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15 22:53:12
향이 아닌 냄새로 기억하는 영화가 있으신가요?
작은 아씨들 리뷰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었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내 미소짓게 만드는 그런 기분 좋은 영화였다.
내용이 미치도록 좋았던 것도, 신선하고 웅장한 장면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분명한 건 영화 자체에서 주는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것. 그 하나로 충분했다.
모든 캐릭터가 사랑스럽고 통통 튀며 각자로부터 전달되는 에너지가 엄청났다. (에이미의 단단하고도 살짝 낮은 그 목소리가, 받쳐 올려주는 그 발성이 너무너무 좋았다)
그냥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당시 뒷자리 분이 타코야끼를 들고 들어오셨는지 가쓰오부시의 강렬한 향과 함께 영화 초반을 보냈다. 실소가 새어 나올 정도로 꽤 강한 냄새였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미소를 머금은 채 스크린 속 작은 아씨들을 보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곤 생각했다. 오늘 영화는 가쓰오부시로 남겠구나.
기억에 향이 묻으면 단단한 추억이 된다.
언젠가 길에 흘러 다니는 타코야끼 냄새를 맡으면 문득, 작은 아씨들이 떠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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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에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타코야끼 생각을 하면 작은 아씨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같이 팝콘을 나눠 먹던 영화관이 떠오른다. 사실 몇 년 되지 않았는데 까마득히 느껴져서 조금 웃기기도 하다.
영화 틈틈히 챙겨 먹으며 팝콘 잔량을 은근히 신경 쓰던 내 모습과 광고가 끝나고 영화 시작 전 완전 암전이 된 고요한 순간에 팝콘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던 그 순간들, 첫 데이트 때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 팝콘 대신 나쵸를 사다 주었다 망했던 그 추억까지..
심지어 요샌 절대 내 돈 주고 사 먹지 않던 과자봉지 팝콘까지 사 먹어 봤다.
몰랐는데 나 팝콘 사랑했네... (노랑 포장지의 스윗&솔트 팝콘 맛있어요. 어디 회사 건지는 기억 안 남 ㅎ)
하루빨리 코로나의 상황이 나아져서, 영화관에서 마음껏 팝콘을 집어 먹을 수 있는 날을 고대해 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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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4주 차 개봉작, 공개 예정작 추천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오늘은 이번 주 개봉, 또는 공개 예정인 작품들을 소개해 드리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로 주목받는 <파벨만스>부터
전종서의 할리우드 데뷔작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까지!
영화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개봉작들을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파벨만스
The Fabelmans
ⓒ 네이버 영화
개요: 드라마 | 미국 | 151분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미셸 윌리엄스, 폴 다노, 세스 로건, 가브리엘 라벨 등
개봉: 2023.03.22.
배급: CJ ENM
시놉시스
난생처음 극장에서 스크린을 마주한 순간부터 영화와 사랑에 빠진 소년 ‘새미’(가브리엘 라벨). 아빠 ‘버트’(폴 다노)의 8mm 카메라를 들고 일상의 모든 순간을 담기 위해 열중하던 새미는 우연히 필름에 포착된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고 충격에 휩싸인다. 진실을 비추는 필름의 힘을 실감한 새미에게 크고 작은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엄마 ‘미치’(미셸 윌리엄스)의 응원으로 영화를 향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져만 가는데… 영원히 간직하고픈 기억, 영화의 모든 순간과 사랑에 빠진다!
CINE PICK!
<파벨만스>는 수많은 명작들을 배출한 할리우드의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감독 본인이 "이 영화는 내가 가진 기억 그 자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성장 과정 속에 겪었던 에피소드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고 하는데요, 단순히 그의 영화제작 일대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이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등 한 개인이 그의 삶을 통해 투영해 낼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녹여내 수많은 영화인들과 평론가의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듄>, <컨택트> 등으로 유명한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 영화를 '기적'이라고 평가하며 시네마의 힘을 다룬 영화들 중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총 7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요. 일평생 영화를 사랑했던 감독의 삶을 그린 영화다 보니, 영화와 관련한 레퍼런스가 많이 등장하고 시네마 자체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선물 같은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
Mona Lisa and the Blood Moon
ⓒ 네이버 영화
개요: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 미국 | 107분
감독: 애나 릴리 아미푸르
출연: 전종서, 케이트 허드슨, 크레이그 로빈슨 등
개봉: 2023.03.22.
배급: 판씨네마(주)
시놉시스
붉은 달이 뜨던 밤, 폐쇄병동에서 스스로 탈출한 '모나'(전종서)는 화려한 조명에 이끌려 도착한 낯선 도시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챈 기묘한 사람들을 만난다. 모나의 능력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댄서 '보니'(케이트 허드슨), 모나한테 첫눈에 반한 로맨티시스트 DJ '퍼즈'(에드 스크레인), 모나에게 락 스피릿을 가르친 11살의 소울메이트 '찰리'(에반 휘튼), 그리고 모나를 뒤쫓는 언럭키한 경찰 '해롤드'(크레이그 로빈슨)까지. 완벽한 밤… 완전한 자유? 완성된 운명!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모나'의 모험이 펼쳐진다.
CINE PICK!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은 독보적인 분위기와 눈빛으로 <버닝>의 '해미', <콜>의 '영숙' 등 매번 전례 없는 개성을 지닌 캐릭터를 탄생시켜 온 배우 전종서의 할리우드 데뷔작으로, 폐쇄병동을 도망친 의문의 존재 '모나'가 낯선 도시에서 만난 이들과 완벽한 자유를 찾아 떠나는 미스터리 펑키 스릴러라고 합니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와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더 배드 배치>로 단 두 작품만에 전 세계에 자신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으며 <유전>, <미드소마> 등 다수의 작품들을 함께한 아리 애스터 사단의 촬영감독 파웰 포고젤스키가 합세해 화려하고 독창적인 영상미를 선보였다고 하는데요, 일찌감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경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것을 시작으로 BFI런던국제영화제, 취리히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멜버른국제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작품성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감각적인 영상과 더불어 EDM과 블루스, 하우스, 락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사운드트랙이 깔려 영화의 펑키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한층 배가시켰다고 전해지며, 전종서 배우의 넘치는 에너지와 도발적인 연기가 시선을 사로잡는 독보적인 매력의 영화일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웅남이
Woong Nam
ⓒ 네이버 영화
개요: 코미디, 액션 | 대한민국 | 97분
감독: 박성광
출연: 박성웅, 이이경, 염혜란, 최민수, 오달수 등
개봉: 2023.03.22.
