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1-12-20 00:20:05
외로운 마음과 파도의 울림, 인 디 아일
영화 <인 디 아일>
운디네와 트랜짓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던 프란츠 로고스키의 필모 중 인 디 아일을 보게 되었는데요.
과거와 현재 그 사이의 외로운 마음과 잔잔한 파도의 울림을 잘 표현한 인 디 아일 이라는 영화를 소개할게요.
자본주의에 허덕이는 지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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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그의 현재를 덮쳐와 갱생하려는 현재를 막아서 과거에 묶인 크리스티안.
하지만 그의 새로운 자리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기에 그는 나쁜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행운을 맞이합니다.
주변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등장한 그의 과거는 약간 아쉽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현재를 완전히 덮치지 않아 그의 현재와 주변이 더 잘보였다는 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쓰레기통에 얼굴을 박고 폐기물을 먹어치우는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네요.
과거에 묶인 것은 크리스티안 뿐만이 아니였죠.
트럭에서 지게차로 옮겨가야만 했던 브루노, 여러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해 그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반복되고 잔잔한 일상에 밀려오는 파도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의 긴 시간을 달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언젠가부터 살기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팔릴때까지 헤엄치는 물고기와 다를바 없는 우리가 참 서글퍼졌습니다.
브루노의 빈자리는 언제든지 채워지고 시간은 지나간다는 것이 말이죠.
약간의 커피와 파도소리가 전체를 비춰주는 조명처럼 느껴졌던 영화 인디아일, 추천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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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즈데이 2 | 우리네 민낯을 들추는 팀 버튼의 별종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왜 <웬즈데이>는 한국에서 인기가 없을까?
넷플릭스에는 '빅3'라 불리는 시리즈가 있다. <오징어 게임>, <기묘한 이야기>, 그리고 <웬즈데이>다. 세 작품은 올해 일제히 새 시즌을 공개했거나 공개할 예정이다. 이 중 2번 타자인 <웬즈데이>는 기대한 성적을 내고 있다. 공개 첫 주에 전 세계 93개국 넷플릭스 TOP 10에 진입했으며, 이 중 92개국에서 TV 시리즈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딱 한 국가, 한국만 빼고.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예상 못 한 결과는 아니다. 시즌 1도 한국에서의 최고 순위는 3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실망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결과인 것도 사실이다. 팀 버튼 감독, 제나 오르테가, 엠마 마이어스가 방한해 수많은 유튜브 채널에 모습을 비춘 노력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여러 요인이 이유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폭군의 셰프> 같은 경쟁자의 등장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팀 버튼 감독 영화가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그의 수많은 명작은 단 한 번도 300만 관객을 넘기지 못했다.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이 200만 명을 넘겼을 뿐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130만 명을 동원하는 데서 그쳤다. <웬즈데이>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팀 버튼이 별종을 사랑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 팀 버튼의 영화는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못할까? 영화 내적으로 이유를 찾아보자면, 팀 버튼이 유달리 별종에게 애정이 많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은 대체로 기괴하다. 두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위가 있거나, 겉모습은 멀쩡해 보여도 괴상한 실험을 일삼는 초콜릿 공장 주인이거나, 이상한 화장을 한 채로 정신이 반쯤 나간 모자 장수인 식이다.
하지만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창백한 얼굴, 주황색 폭탄 머리, 기이한 색의 렌즈를 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모자 장수'(조니 뎁)는 누가 봐도 미치광이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알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는 붉은 여왕의 폭정에 의해서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린 뒤로 미치광이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즉, 모자 장수의 기괴한 겉모습에는 그를 '미쳤다'라고 규정하는 세상이야말로 미친 거라는 역설이 깃들어 있다.
'윌리 웡카'(조니 뎁)도 마찬가지다. 그는 거대한 초콜릿 공장 안에서 칩거하는 사회 부적응자다. 하지만 그의 괴팍함과 폐쇄성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여준다. 엄격한 아버지가 꿈을 억압당했던 기억으로 인해 웡카는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잊어버린 외톨이로 자라난 셈이다. 즉, 윌리 웡카라는 별종은 사회적 관계에는 서툴러도 자기만의 세계를 열정적으로 지켜내는 예술가의 고독한 초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별종들도 다르지 않다. '에드워드 시저핸즈'는 가위로 된 손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수 없었다. <유령 신부>의 '빅터'도 죽은 자들의 세계에 더 큰 편안함을 느낀다. 즉, 팀 버튼의 작품 세계에서 별종은 단순한 괴짜나 이방인이 아니다. 그들은 획일화된 사회의 폭력에 저항하고,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극복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팀 버튼의 별종은 다름의 미학을 현현하는 일종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별종을 별종답게
별종을 향한 팀 버튼의 사랑은 <웬즈데이 2>에서도 유효하다. 네버모어의 학풍만 봐도 알 수 있다. 네버모어는 별종들을 사회화하거나, 그들이 학교 밖 질서에 적응하도록 교육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의 능력을 억제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마음껏 사고 치도록 유도하기까지 한다. 철저히 별종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품게 하는 게 이 학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특정 사건을 거친 뒤에 사회 질서에 알맞은 성인으로 거듭나는 일반적인 학원물의 전개는 <웬즈데이 2>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학기가 끝날 때마다 학생들은 더 별종다워진다. '웬즈데이'(제나 오르테가)만 하더라도 여전히 까칠하고 우울하고 독선적이다. 가족들과의 관계나 친구들과의 관계가 아주 살짝 유해졌을 뿐, 네버모어를 다니기 전이나 후나 그녀의 성격은 크게 차이가 없다.
'이니드'(엠마 마이어스)도 시즌 2 끄트머리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늑대인간의 정체성에 가까워진 모습이 된다. 웬즈데이를 동경하는 신입생 '아그네스'(이비 템플턴)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웬즈데이와 친해지려고 패션과 헤어 스타일을 따라 한다. 투명 인간 능력을 활용해 웬즈데이를 집요하게 쫓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웬즈데이는 아그네스를 그저 멸시한다. 마지막 화에서 그녀가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전까지는.
반면에 별종이 안 되려고 발악하는 이들은 오히려 빌런으로 그려진다. 수십 년에 걸쳐 하이드 능력을 제거하려다가 비극을 맞이한 '아이작 나이트'(오웬 페인터)와 '프랑수아즈 갤핀'(프랜시스 오코너) 남매가 대표적이다. 시즌 1에서 가문의 유지를 이어 별종들을 몰살하는 계획을 꾸미고, 하이드인 '타일러'(헌터 두한)를 조종해 사람들을 살해한 '매릴린 손힐'(크리스티나 리치)이 빌런으로 등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별종을 배척하는 사회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 사회에서 별종은 구조적으로 배척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일종의 병목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조지프 피시킨에 따르면 병목 사회는 우리 인생의 고비마다 병목을 설치한 뒤 병목을 통과할 때 성적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는 사회다. 병목 사회에서는 병목을 통과하는 데 유리한 특정 능력만을 고평가하고, 해당 능력의 유무가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고 부와 권력을 세습할 수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군과 직위, 원하는 삶의 방식과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마저도 획일화되기 쉽다. 이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자화상에 가깝다. 인생의 고비마다 좁은 병목을 통과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모난 별종은 깎여서 둥글어질 수밖에 없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실패자나 패배자로 여겨지며 아예 질서 밖으로 튕겨 나가기도 한다. 자연히 획일화된 사회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별종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아이돌 산업의 특징에서도 병목 사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K팝 아이돌 그룹의 가장 큰 특징은 칼군무다. 모든 멤버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안무를 약 3분의 무대에서 펼쳐 보여야 한다. 움직임이 과하거나 박력이 부족한 멤버가 있으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각 멤버의 개성은 통일감 있는 군무 안에서 꽃필 때만 유효하다. 누구 하나 튀지 않고 하나의 부품이 되기를 바라는 정서가 화려한 K팝 무대 위에도 녹아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시청자가 보기에 <웬즈데이 2>의 주인공들은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 말라는 일은 전부 다 하고, 좀비를 되살리는 등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말 그대로 별종들이니까. 그에 반해 별종들을 통제하고 개성을 깎아내려는 빌런들이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져도 이상하지는 않다. 한국인은 후자처럼 성장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요구받아 왔으니까.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
물론 별종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시각은 <웬즈데이 2>의 흥행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한국인이 별종을 싫어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 중요한 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례로 애초에 한국에서는 <웬즈데이> 같은 기숙사 학원물 판타지의 위력이 크지 않다. <해리 포터> 시리즈 중 단 한 편도 관객 수 450만 명을 돌파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 이는 <트랜스포머>,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다.
