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1-12-20 00:21:32
소중한 것이 그 자리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 마음, 피닉스
대체할 수 있는 기만, 대체할 수 없는 마음.
고통으로 이루어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돌아온 넬리는 레네와 함께 고향으로 갑니다.
그러기 위해 검문소를 거치는데 고통으로 침철된 상처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시대의 참혹함을 들여다볼 수 있었죠.
더 고통스러운 것은 얼굴 재건을 위해 성형수술을 해야 하는데, 이전과는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술로도 원상태로 돌릴 수 없었던 겉모습과 마음은 조니의 흔적에서는 찾을 수 있었는지 만류하는 내네의 말에도 조니와 함께합니다.
그와 함께하면서 시작된 기만을 비롯한 연극이 비극의 끝을 향하고 있는 걸까요.
넬리에게 소중하고 특별한 추억이 조니에게는 바래진 추억일 뿐이라는 게 슬퍼졌습니다.
그렇게 당연하게 여겨진 것을 잃어가며 소중한 것을 되찾게 되길 바랄 뿐이었죠.
복수보다 무서운 용서가 마지막을 맴돕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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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하지 않는 오락 바구니
다소, '힘이 떨어졌다'라는 평가들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디즈니"를 먹여살리는 데에 'MCU(마블)만한 것이 없다'라는 것에 이의를 걸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경쟁자 "워너"도 "DC 코믹스"를 통해서 다양한 작품들과 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DCEU(확장 유니버스)"라는 큰 핵심만큼은 빗겨나가고 있다.
본 작품을 보기에 앞서 <블랙 아담>에 올라간 "드웨인 존슨"이라는 이름을 보는 관객들과 회사의 입장은 똑같을 거다. - 부디, 기본만 해달라고!오래전, 마법사들에게 선택된 "아담"은 그 힘으로 백성들을 핍박하는 왕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나라가 위험에 빠지면, 다시 나타나겠다'라는 예언과 함께 사라진 "아담"은 이내 다시 나타나고 막을 수 없는 위기를 바라본 "저스티스 소사이어티"가 그의 앞을 막아서는데...1. 더 락의 영화엔 지루함이 없지!
낯선 제목이지만, <블랙 아담> 역시 "DCEU(확장 유니버스)"라는 단어에서 보듯이이 "슈퍼 히어로"이다.
새로운 인물인 만큼 소개말과 함께 익숙한 레퍼토리를 읊겠지만,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석양의 무법자, 1966>를 보여줘 우리의 예상을 달리한다.
일반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웨스턴 무비"와 다르게, 선과 악이 없는 주인공이 총알을 퍼붓는 "스파게티 웨스턴"처럼 이를 틀어줬다는 건 뭘까?
눈치 빠른 관객들이라면, 이번 <블랙 아담>의 방향성이 뭔지를 알아챘을거다!설정부터 "신"이라서, 흠집도 안 나는 "먼치킨"스러운 모습에다가 팡팡 터지는 액션은 비현실적이라 해도 시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외에도 5천년 전의 사람이다 보니 낯설기만 한 현대 물건들과 "반어법" 등. 여타 영화들에서도 볼법한 장면들을 보여줘 웃음과 함께 익숙하게 다가선다.
이만해도, 오락 영화로서의 본분을 다한다고 하나 작품에서 보여주는 그의 힘은 아무도 건들 수 없으니 시큰둥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등장은 반가울 따름이다!2. 주인공을 받쳐줄 조력자는 어디에?
결론부터 말하면,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는 "블랙 아담"과의 대결에 승패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여주는 가지각색 능력들은 볼거리에 목마른 관객들의 눈을 충족시키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들의 설명이 없다는 거다!
그중 "닥터 페이트"가 그러한데, 극 중. 트라우마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후반부에 모든 감정을 터트리는 캐릭터로 설명이 전혀, 없음에도 "피어스 브로스넌"의 연기력으로 팬들의 인상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그렇기에 뒤 설명이 조금만 받쳐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생긴데,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모든 캐릭터들이 그러하다.
"닥터 페이트"는 이름부터 경쟁사의 인물이 연상되고, 몸이 커지는 "아톰 스매셔"도 "앤트맨"이 연상된다.
여기에 선과 악을 구분 짓는 데에 진심인 "호크맨"부터 "사이클론"은 또래 "아톰 스매셔"와의 커플을 이루니 단면적 이미지에만 그쳐 "트위너"에 위치한 "블랙 아담"의 비중은 줄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3. 이야기까지 바란 건 너무 욕심인가?
근데, 이야기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블랙 아담>을 단순하게 오락 영화로만 만들려는 건 아니라고 본다.
극 중. 배경이 되는 가상의 국가 "칸다크"는 특수한 자원때문에 "인터갱"이라는 군부에 의해 나라가 넘어간다. - 아프리카 어느 국가를 해도 어색하지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블랙 아담"을 하나의 구세주로 보는 "칸다크"의 시민들과 이를 저지하는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모습은 "전 세계의 경찰"이 되려는 어느 국가의 모습을 겹치게 한다.마지막에 다다르면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는 장면까지 스크린 너머 사건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 캐릭터들(aka. 발암캐)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은 관객들의 화를 돋운다.
이런 이유에는 외부의 사실들을 이야기 자체로 녹여내지 못한 점이 큰데, 125분이나 되는 분량에도 소화하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아쉬울 따름이다.· tmi. 1 - 쿠키 영상 1개가 있는데, 그동안 "DC 코믹스"에서 교체설에 확정설 등. 맘 고생했던 캐릭터의 등장이라 마음 졸일 이유 없겠다!
· tmi. 2 - 당초 "R(성인)"로 설정되었으나 4번의 재편집을 거쳐 PG-13, 국내는 12세 이용가가 되었다!
· tmi. 3 - 2009년부터 "드웨인 존슨"은 "블랙 아담"에 대한 캐스팅되었다. (무려, 13년이나 준비했다고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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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내가 쓸모 있나요?
HOLY
Belgium/Netherlands/Luxembourg/France /2023/102min
핀 트로흐 Fien TROCH /월드 시네마
2023년. OTT 시장을 뒤흔든 작품이 있다. 바로 디즈니플러의 <무빙>이다. '무빙앓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무빙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누구나 한번쯤 해본 상상의 능력이 우리의 이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접근성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유명한 명대사가 있다. 바로 초능력자의 삶에서 하루 아침에 평범한 공무원이 된 남편에게 아내가 한 말.
