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2021-02-24 12:32:00
1:1:1 비율로 만든 커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최동수(조현철) 대리가 커피 원두 1, 프림 1, 설탕 1 비율로 먹는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마치 최동수 대리가 타 먹는 커피처럼 공평한 비율로 만들어진 영화 같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커피 원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커피 원두 역할을 맡은 부분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각색하여 만들었다는 점이다. 1990년대 대기업이 운영했던 영어 토익반 시스템과 1991년 발생한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고졸 학력, 여성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차별을 겪었던 일들과 시대 배경을 재연한 연출을 영화가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커피 원두는 맛이 씁쓸하지만, 향은 은은하며 커피에 없으면 안 되는 재료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역시 배경은 당시 시대 사회의 편견에 대한 잘못을 보며 느끼는 씁쓸함과 90년대 옛 향기를 맡게 해 준다. 설탕 설탕 역할은 캐릭터다.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이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점과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무거운 사회 비판을 가볍고, 통통 튀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삼진그룹에 등장하는 여러 남성 직원들도 초반에 권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성격을 취했으나 최동수(조현철)를 시작으로 후반에 빌리 박(데이비드 맥기니스)이 추진하는 계획을 막기 위해 도와주는 모습들이 등장하며 학력, 성별에 대한 차별이라는 초반에 느껴진 좁은 시야에서 그들 역시 메인 캐릭터들과 다를 바 없는 피지배층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며 점차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립구도로 확장되는 시야로 변한다. 이를 통해 이자영, 정유나, 심보람이 개성이나 주연이라는 점에서 각설탕이라면, 삼진그룹 직원들은 뚜렷한 개성은 비치지 않지만 이들도 똑같이 기업이 저지른 잘못에 불만을 품고, 함께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가 그녀들과 같기에 가루 설탕 같은 존재들이다. 프림 프림은 커피에 넣는 크림(cream)이다. 쉽게 말해 커피를 더 맛있고 풍미 있게 만들어주는 재료다. 하지만 프림은 지방이므로 칼로리가 높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프림 역할은 아마 빌리 박과 이자영, 정유나, 심보람이 필두로 있는 여성 직원들의 설득 장면일 것이다. 사회에 억압받았던 주인공들과 직원들이 통쾌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이 장면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사건 해결 과정을 과장되게 연출한다. 주인공들 성격과 사회 비판 설정에 어울리는 클라이맥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절정이 과도하다고 느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라는 커피의 맛을 살려준다. 다만, 1.3이 들어간 프림 같다. (반내림하면 1)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신롬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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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전한 버전의 저스티스 리그 스나이더 컷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모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을 발현시켜 세상을 구하는데 힘을 쓴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혼란을 겪게 된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을 견뎌야 하고, 자신의 능력이 정확히 어디까지이고 어떤 것까지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혹시나 그것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능력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다치거나 떠날 수 있다는 두려움도 같이 느낀다.
어쩌면 이런 영웅의 서사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찾은 사람은 그 사람대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찾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찾지 못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고민과 불안감을 통해 각자는 자신들이 있어야 할 위치를 어느 정도는 찾게 되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런 개개인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은 세상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각자의 위치에서 작은 영웅이 되어 어느 정도는 세상의 성장과 안정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DC나 마블 코믹스에서 만들어가는 영웅 이야기는 선이 악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기본이 되지만 그 안에는 각 캐릭터들의 고민과 방황이 담겨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저 악당을 이기는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같이 그리는 경우가 많다. 마블의 경우는 개개인의 서사를 먼저 독립적인 영화로 만들어 간 후에 여러 영웅을 같이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를 해나갔다면 DC는 개별 캐릭터의 서사를 먼저 보여주지 않고 바로 같이 등장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2017년에 개봉했던 <저스티스 리그>는 어찌 보면 너무 갑작스럽게 많은 영웅을 등장시켜 관객들에게 감정을 몰입할 시간을 주지 않는 영화였다.
기존 코믹스의 팬이 아니라면 슈퍼맨(헨리 카빌)과 배트맨(벤 애플렉)을 제외하면 다른 캐릭터의 특성과 그들의 고민, 그리고 그들이 가진 능력을 모두 한꺼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영화의 전개가 급작스러운 느낌이 있었고 원더우먼(갤 가돗), 플래시(에즈라 밀러), 사이보그(레이 피셔), 아쿠아 맨(제이슨 모모아) 캐릭터의 행동과 특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게다가 감독 잭 스나이더가 딸의 사망으로 갑자기 하차하게 되면서 조스 웨던 감독이 마무리했는데,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가 개봉되고 말았다.