배급: CJ CGV
시놉시스
태초에 마늘과 쑥을 100일 동안 먹고, 곰에서 사람이 된 최초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이름 웅녀… 아니 웅남이??!!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졌지만 얼마 남지 않은 곰의 수명을 우연히 알게 된 충격에 경찰을 그만두고 빈둥빈둥 곰생인생을 살게 된다. 하지만 자신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이 생긴 테러 조직의 2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엄마의 소원인 경찰 복귀를 위해 형사, 구독자 10명의 유튜버, 동네 순경과 공조하여 국제 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공조 수사대에 합류하게 되는데…
CINE PICK!
<웅남이>는 개그맨 박성광이 감독한 네 번째 연출작이자 첫 장편 상업 영화로, 인간을 초월하는 짐승 같은 능력으로 국제 범죄 조직에 맞서는 '웅남이'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단군 신화를 모티프로 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쌍둥이 곰'이라는 참신한 설정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인데요, <신세계>, <내안의 그놈>, <젠틀맨> 등으로 느와르부터 액션, 코미디까지 폭넓은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박성웅이 전직 경찰이자 동네 백수인 '웅남이', 그리고 그와 180도 상반되는 모습의 국제 범죄 조직 2인자 '웅북이'를 동시에 연기해 화제가 되었는데요, 어떤 모습도 찰떡같이 잘 해내는 배우이기에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그의 매력이 여과 없이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코믹 대세 배우 이이경과 베테랑 배우 염혜란, 최민수의 출연으로 더욱 다양한 재미를 첨가해 침체된 한국 영화계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작품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틸
Till
ⓒ 네이버 영화
개요: 드라마 | 미국 | 131분
감독: 치노늬 추크우
출연: 다니엘 데드와일러, 제일린 홀, 헤일리 베넷 등
개봉: 2023.03.22.
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시놉시스
1955년 시카고. 엄마 메이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14살 흑인 소년 에밋 틸은 미국 남부에 사촌을 만나러 갔다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다. 메이미는 에밋의 참혹한 모습을 세상에 공개해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로 결심하는데… 피부색으로 정의를 가리던 시대, 그녀의 용기 있는 외침이 시작된다.
CINE PICK!
영화 <틸>은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에밋 틸 피살 사건' 이후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려 남부 전역에 민권운동의 확산을 불러일으킨 엄마 '메이미'의 감동 실화를 담고 있습니다. 제76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 주연상 후보를 포함하여 전 세계 영화제 81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21개 부문에서 수상해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아들의 충격적인 죽음을 목도하게 된 엄마 메이미의 참담한 심경부터 아들을 잃은 비극에 침잠하지 않고, 스스로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강인한 엄마이자 여성의 모습을 단단하게 그려내 가슴 아픈 공감과 묵직한 감동을 안겨주는 영화입니다.
실제로 메이미의 행동은 지역 사회의 분노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북부와 남부의 흑인들이 연대하는 계기가 되어 수많은 투쟁 끝에 1964년 인종과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 국가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미국 연방 민권법이 제정되는 데 일조하였고, 나아가 2022년 3월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에밋 틸 안티 린칭 법안(The Emmett Till Antilynching Act)으로 이름을 붙인 반린치 법안에 서명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3년 2월 16일 백악관에서 <틸> 상영회를 개최하며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진실, 국가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것. 그래서 이 영화가 중요하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
The Brand New Testament
ⓒ 네이버 영화
개요: 코미디 |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 115분
감독: 자코 반 도마엘
출연: 브누와 뽀엘 부르드, 욜랜드 모로, 까뜨린느 드뇌브 등
개봉: 2015.12.24.
공개: 2023.03.24.(왓챠)
배급: (주)엣나인필름
시놉시스
유럽 브뤼셀의 수상한 아파트, 그곳에는 못된 심보의 괴짜 신이 살고 있다. 어엿한 가정까지 꾸리고 있지만 인간을 골탕 먹이기 좋아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겐 소리 지르기 일쑤, ‘진상’ 그 자체가 바로 ‘신’이다! 심술궂은 아빠 ‘신’의 행동에 반발한 사춘기 딸 ‘에아’는 아빠의 컴퓨터를 해킹해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는 날짜를 문자로 전송하고, 세상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세상을 구원할 방법은 오로지 신약성서를 다시 쓰는 것뿐! 에아는 새로운 신약성서에 담을 6명의 사도를 찾아 나서는데 …
CINE PICK!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인간을 괴롭히기 좋아하며 아내와 자식들에겐 진상 짓을 서슴지 않는 고집불통 괴짜 신과 그로부터 세상을 구하려는 사춘기 딸 에아가 새로운 신약성서를 쓰기 위해 6명의 사도를 찾는다는 독특하고 위트 넘치는 설정의 이야기로, <토토의 천국>, <제8요일>, <미스터 노바디> 등을 연출하며 재치 있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유럽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으로 인정받는 자코 반 도마엘이 연출한 작품입니다. 다크한 블랙코미디 장르의 특성과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 표현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영화인데요, 지난 2월 28일 넷플릭스에서 서비스가 종료된 뒤 왓챠로 넘어온 것으로 보이며 혹시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관람 시기를 놓친 분들이 계시다면 이번 기회에 감상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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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OTT 신작 등 총 다섯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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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범택시>로 보는, 최근 한국 드라마의 몇 가지 단상
이제훈 주연의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모범택시>는 피해자들을 대신하여 흉악한 범죄자들을 사적으로 처리하는 택시회사 ‘무지개 운수’ 사람들의 복수 대행극이다. 학교폭력 논란으로 배우가 교체되는 논란을 겪기도 한 이 드라마는 1회 10.7%로 시작한 시청률이 2회 13.5%로 상승하며 기분 좋은 첫 주를 맞이했는데, 나는 (아직은 섣부른 판단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의 성공을 보면서 최근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거나 혹은 화제가 되었던 한국 드라마 간에 몇 가지 유사성이 눈에 띄어 그것들을 적어보려 한다.
