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2-01-29 22:53:26
<오징어 게임>만큼 노골적으로, <지옥>처럼 추접하게
<지금 우리 학교는>, 스포일러 없이 추천합니다!
윤여정 배우가 작년인가 청룡영화상에 나와서 한 말이 있다. "몇 주 전 가디언지와 인터뷰를 했는데 '왜 한국의 콘텐츠들이 국제적으로 인기 있는지 아느냐'라고 물었다. 우리는 항상 좋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있었다. 세계가 단지 지금 우리에게 주목할 뿐이다."라고 모두발언에서 말했다. 굉장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오징어 게임>이 굳이 잘 나가지 않아도 나는 한국에서 좋은 콘텐츠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벌새>나 <꿈의 제인> 같은 영화들, 되게 한국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벌새>는 작품 자체만 보면 한국인이기 때문에 경험했던 기억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봐도 충분히 짠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영화인 셈이다.
이렇게 <벌새>와 같이 우리는 충분히 좋은 영화와 드라마를 찍어내고 있다. 작년 국내 여론으로는 <오징어 게임>만큼이나 인기가 많았던 <DP>가 있고, 김다미-최우식 배우의 좋은 케미를 볼 수 있는 <그 해 우리는>도 있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나의 아저씨>나 <비밀의 숲>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으니 한국의 시청자들은 사실 눈이 높은 게 맞다. 이렇게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해 OTT가 발달하고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이 세태에 K-아포칼립스 드라마물이 하나 등장했다. <부산행>의 좀비, <오징어 게임>의 시스템에 대한 은유, <지옥>의 디스토피아 묘사까지 한국형 스릴러물의 좋은 본보기가 나온 셈이다. 5일 걸쳐있는 설 연휴기간, 넷플릭스로 달려가 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드라마인가요?
1화 도입부에 한 학생이 학교폭력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울며불며 사정하지만 가해자들에게 그딴 건 없다. 몇 번 몸싸움을 벌이다 피해자 학생이 옥상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한 3층 정도 되는 높이에 부딪힐 때 간판에 맞고 떨어졌기 때문에 최소 중상이다. 피해 학생은 병원으로 실려간다. 아버지와 대면한 피해자. 아버지는 피해 학생에게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위로하지만 아들은 상처가 깊은 듯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상처에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한다. 마치 과학자가 테스트용 실험쥐를 가진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극이 시작된다.
드라마는 빠르게 한국사회를 훑는다. 학교폭력. 유튜브에 의해 뽑히는 자극적인 썸네일. 왕따. 미투 운동. 전염병이 창궐하고 나서의 한국사회. 현재 한국의 징병제도.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 많은 순간을 지나쳐왔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부조리까지. 뭐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대한민국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기존의 한국 드라마들이 세태를 공격했던 부분까지 포함되어 있다. <오징어 게임>에서 시스템에 대한 비유를 극으로 제시한 부분이나 쉽게 타인을 혐오하는 <지옥>에서의 새 진리교의 모습 역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좀비라는 장르적인 소재도 위화감 없이 잘 녹아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어떤 드라마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1화의 첫 줄에서 썼듯 학교폭력이라는 소재가 영화의 중심축을 이끈다. 이 좀비 바이러스를 만든 사람이 학교폭력 피해자의 아버지였다는 점이 어떤 연출 의도를 담았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 또 극을 보다 보면 왕따 피해자-가해자-그 외의 학생들이 물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극을 보다 보면 감독이 필연적으로 약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대해 어떤 조소를 건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차가운 냉소를 보면 이들에게 우리가 너무나도 무관심했다는 것 역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코로나19가 창궐한 세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헬스장을 갈 때 시간제한이라는 게 생겼다. 원래 나는 모든 일과를 끝마치고 외로운 몸을 침대에 누워 1시간은 쉬었다가 운동하러 간다. 그런데, 9시까지 가는 통금 제한이 생겨 행동에 강제가 생겼다. 그러면 어떤 모습을 볼 수 있느냐. 헬스장에 사람이 많이 보인다. 10시~11시에 갈 때보다 작은 시간에 회원들이 집중적으로 모이는 것이다. 이것도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쉬운 조건 아닌가? 어떤 정파에 휩쓸려서 생각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모두 안다고 여길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단 매일 운동하러 가는 일개 사회복무요원인 나도 '왜 내가 적어도 8시까진 운동하러 가야 하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는 못한다. 이건 어떤 정당이 대선에서 이기든 크게 차이가 없었다. 그냥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정보를 통제하며 부조리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뭘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거라는 도구도 단순히 몇몇 정치인을 끌어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들이 우리를 이용해서 나쁜 짓을 벌이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나 싶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이 모습을 '재난에 극복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극화해서 제시한다. 이게 코로나19 확산 이후에 여러 방역수칙과 전염병 대응방안이 유사하게 떨어지며 극의 몰입을 더한다.
