, 누군가와 함께하고, 잘못된 것에 잘못되었다고 소리칠 것이다. 그것이 '대도시의 사랑법'을 배우며 20대를 거쳐온, 젊은 청춘들의 종착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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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하고 터져도 깊은 맛이 나는 만둣국처럼!
가족의 해체이자 가족의 탄생이다. <대가족>은 제목 그대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혈연으로 묶인 관계이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가 가족이라는 말이 있듯 양우석 감독이 가져온 이 이야기는 가족 해체 시대에 던지는 그만의 답인 듯하다. 2000년대를 배경을 했듯이 영화 스타일은 올드하고, 이야기는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지만, 오히려 정겹고 따뜻함이 베어 있다. 물론, 너무 많은 재료를 담아 터져버린 만두처럼 과하거나 수습이 어려운 부분도 더러 보인다.
만두 맛집 평만옥 사장 함무옥(김윤석)은 열심히 일한 덕에 돈도 많이 벌고 건물주까지 되었지만, 언제나 근심이 가득하다. 이유는 단 하나. 대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문석(이승기)이 출가해 스님이 된 이후, 무옥은 제사 때마다 조상들을 볼 낯짝이 없다. 하지만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느 날 그에게 문석을 찾는 한 어린 남매가 찾아온다. 문석이 자신의 아빠라 알고 이곳을 찾아온 남매의 이야기에 무옥은 평생 없을 줄 알았던 손주가 생겨 뛸 듯이 기뻐한다. 반대로 헐레벌떡 집으로 온 문석은 잠시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업보라 말한다.
“가족 화두를 꺼내든 건 지난 세월과 비교했을 때 그때보다 풍족해졌는데 왜 가족 만들기는 더 힘들어졌느냐는 것이었다. 나름 생각한 결과의 답은 ‘욕망’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만들 게 된 계기를 말한 양우석 감독의 말처럼, 휴먼 가족 드라마처럼 보이는 <대가족>의 주재료는 바로 가족, 즉 자식으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려는 부모 세대의 그릇된 욕망이다. 무옥이 그렇게 대를 잇고 싶어하 는 건 문석의 바람이 아닌 본인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감독은 과거 한국전쟁을 관통하며 타향에서 홀로 살아온 세월, 하루라도 쉬지 않고 일해야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책임감, 부모님은 물론, 여동생, 그리고 조상들을 챙겨야 한다는 K 장남 콤플렉스를 무옥에게 입힌다. 이로 인해 가족 관계가 소원해지고, 특히 아들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상은 했겠지만 문석이 출가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이런 고지식한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준 손자들이 오면서 점점 변한다.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들이 하자는데로 모든 걸 해주려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영락없는 손자 바보처럼 보인다. 마치 스크루지 영감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녀온 후 개과천선한 것처럼, 무옥 또한 그렇게 변한다. 이 과정을 겪은 그는 아들에게 소홀히 했던 자신을 책망하고 진실한 화해도 이룬다.
문석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의대 재학 시절 불임부부를 위해 타의로 자신의 정자를 기증했다. 500번 넘게 기증한 결과, 생물학적 아버지로 400여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자신을 찾아온 남매와의 일화를 통해 문석은 자신의 과거를 되짚는 것은 물론, 비로소 부모의 입장이 되어본다. 그리고 그 비통한 슬픔과 힘겨운 인생을 살아온 아비를 그때서야 이해한다.
이처럼 <대가족>은 무옥과 문석을 통해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을 보여준다. 비로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각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깨닫게 되는 이 부자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가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감독은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임 있음에도 이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여기에 또 하나의 재료를 첨가하는 건 가족의 의미다. 무조건 혈연으로 이어져야 가족이라는 건 옛말. 21세기를 알리는 2000년이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면서 혈연이 아닌 정으로 이뤄진 이들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감독은 무옥을 찾아온 남매, 평만옥에서 무옥을 항상 보살펴주는 방여사(김성령), 그리고 후반부 등장하는 수많은 가족을 통해 이를 증명한다.