1.
중국산 김치, 악덕 고용주, 무기징역 범죄자의 조기 석방 등 <모범택시>가 응징해가는 대상엔 한국에서 벌어진 몇몇 범죄 사건을 어렵지 않게 대입할 수 있는데, 드라마 역시 이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극중 한 범죄자 이름이 ‘조두철’이다). <빈센조>가 마피아를 내세워 대기업의 횡포를 처단하고, <경이로운 소문>이 ‘카운터’들을 내세워 악귀들을 물리쳤던 것처럼 <모범택시>도 음지의 조직이 형사사법기관을 대신해 본인들의 방식으로 범죄자들을 응징한다. 이처럼 최근 한국 드라마에선 공권력이 부패하고 제기능을 못하는 것을 넘어, 그 자리를 사적 개인과 집단이 대체하고 있다.
재난과 범죄 장르의 성격을 지닌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시스템의 무능과 부재를 표상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닐 텐데, <모범택시>는 시스템의 불가능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더 말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이를 잘 나타내는 인물이 장성철(김의성)이다. 그는 가해자들을 비합법적으로 단죄하는 ‘무지개 운수’의 리더이면서, 대외적으로는 범죄피해자 지원센터 ‘파랑새 재단’의 대표이기도 하다. 각각의 역할은 놀랍지 않지만, 두 역할을 함께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의 한계를 드러낸다. 정성철은 가면을 쓴 정의의 사도인 셈인데, 그가 가면을 써야만 했던 이유에는, 법의 처벌과 국가적 지원만으로는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범죄자의 뻔뻔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자리한다. 사법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국민의 법 감정을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통쾌하지만, 그것이 통쾌하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2.
<모범택시>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한번 <경이로운 소문>을 빌려와야겠다. 두 드라마의 흥미로운 공통점은, 범죄자를 응징하는 인물이 개인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이뤄간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들은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우리들’이다. 전 특수부대 장교인 김도기(이제훈)를 제외하면, 평범한 택시회사 직원들로 구성된 인물들은 <경이로운 소문>의 ‘카운터’들이 계급적으로 최상위에 있거나 시민들의 우상인 할리우드식 슈퍼히어로의 모습보다 동네에서 국숫집을 운영하는 등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과 닮아있다. 덧붙여 할리우드의 히어로들이 체제를 ‘대신’하여 외계의 적들과 싸울 때, 한국의 히어로들은 내부의 체제와 ‘대립’한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이 기다리는 것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시민들을 지키는 ‘영웅’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로서 연대하는 ‘시민’인지도 모르겠다.
3.
최근 한국 드라마에선 삽화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 것 같다. 메인 플롯이라는 줄기 위에 다양한 삽화들로 가지를 내는 것은 미니시리즈가 예전부터 자주 사용해 오던 방식이지만, 최근엔 삽화들이 메인 플롯 앞에 서는 듯 보인다. <모범택시>도 2회까지 무지개 운수의 구성원들과 주인공 김도기의 사연은 암시로만 등장할 뿐,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감정이입의 대상이자 극을 끌어가는 인물들의 전사 없이 그들의 역할만 주어진 상태에서 삽화들이 서사를 주도한다. 그리고 이 삽화들은 정체되거나 탈선하는 법 없이 곧게 활주하는데, 악인들이 큰 무리 없이 주인공(들)에게 해결되는 ‘사이다’ 전개에서 오는 쾌감이 상당하다. 이는 사연의 여백을 사건으로 채워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영상 콘텐츠들이 OTT 플랫폼에 맞춰 숏폼의 형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한 시간짜리 미니시리즈들의 자연선택일지도 모르겠다. 2% 넘게 상승한 시청률은 시청자들이 이런 방식에 동의했다는 방증일 텐데, 나 역시 동의하지만, 한편으론 숨 가쁘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르물 사이에서 조용히 마음을 적시던 우리네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교차한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헤운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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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명의 배우가 전하는 가지각색의 이야기
나는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이유는 그냥 멋있어서. 난 사람들을 울릴 줄 아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무언가 말을 해도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앞뒤 다른 사람들이랑 친해지는 건 그 누가 와도 싫겠지? 나는 그런 것들이 엄청 싫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하곤 했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어떤 말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다 내가 재밌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영화 리뷰를 써서 올리는 것도 대중적인 픽들을 골라 쓰는 것, 그러니까 홍상수의 작품보다는 <라라 랜드>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걸 써서 올려야 사람들이 더 많이 본다고 믿고 있다. 아니면 최근에 개봉했던 작품을 쓰는 거지.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기 때문에 나름 객관적인 시선으로 글을 쓰면 사람들이 극장 가기 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나름대로 뿌듯하겠지? 근데 나는 이게 어느 정도는 일반 대중들에게 먹힌다는 걸 앎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쓴 세상들을 읽게 만들려면 사람들이 어떤 걸 궁금해야 할지를 알면서도 내가 진정성을 담아 쓸 수 있는 글만 키보드에 적는 것이다.
