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29 21:48:01
장 뤽 고다르 하고 싶은 대로
< 네 멋대로 해라> 리뷰
제목 <네 멋대로 해라>와 비슷하게 감독이 그 전에 본 고전 영화들과 다르게 기존 영화 문법을 깨트리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찍은 영화였다. 주인공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영화의 흐름과 스토리도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구성이었다. 영화의 컷들이 딱딱 끊기는 장면들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다가 뒤로 갈 수록 장 뤽 고다르 만의 새로운 스타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뉴 웨이브 영화라고 불려지는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점프컷이 너무 자주 나오고 뒤로 갈 수록 이 영화 속 스토리가 집중이 안되어서 나에게는 약간 지루하기도 하였다. 수업 때 보았던 영화들은 사회적인 의미가 있고, 대사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면, 이 영화는 대사도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하고, 개연성이 없다고 느껴져서 감독이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미셸과 패트리샤가 호텔에 있는 장면은 ,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고 대화를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마지막 쯤 대사에서 각자의 얘기만 했다는 대사를 듣고 일부러 의도한 대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 영화가 1960년대여서 미셸이란 캐릭터를 만들어도 좋은 작품이라고 칭송 받 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의 시점에서 본 미셸 캐릭터는 자유분방함이 아닌, 허세가 있으 며, 여성을 외모와 성적인 존재로만 바라보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치마를 들추거나 계속 여성의 외모 얘기, 잠자리 얘기를 해서 오히려 불쾌했던 캐릭터였고 굳이 필요한 장면 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주인공에 이입하는게 아니라 주인공의 불행을 더 바라면서 영화 를 보았다.
결말에서 미셸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궁금했었다. 여성 캐릭터 패트리샤는 미셸이 자신의 몸을 만지면 똑같이 때려주고, 브래지어를 안하고, 남성을 신고를 했다. 고전 영화에서 단지 성녀,창녀로 쓰이던 여성 캐릭터가 이 영 화 속 에서는 행동하고 자신의 생각이 있는 여성으로 나온 점은 좋았다. 이 영화의 기법과 진행 방식은 기존의 영화와 다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화로 자리매김했지만, 그 안의 스토리나 캐릭터들은 몰입하면서 보기 어려웠던 영화였다.
결말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패트리샤의 대사와 표정이 좋았다. 패트리샤와 미셸이 이어지는 결말 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미셸이 시키던 대로 하던 패트리샤가 미셸을 신고한다. 결 국 미셸은 총을 맞고 죽었지만, 패트리샤의 마지막 표정과 대사는 전혀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이 결말 이후 패트리샤의 삶은 사랑에 휘둘리는 삶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또 비도덕적이고 자유라는 면목하에 범법을 저지르고 다녔던 미셸이 죽음으로써 나에게는 오히려 통쾌한 결말을 맞이했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는 아직도 나에게는 어렵다. 개연성이 없고 틀에서 벗어난 영화는 나의 취향이 아니지만 , 이렇게 도전을 해보고 새로운기법을 창조하는 도전 정신은 예술 그리고 영화에 있어서 중요하고 그런 점에선 <네 멋대로 해라>가 가지는 상징성은 가치 있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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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어째서 희망과 다정함을 잃은 혐오의 시대를 반복하는 것일까
우린 지금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성별의 이슈에서도,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서도, 심지어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임에도 사소한 무언가를 꼬투리 삼아 비난하려 하는 우리의 관계에서도, 우린 타인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생각해봐야 할 점은 혐오의 시대가 어쩌다 만들어졌는지,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마저도 알지 못 한다는 것이다. 출처도, 신빙성도 없는 누군가에 대한 루머, 실수, 관념들은 우리의 귀까지 은닉하여 스며들어 마치 진실인 것마냥 자세를 취하고, 나만의 올바른 자세를 취하기 무섭게 그것들을 믿는 사람으로 나를 변모시킨다. 그럼 이런 혐오의 시대가 현재의 21세기에만 존재했을까? 가까운 근현대사로만 넘어가도, 냉전 시기가 만든 엄청난 정치적 혐오의 시대가 존재했고,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들을 향한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혐오를 넘어 무분별한 증오의 시대였다. 'Never Again'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우리 일류는 되내이고, 다짐하고, 결심했지만 결국은 'Do Again'을 들고 일어섰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속 "안나"와 같은,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빌 펄롱"과 같은 희망이 이 혐오의 시대를 종식시킬 인류의 최고 무기임을 앎에도 어째서 우린 그 무기를 홀대하고 혐오를 택한 것일까.
영화 <화이트 버드>는 인류 세계사 중 어쩌면 가장 끔찍한 혐오의 시대라였던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속 희망과 희망 속에 피어나는 10대 청소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직접적으로 나치군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인물들의 작지만 거대한 용기들이 한데 모여 서사를 이끈다는 점이 본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영화는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화 <원더>에 등장했던 "줄리안"과 줄리안의 할머니 "사라"의 대화를 외화로 두고, 내화엔 "사라"가 "줄리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즉 영화의 본 이야기 "사라"와 "줄리안"의 서사로 진행된다.
내화의 초반부와 중반부 조금 그리고 종반부까지 "사라"의 나레이션을 통해 내화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사건의 진행을 소개하는데, "사라"가 "줄리안"에게 설명하는 거지만 마치 "사라"가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외화는 학교 폭력으로 퇴학당해 전학 온 새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아직 뉘우치지 못한 "줄리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주려는 "사라"의 대화 장면과 종반부 어둠을 극복한 "줄리안"과 연설을 통해 "줄리안"에게 전한 교훈을 관객에게 다시 상기시켜주는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영화는 내화와 외화를 정확히 구분짓지 않고, 오가는 식의 진행을 선보이는데, 외화와 내화를 번갈아가면 간혹 관객의 몰입도를 해칠 수 있어 위험성이 있는 연출법이지만, 영화 <화이트 버드>는 그런 점이 크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또한 거시적 관점에서 영화의 구조는 어두웠던 소년이 할머니의 교훈을 통해 극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서, 그렇기에 영화가 극의 대비감과 반전된 상황들을 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초반부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본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친구에게 차갑게 대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무시하고, 비하하는 일진에게 아무런 대응하지 못하던 "줄리안"을 종반부에서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변신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영화가 매우 안정적이었고, 관람하는 데에 있어 편함만을 즐길 수 있었다.