이번에 잭 스나이더가 전권을 받아 다시 구성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각 캐릭터의 서사가 일부 보강되었다. 특히 플래시의 가족사와 그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추가되었고, 사이보그에 대한 서사와 그의 고민도 포함되었다. 4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그렇게 캐릭터의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이전 버전에 비해 좀 더 감정적인 동요를 끌어낸다. 또한 스나이더가 가진 특유의 슬로모션 액션이나 좀 더 디테일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 묘사를 통해 보는 관객에게 보는 재미도 확실히 느끼게 한다. 영화의 분위기도 더 어둡고 진중하게 구성되어 어정쩡한 유머도 많이 줄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웅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영웅들의 특별한 능력이 발휘되는 액션 장면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고민과 성장담을 보면서 결국 같은 세상의 존재라는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허황되게 보이는 영웅의 이야기 속에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야기가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스나이더 감독 버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사이보그에 관한 것이다. 그는 한때 잘 나가는 미식축구 유망주였지만 차량 사고로 중상을 입는다. 그때 마침 외계 물체에 대한 연구를 하던 과학자 아버지의 노력으로 로봇의 몸을 다시 삶을 얻게 된다. 그는 그 자신을 보며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한다.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며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사이보그의 서사는 지금의 성장기의 청소년이나 사고를 겪고 후유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받을 만하다. 영화에서 사이보그가 마음을 고쳐먹는 과정 자체는 조금 두리뭉실 하지만 그의 마음 가짐 변화나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보면서 그를 응원하는 마음은 생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감추고 세상 밖에서도 최대한 조심하며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사이보그 캐릭터의 변화를 본다면 그가 당당히 자신의 몸을 드러낼 때 응원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영화 속 플래시의 캐릭터에도 이런 서사가 일부 보강되었다. 어머니의 살인 혐의로 복역 중인 아버지를 면회하는 플래시의 모습 그리고 현실에서 그가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얻으려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아버지 앞에서의 모습과 대조된다. 아버지 앞에서는 긍정적으로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현실에서는 실수를 연발하고 허풍을 쏟아낸다. 어쩌면 그의 속사포 같은 말투와 유머는 자신의 어두움을 가리려고 하는 노력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유머를 내뱉는 캐릭터는 플래시뿐이다. 이전 버전에서는 그 모습이 잘 조화되지 않고 이상하게 보였지만 이번 스나이더 버전에서는 그의 유머가 그런대로 심각한 분위기 안에 잘 녹아들었다. 그의 유머로 관객을 웃기려는 의도보다는 그의 캐릭터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퍼맨과 배트맨은 대표적인 영웅 캐릭터이고 해당 그룹의 리더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서사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실 특별히 달라진 부분은 없다. 단 배트맨의 경우, 이전 버전에 비해서 좀 더 리더로서의 품격은 더 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 그가 마음 깊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대상인 슈퍼맨에 대한 감정은 전작 <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의 시작>(2016)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질투심과 더 강력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심에 기원한다. 이제 나이가 들고 힘이 떨어진 배트맨은 일반적인 중년들이 느낄만한 그 감정을 이겨내려 애쓰고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저스티스 리그 팀을 구성하는데 힘을 더 쏟았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슈퍼맨의 힘은 너무 강력하다. 그래서 이 시리즈 안에서 그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저스티스 리그> 안에서도 그는 세상을 구할 마지막 존재로 묘사된다. 그래서 이전 버전에서 그가 등장했을 때, 클라이맥스의 긴장감은 급격히 사라지고 상황이 급 마무리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영화 자체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스나이더 감독 버전은 후반 클라이맥스 전투를 일부 보강하여 다른 구성을 보여준다. 플래시의 역할을 좀 달리 하면서 슈퍼맨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고 좀 더 팀업에 가까운 형태로 빌런을 물리치는 구성을 보인다. 그래서 끝까지 영화의 긴장감이 유지된다. 스나이더 감독의 연출에 들어가는 특유의 타격감과 슬로 모션이 보강되며 마지막 액션 장면이 클라이맥스다워졌다.
빌런 스테픈 울프의 서사도 보강되었다. 그가 왜 마더 박스를 얻으려고 하는지 목적이 보다 뚜렷해지고, 그의 과거사에 대한 내용이 추가되었고, 외모적으로 은색의 비늘 같이 보이는 것들을 추가함으로써 좀 더 강력하고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도록 디자인을 바꾸었다. 이전 버전이 컴퓨터 CG라는 느낌이 강했고 비이성적인 캐릭터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스나이더 감독 버전에서는 좀 더 자연스럽고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보여주는 빌런으로 바뀌었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의 화면비는 일반 극장 비율에 비해 양 옆에 잘려있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좀 더 많은 장면을 살려 구성하기 위함이었는데,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OTT나 VOD 서비스만으로 만 제공하게 한 것이 화면 비율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키 XL이 음악 감독을 맡아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음악에 이어지는 음악들을 구성했는데 이 부분도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데 좋은 영향을 주었다.
누군가는 굳이 개봉이 이미 완료된 영화를 다시 구성하여 감독판을 내는 것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전 버전에 비해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가 매우 뛰어난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단지 영화의 전반적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이 원하는 분위기로 바꾸었고, 스나이더 감독이 가지고 있던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보강했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 전체 액션 장면의 스타일도 본인 고유의 스타일로 바꾸었다. 그래서 이전 버전에 비해서 좀 더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로 보인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구성하고 싶어 한다. 2017년에 스나이더 감독이 마무리하지 못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시 세상에 보여줄 기회가 있다는 것은 감독에게도 그리고 관객에게도 좋은 것이다. 이전 버전이 누가 만든 지 알 수 없게 구성된 혼종 영화였다면 이번 감독판은 스나이더 감독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오리지널 작품이다. 그러니까 관객들은 감독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온전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4시간의 러닝 타임이 보는데 부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마지막 파트인 에필로그의 내용은 조금 줄여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담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개봉과 흥행이라는 압박을 어느 정도 덜고 만든 이 새로운 버전은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꽤 많은 관객들이 좋아하는 버전으로 남을 것 같다. 영화는 후속 편을 기약하며 끝나지만 새로운 시리즈가 이어지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잭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리뷰>
https://youtu.be/7g8vNBl7b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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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을 악용한 모순
온라인 세상
정보화 사회와 적합한 영화이다. 21세기의 세상에서 정보력만큼 중요한 것은 또 없을 것이다. 더불어 관련된 응용의 이야기도 말이다. 영화는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이 뉴스 헤드라인에 나오는 영상에 대한 매료로 점차 심화해가고, 냉철해지는 스토리와 주인공의 성격이 반비례해져가는 구도가 나타난다.
