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1-12-20 00:20:05
외로운 마음과 파도의 울림, 인 디 아일
영화 <인 디 아일>
운디네와 트랜짓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던 프란츠 로고스키의 필모 중 인 디 아일을 보게 되었는데요.
과거와 현재 그 사이의 외로운 마음과 잔잔한 파도의 울림을 잘 표현한 인 디 아일 이라는 영화를 소개할게요.
자본주의에 허덕이는 지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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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그의 현재를 덮쳐와 갱생하려는 현재를 막아서 과거에 묶인 크리스티안.
하지만 그의 새로운 자리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기에 그는 나쁜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행운을 맞이합니다.
주변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등장한 그의 과거는 약간 아쉽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현재를 완전히 덮치지 않아 그의 현재와 주변이 더 잘보였다는 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쓰레기통에 얼굴을 박고 폐기물을 먹어치우는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네요.
과거에 묶인 것은 크리스티안 뿐만이 아니였죠.
트럭에서 지게차로 옮겨가야만 했던 브루노, 여러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해 그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반복되고 잔잔한 일상에 밀려오는 파도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의 긴 시간을 달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언젠가부터 살기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팔릴때까지 헤엄치는 물고기와 다를바 없는 우리가 참 서글퍼졌습니다.
브루노의 빈자리는 언제든지 채워지고 시간은 지나간다는 것이 말이죠.
약간의 커피와 파도소리가 전체를 비춰주는 조명처럼 느껴졌던 영화 인디아일, 추천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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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애가 가득한 영화 <레슬리에게>
*스포일러 유의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레슬리에게>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마이클 모리스 감독의 영화 <레슬리에게>는 인간 생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롤러코스트의 드라마틱한 움직임처럼 보여준다. 로또 당첨으로 세상을 모두 가진듯한 희열, 알코올 중독으로 파멸을 겪은 아픔과 후회, 버린 어린 아들이 성장하여 엄마를 멀리하는 현실에 대한 고통,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자책.....
돈벼락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레슬리. 지역방송과 인터뷰에서 아들 제임스와 함께 나와 마음껏 기쁨을 표현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아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기타도 사주고, 식당도 차리고....”
6년 후, 술에 빠져 수억의 복권 당첨금을 몽땅 탕진한 레슬리. 올데 갈 데가 없어 장성한 아들 집을 찾는다. 하지만 알코올중독을 뿌리칠 수 없어 술을 멀리하겠다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아들 제임스(오웬 티그역)는 룸메이트의 돈을 훔쳐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엄마를 멀리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고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영화는 자신의 그릇된 행동으로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 변화하여 일어서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고 있다. 주인공 레슬리의 알코올 중독과 함께 모텔의 젊은 주인 로열도 마약중독자이다. 중독은 삶을 파괴하고 관계를 무너뜨린다. 중독은 또한 의존을 불러온다. 알코올에 중독이 되면 알코올 의존을 벗어나기 힘들고, 마약에 중독되면 마약에 손을 떼기 어렵다.
의지를 가지고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엄청난 고통의 금단현상이 따라온다. 로열이 마약이 생각나면 밤중에 괴성을 지르고 밖으로 뛰어나가 옷을 벗고 춤을 추며 마약에 대한 생각을 돌리려고 몸부림치는 이유다. 레슬리는 오로지 아들에게 괜찮은 엄마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통스러운 술의 유혹을 뿌리친다.
나락에 떨어진 인생에도 눈을 들어 보면 분명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들의 존재와 호의가 망한 인생에 온기를 돌게하고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호텔 관리인 스위니(마크 마론역)의 관심과 사랑은 중독된 두 사람을 치유하고 중독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자가 된다. 잘못된 과거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사는 영혼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은 이 영화는 비평가협회상을 받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촬영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촬영감독 라킨 세이플이 맡아 영화를 더욱 빛냈다. 레슬리의 역을 맡은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연기는 빛났다. 영화의 깊이를 더한 그녀의 연기는 아카데미에서도 인정하여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렸다.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인간사의 어두운 내용들이 펼쳐져, 보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2시간 러닝타임이 3시간 정도로 느껴졌다. 다행히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옆에 앉은 여성관객도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서인지 참지 못하고 소리 내며 훌쩍이며 엔딩에 감동했다. 2시간 내내 인간사에 등장하는 모든 감정이 파도치는 보기드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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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의 괴물을 마주한 아이들
여기 한 한부모 가정이 있다. 엄마는 아들이 느낄지 모르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나가고자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아들은 점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인지 점점 파악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날 한 터널에서 발견이 되질 않나, 학교에서 선생님과 나눴던 이해 못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일련의 사건들을 조합해 보니 아들이 담임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 학교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학교의 대응은 무성의하기 그지없다. 사과는 하는데, 눈에 영혼들이 없다. 절차 상 필요한 행동만 하고 사건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과정에서 담임에게서 아들이 왕따를 주동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전하는데........ 이 일의 진위는 무엇인 걸까? 내 아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엄마는 혼란을 감출 수 없다.