또 <웬즈데이 2>만의 특이점이 아닐지도 모른다. 북미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빅3'의 일원, <기묘한 이야기>도 국내에서는 반향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으니까. 그러나 한국에서의 <웬즈데이 2>의 부진을 그저 무시하기에는 그 함의가 너무나도 흥미롭다. 전 세계 주요 국가 중 다양성 포용도가 최하위권인 것으로 알려진 한국 사회의 특징과 문제점을 <웬즈데이 2>라는 거울이 날카롭게 비춰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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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이리시맨' 리뷰
총(銃)은 칼보다 평등하다. 칼을 무기로 잘 사용하려면 완력이 좋아야 하지만, 총은 방아쇠를 당길 정도의 힘만 있다면 누구나 격발할 수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상대를 총으로 제압할 수 있다. 총이 개입하는 순간 육체적 우위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순식간에 기화(氣化)된다. 총싸움에서는 근육의 무게보다 아무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배짱의 무게가 중요하다. 누구나 총을 쏘려면 쏠 수 있겠지만, 무심하게 총을 갈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과 실행 사이에는 총신(銃身)의 수억 배에 달하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다. 갱스터 무비의 주인공들은 누군가에게 발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책감과 양심에 발포한다. 그들의 사격은 늘 두 번씩 이루어진다. 그 태연한 반복 동작을 보며 관객은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느끼게 된다.
영화 <아이리시맨(The Irishman, 2019)>을 연출한 마틴 스콜세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갱스터 무비의 대가다. <아이리시맨>은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 <좋은 친구들(Goodfellas, 1990)>, <비열한 거리(Mean Streets, 1973)> 등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이름을 영화사에 아로새겼던 그의 대표적 갱스터 무비들과 같은 듯 다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전 그의 페르소나였던 로버트 드니로(프랭크 시런 역)가 조 페시(러셀 버팔리노 역)와 함께 예전처럼 극의 중심을 든든하게 지켜준다. 여기에 <대부> 시리즈와 <스카페이스(Scarface, 1983)> 등 여러 갱스터 무비에서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연기로 관객들을 겁박했던 알 파치노(지미 호파 역)까지 가세했다. 이처럼 갱스터 무비의 전설들이 힘을 합쳐 범죄, 우정, 배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사실은 일견 <아이리시맨>이 갱스터 무비의 성공 방정식을 재현(再現)하는 영화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리시맨>은 이러한 단편적인 해석을 배반하는 영화다. 1942년생, 한국 나이 79세로 소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마틴 스콜세지 감독, 로버트 드니로(1943년 생), 알 파치노(1940년 생), 조 페시(1943년 생)는 동년배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풍화작용은 그들의 얼굴에도 깊은 주름의 지류를 형성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금언(金言)을 비웃으면서 살인을 비롯한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밤의 세계에서 군림했던 갱스터도, 늙는다. 사실은 법이 아니라 '시간 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처럼 늙은 갱스터를 위한 밤거리는 없다. 시간의 절대적인 힘에 저항해 보려는 걸까. <아이리시맨>은 최첨단 영화 기술 중 하나인 'de-aging'을 활용해 세 주연 배우의 얼굴 주름을 펴서, 마치 초혼(招魂)하듯, 그들의 더 젊었던 시절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그렇게 과거의 영광을 복기해 본들 밤거리를 휘젓던 갱스터의 두 다리는 속절없이 좌표를 휠체어로 옮길 수밖에 없다.
(CG로 도배된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고 비판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de-aging' 활용했다는 것은 영화가 당대 최첨단 기술과 친구일 수밖에 없음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아이리시맨>은 갱스터에게도 봄날은 가기 마련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인생의 황혼을 지나 밤을 향해 걷고 있는 갱스터 무비의 전설들이, 밤의 고요 속에서, 누구나 '평등한 덧없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나직하게 읊조린다. 총성으로 밤의 고요를 깨는 장면들로 점철되기 일쑤인 갱스터 무비가 오히려 밤의 고요를 느끼게 해 준다는 아이러니야말로 <아이리시맨>의 핵심이 아닐까. <아이리시맨>의 엔딩 크레디트를 채우는 'The Five Satins'의 'In the Still of the Night(밤의 고요 속에서)'를 들으며 나는 침묵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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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회로 최대치에 담겨있는 비밀
엑. 배가 왜 이렇게 아프지? 분명히 알약 네 알을 빼먹지 않았음에도 탈이 났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인가? 그럼에도 책 읽기 게임하기 공부하기는 포기할 수 없어서 이 변명을 나 자신도 듣지 않을게 뻔하지만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다행히 목적지와 집이 그렇게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제주의 원도심 어느 곳에 내린 나. 근처 지하상가에 들어가 화장실을 찾는다. 자주 온 곳이라 어딘지 위치도 외워버렸다. 공중화장실에서 변기 커버를 아무거나 잡고 올렸다.
악! 비명을 질렀다. 누가 변기 물을 안 내렸다. 후다닥 질끈 눈을 감고 물을 내렸다. 그리고 바로 옆의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악! 이 깔끔한 공중화장실 변기 한가운데에 휴지 몇 장이 둥둥 떠다닌다(그냥 휴지만 있었다). 오늘 운수가 왜 이래? 우연 치고는 뭔가 재수 옴 붙은 느낌이다. 근데 또 억울한 게 변기 물이 고장 났냐? 그건 또 아니다. 쭉쭉 잘 내려갔다. 다른 변기도 후다닥 물 내리고 약을 꺼내 먹은 다음 아픈 복통을 처리했다. 그렇게 지하상가를 나와 나의 대장은 왜 이따위인가? 자조하다 갑자기 느닷없이 '이 우연이 참 웃기기도 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 때문에 화장실에 갔는데 그 변기 두 개가 물 안 내린 채로 있었다. 근데 그 변기 하나엔 어떤 못된 인간이 휴지만 둥둥 떠다니게 만들었다. 금세 나는 그런 적이 없었을까? 반추해본다. 다행히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는 그랬던 적이 없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서 '이런 우연도 벌어졌는데 다른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면 안 될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에잉. 이 무료한 사회복무요원 생활을 빨리 지나 우연같이 만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차 운전 열심히 하던 때 세 명의 여자들은 각기 다른 우연에 맞이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같이 제작됐었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우연과 상상>이다.
우연을 상상해서 만든 이야기
메이코는 모델이다. 사진 촬영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집으로 가는 택시에서 동료 사진작가 츠쿠미와 남자 이야기를 하게 된다. 츠쿠미가 만난 남자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이야기가 잘 통해서 수다 만으로도 밤을 새웠다고 한다. 츠쿠미는 그 남자를 마법 같은 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잘 맞는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던 츠쿠미. 그렇게 메이코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근데 메이코의 반응은 영 탐탁지 않다. 혹시? 츠쿠미가 말하는 남자의 특성을 조합하면, 메이코의 전 남자 친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충분했다. 생각에 잠긴 메이코. 메이코의 전 남자 친구가 있는 사무실로 길을 돌린다.