"넌 나의 쓸모야"
영화 <HOLY>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십대소녀의 이야기다. 우리 곁에서 어디서든 볼수 있는 십대 소녀 홀리. 어느날 불길한 마음이 가득하여 학교에 가지 않는데, 이는 그날 하교에서 일어난 큰 화재로부터 그녀를 구해준다. 이러한 예지력이 있지만 학교에서는 마녀라고 취급당하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남자친구와 언니만이 유일한 대화상대이다. 그런 홀리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선생님은 홀리를 자원봉사활동을 할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거기서 홀리는 다른 사람을 만지기만 해도 그들의 아픔을 회복시켜주고, 슬픔을 경감키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제나 배경이나 엑스트라 같은 삶을 살던 홀리. 놀라운 능력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홀리를 찾게 되고 그 혼돈의 시간속에서 홀리는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영화의 서사는 어느덧 찾아온 가을처럼 스며들게 만든다. 이미 <썸원 엘스 해피니스><2005>를 통해 유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감독의 핀 트로흐는 섬세한 십대의 감성과 함께 누군가에게 주어진 능력이 축복이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한 상황을 잘 그려나가고 있다. 특별히 신인 배우를 캐스팅하여 주인공으로 열연한 배우 카탈리나 게라츠의 연기는 현실과 영화의 세계를 혼돈시킬만큼 몰입하게 만든다.
감독은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단어를 던지고 싶었다고 영화전 인터뷰영상에서 언급한다. 누군가를 향한 진심 어린 위로는 상대를 믿고 자신의 몸을 맡겼을 때만 가능한것을 이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커다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타자가 아닌 사물화 시키는 모습은 결국 인격을 말살 시켜버린다는 경고 또한 우리에게 하고 있다.
가을이 오는 이 계절에 <홀리>는 타인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잃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내가 당신에게 필요할까요? 그렇다면 천천히 나의 손을 잡아보시겠어요?"
어쩌면 영화 <홀리> 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쓸모있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답니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 4일부터 10월 13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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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 17>: 돌아온 이야기꾼 봉테일.
지구 밖 낙원은 가능한가.
미키는 지구에서 티모와 영끌한 마카롱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사채업자를 피해 지구를 뜬다. 파일럿 기술로 한자리 꿰차는 티모와 달리 미키는 아무런 기술이 없어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을 신청한다. 이름부터 노골적이다. 익스펜더블, 소모품으로 우주 식민지 개척을 위한 실험체가 된다. 미키는 임상 실험체로서 쓰이고 지워지길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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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프린팅의 반복이다. 극 초반에는 미키의 내레이션 목소리 때문인지 봉준호의 연출 터치 때문인지 미키의 상황이 덜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미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굉장히 비인간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음이 확실하다. 빚쟁이를 피해 고향 지구를 떠났지만 우주에서는 임상 실험체로서 죽고 다시 태어나길 반복 인생이니까.
미키에게 우주는 새로운 공간이지만 이곳에서의 처지는 더 나빠졌지 좋아지진 않았다. 노동의 신성함은 허울 좋은 미끼에 불과하다. 미키에게 남겨진 것은 죽음뿐인 노동이다. 이는 현실과 연관 지어 생각할 포인트가 된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류의 노동을 줄여 준다고 하지만, 인간의 노동보다 더 비싼 비용이 필요한 순간에서 인간의 노동이 줄어들 수 있을까?
오히려 값싼 인건비를 이용해 로봇 대신 위험한 일에 계속 투입시키지 않을까. 외국인 노동자의 사례만 봐도 쉽게 이해 가능하다. 우주 방사선과 바이러스 확인을 위해 소모되는 미키를 보고 있자니, 로봇 유지 보수 비용보다 값싼 노동이 미래에도 끊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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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신성한 것이라는 말에 엿이나 먹으라고. 미키를 보라고, 값싼 노동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투입되는지 당신들은 모르지 않냐는 봉준호 감독의 생각이 살짝 묻어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프린팅되는 미키를 대하는 모습과 멀티플이라는 개념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윤리와 법이 제대로 작동할지 의문이 생긴다.
죽고 나서 프린팅되는 미키 17을 보고, 그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보단 미키가 어떤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존재인지, 그는 죽음을 어떻게 느끼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니까. 대부분은 그의 죽음과 삶을 단순한 하나의 절차와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인식한다.(죽음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 본능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하나의 육체에 하나의 영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멀티플 현상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든다. 만약, 멀티플이 발생하게 되면 그 즉시 죽여서 삭제한다는 단서 조항도 만든다. 미키에게 행해지는 것과 모순적이다. 미키는 반복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재생당한다. 그러면서 동일한 기억이 심어진다. 자연의 섭리를 따지지만 인간을 프린팅 해서 자기들 입맛에 맛게 사용하고 죽이고 다시 살려내는 비인간적인 행위는 서슴지 않고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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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심어지는 것도 생각해 볼 포인트다. 누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부 기억을 삭제한 뒤 심을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다. 기술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미키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다. 코에 걸면 코 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격이다. 내로남불. 이런 상황이면, 법의 사각지대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지구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돌아가지만 제한된 자원과 극한의 환경인 우주에서는 어떤 사회 시스템이 작동할까?라는 의문도 생긴다. 우주형 자본주의가 새롭게 생겨나거나, 제한된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전체주의가 들어설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신기술을 가진 새로운 기득권이 전체주의 독재를 펼치게 된다면 마샬이 집권하는 사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마당에 우주로 공간이 바뀐다 해서 인류가 파라다이스를 건설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인간의 비인간적인 잔혹성이 커질 수 있지 않을까. 미키의 서사와 세계관을 살펴보면 심각하게 생각해 볼만한 내용이 많다. 이런 포인트를 넣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만 함몰되지 않고 극의 재미를 이끌어 가는 봉준호의 터치는 매우 좋았다. 물론, 로버트 패틴슨과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없었다면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장과 사랑
나샤와 미키 18의 등장으로 미키 17은 변화를 맞이한다. 죽음과 프린팅밖에 없는 일상에 사랑과 질투의 감정이 새로 스며든다. 미키 17은 18과 나샤를 두고 경쟁(?)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미키 18은 17보다 더 적극적이고 때론 공격적이다. 미키 18은 미키 17의 다른 자아이자 봉준호 감독 자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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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17은 지구에서부터 니플하임까지 오게 된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엄마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눌렀던 빨간 버튼으로 인생을 망친 벌을 받고 있다고 말이다. 여기에 대고 봉준호 감독이 미키 18을 빌려, “네 잘못이 아냐”라고 말하며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서의 미키 17은 일반의 삶을 살아가는 모두를 의미한다 해도 무방하다.
미키 18은 미키 17과 달리 인생이 꼬여버려 불행한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다. 지구에서 불의의 사고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자동차의 기계 결함이고, 니플하임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스스로의 벌이 아니라 마샬 때문이라고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전작에서, 구조적 문제에 봉착해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그렸었다.