1. 3가지 시점이 존재하는 영화
영화는 주인공이 두 명이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 두 명의 시점에서만 진행되진 않는다. 미나토의 엄마, 미나토의 담임 두 사람의 시점도 함께 보여준다. 이 세 가지 시점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본 것만 믿으면서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소문을 창조해내는 한없이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1-1. 아이들의 시점
한 초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미나토와 요리, 두 친구는 멀리서 보면 그리 친해 보이진 않는다. 표면적인 교실의 풍경 속에서 요리는 왕따를 당하고 있지만 미나토는 그 왕따를 관망하는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이 둘이 정말 영혼의 단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어른들이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거라고 몰아갈 수는 없다. 어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저 아이들이 굉장히 잘 숨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른들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들이 잘 못 생각하는 지점 중에 하나가 초등학생들의 심리 정도는 어른들이 가뿐히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틀렸다. 아이들도 집단으로 뭉치게 되면 그 어린 영혼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존재하게 되고, 집단 논리라는 것이 생긴다. 요기는 그 집단의 논리에 적응을 못해 남자 아이들의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였고, 미나토는 집단의 논리에는 순응하는 듯 했지만 사실은 반감이 있었던 아이였던 것이다. 이 두 지점이 통했던 아이들은 수업 시간이 끝나면 자신들만의 아지트로 가 힐링의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별해야 할 시점이 오자, 아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이 그저 우정이 아니라 그 너머의 있는 감정임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감정은 어린 초등학생이 느끼기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1-2. 담임
담임은 표면적인 잘못은 한 적이 없지만 아이들 사이에 어떤 논리가 형성되어 있는지부터 학생들의 개개인적인 특성을 잘 알지 못했다. 표면적인 평화를 지키는 데에 급급했을 뿐이다. 그는 학교폭력을 저지르거나 세상의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지만 아이들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아이들이 숨긴 메세지가 불러온 나비효과에 직격탄을 맞은 것 뿐이다. 요리와 미나토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아이들이었지만 끊임없이 선생님에게 표현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혼란한 감정들을 말이다. 조금만 관심있게 지켜봤었다면 이 아이들이 겉으로는 친해 보이지 않아도 아주 깊은 공감대가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성을 좋아한다는 감정은 이성애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범주이기에 설마 이 어린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 지점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3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
사오리는 아들의 상처를 보고 폭력을 당했다고 1차원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곧장 학교를 달려가 항의를 하는데, 점점 미나토가 이상한 말들을 하기 시작한다.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라는 둥, "아빠는 다시 태어났을까" 등등 엄마로서 불안함을 증폭시키는 말들을 한다. 정상적인 엄마라면 사오리의 행동이 정당했겠지만 미나토가 엄마에게조차 자신의 동성애 기질을 숨겨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사오리는 과연 자신의 아들을 잘 알고 있었던 걸까 의심하게 된다. 모든 엄마들은 자식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이들은 엄마라는 친근함을 느끼는 존재에게마저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모습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을 철저히 숨긴다. 나는 내 아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오만이며, 그 오만으로 사오리는 자신의 아들이 명백히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갖혀 한 교사를 폭력 교사로 몰아가기에 이른다.
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돌아왔다.
일본이 사회적 이슈들을 소재로 삼아 영화화 해왔던 감독인 만큼 이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도 이지메라는 일본 사회의 왕따를 앞세워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진짜 키워드는 동성애이다.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느끼는 동성애, 그리고 그 혼란한 감정을 숨기는 과정에 있어서 어린 아이들의 서툰 모습들이 어른들의 삶에 큰 반향을 일으키는 그런 이야기이다. 영화가 처음부터 잔잔한 파도처럼 시작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몰아치기 시작한다. 잔잔한 과격함이 있다라고나 할까. 분명히 자극적인 내용이기는 한데, 모든 인간군상에 대한 이해를 하게 만든다. 그게 고레에다 감독의 장점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분명 선악이 명확하지 않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만든다. 이건 범죄자를 미화하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그저 사람이라는 존재가 다 그런거지 하면서 씁쓸한 인정을 하게 만든달까.
3. 괴물이라는 제목
영화는 요리보다는 미나토의 관점이 주된 영화적 시점인데, 요리 캐릭터도 흥미로운 것이 미나토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 것처럼 보이는데, 요리는 마치 이전부터 자신의 그런 성향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온다. 아들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요리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괴물 취급을 하고, 그렇게 괴물 취급을 당하면서도 요리는 특유의 해맑음을 잃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리의 그런 해맑음이 어린 아이가 경험하기엔 너무 가혹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느끼게 한다.
그래서 괴물이라는 영화 제목에 대해 다시 곱씹어 보니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깨닫는 분들이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사회에 안정적으로 편입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책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때로는 외계인 같기도, 때로는 괴물 같이 느껴지는 것일까. 미나토도 언젠가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자신의 엄마 앞에서 자신의 아빠처럼 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 그 모습에서 자신이 세상과는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세상에 융화되지 못하는 자신은 괴물이거나 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돼지의 뇌니 뭐니 하는 대사가 나오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니 그저 안쓰러울 수 밖에 없었다.
4. 결말에 대한 의문
영화는 과연 해피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빗속에서 실종된 아이들을 담임과 사오리가 찾아냈다는 장면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상에서 두 아이들은 비가 그친 뒤의 들판을 해맑게 뛰어나간다. 이것은 아이들이 나온 곳이 진짜 세상인 건지, 그들의 죽음 이후의 세상인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상태가 어떤 것이든 아이들은 그들 나름의 안식을 찾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마지막에 미나토가 교장 선생과 부는 불협화음 색소폰이 그 증거일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면 그저 힘껏 색소폰을 불어보라는 교장의 말에 희미하게 웃는 미나토의 밝은 웃음을 믿어보고 싶다. 아이들은 그들만의 돌파구를 찾은 거라고.