사사키는 대학생이다. 그리고 그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나오다. 사사키는 대학 교수 세가와가 진행하는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세가와가 꼴 보기 싫었던 사사키. 유사 여자 친구였던 나오를 구슬려 세가와에게 망신을 주려고 한다. 나오는 사사키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세가와 교수의 저서가 상을 받았던 것을 보고 한번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나오는 사사키의 부탁대로 세가와 교수를 유혹을 시도하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일어나게 된다.
중년의 여성 나츠코. 10대 때까지 사랑했던 연인을 찾기 위해 동창회에 참석한다. 그런데 그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쉬운 나츠코. 속상한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기차역으로 향한다. 그때, 옛사랑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했다. 다시 달려가는 나츠코. 그 사람도 왠지 나츠코를 아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츠코는 확신에 찬다. 행인의 집으로 향하는 나츠코. 나츠코는 그곳에서 우연이 만든 기막힌 사실을 맞이하게 된다.
우연히 만나 상상하기
영화는 세 편의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우연은 '내 친구가 어제 썸탄 남자가 내 전남친'이라는 우연이다. 두 번째 우연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였다. 세 번째 우연은 내 옛사랑을 길 지나가다 만났다는 우연이다. 영화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병렬로 배치시켜 우연의 속성에 탐구한다. 영화는 세 우연에 앞서 상상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상상을 통해서 인물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 소재다.
잠깐 생각을 해 보면, '우연'이 뭘까? 인생은 거의 대부분 필연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연이 일어나기 어렵다. 우연은 그러니까 상상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지금 당장 이 카페에서 벗어나 만원을 주울 확률은 거의 상상력에 가깝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만원 돈이 아깝기 때문에 지갑에 넣고 다닌다. 그리고 또 요즘은 xx페이가 잘 되어 있어서 현찰 갖고 다니는 사람도 얼마 못 본 것 같다. 이 필연의 가능성이 하나, 둘 모여 우연을 없애버린다. 잠깐 상상했던 나의 우연이었다. 그런데 난 이 우연을 기다리고 있다. 또 이 우연을 맞이하면 대충 어떤 행동을 할 것 같은지도 예상이 간다. 사실 간단하다. 내가 이 우연을 상상했던 이유는 방금 초코라떼 하나를 주문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못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상상은 나에게 있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우선이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맞이하는 우연은 본연이 갖고 있는 욕망에 근거해서 벌어진다. 우연처럼 벌어진 일에 어떻게 행동할지 모를 것 같지만 그 진단에는 '나'라는 인물이 거진 다 스포일러를 하고 있다. 전남친과의 재회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 교수를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 바라던 옛사랑과의 조우까지 이 우연을 대비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내면에 갖고 있는 구멍과도 상충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 구멍의 크기만큼 인물이 행동한다. 영화는 이 인물이 갖고 있는 공허함과 미련을 우연이라는 상황을 접목시켜 가감 없이 드러낸다.
또 하마구치 류스케 월드
6개월 만에 돌아온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이다. 작년 <해피 아워>와 <드라이브 마이 카>가 국내에서 개봉했을 때가 생각난다. 전자는 후에 왓챠를 통해 봤고 후자는 극장에서 두 번 봤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주는 마력은 어마어마했다. 천천히 쌓아 올려 도착한 엔딩에 긴 여운이 남았다. 그리고 내 인생영화로 등극했다. 이는 비단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분들의 인생영화가 된 두 작품.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분명하다. 지루하지 않게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는 능력 때문이다. 이 하마구치 류스케가 가진 강점은 이 세 편의 옴니버스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내면 묘사가 탁월하게 드러난다. 나츠코가 만난, 그러니까 행인에 해당하는 인물이 에피소드 3의 후반부에서 같은 장소를 와다다 달리는 신이 있다. 또 나츠코가 행인의 집에서 만나 하는 대화들을 잘 보면 글 쓰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 언어에 기반한 문장'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사의 톤이 보편적인 톤으로 일관되면 연극 같은 느낌이 강할 것이다. 근데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서 말하는 대사들은 배우 고유가 갖고 있는 언어와 톤으로 전하는 형식이라 극이 갖고 있는 개성과 흡인력이 뛰어나다. 이는 실제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대본 리딩을 한 방식(자주 대본 리딩 읽기)이 실제 하마구치 류스케가 쓰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 의도를 부여해서 연출자로서의 시그니쳐를 새긴 것이다.
근데 손님은 홍상수
이 영화에는 손님이 한 명 있다. 바로 홍상수다. 지금 당장 구글에 '하마구치 류스케 홍상수'라고 검색하면 작년 10월에 하마구치 류스케가 '나는 홍 감독의 팬'이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영화의 형식이나 내용이 홍상수를 베꼈다(근데 그렇게 마음먹어도 못 베낄 듯..)는건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살짝 홍상수의 영화를 하마구치 류스케가 자기 식대로 소화한 느낌이 든다.
우선 자기화의 근거로는 '대화'를 사용한 방식이 떠오른다. 사건이 공개되기 전의 홍상수는 인간 존재에 대해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공개되고 난 후는 외로움이라는 정서가 영화를 이끄는 듯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자기화시킨 부분은 전자다. 특히 <옥희의 영화> 생각이 난다. 우선 <우연과 상상>과 <옥희의 영화>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옥희의 영화>에 '우연'이란 키워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옴니버스 영화지만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들이 같은 사람이 아니다(이선균, 정유미). <옥희의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아도 생각나는 차이점 키워드는 두 개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뇌를 빼고 홍상수의 영화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의미와 닿아있기도 하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해피 아워>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타인과 나의 관계를 통해 바라보는 자아'를 중심으로 극본을 써온 사람이다. '인간의 욕망을 통해 웃긴 인간의 내면을 묘사한다'는, 전반기 홍상수의 영화적 테크닉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를 보여주듯 '마음의 구멍'을 위시한 인간 내면 치유의 대사가 <우연과 상상> 곳곳에서 들린다는 것은 그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욕망의 발현이 아닌 하마구치 류스케의 방법론 제시라는 점에서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셈이다. 또한 주연 배우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옥희의 영화>에서 주연 배우들은 다 똑같다. 근데 모두 같은 역할을 맡았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홍상수 감독님이 이 글을 읽고 '그냥 돈 없어서 그렇게 섭외했는데 히히'라고 하면 딱히 할 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글쓴이가 느끼기엔 네 편의 이야기가 한 가지 키워드로 읽히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영화의 구조보다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정서, 그 정서를 공유하는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비슷한 이야기들을 묶어 네 에피소드의 공감대를 하나로 묶고 싶었던 것이다. 이 <우연과 상상>은 세 에피소드의 배우들이 다 다르다. 이러면 단편영화 세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각기 다른 우연과 입장 차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사연을 통해 웃기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는 게 관객이 되는 셈이다. 당연히 뭐가 더 낫고 구리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적어도 홍상수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전개 방식과는 다른 형식을 택한 건 확실한 셈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홍상수 영화에서 썼던 연출법이 곳곳에 보이기도 한다. 일단 배경음악을 잘 들어보면 홍상수의 감성이다. 음악의 ㅇ자도 모르는 나. 그냥 '클래식 비슷한 것'으로 홍상수의 OST를 기억하고 있다. 근데 또 이 홍상수란 사람의 취향이 일관돼서 일상 속의 상황에 튀지도 그렇지도 않은 음악들을 넣어 왠지 모르게 웃긴 느낌이다. 이 <우연과 상상>에서도 이런 연출 방식이 나타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와 다카츠키가 대화하는 신, 눈 묘지 앞에서 가후쿠와 미사키가 대화하는 신에서 조용한 배경으로 대사만 나왔던 것과 대비된다. 또 홍상수 특유의 매가리 없는 클로즈업이 영화에 제시된다. 뭐 클로즈업 기법 쓰는 거야 감독 맘이지만 각각의 쓰는 타이밍은 홍상수가 썼던 형식을 빌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 외에도 19금 코드를 사용한 것, 반복과 차이를 활용한 방법까지 우리나라의 영화 팬이라면 왠지 모르게 드는 기시감이 놀라울 것이다.
