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샤2022-09-16 13:21:05
영화 '아이리시맨' 리뷰
평등한 덧없음에 대하여 - 갱스터에게도 봄날은 간다
총(銃)은 칼보다 평등하다. 칼을 무기로 잘 사용하려면 완력이 좋아야 하지만, 총은 방아쇠를 당길 정도의 힘만 있다면 누구나 격발할 수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상대를 총으로 제압할 수 있다. 총이 개입하는 순간 육체적 우위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순식간에 기화(氣化)된다. 총싸움에서는 근육의 무게보다 아무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배짱의 무게가 중요하다. 누구나 총을 쏘려면 쏠 수 있겠지만, 무심하게 총을 갈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과 실행 사이에는 총신(銃身)의 수억 배에 달하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다. 갱스터 무비의 주인공들은 누군가에게 발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책감과 양심에 발포한다. 그들의 사격은 늘 두 번씩 이루어진다. 그 태연한 반복 동작을 보며 관객은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느끼게 된다.
영화 <아이리시맨(The Irishman, 2019)>을 연출한 마틴 스콜세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갱스터 무비의 대가다. <아이리시맨>은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 <좋은 친구들(Goodfellas, 1990)>, <비열한 거리(Mean Streets, 1973)> 등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이름을 영화사에 아로새겼던 그의 대표적 갱스터 무비들과 같은 듯 다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전 그의 페르소나였던 로버트 드니로(프랭크 시런 역)가 조 페시(러셀 버팔리노 역)와 함께 예전처럼 극의 중심을 든든하게 지켜준다. 여기에 <대부> 시리즈와 <스카페이스(Scarface, 1983)> 등 여러 갱스터 무비에서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연기로 관객들을 겁박했던 알 파치노(지미 호파 역)까지 가세했다. 이처럼 갱스터 무비의 전설들이 힘을 합쳐 범죄, 우정, 배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사실은 일견 <아이리시맨>이 갱스터 무비의 성공 방정식을 재현(再現)하는 영화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리시맨>은 이러한 단편적인 해석을 배반하는 영화다. 1942년생, 한국 나이 79세로 소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마틴 스콜세지 감독, 로버트 드니로(1943년 생), 알 파치노(1940년 생), 조 페시(1943년 생)는 동년배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풍화작용은 그들의 얼굴에도 깊은 주름의 지류를 형성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금언(金言)을 비웃으면서 살인을 비롯한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밤의 세계에서 군림했던 갱스터도, 늙는다. 사실은 법이 아니라 '시간 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처럼 늙은 갱스터를 위한 밤거리는 없다. 시간의 절대적인 힘에 저항해 보려는 걸까. <아이리시맨>은 최첨단 영화 기술 중 하나인 'de-aging'을 활용해 세 주연 배우의 얼굴 주름을 펴서, 마치 초혼(招魂)하듯, 그들의 더 젊었던 시절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그렇게 과거의 영광을 복기해 본들 밤거리를 휘젓던 갱스터의 두 다리는 속절없이 좌표를 휠체어로 옮길 수밖에 없다.
(CG로 도배된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고 비판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de-aging' 활용했다는 것은 영화가 당대 최첨단 기술과 친구일 수밖에 없음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아이리시맨>은 갱스터에게도 봄날은 가기 마련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인생의 황혼을 지나 밤을 향해 걷고 있는 갱스터 무비의 전설들이, 밤의 고요 속에서, 누구나 '평등한 덧없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나직하게 읊조린다. 총성으로 밤의 고요를 깨는 장면들로 점철되기 일쑤인 갱스터 무비가 오히려 밤의 고요를 느끼게 해 준다는 아이러니야말로 <아이리시맨>의 핵심이 아닐까. <아이리시맨>의 엔딩 크레디트를 채우는 'The Five Satins'의 'In the Still of the Night(밤의 고요 속에서)'를 들으며 나는 침묵한다.
<끝>
Relative contents
-
- 〈파묘〉는 장재현 감독의 진일보가 아니다
- 6★/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어느 부유한 집안에 불운이 연달아 생긴다. 아버지, 아들, 손자에게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이어진다. 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곳은 무당의 자리다. 두 무당 화림과 봉길은 괴로워하는 가족에게 조상의 묫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제안하고, 여기에 풍수사 상덕과 장의사 영근이 결합한다. 의뢰인 조상의 묫자리는 좀처럼 무덤이 있을 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화림, 봉길, 상덕, 영근은 이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한다.
이 첫 번째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영화가 자아내는 긴장감은 상당하다. 감독이 이미 전작 〈검은 사제들〉, 〈사바하〉에서 선보인 바 있는 능숙한 솜씨로 사건의 비밀을 향하는 여정을 채운다. ‘미신’으로 불리는 일에 종사하는 캐릭터와 배우들의 연기도 몰입감을 강화한다. 훌륭한 배우들이 나름대로 표현한 개별 캐릭터를 한국의 케이퍼 무비에서 본 능청스러운 호흡으로 엮어내 오컬트 장르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쉬이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영화의 중반, 의뢰인 가족의 사연이 갈무리된 후 영화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하면서 영화는 고꾸라진다. 의뢰인 가족 조상의 관 아래에서 수직으로 박힌 거대한 관이 발견된다. 크기와 묻힌 방향 모두 기괴한 이 관은 말뚝의 형상이다. 묫자리는 한반도의 척추에 해당하는 곳이다. 때문에 관은 척추를 부러뜨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관 속에 든 것이 일본 다이묘(무사)라는 것이 금세 밝혀진다. 의뢰인은 친일파로 고위 관료였는데, 다이묘의 관을 파헤치지 못하게 고위 관료의 관을 그 위에 덮어 위장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지도가 호랑이 모양인지 토끼 모양인지를 두고 다툼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누가 각각의 의견을 지지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민족의 가능성과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은 한반도를 도약하는 호랑이로, 민족의 기질을 유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것으로 본 사람들은 토끼로 보고자 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영화의 대사는 이 영화가 전자의 관점을 취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요컨대 개인적 비극을 파헤쳐보니 민족의 비극이 보였고, 파묘를 통해 호랑이의 끊어진 척추를 되살려내 민족정기를 회복하자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다.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는 완전한 실패로 보인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미스터리의 대상이 너무 빠르게 정체를 드러낸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대상의 정체가 무엇일지에 대한 궁금증은 오컬트 장르가 긴장감을 자아내는 핵심 장소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따르지 않고, 무당 일당이 어떻게 민족정기를 억누른 괴수를 퇴치할 것인지를 관객에게 몰입감을 유지하며 보여줘야 한다는 어려운 싸움에 자발적으로 뛰어든다. 장르 영화가 반드시 장르 공식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 오컬트 장르의 재미 요소를 부정하고 시작하는 건 영리한 선택이 아니다. 장르의 문법을 넘어설 만한 분명한 장점이 있는 게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파묘〉가 후반부에서 선보인 도전은 전반부와 달리 참을 수 없이 지루했다.