그런 태도에서 오는 강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글 쓰기가 쉽다는 것이다. 없는 내용을 만들어서 쓰기보다는 있는 생각들을 와다다 쓰는 게 쓸 때 편하다. 두 번째. 몰입이 잘 된다는 것이다. 4초당 1번꼴로 휴대전화를 보는 나는 집중이 잘 돼야 다음 문장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 가치관이 담겨 누가 읽든 글의 힘이 느껴지게 하는 것 같다. <완다 비전>을 보고 느낀 후반부의 처연함이나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를 느낀 인연의 감사함도 다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해서 쓴 글이다. 이는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떤 씨네 아티스트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결합해서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곤 하는데, 그런 식으로 극을 만들면 확실히 하고자 하는 말을 진정성 있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교훈을 며칠 전에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지난 8일 왓챠에 박정민-손석구-최희서-이제훈 네 명의 배우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단편영화가 공개됐다. 아무 생각 없이 본 단편영화 4작품이지만 난 이번 해에 봤던 한국영화 중 가장 큰 감동을 받았기에 여러분에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각 배우들이 가진 진정성이 너무나 잘 느껴져 좋았다.
1) 반장선거(박정민)
반장선거는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다. 한 초등학교 반에서 반정 선거를 하는데, 세 명의 후보가 나와서 각자의 선거운동을 펼친다. 사실 돌아보면 '초등학교 반장이 별건가' '고등학교 학생회장이 별건가' '대학교 ~장이 별건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에- 물론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나름대로 치열하게 했을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트와이스 섭외부터 시작해 가지각색으로 공약을 펼치는 아이들. 마치 2022 대선을 앞두고 있는 양 당의 후보를 보는 듯하다. 보통 이렇게 반장선거에 나갔던 아이들은 학생들의 주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흔히 말하는 '아싸'에 속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은 주인공. 사랑받고 싶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마음에 반장선거를 나서는데, 여기서 오는 코미디와 서스펜스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도 저랬지'하는 공감을 일으킨다. 아마 <벌새>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작품 역시 좋다고 느낄 것 같다. <벌새>의 은희는 인간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인데, 이때 여기서 얻었던 따뜻한 포옹을 기억한다면 이 작품이 선사하는 뒤틀린 코미디가 인상 깊을 것이다. 아이들을 동정이나 이해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같은 인격체로 바라보는 박정민 감독의 시선이 돋보인다.
2) 재방송(손석구)
재방송은 무명배우에 관한 영화다. 아마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봤던 분들이라면 유이(박정민 역) 옆에서 '너 이 나라 감옥에서 인기 많겠다'라고 말하던 역할을 기억할 텐데, 이때 통역사를 맡았던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임성재 배우는 이모와 함께 사는 그냥 평범한 남자다. 피지컬은 좋아서 배우로서의 재능은 충만한 것 같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무명 배우들이 그렇듯 그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설정과 함께 이모와 함께 병원을 들렸다 결혼식장에 가는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다. 두 주인공 이모와 수인은 거대한 결핍이 있다. 이에 대해 수인은 아무래도 예측하기 쉽지만 이모는 말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적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모가 겪고 있는 심리적 부침이 영화의 주요 메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위로가 필요할 때가 온다.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울고 있을 때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따뜻한 손 한 번을 건넨다던가 할 때가 그 예시가 될 것이다. 이 마음의 이면에 깔려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진정성일 것이다. 겉으로는 툴툴대도 용기 내 손 한번 건네보는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데, 손석구 감독은 이런 우리에게 '어떤 마음으로 손을 건네어야 하는가'와 함께 그가 제시한 방식으로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후의 <블루 해피니스>의 이제훈 감독처럼 수인 캐릭터가 손석구 배우의 무명배우를 연상케 하는데, 이때 겪었던 '묵묵한 위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감독은 아는 것 같다.
3. 반디(최희서)
'없다'라는 단어는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늘 하던 것이 없고. 돈이 없고. 헬스장 이용권이 만료되고. 익숙하던 것이 날 떠나고 나서야 드는 슬픔은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이 상실과 부재에 관한 영화인데, 우리가 떠나보낸 것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난 아직도 사라지는 게 두렵다.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서, 또 나이가 들어서 날 떠나간다면 앞이 캄캄하다. 요즘은 이런 두려움을 말해 타인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드러내긴 했지만 그게 그렇다고 해서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필연적으로 우리를 따라오는 어두움에 대해 최희서 감독은 어떤 태도로 이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중반부 주인공의 어머니가 주인공에게 하는 대사나 딸이 엄마에게 하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는 것이다. 상실에 대한 최희서 감독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나는 4편의 단편영화 중 가장 좋았다. 나는 아직 보내기 싫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우리, 이별하지 말자. 사랑했다면 그 나름대로 영원히 그들을 기다리며 살자. 그게 우리의 전부가 될지도 모르니까.