베를린의 이유 있는 선택
이 영화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에 이유를 증명하듯 영화에 마법을 부린 것 같다. 전부 다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우연인데, 왠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근데 그게 영화 보는 이유 아니겠어? 이미 벌어진 일이 아님에도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는 것. 또 그게 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믿는 것. 우연 같은 좋은 이야기를 만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야 말로 사람에게 있어 영화의 역할일지도 모른다. 다들 알 거라 생각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 다 똑같다. 그런데 이 영화는 비슷한 궤를 향하는 것 같지만 좀 더 창의적이고 개성이 있다. 일본의 풍경과 감성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녹아든 사랑스러운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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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속으로...스웨덴] 사랑이라는 모순에 대해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트와일라잇>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뱀파이어의 인기를 체감케 한 소설로도 잘 알려진 <렛 미 인>은 두 차례 리메이크 될 정도로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전무후무한 서정 뱀파이어물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리는 작품 중 하나이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해당 영화는 원작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스톡홀름 외곽의 소도시 블라케베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로 단순 로맨스를 넘어 관객들로 하여금 갇혀있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된 일종의 성장과도 같은 묘한 감상을 갖게 한다는 작품으로도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이야기는 일 년 중 반절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눈이 내리는 그야말로 열기의 화창함과는 상반된 곳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온 세상의 소음을 흡수할 정도의 눈이 내린 어느 날, 고요 속에 살아 숨쉬던 도시는 소녀 '이엘리' 를 맞이하게 되고 소년 '오스칼'은 그녀의 비밀에 점차 다가가게 된다.
혹시 누군가와의 사랑이 세계를 바꿔놓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여기 소년 오스칼의 세계가 그러하다. 이엘리라는 소녀와의 만남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그녀가 단순히 뱀파이어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스칼은 지속적인 학교 폭력에 노출되어있는 인물로 유일한 여가라고는 단조로운 아파트를 뛰쳐나가 자신을 괴롭히는 상대를 흉내내며 그를 찌르는 상상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 눈 내리는 고요한 놀이터를 배경으로 그렇게 폭력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던 두 소년과 소녀는 만나게 된다.
오스칼이 이엘리에게 빠지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하다.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외톨이었던 자신의 새로운 친구일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가해의 흔적을 발견하는 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어른들이 제안하는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다름 아닌 폭력이다. 밤이 찾아오면 더욱 고요해지는 이 곳에서 두 사람의 세계는 그렇게 맞물린다. 그야말로 더 큰 성찰로 나아가지 못한 단순한 아이들의 해결책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유혹적이다. 오스칼은 어쩌면 어른 그 이상을 웃도는 나이이나 영원히 12살로 살아가는 이엘리에게서 폭력 이라는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오스칼은 그런 이엘리의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시간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겪게 된다.
영화는 그야말로 이러한 모순의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채 조용하나 거침없는 전개를 선보인다. 냉전 이후 처절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치열하지도 않는 삶을 사는 후기 산업 사회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여가라곤 산책과 수다가 전부인 삶을 산다. 이를 배경으로 폭력으로 하나가 되는 두 아이는 모순적이다. 폭력을 통해 폭력 속에서 구원 받는다는 서사는 물론 그들을 둘러 싼 한 밤 중 눈부신 눈더미와 같은 배경 역시 아이러니의 이미지를 갖는다. 제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엘리라는 비극은 초대 받아야 들어올 수 있는 존재이다. <렛 미 인>은 극중에도 강조되어 등장하지만 뱀파이어인 그녀가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지만 누군가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인다. 이엘리의 보호자였던 호키는 물론 오스칼 역시 그녀를 자진해 맞이한다. 그렇게 의도된 모순들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말 마저 이엘리가 과연 오스카를 이용하는 것인지 사랑하는 것인지 의문을 남기는 와중 그들이 결국 알면서도 선택한 비극이라는 모순이 갖는 의미와도 같은 지점이 강조되기에 서정을 자극한다 볼 수 있다. 순리는 납득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큰 울림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예외는 그 자체로도 모순을 품고있으나 특별함을 갖고 있다. 영화 <렛 미 인>이 보여주는 서사 또한 그러하다. 더불어 12살 아이인 오스칼의 시점이기에 관객은 일정 부분 그의 나이대로 돌아가 잘못된 것임에도 그 선택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 다시 주요 소재를 살펴본다면 왜 모순이 갖는 단점이 해당 영화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지 알 수 있다.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은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뱀파이어라는 특정 설정 역시 모순의 일종으로 십분 작용한다. 사실 뱀파이어는 근사한 외모와 비극적 배경으로 여러 콘텐츠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어주나 현실을 사는 뱀파이어는 어쩌면 그 환상과는 꽤 큰 차이를 보일지 모른다. 우선 콘텐츠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이들은 피를 섭취하며 그 외의 음식물에는 몸이 먼저 거부감을 보인다. 그렇기에 늘 살인이 따라 다님으로 유랑이 불가피하다. 또한 대체로 평생을 살며 이들의 시간은 추정컨대 죽음을 맞이한 날에 멈춰져있다. 그것을 장점으로 부를 쌓는 류의 스토리도 다수 존재하나 이엘리의 시간은 12살에 멈춰져있다. 경제 활동은 물론 법적으로 홀로 살아가기에 장벽이 존재하는 나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엘리는 보호자 호킨의 사냥을 통해 피를 공급 받으며 살아간다. 여기서 이 호킨과 이엘리의 관계성이 영화 속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소녀인 이엘리에 비해 호킨은 아버지로 보일법한 외모의 어른이다. 그는 이엘리를 위해 낯선 곳에서 사냥을 시작하지만 어쩐지 그의 행동은 허술하기만 하다. 제대로 된 피를 구하기도 전에 사람들에 의해 장비를 잃어버리기도, 제대로 된 사전 조사 없이 사냥감을 구하려다 모든 것을 망쳐버리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고마움은 커녕 이엘리는 모질게 대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호킨은 불평하지 않는다. 그 어떤 감정의 표현 없이 이엘리만을 위한다. 그가 딱 한 번 자신의 의견을 소리내 말하는 것은 오스칼과의 만남을 중단하라는 때 뿐이다. 그리고 그는 실패한 사냥을 책임지기 위해, 더 나아가 이엘리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얼굴 위로 염산을 부어 끝내 이엘리의 허기를 채워주게 된다. 그렇다면 이 관계성은 영화 속 서사에 왜 들어가게 된 것일까.
호킨의 마지막 대사가 '이엘리' 였음으로 미루어보건데 이들은 부녀지간이 아닌 연인 사이였음이 암시된다. 호킨 역시 오스칼의 나이에 그녀를 따라 나섰던 것일지 모르며 그렇게 호킨의 시간 역시 이엘리와 만나는 그 순간 멈춰버렸을지 모른다. 끝까지 이엘리에게 헌신하는 감정이 사랑이라면 어쩌면 결국 이엘리에게 구원 받았음으로 함께 길을 떠나게 된 오스칼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 역시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호킨과의 관계성을 통해 한 차례 그들의 미래가 예고된 바와 달리 결말은 기차 차장 너머 한껏 들어오는 햇살을 강조하며 아름다운 새출발로 묘사된다. 오스칼은 그 환한 빛을 맞이하며 어둠 속에 잠긴 자신의 사랑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내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아침과도 같은 사랑의 시작이 결국 밤의 희생양이 되는 호킨의 결말처럼 끝나리라는 일종의 예고, 순환의 흔적은 잔인하나 동시에 찬란하기도 하다.