여기서는 문제의 원인을 바로잡고자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인물을 미키 18을 통해 보여준다. 설국열차에서 기차의 벽을 터뜨리는 남궁민수와 비슷하다. 종국에는 미키 17이 자신의 손으로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부숴버리며 당당히 극복하는 모습도 그려낸다. 미키 17에게 미키 18은 미키 스스로의 내적, 외적 성장을 촉진하는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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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복의 과정에는 미키에 대한 나샤의 무조건적인 사랑도 한몫했음을 그려낸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바로, 나샤가 미키 17과 18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장면과 나샤와 카일이 미키 17과 18을 두고 경쟁하는 장면이다. 이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권력이 바뀌는 분기점이 된다. 결말로 향할수록 모계 사회에 대한 그림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짐작 가는 여러 장면이 더 있다. 멀티플 법안을 만드는 위원회에서 지구 측 발언자가 여성인 점. 독재 권력자인 마샬이 아내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나샤의 신분이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활용.
일부에서는 PC 주의를 버리지 못했다는 의견을 비추기도 한다.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구체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과거보다 현재 여성의 사회 진출은 늘었고 그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권력도 커졌다. 숫자는 적지만 여성 지도자를 배출한 국가도 있다. 앞으로도 인종과 성별에 따른 사회의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실이 이러한데 영화의 배경은 우주다. 행성을 개척하려는 인류는 함선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더불어 인간을 프린팅하고 기억을 심는 기술을 보유한 인류다.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극 중에서 인종과 출신 그리고 사회적 구조를 창의적으로 구성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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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의 주인공처럼, 베이비 크리퍼를 안고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나샤를 보면 나샤의 결말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니플하임에서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진 않다. 소설 원작의 작품이고 극중 인물과 사회적 배경에 대한 각색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다. 무작정 PC가 점철된 영화라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상황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다는 자연스러운 전개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키 17은 PC 요소를 적절히 활용한 영화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PC를 적절히 활용한 것과 그저 이용만 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서 구별하기 어렵다. 백설 공주와 인어공주 그리고 마블의 사례를 따져보자. 백설 공주와 인어공주 원작 주인공은 백인이다. 아주 오랜 시간 백인 주인공으로 모두의 뇌리에 박혀있는 점도 무시하기 어렵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굳이 라틴계와 흑인 배우를 섭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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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원작과 팬들에 대한 각색을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했다고 봐야 한다. 조선시대 장군이 백인으로 등장하거나 타 인종으로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봐야 한다. 원작의 특징을 무시하고 PC를 잘못 활용하면 이렇게 된다. 마블에는 대표적으로 아이언하트가 있다. 아이언맨과 아이언하트 사이에는 어떠한 개연성이나 연관성이 없다. 아이언맨은 전형적이지만 완벽한 영웅 서사를 가졌다. 반면, 아이언 하트의 서사는 그 자체로 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 바운더리에 포함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아이언맨 3에 등장했던, 차세대 아이언맨이 되지 않을까 모두의 기대를 받았던 캐릭터는 사라지고 뜬금없이 어린 흑인 배우가 아이언맨인 양 등장해서 PC 비판만 받았다. 차라리 캡틴 아메리카와 팔콘의 서사처럼 흘러갔다면 PC 비판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언 하트의 경우는, 서사를 무시하고 PC 요소를 잘못 활용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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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PC를 활용하는 방법이 구린 것이 문제다. 백설 공주와 인어공주 그리고 마블의 일부 영화는 이 부분에서 처참히 실패했다. PC 요소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를 활용하는 방법의 적절성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정확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결론적으로는, 위의 영화들과 달리 미키 17은 PC 요소를 적절히 활용한 완성도 좋은 상업 영화다. PC를 덕지덕지 묻힌 영화라는 비난과 비판을 받기엔 서사의 완성도가 높고 비난 의견에 대한 근거는 빈약하다.
통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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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서 등장했던 통역기가 여기서도 나왔다. 통역기 사용 전에는 미키와 나샤는 크리퍼가 미키를 살려준 것이라는 합리적 추측으로 결론짓는다. 마샬은 벌레의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다며 식민지 개척을 목표로 크리퍼 몰살을 계획한다. 모두 각자의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해 행동한다. 이 상황에서 통역기가 개발된다. 통역기를 통해 처음으로 크리퍼와 소통을 시도하는 인물이 미키다. 그는 왜 자신을 살려줬는지 크리퍼에게 물어본다. 프린팅 인간이라 맛이 없어서 그러냐고 말한다. 이때, 별것 아닌 크리퍼의 대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럼, 죽여?”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존재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존재기 때문에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위협적인 존재라고 빠른 판단을 하는 것도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는 관객들조차 크리퍼가 위협적인 행동을 하진 않을까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고 이는 극 중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라고 깨닫게 해주는 대사였다. 백인의 미대륙 원주민 침략 역사를 반추하게 한다. 넓게는 인류의 침략 역사도 떠올려진다.
여자어와 남자어가 있듯이 사람과 사람끼리의 오해도 쉬운 세상이다. 오해가 켜켜이 쌓여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던가. 만약, 역사의 여러 부분에서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통역기가 있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지 않았을까. 이는, 나샤가 언급하는 원주민의 역사와도 관련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마샬처럼 원주민을 약탈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변했을까. 무기를 개발하는 것보다 좋은 통역기를 개발하는 게 시급하겠다 싶더라. 이런 게 봉준호식 스토리텔링이구나 감탄했다.
그 외 이야기들미키의 과거 서사가 부족했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자동차 버튼을 눌러서 미키의 가족과 인생이 어떻게 변했고 이후로 이 사건이 미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키가 지구에서 사업도 말아먹고, 자신의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과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크게 필요하진 않겠다 싶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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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서도 기택 가족의 구체적인 서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이 어떤 특징과 사연을 가졌었는지 대사로 짧게 설명하고 만다. 이번 영화에서도 미키17이 내레이션으로 자신의 서사를 간략하지만 충분히 설명한다. 이러한 이유로 미키의 서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미키 17과 18처럼, 생김새는 같지만 각자 이름을 가진 루코와 조코를 통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름이 있고 가족이 있듯이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자신들의 세상만 생각하는지, 역지사지의 태도는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듯, 이들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마지막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배척하지 말라고.