4. 블루 해피니스(이제훈)
난 지금 25살이다.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이 주위에 많은 요즘, 주위에 주식이나 비트코인 하는 사람들 진~짜 많다. 부동산 정책이 어쩌니 코로나가 어쩌니 원인은 여러 가지가 제시된다고 듣는 것 같다. 근데 사실 이런 걸 떠나서 돈 벌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을 것이다. 그거 했다고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뭐 멘탈이 약한 사람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취업준비생인 주인공을 내세워 어떻게 주식에 빠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훈 감독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퍽퍽한 현실에 놓인 우리들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시나리오를 쓴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쁜 세상 속에서 돈 문제로 속 썩는 우리는 이런 실패들에 자연스레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현실을 사는 각자에게 '그럴 수도 있지'라며 격려를 보낸다. 지금의 스타 이제훈이 아닌 무명 배우 때 겪었던 고민과 딜레마를 현재에 잘 녹아든 작품이다. 자기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에 상황이 더 구체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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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들만의 리그(1992)> 리뷰
평생 스포츠와 관계 없는 일상을 살았고, 올림픽 시즌엔 늘 소외감을 느꼈으며, 올해에도 어김없이 도쿄 올림픽 열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소시민이지만, 시즌이 시즌인 만큼 스포츠가 주요 골자인 영화를 감상했다. 바로 페니 마셜 감독의 《그들만의 리그(1992) 》다. 미국 의회도서관 선정 영구 보존 영화로도 꼽혔다고 하는 만큼 영화 내에서 문화적, 사회적 텍스트를 구석구석 살피는 것도 영화를 감상할 때의 한 가지 재미일 것이다. 물론 ‘신예로만 꾸려진 스포츠 팀’과 ‘급작스럽게 몰락했으나 어쨌든 유능하긴 한 코치’의 조합에 질렸을 수도 있고, 세월이 흐른 만큼 영화의 세련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이런 지점은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그들만의 리그》가 다큐멘터리인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가볍게라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영화의 스토리적 배경인 AAGPBL의 창립 과정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단 것이 아니라, 여성 프로 야구 경기가 미국을 휩쓸게 된 까닭엔 세계대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단 이야기다. 세계 2차 대전. 아마 의무교육기간에 모두가 들었을 서구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점이 이 때였다. 특히 “미국 정부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을 국방 산업과 경제 전역으로 호출(서재철, 2016)”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장려한다 한들 ‘Rosie the Riveter’는 분명 통념에 위배되는 일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여성 스포츠, 흙 위를 달리고 굴러야 하는 야구 경기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겐 어처구니가 없는 처사다만- 몹시도 여성적이지 못한 일로, 권장한다는 건 얼토당토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선수단에게 주어지는 여러 제약은 우리에게 영화적 장치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 선수들의 증언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선수의 몸을 보호하기 어려워 보이는 스커트형 유니폼, 숙녀가 되기 위한 필수 교양 수업, 상당히 강력한 사적인 생활 제재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유감스럽게도 언론의 태도나 일부 유니폼 규정은 20세기로부터 특별히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일 때도 있으나, 최소한 아들을 데리고 원정을 다녀야만 하는 에블린(비티 슈람)같은 선수나, 외모가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았음에도 스카우트되지 않는 일은 감소했으리라 믿는다-혹은 믿고 싶다-. 이중에서도 마라 후치(메간 카바나프)가 스카우트 되던 장면과, 여성 프로 야구를 홍보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요구되었던 여러 ‘노력’ 에 관해선 선수 개인의 항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존재한다는 걸 실감케 한다. 확실히, “여성과 스포츠는 결국 여성과 남성의 문제, 혹은 여성과 사회의 문제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통적, 관습적인 이유가 있다(김은영, 이혜란., 2004)”고밖에 말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특히 구조적인 요소를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선수들에게 사실상의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위에서 짧게 이야기한 스커트형 유니폼을 입지 않을 때엔 더 이상 선발된 야구 선수일 수 없으며, 신문사 촬영팀의 인터뷰에 기꺼이 응하지 않는다면, 여성 프로 야구 리그는 존속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가정이 그들을 몰아붙인다. 이밖에도, 더불어 선수들이 심각하게 자각하진 않았으나,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장면 역시 있다. 전미 여성 프로 야구라는 이름이 붙어있고, 자작곡 가사엔 캐나다와 스웨덴을 비롯한 국가 이름이 등장하는데도 미국에 사는 흑인 여성은 모집 대상조차 아니었던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장면은 능력이 출중하다면 어떤 인재든 등용한다는 능력주의가 기실 미국 사회의 백인 남성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브레히트까지 인용할 생각은 없으나, 《그들만의 리그》는 영화 내에서 이들의 여정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넌지시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껄끄러움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가 지닌 사회문화적 가치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스토리에 진입하기 전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젠 《그들만의 리그》의 주인공 격인 도티&키트 자매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언뜻 보기에 둘은 야구 경기를 한다는 것 외에 크게 공통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야구를 향한 태도 역시 크게 다르다. 언니인 도티 힌슨(지나 데이비스 & 트레이시 레이너)은 능력이 출중하나 야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동생인 키트 켈러(로리 페터 & 캐슬린 버틀러)는 도티에 비해 실력이 뛰어나진 않으나, 야구에 대한 열정은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이 외, 자매의 연결고리를 부각시킬만한 외모가 닮았다던가, 공유하는 습관이 있다던가 하는 장면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도티와 키트의 관계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키트가 언니에 대해 열등감을 품고 있다는 점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키트는 강하게 불만을 토로한다. 도티와 함께 있을 때 스포츠 실력에 대한 비교를 당하는 것은 물론, 외모에 대한 비교까지 당하는 경우가 잦다고. 그러던 와중 게임에 임하던 순간, 팀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언니에게 키트는 불만을 품는다. 길게 이끌 수 있었으나, 제법 짧게 묘사된 이 갈등은 결국 키트가 트레이드 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편의상 도티와 키트를 주인공격의 인물이라 명명하긴 했으나, 영화가 이 둘의 서사에만 오롯이 집중했다고 보긴 어렵다. 우리는 키트가 트레이드 된 후 라신느에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아 부었는지 알 수 없고, 남편인 밥(빌 풀만)이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야구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도티가 어떤 결심을 하고서 경기장으로 복귀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키트가 도티에게서 승리하는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그의 노력이 촘촘히 쌓여지는 순간을 삽입하여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순간,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시퀀스를 넣었어야 했는데, 페니 마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티가 감독인 지미 듀간(톰 행크스)의 말을 듣고 야구에 대해 숨겨진 자신의 열정을 깨닫고 돌아오는 모습을 삽입하지도 않았으며, 키트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크게 좌절하는 모습을 넣지도 않았다. 감독이 잡아주는 숏이란 그저, 도티가 놓친 공과 승리를 만끽하는 도티를 멀어지는 샷으로 넣어준 것이 전부다.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투수에게 높은 공을 치라고 했던 도티가 자신의 실수에 대해 크게 자책하는 모습 역시 없다.