파리와는 멀리 떨어진 프랑스의 한 고즈넉한 마을에 "사라"라는 소녀가 살고 있다. 화목한 가정, 평범해서 더욱 따뜻했던 "사라"의 집은 어느날 마을로 들이닥친 나치 군대의 점령에 혼란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이였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이민을 떠나려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나치군이 학교로 쳐들어왔고, "사라"는 그런 나치군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위기의 순간, 동급생이자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왕따 당했던 "줄리안"에게 도움 받아 "사라"는 그의 곳간에 들어가 나치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영화의 초반부와 중반부, 이 곳간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영화는 "사라"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줄리안"은 어떤 식으로 그녀를 도와주는지, 두 청소년 남녀의 관계는 어떻게 변하는지를 다룬다.
영화 <화이트 버드>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런 주객전도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공주처럼 잘 커왔던 한 소녀와 장애로 인해 왕따 당하고, 무시받던 소년의 관계가 나치의 홀로코스트라는 상황으로 인해 역전되어, 무시와 홀대의 관계에서 도움과 구원의 관계로 바뀌었다는 점이 영화의 핵심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비유대인이더라도 유대인을 도왔을 경우 죽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구원하고, 자상함을 베풀 수 있었던 데에는 사랑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영화는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관계의 역전성을 통해 일러주었고, 또한 이를 성인의 사랑이 아니라 10대 청소년의 애틋한 사랑이었기에 더욱 가슴 따뜻해지고, 그들을 응원하고 싶게 했다.
작품의 초반부, 외화 속 "줄리안"이 등교하는 길, "줄리안"이 하교하는 길 등 영화는 "줄리안"의 행하는 길, 행하는 움직임 등에서 모두 '어울리지 못함', '혼란스러움'을 하강하는 시선을 통해 표현했다. 또한 유리창 사이 작은 공간에 비춰지는 그의 연약한 모습들을 비추곤 했는데, 이는 내화 속 창문틈과 벽 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과 지붕 틈에 앉은 하얀 새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이 '틈과 벽'을 통해 마치 외화와 내화 간의 이동을 대화와 나레이션을 사용하여 영화의 구조에 있어 벽을 표현한 것처럼 "사라"가 곳간과 외부 간의 간극, 즉 "줄리안"의 보호와 희망으로 존재하는 공간과 나치의 혼돈과 공포만이 흐르는 공간을 구분지었고, 이는 비록 작은 틈, 얇은 벽이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극대화시켰다. 이 점에서 인상적인 점은 "줄리안"과 "사라"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는 놀이가 바로 '상상놀이'와 '영화'라는 점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 아닌 것들을 통해 현실과 같이 즐기려 그들의 행위는 상상을 통해서라도 행복감을 구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결국 관객이 그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더욱 몰입하고, 그들에게 더욱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영화는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사라"와 "줄리안"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돕고, 이해하며, 자상함을 베푸는 지 풀어내고, 후반부에 도착하여 극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 점만큼은 필자에게 있어 다소 아쉬웠다. 등교하는 길에 실수로 통행증을 안 가지고 와 나치군에게 "줄리안"이 붙잡히게 되고, 그로 인해 "사라"의 존재를 알게 된 나치군이 곳간으로 가 추격씬을 펼친다. "사라"는 늑대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게 되지만, "줄리안"은 도망치던 와중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암시한다. 물론 주연인 인물이 절대적으로 사망해서는 안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야기의 메인을 담당했던 캐릭터가 사망하게 된다면 그에 마땅한 씬 소비를 했어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화이트 버드>가 "줄리안"이라는 인물을 관객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공들여 쌓아올린 탑을 생각한다면 영화가 그 탑을 허무는 과정도 소중히 대하는 게 서사적으로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는 너무 한순간에 탑을 무너뜨려 소비시켰고, 그의 죽음이 희생이 되어 무언가 남는 것이라도 있었다면 영화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점도 없었기에 좀처럼 영화의 그러한 선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영화의 이 모든 것들이 의도였고, 이를 통해 '어쩔 수 없는 그런 슬픈 상황'이라는 점을 살리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점을 생각해보아도 어색함을 감출 순 없었다.