자극
이 영화는 잔인한 면이 많고 범죄 사건들과 연관된 영상을 만들다보니 R등급 판정을 받은 영화다. 점층적으로 사건이 자극적이게 되고 주인공과 영화를 보는 사람은 더욱 무리수를 보게되는 쓴맛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자극을 피하고 싶어서일까 주인공은 낮이든 밤이든 항상 선글라스를 착용하며 세상과의 단절을 취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은 낡은 차에서 SUV차로 바꾸는데 색상을 빨강으로 잡는다. 이에 대한 생각은 피와 총소리,재난으로 인한 피해 등의 자극적인 요소를 찾아다니는 주인공을 대변하는 색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피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처럼
Irony
영화의 아이러니는 진실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은 신속성과 정확성 그리고 사실성을 기반으로 둔 직업이지만, 주인공은 단지 돈을 버는 것과 자신의 명예를 드높히기 위한 탐욕스러운 목적을 가지고 취재를 다룬다는 점이 기자의 이상향과 전혀 다른 아이러니이다.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소시오패스 성격을 연기한 제이크 질렌한 연기는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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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보이는 자에서 보는 자로
시선의 방향
그리스로마신화에 아르고스(Argos)라는 이름의 괴물이 등장한다. 그는 온몸에 붙어있는 100개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자다. 아르고스는 제우스의 애인인 이오를 감시하다 제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헤라는 그 100개의 눈을 공작의 깃털에 붙여준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은 뛰어난 감시자를 뜻한다. 판옵티콘의 감독자들은 죄수들의 모든 것을 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 있는 자들은 결코 위를 볼 수 없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항상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관음되던 여성이 고개를 들고 관찰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곧 비난으로 이어진다. 은밀하게, 자기들끼리 관음하고 관찰하는 '보는 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다 한순간에 '보이는 자'의 위치에 서버린 관객들은 당황스럽다.
아시아단편 단편선은 아시아 여성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 중 경쟁에서 선정된 작품들을 모아둔 섹션으로, 단편선 1부터 4까지 나뉘어 있다. 단편선 1에 속한 몇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들에서 여성은 더 이상 '보이는 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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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싶지만(Crack)(2021)
감독 : 이현주
상영시간 : 23분
시놉시스 : 25년 동안 혼자 살아온 민영은 함께 살게 된 조카 연정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연정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잘 지내고 싶지만>의 민영과 연정을 보자. 민영은 연정이 오기 전 집을 깨끗이 닦고 연정을 맞을 준비를 한다. 연정의 약봉투를 세심히 살피고, 배탈이 난 연정을 위해 죽을 배달시켜 준다. 연정은 연정대로, 민영이 기침을 하자 쌍화탕을 먹어 보라고 권하고, 민영의 몫까지 삼겹살을 사온다. 민영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방도 한 칸뿐이지만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 주인으로서 객식구인 연정을 관찰하고 살핀다.
그러나 민영은 혼자 산 사람이다. 혼자 오래 살아온 사람이 느끼는 양가감정이 있다. 혼자 있으니 쓸쓸해서 누가 옆에 있었으면 싶은 감정과 누구도 내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을 지키고 싶은 감정. 홍성은 감독의 <혼자 사는 사람들>(2021)에서 혼자 밥 먹고 혼자 TV보는 진아처럼, 민영도 혼자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제가능한 삶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민영의 평화로운 삶에 조카 연정의 침입은 미세한 균열(Crack)을 만들어낸다. 호기롭게 '잘 지내보자'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 이제 민영의 집에는 연정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25년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타인의 눈. 그 눈으로 민영은 관찰당하기 시작한다.
아플 때 쌍화탕을 데워주었더라도, 밤에 시끄럽게 뭘 먹지 않았어도. 아침에 잠에서 깬 민영이 TV를 켰을 때 연정이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어도, 화장대 앞에 누워있는 연정의 다리를 치웠을 때 연정이 몸을 돌리지 않았어도 민영은 견디기 어려웠을 거다. 민영은 통제불가능한 연정의 눈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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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The Dress)(2022)
감독 : 스팡팅
상영시간 : 30분
시놉시스 : 리얼돌 호텔에서 일하는 원치는 어느 날 이상한 손님을 맞는다. 그는 매 방문마다 인형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 놓고 떠난다. 원치는 리얼돌이 되고픈 욕망을 난생처음 느끼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드레스>는 리얼돌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 호텔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눈으로 호텔을 관음한다. 호텔 청소부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봐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른 척, 호텔을 드나드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모른 척 해주는 사람이다. 사람일까? 어쩌면 NPC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다시 <프리 가이>의 가이를 소환해보자. NPC였던 가이는 자신이 살던 세상의 수상함을 깨닫고 세상 밖 현실의 진짜 사람과 소통하게 되면서 감정을 깨닫는다.
호텔이든 모텔이든 여관이든 묵을 일이 생기면 이따금 청소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내 눈에 보이는 자들이며 그들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못본 척 한다에 가깝지만). 리얼돌 호텔을 찾는 자들 역시 자신은 볼 수 있지만 인형은 절대 자신을 볼 수 없으므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무슨 짓이든 가능하다. 죽은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히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
청소부 원치는 리얼돌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놓고 떠나는 남자가 궁금해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원치는 보는 자다. 섹스돌에 드레스를 입히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남자를 훔쳐보는 자. 그는 원치의 존재를 모르고 보여지는 자로 전복된다.