두 번째는 감독이 전작 〈검은 사제들〉, 〈사바하〉에서 보여준 치밀하고 깊이 있는 윤리 의식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던지는 두 신부의 이야기를 담은 〈검은 사제들〉, 영생을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착취해야 한다면 그 존재가 불사의 존재라도 ‘신’일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사바하〉와 달리, 〈파묘〉에는 우리가 일상으로 끌어올 만한 윤리적 고민이 없다. 그저 우리 민족을 억누른 일제와 그에 동조한 친일파를 처단해야만 한다는 당위와 그 당위가 달성됐을 때의 통쾌함만 있다. 앞서 언급한 한국 케이퍼 무비의 능숙한 호흡과 더불어, 더 많은 관객이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소재를 영화에 들여왔다는 점에서 이는 흥행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오컬트 장르를 크리처물로 바꾸고, 민족 감정으로 지금껏 감독이 던져온 윤리적 화두를 대체한 결과가 과연 얼마나 의미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모든 걸 ‘의도하고 밀어붙였다’*는 감독의 말은 아리송하다. 지금껏 보아온 그의 뚝심이 이 작품에서는 적당한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데만 쓰인 것 같아서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릴 테지만.
*https://sports.khan.co.kr/entertainment/sk_index.html?art_id=202402260903003&sec_id=540401&pt=nv
-
- 4월 2주차, 위클리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지난 한 주, 국내외 영화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해 보는 '위클리 뉴스' 차례가 왔습니다!
그럼, 지난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
.
국내
<어부바>, 5월 극장 개봉
출처 | 네이버 영화
정준호, 최대철 주연의 <어부바>가 5월에 극장 개봉을 확정했습니다.
가족에 관한 코미디 영화로, 가정의 달인 5월에 맞춰 개봉 시기를 정한 것 같습니다.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며, 유쾌한 웃음을 선사했던 두 배우가 만나 기대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제3회 5.18영화제, 12일부터 시작
출처 | 씨네허브
‘5·18 영화제’는 5·18 민주화운동이 젊은 세대에게는 점점 잊혀져가는 과거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고자 기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3회 ‘5·18 영화제’는 5월12일부터 5월19일까지 온라인 영화제로 개최하며,
‘5.18 영화제’ 개막식과 수상작 시상식은 2021년 5월12일 오후2시, 서울시청 8층다목적홀에서
개최하고 www.cinehubkorea.com, TBS 유튜브로 생중계 된다고 한다.
황동혁 감독, 차기작 언급
출처 | 넷플릭스
새 작품으로 ‘노인 죽이기 클럽(Killing Old People Club·가제)’을 구상하고 있고, ‘오징어게임’보다 더 폭력적인 내용이 될 거라고 밝혔습니다.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황동혁 감독은 이미 25페이지 분량의 글을 써놓은 상태라고 밝혔습니다.
<안녕하세요>, 5월 개봉 확정
출처 | 네이버 영화차봉주 감독의 <안녕하세요>가 5월 개봉 확정과 동시에 티저 포스터를 공개했습니다.
<안녕하세요>는 혼자 남겨진 열아홉 수미와 '죽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수간호사 서진을 만나
세상의 온기를 배우는 휴먼 드라마입니다.
해외
정호연, <가정교사>로 美 스크린 데뷔출처 | 사람엔터테인먼트
지난 6일, 배우 정호연이 릴리 로즈 뎁, 르나트 라인제브와 함께
조 탤봇 감독의 신작 <가정교사>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정호연은 위 배우와 함께 공동 주연을 맡았고, 스페인에서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브리 라슨, 분노의 질주 10 합류
출처 | 빈 디젤 인스타그램
지난 9일,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주연 배우 '빈 디젤'이 자신의 SNS를 통해
브리 라슨이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합류한다는 소식을 직접 전했습니다.
<분노의 질주10>은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할 영화이고, 2023년 4월 개봉 예정이다.
윌 스미스, 10년 동안 아카데미 참석 금지
출처 | AP 뉴시스
시상식에서 폭행을 저지른 배우 윌 스미스가 미국 아카데미 행사에서 10년 동안
참석 금지를 하고, 윌 스미스의 남우주우연상 수상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워너미디어와 디스커버리의 합병
출처 | 워너 브러더스 디스커버리
지난 8일, 워너 미디어와 디스커버리가 워너 브러더스 디스커버리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합병을 마무리했다고 전했습니다. 향후 양사의 주요 스트리밍 서비스인
HBO맥스와 디스커버리 플러스가 통합된 스트리밍 서비스가 출시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
- [JIFF 데일리] 알고 보면 더욱 재미있을 이야기
SYNOPSIS.
2001년 인도의 어느 시골을 배경으로 한 <뒤바뀐 신부들>은 같은 기차에서 길을 잃은 두 어린 신부의 모험을 그린다.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사건들과 예상치 못한 일들을 통해 두 사람은 자신과 여성성, 인생 자체에 대해 엄청난 발견을 한다.
PROGRAM NOTE.