아, 그리고 담임이 궁지에 몰려 난간에 서있을 때 그 불협화음 색소폰이 울려퍼지는데, 보면서도 이 기괴한 음악은 뭘까 생각했었는데, 그게 미나토의 일종의 절규였음을 알게 되자, 감독의 연출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의 모호하지만 처절한 외침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곱씹을수록 슬프면서도 선생님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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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꾸는 현재를 놓지 않겠다는 과거와 마주하는 순간
쉽게 쓰이지 않은 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는 흥행하지 못하면 좋은 영화가 아닌 걸까.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어려움으로 다가와 내려놓게 되는 현실을 마주한다. 깨진 문 사이의 바람처럼, 끝끝내 틀린 맞춤법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진 지완. 그는 어느 날, 아르바이트 삼아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인 홍은원 감독의 작품 <여판사>의 음향 복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중간중간 사라진 필름, 들리지 않는 소리, 바래진 장면으로 가득한 영화 속에서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홍은원 감독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가는 길목마다 그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며 어떤 여성의 그림자를 만난다. 어떤 장소에 빛만 바래진 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각자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 영화인들을 발견하며 들게 만든 소중한 작품들이 빛을 받지 못했던 과거의 순간과 현재의 순간이 겹치며 어둠이 그림자를 흡수하듯 앞으로 나아가는 지완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넨 끝까지 살아남아”
하나, 둘씩 떠나가는 주변과 영화 그만하라는 말 가운데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변화를 겪어야만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상황 속에 놓였다. 한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지 못했고 또 검열되었던 수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면서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게 필름을 복원하듯 먼지를 털어낸 자신의 꿈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을 맞이 한다.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오랫동안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놓아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도 포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좋아하는 것을 평생 할 수 없었지만, 그때의 순간들을 찍어둔 앨범, 커피에 달걀을 넣어 마시던 다방, 고이 넣어둔 영사기처럼 영화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끝끝내 자리를 지켜 소중한 영화들을 펼쳐낸 누군가의 작품이 그림자처럼 흔적을 남기고 커피에 달걀을 넣어 먹던 그때의 다방이 빛바래지지 않은 채,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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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 때 나는 나에게 최악의 사람이 된다.
개인적인 관심뿐만 아니라 업무 특성상 국내외 영화제의 선정작들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배우 정재영의 뛰어가는 짤과 비슷해서 익숙했을 수도 있지만, 근래 봐온 다수 영화제에서 계속해서 본 탓도 있었을 것이다. 국내에선 2021년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한 이 작품을 언젠간 꼭 보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접한 개봉 시사회 소식에는 바쁜 시기가 맞물려 고민이 많이 되었다.
시사회 당일에는 퇴근을 하고 용산 아이파크몰 CGV 근처 자리가 있는 라멘집에 갔다. 함께 간 지인과 라멘을 먹으며 라멘 이름에 대해 얘기를 했다. 소유는 간장, 시오는 소금. 일본에는 단일 소스를 베이스로 한 음식들이 꽤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섞어 깊은 맛의 요리들이 주인 것 같다는 얘기였다. 식사를 마치고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가 무슨 얘기를 담고 있더라도 분명히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전작 <델마>와 <라우더 댄 밤즈>들이 모두 다수의 영화제에 선정되어서가 아니라 단일의 맛이 아닌 깊은 맛을 담고 있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프롤로그-12개의 장-에필로그의 순으로 구성된다. 의학을 공부하던 율리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삶을 살기로 한다. 삶의 방향뿐만 아니라 사랑 또한 율리에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파티에서 만난 악셀과 사랑에 빠져 그와의 관계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성장하기도하지만 점점 어긋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국내에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유미의 세포들>이 떠오른다. 유미라는 주인공의 연애를 포함한 성장기를 담아내며 귀여운 세포들을 이용해 유미의 내면을 대변해주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웹툰)가 많은 사랑을 이유는 유미의 작고 섬세한 감정들을 세포들을 통해 보여주었기에 주인공에게 감화될 수 있었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는 귀여운 세포들은 없지만 판타지적인 연출을 통해 주인공 율리에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게 만든다. 예를 들면 율리에가 마약버섯을 섭취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세 가지의 의미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첫 번째는 악셀과의 만남에서 본인 스스로 관계 또는 삶에서 주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율리에의 상황이 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 두 번째는 율리에의 무의식, 혹은 율리에를 압박하는 것들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 세 번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미의 세포들>이 세포들을 통해 주인공에게 이입시켰다면 약물에 취한 율리에가 경험한 환각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도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롤로그, 에필로그 외에 12장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을 담은 서사적 이야기 같으면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일의 파트를 나눈듯하기도 하다. 악셀을 만나고, 함께 하게 되고, 헤어지는 과정 중에 진행되는 가족 이야기는 비교적 평행한 시간 같이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판타지적인 연출과 인물의 삶을 파트별로 나눈 구성은 율리에의 삶에 더욱 이입시키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그냥 누군가의 삶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위로가 된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이 더욱 와닿았던 것 같다.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또한 율리에의 삶을 통해 위로가 되기도 했다. 본론에서 비교했던 <유미의 세포들>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분명히 다르다. 주인공이 마주하는 상황들과 삶에 대한 고민의 깊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율리에의 삶을 ‘경험’할 수는 있었지만 율리에가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는 다소 부족했다는 점이다. 감독은 보여주고자 했었으나 아쉬움이 남는 것인지, 감독의 의도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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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크리스마스는 12월 21일인 걸로
올해는 유난히 눈이 잦다. 아침에 눈을 뜨면 소복이 내려앉은 흰 풍경을 보기도 했고, 길을 거닐다가 바람에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만났으며 우산이나 모자 없이는 한 발 내딛기도 힘든 때도 있었다. 눈. 대부분 어린이가 그러하듯 나 또한 눈을 아주 좋아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골칫거리라고 느꼈다. 희게 날리는 눈발을 보아도 이것들이 쌓여서 생길 질퍽대는 까만 흔적들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혹 땅이 얼기라도 하면 불편은 가중되었으므로 겨울의 눈 소식만큼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올해엔 무슨 바람이 들었나. 11월 초, 같이 일하던 사람이 튼 크리스마스 캐롤 때문이었을까. 출퇴근 길, 귀에 항상 꽂힌 이어폰에서는 일찌감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흘러나왔다. 특정날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걸 처음 느낀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감흥이 없다. 캐롤도 거의 듣지 않고. 아마 이른 크리스마스를 맞이했기 때문이겠지.