호텔에 전기가 끊겨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된 날, 원치는 그의 예약을 취소하지 않고 그가 이용할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기다린다. 그는 보는 자로 들어갔으나 인형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이는 자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그는 호텔을 황급히 떠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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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중의 탑(The Top of the Tower)(2022)
감독 : 박은새
상영시간 : 22분
시놉시스 : 반지하에 살고 있는 지숙이네 가족. 어느 날 십자가에서 빛이 나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빛을 다시 보기 위해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침수피해만 겪은 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이 창문에다 대고 노상방뇨하고 구토하는 등의 일상적인 테러를 겪는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반지하 성범죄, 반지하 불법촬영 등의 뉴스기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권력을 가진다.
수험생인 지숙의 가족도 반지하에 산다. 지숙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갑자기 방에 걸어둔 십자가에서 빛이 나더니 천장으로 튀어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아! 드디어 성령을 본 것이다. 지숙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는 성령을 본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간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신도는 성령이 십자가에서 빛나다가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이후 아들이 연금복권에 당첨되었단다.
하지만 지숙은 반지하에 산다. 목사가 이르기를, 성령이 하늘로 올라가야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닿을 텐데, 지숙네 가족은 너무 낮은 곳에 있다. 이들이 반지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지숙이 잘 되는 것이다. 지숙은 서울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사실 택도 없지 싶다.
목사는 이 가족에게 옥탑방을 소개해준다. 엄마 아빠는 있는 돈 없는 돈, 친구 친척 사돈의 팔촌의 돈까지 끌어다가 무리하게 이사를 한다. 이삿짐 비용이라도 아껴보려고 세 가족이 죽도록 짐을 올린다. 이 집도 역시 엘베 없는 집이다.
마지막 매트리스만 올리면 이사도 끝인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지숙은 또 다시 성령을 목격한다. 지숙을 가여이 여긴 하나님의 은혜일까. 지숙은 성령의 빛을 따라 옥상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나 지숙의 눈 앞에는 거대한 고층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폭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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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단편 단편선1에는 위의 세 작품 외에도 <로봇이 아닙니다.>와 <거미>까지 총 다섯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거미>는 에도시대에 강도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동생의 복수를 하는 여자 이야기이고, <로봇이 아닙니다.>는 자율주행자동차가 백인이 아닌 여성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여 발생한 사고를 다룬다. 서두의 아르고스 이야기는 <로봇이 아닙니다.>에서 가지고 왔다. 연구에서 과소대표되고 비표준화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선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묶어보기로 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아시아단편 단편선1을 상영하던 날, 영화제 현장에서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아마 동시간에 나와 함께 영화관에 있었던 분들이 계실 것이다).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제법 큰소리였다. 양손으로 성기를 쥐고 흔드는 짓을 몇십 분은 한 것 같은데(하필 나는 그 남자 근처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여자들이 꺅 하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당하게 성기를 흔들고, 놀란 여성들을 보는 자로 군림하고 싶었겠으나 딱하게도 현장에서 그는 보이는 자, 아무리 봐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그 누구도 대꾸해주지 않는 자가 되어 있었다.
자동차 창문 열고 따라오며 똑같은 짓을 하던 성인 남성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던 교복 입은 어린 여자 아이도, 그런 사람을 보니 딱하더라는 글을 쓰는 어른 여자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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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년 8월 27일 14:00~15:4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년 8월 29일 16:30~18:1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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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인 부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와 헤트비히 헤스(산드라 휠러)다. 세계 2차 대전 중이다. 일에 충실하는 루돌프 회스. 아예 집 옆에 일터가 있을 정도로 일에 진심이다. 조용한 일상.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사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사는 집 옆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고, 루돌프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가까스로 다 읽은 한나 아렌트의 책 두 권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 ‘악의 평범성’에 대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누구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바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 중요한데, 생각하거나 관심 갖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 남자를 조명한다.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중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남자의 궤변에 격분한다. 하지만 서서히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아이히만이 우리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포착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사유(Thougtlessness)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직장인이 역사에 남는 전쟁범죄자가 된 것이다.
이 ‘악의 평범성’을 제시한 것은 후대에 엄청난 파급력을 낳는다. 당연하다. 원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잖아? 이긴 자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상대방, 그러니까 악의 근원을 “이 집단이 이래서 문제야!”로 퉁칠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규정하면 쉽다. 잔다르크가 마녀로 지목당해 화형 당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종교라는 잣대가 명확하다. 또 서양의 기독교나 동양의 맹자가 인간에겐 원죄/악한 본성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악이라는 개념이 특정한 상황 하에 만들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그게 되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류 역사상 히틀러 같은 존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보면 악은 특정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특정한 무언가가 있기에 대단하다던가 굉장히 특이한 게 아니다. 그냥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일 뿐, 생각 없이 산 것의 총합체라고 정의한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 이전의 역사가들이 악에 대해 이렇게 규명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그 악의 형태가 구현되고 있다. 가령 영화에서 온갖 비명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회스 부부의 모습은 분명한 악이다. 아니면 유대인의 코트를 빼앗아 입는 헤트비히의 모습 역시 분명한 악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무사유’의 과정을 두 측면에서 보여준다. 어떻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이 보여주듯, 조직에 흘러가는 남자(루돌프)와 타인에게 무관심한 여자(헤르비히)를 통해서. 또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역설하듯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을 강조한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다.