또한 내화의 초반부를 외화 속 "사라"의 나레이션을 통해 장식하고, 배경을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화의 종반부를 외화 속 "사라"의 나레이션으로 마무리지었는데, 너무 이르게 결론짓고, 황급히 마무리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비록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사라"와 "줄리안"의 슬픔 속에 피어난 사랑이고, 결국 내화도 외화 속 변화의 매개체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외화와 내화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작품에서 내화를 본 작품과 같이 끝내는 것은 무리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화를 방점 찍는 과정에서 급작스럽게 의심되었던 이웃들이 사실은 유대인들을 돕고자 했던 가족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어느날 갑자기 찾은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떠나게 된 "사라"의 뒷이야기를 설명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관객을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관객에게 정보를 던져주는 식의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초반부와 중반부까지의 진행이 굉장히 편하고, 안정적이었어서 상대적으로 종반부의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는 것일지 몰라도, 결국 종반부의 완성도로 인해 영화 전체의 완성도가 다소 아쉬워졌다. 더불어, 초반부와 중반부마저도 극의 안정감과 완만함에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하지, 예술적 창의성이나 색다름의 측면에서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그렇기에 영화의 후반부와 영화가 결론짓는 방법이 매우 중요했다. 영화의 초반부 진행과 순서는 관객들 모두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서 일어났고, 그 단조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청소년 남녀의 사랑으로 장식하려 했지만 모두 채우기엔 무리가 있기에 영화의 후반부에 무언가 킥이 필요했지만 부실한 킥으로 인해 이 모든 계획이 다소 어긋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관점에서 종반부가 초반부와 중반부에 비해 너무도 아쉬워 혹평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 교훈, 메시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중요한 이슈로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혐오의 시대를 다시금 반복하지 말자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반복하고 있는 우린 무엇 때문에 다정함을 잃었을까. 어째서 우린 인류의 가장 큰 무기인 다정함을 놓아버리고, 가장 큰 원흉인 혐오를 택한 것일까. 사랑으로 서로를 품을 순 없는 것일까. 많은 분들이 본 작품을 통해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실 수 있으면 좋겠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씨네랩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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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뇨 아빠가 인간이었을 때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자타공인 '지브리 스튜디오'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 덕후다. 일본 방송에 지브리 매니아로 두 번이나 방송에 나간 적도 있다.
영상을 보면서 환경을 생각하게 된 것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클지도 모른다.
<벼랑 위의 포뇨>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에 4년 만에 들고 온 신작이었다. 은퇴한다고 했었는데 새로운 작품이 나온 것도 기대되었지만 이번에는 어떤 내용으로, 어떤 캐릭터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줄까 매우 기대가 되었다.
포뇨를 본 뒤, 어른을 위한 동화를 기대하고 있었던 팬과 평론가들에게는 실망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귀여운 포뇨와 소스케 때문이 아니라 포뇨의 아빠 때문이었다.
<벼랑 위의 포뇨>는 호기심이 어마어마한 물고기 소녀 포뇨가 육지의 소년 소스케를 만나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마 인어공주를 재해석하여, 혹은 모티브로 하여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 역시 다른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과거로의 회귀', '자연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그 깔려있는 스토리는 포뇨의 아빠가 끌어가고 있다. 포뇨의 아빠라고 부르고 있지만 엄연히 '후지모토'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그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리뷰라고 하지만 상상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봐도 무관할 것 같다. 후지모토는 인간이었다. 아니, 아직까지 바닷속에서 편하게 숨을 쉬지 못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애를 잃고 바다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다. 인간인 소스케를
좋아하는 딸 포뇨가 육지로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그는 딸바보, 극성 아빠라며 수많은 욕을 먹었지만 그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주는 이는 없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포뇨의 등장은 쓰레기가 가득한 바다로부터 시작한다. 인간들은 바다에 쓰레기를 마구 버렸고 그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배는 그물을 이용해 바다의 바닥을 긁어낸다. 쓰레기만 치우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다 보니 바다의 생물들은 쓰레기 때문에 피해를 받고, 쓰레기를 치우는 과정에서도 또 피해를 받는다. 인간으로 인해 자연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후지모토가 육지로 올라갔을 때 깨끗한 물을 주위에 뿌리는 행동이나(물론 제초제로 오해받았지만) 소스케와 차를 타고 가는 포뇨를 따라가면서 바닷속의 쓰레기에 계속 맞는 모습으로도 확인할 수도 있다. 후지모토가 더러워진 모래와 뻘에 질색팔색 하는 것은 덤이다.
후지모토가 말하길 그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는 언제부터 인간이길 포기했고, 언제 바다의 여신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까?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일까? 이는 그는 말한 것으로 조금은 추론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물과 공기는 더럽고 인간은 어리석은 생물이다. 인간은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갈 뿐이다."
"나도 한때는 인간이었고, 인간을 그만두기 위해 얼마나 노력..."
아마도 그는 어느 사건으로 인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바다의 여신과도 만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으로 인해 죽을 위기였으나 바다의 여신이 구해줬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포뇨의 현재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는 그는 떨린다며 혼잣말을 했다. 그 떨림은 과연 설렘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이 의문 역시 그가 바다의 여신을 만났을 때 그녀의 손길이 그에게 닿았을 때 확신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 모습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두려움 혹은 경이로움에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떨어진 생명의 물을 먹으러 바다 생물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바다의 결계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한다. 후지모토는 인간이 망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인간이 너무 우점해 있고, 그로 인해서 다른 자연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간 것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되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아놓는 우물의 방의 번호는 1907이다. 1907년은 환경운동의 역사에 한 축인 '레이첼 카슨'이 태어난 해이다. 방 안에 있는 병에 쓰인 숫자인 1957년에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민간 환경운동 단체인 '시빅 트러스트'가 만들어졌고, 세계기상기구가 주관하여 체계적으로 오존량을 관측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병의 숫자인 1871년은 찰스 다윈은 식물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친구인 조셉 달톤 후커에게 진화론의 가설을 편지에 써서 보낸 해이면서 '인간의 유래'라는 책을 출판한 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인지 후지모토가 언제부터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인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이 오래되었다면 후지모토는 환경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던 해의 생명의 물을 소중히 모아 놓았을 것이다.
결국 후지모토도 아버지이기는 한 것인지 자녀인 포뇨의 성장 과정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난다. 포뇨가 소스케의 피와 오랜 시간 모아놓은 생명의 물을 먹어서 파워업되었다고도 알린다. 5살의 사리 분별 못 하는 않는 어린아이에게 무서운 무기를 맡긴 것 같은 말 그대로 긴급상황이다.