인도의 국민 배우이자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아미르 칸이 제작하여 화제를 모은 <뒤바뀐 신부들>은 2001년, 인도의 시골 어딘가를 배경으로 한 유쾌한 가족 코미디이다. 자야와 풀, 두 여인은 신부가 된 날 밤, 빨간 결혼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남편을 따라 같은 기차에 몸을 싣고 각자의 시댁으로 향한다. 풀의 남편 디팍은 한밤중의 혼잡한 기차에서 실수로 자야를 깨워 자신의 마을로 데려가지만, 집에 도착해서야 실수를 알게 되고, 반대로 자야의 남편은 풀과 기차에서 내리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풀을 기차역에 버려둔 채 사라진다. 이제 두 여인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긴 여정을 떠나야 한다. 좌충우돌 신부를 찾아 나서는 디팍과 덩달아 애가 타는 그의 가족을 오히려 위로하는, 자아실현을 위해 나아가려는 지혜로운 현대 인도 여성의 모습인 자야와, 수줍은 성격이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풀의 성격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전진수)
돌이켜보면 나의 영화제 도장 깨기는 "인도 영화 찾아 삼만리"로 시작되었다. 넷플릭스에 있는 것도 여러 차례 시도해 봤지만 별로인 게 너무 많았다. 춤과 노래가 반복되는 거야 뮤지컬 영화라 생각하면 된다 쳐도, 개연성을 버리면서까지 흥겨우면 그만인 식의 전개 혹은 맥락을 끊고 들어오는 힌두 신 찬양 장면이 너무 재미없었다. 그런 내 눈이 들어온 것이 바로... <세 얼간이> 배우 아미르 칸이다.
그는 우리에게 <세 얼간이>의 주연배우로 가장 잘 알려졌지만, 자기 이름 내건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영화 제작자이기도 하고,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 모든 작업의 공통점은, 맥락 없고 개연성 없는 양산형 엔터테인먼트를 하지 않는다는 것. 아미르 칸 프로뎍션 작품들은 모두 여성 인권이나 아동 보호 등 인도 사회에 묵직하게 드리워진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상업영화들이다. <당갈> 과 <시크릿 슈퍼스타>는 중국을 비롯한 글로벌 흥행도 해냈고, 국내에도 개봉했다.
<뒤바뀐 신부들>은 <당갈>과 <시크릿 슈퍼스타>를 연출한 키란 라오 감독의 신작이며, 여기에도 아미르 칸은 제작자로 참여했다. <당갈>과 <시크릿 슈퍼스타>도 좋아했지만, 이번 작품을 보고는 더욱 만족스러웠다. 전작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편하게 어필하는 영화다. 웃으면서 유쾌하고 편하게 볼 수 있고, 실제로 전주국제영화제 현장 반응도 너무 좋았다. 인도 향신료 '마살라' 맛이 이렇게 김치처럼 입에 착 붙어도 돼요?
참고로 이 작품은 해외 넷플릭스에는 오픈되었는데, 국내 계정으로 접속하면 나오지 않는다. 향후 개봉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넷플릭스에 서서히 오픈될지 모르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 <세 얼간이>의 뒤를 이을 만한 인도 영화로 기억될 만한 작품이므로. 그 날이 어서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은 이 영화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기보다는 감상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써 보기로 한다.
결혼: 연애vs중매 너머 더 다양한 이야기로
인도에서 결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연애결혼(love marriage)와 중매결혼(arranged marriage)이다. 그건 만국 공통 아니냐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중매 혹은 선자리라는 말이 소개팅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가는 우리 나라만 보아도, 타인의 역할은 '소개' 선으로 축소된다. 결혼을 전제하고 만나더라도, 실제 그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게 일반적이다. 그 시간을 아주 빠르게 마치는 커플도 있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사진 한 장 받고 결혼하는 시대는 아니다.
인도에서는 여전히 가능하다. 특히 이 영화의 배경처럼 시골인 경우, 상대를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한 채로 맺어지는 결혼이 가능하다. 비슷비슷한 아웃핏의 붉은색 웨딩 사리를 입고 두꺼운 베일로 얼굴을 가린 신부가 뒤바뀐다는 이 영화의 시놉시스 또한, 이러한 배경 위에서 성립 가능하다.
애초에 인도에서 결혼이란 두 사람의 연애 감정 그 이상의 것들이 많이 작용한다. 이 또한 만국 공통이겠지만 인도는 더더욱 그렇다. 워낙 다이나믹한 국가다 보니, 다양한 언어와 종교와 '가문' 수준으로 세분화된 카스트 등 다수의 역학 관계가 존재한다. 도시에서는 차라리 '돈'을 위시해 심플해진 현대의 '계급'이 작용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러한 조건들 또한 시골에서 더욱 강력하게 기능한다.
참고로 그 심플해진 현대의 기준들 또한 새로운 형태로 세분화되는데, 넷플릭스의 <매치메이킹 인디아: 중매를 부탁해>를 보면 흥미로운 면면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 도시의 부자들은 저런 식으로 중매 결혼을 하는군, 이라는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시리즈는 '밥 친구'로 좋으니 추천한다.
문제 해결: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
많은 인도 영화가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보장된 해피 엔딩"이다. 춤추고 노래하며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문제가 뚝딱 해결되고 또 다 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끝나는 것이 전통적인 발리우드 영화의 인상이다. 발리우드 컬러를 걷어낸 작품들도 국내에 조금씩 더 소개되고 있지만, 그게 꼭 인도 영화의 '발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인도 영화도 다른 모든 산업과 마찬가지로 점점 발전하고 있지만 그 발전이 꼭 국제적 통용의 동의어는 아니라는 뜻이다. '마살라'만의 맛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영화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보장된 해피 엔딩의 맛 안에서, 인도 사회의 이러저러한 면면을 밉지 않게 담는다. 인맥에 좌지우지되지만 그나마도 좀 어설픈 정치인의 모습은, 그 나름대로 또 좀 든든하다. 많은 문제에 뇌물과 주먹을 개입시키는 인도 경찰의 모습 사이사이 또 그 나름대로 훌륭한 역량들이 돋보인다. 정석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는데 어찌저찌 에둘러 가다 보면 뭐가 된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고들 한다. 유능하고 발빠른 행정 처리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대체 왜 공공기관의 정한 프로세스를 안내받지 못하는지, 혹은 안내 받은 대로 다 했는데 왜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인도는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가 게으르고 무능한 나라인 것은 아니다. 그냥 인도에는 인도식 방법이 있는 것이다. 수천 년째 얽히고설킨 이 뿌리를 현대 합리주의가 손쉽게 걷어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냥 거기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그리고 적절히 따박따박 따지며 화낼 타이밍과, 여성이라면 전략적으로 눈물을 뿌릴 타이밍을 파악하여 이 도전에 응전하는 수밖에.)