그렇기에 나는 도티가 마지막 순간 공을 놓친 건, 그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의 유명한 대사, “결과를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처럼, 언니인 자신이 아니라 야구를 위해 온몸을 날리는 키트를 위해 기꺼이 손을 놓은 것은 아니겠는가, 하고. 전미 선수로 뽑혔을 때부터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도티는 지미가 감독직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때에도 나서서 게임을 지휘했을만큼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지미가 야구를 사랑했던 자신의 삶을 망친 5년에 대해 털어놓는 순간에도 감정적으로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미련없이 짐을 싸 고향으로 떠나고자 했으며, 진심으로 키트가 아닌 자신이 트레이드되길 원했다.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도티가 전미 야구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오로지 하나, 동생 키트가 떠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함이었으며, 그가 남편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경기 내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면서도 야구를 떠나면서까지 피하려 했던 것은 혹시 모를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의 기량이 떨어졌다던가, 부상을 입었기에 나오는 내적 갈등 때문이 아니라, 키트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키트를 밀어내면서까지 피치팀에 남으려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를 다시금 경기장으로 부른 건, 남들이 몇 번이고 말한 ‘숨겨진 야구에 대한 열정’때문이 아니라 ‘하나뿐인 자매 키트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야구를 향해 온 몸을 내던지는 동생에게서 야구를 떠나는 것 정도로 화답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돌아왔을 테니까. 그러하므로 도티와 키트는 모두 승리한 것이라 봐도 무방할 터다. 도티는 자매를 되찾았고, 키트는 야구를 되찾았으며, 둘 모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러하니 이 자매가 닮은 부분은, '야구를 한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선 누구보다 고집이 세다는 점이며, 어려운 시대임에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에 있으리라.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끝으로, 영화 속 몇 남성 캐릭터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좀 섭섭한 일일 것이다. 예컨대 마라의 아버지, 마라의 남편이 되는 넬슨, 도티의 남편인 밥, 그리고 감독인 지미 듀간(톰 행크스)까지. 이 당시 여성들은 남성들의 트로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및 문화가 팽배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이들이 함께 증명하기 때문이다. 같은 여성마저 마라를 향해 ‘야간 선수로 세우라’고 이야기하지만, 마라의 아버지와 남편인 넬슨은 그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품고 있다. 지미의 말에 따르면 ‘흔치 않은', 몇 안되는 똑똑하고 괜찮은 남자 밥은 스포츠라는 전통적 여성상과 어긋난 일을 하는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포용한다. 단순히 남성들이 없는 자리를 '계집애'들이 들러리로 채웠다 생각하였으나, 선수들이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발휘하는 것을 발견한 지미는 자신의 리딩 방식도 바꾸려 노력(!)하는 것은 물론 도티에게 찬사를 보내며, 다른 팀의 감독직이 왔음에도 거절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보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상대를 나와 동등한 인간이라 인정할 때 우리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달리 말하자면, 접점 없이 먼 자리에서 선수를 조롱하던 남성 관객은 성 차별주의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선수를 오로지 구경거리로만 취급하였고, 여성 프로 야구 리그를 창단했다 한들 자본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여성 선수를 경제적 손실을 방어할 대체물정도로만 인식했던 월터 하비의 태도는 인본주의적 사상에서 크게 어긋났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이 영화 내의 모든 여성과 남성 캐릭터는 각각의 위치에서 우리에게 성별과 인종을 떠나,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90년대식 인간적 온정을 사랑한다.
★★★★
참고문헌
김은영, 이혜란. (2004). 여성스포츠의 성립배경과 페미니즘적 제 이론 고찰. 한국여성체육학회지, 18(2), 35-45.
서재철. 2016. 영화《그들만의 리그(1992)》에 대한 여성스포츠역사 및 사회적 성 역할 관점의 `교육적` 읽기. 한국여성체육학회지 3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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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어서
미국에서 거주하는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영문과 교수가 된 지윤은 펨부르크 대학 영문과의 학과장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윤은 인종차별을 뚫고, 우아한 학과장 라이프를 누린 성공한 여성 같아 보이겠지만 펨부르크가 배출한 동양인 최초 여성 학과장은 영문학의 위기를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에 맞닥뜨린다.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트렌디해지는데, 펨부르크의 영문학 교수들은 영문학과를 살려보겠다고 방방 뛰어다니는 지윤에게 빅엿을 날려버린다. 게다가 영문학에 대한 인기가 하락하니, 학교의 윗대가리들은 지윤에게 끊임없이 압박을 넣어대는데, 아무래도 우아한 여성 학과장은 물건너 간 것 같다.
1. 꼰대에서 벗어났다고 광고해봤자 여전히 꼰대인
학교라는 집단은 교수와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은 일정 기간 잠시 머물고 가는 비둘기 같은 존재들이지만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 학교에서 최소 정년까지 근무한다. 최소 정년까지라는 말은 교수는 종신 교수로 재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생들은 매년 최신의 유행을 흡수하고, 종신 교수들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편견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수들처럼 하나의 전공만을 주구장창 파는 직종의 사람들, 특히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의 전공에 있어서 전문가가가 되신 분들은 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일 수는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 유연한 사람들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편견이 젊은 사람들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변화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고려, 여성에 대한 인식에 대한 변화가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표면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여전히 교수 집단 내부에서는 유색 인종, 여성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그저 표면적인 허례허식으로 학생들에게 학교가 한 단계 진보하고 있다고 마케팅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 마케팅의 정점에 서 있는 이가 바로 지윤이었다. 표면적인 학교 개혁의 주인공.