엔딩 크레딧 역시 마찬가지이다. 눈을 꽉 감은 채로 강한 빛을 마주하면 눈 앞을 가득 채웠던 어둠은 점차 붉은 색의 빛으로 물든다. 검은 엔딩 크레딧의 배경은 꽉 감았던 오스칼의 시야를 대변하듯 칠흑같은 어둠의 색이었다가 점차 피붉은 색으로 변화한다. 오스칼이 최후가 어쩌면 호킨의 최후처럼 반복되는 일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오스칼의 세상, 권태와 폭력에 노출되어있던 세상은 이엘리라는 광폭적인 사랑에 의해 변화를 맞이했다. 이는 명백한 구원이다. 눈부시도록 밝은 수영장에서 죽음의 위기에 놓였던 오스칼이 이엘리를 바라보기 훨씬 이전부터 구원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오스칼 뿐일까? 더 짙은 어둠을 찾아, 더욱 긴 겨울을 찾아 유랑하던 이엘리는 이제 어둠 속에서 먼저 오스칼을 향해 신호를 보낸다. 어쩌면 오스칼의 존재는 단순 호킨의 대체제가 아닌, 다시 시작된 시간 즉 영원을 사는 이가 다시금 맞이하는 원형의 시간일지 모른다.
눈 부시도록 시린 스웨덴의 눈은 아이러니 하게도 긴 밤과 함께 찾아온다. 추위도 잊은 소녀에게 오스칼은 과연 무엇을 깨닫게 해준 것일까. 찬안한 밤의 설원은 그렇게 두 사람을 방관한다. 관객들 역시 그 끝이 비극일지 찬란할지 알 수 없으나 소년과 소녀를 다른 시간으로 보내줄 수 밖에 없다.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알고 있으나 그 끝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소재이기도 하다. 사랑의 모순됨은 그렇기에 우리가 가장 열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가장 많은 색을 띄고 있는 것 역시 그때문일지 모른다. 내 삶이 슬펐기에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노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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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7 노 타임 투 다이> 결연하고 숭고한 헌정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MI6를 떠나 연인 '매들린(레아 세이두)'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자신의 과거와 죄책감을 떨쳐낸 후 매들린과 함께할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그는 자신 앞에 또다시 찾아온 위기로 인해 그녀와 이별한 후 잠적한다. 그러나 본드의 과거가 뒤섞인 적 '블로펠트(크리스토프 발츠)'와 그의 조직 스펙터는 물론, 매들린의 과거가 얽힌 새로운 적 '사핀(라미 말렉)'이 등장해 MI6가 숨기고 있던 치명적인 생화학무기 헤라클레스를 탈취하자 'M(랄프 파인즈)'은 본드에게 복귀를 요청한다. 이에 본드는 오래된 동료 'Q(벤 위쇼)'와 '머니페니(나오미 해리스)', 그리고 잠시 동안 007을 맡고 있던 '노미(라샤나 린치)'와 함께 세계는 물론 마들렌과 새로운 가족을 지키기 위한 그의 마지막 미션에 나선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수십 년의 전통을 지닌 캐릭터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한 끊임없이 사투를 벌여 왔다. 냉전이 끝나고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스파이가 존재하는 이유와 그가 상대할 시대에 맞는 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했다. 그래서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는 적절한 답을 찾을 때면 호평을 받고, 그렇지 못할 때면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주식시장을 악용해 자본주의 질서를 망치려는 테러조직을 상대하거나(<카지노 로얄>), 국가의 폭력으로 인한 희생자 및 피해자의 역습에 맞서 과거를 성찰하고 새롭게 거듭난 본드는(<스카이폴>) 극찬을 받았다. 반면에 거대 비밀 조직 퀀텀과 스펙터와의 구시대적 대결 구도라는 첩보물의 클리셰를 답습한 <퀀텀 오브 솔러스>와 <스펙터>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007 시리즈인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둘 중 전자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편에서 애인인 마들렌과 은퇴 이후의 삶을 즐기기로 결정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스파이가 다시 한번 영웅으로 복귀해야 하는 이유와 그의 퇴장까지 애정을 듬뿍 담아 성공적으로 제시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이때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포착한 시대의 변화는 '위기의 국가'다.
<007 노 타임 투 다이> 속 세상은 혼란스럽다. 본드의 코드네임 007을 물려받은 노미가 그에게 작금은 변화의 시대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 변화가 혼란의 동의어로 보일 정도다. 테러리스트의 습격으로 빼앗긴 생화학 무기 '헤라클레스'를 처리하는 문제를 두고 MI6와 CIA가 강한 이견을 보이는 가운데, 둘 중 누구도 해당 테러를 어둠 속에서 조종한 사핀의 정체와 목적을 파악하지 못한다. 감옥에 갇힌 전편의 빌런이자 스펙터의 수장 블로펠트도 사핀이 어떻게 자신을 위협하는지 알아내지 못한다. M은 끊임없이 부하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찾고 사라진 정보를 복구하라고 요구하지만, 정작 그조차도 자신이 지닌 힘과 권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모습을 숨기고 있는 새로운 적과 싸울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이처럼 국가가 자신의 소관 밖에 있는 적에게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하는 영화 속 세상은 지그문트 바우만과 카를로 보르도니가 포착한 현대 사회의 알레고리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들은 공동 저서인 <위기의 국가>에서 국가가 권력의 상당 부분을 초국가적·전지구적 자본과 기술, 조직 등 국가 정치 기구의 소관 바깥에 있는 존재들에게 빼앗겼다고 말한다. 국가가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최후의 강력한 중재자, 경제 규제의 주체, 안전의 보장자로서 행동할 능력을 상실했고,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주체의 부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혼란과 변화는 빌런인 사핀의 대사와 그가 탈취한 생화학 무기 '헤라클레스'의 묘사에서도 암시된다. 너나 나나 폭력을 쓰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일갈하는 본드에게 사핀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제거할 방법도 없이 DNA 정보를 이용해 정확히 개인이나 집단을 노릴 수 있는 자신의 방법이 더 깔끔하다고 답한다. 이 장면은 정체를 숨길뿐 아니라 평범한 모습으로 일상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악과 본드와 첩보원으로 상징되는 국가가 주도권을 잃은 현실을 간단히 압축시켜 보여주기 때문에 특히 인상적이다. 또한 무기의 이름인 헤라클레스가 그 자체로 힘을 상징하는 영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MI6가 사핀에게 생화학 무기를 빼앗긴 것은, 국가 기관이 독점하던 권력과 힘이 사핀과 같은 개인 혹은 조직에게 넘어간 현실에 대한 비유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에 더해 특정 국가의 소유가 아닌 장소에 위치한 그의 기지 역시 어떤 국가도 누가 중재자이고 적대자인지 알지 못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위기는 제임스 본드가 내려놓았던 살인 번호를 다시 되찾고 영웅적인 활약을 선보이게 될 장을 마련한다. 두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정부와 정치 대신에 민간 보험회사들이 사회보장을 담당하게 되었을 정도로까지 국가가 무능해졌"다. 그 결과 "시민에 빌붙어서 오로지 스스로의 생존에만 신경을 쓰는 ‘기생충’"이 되어버린 국가는 역으로 생존을 책임져 줄 시민, 곧 은퇴한 스파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CIA는 프리랜서가 된 본드를 MI6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작전에 투입시키려 하고, M 역시 전직 요원에게 끊임없이 정보를 달라고 요구하며, 머니페니도 본드에게 위기 극복을 도와달라고 거듭 요청한다.