여성: 우리는 늘 선을 넘지
이 영화가 가진 특별한 장점 중 하나는 아주 다양한 여성들이 나오며, 이 중 어느 한쪽만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집 주소도 남편의 이름도 입밖에 내지 못할 사람으로, 단지 집안일만 하고 아이만 낳는 사람으로 여성을 기르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교육도 받고 일해서 돈도 벌고 아이도 낳고 아무튼 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이다. <시크릿 슈퍼스타>에서 눈물 뚝뚝 흘리는 어린 신부의 입으로 재현되었던 이 메시지는, 영화를 통틀어 등장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선택으로 더 은은하지만 강하게 발산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농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는 2001년 마디아프라데쉬(Madhya Pradesh)의 한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아직 '유기농 농법(organic farming)'이 널리 알려지기 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때부터 이미 화학 살충제를 사용하는 대신 보다 안전하고 환경에 영향을 덜 주는 방법들을 고민하고자 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이 여성이 향하는 데라둔이라는 도시는 반다나 시바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반다나 시바는 국내에도 <오늘부터의 세계> 같은 책이나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시리즈 등을 통해 소개된 바 있는 환경운동가이다. 오래 전 삼림파괴에 맞서 나무를 끌어안고 버티는 '칩코 운동'을 조직하였고, (주로 서구권의) 거대 농업회사들이 종자를 통해 식량주권을 침해하는 상황 속에서 지역의 토종을 잘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그의 주장은 단지 세계화에 맞선 지역 주권의 측면만 바라보지 않는다. 이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궤를 같이 한다. 발전의 비용을 선진국이 개도국에게 전가하는 동시에, 여성에게도 착취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성이 농촌에서 로컬한 종자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 삶을 긍정한다. 이러한 마음은 나브다니야(Navdanya)라는 단체 설립으로 이어졌는데, 영화 속 인물이 훗날 이 단체에서 일하게 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아무튼 에코페미니즘, 지구 민주주의, 다양성 강조 등으로 정리될 수 있는 그의 사상은 지금 같은 시대에 귀를 기울여봄직하다.
그냥 봐도 재미있는 영화지만, 인도의 현실과 접목하여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다. 흥겨운 마살라 맛 너머 인도라는 나라의 변화상도, 그 사회를 담은 영화도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2024. 05. 04. 16:30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상영코드 339)
2024. 05. 05. 2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상영코드 462)
2024. 05. 09. 11:00 CGV전주고사 1관 (상영코드 802)
-
- #이터널스 / Eternals, 2021
-
배우 '마동석'의 별명 "마블리(Mavely)", 뜻은 강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귀여운 이미지로 붙여진 별명이지만 발음은 "마블(MARVEL)"과 비슷한데요.
그런 '연관성(?)'에 곧장 새로운 마블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왔는데, 이에 참여한 배우와 제작진들의 이름들을 듣자니 입을 쉬이 닫히지가 않습니다.
"앤젤리나 졸리"를 시작으로 "리타드 메든 - 쿠마일 난지아니 - 셀마 헤이엑 - 젬마 찬 - 베리 케오칸", 그리고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 - 작품상"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까지 한국 영화 팬들뿐만 아니라 마블 그리고 씨네필들까지 모두가 궁금했을 겁니다.
그렇게 공개된 <이터널스>의 성적은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박스오피스 1위야, 사실상 예정된 결과이기에 궁금한 건 성적이었을 겁니다.
먼저, 국내에서는 21년 들어서면서 주말 박스오피스 1위 영화가 주말 관객수 100만명을 기록하게 된 첫 영화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여기에 상영 2주차로 접어든 현재 관객 수는 200만명을 넘기며 "역시, 마블이다"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미에서의 반응은 이와 다릅니다.
최소 8000만 달러에서 최대 1억 달러로 점쳤던 오프닝 성적은 7000만 달러에 그쳤고, 평가도 전문가 48%로 앞전 "아카데미 감독상 - 작품상"을 수상한 이력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데요.
'과연, 어떤 점들이 문제였는지?' - 영화 <이터널스>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지구가 생기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류가 생기던 그 시점에 생명체들을 먹고 살아가는 "데비안츠"들이 외계로부터 찾아오게 됩니다.
이에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셀레스티얼"은 지구의 인류를 "데비안츠"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터널스"를 보냅니다.
그렇게, 지구를 지키는데 성공한 "이터널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이내 "데비안츠"의 부활과 함께 지구의 멸망이 일주일로 다가옴을 알게 되는데...왜, 반응이 나쁘죠?
1. 신을 다루었다고, 영화가 완벽하지는 않아요.
영화 <이터널스>를 소개하는데 앞서, "마블" 혹은 "슈퍼 히어로"장르의 작품들을 보는데 특정 규칙들이 존재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소한 이름과 함께 관객들에게 소개되는 '해당 캐릭터의 능력부터 어떻게 가졌으며, 또한 왜 영웅으로 변모하고 어떤 적과 마주하는지?'까지의 과정을 온전히 1명의 캐릭터가 풀어가는데도 132분(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분량)이 걸립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이터널스>의 155분은 길어 보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마동석"분을 포함하고도 10명분의 소개를 해야 하기에 짧게 느껴집니다.
물론, 이를 시원시원한 전개로도 바라볼 수 있겠지만 하나의 장점에는 하나의 단점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신이 약골이군
으레, 이런 '멀티캐스팅'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온다는 건 그만큼 캐릭터의 매력을 나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해당 캐릭터들의 출연 당위성을 비롯하여 이끌어가야 하는 이야기의 개연성까지 성립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앤젤리나 졸리"라고 해도 그 분량을 보장받을 수가 없고, 이런 예상은 크게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영화 <이터널스>는 뭔가, 캐릭터의 깊이를 논하기에는 각자 매력들이 뚜렷해 관객들의 선택을 유도합니다.
특히, 캐릭터들마다 취하고 있는 입장의 차이도 있기에 분열하는 조직만큼이나 관객들도 다양한 스탠스를 취하게 됩니다.2. 5개의 입장을 어떻게 풀 건데?