하지만 바다의 여신은 딸과 인간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마법의 힘이 가득 차 있고, 데본기의 바다로 돌아간 것 같다며 그 상황을 즐기고 좋아한다. 만약에 후지모토가 바다의 여신을 사랑해서 오로지 그 이유로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었다면 여신의 이 한 마디는 뿌듯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포뇨를 걱정한다. 인간이 싫다면서도 '브륀힐트'라는 딸의 이름을 놔두고 소스케가 지어준 이름인 '포뇨'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을 알 만도 하다. 후지모토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한다. 실제로 인류애를 잃은 것이라면 그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딸 덕분에 그 멸망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다만 사람으로 인해 훼손된 자연이 그 옛날 과거로 돌아갔으면 하고 있었다.
딸이 사랑을 얻는 것에 실패해서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도 후지모토다. 엄마인 바다의 여신은 '원래 물거품이었는데 뭐'라면서 아주 쿨하게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남은 자식이 많더라도 오래된 마법에 자식의 생사를 결정하도록 하는 건 너무 매정한 엄마다.
소스케와 포뇨를 약속의 장소로 데리고 가려고 할 때도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토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은 속아서 갔다고 했지만 후지모토는 그냥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회유책을 썼을 뿐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다리가 나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이동하는데 더 편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데 머리 좀 길고, 스모키 화장을 했고, 화려한 옷을 입고 귀걸이를 했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 후지모토는 가엽기까지 하다. 그리고 요놈 딸내미 아무리 남자 친구가 좋아도 그렇지 아빠한테 물이나 뱉고 있으니 약간의 무력은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지구에 가까이 온 달 때문에 지구의 중력은 달라졌고, 쓰나미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 포뇨 자체가 쓰나미라는 해석이 많다.
결국 소스케의 사랑이 포뇨를 지켰다. 그리고 지구와 세계를 지키게 되었다. 후지모토는 인간의 소스케의 배를 찾아주고, 인간이 소스케에게 악수를 청한다. 지상의 공기와 땅을 더러워하던 그인데 정말 큰 변화이다. 인간이길 포기하기까지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는 그이기 때문에 사실 안타깝기도 하다. 그는 쓰나미 즉 자연재해로 인해 자연의 위대함과 두려움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을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가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들의 삶의 회복을 위해 '급진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후지모토는 한발 물러섰다. 딸의 행복을 위한 아빠의 마음이었을 수도 있으나 남편을 부르는 리사의 오른쪽에 보이는 산에 꽂힌 송전탑을 보면서 생태주의자이자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냥 해피엔딩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캄브리아기로 바꾸려고 했었는데, 그보다 이후 시대인 데본기로 바뀌어도 인간이 살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안 후지모토는 다른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후지모토는 환경운동가였던지, 생물학자였던지, 역사학자였을 것이다. '별의 중력장 붕괴 제2단계' 같은 걸 얘기하는 걸 보면 과학자였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그가 인류애를 잃고 지구와 바다를 과거로 회귀시키고 싶게 된 사건은 결국 알지 못한다. 사실 지금의 행보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고, 바다의 여신이 심심할까 봐 혹은 자신의 마력을 높이기 위해 후지모토에게 일거리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바다의 여신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생각보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인간들 중에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후지모토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환경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으면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의외로 외로운 싸움이기 때문이다.
후지모토를 포함한 이 온 세상 환경운동가들, 힘내시고 평화가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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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함에 상상을 더해 웃음을 만드는 영화.
어디에선가 날아온 로또는 바람을 타고 말년 병장 천우의 앞에 떨어진다. 반신반의하며 맞춰보는데, 아니 이럴 수가 1등 당첨 로또 종이였다. 인생 펼 일만 남은 천우는 온 세상의 기쁨을 맞으며 방실방실 웃는다. 하지만 찰나의 실수로 로또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천우는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다. 다시 바람을 타고 날아간 로또는 북한군 용호 앞에 떨어진다. 천우는 무사히 1등 로또를 되찾을 수 있을지 영화를 통해 확인해보면 좋을 듯하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의 구조가 생각나기도 하는 이 영화는 남과 북의 병사들이 경계선에 서서 1등 로또를 두고 대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남북을 주제로 하는 만큼 정치적인 선입견이 들어가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보았는데, 거리를 두며 적정선을 유지한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인해 어떠한 거리낌 없이 영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토록 가벼운 재미와 우연함에 상상을 더한 황당한 전개가 또 있을까. 시사회를 통해 보고 온 ‘육사오’는 시종일관 웃기려고 작정한 영화 같았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 코믹을 노린 듯했지만 영화의 등장인물들끼리 웃고 떠드는 모습이 마치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시간도 티켓값도 아까워져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웃음을 작정한 이 영화에서는 통 크게 웃겨주어서 재미있게 보았다. 너무 가벼운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TV에서 틀어주면 몇 번을 봐도 재미있었던 코믹영화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악당과 티키타카가 오가며 상당히 웃기고 계속해서 기억나는 영화였는데, 작품성이 떨어지더라도 기억에 남고 재미있는 영화가 어느새 신파와 진지함에 묻혀 사라진 것 같다. 언제쯤이면 다시 ‘강철중 : 공공의 적 1-1’ 같은 영화가 나와 브라운관을 가득 채워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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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니엄의 환희와 청춘의 질감에 관한 인상적인 스케치
술 냄새가 난다. 담배 냄새가 난다. 땀 냄새가 난다. 정돈되지 않은 지저분한 집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약 냄새가 난다. 제대로 닦아내지 않은 정액 냄새도 문득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다. 시끄럽다. 클럽 음악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진동이 내내 쿵쾅거린다. 싸우는 소리가 난다. 불평하는 소리가 난다. 서로를 원망하는 소리가 난다. 홀로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가 난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난다. 저주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난다. 청춘의 냄새, 청춘의 소리다. 이 지독한 냄새와 소리 속에서, 여성 청년 비키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다.