12월 21일. 꼭 데칼코마니 같은 이 날은 닮은 듯 다른 캐롤의 두 주인공이 처음으로 약속을 잡고 만난 날이다. 때마침 21일엔 눈이 내리다 못해 쌓였고, 그런 날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단 게 어찌나 행복하던지. 왠지 모를 떨림과 함께 자리에 앉았고, 불이 꺼지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 아래부터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평을 보았다. 이 영화가 감독인 토드 헤인즈의 최고작이라고. 물론 2016년 개봉작임을 감안하면 지금은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동의했다. 집에서 작은 화면으로 두어 번 보았던 이 영화가 얼마나 위대하게 시작했는지.
녹슨 쇠창살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벽지 패턴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배우들 이름이 그 위에 하나씩 얹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서정적인 배경음악이 잠시간의 지루할 시간을 달래려는 듯,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들려주려는 듯 이어졌고.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인 'carol'이 뜨자 약간 부산스러운 소리가 새로 등장했다. 이윽고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더니 문인지 창문인지 모를 그 쇠창살의 정체를 보여준다. 하수구. 이제부터 기나긴 테이크다. 하수구에서부터 도로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신호등.
구체적인 위치나 시대는 몰라도, 사람들의 옷차림과 북적한 분위기만으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다. 여긴 도시이고, 지금보다 1900년 중반쯤을 다루는 듯하고, 미국인 것 같다.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거리 전체를 보여주는데 처음으로 배경음악보다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가판대에서 책을 사는 남자. 카메라가 다시금 움직이고, 택시를 부르는 또 다른 남성의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드디어 다음 컷으로 넘어갔다.
책을 손에 든 남자가 계단을 빠르고 가볍게 오른다. 손에 쥔 책을 보고 관객은 예감한다. 아, 좀 전에 책 샀던 남자구나 하면서. 그는 한 레스토랑에서 바텐더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아는 사람을 발견했는지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 할 캐롤이 보인다. 하지만 남자는 캐롤과 마주 보고 있는 뒤통수의 주인공, 테레즈에게 아는 체한다. 둘 사이의 오묘한 분위기는 테레즈의 친구가 끼어들며 자리가 아예 파하는 것으로 끝난다.
궁금증을 한껏 유발하더니 영화는 테레즈의 좀 더 앳된 시절로 전개된다.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는 테레즈.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경영진이 필수로 착용하라는 모자를 느지막이 쓰고, 손님을 응대한다. 그러다가 문득 한 곳에 그의 시선이 콕 박혔다. 눈을 떼지 못한다는 표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이, 눈도 안 깜박이며 뚫어지게 쳐다본다. 시선의 끝엔 캐롤이 있었고.
둘의 눈이 마주치고, 잠깐 손님의 시야로 가려진 캐롤은 사라졌나 싶더니 손에 쥔 장갑을 턱 내려놓으며 테레즈에게 말을 건다. 자신의 딸 린디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려는데 뭘 줘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에 테레즈가 캐롤이 보고 있던 장난감 기차 세트를 추천한다. 이름, 주소, 연락처를 적은 빌지를 끝으로 둘은 손님과 점원 간의 짤막한 만남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캐롤이 두고 간 장갑. 이 장갑을 기차 세트에 함께 보내며 테레즈는 그 연결을 이어가고자 한다.
분실물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건 점원으로서의 당연한 행동이지만, 캐롤에게 제대로 기차 세트가 도착했는지 거듭 확인하는 그 목소리엔 분명한 기대감이 있었다. 고마움을 표하는 전화가 한 번쯤은 걸려 오지 않을까 하는. 내색하지 않아도 은근히 캐롤을 기다리던 테레즈에게 곧 반가운 목소리가 찾아왔다. 수화선 너머의 캐롤. 고마운 마음에 점심을 사고 싶다며 둘은 약속을 잡는다.
12월 21일 오후 2시.