이에 일부 관객들은 이를 두고서, 이번 <이터널스>의 차별화 즉슨 고착화된 마블 영화의 새로운 변화로 볼 것입니다.
하지만 저처럼 "마블 영화"를 많이 봐왔던 관객들에게는 <이터널스>는 여전히 그들의 법칙에 굳혀진 작품입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대립을 취하는 구조는 이미,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한 번 다뤄진 구조입니다.
물론, 찬성과 반대의 <시빌 워>와 다르게 이번 <이터널스>는 각자 2명씩 짝을 이뤄 5명의 입장으로 가짓수를 늘려 관객들에게 폭넓은 선택을 취하게 하나 이는 전개에 있어 중요한 개연성을 빠트리게 만듭니다.메뉴는 많아졌는데, 젓가락이 안가네?
앞서 언급한 <시빌 워>는 "슈퍼 히어로가 조치하는 행동들을 제한하는가?"에 찬반을 다루었고, 이에 조직이 와해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각자 나온 솔로 영화에서 끝마친 소개와 설명도 있겠지만, 이 2개의 입장을 온전히 담아내는 데에도 147분이나 걸렸습니다.
그렇기에 각자 솔로 영화도 없이 2개도 아닌 5개의 입장을 풀어야 하는 <이터널스>로서는 155분은 부족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걱정은 <이터널스>의 캐릭터들, 그리고 보여주는 방식에 엿보입니다.3.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 <이터널스>에는 "플래시백"이 많이 나옵니다.
이를 잘 쓴다면야 큰 문제는 아니지만, 문제는 이게 "플래시백"은 관객들에게 설명하는데 논리보다는 감정을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대에 놓인 캐릭터들의 모습을 통해서, 감정을 먼저 읽게 함으로 몰입하게 만들면서도 이야기를 늘리게 합니다.
물론, 이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10명의 캐릭터들의 입장 차를 소개하기에는 이보다 간결한 방법이 없거든요.
여기에 그들의 소개까지 하려면 선택이 아닌 필수였을 겁니다.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후 "스프라이트"의 선택과 "킨고"의 불참, 그리고 악당으로 등장하는 "대장 데비안츠"의 대립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먼저, 대장 데비안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이들을 직접적인 마찰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극 중 "흡수"라는 설정으로 비밀을 알고 있는 "에이잭"을 통해 "이터널스"와의 대립각을 세우는데, 이는 "악당을 세워야 하지만 설명할 분량은 없으니 이렇게 진행하자"라는 느낌이니 무미건조를 넘어 갖다 세워둔 느낌입니다.
여기에 "스프라이트"의 선택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갑작스레, 제안하니 당황스러울 뿐입니다.4. 마블에게 이런 여유도 없었나?
무엇보다 캐릭터들의 죽음은 이야기의 방향을 좌우하는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태나"와 "길가메시"의 관계에서 추후 "대장 데비안츠"의 대립까지 귀결되는 이야기의 연결 새는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가슴이 따라가는 공감은 이번 <이터널스>를 무리하게 1편으로 축약시킨 부작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분명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마블 영화"로 끝난 건 어른들의 속 사정이 빚어낸 해프닝이 아닌가 싶습니다.
-
- 붉은 거북
붉은 거북
미카엘 두독 두빗 감독 장편 애니메이션. 두빗 감독은 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전에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청소부 톰', '수도승과 물고기', '아버지와 딸', '차의 향기'가 그것인데, 이 작품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두빗 감독의 공통점은 모든 작품에 대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대사'는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사가 필요한 작품이 있고, 대사 없이 인물의 행동과 반응만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과거 무성 영화에서 소리 없이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대사보다는 인물의 행동과 반응이 더 직관적이거나 상징적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사 없는 영화는 상징과 은유가 강하다. 대사로 전달할 수 없는 서사와 감정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압축하고 인물과 자연의 변화를 동기화한다. 단편 '아버지와 딸'은 이 영화 '붉은 거북'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두 작품은 단편과 장편의 길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주제를 담고 있으며, 매우 깊은 상징과 은유를 내재하고 있다.
'아버지와 딸'에서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난다. 그가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은 무수한 신화의 변주다.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노래도 있는데, 이때 요단강은 죽음의 강을 뜻하고, 요단강을 건넌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몹시 안타깝지만,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딸은 너무 어렸고, 자신을 두고 떠난 아버지가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날마다 강가로 나온다.
딸은 자라고, 친구들을 사귀고, 연인을 만나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함께 아버지가 떠난 강가를 찾는다. 더 시간이 흘러 남편도 죽고, 아이들은 모두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고, 딸은 다시 혼자 아버지가 떠난 자리를 찾아온다.
노인이 되어 허리가 굽은 딸은 아버지가 떠난 강이 이제는 물이 말라 모래톱이 드러난 곳을 걸어들어간다. 한참을 걸어간 딸이 발견한 건 아버지가 타고 떠났던 작은 배였다. 딸은 모래에 반쯤 잠긴 작은 배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걸을 때마다 조금씩 젊어지면서 평생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작품에서 보이는대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지만, 작품 전체가 하나의 메타포이며, 신화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어린 딸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 아마도 어머니는 더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 혼자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아버지는 '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은 서양 종교에서 남성으로 현현한다. 또한 많은 경우 '아버지'로 불리며, '아버지'와 '신'은 동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린 딸은 어리석은 인간이다. 아버지 즉 신의 보살핌 없는 인간은 세상에서 늘 힘들고 괴롭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신)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이 아버지(신)를 만날 수 있는 건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요단강을 건널 때, 즉 아버지가 계신 저 강(바다) 너머로 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딸이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멀리 떠난 줄 알았던 아버지(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붉은 거북'의 해석도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 작품은 장편이지만 서사는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서사를 이해하고 풀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상징과 은유의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자는 바다에서 표류하다 작은 무인도에 닿는다. 남자는 곧 '인간' 또는 '인류'다. 바다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신화와 은유의 세계다. 또는 원초의 세계, 원시의 상징이다. 바다에서 무인도에 도착한 남자는,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남자는 '신'의 자식이지만 '신'은 아니며,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남자는 원초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세상에 발을 딛지만, 현실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괴롭다. 남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사방은 망망한 바다만 놓여 있을 뿐이다.