2001년의 대만, 고등학교를 중퇴한 비키는 남자친구 하오하오와 동거 중이다. 하오하오는 ‘예술적 퇴폐’를 지향하는 남성이 갖고 있는 쓰레기 같은 전형성을 고루 갖추었다. 돈을 벌지 않고 여성의 노동에 의존한다. 아버지의 롤렉스 시계를 훔쳐 경찰 조사를 받을지언정 결코 직접 노동하는 법은 없다. 하오하오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의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비키를 의심한다.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는 망상이다. 자신이 노동하면 비키가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상한’ 하오하오는 이런 가능성을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하오하오는 클럽 음악을 만들고 친구들과 술 마실 때만 생기가 돈다. 가끔 욕구가 일어 다짜고짜 비키에게 관계를 요구할 때만 다정해진다. 자기 신세의 비참함에 심취해 마약을 하고 이를 말리는 비키를 경멸한다. 그렇다. 하오하오는 자신의 자발적, 의도적 비루함을 예술가의 고난으로 오독한다. 비키의 몸과 돌봄, 노동에 극단적으로 기생하면서도 그녀에게 군림하려 든다. 치가 떨릴 만큼 익숙한 인물이다(이상의 〈날개〉를 떠올려보라).
소란 끝에 비키는 하오하오를 떨쳐낸다. 그러고는 클럽 관리자 격인 잭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다. 잭은 책임감이 있고 점잖다. 하오하오가 갖추지 못한 것을 가졌다. 그는 비키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으로 떠난다. 비키는 그가 남긴 흔적을 쫓아 일본에 따라간다. 잭은 그녀를 위해 숙소를 잡아주었고, 편지를 남겼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비키는 끝내 잭의 비밀에 다가가지 못한 채 혼자 남는다. 잭에게는 비키와의 관계보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음지의 일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 두 남자가 떠나간 후, 비키는 그제야 홀로 선다.
비키를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도대체 왜 저런 남자들이랑 붙어 있냐’라는 책망은 그 욕망의 소유자도 적당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물음이다. 우리 모두는 종종 알 수 없는 동기로 이해 못 할 선택을 내린다. 문제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혼란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다. 욕망과 충동의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 후과를 알맞게 갈무리하는 것이 성인의 자격이다.
불쾌한 냄새와 소음으로 가득 찬 비키의 2001년은 지극한 성장통의 시기였다. 하오하오는 비키가 자신을 떠나려 할 때마다 애원하며 그녀를 붙든다. 그는 자신이 쓰레기인 것을 안다. 만에 하나 ‘예술가’로 성공하면 미련 없이 비키를 버리겠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이 현실로 도래하기까지는 기생할 상대가 필요하다. 그런 자신을 품어줄 여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아는 하오하오는 그래서 비키에게 더더욱 매달린다. 비키는 이를 관계의 특별함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하오하오의 곁에 머물렀다. 잭은 상대적으로 비키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그녀와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비키는 잭에게 사랑의 대상이 아닌 친밀한 타자일 뿐이다.
세상의 떠들썩한 환호와 함께 맞이한 새로운 밀레니엄은 비키에게 지리멸렬한 현실의 연장에 불과했다. 오히려 모두가 희망적인 미래만을 말했기에 비키가 살아가는 현재의 형편없음이 더욱 극화되었다. 2001년 겨울, 비키는 하오하오와 잭을 거친 후에야 자신만의 뒤늦은 밀레니엄을 마주한다.
영화는 내내 명멸하듯 깜빡거리는 불빛과 뿌옇게 번진 빛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카메라에 담긴 대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기 어렵게 만드는, 많은 것을 뒤엉켜 보이게 하는 이 이미지들은 청춘의 열악한 삶을 환기하는 시청각적, 후각적 자극과 맞물려 비키가 살아가는 현실의 혼탁함을 구체화한다. 비키가 문제적 남성들을 떨쳐내고 하얗게 눈 덮인 일본의 한 마을에서 마침내 혼자가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곳곳에 쌓인 하얀 눈은 어둡고 음습한 방의 뿌옇고 경계가 불분명한 혼탁한 이미지들을 단번에 무력하게 만든다. 일상적 장소에서의 이탈은 종종 시공간의 감각을 새로이 배열하여 기존의 감각을 성찰할 자원이 되어주고는 한다.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두 남자에게 연루되어 고통받던 비키는 이 극명한 빛의 대비와 일상적 시공간에서의 이탈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할 계기를 마련한다. 두 남자로 상징되는 벗어날 수 없는 폭력적 수수께끼를 뒤로하고 밀레니엄의 환희에 뒤늦게나마 동참하는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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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회] 기댈 곳이 없어 너무 빨리 자라버린
개봉 | 2025.08.06.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가족, 미스터리, 스릴러
국가 | 대한민국
러닝타임 | 108분
배급 | 싸이더스시놉시스 |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열세 살 ‘수연’은 보육 시설을 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보호자를 찾아 나선다. 우연히 한 부부의 유튜브에서 ‘선율’이라는 일곱 살 아이를 입양해 행복하게 생활하는 완벽한 가족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추가 입양 계획을 알게 된 ‘수연’은 이들의 새로운 가족이 되기 위해 ‘선율’에게 일부러 접근한다. 그런데 ‘선율’의 행동이 어딘지 좀 이상하다.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수연의 선율>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동 복지에 관심이 있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를 6년째 이어가고 있고, 영화 속 ‘수연’과 같은 6학년 여아들을 담당하여 한 해 동안 그들의 고민과 삶을 나누며 가까워본 적도 있었기에 더욱 궁금했던 작품입니다.
