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2025-02-17 14:31:38
인간의 조건
드라마 <비밀>을 보고
드라마의 주인공인 민혁은 묻는다. “사랑은 얼마나 대단해야 사랑일까?” 온 마음 바쳐 사랑했던 이를 잃은 그는 세상에 물음을 던진다. 또 다른 주인공인 유정. 유정은 이 정도는 되어야 사랑이라고 온몸을 바쳐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랑 때문에 애인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기를 선택한다. 유정이 짊어진 죄는 민혁이 죽도록 사랑하던 애인을 뺑소니로 죽인 것이다. 민혁은 그녀를 용서하지 못한다. 감옥살이로 죗값을 치르는 일은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는 그녀의 삶을 철저히 망가뜨리려 하고, 그렇게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시작된다.
사랑이 뭐라고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벌인다. 유정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끝없이 비밀을 만들고, 민혁은 그런 그녀를 끝없이 미워하며 괴롭힌다. 그리고 익숙한 전개가 이어진다. 서서히 밝혀져 가는 비밀과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서로에게 끌리는 두 사람. 흔하디흔한 ‘막장 드라마’적인 서사.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몰입했고 단숨에 감상을 마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분명 한 끗이 다른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표면적인 소재는 ‘사랑’이다. 그러나 드라마의 서사를 찬찬히 좇다 보면, 다른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사랑’을 경유하여 ‘인간의 조건’을 논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유정은 일견 바보 같은 인물로 보인다. 남자 하나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여자라니.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민혁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 말은 습관이 되고 만 것인지,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고 나온 뒤에도 그녀는 조금의 실수에도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처음에는 그녀가 한심했다. 사랑이 뭐라고, 그깟 남자 하나가 뭐라고 저런 삶을 선택하여 불필요한 죄책감을 짊어지고 사는가. 그러나 그녀는 사실 그렇게 얄팍한 사람이 아니다.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그날의 사건이 유정의 짓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민혁은 유정에게 묻는다. “그날 네가 운전을 안 했다면 실은 안도훈이 한 거라면 말야. 네가 이렇게 나랑 더럽게 엮이진 않았을 텐데.” 유정은 답한다. “아니요. 만약에 제가 운전을 하지 않았다 해도 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분이 돌아가신 그날 밤 전 분명 그 자리에 있었어요.” 유정은 그저 안도훈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기에, 사랑했기에 죄책감을 안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녀 또한 그 자리에 있었기에, 어딘가 수상한 그의 행동을 보고서도 그 순간을 넘겼기에 죄책감에 사는 것이다. 반면 안도훈이라는 남자의 모습은 어떠한가. 유정의 희생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며 되려 그녀를 탓한다. 나아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다른 죄를 저지르는 것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자신만을 알고 죄책감 따위는 모른다. 그가 보이는 불안은 죄책감이 아닌 자기 연민에 불과하다. 결말부 모든 비밀이 드러났을 때야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유정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그는 주어진 수많은 기회들을 놓쳤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은 무엇일까. 유정은 자신이 무결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이 민혁의 애인을 죽인 것은 아니나, 은연중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앎에도 외면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실 세상 어디에도 무결한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잘못을, 크게는 죄를 아느냐이다. 그리고 그것에 맞는 대가를 치르느냐가 문제다. 이 작품을 보고 내가 죽도록 미워했던 이들을 생각했다.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 기회를 줬었다. 그러나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 시간들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아끼는 이들이 떠올랐다. 작은 실수에도, 심지어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모두 자신의 탓인 것 같다며 끝없이 자책하며 아파하는 이들. 그렇게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나의 사람들을 ‘자의식 과잉’이라며 놀리곤 한다. 어떻게 그들을 위로해 줘야 할지, 어떻게 그 일들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설득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내뱉는 말. 그런 당신이기에 사랑하지만, 그것만이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아니기에 슬퍼지곤 한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인지하지도 못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바보같이 인간다운 당신들이 내 곁에 있다.
작품 하나를 보고 수많은 생각을 했다. 10년도 더 된 작품이기에 불편한 지점이 없지는 않다. 작품의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지점은 분명히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민혁은 너무나 폭력적인 남자이며, 그런 지점에서 용인할 수 없는 장면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빌드업을 통해 작품은 분명한 설득력을 갖는다. 나아가 서로를 적으로 두던 여성들이 진정한 친구로 거듭나며 연대하는 모습 또한 좋았다. 죽도록 미워했지만 어느 순간 안쓰럽기도 하고 그것이 애정이 되기도 하는 그런 우정이 좋았다. 이런 작품이 단순히 과거의 작품들에서 성별을 반전할 뿐 납작하디 그지 없는 최근의 작품들보다도 훨씬 좋지 않은가.
드라마 한 편을 본 것뿐인데, 내 인생과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전부 스쳐 갔다. 내가 그 사람들을 이제는 조금 덜 미워할 수 있기를, 나 또한 인간의 조건을 잊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여리디 여린 사람들이 최소한 오늘만큼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에 아파하지 않고 편안한 밤을 보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