남자는 무인도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를 모아 뗏목을 만든다. 그는 저 무한의 바다를 건너 자신이 처음 있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향'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바다에 뗏목을 띄우고 나아가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뗏목은 부서진다.
다시, 조금 더 큰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는 남자. 두번째도 뗏목이 부서진다. 저절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물밑에서 무언가 의도적으로 뗏목을 부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남자는, 아주 큰 뗏목을 만든다. 크고 튼튼한 뗏목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여기서 '뗏목'은 이동수단이지만, 남자가 그리는 '이상향'으로 가는 사상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 뗏목이 부서지는 건, 남자의 신념, 사상, 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다. 뗏목은 폭풍을 만나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체가 뗏목을 일부러 부수기 때문인 걸 알 수 있는데, 부서진 뗏목 주변에서 만난 동물이 '붉은 거북'이다.
붉은 거북은 무얼까. 남자가 다시 무인도로 돌아와 외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 바다 - 로 나가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뒤로 분노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바다에서 섬으로 올라오는 붉은 거북.
많은 거북 종류는 해변의 모래밭에 알을 낳아 묻는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은 모래를 헤집고 올라와 바다를 향해 기어간다. 이 붉은 거북도 해변에 알을 낳기 위해 올라온 것은 아닐까. 이 현실적 해석은 이어지는 상징과 은유와 섞이면서 환상으로 환유한다.
남자는 해변으로 올라온 붉은 거북을 보고 분노가 폭발한다. 그 붉은 거북이 자기가 만든 뗏목을 부순 바로 '그' 붉은 거북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붉은 거북이 남자의 뗏목을 부순 거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남자는 거북의 머리를 대나무로 내려치고, 거북을 뒤집어 놓는다. 복수한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남자는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한다. 붉은 거북을 살리려 바닷물을 떠 끼얹기도 하지만, 붉은 거북이 회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붉은 거북이 죽었다고 여긴 남자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데, 갈라진 거북의 껍질 안에 젊은 여성이 누워 있었다. 남자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지만, 붉은 머리의 여성은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실제의 존재였다. 남자는 여자를 살리려고 그늘을 만들어주고, 숲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물을 떠와 여자에게 물을 먹여주고 지극하게 보살핀다. 비가 내리는 날, 여자는 긴 잠에서 깨어난다.
여자는 자기를 감싸고 있던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낸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만들고 있던 뗏목을 바다로 떠나 보낸다. 여자는 더 이상 바다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고, 남자는 그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더 이상 바다로 나가,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붉은 거북이자 붉은 머리의 여성은 남자의 또 다른 자아이면서 욕망의 현현이다. 남자(인류)는 진화를 통해 점차 문명을 갖게 되고,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적응해 살고 있는 존재다. 그는 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초의 고향 - 자연 - 으로 돌아가고픈 본능을 지니며 살아간다. 회귀 본능은 사라질 수 없으며 다만 현실의 욕망이 더 클 때, 본능을 누르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자라고, 세 사람의 삶은 변함 없이 평온하고 따뜻하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 아이가 바다에 빠졌지만, 본능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그리고 알 수 없는 문명의 물건이 해변에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는 소년.
아이는 자라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된다. 남자와 여자는 나이 들어가고, 아무 변화가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삶이 파괴되는 재해가 일어난다. 바다에서 해일이 몰려오고, 그들이 살던 숲이 거의 다 파괴되고 세 사람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성장한 아들은 좁고 답답한 섬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멈춰 선 파도에 올라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새로운 문명 사회를 발견한다. 아들은 부모를 설득해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노라고 말하고, 부모는 성장한 아들을 막지 못한다. 아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섬을 떠나고, 섬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는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고, 두 사람은 이제 백발 노인이 된다. 삶은 변함 없지만, 시간(역사)은 남자를 죽음으로 이끈다. 남자가 숨을 거두자 여자는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붉은 거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느리게 몸을 돌려 바다로 나간다.
붉은 거북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바다로 나갔다. 남자(인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또는 붙들린 삶을 살았고, 육체가 소멸하자 욕망은 다시 원초의 바다, 이상향으로 돌아간다.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살아움직이도록 추동하는 힘은 '욕망'이었다.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이면서도 그로 인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에서의 삶이 끝나면, 인간의 욕망도 자연스럽게 원초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불교적이다. 죽은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던 여자가 다시 붉은 거북으로 변해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주제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긴 시간이 조금도 아깝거나 지루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부드러운 선과 파스텔톤의 가라앉은 채색, 간결한 선과 최소한의 움직임, 작은 섬과 망망대해, 바람, 대나무 숲, 모래톱, 일렁이는 파도와 포말, 하늘을 나는 새, 붉게 물드는 노을,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세 사람의 삶은 인류의 초기, 원시적 삶을 살았던 힘들지만 순수했던 시기를 떠올린다.
좁게는 개인의 인생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넓게는 인류, 신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은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지만,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더 근본적인 질문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많은 사람이 보고 함께 이야기 하길 바라는 몇 안 되는 명작이다.
-
- 황혼의 사무라이
황혼의 사무라이
'황혼의 사무라이'는 중의적 제목이다. 주인공 이구치가 하급 사무라이로 창고지기 노릇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해가 떨어지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해서 '황혼'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구치가 살던 19세기 중반은 '사무라이'라는 계급이 사라지기 직전이어서 역사적으로 사무라이의 '황혼'이기도 했으며, 마지막 '사무라이'로 살았던 이구치가 관군의 총탄에 죽음으로써 계급으로의 사무라이는 '황혼'을 맞이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영화는 하급 사무라이 이구치의 막내딸, 다섯 살 이토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이토의 눈으로 본 세상이며, 회고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토는 다섯 살에 등장해 나중에 일흔 살의 노인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메이지 유신'을 중심으로 나이를 살펴보면, 이토는 1860년생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70년을 더 하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1930년대가 된다.