그렇게 지윤은 학교의 최초 여성 학과장이라는 허울좋은 상징을 등에 업었지만 고참 교수들은 그녀에게 협조해 주지 않는다. 그녀의 상사는 인기없는 수업은 폐강시키라고 하지만 그녀는 동료들의 수업을 폐강시킬 수 없어 전도유망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여자 교수와 합동 수업을 제안한다. 하지만 백인 노교수와 흑인 젊은 여강사의 조합은 시너지보다는 역효과를 발생시킨다. 몇 명 있지도 않은 수업을 진행하던 나이든 교수가 은근히 무시했던 교수의 인기를 목격했을 때의 그 허탈한 표정은 지식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이 정작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을 표현한 듯했다. 또한, 한 교수의 지식적 발전이 그의 의식적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던 포인트도 그 백인 남자 교수, 엘리엇이 교양있게 흑인 여자 교수, 야즈를 무시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흑인 여자가 영문학 교수가 되기까지 백인 남자 교수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이 이 남자 교수가 인격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밉상으로 보이게 만들었고, 지윤의 좋은 사람이자 좋은 학과장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무너뜨리는 주요한 사건이 된다.
결국, 지윤은 학교는 꼰대 집단이라는 학생들의 편견을 깨부시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개혁된 학교의 상징으로서 여성 학과장이 될 수 있었지만 개혁된 학교를 표방하기엔 그녀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개혁한답시고 모여봤자 꼰대는 자신들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저 꼰대로밖에 남을 수 없음을 지윤의 존재가 증명하고 있었다.
2. 놀랍지 않은, 어쩌면 당연했을 영문학의 위기
영문학은 백인들이 시작한 학문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학문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무리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젠더적 연구 등까지 저변을 확대해 오기는 했지만 과거의 죽은 자들의 역작을 연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학문은 현재성을 띌 수 없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학문의 발전은 다른 학문들에 비해 유달리 느리게 보이기는 한다. 우선, 완성된 문장보다는 단편적인 짤,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미지적 메타포에 익숙해져 있는 젊은 세대가 보기에 초서나 셰익스피어, 바이런 등의 영문학 시인, 소설가들은 구시대적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죽은 사람들의 역작을 평생토록 연구한 교수들과의 근본적으로 소통의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노교수들의 한 우물을 판 전문성이 젊은 세대에게는 휴지조각으로 평가받는다. 그 휴지조각은 결국 강의평가로 표현된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학문에 대한 진심, 학문에 대한 전문성이 전문성 따위는 1도 없는 Undergraduate들에게 평가받아야 하는지 화가 나고, 학생들은 현재성이 없는 학문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거침없이 쏟아낸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의 소통 오류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어느 쪽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현 세대와 소통을 거부하는 학문은 환영받을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부분이었다. 필자도 학생으로써 강의평가를 해보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 학생들에게 대학교의 강의는 순수하게 학문을 배워보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어떤 수업을 들어야 더 재미있고,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지 등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노교수님들의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과 상충될 수 밖에 없다. 필자도 영문학 비스무리한 전공이었기 때문에 꽤 SF소설 수업부터 셰익스피어까지 다양한 수업에 발담가보았지만 현재 가장 핫한 문학적 이슈와 관련해 대해서는 수업받아본 기억은 없다. 아무리 영문학이 꾸준히 발전해왔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트렌드에 익숙한 세대와 트렌드보다는 클래식을 중요시하는 교수들 간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영문학, 아니, 인문학 강단의 미래는 밝을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가 없다.
3. 애매하게 착한 사람은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지윤은 학과장으로서는 실패했다. 애매하게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착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상대편의 욕을 먹더라도 정확한 위치를 고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때가 있다. 지윤에게는 학과장으로 당선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정했어야 했다. 야즈를 위했다면, 엘리엇에게는 조금은 매정했어야 했고, 빌을 위해서도 더 매정한 모습으로 일관했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의 왕관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왕관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싶었기 때문에, 군중 심리에 휩싸인 학생들의 외면과 교수진들 모두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나쁜 사람보다 애매하게 착한 사람이 욕은 더 먹는 것이다. 그러니, 지윤도 억울할 수밖에. 지윤은 오히려 학과장직에서 내려온 현재가 가장 그녀답다. 그러니 달리 생각한다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자리 때문에 선천적인 성격까지 바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안될 사람이기에 달리 생각한다면, 지윤의 우당탕탕 학과장 도전기는 오히려 그녀의 내재된 선함이 학과장이라는 자리의 압박감 때문에 변화할 만큼 얄팍한 선함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녀는 학과장이라는 자리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착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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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샷건 웨딩(2022) 리뷰>
영화 <샷건 웨딩(2022)>는 <피치 퍼펙트(2012)>로 유명한 제이슨 무어 감독의 신작으로, 결혼 직전의 달시(제니퍼 로페즈) & 톰(조쉬 더하멜) 커플에게 갑작스레 닥친 재난을 코믹한 액션과 결부시킨 영화이다. 사실 제목에서부터 두 사람의 결혼식이 심상치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샷건 웨딩이라니! 미국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단어가 거친 서부 개척시대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을 기억할 터다. 현대에 와선 속도위반 등으로 인해 급히 치러야만 하는 결혼식 정도로 희석되었다고는 하지만, 최초의 의미든 현대의 의미든 단어가 갖는 기본적인 방향성은 동일하다. 당사자의 의지가 우선시된 다기보단 외부의 압력 혹은 필요에 따라 진행되는 결혼식이라는 것. 이런 점에서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는 많은 상상과 기대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을 둘러싼 외부 갈등은 무엇일까, 왜 생겼을까, 그리고 둘은 그 갈등을 어떻게 넘어서서 행복한 결합을 이루어 낼 것인가?