복제인간을 다룬 영화는 많다. 대부분의 경우 주인공과 주인공 복제 인간이 대립하면서 한쪽이 죽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미키 17과 18은 살짝의 갈등이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지배받는 시스템을 향해 그들이 처한 문제의 원인을 돌린다. 전형적인 복제인간 서사를 살짝 틀었다고 생각은 들지만 2009년에 개봉한 영화 <MOON>의 서사와 굉장히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샤와 카일 그리고 티모와 일파까지 추가해 서사를 더 풍성하게 만든 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마크 러팔로의 케네스 마샬은 트럼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특정 정치인을 이야기했다고 말하긴 했다. 그리고 마크 러팔로가 트럼프가 양 팔을 허리 위로 들어 트위스트 비슷하게 두둠칫하는 춤사위를 따라 하는 장면도 나온다. 어느 장면에서는 마샬이 말할 때 실룩이는 입술 모양으로 트럼프를 묘사한 것 같았다.
또한, 트럼프가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질문을 받는 모습과도 유사한 장면이 있다. 더불어 One and Only가 적힌 빨간 모자와 카페 간판만 봐도 트럼프를 묘사했다는 게 명확하다. 트럼프가 총격을 당했었는데, 마샬 얼굴에 총알 스치는 장면이 나온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키 17의 촬영은 2022년 12월에 끝났다고 한다. 트럼프가 등장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대통령직을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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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의 이름 자체가 권위주의적이다. 마샬이라는 영문 성은 군사적 지도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극 후반에는 사실상 군사적 지도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마크 러팔로가 악역 연기에 처음 도전했다는 말이 있던데, 작년에 개봉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에서 악역에 가까운 던컨 웨더번을 연기한 모습도 떠올랐다. 물론, 사악한 정도의 캐릭터는 아니긴 했지만.
일파는 왜 소스에 집착했을까? 아직까지 정확히 모르겠다. 굳이 엮어 보자면. 미키와 같은 노동 계급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손에 흙먼지 하나 묻히지 않고 쏘옥 빨아먹는 권력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였다. 노동자들을 갈아 넣은 그들에겐 의미 있는 어떤 결과물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소스는 다채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근데, 마샬 부부를 제외하면 함선의 사람들은 맛없는 밥만 조금씩 배식 받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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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은 넉넉한 음식들에 소스를 껴얹어 먹고. 이런 비교를 위해 설정한 부분 아닌가 싶기도 하다.(우주에서 향신료나 소스가 얼마나 귀하겠나.) 크리퍼의 꼬리를 자르고 갈아 마시는 행위와 미키 악몽에 등장하는 마샬 복제 장면을 연결 지어보면 복제 인간이 가능한 시기에는 장기 매매 같은 것도 성행하게 되리라는 상징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앞서 미키17 세계관을 먼저 설명해야 했지만 글의 마지막에서야 언급한다. 미키가 간 곳의 행성 이름은 니플하임이다. 이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세계 중 하나의 이름이라고 한다. 얼음과 안개의 세계. 실제 극에서 크레바스가 등장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행성으로 그려진다. 니플하임은 죽음의 신인 헬이 통치하는 세계로 알려져 있다 한다. 죽은 자들이 가는 장소로도 여겨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지구에서 활용될 만큼 활용된 빈 껍데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모시키기 위한 장소라고 볼 수 있어 보인다.
봉테일의 귀환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미키가 화력발전소와 구의역에서 숨진 청년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미키가 우주에 나가서 시설을 정비하는 모습이나 사이클러 불구덩이로 미키의 시체가 던져지는 장면을 보면 봉준호 감독의 말이 쉽게 설득된다. 결과적으로, 미키에게는 죽음의 장소였지만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곳이다. 나샤라는 사랑도 만났잖나. 어둡게 생각하면 한계 없이 침울해질 영화지만, 동시에 아기자기한 희망이 담겨 있는 영화기도 하다.
<기생충>과 비교하면 복부를 푹 찌르는 날카로운 느낌은 줄었지만, 그럼에도 봉준호의 영화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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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불한당>,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
*<불한당>과 <무뢰한>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고품격(?) 막장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두고 누군가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불륜이 선빵이면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농담조로 말하자 상대방은 부부, 아니 인간관계에서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냐고 진지한 답을 내어놓았다. 동감하며 답했다. 맞다. 그런 메세지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믿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 짓인지를. 안 믿고 있다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는 게, 믿었다가 못 믿을 놈이란 걸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데 말이다. 그런 인생의 교훈을 일찍 깨달아서 도움이 되었겠다는 말에 웃으며 답했다. 아뇨, 알면서도 당했다고. 이번은 다르겠지. 이 사람은 다르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결국 결과가 똑같았다고. 알면서 당하면 진짜 바보인데. 안 그런가?
현수 曰 "(어휴) 촌스러워요"
<불한당>은 촌스러운 듯하면서 까리하다.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빨간 스포츠카 같은 영화다. 맛깔나는 대사나 장면도 많다. 다년간의 드라마와 영화 학습으로 쌓인 우리의 기대와 예지력을 조금씩 벗어난다. 처음부터 생선 눈이 무서워서 회를 못 먹는다는 둥, 사람 눈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최후의 만찬처럼 회를 사주고 머리에 총알을 박질 않나, 사람 죽이는 건 안 무서운데 여전히 생선 눈은 무섭다고 깻잎을 덮질 않나. 그러다간 또 푼수 떼기처럼 허세를 부리다가 삼촌에게 얻어맞고 차에 가서 훌쩍거린다. 그 눈물이 어찌나 새롭게 느껴지던지. 덩치가 작은 현수가 덩치 큰 수감자와 뺨 때리기를 하면서 주먹을 쓰는 반칙을 하면서도 당당하고, 재호는 그걸 보며 '혁신적인 또라이'라며 마음에 들어하기도 한다. 그런 현수에게 열광하는 당신도 두말할 것 없이 압도적인 또라이 아니겠어.
숨겨둔 카드를 빨리 보여준다. 아니, 벌써? 살짝 당황스럽지만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재호는 현수가 위장 경찰인 걸 일찌감치 알고 있고, 현수는 심지어 순진무구한 얼굴로 "형, 나 경찰이야"라고 자백을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알아차리게 된다. 무간도 같은 언더커버 전개가 아닐 거라는 것. 실제로 영화는 나쁜 놈인 건 둘째치고 등장인물들이 어지간히 또라이들이다. 이상하게 순정파 같은 또라이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실 재밌어서 도와준 거 같기도 하고
재호와 현수의 영화이다. 좀 더 치자면 재호와 현수, 병갑과 천 팀장이 남는다. 현수의 행동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재호는 잘해야 미끼 혹은 돌다리다. 검거해야 할 타켓 중 일부에 불과했다. 어지간해선 칼을 가지고 재호를 얼마나 다치게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기를 쓰고 그렇게 말리고선 대신 다친다. 재호를 구하지 않았어도, 다치지 않았어도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있진 않았을까. 목숨은 어머니 말씀처럼 박애주의적인 입장에서 구할 수도 있다 쳐도 교도소에서 남은 기간 동안 모든 힘을 다시 찾을 수 있게까지 해준 게 제법 과하게 느껴졌다. 목적을 위해 마음을 얻는 일이 이렇게 정성이 가득한 일이었나 싶었다. 재호에게 든든한 믿음을 얻으려는 전략이었을까, 그 사이에 진심이 있었던 걸까.