가장 먼저 탐구해야 할 인물은 루돌프 회스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 회스가 조직 내에 꽉 박혀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영화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이 연출은 꼭 필요했다. 왜? 루돌프 회스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야 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악의 속성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는 이를 위해 건조하게 그의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령 외부 협력업체가 와서 회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 속 두 남자는 그냥 대표자들끼리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그가 직장인으로 얼마나 자기 하는 일에 투신하는지를 묘사한다. 좀 필요 없어 보이는 전화 장면이 여러 번 들어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특별한 설정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아우슈비츠 옆에 사무실이 있고 거기서 산다는 특징은 가정적이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 회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루돌프라는 인물에게 가장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직장인으로서의 업무나 가정의 안녕이 아니다. 나치라는 조직이다. 나치의 일원으로서 소속됐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이 사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 왜? 초반부터 영화가 이 인물의 내면을 이미지로 강조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가 누군가에게 축하받는다. 그런데 그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이 나치 조직원들이다. 얼핏 보면 회색 옷 입은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심지어 배경도 회색 저택이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카메라를 멀리 떨어트려서 누가 루돌프 회스인지 알 수 없게끔 묘사하는 것이다. 축하받는 사람과 하는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명백하게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해진 행동을 흐려놓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보다 조직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직장인으로서의 활동반경과 쉴 수 있는 집의 바운더리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산다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서 일을 한다는 건 더 기괴하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조직에 잡아먹힌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루돌프가 전출을 가니 마니 하는 설정이 들어간 것도 흥미롭다. 사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굳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안 간 거라서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갈등이 격정적이지도 않다. 영화의 기-승-전-결이 이 전출 여부를 두고 쌓아 올린, 소위 ‘빌드업’ 한 것도 아니라 맥 빠지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일이 이 가족에게 끼친 영향이 중요하다. 조직이 루돌프 회스의 가족공동체를 해체시킬 정도로 주인공(회스)에게 절대적이었다는 의미다. 나치와 히틀러의 말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엔딩신에서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내면의 무언가를 갖고 있지만 결국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 역시 인물의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무의식이 영화의 플롯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루돌프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출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초반 루돌프가 축하받는 장면과 후반부 나치 조직원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은 수미상관처럼 반복된 것 같다. 왜? 회의를 주체하는 장면을 가장 첫 신에선 보여주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부감 숏으로 화자를 숨긴 것이다. 이다음 장면을 보면 영화 안의 회의 주제에는 회스가 제시한 근거가 중요하게 설정되어 있다. 다음 장면은 회스가 자기 의견을 역설하는 장면을 넣으면서 회의의 끝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돌프 회스가 회의에서 중요하다는 것만 묘사하고 그 안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루돌프 회스가 이 당시 나치라는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도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 영화 초반부를 생각해 보면 수미상관처럼 조직 안의 루돌프 회스를 강조하기 위함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운드의 힘만 믿은 게 아닌 비주얼의 힘이 조직에 휩쓸리는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줬다.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연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은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다. 이 인물이 이 영화에 차지하는 물리적 비중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그 비중치고 영화 안에서 유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인물은 플롯 전면이 아닌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담당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근거는 간단하다. “내가 이 집을 가지려고 17년 동안 고민해 왔다!”라는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 이 인물의 동선이다. 이 인물은 집 밖에 멀리 나가지 않는다. 루돌프가 타 지역으로 나가거나 헤트비히 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도착한 것과는 대비된다. 전업 가정주부인 것으로 보이는 헤트비히. 남편 루돌프에게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는다. 후반부 루돌프와의 갈등에서도 이 사람은 집 밖에 나가기 싫다. 남편을 속여서라도, 유대인들 고용해서라도 만든 집이니 만큼 애착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집에 박혀있는 헤트비히.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면 자기 집 안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능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인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인물은 집안사정에 그렇게 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근거. 이 사람이 집 안에 일어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대놓고 드러난다. 이 영화의 사운드 지분 중 크다고 볼 수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 예시 중 하나다. 그냥 ‘왜 이렇게 울까?’ 한 마디면 엄마로서의 역할이 끝나나? 후반부에 남자 형제들끼리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다투다 형이 동생을 장난으로 가두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동생이 울고불고 소리 지르지만 어머니 헤트비히는 알아채지 못한다. 중후반부 폴란드 소녀가 사과를 수용소 근처에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도 이 헤트비히는 인기척을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강가에 재가 떠다니는 것도 헤트비히가 아이들을 씻는 장면은 있지만 원인을 예방한 다 던가 하는 진단이 없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취해있기만 하지 실질적으로 ‘일 잘한다’라는 말을 듣기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후반부에 묘사되는 루돌프 회스의 불륜은 이 인물(헤트비히)의 무능력함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어디 다른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루돌프의 집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불륜이 이어진다. 루돌프의 아이가 “아빠 땀 냄새나!”라고 말할 정도로 이 남자의 불륜은 이 가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남편이 속였기 때문에 불륜을 저지른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루돌프 회스는 실제로도 가정적이지 않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트비히 의 대사 “오래전에 (전출이) 결정 난 것으로 보이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라는 말은 과연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집안이 화기애애하다는 시각적인 만족감에 도취되어 가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분명한 패착이다. 마치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다음의 모습이 1차 대전 전후의 독일을 재건하고 있다고 믿었을 독일인들처럼 말이다. 글쓴이가 헤트비히가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을 비유하고 있다는 건 여기에서 온다. 나의 행동이 독일의 재건을 위해서라는 자기기만, 가정에 착실한 어머니라는 자기기만이 나치당의 지지자들과 헤트비히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의미를 부여하니 영화 안의 두 대사가 더 와닿는다. 유대인 학살이 기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너희들(유대인)은 나 덕에 편하게 사는 거야”라며 남편이 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폭언을 하는 것. 그녀가 가진 모순을 이 영화가 폭넓게 묘사하는 것이다. 또 후반부에 루돌프가 헤르비히에게 “우리의 성과”라는 식으로 “우리”를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당연하다. 자국민들을 속인 나치의 군인들도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심정적 동조자로서 학살에 ‘무관심’과 ‘자기기만’으로 참여한 당시 독일인들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일상만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무시무시한 좋은 각본의 힘이다.