본 영화의 주제를 보았을 때엔 사회 고발을 목표로 하는, 공익성이 짙은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관객이 되어 영화를 들여다 보면, 물러설 곳 없는 아이에게 닥친 현실을 함께 마주하며 서스펜스를 느끼게 되죠. 완벽한 가족처럼 느껴졌던 ‘선율’의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다가길수록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은 커져만 갑니다.
고작 13살인 ‘수연’이 마주하는 거친 세계는 아주 복합적입니다.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의 죽음을 온전히 애도할 겨를도 없이, ‘수연’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지켜내야 합니다. 재개발 예정인 집을 지키기에 ‘수연’은 너무 어리고, 힘도 없습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복지사 선생님도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합니다. 법적 대리인이 될 수 있는 어른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냈던 친구의 엄마인데, 그마저 너무도 선명한 선이 그어진 남이란 사실을 ‘수연’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서 ‘수연’을 좋아한다며 따라붙는 상급생은 비릿한 눈빛을 보내오고, 현관문 앞까지 찾아와 문을 마구 두드리며 위협하죠. ‘수연’은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함부로 팔아버리거나 문 앞까지 찾아오지 못하는, 안전한 집이 필요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함께할 따뜻한 가족이 필요합니다.
최종룡 감독은 방과후 교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단선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됐다”며, 아이들의 복잡한 현실을 그리려는 의도를 밝혔습니다. 그는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캐릭터를 통해 아이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죠. 또한, 감독은 수연과 선율의 캐릭터에 대해, “환경이 그들을 단련시킨 거다”라고 설명하며,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과 그로 인한 성숙함을 강조했습니다.
본 영화를 관람하며, 위태로운 아이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관객들의 생각이 궁금해졌습니다. 온 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입양아 학대 사건, 쏟아지는 키즈 크리에이터와 이에 대한 갑론을박 등, 영화는 현재 우리가 직시하고 답을 찾아야 할 문제들을 선명하게 조명하고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아무도 모른다>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무책임한 어른과 위태로운 아이들의 생존을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죠. 아이를 동정의 눈으로 보기보다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관찰한 모습들을 다루고자 한다는 점도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본 영화를 관람하며 마음에 걸리는 지점들도 있었습니다. 여기부턴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든지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지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의견을 존중합니다.
전 영화가 의도한 메시지에는 공감하지만, 일부 장면에서는 어린 ‘수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어른 중심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캐릭터를 조형하는 방식이 다소 관념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의 폭력과 맞선다”는 의도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아이의 경험을 그리는 방식 자체가 어른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느꼈고, ‘수연’이라는 캐릭터는 ‘아이’라기보다는 ‘조숙한 소녀’로서 일종의 상징처럼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전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언급한 “저항하는 어린이”를 느끼기보단, 물러설 곳 없는 아이가 어디까지 시달려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연’이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을 당차게 해결해나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딘가 ‘수연’을 타자화하는 듯한 연출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아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순진하지 않다”는 메시지 자체가 불순한 게 아니라, 그 순진하지 않음, 호락호락하지 않음이 어딘가 지나치게 조숙하게 연출되었기 때문에, 심하게 말하면 조금 거북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만난 6학년 아이들도 제가 가졌던 관념보다 성숙했습니다. 부당함을 표현할 줄도 알았고, 화가 나면 어른보다 살벌하게 욕을 할 줄도 알았습니다. 아이들도 우울할 때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자신과 주변에 대해 끊임없이 파악하고 업데이트하며 관계를 정립해나가더라고요. 순진하게 아무나 덜컥 믿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수연’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전 ‘수연‘이 고등학생쯤으로 느껴졌습니다. 이게 너무 개인적인 트집으로 느껴지지 않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느꼈든, 영화가 조명하고자 한 의도까지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영화는 더 많이 제작되어야 하고, 더 많은 관객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많이 관심 가져주시고,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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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함께 했던 영화는 환한 꽃이었어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나더러 '쟤는 아쉬운 애'라고 말할까? 이불킥 뻥뻥 흑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을 때, 누가 나더러 그런 이야기를 내 뒤에 했을까? 내가 아는 한 난 욕먹은 게 전부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가 모르는 재능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공부하는 쪽으로. 공부머리가 좋으면 엄청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살아본 결과 난 공부머리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는데 숙련도가 있다는 결론이다. 뭐 공부머리가 좋을 수는 있겠지만 이제까지의 삶을 반추했을 때 그렇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안다. 매일 두 편씩 쓰는 수기. 이 수기야 말로 나의 재능일지도 모른다. 누가 보면 성실한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런 글쓰기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라는 마음이 든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취향과 비슷한 수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웃었고, 화가 났나 하는 일들이다. 주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엔 내가 봐도 쓸데없어서 싫을 것 같다. 이 잡듯 뒤져도 만나기 어려웠던 그 사람. 언젠가 나도 그를 위해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처럼
여자는 누군가의 책방에 도착한다. 스카프를 꼼꼼하게 두르고 나타난 여자. 이 가게의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다. 안에 있는 것들을 몇 번 뒤적거리다 밖의 테라스로 나온다. 전자담배를 피우는 여자. 가게 직원이 나와 ‘필요한 건 없나요?’라고 묻는다. 담배를 피우러 왔다고 대답하는 여자. 직원이 다시 가게로 들어서고 이곳의 주인이 나타난다. 언니! 두 여자는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서로의 근황을 묻는 두 사람. 같은 직원이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 동생이에요. 아는 동생. 아. 너 글은 쓰니? 아뇨. 아마 앞으로도 안 쓸 것 같아요. 너 살찐 것 같아. 맞아요. 저 10kg 쪘어요. 너무 쪄서 맞는 옷이 없네요.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묻다 책 이야기로 향한다. 가게 주인은 손님에게 “얼마 전에 낸 책 읽었어요”라고 답한다. 그 질문을 듣고 본론을 물어보는 손님. “너, 왜 연락을 안 하니? 연락하는 게 부담스러웠어?”