이토의 나이가 중요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역사가 매우 빠르게 군국주의화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인데,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의 수십 개 막부가 사라지고, 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이 강화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종료되는 것과 동시에 조선을 침략하고, 곧바로 식민지를 확대한다. 가장 가까운 나라가 조선이었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런 일본의 침략은 유럽과 미국 강대국의 폭력 앞에 무릎 꿇은 뒤, 선진문물을 수입해 빠르게 개화하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발빠르게 최신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고, 여기에 자신감을 얻어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지방에 남아 있던 막부의 토호세력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식민지에서 얻는 이익을 일정부분 공유하며, 일본 내부의 화합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부활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전의 막부와 관련이 있다. 형식적으로 막부는 사라졌지만, 지방의 토호세력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메이지 천황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막부에서 귀족으로 신분이 바뀌어 중앙 정부 또는 지방 정부에서 권력을 가진 세력이 된다. 이들 지방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천황제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천황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전체주의 체제가 오래 이어져 오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기반이 약한 메이지 천황제에서 과거 막부의 전통, 사무라이의 신성화 등이 군대, 군인을 우상화하고, 군인의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군국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1860년대 초, 우나사카 막부 휘하에서 하급 사무라이로 살아가는 이구치는 막부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시에 성의 곡식창고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다. 그는 매우 가난해서 한달에 50석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데, 그 돈으로는 생활이 궁핍해 퇴근하고 저녁에 새장을 만들어 파는 부업을 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폐병을 앓던 아내가 사망했고,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매우 난감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다. 게다가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고, 어린 두 딸은 이제 열 살, 다섯 살이어서 그가 오로지 돌봐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 살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함께 술집으로 몰려가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지만 이구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집안 일을 하고, 어머니도 돌봐야 하고, 아이들도 보살펴야 한다. 여기에 부업으로 새장을 만들어야 하니 그는 조금도 쉴틈이 없는 것이다.
하루는 영주가 곡식창고 시찰을 나왔는데, 이구치가 직접 보고를 하다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걸 영주에게 들키고 말았다. 다행히 영주는 덕이 있는 사람이라 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영주의 부하인 관료들이 더 난리를 부리고, 이구치의 집안 어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구치의 삼촌이 그날 저녁 집으로 달려와 영주 앞에서 망신 당한 사실에 대해 노발대발 하고, 자기가 점지한 지인의 딸이 있으니 재혼하라고 윽박지른다. 하지만 이구치는 어린 두 딸과 치매를 앓는 노인이 있는 집에 어떤 여자가 올 것이며, 설령 온다해도 고생만 할 뿐이니 자기는 재혼할 의사가 없노라고 말한다.
이구치는 성정이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그는 술도 마시지 않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폭력을 싫어한다. 그는 사무라이 계급이고, 그 자신 어려서 무술을 배워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나, 먼저 칼을 빼는 일은 결코 없다. 더구나 그가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가장 아끼는 보검은 아내의 병구완을 위해 일찌기 팔아버렸다. 그의 꿈은 농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구치는 운명을 잘못 타고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사무라이보다는 농부나 학자가 되는 것이 본성에 어울리게 보이는데, 사무라이에서도 하급에 머무른 것은 그가 욕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봄이 되어 진달래가 피는 따뜻한 날, 이구치는 두 딸과 함께 들판으로 나와 나물을 뜯는다. 그때 개울에 떠내려오는 어린 아이의 시신을 보게 되고, 몇 년 째 계속되고 있는 흉년으로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나마 이구치의 가족은 근근히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구치는 친구 이누마를 만난다. 이누마는 한 달 정도 오사카 막부와 쿄토의 황성을 다녀왔는데, 막부의 움직임과 황성과의 갈등이 심상치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얼마 전, 결혼했던 여동생 토모에가 이혼하고 집에 와 있다고 말한다. 토모에의 전 남편 코다 역시 사무라이였고, 부유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술 마시고 아내를 때리며, 학대해서 오빠 이누마가 막부에게 직접 부탁해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오니 뜻밖에도 토모에가 와 있었다. 이구치는 몹시 반가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토모에 처지를 위로한다. 토모에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길에, 토모에 집앞에 도착했을 때, 집안에서 싸움이 벌어져 소란스러웠다. 토모에의 전 남편 코다가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코다는 토모에보다 그의 오빠 이누마가 더 괘씸하다고 화를 낸다. 그러면서 이누마에게 행패를 부리고 싸우자고 덤벼드는데, 이때 이구치가 나서서 싸움을 말리고, 코다를 힘으로 제압한다. 코다는 화가 나서 이구치에게 정식으로 대결을 신청하고, 두 사람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게 된다.
이누마는 자기 때문에 코다와 싸우게 되었으니, 자기가 나서겠다고 하지만, 이구치는 이누마의 실력으로는 코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으므로 나서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검이 아닌, 목검을 들고 코다와 맞선다. 이 시기에는 이미 사적 폭력이나 개인적 결투는 막부에서 금지하고 있었지만, 사무라이들은 목숨을 걸고 일대 일 승부를 겨루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다.
코다는 이구치가 목검을 들고 서자 자기를 얕잡아 본다며 진검으로 달려든다. 이구치는 가볍게 코다를 제압하고, 이누마와 함께 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사무라이가 칼을 들고 싸우는 장면은 두 번 나온다. 이구치가 코다와 싸울 때, 이때는 목검을 들었지만 사무라이의 검술이 어떤 모습인가를 짐작하는 동작이 나온다. 목검이 아니고 진검이었다면, 코다는 두세합 만에 목숨을 잃게 된다.
또 한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구치와 요고 젠에몬의 결투인데, 전혀 과장하지 않은 사실주의 형식으로 사무라이가 어떻게 싸우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 사무라이의 결투는 일본 사무라이의 환상을 깨뜨리고, 막부 시대의 사무라이가 어떤 존재인가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구치가 집에 돌아오니 토모에가 보낸 편지가 있었고, 이구치는 토모에의 마음을 읽는다. 이후 토모에는 이구치의 두 딸 키야노와 이토의 '엄마'가 되어 생활의 중심이 된다. 어린 키야노에게 살림살이를 알려주고, 함께 놀아주며, 나들이도 하면서 엄마 역할을 해주는데, 이구치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
이누마는 이구치에게 토모에의 재혼을 거론한다. 이누마도 이구치를 좋아하는 친구이고, 토모에는 어려서부터 함께 소꿉놀이를 하던 동생이었으니 서로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는 진정한 벗이었다. 이누마는 부잣집 아들이지만 가난한 이구치를 차별하지 않고 친구로 어울렸고, 나이 든 지금도 변함없이 친구로 지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누마의 인성도 훌륭하고, 토모에는 어려서부터 이구치를 좋아했었다. 다만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그건 이구치도 마찬가지였지만, 집안이 너무 기울어져 토모에가 자기와 결혼하면 불행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이구치는 혼인을 거절한다.