두 캐릭터 말고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사운드다. 우선 카메라. 이 영화가 카메라로 일상을 담는 방식이 특별하다. 그냥 일상적인 걸 담으면 모르겠는데 어디에서 훔쳐보는 것처럼 화면을 담았다. 실제로 검색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촬영 기법을 찾을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많이 설치한다. 대신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건 중요하다. 억지로 드라마를 배격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대놓고 있다. 그럼 그건 대놓고 영화다. 배우들이 서로 얼굴 보면서 연기한다. 감정의 이입을 유발하고 곡진한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것. 이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치되는 부분이다. 관심을 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응집성을 위해서라도 감정이입을 유발하면 하고 싶은 걸 보여주기 어렵다. ‘얘 나쁘지?’가 되는 순간, 인물의 표정이 보이는 순간 비명의 의미가 옅어진다. 영화가 그은 선을 스스로 넘는 것이다. 촬영 구도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이 카메라를 활용한 연출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각적인 것으로 사방이 막힌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모든 샷에서 벽이 강조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벽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서 굳이 벽을 보여준다는 게 핵심이다. 중후반부에 어떤 남자가 벽 너머의 풀숲에 어떤 것을 뿌리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인 카메라워킹이라면 벽을 등지고 찍는 게 맞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에서 벽과 남자, 풀숲이 같이 등장한다. 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더 나아가 청각적인 요소는 벽과 충돌하며 영화에 균열을 낸다. 남자가 숲에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소리. 어떤 남자가 비명인지 절규인지 질문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다. 곧바로 총성이 들린다. 카메라는 여기서 총에 맞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벽만 보여준다. 마치 소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 대신 관객들은 상상력이라는 게 있어서 벽과 소리만 보여줘도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운드를 강조하는 이유? 아니 그 이전에 사운드를 어떻게 강조했을까? 벽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줘서 이 영화 안에 쳐져있는 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벽의 의미는 간단하다. 무관심이라는 벽이다. 계속해서 안에 있는 야채니 꽃이니 라일락이니 수영장이니 하는 것들을 보여주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이 인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벽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닿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이 영화가 사운드와 카메라의 존재로 보여준 것이다. 이 벽의 존재 덕에 카메라는 무엇을 찍을지에 대한 고민도 끝냈다. 분명한 악에 대해서는 카메라로 찍고 희생자들은 사운드를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악에 익숙한 악인이 되는 셈이다. 이 맥락에서 열 카메라로 표현한 소녀를 설명할 수 있다. 악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사과를 주는 따뜻한 마음이 이 영화의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선의가 된다. 사운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닌 촬영에 의한 연출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했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영화의 핵심을 담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 속 비명이 틈입한다. 이 비명이 가지는 임팩트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을 말할 것 같다. 비명도 비명 나름이다. 어떻게 기괴한 소리만 다 골라서 삽입했는지 이런 요소들도 다 감독의 감각이 크게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언더 더 스킨>에서 외계인(스칼렛 요한슨)이 지구인들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사운드로 치환된 셈이다. 이 선택은 아주 좋았다. 학살의 진상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게 한다.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 일상 속에서 비슷한 것만 보면 생각난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감정적인 임팩트로 관객에게 큰 효과를 낸 것과는 다르게 신기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청각을 아주 잘 활용했다. 이 영화 예술의 근본에는 무성영화라는 게 있다. 이 말은 즉슨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시각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인지심리학에서 인류는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두 특징을 과감하게 무시하며 청각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가 청각적인 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화룡점정은 오프닝과 엔딩에 있다. 이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 비명이다. 유대인들의 절규가 담겨있다. 오프닝을 본다. 오프닝은 검은색 화면인 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첫 장면부터 청각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힘을 꽉 주는 것이다. 이 기점으로 영화의 청각적인 것에 대해 연이어 생각해 보면 이후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대신 시각적인 부분이 청각적인 장면과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럼 비명소리가 이 이야기의 이전에 깔려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으로 날아간다. 루돌프가 헛구역질을 한다. 현대의 박물관 노동자가 건물을 닦는다. 닦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시점으로 돌아와 루돌프 회스가 어둠으로 걸어간다. 시점이 세계 2차 대전 한가운데로 돌아간 것이다. 그다음이 엔딩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처럼 청각적인 요소만 부각한다. 영화 후반과 초반이 비명소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일상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타임라인인 것이다. 영화의 과거와 미래, 오프닝과 엔딩이 청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영화 안에서 비명소리가 청각적인 요소로 강조된다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 감독이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곧 비명과도 같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악인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 만든 비극이 홀로코스트라고 말한 셈이다.