책방 주인은 숨어 지내고 싶었나 보다.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웠던 주인. 주인은 손님이 어떻게 왔을까 궁금해졌다. 손님은 주인에게 ‘너 보러 왔다’고 답한다. 그렇게 솔직해진다. 솔직한 마음은 금세 책으로 옮겨간다. 이제 내가 읽고 싶은 것에 집중하게 됐다는 가게 주인. 세 사람의 대화는 직원의 수어로 이어진다. 날이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 금세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손님. 그렇게 우연처럼 만나 새로운 말을 배웠다.
저도 여기 처음 왔습니다
여자는 다시 이방인이 되어 전망대에 도착한다.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관찰하는 여자. 갑자기 어떤 사람이 스윽 나타나서 인사를 한다. 저 모르세요? 영화감독이랑 같이 사는 사람. 우연 덕에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여자는 같이 사는 영화감독인 남자를 소개한다. 진짜 카리스마 있으세요. 뭔가 영혼이 없어 보이는 말 몇 마디를 한 후에 카페로 향한다. 저기서 뭐 마시도록 하죠. 손님은 영화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같이 온 여자는 감독의 영화가 달라졌다고 한다. 맑아졌다고 한다. 뭐가 맑아졌어요? 영화 만드는 마음이 달라졌어요. 그게 영화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제작에 대한 강박을 떨쳐냈다고 말하는 남자. 사는 태도를 고쳐야 영화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사는 걸 달라지게 한다라.. 말은 쉽지만 역시 어렵다.
감독은 여자가 썼던 소설을 가지고 영화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무기력하게 엎어졌던 지난 이야기를 꺼낸다. 왠지 모르게 영화 만드는 데 영화 외적인 것이 작동하는 것 같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남자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손님 준희. 준희는 카메라 작동법에 대해 배우고 직접 써보기까지 한다.
소설가가 만든 영화
일행은 밖으로 나온다. 어? 저 사람 누구였더라? 그 사람 아냐? 그 배우? 우연히 영화감독과 배우, 소설가와 감독의 부인이 만나고 있다. 여배우 길수와의 근황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길수는 이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나라 독립 영화 몇 편 나오다가 이제는 그 바닥을 떠나려고 하는 것 같다. 길수 씨가 아까워요. 감독은 한 명의 팬으로서 아쉬움을 토로한다. 길수 씨가 아까워요. 근데 준희는 감독의 이런 말이 듣기 싫었나 보다. “뭐가 아까운데요?” 답답해 돌아가실 것 같은 네 사람.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 이상한 주제로 말싸움하고 있다. 이 꼴이 웃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죠.” 이죽거리는 답을 내놓자 두 사람은 후다닥 도망친다. 두 명만 남았다. 어색한 분위기의 두 사람. 한, 두 마디 대화를 하다 또 지인을 만난다. 그 사람은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준희와 길수는 경우와 영화를 만드려고 한다. 난 있는 그래도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럼 다큐멘터리가 되겠네요? 아니오. 그런 건 아니에요. 아. 그럼 뭘 만들지 기대가 되네요.
비스듬히 겹쳐 보이다
비교적 순한 맛의 홍상수다. ‘그 일’이 공개된 후의 홍상수는 매웠다. 아예 죽음이 소재였던 <강변 호텔>이나 <풀잎들>과는 다른 소재를 갖고 왔다. 그 소재는 창작론이다. 영화 전반적으로 ‘하고 싶은 일’과 ‘어떻게 창작할 것인가’가 끝까지 반복된다. 소설가 준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으려고 하고 있다. 근데 갑자기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면 그건 맞는 것 같다. 이 ‘소설가’라는 직업을 ‘영화감독’으로 치환하면 누가 봐도 홍상수 본인의 이야기다. 영화감독이나 소설가 둘 다 뭔가를 창작한다는 점이 이에 대한 근거다.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고 하는 준희의 말이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의 인물의 모습은 겹쳐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러닝타임의 1시간을 투영해서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나, 영화 만드는 방식을 달라지게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인위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자기의 모습을 극 안에 투영하기 시작한다. 이런 영화의 화법은 준희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감독은 길수에게 '아깝다'라고 답한다. 길수는 이에 대답한다. '시나리오는 들어오지만 그냥 독립영화 몇 편 나왔어요. 사람이 귀찮아서요.’ 이건 김민희 배우의 현재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느덧 그녀가 홍상수 이외의 영화에 나온 지가 꽤 됐다. 김민희 배우는 <화차>와 <아가씨>로 만개했던 포텐을 뒤로 한지 오래다. 이런 나는 김민희 배우를 보며 솔직히 아깝다고 생각했다. 천우희 배우만큼이나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 자의 반 타의 반 이런저런 여론 때문에 복귀가 성사될 때 반응이 쉽게 예상이 된다. 전국적인 대스타가 되어 우리나라 충무로를 반으로 쪼개기 충분한 김민희 배우. 그녀의 현실은 평단의 호평과는 별개다.
그게 실패한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홍상수는 이 연인의 처지와 입장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넌 재능이 있어. 근데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뿐이니까. 이런 위로 아닌 위로는 영화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처연해진다.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일. 뭐 그런 걸 소재로 영화로 만들 수도 있어요. 소설가는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준희는 생일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쭉 말한다. 길
수는 ‘저 진짜로 그런 일 있었어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길수는 남편이랑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내면의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길수 부부는 더 이상 술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 같다. 누가 봐도 소원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영화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이야기(<소설가의 영화>에서, 길수 부부가 내면의 이야기 '술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제 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과 유사하다. 그동안 포기할 수 없었던 내면의 욕망, 그러니까 세상이 허락하지 않았던 로맨스를 품고 작품을 찍어내던 예술가의 입장이다. 시간이 지나며 멀어질 수밖에 없어. 그런데 이젠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는다. 감독이 ‘준희’고 배우가 ‘길수’라고 가정하면 홍상수는 이제 외면하면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비유가 성립된다.