이처럼 영화는 전반부에는 코믹한 설정에 따른 무해한 웃음을, 후반부에는 가족의 의미를 곱씹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문제는 다루려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너무 많고, 이질적인 것들이 많음에도 이를 한꺼번에 담으려다 넘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흐름이 자주 끊기는 전개 방식과 편집에서 단점이 드러나는데, 이는 마치 좋은 재료를 너무 많이 넣어 터진 만두를 연상시킨다. 세 나라의 정상이 한데 모여 각각의 정치적 의견 대립을 그린 <강철비2: 정상회담>에서도 드러났던 양우석 감독의 단점이 이번에도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문현답 스타일의 불교적 가르침도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맛을 살린다. 중심에는 김윤석이 있다. 진짜 만둣국집 사장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은 물론, 남매를 본 순간 그동안 고수했던 걸 본인 스스로 무너뜨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전한다. 방여사 역의 김성령 또한 그와 티키타카를 맞추며 코믹함은 물론, 중년의 로맨스도 펼친다. 여기에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며 업보라 말하는 이승기와 극 중 과거 연인 사이였던 강한나, 그리고 두 팔을 다치면서도 이승기를 보좌하는 박수영의 맛깔난 양념 연기는 빛을 발한다.
“자식에게 부모는 우주이고, 부모에게 자식은 무능한 신이다”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상대를 여기는 시선은 아래가 아닌 위로 향해 있다. 우러러보는 마음, 곁에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고마움. 이 작품이 연말 시즌에 잘 어울리는 건 너무나 흔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함을 알지 못한 의미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뻔하고 터져도 깊은 맛이 나는 만둣국과 같은 <대가족>의 온기를 많은 이들과 나눠 보기 바란다.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3.0 / 5.0
한줄평: 속 터져도 맛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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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을 향한 희망을 전하는 영화
❣️[Cinelab Curation]❣️
힘든 어제의 끝에는 언제나 희망찬 내일이 있기 마련이죠!😆
어떤 이유로든 지쳐 있을 여러분들께 영화를 통해 힘내자는 말을 전해봅니다.
행복은 빈도라고 하던가요?
여러분들의 하루에 기분 좋은 일들이 더 자주 찾아오길,
행복한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되길 바랍니다!🧡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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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과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만든 구원의 길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처음엔 단순히 ‘불리기 위한 호칭’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름에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게 될 모든 이야기와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든다. 그렇기에 이름을 부르고, 또 불린다는 행위는 꽤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서로 다른 이름들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넌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관계를 맺는다. 이름이 없다면 나 자신을 정의하기도 어렵고, 타인에게 나를 제대로 각인시키기도 힘들다. 결국 이름이란, 우리 내면을 드러내고 서로를 구분 짓는 뿌리이자, 한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시가 된다.
영화 <검은 수녀들>에서 우리는 유니아, 미카엘라, 바오로라는 ‘이름’을 지닌 세 인물을 만난다. 수녀이자 신부인 이들이 각각 품고 있는 절망, 죄책감, 후회는 그들의 이름 속 정체성을 흔들고 시험한다. 어둠에 사로잡힌 세계에서, 구마 의식을 둘러싼 제한과 의심 속에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에 걸린 책임과 소명을 다시금 떠올린다. 과연 절망이 오히려 힘이 될 수 있을까, 죄책감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을까, 후회가 도움의 손길로 바뀔 수도 있을까? 다음부터 살펴볼 세 가지 감정은 이 영화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치는 출발점이다.
[첫 번째 감정] 유니아 수녀의 절망감
유니아 수녀의 과거가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과 태도, 그리고 반응하는 방식에서 그녀가 깊은 절망감 속에 머물러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조금은 외로운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니아 수녀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돕고 구하려고 애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녀의 절망감이 오히려 그녀를 움직이는 동력처럼 보인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마주할 때조차, 그녀는 흥분하거나 극단으로 치닫기보다 담담하게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 태도가 영화 전체에서 중요한 이유는, 유니아 수녀가 어떤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을 띠면서도, 막바지까지 타인을 위해 구마 의식에 나서는 모습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상징한다. 절망감은 흔히 사람을 고립시키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유니아 수녀는 그 절망 위에 일종의 ‘책임감’을 덧씌워,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된다.
특이하게도 영화는 이 ‘절망감’이 유니아 수녀에게서 연민이나 연약함이 아닌, 더욱 단단한 ‘투쟁심’을 끌어낸다고 묘사한다. 실제로 그녀가 처한 환경은 녹록지 않다. 구마 의식은 허가받은 신부만이 거행할 수 있는데, 유니아 수녀는 이 제약을 뛰어넘을만한 권한도, 신분도 갖고 있지 않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무당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거절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사람을 구하고, 악령을 막아내려 애쓰는 모습은, 절망을 극복하는 데 있어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감정] 미카엘라 수녀의 죄책감
영화 곳곳을 살펴보면, 미카엘라 수녀가 어릴 적부터 죽은 이들을 보아왔다는 암시가 있다. 친구가 자살한 듯한 과거가 엿보이는데, 그녀는 그 환영을 지금도 계속 목격한다. 이상한 기운이나 귀신 같은 존재가 주변을 맴돌면, 미카엘라 수녀도 금방 눈치채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질병’으로 치부하고, 외면하려 든다.