이누마는 한달 전, 에도(교토)에서 영주가 사망하는 바람에 후계자 문제로 내부 권력투쟁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이구치에게 알려준다. 이구치는 최하급 말단 사무라이여서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기와는 직접 문제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관리 사무장인 쿠사카가 이구치를 찾아온다. 두 사람은 우나사카 가문의 고위 관료인 호리 댁으로 찾아가 명령을 하달받는다. 요고 젠에몬이 할복하지 않아 죽이러 간 무사들이 오히려 요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으니 이구치가 가서 요고 젠에몬을 죽이라는 명령이다.
이구치는 애써 변명하며 거절하지만, 호리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며, 말을 듣지 않으면 무사 계급을 박탈하고 번에서 내쫓겠다고 협박한다. 하는 수 없이 승락하고 돌아온 이구치는 죽음을 의식하며 마음을 정리한다.
이구치는 몸종 나오타에게 심부름을 보내, 토모에에게 와달라고 부탁한다. 나오타의 전언을 들은 토모에는 급하게 달려오고, 전투를 앞두고 몸치장을 해야 하는 이구치의 부탁을 듣고 그의 몸단장을 돕는다. 이 과정에서 이구치는 자신이 마음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는다. 토모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어릴 때부터 늘 좋아했고, 결혼하고 싶었으며, 결혼한 이후에도 토모에를 잊지 않고 있었노라고. 지금 결투를 하러 떠나지만, 살아 돌아오면 토모에에게 청혼하겠노라고. 지난번 오빠를 통해 재혼 이야기를 들었지만,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토모에가 자신과 혼인하면 평생 고생만 할텐데, 그건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고백하노라고.
이 장면에서 이구치와 토모에의 모습은 담담하지만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어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난한 이구치와 부잣집 딸 토모에의 신분, 어릴 때부터 서로 좋아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감정들, 체면과 권위로 살아야 하는 사무라이와 사회 제도로 억눌린 여성의 지위와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수많은 제약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믿으며 조용히 살아온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을 읽게 되면서, 시대와 역사를 떠나 인간 본연의 사랑의 실체를 만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토모에는 이미 혼담이 들어왔고, 자기도 그 혼담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불러줘서 고맙다고 담담히 말한다. 이구치는 자기가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것 같아 몹시 당황하면서 마침 도착한 길잡이를 따라 집을 나선다.
요고 젠에몬은 상당한 실력을 지닌 사무라이다. 그를 죽이러 간 다른 사무라이들이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정도였는데, 이구치는 내심 자신 있었지만, 그래도 긴장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요고의 집안으로 들어간다. 마당에는 먼저 들어갔던 사무라이의 주검이 쓰러져 있고, 그 주변으로 파리들이 요란하게 날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요고는 이구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고는 이구치에게 싸우지 않겠노라고, 자기는 도망갈 것이고, 도망가도록 길을 터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요고는 자기가 살아왔던 과거를 이야기한다. 그 역시 사무라이로 쇼군을 모셨으나, 그 쇼군이 다른 쇼군에게 지면서 가산이 몰수당하고, 자기 가족도 쫓겨나 낭인으로 7년을 떠돌다 어렵게 하세가와의 수하로 들어올 수 있었고, 하세가와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를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7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아내와 딸이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고, 이구치 역시 자기 아내가 병으로 죽은 것을 알고 있으니, 하급 사무라이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말한다.
이구치도 아내의 병구완을 위해 명검을 팔고, 싸구려 검을 가지고 다닌다는 말을 한다. 이때 갑자기 요고가 화를 내며, 싸구려 칼로 자기를 베러 왔느냐고 소리친다. 요고의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두 사람은 결투를 하고, 이미 지쳐 있던 요고는 이구치의 칼을 맞고 죽는다. 두 사람이 싸우기 전에 나눈 대화는 하급 사무라이의 처지를 드러내는 의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존재가 이제 시대의 막바지에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투에서 이기고 돌아온 이구치를 맞이하는 건 토모에였다. 토모에는 이미 집안에서 재혼 혼담이 오가고 있고, 상대도 정해졌지만, 집안의 반대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이구치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이구치와 결혼하고 두 딸과 행복하게 살지만, 그 기간은 불과 3년이었다. 이토의 나레이션으로 이어지는 토모에와 이구치의 사연은, 이구치가 관군과의 전투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고, 토모에는 두 딸을 데리고 도쿄로 이주해 그곳에서 두 딸을 훌륭하게 키운다. 토모에가 나이 들어 숨지자, 카야노와 이토는 아버지 이구치와 어머니 토모에를 한 무덤에 모신다.
막부가 해체되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국가체제로 발전한다. 그 와중에 마지막 사무라이였던 이구치와 토모에의 애틋하고 깊은 사랑과 저물어가는 사무라이의 역사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이구치의 삶을 보면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삶과 운명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거대한 담론으로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그 속에는 무수한 개인들의 삶이 담겨 있고, 한 평생이 들어 있고, 개인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다. 역사를 덩어리로만 볼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개개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에 거울이 되는 장면을 만나게 될 것이다.
-
- 현실은 몇배는 더 잔인하다! 반전 또 반전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에취한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allwey01
사용중인 이어폰 : 저지연 무선이어폰 GTW270 hybrid
-
-
- 영화 <밀수> 메인 예고편
동작 그만 - #밀수 메인 예고편입니다?️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 올여름, 시원함을 선물 할 해양범죄활극 '밀수' 7월 26일 극장에서 만나요?
-
- 영화 <더 트래커> 예고편
한계를 넘어선 액션이 시작된다!
이탈리아에서 갱단의 납치로 아내와 딸을 잃은 하칸슨. 10년 후 이탈리아 형사로부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곧장 이탈리아로 떠난다. 하지만 그에게 연락했던 형사는 이미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같은 시기에 그 도시의 형사로 새로 발령받은 안토니오는 이 사건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하칸슨과 함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갱단으로 침투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