이 비유는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적이다. 간단하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누가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관객은 단 한 명이다. 여배우 길수뿐이다. 또 다른 두 인물의 대화에서 ‘이 영화를 꼭 시간 지나고 나서 봐라’라고 말한다. 그니까 관객 길수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길 바란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리고 단 한 장면에서 흑백이던 색감이 컬러로 바뀐다. 꽃을 든 길수. 화장을 안 한 맨 얼굴로 렌즈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슬픈 음악과 함께 길수는 행인과 함께 길을 건넌다. 그렇게 영화 크레딧이 올라간다. 순서 상 단편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도 무방한데 이 영화 전체가 끝났다고 알린 셈이다. 자기가 하고 싶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준희는 자기의 작품 세계를 오롯이 반영한 영화를 끝냈다. 그리고 길수는 혼자가 됐다. 심지어 영화관 스태프와 가는 길마저 다르다. 카메라는 길수가 떠난 곳을 비춰준다. 같이 올라가지 않는다. 또 이 길수가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모습까지 비쳐주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만든 영화가 끝나고 여배우는 혼자가 됐다. 영화는 그렇게 감독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 정말 하고 싶었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니 길수는 혼자가 됐다. 우리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한 사람의 미래다. 이제 그녀는 인지도가 너무 높아졌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의 연애. 두 편의 영화에서 만개했던 연기력. 빼어난 미모까지. 우리나라 영화판이 만든 슈퍼스타인 그녀. 이 여배우는 다시 슈퍼스타로 돌아가기에 너무 멀리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즐거웠던 일상이, 이젠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마저 끝나 영화의 제작진 자막이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엔딩이 한번 더 나온다. 굳이 혼자가 된 길수를 조명하는 감독. 그는 이제 인정하는 것 같다. 내가 외면할 수 없는, 이 시간의 끝자락에 서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며 웃고 떠들던, 첫 만남의 술자리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속에서 너와 함께했던 시간은 꽃과 같이 웃는 얼굴이었다는 걸. 언젠가 날이 저무는 걸 맞이했을 때 이 영화를 봐달라는 것을. 네 삶은 절대 아까운 인생이 아니고, 나는 그런 너를 아름다운 색감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찾았고 이제야 보이는 것
영화는 홍상수의 창작론을 소재로 이끌어간다. 물론 홍상수가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 왔는지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한 명의 연인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보는 것이다. 확실한 근거는 앞에서도 쓴 것들이다. 혼자서 보는 영화. 환하게 웃는 미소의 색감. '삶의 이야기'를 끝내고 올라가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감독 홍상수는 이제야 예술가로서의 창의성이 넓어진 것 같다. 그리고 이 성장을 어두운 환경과 대비시키는 것이야 말로 그가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후반부에 있다고 보는 쪽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물론 누군가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이 절대 잘하는 짓을 아닐 것이다. 내가 뭐 제 3자의 입장이지만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쁜 인간이다. 그는 머지 않아 상처준 사람에게 반성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연인에게 바치는 감사함의 표시는 큰 반향으로 남을 것 같았다. 이것이야 말로 감독 홍상수의 연출력이 아닐까? 잔잔히 집중하게 만들어 후반부의 터트리는 힘, 그게 그가 가진 장점이 집약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의 영화가 아니라 홍상수의 영화다. 이제 보내야 할 것에 대해 당신얼굴 앞에 대고 기억할, 그와 그의 연인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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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 끝장리뷰 | 세 개의 챕터(3막 구조) 분석 | 물과 불 상징 | 천국과 지옥, 신발 의미 | 남성과 여성 | 두 어머니 | 결말해석
[괴물](2023)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3개의 Chapter, 지옥과 신발
Chapter 2 미나토와 요리, 물과 불, 여성과 남성, 결말해석
00:00 고레에다 히로카즈
01:58 3막 구조
04:56 천국과 지옥, 신발
06:16 미나토와 호리
07:10 남성과 여성
10:17 물과 불
11:32 결말해석
13:03 별점 및 한 줄 평
13:21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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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사: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제작: 매튜 본, 데이빗 리드, 애덤 볼링
각본: 매튜 본, 칼 가이듀섹
원안: 매튜 본
출연진: 해리스 디킨슨, 레이프 파인스, 젬마 아터튼, 다니엘 브륄, 자이먼 혼수, 스탠리 투치 외
음악: 헨리 잭맨
개봉일자: 2020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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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종착역> 티저 예고편
사진 동아리 '빛나리' 부원인 시연, 연우, 소정, 송희는 '세상의 끝'을 찍어 오라는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신창역으로 향한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친구들은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는 여정에 점점 지쳐가고, 낯선 곳에서 14살 첫 여름방학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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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언프레임드> 티저 예고편
최희서 감독의 <반디>는 엄마와 함께 사는 소녀 반디의 사연을 담았다.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보듬는 사려 깊은 태도가 돋보인다. 손석구 감독의 <재방송>은 이모와 조카의 짧은 동행을 따라간다. 함부로 위로하는 대신 무심한 척 상대의 마음을 쓰다듬는 원숙함이 신뢰를 더한다. 박정민 감독의 <반장선거>는 초등학교 반장선거를 소재로 마치 범죄영화처럼 흥미진진한 전개를 펼친다. 아이를 동심의 대상으로 포장하지 않는 시선이 흥미롭다. 이제훈 감독의 <블루해피니스>는 취업준비생이 주식에 얽히면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