아마도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현재 그녀를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 대신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미묘한 부채감, 무엇인가 바꿀 수 있었을 텐데 바꾸지 못했다는 자책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든다. 미카엘라 수녀는 그러한 마음의 짐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 하고, 수동적인 태도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유니아 수녀를 만나면서부터, 그녀는 조금씩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다.
죄책감은 사람의 행동을 옭아매는 강력한 감정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처벌하려는 듯한 충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미카엘라 수녀는 스스로를 속이는 방식으로 이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만, 유니아 수녀를 통해 ‘죄책감이 나 때문에 생긴 감정’이라면,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자각을 얻는다. 그제야 그녀는 더 이상 뒤로 숨지 않고, 마주보려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미카엘라 수녀는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이, 사실은 새로운 결심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 번째 감정] 바오로 신부의 후회
바오로 신부는 영화 전반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인물임에도, 의외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정신병 같은 건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구마 의식 자체를 부정하는 쪽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그는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취약해 보이는 존재가 바오로 신부다.
다만 흥미로운 건, 바오로 신부가 어느 순간 결단을 내린 뒤의 모습이다. 영화는 그 과정 자체를 상세히 보여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구마를 돕는 인물로 바뀐다. 바오로 신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구마 의식을 직접 행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위한 물품과 장소, 그리고 현실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후회’가 얼마나 강렬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진작 믿었다면, 아니, 적어도 무관심하지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의 감정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후회라는 감정은 이미 벌어진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을 무력감에 빠뜨리지만, 동시에 그 무력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게도 만든다. 바오로 신부가 보여주는 반전과 지원은, 여전히 죄의식과 후회를 품고 있음에도,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로 인해 유니아 수녀가 고립되지 않고 끝까지 악령에 맞설 수 있게 된다는 점은, 후회가 뒤늦은 도움일지언정 완전히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이야기 속 논쟁거리
정신병에 대한 평가는 사회적으로 여전히 논란거리다. 누군가는 의학적·과학적 치료가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또 누군가는 영적인 문제나 전통적 주술적 방식(무당, 굿 등)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이 영화 <검은 수녀들>은 구마 의식이라는 종교적 접근, 그리고 무당을 통한 민속적 접근, 의학적인 치료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시각에 따라 대처법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현대사회에서도 정신적 문제나 질병을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이 충돌하고 있는데, 영화가 그런 복합적인 관점들을 끌어모았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물론 이야기 자체에 완벽하지 않은 구멍들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 방식만이 옳다고 단정 짓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트라우마나 초자연적 현상에 접근하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사회학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질병’ 혹은 ‘이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다원성을 반영하는 사례일 것이다. 사람마다, 혹은 문화권마다 시각이 다르고, 그 다름이 때로는 갈등을 낳지만, 동시에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게도 만든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던지는 메시지
영화 <검은 수녀들>은 제목만 보면 어두운 분위기의 공포·오컬트 장르로 느껴지지만, 정작 핵심은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한다. 유니아 수녀의 절망감, 미카엘라 수녀의 죄책감, 그리고 바오로 신부의 후회를 통해,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과 상처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지를 펼쳐 보인다. 우리는 종종 절망, 죄책감, 후회 같은 감정이 부정적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 감정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래도 앞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분명 영화상에서 아쉬운 구석이 없진 않다. 마치 급작스럽게 변하는 바오로 신부의 태도나, 미카엘라 수녀가 어떤 식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지 좀 더 구체적인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뚜렷하다. ‘결국 인간을 흔드는 건 외부의 악령이 아니라, 우리가 내부에서 품고 있는 절망,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아닐까?’라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진득하게 남는 여운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어떻게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감독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전반적으로 큰 사건과 스펙터클에 집중하기보다는, 인물 간의 심리적 갈등과 변화를 다루는 데 공을 들인 영화라서, 한 편의 심리 드라마를 본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오컬트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타인을 구하기 위해 절망감을 이겨내고, 과거의 죄책감을 짊어진 채라도 한 발씩 나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이 영화 <검은 수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일상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이름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자, 내가 지닌 모든 감정의 집합체다. 그리고 그 감정들 사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순간, 우리는 자기만의 구원과 용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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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게 될 거라는 비보를 접하고,
어린 시절 처음 들었던 그 북소리를 담은 대작을 만들기 위해
23년을 아껴 두었던 나무를 꺼낸다.
그러나 날씨도, 몸도, 전수자인 아들 동국과의 협업도 마음 같지만은 않은데...
60년 동안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첫 북소리의 울림.
그 울림이 담긴 북을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