게임 끝나버렸는데요
재호가 왜 현수를 아까워하고 아꼈는지는 분명하다. 고아원부터 함께한 병갑과는 다르다. 병갑은 무조건적으로 재호를 좋아하고 무해하다. 하지만 그라고 뒤통수를 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호는 늘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뒤를 돌아보며 살라 하지 않았나. 병갑이 현수를 꼬마 새끼, 짭새 새끼라며 부르며 질투하고, 회장 자리에 앉아보면서 히히덕거리는 순진한 힘에 대한 로망은 빤히 보이니까 괜찮다. 병갑이 정말 재호를 아끼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삼촌이 재호를 죽이려고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놀라지 않았을 때였다. 별스럽지 않게 면회를 와선 뒤늦게 삼촌이 널 죽이려고 했다며 재호의 뒤통수에 대고 말하는 장면. 아, 이래서 병갑이와는 안 되겠구나 했다. 만약 재호가 잘못됐어도 지금처럼 침착할 수 있었을까. 훌쩍거리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현수가 재호의 뒤통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병갑은 늘 한 박자 늦고 어딘가 빈틈이 있다. 재호는 병갑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야속하게도 마음이 수평을 이루는 사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병갑의 마음이 재호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나 상황이냐, 앞통수냐 뒤통수냐
<불한당>은 내게 믿음에 관한 영화다. 그 안에 사랑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무뢰한> 이후에 믿음의 씁쓸한 얼굴이 떠오르는 영화다.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누구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은 역으로 현재 세상의 기본값이 거짓말과 뒤통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뢰한>은 <불한당>과 비교하면 그나마 해피엔딩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재곤과 해경은 살아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믿진 못했다. 재곤은 해경을 속일 힘과 집요함이 있었고 혜경은 속일 수는 있지만 끝까지 모질지 못했다. 그에게 칼을 꽂아도 치명상에 이르지 못한다. 재곤은 혜경을 찾아가 변명도 하고 믿음을 저버린 걸 나름의 방식대로 속죄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해경의 복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에게 칼을 꽂는 것이고, 재곤의 속죄는 그 칼을 그대로 맞고서도 그녀의 새해 복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나 <불한당>은 다르다. 현수와 재호는 둘 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 인정사정없이 칼을 꽂고 목을 조르고, 얼굴을 뭉개고 총을 쏜다. 재호의 배신은 순순히 넘어가기 힘들다. 다른 건 몰라도 부모님은 건드리는 게 아니지 않나. 재호가 현수를 감는 방법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아끼는 현수를 알고도 완전히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려면 어머니의 죽음쯤은 감수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열하는 현수를 보던 재호의 얼떨떨한 표정이 인상 깊다. 마치 "그렇게까지 괴롭고 슬퍼할 일인가" 싶으면서 약간은 잘못했나 싶은 표정.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현수가 심지어 신분을 드러내는, 평생 재호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믿음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비밀과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게, 가족을 그렇게 아낄 수 있다는 게 재호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재호의 마음도, 어깨도 무거워진다. 우리만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그 생각.
이렇게 어려운 건 현수 네가 처음이야
재호는 착실히 판을 짜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서 원하는 것들을 이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왔다 가면서 세워놓은 방법이었다. 이제 현수도 곁에 있고 고병철 회장도 사라졌다. 살기 위한 일이었을 뿐 지겹고 피로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현수에게는 마지막까지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다른 게 분명한데도, 주변의 공기도 날씨도 다른데도 함정에 걸어 들어갔다. 병갑을 직접 명패로 때려죽이면서도 현수가 복수를 하고 있구나, 내 손으로 복수를 하게 하는구나 했을 것이다.
묘하게 밉고 묘하게 미워할 수 없다
재호의 병 주고 약 주고(어머니는 돌아가시게 하곤 장례식 비용과 마무리는 도와주는) 식의 행동을 알게 된 후, 현수는 재호를 이상하게도 많이 배려해 준다. 일찌감치 어머니를 죽인 사실을 얘기해서 자신을 죽일 기회도 주고, 경찰들로부터 피할 수 있게 작전을 모조리 바꿔버린다. 재호 역시 자기 한 몸 지키기 바쁜 와중에도 현수가 곤경에 처하자 다가와서 도와주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재호를 천 팀장이 차로 받아버릴 때는 순간 이 영화의 악역이 천 팀장이었나 싶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 팀장이 제일 못된 사람은 아니지만 제일 야멸찬 사람이긴 하다. 모든 걸 알고도 원하는 걸 위해서만 움직이는 사람. 죄책감 같은 건 스스로 괴롭기만 하고 당하는 놈이 바보라고 하더니 그럼 이제 누가 바보인가. 얼마나 악역인지는 재호의 웃음소리 뒤에 현수가 천 팀장에게 박아 넣은 총알 소리를 세어보자.
현수가 될 수도 있었지
재호와 현수를 보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안타까워진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아니 현수가 원하는 대로 감방으로 입학하지 않고 취직을 했다면, 재호가 오세안 무역 사람이 아니고 현수가 경찰이 아니었다면, 재호가 가족애라는 걸 공감하거나 현수가 좀 더 솔직하지 않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현수가 바라던 대로 취직을 했다면 회를 먹으면서 영화 시작과 동시에 머리에 총알이 박혔을 것이고 오열하면서 홀로 남은 쪽은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알뜰히 챙겨줬다면 어머니를 핑계로 현수를 움직이게 했던 천 팀장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뭔가 달라졌다고 해도 결과가 과연 안타깝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처음에는 현수 입장에서 재호를 원망했다. 하고많은 방법 중에 꼭 어머니를 죽이는 방법이었어야 했을까. 좀 더 솔직할 순 없었을까.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으면 너를 죽였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 번도 누굴 믿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를 믿는다고 말할 때마다 괴로웠다고도. 천 팀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이야기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을 입도 이해는 간다. 경찰인 걸 속이는 것과 어머니를 죽였다는 점을 속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말했다 하더라도 현수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재호가 밝히는 순간 현수는 세상에 홀로 버려지게 된다. 차라리 끝까지 몰랐으면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보고 나선, 현수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과연 현수가 재호의 숨을 끊었을까 싶었다. 총도 맞고 차에도 치어 치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재호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는 끈질기니까 살아남을 순 있겠지만 어차피 이젠 함께할 수가 없다. 현수와 재호는 정말 모든 걸 그만두고 버리고 떠날 용기는 없었다. 재호가 다시 감방에 잡아넣는다고 치면 지난날처럼 감방을 주무르며 지낼 수 있을까. 또 나온다 한들 다시 이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현수는 이 일을 계기로 경찰을 그만둘 수 있을까. 현수는 모든 것을 재호에게로 돌린다. 이 모든 상황도, 사람들도, 시간도. 사람들도 역시 상황을 믿을 테니까. 재호의 손에 쥐여준 그 총을 믿을 테니까.