괴물 같은 영화다. 음향, 촬영, 각본, 연출 모든 부분에서 한 부분의 극점에 다다른 능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산드라 휠러를 위시로 한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뛰어나기까지 하니 무결점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극의 재미를 부각한 영화가 아니라서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부담(?)에도 글쓴이가 장점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정말 필요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만큼 징글징글하고 강박적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왜 인간 근처도 가지 못하는지는 영화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하는 부분은 곧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도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했다. 정치적인 행위부터 시작해 불멸하게 남는 여러 기록까지, 또 공/사적인 공간의 필요성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온다고 역설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아주 속 깊게 우려낸 사골국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대화하는 사소한 것들, 공간들, 하녀의 움직임부터 루돌프 회스의 동선과 공간까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조건>의 목차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영화다. <액트 오브 킬링>과 함께 과거의 비극이 단지 과거에만 국한될 것이 아닌, 날카롭고 깊은 인사이트를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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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베테랑2>가 개봉 2주차 만에 누적 관객수 56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주말 동안 91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며, 호불호가 갈리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재개봉한 <비긴 어게인>은 주말 동안 4만 4천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습니다. 이와 함께 <사랑의 하츄핑>은 누적 관객수 100만 명을 돌파하며 3위 자리에 안착했습니다.
한편,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는 <트랜스포머 ONE>의 개봉에도 불구하고 <비틀쥬스 비틀쥬스>가 3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누적 수익 약 3000억 원을 기록, 그 인기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트랜스포머 ONE>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으로 2위에 머물렀으며,
<스픽 노 이블>이 3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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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시 그 외는 없는, <스텔라>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스텔라(Stella. A Life)., 2024
감독: 킬리안 리드호프
명시 그 외는 없는, <스텔라>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아름다운 별빛을 품은 금발의 미녀, 스텔라는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재능 있는 재즈 가수다. 미국에서 원 없이 노래하며 살고 싶은 열망은 그녀와 함께하는 밴드 친구들도 품고 있는 소망이기에, 이들은 자발적으로 현실을 등진 채 연습에 몰두한다. 고대하던 공연 당일, 스텔라는 관계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친다. 관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밴드와 스텔라는 할리우드로 향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음을 자축한다. 이제 남은 건 미국으로 향하는 레드카펫뿐. 그러나 이들을 호위하던 재즈가 뚝 끊기고 고막을 찢는 공장 소음이 울려 퍼지면서,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잔뜩 더럽혀진 노동자 옷을 입고 강제 노역 중인 스텔라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실 그녀는 재즈 가수이기 이전에 1940년 독일, 나치 정부하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었고, 밴드와 스텔라가 등진 현실은 제힘은 물론이고 모두의 힘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유대인이기에 공포뿐인 세상이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어둠 속에서도 자기 빛을 뿜어내는 걸 멈추지 않는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으로 게토에 있는 군수공장에 끌려가 유대인 배지를 달고 온종일 기계 부품을 만들며 언제 죽을지 모를 현실을 받아들인 동포들과 달랐다. 밤이 찾아오면 배지 대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거리로 나갔고,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는 금발과 푸른 눈은 그녀를 더 과감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독일 시민 '같은' 외형(가면)은 스텔라에게 미국 진출 실패에 대한 보상이 될 순 없었지만, 지옥 속에서 그녀가 그녀답게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수단은 곧 그녀만이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됐고 공장 책임자에게도 영향을 줬다. 도망치라는 책임자의 신호 덕에 스텔라와 그녀의 부모는 수용소로 잡혀갈 뻔한 위기를 넘긴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스텔라는 더 과감해진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신분증 위조 브로커(롤프)의 연인이 되어 그와 함께 일한다. 그들은 독일 시민인 척 거리를 쏘다니며 동포에게 돈을 뜯어낸다. 제삼자였던 동포의 경계는 점차 그녀의 가장 친한 밴드 친구들에게까지 확장되고, 스텔라는 절친에게도 목숨을 담보로 돈을 갈취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텔라는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기로 한다. 본인이 느끼는 고통과 별개로 나치는 여전히 유대인을 색출했고, 그녀에겐 안전한 은신처와 생계를 위한 돈이 필요했으니까. 언제 빼앗길지 모를 자유를 향한 욕망도 분명 결정적인 역할을 했겠지. 하지만 스텔라는 알지 못했다. 그 결정이 훗날 자기 삶은 물론 인간상까지 송두리째 무너트릴 계기가 될 거란 사실을 말이다.
스텔라는 밴드 친구의 고발로 게슈타포(나치의 비밀 국가 경찰)에 붙잡히면서 반쪽짜리 자유마저 완전히 빼앗긴다. 갖은 고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수용소 수감을 피하고자 나치의 비밀 요원이 되기로 맹세한다. 비밀 요원 일은 딱 하나, 유대인 색출. 그동안 해왔던 브로커 일과 차원이 달랐다. 신분증 위조보다 더 예리하고 대담해야 했으며 재즈를 부르며 자아를 팽창하듯, 인간의 극한 이기심을 폭발시켜야 했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기에 어떠한 감정도 비밀 요원 일에 방해 돼선 안 됐다. 그로 인해 받는 정신적 압박과 심리적 불안 역시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불편한 마음’과 똑같았다. 브로커와 비밀 요원은 스텔라에게 행위만 다를 뿐 사실상 생존이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일치된 생존 방식으로 정립됐다. 이전보다 더 냉혹해져야 했다. 유대인을 잡는 유대인은 스텔라 말고도 넘쳐났으니까. 업무 성과 미달로 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반드시 다른 요원보다 더 많은 동포를 고발해야 했다. 물론 다른 요원보다 더 많은 유대인을 색출했다고 해서,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낄 필요 없는 독일인이 될 순 없었다. 태생적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은 레드카펫도 자유도 아닌 '길이 하나뿐인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장으로 변했고, 그렇게 스텔라는 동포를 잡는 동포가 아닌 ‘독재 국가를 위한’ 요원이 됐다. 매혹적인 금발과 푸른 눈이 만든 무기는 그 쓸모를 잃었으며, 마음 한쪽에 자리했던 죄책감과 죄의식은 본인이 처한 비극에 더 철저히 가려졌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스텔라에게 남은 건 스스로 만든, 무자비한 본인뿐이었다. 금발의 배신자는 친구들은 물론 얼굴만 아는 사람들까지 닥치는 대로 고발해 적게는 600명, 많게는 3,000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그 덕에 강제수용소로 끝까지 끌려가지 않았지만, 종전 후 체포돼 전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미 이전 재판에서 선고받은 형기(10년)를 마쳤다는 이유로 처벌 없이 풀려난다. 재판 내내 부모님 역시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며 본인 역시 피해자임을 주장했던 스텔라였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작은 거울에 한 할머니가 비친다. 여전한 금발 머리와 푸른 눈 그리고 빨간 립스틱, 스텔라다. 악착같이 얻고자 했던 삶이 주는 압도적인 평온이 계속될 듯했는데, 돌연 스텔라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쿵 소리도, 사람들의 비명도, 그 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스텔라> 끝난다.