테레즈는 공책에 캐롤의 이름과 만날 장소, 시간까지 천천히 적어 내려 간다. 한 획을 긋는 그 손길은 조심스러움이 묻어났고, 그게 참 소중해 보였다.
먼저 도착한 테레즈. 캐롤은 약속에 늦어 미안하다는 사과로 첫인사를 건넨다. 곧 메뉴를 고르는데 능숙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문하는 캐롤과 달리 테레즈는 곁눈질을 하다가 같은 걸로 달라고 한다. 캐롤과 같이 있는 동안 테레즈는 늘 그래 보였다. 캐롤이 "Would you?" 하며 무언가를 제안하고, 테레즈는 넙죽 "Yes"로 답한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에 뉴욕 외곽에 있는 캐롤 집에 가게 된 테레즈.
테레즈는 꽤 들떴던 것 같다. 새하얀 눈을 보면 몽글몽글해지는 우리네 마음처럼. 집안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하며, 나름 캐롤을 중심으로 린디, 테레즈가 조용하고도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캐롤의 불청객이 찾아온다. 캐롤과 이혼 소송 중인 하비. 분위기는 폭삭 무너진다. 테레즈가 피아노 치던 화기애애한 순간이 한순간에 꿈같은 일로 뒤바뀌고, 캐롤과 하비의 날카로운 음성들을 들으면서도 듣지 않는 체하며 테레즈는 멀찍이 서성였다. 하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테레즈를 추궁하며 무례하게 묻는다. 캐롤이랑 무슨 관계냐고. 또 무슨 짓을 벌인 거냐며.
하비의 폭주는 테레즈를 당혹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캐롤의 자존심이 다칠 만한 행동이었다. 캐롤은 힘겹게 상황을 수습해 간다. 크리스마스는 절대 양보하고 싶지 않았지만 린디를 하비 품에 보내고, 테레즈 또한 집으로 돌려보낸다.
결국 기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던 테레즈. 분명한 상처였다. 대신 담배를 사 오겠다는 말에 캐롤이 이 밤에 주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는 분노 섞인 답변이 그를 아프게 했던 것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느끼는 실망감으로도 보였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함.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 보다가 하루가 끝났다. 크리스마스트리를 고르던 캐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처음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보기 시작한 변화의 날이 이렇게.
침착함을 되찾은 캐롤이 테레즈에게 사과를 건네고, 테레즈는 이를 받아들였다. 캐롤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일지, 혹은 좋아하는 마음으로 상처를 덮어버린 것인지. 린디와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없게 된 캐롤은 접근 금지까지 받게 된다.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자신의 가족들과 보내자는 하비의 말을 완강히 거절한 캐롤에게 벌을 주듯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은 캐롤 또한 똑같이 받는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있거나 슬퍼하기보다는 뭐라도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서부 여행을 가려는데 테레즈에게 동행을 제안한다. 이번에도 역시, YES.
이 말에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연인 리처드다.
사실 명목상 연인이라고 할 정도로 테레즈와 그 사이엔 별다른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리처드는 유럽 여행을 가자며 오랫동안 테레즈에게 졸랐고, 캐롤의 모든 말에 좋아요를 외치던 테레즈는 대답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그런 테레즈가 캐롤과 여행을 가겠다니. 자신이 정체 모를 사람에게 밀렸다는 인상을 받은 리처드가 난폭한 말을 퍼붓는다. 2주 뒤면 자신에게 만나달라며 빌게 될 거라는, 바람 섞인 말을 뱉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캐롤이 운전하고, 중간중간 식사를 하고, 가끔은 차에서 간단히 먹기도 하고. 스탠더드 룸 2개를 쓰던 둘은 할인을 핑계로 스위트룸에 묵으며, 더 가까워졌다. 여행을 하며 점점 확신에 차던 테레즈와 달리 캐롤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하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끊기도 하며. 와중에 테레즈 앞에선 의연하게 굴었다.
그러나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게 아니다. 서로에게 아주 깊어졌을 무렵 일은 터지고 만다. 호텔에 딸린 카페에서 만난 외판원. 그는 외판원이 아니라 하비가 고용한 사람이었다. 둘의 옆방에서 그들의 음성을 녹음한 테이프를 하비에게 보낸 걸 알자 캐롤은 거의 이성을 잃는다. 총을 그에게 겨눌 정도로.
테레즈는 캐롤이 지닌 불안을 감지했었다. 그의 캐리어 속 총을 이전에 보았기에. 슬쩍 그에게 물어봤지만 캐롤은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 캐롤이 말하지 않는 이상 이때에도 테레즈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장전하지 않은 총은 빈 탄창 소리만 냈고, 캐롤이 운전하는 차 안은 테레즈의 울음 섞인 말로 뒤덮인다.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좋다고 따라왔다며. 캐롤은 그게 아니라고 테레즈를 달랜다.
그렇게 둘은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문제는 캐롤이 혼자 정한 마지막이었다는 것. 아침, 잠에서 깬 테레즈를 맞이한 건 캐롤의 오랜 친구이자 한때 만났던 사이인 애비였다. 테레즈는 넋 나간 사람처럼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았다. 딱 실연당한 모습으로. 실연이 맞긴 하다. 제 인생을 뒤흔들어 놓고선 어느 날 눈 뜨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니.