마지막 장면의 현수의 표정은 춥다. 늦은 후회와 밀려오는 공포와 두려움에 허여멀건 하게 질려있다. 굳이 손으로 재호의 숨통을 막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태까지 잠입을 위해 때리고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재호는 다르다. 의미가 생기고 믿어버리게 됐다. 차라리 그가 알아서 고통받도록 그대로 두었다면 적어도 죽음은 현수의 탓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믿음을 저버린 복수는 현수를 스스로 세상에 홀로 버려진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현수가 재호를 덮었던 손을 늦지 않게 놓아버리고 뒤도 돌아버리지 않고 걸어갔으면 어땠을까. 그 빨간 스포츠카가 비어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들이마시는 재호의 숨은 인셉션의 팽이처럼 마지막 숨인지 계속되는 숨인지 알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영화는 불한당이고, 나쁜 놈들의 세상이다. 현수는 재호를 죽게 함으로써 불한당이 되고, 재호의 마음을 이해한 채로 살아가게 됐다.
여담이지만 <무뢰한>에서 목적을 위해 믿음을 뒤로했던 형사 재곤은 <열혈 사제>에 가서는 신부가 되어 "너에게 말한다. 77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역대급으로 성장한 인내심과 믿음을 보여주었다. <불한당>의 피와 눈물, 배신감과 불안, 슬픔과 두려움에 젖은 경찰 현수는 재호와의 사이에서 용서가 물 건너가 버린 게 마음 아프기도 하다. 인생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용서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내 안에 살아있던 그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사라지게 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부정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것이다. 언제 봤다고 대뜸 자기라고 부를 때였는지, 처진 어깨로 등 뒤에 칼이 있는지도 모르고 감방 복도를 걸어갈 때였는지, 출세하기 한참 전에 낡아빠진 사무실에 데려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인지, 알면서도 자기가 불러들인 죽을 자리로 들어오는 초연함 때문인지, 혹은 언제든 총을 쏠 수 있던 사람이 자신 앞에서는 결국 총을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인지. 다만 현수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손을 떼지 못하는 그 순간에 여실히. 그 마음이 미안함 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어둠 속에서 느낀 모든 것들이 날이 밝아오면서 밀려올 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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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씬 레드 라인 the thin led line - 테렌스 멜릭
씬 레드 라인 the thin led line - 테렌스 멜릭
'천국의 나날들'을 연출하고 무려 20년의 시간이 지나서 맬릭 감독은 새로운 영화 '씬 레드 라인'을 공개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후 서너 번을 더 봤다. 처음 보고 쓴 리뷰는 아래 있으니, 이번에 새로 보면서 느낀 부분을 정리해보자.
영화에서 '물'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물은 곧 '생명'이다. 영화의 시작, 중간 부분의 전투, 영화의 끝에서 물이 등장한다.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바다는 만물의 생명이 탄생하는 근원으로 보인다. 평화로운 남태평양의 섬에 주민들이 살아가고,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물에서 헤엄치며 행복하게 놀고 있다. 이 평화 속에서 군인인 주인공은 주민들이 군인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화로운 바다에서 나와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전투가 벌어지고, 병사들은 물이 부족해 힘들어 한다. 고지를 점령하기 전에도, 고지를 점령하고도 지휘관은 계속 물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물'은 갈증을 해갈하는 물질로써의 '물'이기도 하지만, '물' 그 자체가 생명을 상징한다.
여러 명의 주인공 시점으로 발화하는 나레이션은 그 상황에 맞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들의 독백처럼 들리는 이 나레이션은 영화를 끌어가는 힘이기도 하다. 주인공 각자가 놓여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객관적 상황 - 전과의 전투 - 속에서 이질적이지만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이 영화가 다른 전쟁, 전투영화와 다른 점은, 전투를 '액션'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 전투'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멜릭 감독은 이 영화가 '전쟁 액션, 전투 액션' 영화가 되지 않도록 의도한다. 그렇다고 전투 장면이 적거나 대충 찍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전투 영화보다 뛰어난 장면들이 많고, 생생하며, 실감나는 전투 장면은 관객이 몰입하게 되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전투의 사실성을 드러내면서도 관념화 하지 않으려는 장치를 곳곳에 넣고 있다. 총이나 폭탄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병사들의 비명이 거의 들리지 않고, 하반신이 사라진 군인의 처참한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모습을 희화화하지 않고 있다.
전투에서 이긴 쪽이나 진 쪽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미군이나 일본군이나 군인의 생명은 다르지 않고, 누군가의 총과 폭탄에 죽어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것이 정의인지 묻는다. 이 회의적 태도는 전쟁을 객관으로 바라보려는 것이며, 개인에게 생명은 오로지 단 한 번이라는 것에서, 전쟁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고든 대령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장군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병사들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직업군인이다. 제임스 대위는 중대장으로서 자기 중대의 병사들이 적군의 총탄에 죽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하고, 고든 대령과 대립한다. 이때 군인으로서 논리적인 주장은 고든 대령이 승리한다. 결국 눈앞에 있는 적과 싸워야 하고,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지상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터무니없는 공격 명령에는 따를 수 없다는 것이 제임스 대위의 생각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어떤가를 보여줌으로써, 전쟁 또는 전투를 지휘하는 고위 장교들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들은 승진에 관심을 두고, 병사의 죽음을 외면하며,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 반발하거나 회의하는 지휘관은 제임스 대위처럼 중간에 군복을 벗어야 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위트 일병은 6년 동안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음에도 계급은 일병이다. 그는 여러 번 근무지 이탈을 했고, 징계를 받아 진급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위트 일병의 태도는 관조적이고 집착과 욕망을 버린 초탈한 인물이다. 무엇이 그를 무심한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오랜 전투를 통해 위트는 삶과 죽음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을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자청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돌아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거나, 살아남는 걸 포기했는지 모른다. 그는 가장 위험한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정찰을 나가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사살당한다.