동시에 영화는 본드가 007로 복귀하게 되는 동기로써 국가의 보호막이 없는 시대에 개인이 마주해야 할 위험을 제시한다. 그 위험은 두 캐릭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블로펠드와 마들렌이다. 블로펠드를 만나 그와 그의 조직인 스펙터를 이용해 사핀을 찾는 데 활용하려던 본드는 역으로 자신을 이용해 스펙터를 무력화하려는 사핀의 음모를 뒤늦게 깨닫는다. 이는 한 개인의 각종 정보와 존재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 타인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조종당할 수 있는 위험을 암시한다.
한편 마들렌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불안에 떨어야 하는 위기를 간접적으로 비춘다. 호색한 스파이였던 본드는 마들렌과 함께 가족을 이루는데, 영화는 세계를 구해낸 스파이조차 가족을 지킬 도리가 없는 상황에 그를 던져 놓는다. 이처럼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해진 개개인의 삶을 사랑과 부성애를 매개로 직관적으로 전달하다 보니 본드와 마들렌의 멜로드라마는 예상보다 큰 비중과 많은 분량을 가져가고, 그만큼 진하고 애틋하다. 또한 본드의 든든한 동료였던 펠릭스와 본드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인상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제목처럼 아직 국가와 영웅에게 희망을 갖는다는 점이다. 당장 본드만 하더라도 가족과 함께 테러리스트에게 추격당하자 앞뒤 재지 않고 MI6의 도움을 요청하며, 추격전에서 좌절을 맛본 후에는 시종일관 티격태격하던 나미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힘이 없는 개개인이 혼자의 힘으로 위기를 이겨낼 수 없다면 결국 국가만이 비빌 언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깔끔한 방식이 많아진 세상에서 비록 힘과 통제력을 잃은 과거의 존재라고 해도 국가는 살아있는 동안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해 보여야 하며, 이는 제임스 본드라는 한 영웅을 통해 이루어진다. 새로운 적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M의 모습처럼 본드 역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체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미션에 나서며, 그의 007 복귀는 자연히 보호라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한 줄기 희망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영화는 시작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국가와 본드를 연결시킨다. 본드를 숱하게 죽음과 삶의 경계상에 위치시키며 하강과 상승의 운동을 반복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본드를 배와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힌다. 베스퍼의 묘지에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든 후 그는 장례식을 알리는 종소리 아래에서 애스턴 마틴 DB5를 타고 가장 007스러운 카체이싱 액션을 이어간다. 수많은 테러리스트가 깔린 계단을 올라가며 그들과 처절하게 싸우고, 기어코 미션을 완수한다. 이렇게 본드를 하강시켜 위기에 처하게 하고 또 그가 위로 올라가며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존재 가치를 잃어가는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는 상황도 환기시킨다.
이처럼 반복되는 연출은 영화가 더할 나위 없는 헌정사를 매듭지을 수 있었던 결정적 요소이기도 하다. 본드는 마들렌의 과거가 사핀이라는 위험을 만들어낸 것처럼, 과거의 영웅인 자신의 존재가 위험이 될 수 있기에 마들렌이라는 현재와 딸의 미래가 꽃필 수 있도록 퇴장을 선택한다. 이는 오프닝에서 서로의 과거를 태워야만 현재가 있을 수 있다는 본드와 마들렌의 대화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렇기에 본드가 마지막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장면에서 상술한 장면에 담긴 의미는 전복되고, 더 이상 삶을 의미하지 않는 본드의 상승은 그의 결연함과 비장함, 그리고 숭고함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이렇게 본드의 의미와 상징, 진심이 완벽하게 전달된 결과 마지막까지 의연한 본드의 모습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시리즈의 마무리로 손색없다.
한 작품으로서 비교적 단단한 완성도 역시 영화에 담긴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하고, 제임스 본드라는 한 인물에게 몰입해 그와의 작별을 고할 길을 적절히 터준다. 특히 근래 많은 작품이 선택하는 빠른 템포와 짧은 숏으로 구성된 액션 대신 본드의 등 뒤 시점에서 원테이크로 찍는 액션이 효과적이다. 마치 다양한 로케이션 현장에서 함께 싸우고 다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면서 단지 액션을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본드의 감정선까지도 따라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신무기를 보여주면서 007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리기도 하고, 감독의 전작인 공포영화 <그것>처럼 서스펜스를 영리하게 조절하며 카 체이싱, 총격전, 맨몸 격투 등의 다양한 액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또한 시리즈를 총정리하는 작품이라서 다루어야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데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왕도적인 첩보 영화 구조를 토대로 주인공들이 단계별로 단서를 추리하여 사건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큰 비중을 두고, 불필요하다 싶은 장면은 모두 쳐내면서 담백하게 이야기를 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나 데 아르마스가 연기한 팔로마처럼 중간중간 새로운 캐릭터를 수혈해서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도 일품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163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농축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늘어진다는 생각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물론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빌런인 사핀은 가면을 벗고 영화 전면에 나서자 오히려 위압감과 카리스마를 잃기 시작한다. 최초의 계획을 이루고도 더 크고 위험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추상적인 말만 반복하며 설득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 결과 뻔하고 익숙한 캐릭터는 단지 라미 말렉이라는 배우 개인의 존재감 외에는 큰 인상을 남기는 데 실패한다. 이에 더해 별다른 설명 없이 일본풍 소품이나 배경이 과하게 두드러지고 주인공들이 일본식으로 행동하는 장면도 순간적으로 몰입을 방해한다. 추가적인 상황 설명이 덧붙여지기는 하지만, 이러한 연출은 일본계인 캐리 후쿠나가 감독의 선택이든 일본을 배경으로 했던 1967년작 <007 두번 산다>의 오마주든 간에 극의 흐름과 동떨어진 간격을 메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위의 단점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건네는 작별인사의 감흥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전 시리즈의 내용을 함축하고 영화 본편 내용을 암시하는 오프닝 시퀀스가 관객을 압도하는 가운데, 오프닝 시퀀스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엔딩이 대구를 이루며 관객들을 영화 안에 가둬 버린 결과다. 오프닝은 사핀과 마들렌의 과거사와 베스퍼의 죽음부터 본드의 숱한 역경과 은퇴, 그리고 끊임없이 그를 노리는 숙적 스펙터의 존재, 마지막 사랑인 마들렌에 이르기까지 4편에 달하는 전작의 내용을 한 데 압축시키며 감정적으로 휘몰아친다. 그런데 빌리 아일리쉬의 목소리가 더해진 007 특유의 오프닝 크레디트 이후 영화가 이미 나온 이야기들의 역순으로 진행되는 듯한 인상을 남기기에, 또 한 번 달라진 세상에서 본드가 자신의 역할을 찾기 위해 펼치는 사투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으로 강렬한 몰입도를 자랑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제임스 본드는 돌아온다(James Bond will return)'는 자막을 스크린에 띄운다. 이미 007 시리즈가 시간 순서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진행되는 상황인 만큼, 이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아닌 또 다른 제임스 본드가 등장해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라는 암시일 수 있다. 또 할리우드이기에 그 외에 수많은 방법으로 제임스 본드를 다시 불러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제목과 달리 역설적으로 왜 본드가 멈춰 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여섯 번째 제임스 본드는 또 다른 시대의 아이콘인 로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처럼 장중하고 심금을 울리는 작별 인사를 건넬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보이지 않는 위기 속 국가와 영웅의 한계와 역할에 대한 희망과 슬픔이 뒤섞인 소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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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분동안 숨 못쉬게 질문하는 마스터피스
마음이 찝찝하다. 왜? 방금 붕어빵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가격이 1000원이라 쌌기 때문에 내면의 변명을 대고 먹었다. 근데 맛을 보고 난 한 중간쯤에 '아놔'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냐면 난 오늘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었기 때문이다. 500원이라는 가격에 혹해 사치 아닌 사치를 부렸다. 밑도 끝도 없이 당뇨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다. 건강검진에서 당뇨의 ㄷ자도 볼 수 없었지만 유달리 단 걸 좋아하는 나의 성격이 왠지 모르게 화를 부를 것 같다.