테레즈는 애비 더러 묻는다. 왜 자신을 싫어하냐고.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것 같았다. 테레즈는 캐롤이 애비에게는 솔직한 얘기를 하며 의지한다는 걸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둘이 만났던 사이란 것도 알기에. 그 마음을 아는지 그게 사실이라면 아침 댓바람에 서쪽까지 비행기 타고 왔겠냐는 말부터 애비가 열 살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라는 이야기까지 덤덤히 들려준다. 그리고 캐롤의 편지를 건넨다.
캐롤은 불같으면서도 물 같다. 화르륵 타올랐다가 금세 차분해지며 자신이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찬찬히 생각하고 행동한다. 테레즈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하고 화가 날 테지만, 캐롤이 생각하기에 이건 최선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최선. 이번에도 테레즈는 아무것도 선택해보지 못한 채로 어떤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돌아온 집.
눈에 보이는 건 똑같은데 모든 게 달라졌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고, 테레즈는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사진. 캐롤이 선물한 최신형 카메라도 있지 않은가. 포트폴리오를 착착 준비해 가며 사진을 엄선한다. 현상한 사진 중에 불쑥 캐롤이 나와서 멈칫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할 일을 할 뿐이다.
캐롤은 무얼 하고 있는가.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하비네 가족 틈에 둘러싸였다. 심리 상담사를 꾸준히 만나며 '동성애 치료'를 받는 중이다. 1950년대 뉴욕에서는 동성애가 정신병 취급받았으므로, 그들에겐 당연한 처사이긴 하다. 일련의 노력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다. 린디, 캐롤 자신.
본인은 얼마나 의식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한 사람 더 있다. 테레즈. 자신이 아닌 사람인 척 연기하는 똑같은 일상에 숨 막혀하는 캐롤에게 애비는 테레즈 얘기를 꺼낸다. 잠시 간의 정적. 소식 뭐 알고 있느냐는 은근한 물음. 퍽이나 진지한 상황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제 손으로 놓았는데 정작 놓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잘 모르겠는데 뉴욕타임스에 입사한 것 같다고 답하는 애비도 참. 서로 어깨동무하며 계단을 내려가던 뒷모습이 힘들 때 의지해가며 버텼을 그들의 세월을 느끼게 해 주었다.
캐롤은 하비와 자신의 변호사들과 만난 공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모두를 배제한,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내린다. 자신의 성 지향성을 인정하고, 테레즈와 있었던 일도 인정하며. 린디 양육권은 포기하되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여기까지 최대한 양보한 건데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법정까지 갈 거고, 그러면 정말 추해질 거라고. 그리고 하비에게 말한다. 우리 그렇게 추한 사람은 아니잖아.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테레즈, 자기 자신을 선택한 캐롤. 둘은 알게 모르게 한 뼘 자라난 상태로 만난다. 이번엔 캐롤이 기다린다. 그가 약속 시간에 보이지 않자 전화를 건다. 테레즈가 일하는 곳에 전달한 편지가 제 주인을 잘 찾아갔는지. 그렇다는 답을 듣고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반대편 의자가 찼다. 테레즈가 온 것이다.
캐롤은 가구 바이어로 일하고 있다며 근황 얘기를 늘어놓는가 했더니 집이 꽤 큰데 텅 비었다고. 괜찮으면 함께 살자는 제안을 꽤나 대뜸 던진다. 단숨에 뱉는 그 말이 의아하기도 하면서 지금처럼 디지털로 순식간에 연결되는 세상이 아니니까, 오히려 이 전개가 당연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테레즈는 생전 캐롤에게 하지 않던 답을 들려준다. NO.
캐롤은 반쯤 예상한 답이 아니었을까. 이따 저녁 약속에 가는데 마음이 바뀌면 와 달라는 말과 함께 분위기는 오묘해진다. 이 오묘한 분위기로 책을 든 남자가 테레즈를 부른다. 맞다, 이제 영화 초반 장면과 맞닿았다. 캐롤과 테레즈는 각자의 모임 장소로 흩어진다. 테레즈는 파티 장소에서 시간을 잘 보내면서도 한 편으로는 계속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캐롤의 시점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도 똑같지 않았을까. 똑같았을 거다.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영화의 마지막. 결국 테레즈는 캐롤을 찾아간다. 테레즈가 멀리서 캐롤을 보고, 서서히 다가선다. 캐롤이 테레즈를 발견한다. 둘의 눈이 짧게 마주쳤던 백화점에서의 첫 만남과 달리 이번엔 서로를 뚫어지게 본다. 그렇게 눈빛이 계속 이어지다가 영화가 먼저 끝난다.
이제 테레즈도, 캐롤도 두렵지 않다.
너무 좋았다. 좋았다는 모호한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고 느낄 만큼 좋았다. 끝나고서는 이번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해 줄 이야기가 이어졌다.
영화 속 소품 등을 굿즈로 만들어 판매하는 '클로저'다. 첫 상영회 기념으로 캐롤과 관련된 몇 가지 선물을 받았다. 테레즈가 사용한 노트를 본떠 만든 수첩, 편지지, 스티커들을 받았다. 은근 묵직한 선물을 품에 안고 완벽한 마무리를 지었다. 12월 21일 오후 2시, 그들의 점심 약속에서 곁들인 마티니를.