※스포일러 주의
<샷건 웨딩>의 초반부는 비교적 타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다르지 않다. 결혼식을 앞둔 커플이 있고, 둘을 둘러싼 말 많고 문제 많은 가족이 있다. 사실, 커플 사이의 갈등조차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서로를 끔찍하게 여기는 듯 하지만 식전 파티에서 손을 놓지 말아 달라는 달시의 부탁조차 곧바로 지켜지지 않을 만큼. 어디 그뿐인가? 이혼 후 애인과의 애정을 과시하며 등장하는 부유한 달시의 아버지 로버트(치치 마린)는 자신이 제시한 럭셔리한 호텔 결혼식을 물린 딸과 예비 사위를 탐탁지 않아 하고, 달시의 어머니 레나타(소냐 브라가)는 달시에게 로버트의 애인 해리엇(다르시 카덴)이 자신에게 웃어 보이는 것도, 다소 점잖지 않아 보이는 톰의 어머니 캐롤(제니퍼 쿨리지)이 다가오는 것조차 끔찍하다며 토로한다. 심지어 캐롤은 집안의 전통이라며 다 녹슨 칼을 결혼 선물로 주고, 달시가 조금도 원치 않았던 구식 웨딩드레스를 입게 권하는 데다가, 톰의 아버지 래리(스티브 콜터)는 끊임없이 비디오만 찍다 축사를 하는 동안엔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까지 한다. 이렇듯 <샷건 웨딩>의 등장인물은 결혼식을 앞둔 커플과 그 두 사람을 둘러싼 가족 관계 등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도식이고, 이 갈등을 푸는 것에 100분 이상을 할애해도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것도 같다. 하지만 액션 요소를 한 스푼 추가함으로써 이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필리핀의 어느 섬에서 열리기로 한 결혼식은 사실 예비 신부 달시가 원했던 스몰 웨딩과는 전혀 다른 류의 것이고, 부족한 재력과 장래의 불투명성으로 달시의 부모님에게 제대로 어필하지 못했다는 초조함을 지닌 예비 신랑 톰 사이엔 바쁘다는 이유로 회피하기만 한 불안이 자리한다. 이 갈등은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점차 고조된다. 게다가 달시의 아버지 로버트가 초대한, 달시의 전 약혼자이자 사업 후계자와 다름없이 예뻐한다는 숀이 도착하는 바람에 달시와 톰 사이의 분위기는 한없이 냉랭해졌다. 그렇다 한들 어쩌겠는가? 본국과 한참 떨어진 태평양의 섬까지 와준 하객들을 생각한다면 갑작스레 모든 걸 멈출 순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참으려 했다는 달시와 ‘당신을 위해서’ 완벽한 결혼식을 준비하고자 했던 톰 사이의 말다툼은 점차 수위가 높아지고 달시는 끝내 반지를 손가락에서 뺀다.
그러나 이때 피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거대한 위기가 당도한다. 바로 해적이 섬을 포위한 것. 결혼식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다. 하객은 모두 인질이 되었고, 로버트는 거의 모든 재산을 잃기 직전이다. 말다툼을 하고자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던 달시와 톰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희망이 된다. 결혼식을 물리니 마니 했던 두 사람이 결국 다시 뭉친다. 피는 물론 벌어진 상처만 봐도 졸도할 듯한 달시가 수류탄을 들게 되고, 높은 탑에 오르는 것조차 무서워하던 톰이 낙하산에서 하강하게 되는 데엔 상대방을 지키고 둘을 아끼는 하객을 구하겠다는 선의와 사랑이 존재한다. 결혼 직전 터졌던 갈등을 전우애로 다시금 봉합한 두 사람이 행복한 결혼을 하는 건 당연지사다.
<샷건 웨딩>을 코믹 액션버스터로 소개했지만 영화에 몇 번이고 등장하는 결혼식의 의미 변화를 떠올린다면 이 영화는 액션 장르로 포장했을 뿐,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문법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처음 등장한 결혼식은 ‘오로지 행복만으로 칠해내고 싶었던 환상적인 결혼식’이나, ‘단 하나뿐인 반려자와 나누는 흠 없는 일생’이란 미숙한 판타지의 상징이며 철저히 부서진다. 이후 영화는 이혼하지 않고 큰 갈등 없이 산 것처럼 보였던 톰의 가정조차 실은 울퉁불퉁한 현실을 얼렁뚱땅 봉합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인생이란 대단히 매끈한 아스팔트 도로를 빠르고 행복하게만 질주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달시와 톰은 이토록 엉망진창이 된 결혼식조차 소중한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배우며, 정신없는 인생을 몇 번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서로를 구하고자 몸을 내던질 줄 아는 상대와 함께 꾸려나갈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리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게 영화 말미의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서약의 의미를 되새기고, 진정한 결합을 완성한다.
결혼이 연애 과정에 쌓아 올린 낭만의 최종점이 될 수 없다는 것, 사랑의 최종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는 점에서 <샷건 웨딩>을 고전적 로맨틱 코미디와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가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사랑의 완성도 아니다. 감독이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것은 삶의 복잡다단함이다. 단 하나의 일반적인 결말을 원할 뿐이더라도 뜻밖의 상황이 펼쳐져 엄청난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경쾌한 경고라 여겨도 좋다. 혹은 뒤죽박죽, 알쏭달쏭한 인생 속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동반자 한 명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결혼(혹은 삶)일지 모르겠다는 으쓱임 하나 정도이지 않을까.
<샷건 웨딩>은 정말이지 여러모로 뻔하고 가벼운 영화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속속 등장하는 소품의 활용과 다채로운 사투만큼은 일품이다. 전투뿐만 아니라 달시와 톰의 티키타카나, 범상치 않았던 하객의 대응 역시 웃음을 적지 않게 자아낸다. 참을 수 없는 진지함으로 가득한 일상에 지쳤더라면, 당신의 100분을 마법처럼 채워줄 <샷건 웨딩>을 감상해 보는 건 어떨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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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CGV 단독개봉
02:05 육체와 정신
06:22 종교적 해석
11:17 별점 및 한 줄 평
11:36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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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 차오르는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매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가 나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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