위트 일병의 죽음으로 이 영화가 '영웅'을 만들 의지가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있다. 전쟁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으며, 살아남는 것은 오로지 '운'이 좋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즉, 전쟁, 전투에서 총알이나 폭탄은 우연한 작용이며, 그것은 개인의 의지, 희망, 계획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의미 없는가를 말한다. 인간의 주관적 의지는 마치 바다의 물방울처럼 거대한 파도의 한 부분일 뿐이어서, 외부의 조건 즉, 시대와 역사, 시간과 공간의 어느 순간에 놓여 있는 인간은 그 한계를 절대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제목이 늘 궁금했다. '씬 레드 라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무슨 뜻일까. 얇고 붉은 선이라니.
'나무위키'에서 설명한 것을 보니, '크림 전쟁' 때 영국군의 붉은 군복을 빗댄 별명이라고 한다.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두줄로 가늘고 길게 늘어서 승리를 했고, 이 전투를 본 종군기자가 "A thin red streak tipped with a line of steel"이라고 쓴 데서 이 단어가 나왔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제목의 의미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일 수도 있고, '이성과 광기의 경계선'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테렌스 멜릭 감독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매우 잘 만든 전쟁영화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전쟁을 통한 인간의 광기와 성찰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원작이 있는 책을 바탕으로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과 주인공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을 느리지만 깊이 있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어떤 전쟁영화와 비교해도 결이 다르다.
주인공과 그의 전우들, 중대장 스타로스 대위, 연대장 고든 대령으로 대표되는 인물은 이 전쟁을 바라보는 중요한 시각을 반영한다. 실제 전쟁의 상황으로만 봐도 미군이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지 않고, 지속적인 함포사격과 비행기 폭격만으로도 얼마든지 일본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에게 선제 공격을 했지만, 그것이 미국을 이기겠다는 전술이 아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지기위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유럽연합군에 의해 패퇴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쏘련과 독일의 전쟁으로 이미 승패는 어느 정도 결정된 상황이었다.
독일과 일본은 추축국이었지만 그들끼리 연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리적으로 연합이 불가능했고, 미국이 초기에는 전쟁 군수물자를 엄청나게 유럽으로 보내면서, 초기에 독일에게 밀리던 유럽의 연합국은 군수품의 압도적인 우위로 인해 독일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좀 의아하겠지만, 미국은 쏘련에도 군수물자를 퍼부어 주었다. 미군이 비행기로 떨어뜨린 많은 군수물자가 독일군 진영으로 떨어지는 웃지 못할 일도 많이 발생했지만, 어떻든 쏘련군은 미국이 보내 준 다양한 군수품으로 인해 전투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병력 손실도 상당부분 막을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가운데 사상 최대의 피해를 입는다. 이 영화에서도 미군의 피해가 막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휘관의 무능과 탐욕이었다는 것을 감독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는 고든 대령이 자신의 진급을 위해 끊임없이 중대장을 몰아부치지만, 사실 지휘부는 고든 대령 위에 있는 똥별들이다.
그들에게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애국심을 내세우지만, 정작 자신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지도 위에 빨간선을 그리는 것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전쟁터는 참혹한 장면들 뿐이고, 똥별과 똑같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지만, 전쟁의 논리는 지배자의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 위트 일병은 전쟁터에 나온 군인이지만 그는 종종 무단으로 병영을 뛰쳐나와 혼자 돌아다니거나 원주민들과 어울린다. 보통의 경우 이런 병사는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영창에 가게 되지만, 그를 이해하는 웰쉬 상사 덕분에 큰 문제 없이 군대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진급을 못하는 것이 유일한 벌이다.
하지만 위트가 바라보는 전쟁터는 총탄과 대포가 날아다니고 군인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거나 터져나가는 참혹한 현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과 싱그러운 바람과 구름과 따가운 햇살과 아름다운 원주민들과 고요한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전쟁터의 가운데에서 오히려 평화와 고요를 느끼며 시간을 보낸다. 역설적이다.
전쟁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전투장면이 있는데, 처음 이 장면을 볼 때, 내 심장 박동이 쿵쿵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실제 전투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테렌스 멜릭 감독의 연출은 탁월하다. 이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전쟁영화의 걸작으로 남을 수 있을 테지만, 이 영화를 빛내는 장면들은 전투 장면보다는 전투와 전투 사이에 보여주는 위트 일병의 일탈과 풍경들이다.
역시 전쟁영화 가운데 명장면의 하나인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마지막 장면이 평화로운 새소리와 함께 소리 없이 날아 온 총탄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여주는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풍경은 전투를 겪는 군인이 가장 원하는 평화로운 풍경이며, 그것은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비현실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위트 일병의 환상일 수 있다.
과달카날 전투는 많은 미군이 사망한 격렬한 전투였고, 이 섬을 탈환하면서 남태평양에서 일본까지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미군이 장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영화에서는 미군의 희생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적군인 일본군의 참혹한 상태도 보여주고 있다. 적군이니까 당연히 죽여도 좋다는 심리적 동조를 테렌스 멜릭 감독은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일본군의 악명은 당대에도 이미 유명했지만, 그들 역시 전쟁의 피해자이자 소모품으로 전락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참혹한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은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기 전에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또한 참호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본군의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것은 일본군 개개인을 세뇌하고 강제한 일본 군국주의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이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예상보다 훨씬 강렬하게 저항하는 것은, 미군들이 포로가 된 일본군의 피부를 산 채로 벗긴다는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군인 개개인의 전쟁범죄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강제였든, 세뇌였든, 빗나간 애국심이었든 자유로운 개인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한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일본 군인들은 잘못된 애국심으로 군국주의를 받아들였고, 군국주의의 체제를 내면화했다. 그것은 히틀러를 선택한 독일 국민의 정서와 결코 다르지 않으며, 국가의 범죄에 동조하고,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에서 단죄를 면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군국주의, 집단체제에 맞서는 개인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군과 일본의 군대 조직은 개인의 의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위트 일병의 일탈은 이런 집단에 맞서는 개인의 항의이며, 폭력을 만들어 내는 집단(그것이 미군이든 일본이든 상관 없다)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위트 일병이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로운 사람들은 그가 바라던 세상의 모습이었지만, 그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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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체이탈자 / Spiritwalker, 2020
이제는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손이 가는 국내 영화들이 없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시간이 없는 것도 있지만 <기적>과 <보이스> 이후 극장에 개봉하는 규모 있는 한국 영화들의 휴전도 적진 않았습니다.