뒤에 일정이 있어 음미하고 가진 못했지만, 이런 경험 자체가 좋았다. 사실 12월 21일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며칠 전일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코끝 시린 겨울과 딱 맞는 영화를, 영화 속 뜻깊은 날짜와 정확히 같은 날에 보며 영화에서 나온 음식을 맛보며 마무리 짓다니. 그들이 담긴 장면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내게도 소중한 날이 하나 더 생겨 기뻤다.
다가올 25일보다 더 좋은 기억이 생긴 것 같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12월 21일이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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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다정한 상상력 깃드는 곳에
1988년. 미라 나이르 감독의 <살람 봄베이>가 세상에 등장한다. 지금도 여성 감독이 손꼽히는 나라 인도에서.
연극을 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사람의 첫 장편 극영화였다. 거리의 아이들이 가진 힘을, 또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더 많은 곳에 실어 나르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예술이 과연 현실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거리의 아이들을 배우로 기용하고, 아이들이 사는 바로 그곳에서, 인파 통제도 없이 바글바글하게 찍었다고 한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 영화는 상업 배급망을 타고 해외에 흘러간 첫 인도 영화가 되었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고,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는 등, 세계 곳곳에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미라 나이르는 영화의 성공에서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자신의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예술은 현실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마치 그 대답처럼. 미라 나이르는 재단을 만든다. <살람 봄베이>의 수익금으로 거리의 아이들을 후원하는 단체. 이는 집과 밥을 제공받는 아이들뿐 아니라 미라 나이르 감독 본인에게도 선물 같은 존재였다. 예술이 현실에 무언가 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목말랐던 질문을 해갈하는.
그리고 30여 년이 흘렀다.
2021년. "아주 특별한 단짝dostojee"이라는 제목으로, 인도에서 또 한 편의 영화가 나왔다.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어떤 드라마가 우리에게 알려준 <깐부>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달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예술은 현실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깐부>의 시놉시스만 읽었을 때에는 좀 더 잔혹한 이야기를 상상했다. 이웃집에 살며 모든 걸 함께하는, 단짝인 두 아이가... 한 아이는 힌두교 집안, 다른 한 아이는 이슬람교 집안. 평화로웠던 마을에 서서히 흘러들어오는 종교 간의 긴장감. 그때 찾아오는 이별.
그러나 막상 <깐부>를 보면 많은 부분이 참 동화적이다. 시골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를, 한참 공들여 보여준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이 어떻게 창의력을 발휘해 멋진 장난감을 만들어 내는지, 용돈이 마땅치 않은 아이들이 어떻게 신박한 방법으로 용돈 대용품을 마련하는지, 값싼 장난감(그중에는 '똑딱이'라고 나오는, 요즘 애들이 갖고 노는 푸쉬팝 같은 것도 있다. 애들은 동서고금 똑같은 걸까?) 하나로 얼마나 깊은 소통을 할 수 있는지... 가난하지만 잔잔한 인도의 시골 풍경에서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이 편안하게 펼쳐진다.
얼핏 보면 시대적 배경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은 노인이 된 유명 배우의 젊은 시절 포스터가 나왔을 때에야 옛날임을 겨우 느낄 수 있었다. 인도 시골은 9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건,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인도 사람들은 아마 영화 초반에 시대적 배경을 단박에 눈치챘을 것이다. 비 오는 밤,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 타밀나두에서 버스 테러가 있었고... 사원 파괴 사건 진상 조사회가 꾸려졌고...
1992년이다. '바브리 마스지드'라고 불리는, 인도의 이슬람 사원 하나가 파괴된 해. 힌두교도들의 행동이었다. 이는 단박에 종교 분쟁으로 번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남부의 타밀나두 지역은 잠시 마비되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제법 끔찍하지만, 바브리 마스지드 사원 파괴 사건은 오랜 시간 겹겹이 쌓여 온 힌두교-이슬람교 분쟁사의 한 장면일 뿐이다. 수많은 사건들은 사슬고리처럼 연결되어 있고, 이 사건 또한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의 사건에서 이어져 와, 이후의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피는 피로, 긴장은 긴장으로.
그 영향력은 두 아이가 사는 시골마을까지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들어온다. 원래 나란히 이웃한 두 아이의 집이, 낮고 얇은 담장 하나로 가볍게 갈라져 있던 두 집이 실은 여러 모로 대칭적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힌두교 소년인 팔라시의 집에서는 아빠보다 엄마가 부각되고, 여동생이 있고, 농사를 짓는다. 이슬람교 소년 사피의 집에서는 엄마보다 아빠가 부각되고, 누나가 있고, 베틀을 돌린다. 이제는 대칭의 모양보다 차이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큰 교류도 없지만 큰 갈등도 없었던 양쪽 집에서는 두 아이에게 슬슬 눈치를 준다. 간식을 나눠 먹는다든지, 친구의 집에 들어서는 일, 같이 노는 일, 물 한 컵을 마시는 일조차 눈치 보이는 일이 되어 간다.