근데 사실 이 불안감은 익숙하다. 왜냐하면 밤에 자기 전에 뭔가를 먹는 습성을 고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근데 또 안 먹으면 뭔가를 입에 넣기 전까지 잠이 안 온다. 여러모로 나 자신에게 지는 듯한 나. 매일 밤이 될 때마다 작은 불안감이 든다. 이러다가 사고를 치면 어떡하지? 진짜 당뇨에 걸리면 어째? 강박증이라는 트리거가 의심에 불을 붙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뭔가 마음이 찜찜해진다. 어느덧 여름이다. 2022년이 되고 <매그놀리아>에 대해 쓰며 나 자신에게 뭔가 말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되어버렸다. 콜린성 두드러기 때문에 여름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같이 스테디 한 영화는 종종 생각이 난다. '올 때 XXX'라는 유명한 밈이 있지 않나. 그 아이스크림의 제품명처럼 이 영화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현대인의 공포로 자리 잡을 것 같다. 또 정식 개봉이 처음으로 이뤄진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 맛집이 될 것이다. 아마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당신의 머릿속에 서늘하게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영화 정말 무섭고, 빠져나오기도 어렵다. 텅 비어버린 내면을 가진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당신. 누구야? 극장에서 무슨 영화 볼 거야?"
끔찍하고 찝찝한 살인사건
베테랑 형사 타카베는 한 사건이 일어나서 머리가 아프다.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인했다. 그런데 그 살인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목에 X자를 그려 끔찍하게 살인했다. 경악하는 타카베. 첫 번째 피해자는 매춘부였다. 옷이 발가벗겨진 채로 피투성이인 시체를 바라보는 타카베. 벌거벗겨진 채로 도망갔다는 부사수의 말에 호텔 구석구석을 찾아보기로 한다. 소화전 문을 연 타카베. 가해자는 다 벗은 채로 벌벌 떨며 숨어 있었다. 심문을 시작하는 타카베. 이 살인사건들이 더 끔찍한 건 가해자들의 기억이 죄다 사라졌다는 점이다. 왜 죽였는지, 피해자에게 갖고 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잃어버린 범인들. 잔혹했던 범죄 수법이었는데 이걸 기억 못 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근데 이런 일이 한 번이 아니었다.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가지도 피해자들이 만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우연처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점이다.
수사를 지속하는 타카베를 뒤로하고 카메라는 어느 해변으로 이동한다. 어딘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남자. 남자는 26살의 교사다. 교사인 남자는 뭔가 창백해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 교사에게 남자가 말을 건다. "오늘이 며칠이지?" "2월 26일이요." 교사와 남자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이상한 질문을 건네는 남자. 교사는 이끌리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대답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도와줘. 부탁이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교사는 남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서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남자의 이름이 마미야인 건 어렵지 않게 알았지만 남자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의 이야기를 한 교사. 교사는 마미야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라고 답한다. 마미야는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난 바다에 있던 적이 없다"라고 답한다. "난 아무 생각도 안 나"라고 답하는 마미야. 금세 이야기의 화두는 교사의 아내로 향한다. 아내는 하는 일 없는 전업주부라고 답한 교사. 그 말을 듣고, 마미야는 라이터를 켠다. 그리고 말한다. "부인 이야기 더 해봐." 교사는 초점을 잃었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됐다. 가해자는 교사였다.
형사 타카베
타카베는 가정을 꾸리고 있다. 아내가 있다. 아내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아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카베는 아내를 사랑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집에 올 때마다 돌아가는 빈 탈수기는 아무렇지 않다. 쉬운 길도 잃어버리는 것도 별일 아니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겪는 고통도 감내해야 했다.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았던 타카베. 타카베는 친구 정신과 의사인 사쿠마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하나, 둘 씩 파헤쳐나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신 왔다 간 듯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감정은 살기다. 이 영화는 살기가 느껴지는 영화다. 연쇄살인을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살기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압도적인 서스펜스를 서서히 목을 조르는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죽기 전을 유지한다. 일단 첫 번째,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다카베의 아내가 어느 병원에서 책을 의사 앞에 낭독한다. 그리고 한 남자가 발가벗고 있는 여자를 파이프로 무차별 폭행한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서 물이 쏴-하는 소리가 들리고 어디선가 귀염 뽀짝 한 노래가 들린다. 세상 졸려 보이는 타카베의 표정과 함께 'CURE'라는 자막이 나타난다. 배경음악과 장면이 대조되는 연출 방식은 거의 정석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서 25년 전 영화의 연출 방식이 지금까지 먹힌다는 걸 생각하면 이 영화가 가진 놀라운 지점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귀염 뽀짝 한 삽입곡을 지나고 나면 처음 가해자가 카메라가 잡힌다. 이 가해자가 처음 제시된 이후부터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대사 작문이나 장소 설정, 연기 디렉팅까지 거의 신기가 들린듯한 탁월한 연출 능력을 선보인다. 별 것 아닌 거 같은 이미지에서 만드는 기괴함이라는 정서가 영화 전반을 이끄는데, 이것은 영화를 단순히 범인이 사이코패스여서 오는 공포감으로만 영화가 구성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처음 가해자는 옥내 소화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체였다. 타카베가 취조하는 장면이다. 이것도 타카베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심지어 모니터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화면에 갇힌 가해자의 모습이 비친다. 확실히 답답하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라는 답변과 잘 어울린다. 사실 간단한 비유다. '관객이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직간접적인 무언가를 확인할 수 없다' 혹은 '타카베 역시 구체적인 무언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와 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감독은 메시지와 장면 구성이 이질적이지 않게, 꼼꼼하게 설계했다.
이는 다음 장면과도 이어진다. 바다에서 무언가를 그리는 교사. 해안가에서 그렇게 멍-때리고 있는데, 마미야가 교사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렇게 모래사장 안에서 먼발치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냥 바다에서 사람들이 하는 대화다. 마미야는 교사에게 먼저 말을 건다. "여기가 어디야?" "XX 해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마미야가 사라진다. 다시 또 먼발치에서 카메라가 교사를 찍는다. 다시 등장하는 마미야. "오늘 며칠이지?" "여긴 어디야?" "내가 누군지 알아?" 이상한 질문을 한다. 근데 더 이상한 건 이 질의를 하는 인물들의 자세한 부분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얼핏 보면 바다에서 남자 둘이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게 전부라 이상할 게 없다. 이상한 건 단 하나뿐이다. 마미야가 하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은 굉장히 아무렇지도 않게 쓱 묘사된다. 얼마나 쓱 묘사되냐면, 살인이 벌어지고 나서야 관객이 '아 이래서 이랬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이런 상황을 차곡차곡 쌓아올라 후반부까지 이야기가 점점 폭주하게끔 만든다. 행동 하나, 하나 단적으로 잘라서 보면 ? 싶은 순간을 점점 차곡차곡 누적해서 광기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순간은 이 영화가 호러 분위기를 내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일상 속에 내재되어있는 두려움을 노린, 구로사와 기요시의 창의적인 발상이 뒷받침됐다고 볼 수 있다. 신기한 영화다. 조그마한 균열이 모여 목을 조르는 서스펜스가 만들어진다. 문장만 보면 러닝타임이 한 네 시간쯤 되려나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111분이다. 두 시간도 안 되는 영화 상영시간 안에 모든 에너지를 집약시켜 관객을 홀리게 만든다. 아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이 영화의 신에 홀려 연기 디렉팅, 청각 효과, 시각효과, 장소 섭외까지 저세상의 명작을 만든 게 아닐까 싶다;
무섭고 두려운 것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와 이거 미쳤다'라는 생각과 함께 숨을 굉장히 오랜만에 쉰다는 느낌이었다. 초중반부에 두 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나서는 그냥 아예 눈을 뗄 틈도 없이 집중해서 봤다. 이는 몰입감이 뛰어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몰입감이 왜 뛰어날까? 내가 이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리고 나 역시 내면의 한 구석에게 정복당해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나 역시 살아오며 내면에 품고 있는 분노가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잠식당해서 끔찍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 번 했었다. 당연히 영화는 영화고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는 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일상적인 방식으로 일반적인 호러영화의 문법을 탈피했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우리 내면에 갖고 있던 분노를 상기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장면이 주는 공포감보다 내면의 두려움이 먼저 떠오른다. 이 두려움이 영화를 이끌다 보니 평범한 일상이 제시돼도 너무 무섭다. '너 이거 무섭지?'가 아니다. '네가 무서워하는 거 알아서 일일이 말해라'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몰입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리 단점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일본 송강호
글쓴이가 일본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야쿠쇼 코지 이 아저씨 얼굴은 기억하고 있다. <바벨>에서도 본 적 있다. <세 번째 살인>이나 <도쿄 소나타>에서도 본 적 있다. 뭔가 일본의 거장들 픽을 몇 번 받으신 게 뭐랄까 우리나라의 송강호 배우가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이 느낌은 연기가 엄청 다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송강호 배우의 장점은 감정연기가 입체적이라는 것이다. <사도>에서 영조 역을 맡으며 "미쳐-서~"라고 톤을 변조하는 송강호 배우의 열연은 창의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는 연기였다. 이 영화의 중후반부를 지나면 긴장감이 한번 터지는 부분이 있다. 아마 영화를 본 후라면 잊히지 않을 장면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때 야쿠쇼 코지의 연기는 압권이다. 물론 이 하이라이트 신의 연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톤을 왔다 갔다 하는 참는 연기가 극의 생기를 부여한다.