아무튼, 전주 <장르만 로맨스>가 <이터널스>를 꺾고서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으나 그 격차는 1만 3000여명에 불과할 만큼 압도하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체이탈자>는 누적 관객수 165,050명(11.26 기준)으로 현재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영화 <유체이탈자>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교통사고 현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모른 채 응급실에 실려옵니다.
그렇게, 기억 상실증으로 여겨질쯤 갑자기 주변의 환경들이 일그러지고 낯선 장소에 떨어집니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는 12시간마다 얼굴과 이름이 바뀌는 것을 알게 되고, 만나는 사람들이 "강이안"에 묶어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그는 궁금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강이안"을 찾아야만 하는데...제목은 뭐가 빠졌다는데?
1. 다들 신선하다는데, 나는 익숙하다?
먼저, 영화 <유체이탈자>를 보고 온 이웃분들과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해당 작품은 신선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는 '12시간마다 달라지는 인물'의 설정 때문인데요.
그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로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신선한 설정 때문이라 생각하겠지만, <유체이탈자>는 상당히 클래식한 영화입니다.
'클리셰'적인 소재를 신선하게 포장해 풀어낸 요망한 작품입니다.넋 나가듯이 보았다.
영화 <유체이탈자>의 가장 중요한 소재 '12시간마다 달라지는 인물'은 결국, 나만 모른다는 것입니다.
근데, 몸은 저절로 반응하니 관객들과 주인공은 '이게 무슨 일인가?'싶다가도 자그마한 단서들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되묻게 합니다.
이미, <제이슨 본> 혹은 숱한 작품들에서 다루어낸 '기억을 잃은 특수 요원'으로 앞서 말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숨겨진 로망을 들춰내는데요.
이런 클래식한 감정을 '12시간마다 달라지는 인물'라는 설정으로 풀어낸 것까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2. 연기력이 받쳐줘야하는 소재
영화 <23 아이덴티티>는 제목대로 23개의 인격체를 지닌 "케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유체이탈자>와 다르지만, 인격체를 교체하는 연출을 살펴보면 <23 아이덴티티>는 문을 열고 닫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관객들에게 들려줘 달라지는 타이밍을 보여주는데, 이외에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과 입 등의 신체 부위들을 깨진 거울 조각마다 가득히 채워 넣어 ' 23개의 인격체'들을 멋지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체이탈자>는 달라지는 캐릭터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을까요?연기력을 보여줘!
해당 작품에서는 "윤계상"분 혼자서, 이를 도맡아 다른 캐릭터들의 시점에서 달라지는 캐릭터들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렇기에 이야기 중간마다 달라지는 그의 모습은 지켜보는 캐릭터들과 관객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일체화시키는데요.
이 때문에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어려움도 겪겠지만, 이는 앞서 언급한 로망을 비롯하여 맞춰나가야 하는 이야기를 맞춰나갈 적극성을 키웁니다.
공통점이 없을 것만 같은 캐릭터들이 겹쳐지는 '미필적 고의'와 같은 접점은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기도 하고요.3. 더 고생했는데, 티가 안나네
앞서 <23 아이덴티티>에 비해서, <유체이탈자>가 보여준 "캐릭터의 교체"는 더 여려운 방식을 택했습니다.
무엇보다 <23 아이덴티티>의 경우. 온전히 "제임스 맥어보이"만의 영역이었다면, <유체이탈자>는 "윤계상"분과 여러 배우들이 같이 했는데요.
같이 했기에 좀 더 시너지를 기대했지만, 이를 연기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매번 달라지는 캐릭터, 그리고 합을 맞춰야 하는 상대역까지 이 모든 상황들을 통제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기에 구심점을 잡아줘야 하는 "윤계상"분의 연기가 중요했는데, 이 점에서 잘했다고 생각하나 문제는 이 점에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군데군데 아쉬움이 새어 나온다.
<23 아이덴티티>는 달라지는 인격의 차이를 "여자" 혹은 "아이"같은 특징이 잡히는 캐릭터들로 관객들에게 "저 배우 연기 잘한다"를 말하지 않아도 알게 만들었다면, 이번 <유체이탈자>는 이런 특징들이 잡히지 않을 만큼 밋밋했습니다.
그나마, "박실장"을 맡은 "박용우"분이 가장 뚜렷했는데 극 중 기억을 잃은 상황이라 이를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합니다.
어려운 방법을 택했지만, 결과는 쉬운 것보다 나오지 못한 것이죠.
여기에 이야기마저도 아쉽게 매듭을 짓고 말이죠.4. 경기의 성패는 마지막에 결정된다.
앞서 말했듯이 매번 달라지는 캐릭터들로 맞춰지는 단서들은 "수사"를 방불케 만듭니다.
그로 관객들은 스스로 <유체이탈자>의 조각을 맞춰나가 스스로 흥미를 붙여나갑니다.
물론, 그게 감독이 준비한 정답이 아닐지라도 재미를 붙이는 것은 틀리지 않을 텐데 문제는 좌르륵 펼쳐지는 "플래시백"입니다.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과거는 의도와 다르게, 딴 길로 샐지 모르는 친절일 수도 있겠지만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그래도, 액션만이 위로해 준다.
이렇게 아쉬움이 생기는 이야기를 뒤로한 채 보여주는 액션의 모습은 나쁘지 않습니다.
보여주는 구성이 이제는 기성품이 되어버린 <존 윅>의 "건푸"로 새로움은 없지만,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예 새로울 것이 아니라면, 익숙함을 날카롭게 벼려내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유체이탈자>의 액션은 요즘 트렌드에 맞게 잘 나왔다고 봅니다.
딱히, 월등한 작품까지는 아니더라도 "킬링타임"을 하는 데는 부족함은 없는 작품인데 이렇게 평가절하를 하는 데는 앞서 보여준 '신선한(?)'설정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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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질주 1~8 시리즈 결말포함 요약 정리 영상(*액션위주)
*외전 "홉스앤쇼"(2019) 제외- "분노의질주9" 정보
감독: 저스틴 린
제작: 저스틴 린, 빈 디젤, 닐 H. 모리츠,제프 커센바움, 조 로스, 클레이튼 타운센드, 사만다 빈센트
각본: 저스틴 린, 다니엘 케이시
원안: 저스틴 린, 다니엘 케이시, 알프레도 보텔로
장르: 액션
출연: 빈 디젤, 미셸 로드리게즈, 조다나 브루스터, 존 시나 등
음악: 브라이언 타일러
제작사: 원 레이스 필름스, 오리지널 필름, 로스/커센바움 필름스
배급사: 미국 유니버설 픽처스, 대한민국 UPI 코리아
개봉일:미국 2021년 6월 25일, 대한민국 2021년 5월 19일
상영 시간: 1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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