팔라시의 어머니는 불안하다며 이사를 가고 싶어 한다. 사원이 파괴되었으니 사원을 새로 지어야 한다며 이슬람교도들은 시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힌두교도들은 그에 맞서 연극패를 부르고 새 신상을 세우기로 한다. 새로 세우려는 신상의 주인공인 라마를 모셔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상황이 몰아치는 대로 어른들은 그렇게 몰려 간다. 불안하니까. 어른들은 그동안 너무 많이 본 것이다. 종교적으로 소수파가 되는 순간 학살당하는 장면을 많이 목격했고, 거기서 너무 많은 피를 보았다. 불안해지지 않기 위해 더욱 이를 악물고, 맞불을 놓아야 한다고 외친다.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경계가 무엇인지 모르고 넘어선다. 무대 위에서 원수였던 연극배우들이 무대 뒤에서 나란히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며 "원수지간 아니었어요?" 하고 놀랄 만큼 순진무구하다. (배우들은 "먹고살려면 다 그런 거다."라고 대답하는데, 사실 어른들의 종교 싸움도 기원을 따져 보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걸 깨닫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아이들은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 싸움 놀이를 한다. 종이 모자를 만들어 끈끈이를 바르고 허공에 휘둘러, 반딧불이가 붙은 빛나는 모자를 만들어 쓰고 "왕처럼 싸워 보자"라고 한다. 어른들이 맞불을 놔야 한다고 얘기할 때, 반짝이는 것들을 모아 붙인 채 밝게 웃으면서 칼싸움을 한다. 서로 반대되는 지점에 서 있어도 누구도 다치지 않는 것. 아이들의 동화 같은 상상력과 아이다워 사랑스러운 모습이, 현실적인 어른들과 대조되어 더욱 눈이 부시다. 그렇기에 두 아이의 "이별"이 더욱 눈물겹고 놀랍고 애달프지만.
두 아이가 우연히 애벌레를 발견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밟아 터뜨리거나 저 멀리 툭툭 털어버릴 만한, 털이 부숭부숭한 애벌레를 보고 팔라시는 사피에게 묻는다. "나비 만들래?" 백번 양보해서 나비가 될 때까지 애벌레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해도, 그런 문장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신선한 문장이었다. 살리는 힘,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깃든 문장이라 마음에 깊이 남았다.
창조의 상상력. 생명을 품는 상상력. 그 마음은 사실 대단히 엄숙하고 중요해 보이는, 이를 테면 종교의 사원이나 중요해 보이는 어른들의 회합 자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같이 있는 마음. 그 다정한 상상력 끝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데서. 나란히 똑같은 자세로 서서 뻗어보는 발끝, 친구를 부르면서 웃는 눈초리 끝, 소중한 사랑의 이름을 나무에 새기는 마음 끝, 그런 데서.
얼핏 보면 매우 특수한 인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지만, <깐부>를 보면서 나는 인도 바깥의 것들을 더 많이 떠올렸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분쟁과 그 안에서도 빛나는 어린 시절을 담은 영화 <벨파스트>부터, 지금도 분쟁이라는 이름 하에 신음하고 있는 지역의 어린이들까지도. <깐부>는 인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의 벽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모든 사회의 이야기이다.
다시 미라 나이르 감독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예술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미라 나이르 감독 본인이 확인했듯, 그렇다. <살람 봄베이>가 미라 나이르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였듯, <깐부> 또한 프라순 차터지라는 젊은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이다. 실제로 영화의 배경과 비슷한 지역에 10년 넘게 살았다는 그는, 실제로 본인의 삼촌도 종교 분쟁 중 사망했고 그로 인해 할아버지가 마음의 병을 얻었다는 그는, 차기작 또한 경계를 넘는 영화가 될 것이라 말한다.
<깐부>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국경선이 정해진 이래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인도의 무수한 경계와 담을 허무는 영화로, 인도뿐 아니라 세상 멀리까지 흘러가 주길 기대한다. 예술이 현실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한 번 보여주는 영화가 되길 기대한다.
[전주국제영화제 <깐부> 상영]
▶ 여기에서 영화제 기간(2022년 4월 28일~5월 7일) 내내 온라인 시청이 가능합니다. :)
▶ 5월 5일 11:30 CGV전주고사 1관에서도 관람이 가능합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의 초청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프레스로 참석하였습니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는 2022년 5월 7일까지 전주 영화의거리 일대에서 계속 진행됩니다.
일부 온라인 상영작도 있으니 어디 계시더라도 이 시간 놓치지 마시길 추천드립니다. 전주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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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경이 보여주는 멀티버스 액션! 이렇게 기발한 방법이 있었다니!!
?Rabbitgumi 입니다!
양자경 주연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개봉했어요.
멀티버스를 다루는 무척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주인공 에블린이 다른 우주와 연결하면서 보게 되는 다양한 다른 버전의 자신을 보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는데요.
마치 인생의 갈래길에서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죠.
다양한 가능성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액션도 좋고, 영화의 유머도 꽤 타율이 높아요.
무엇보다 예측가능하지 않으면서 묘하게 설득되는 이야기 전개가 무척 훌륭합니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배우 양자경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겠죠.
무척 따뜻한 가족 영화로 볼 수도 있어요.
이 영화 궁금하시죠?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에사는 일반적인 영화 리뷰 보다는 보면서 떠올렸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정리하여 전달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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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지던트 이블 : 라쿤시티> 티저 예고편
거대 제약회사 '엄브렐라'가 철수한 후 폐허가 된 '라쿤시티' 어릴 적 끔찍한 사건을 겪고 고향을 떠났던 클레어가 돌아온 그날 밤, 라쿤 시티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순식간에 지옥으로 돌변한다. 남은 시간은 7시간, 죽음의 도시를 탈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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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챌린저스> 1차 예고편
코트 위 승리를 향한 집념, 치명적 끌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