또 하기와라 마사토의 연기는 '돌아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울린다. 이 인물을 연기하는 난이도는 아마 높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텅 비어버린 내면이라고 하는 게 말이 쉬운 거지 사실 상상이 그렇게 잘 되는 모습은 아니다. 근데 글쓴이는 이 '텅 비었다'라는 속성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광기로 가득 차 있다. 뭐 자기 이름도 모를 수 있고 얼굴도 모를 수 있다. 근데 이 사람은 최면으로 살인을 교사한 연쇄살인마다. 아닌 거다. 텅 빈 인물이 살인을 교사한다? 나머지는 다 비어있어도 내면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 가져야 할 연기 준비물이 있다. 순수한 척하는 연기다. 어찌 보면 이중적인 이 역할을 내면의 광기로 잘 소화해낸다. 이 두 배우의 연기가 극의 배경이 되어 전반적인 서스펜스를 이끈다.
마스터피스가 어울려
우리는 호러영화의 걸작 두 작품을 알고 있다. 바로 <곡성>과 <유전>이다. 전자 <곡성>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 불행에 스며든 인간의 발악을 다뤘다. 이 발버둥은 참 여러모로 관객의 기를 빨아버린다. 뭐가 옳지? 선택을 고민하지만 사실 그런 건 없다. <곡성>을 본 분이라면 이 영화의 엔딩을 선명하게 기억할 것 같다. 이는 우리 일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난 아니라고 믿었지만 사실 미끼를 물었다는 두려움은 우리 삶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는 <큐어>와 <곡성>이 오컬트 소재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일상 속, 내면의 두려움을 다뤘다는 점에서 <곡성>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마음에 들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을 딱 골라서 유효타를 쳤다.
또한 이 <큐어>는 이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을 이끄는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 <유전>역시 <큐어>의 후배 격인 영화다. <유전>의 공포 중 하나는 예상이 간다는 점이다. '설마 이렇게 되는 거 아니겠지?' 생각하면 바로 그게 이뤄진다. 근데 그게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클리셰를 부수며 이뤄진다. 즉 운명론적인 관점이 작용한다. 이 <큐어>의 공포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뭔가 똑 부러지고 똘똘한다고 해서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직업 다 좋다. 열심히 살았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피할 수 있었냐? 아니다. 이는 인물들이 삶의 선택지를 고르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선택지를 고른다는 건 당연히 단점이 딸려온다. 그러니까 이 단점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은 어찌 보면 인간에게 필연적일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쓴 바와 같이 <유전>의 공포와 일맥상통한다. 아마 <유전>을 좋아하셨던 분 역시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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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4」시리즈 속 모든 상징과 철학 뽀개기 #03 | 매트릭스 인문학적 리뷰 | 매트릭스 리저렉션 리뷰 | 매트릭스4 리뷰 | 매트릭스4 해석 | 매트릭스 리저렉션 해석 |
?《매트릭스4 리저렉션》(2021) 영화리뷰 / 매트릭스4 리저렉션 리뷰
《매트릭스 1~3》 인문학 결말포함 영화리뷰 #3
*후속영상
#1 [네오는 테스형♪] https://youtu.be/gckW2TYRFMc
#2 [현실은 진짜일까?] https://youtu.be/wfvqm5HBRb0
#4 [오라클은 악마다?] https://youtu.be/fLgWf7NWkn8
#5 [스미스는 왜 졌을까] https://youtu.be/Uas0KZDCQec
*추천영상
- 매트릭스1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댄 크라치올로, 캐롤 휴스, 리차드 미리쉬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외
제작사: 실버 픽처스,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아츠 엔터테인먼트, 그라우쵸 II 필름 파트너쉽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미국 1999년 3월 31일, 대한민국 1999년 5월 15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6300만 달러 ~ 6500만 달러
상영 시간: 136분
북미 박스오피스: $171,479,930 (1999년 9월 23일), 월드 박스오피스 $463,517,383 (2003년 3월 10일)
상영 등급: 12세 관람가
- 매트릭스2 리로디드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38분
북미 박스오피스: $281,576,461 (2003년 10월 30일)
월드 박스오피스: $742,128,461 (2011년 11월 25일)
- 매트릭스3 레볼루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29분
북미 박스오피스: $139,313,948 (2004년 2월 26일)
월드 박스오피스: $427,343,298 (2004년 3월 28일)
- 매트릭스4 리저렉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 라나 워쇼스키
각본: 라나 워쇼스키, 알렉산드르 하몬, 데이비드 미첼[1]
제작: 라나 워쇼스키
음악: 조니 클라이맥, 톰 티크베어
촬영: 존 톨
출연: 키아누 리브스, 캐리앤 모스 외
제작사/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미국 2021년 12월 22일, 한국 12월 22일
화면비: 2.39:1
상영 시간: 1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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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비스 리뷰 - 시대의 아이콘으로 메세지를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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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아이돌, 시대의 아이콘, 영원한 슈퍼스타
`엘비스`의 모든 것이 뜨겁게 펼쳐진다!
미국 남부 멤피스에서 트럭을 몰며 음악의 꿈을 키우던 19살의 무명 가수 `엘비스`.
지역 라디오의 작은 무대에 서게 된 `엘비스`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몸짓과 퍼포먼스로 무대를 압도하고,
그에게 매료된 관객들에게 뜨거운 환호성을 받는다.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일하던 `톰 파커`는 이를 목격하고
`엘비스`에게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함께할 것을 제안한다.
자신이 자라난 동네에서 보고 들은 흑인음악을 접목시킨
독특한 음색과 리듬, 강렬한 퍼포먼스, 화려한 패션까지
그의 모든 것이 대중을 사로잡으며 `엘비스`는 단숨에 스타의 반열에 올라선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 나간 치명적이고 반항적인 존재감은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갈등을 빚게 되고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압박하는 `톰 파커`까지 가세해
`엘비스`는 그의 뜻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평생을 함께한 매니저 `톰 파커`와의 관계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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