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신고

댓글 신고

test2021-02-23 17:00:00

<트랜짓>의 게오르그

두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는 유령난민

매혹적인 은유 덩어리, <트랜짓>

 

"그러니까 내가 이 호텔에 머무르려면 이 나라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걸 증명해야만 하네요?"

 

어렵게 마르세유에 도착해 호텔에 잠시 묵으려는 게오르그에게 호텔 주인은 체류 허가증을 요구하며 그가 잠시 머물다 갈 사람임을 증명하라고 한다. 머물고 싶어도 마음대로 머물 수 없고, 떠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 영화 <트랜짓(Transit)>(2018)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는 자들의 딜레마를 조명한다.

<트랜짓>은 선명한 영화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기묘하게 점유하는 영화의 배경은 영화의 선명도를 한껏 낮춰 그 자리를 모호함으로 채운다. 선명하지 않다는 말은 곧 규정짓기 어렵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특정 관점을 견지한다기보단 복합성을 머금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트랜짓>은 그 자체로 시공간대를 중첩하고, 인간상을 교차하고, 다양한 실존적 딜레마 요소를 얽어내어 가공해낸 매혹적인 은유 덩어리에 가깝다. 모호한 기운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무정형의 덩어리 <트랜짓>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과정에서, 겹과 겹 사이의 공간이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나타난 난민 문제는 오랜 기간 논의가 되어온 범세계적 사회 이슈다. 이때 나는 조금 디테일한 면에 주목하고 싶다.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오르그를 관찰하려고 한다. 그를 통해 영화에서 난민들의 삶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게오르그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다. 그는 죽은 바이델의 소지품과 편지들을 챙겨 마르세유로 떠난다. 상태가 위독한 동료 하인츠는 마르세유에 도착하기 전에 죽는다. 번듯한 신분증조차 없이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던 게오르그는 졸지에 두 남자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삶에 직면한다.

 

 

 

 

 

 

 

 

 

 

 

 

 

 

 

 

 

 

 

 

 

 

두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는 게오르그

 

누구의 신분도 빌리지 않은 게오르그의 민낯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게오르그는 독일 출신의 난민이다. 하인츠의 아들 드리스가 골키퍼는 독일이 최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게오르그는 독일인이면서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는데, 현대 독일 국민의 스포츠 문화를 염두에 둔다면 독일인으로서 게오르그가 품은 정체성은 은근슬쩍 뭉그러진다. 영국, 스페인, 독일 등이 축구 문화의 선봉장인데다 자국민들의 관심도도 매우 높고 독일이 축구사에 있어 걸출한 골키퍼를 많이 배출한 국가라는 사실 등이 자연스레 뒤따라온다는 점에서, 게오르그는 분명 소속감이 결여된 타자다. 어쩌면 그에게 정체성이 지워진 껍데기로서의 삶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바이델의 신분으로 위장하거나 하인츠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은 상태의 게오르그는 피상적으로 존재는 하지만, 내면이 텅 비어버린 갈 곳 잃은 유령이다.

우선 게오르그에게 죽은 동료 하인츠의 삶을 대체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인츠의 아내 멜리사와 아들 드리스 역시 게오르그와 같은 불법 체류자로, 정착을 어려워하는 불안정한 존재들이다. 드리스는 게오르그를 통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 한다. 멜리사에게 청각 장애가 있으므로 소통에 있어 제약을 받기 때문에, 게오르그와 드리스의 관계가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게오르그는 드리스와 유대를 쌓아가며 아이에게 애착을 느끼게 된다. 의사 리처드가 볼 때 게오르그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 의사는 게오르그에게 왜 그 아이를 사랑하는데 버리려 하냐고 추궁하지만, 정작 게오르그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상투적인 이유를 거들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소속감이 없는 유령 같은 게오르그는 아무리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처럼 보여도 쉽사리 녹아들지 못하며, 이는 곧 게오르그의 텅 빈 정체성을 부각한다. 멜리사와 드리스 모자 역시 끝내 마르세유를 떠나 홀연히 사라진다는 점에서 난민들의 처지에 대한 상징성을 강화하고 있다.

 

 

 

 

한편 게오르그는 죽은 작가 바이델의 신분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멕시코 영사관을 떠올려보자.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떠난 사람일까요? 남겨진 사람일까요?”. 게오르그는 바이델과 마리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참고할 만한 자료는 오면서 읽었던 편지뿐인 상황에서 그는 나는 더 이상 아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남겨진 이가 먼저 잊을 거라는 암시를 날린다. 이 말은 마리의 말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그녀는 게오르그에게 남겨진 사람에겐 슬픈 노래와 동정이 있지만 떠난 이에겐 아무것도 없다라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영사의 질문은 남녀 관계의 딜레마를 건드리는 아련한 물음이지만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겠다. 남편을 떠난 마리는 남편을 계속 그리워하며 찾으려 한다. 독일을 떠나온 게오르그 역시 라디오 수리를 하며 어렸을 적 엄마가 자장가로 불러줬던 노래를 부르며 추억에 잠긴다. 게오르그는 자국의 골키퍼가 유명한 지조차 모르는 독일인이다. 자국에서의 삶은 저 멀리 기억 저편에 묻어둘 법도 하다. 그런 게오르그가 아직도 자신이 떠나온 국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게오르그의 양가적 면모는 그를 스스로 모호한 존재적 잔상에 갇혀 있도록 만든다.

 

 

 

 

 

유령 난민 게오르그를 구속하는 경유지

 

게오르그라는 존재는 소속감 없이 부유하는 난민의 공허한 삶의 표상이다. 미국 영사관에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하는 듯한 영사의 질문에 게오르그가 바이델의 유작 원고 일부를 읊는다. “여기가 지옥이라는 그의 말은 비록 바이델의 표현을 빌렸음에도, 게오르그 본인의 처지를 강조하는 역설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지옥 그 자체인 셈이고, 정체성과 목적지를 모두 상실한 방랑자로서의 비참한 최후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런데 지옥에서의 삶을 체념하고 받아들여야만 오히려 살아남는 건 아닐까. 재밌게도 게오르그의 곁을 떠나 마르세유라는 경유지(지옥)를 탈출한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모두가 거쳐가는, 그 누구도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는 경유지가 난민에게만큼은 운명적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씁쓸함이 몰려온다.

이제 게오르그는 지독한 상실감을 받아들여야 한다. 돈도 있고 장비도 있으니 바텐더에게 게오르그는 산맥을 넘겠다고 말했지만, 모든 걸 포기한 채 마리의 잔상에 취해 있는 그의 뒷모습에선 탈출과 전진을 향한 동력을 찾을 수 없다. 비자도 없고, 점령군의 세력은 갈수록 확장되고 있으며, 사랑하는 이들도 전부 자신을 떠나갔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눈앞의 현실을 헤쳐나갈 힘을 상실한 채 공백에 사로잡혀 끝없는 표류의 세계로 침잠하다가 문득 유령 같은 마리를 마주하길 고대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오르그의 삶은 정상궤도에 다시 오를 수 있을까? <트랜짓>의 모호한 기운을 빌려 말하자면, 대답할 수 없다. 그저 경유지에 발이 묶여 허우적대는 유령만이 보인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드플레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작성자 . test

출처 . https://brunch.co.kr/@cena0223/85

  • 1
  • 200
  • 13.1K
  • 123
  • 10M
Comments

Relative contents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