<스텔라>는 실존 인물 '스텔라 골드쉬라크'의 일생을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감독은 처음부터 스텔라의 일대기를 꼼꼼히 살펴, 이를 영화에 조금의 덧붙임 없이 담았다. 나치, 홀로코스트란 배경(환경)보다 그 안에 속한 인간, 스텔라(개인)에게 관객이 집중하길 바랐다. 따라서 그녀의 생과 사를 작품 안에 거짓 없이 담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고, 스텔라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이야기 전개에서 스텔라가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은 철저히 '개인'의 내면으로만, 즉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밖으로 빠져나와 제삼자에게 감정이 전이시키는 과정은 없었다. 중요한 건 스텔라의 행위에서 파생되는 결과였지, 그 안에 소용돌이치는 '나'만의 감정 태풍 따위가 아니었다. 영화는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하루살이처럼 살았던 스텔라의 무수한 하루를 단순 기록했다. 사건 나열이 아닌 개인의 연속된 선택과 결과로 가중되는, 그다음의 선택과 결과에 무게를 뒀다. 스텔라 골드쉬라크가 해체되면 될수록 그녀의 개인사는 모두를 향한 이야기로 변형됐고, 이는 개인을 통해 전체와 역사를 바라보게 되는 길이 됐다. 영화는 스텔라란 인물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목도하는 일이야말로 끝나지 않는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는 첫걸음이란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면서, 끝에 다다라서는 최종 판단과 결정을 관객에게 넘기며 제 몫을 다 했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1980년 광주에서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된 '영호'(이창동, <박하사탕>(1999))와 1943년에 나치 친위대에 들어가 아우슈비츠 감시원으로 일했던 '한나 슈미츠'(스티븐 달드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도 스텔라와 같은 길을 걸었다. 세 사람 모두 국가적, 시대적 환경 안에 갇힌 인물로 피해자이자 가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표현됐다. 죽음의 과정도 닮아있다. 영호는 그동안 저질렀던 자기 죄를 스스로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기차 앞에 섰다. 유대인을 가스실에 넣어 죽인 일보다 문맹을 폭로 당하는 걸 더 수치스럽게 여겼던 한나는 수감 후 글을 읽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악마 같았던 자신을 마주하고, 스스로 목을 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와 '마지막까지 이어진 자기 파괴적 결말',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이야기'까지 영화가 각각 무엇을 더 강조하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그 쓰임이 달랐을 뿐 모두 충실히 활용됐다.
영호는 누가 진짜 가해자이고 진짜 피해자인지를 질문했고, 한나는 사고하지 않은 복종으로 파생된 악의 평범성을 고심하게 했다.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자기반성이 뚜렷하게 보였기에, 두 인물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관객에게 확실하게 전달했다. 여기서 자기반성은 다양한 방식과 절차가 존재하는데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는 꼭 포함되어 있다. 자기반성이 참회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용서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요점이다. 두 사람의 자기반성은 관객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했고, 결과적으로 마음을 울리는 경종을 외면하지 않게 했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반면 스텔라의 자기반성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만 휘몰아쳤다. <스텔라>는 이마저도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담았다. 스텔라가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장면보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행위적인 측면의) 장면을 더 길게 노출했다. 스텔라가 창문을 열고 투신하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그녀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여줬다. 스텔라가 화면에서 사라진 뒤에도 카메라는 공허한 바람 소리조차 허용하지 않고, 오직 창문이 열린 방 안에서 머물러있었다. 그녀가 대체 어떤 얼굴과 어떤 마음으로 그와 같은 선택을 했는지, 우린 확언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 자체도 관객이 뭘 알고 싶고, 또 뭘 회피하고 싶어 하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은 게 분명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자기반성은, 공감이나 비난 심지어 반사적으로 가능한 일차원적 반응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무관심과 관심의 대결에서 당연히 후자가 패배한 줄 알았는데, 스텔라의 메시지는 영호와 한나처럼 뚜렷하게 전달됐다. 아니, 오히려 더 냉철하고 단호하게 관객에게 닿았다. 마치 추상적인 물음이 가장 구체적인 답이 된 것처럼, 최종 판단은 알아서 각자 해야 함을 꼭 명심하길 바라는 것처럼‥.
<스텔라>는 명시 외엔 다른 방법을 쓰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신감도 분명히 보인다. 다하우 수용소에 새겨진 추모문 중 ‘죽은 사람에게는 애도를 표하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경고하기 위하여’란 구절이 <스텔라>를 관통해,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뚫고 지나갔음을 부정할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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