3. 이 드라마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일단 첫 번째, 조연진의 연기 퍼포먼스가 어마 무시하다. 특히 이유미 배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유미 배우는 현재 1994년 7월생이라고 한다. 13학번이니까 지금 29살이다. 근데 이 사람이 10대 배역을 맡았다. 솔직히 이거 티 좀 난다. 살짝 비주얼 상으로는 안 어울리는 느낌이 있다. 혼자만 선생님 포스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이게 상쇄된다. 극의 초중반부는 이유미 배우의 카리스마로 이끌어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또 다음은 윤귀남 역을 맡은 유인수 배우다. 이 역은 연기 조건이 다른 역들에 비해 많다. 좀비가 튀어나와야 하고. 액션도 해야 하고. 일진 역할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전제조건을 살기 어린 액션으로 소화한다. 또, 이 인물을 관통하는 내적인 콤플렉스가 있는데 이를 소화하는 데 있어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또 박미진-장하리 두 역을 맡은 배우들도 퍼포먼스가 좋았다. 특히 장하리 역을 맡은 배우는 내면의 고독함과 똑 부러져야만 하는 현실을 감내하는 그 기분과 감정이 잘 느껴졌다.
다음은 액션과 촬영이다. 사실 윤찬영 배우가 대사 하는 데 있어 좀 잔잔한 감이 있다. 굳이 고등학생이 아니더라도 감정적으로 고양될 수밖에 없는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너무 점잖다. 근데 액션 연기는 진짜 미쳤다. 중반부 액션신 롱테이크는 드라마를 보시는 분들이 기대해도 좋다. 깔끔하게 잘 뽑혔다. 또 이수혁 역을 맡은 배우의 맨몸액션도 잘 뽑혔다. 피지컬이 되게 좋은 것으로 보이는데 팔다리가 길쭉해서 보는 맛이 있었다. 이 액션 하나만으로도 극의 퀄리티가 업그레이드됐다고 생각한다.
4. 난이도가 있는 드라마인가요?
일단 12부작이다. 도합 709분이 걸린다. 좀 길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좀비가 나오기 때문에 잔인한 편이다. 이 외에는 극을 보는데 크게 어렵다고 느낄 부분은 없을 듯하다.
5.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사실 주연진 이유미/윤귀남 배우를 제외하면 학생들의 연기가 어색하다. 특히 윤찬영-박지후 두 배우는 뭔가 감정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느낀 부분인 것 같다. 둘이 처하고 있는 상황에 비해 너무 나긋나긋한 느낌? 근데 크게 막 보기 힘들 정도는 아니다. 박지후 배우 좋아하는데 욕 안 먹었으면 좋겠다.
6.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일단 이 드라마에 질병관리청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감독이 현 한국사회에 대해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어떤 인물이 소외되었는가? 와 그 소외된 인물이 어떤 선택지를 고르며 어느 위치에 있는가? 도 중요하다. 또 학교 구성원 중 누가 제일 먼저 좀비가 되었는지도 확인한다면 극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7.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당연히 설 연휴 코시국에 나가기엔 심심한 분들이 아닐까? 킬링타임 용으로 딱 좋다!
난 이거 국제적으로 꽤 히트칠 것 같다! <오징어 게임>만큼이나 잘 만들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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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스웨덴] '경계'에 의문을 던지다
*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못생긴 게 재수없게 말 섞지 말아야지 "
출입국 세관 직원 티나는 남들과 유난히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티나의 외모를 못생겼다거나, 이질적이라고 느끼며 신기하게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그런 티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바로 수치심, 죄책감, 분노와 같은 인간의 감정을 냄새로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 덕분에 티나는 아동 포르노범을 검거하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과 닮은 외모를 지녔고 정체불명의 냄새를 풍기는 인물 ‘보레’가 나타난다. 티나는 그의 냄새를 계속 맡아보지만, 쉽사리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얼마 뒤, 출입국 수속장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 두 사람.
티나는 직감적으로 보레에게 뭔가 있다고 느껴 동료에게 몸수색을 부탁하고, 그 과정에서 동료는 보레가 과학적으로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다며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외적인 부분에서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고, 점점 가까워진다. 자연스레 보레는 티나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 남들과 다르다며, 기형이라며 "
티나는 오랫동안 자신을 염색체에 결함이 있는 ‘못난 인간’이라 여겨왔다.
어릴 적부터 외모로 인해 차별받고 살아온 티나는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보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티나는 점점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이들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여성의 외형을 가진 티나는 남성의 성기와 비슷한 것을, 남성의 외형을 가진 보레는 여성의 성기와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 난 누굴까요?
티나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쭉 의문을 품고 살아왔던 듯하다.
이에 보레는 티나에게 자신들의 정체가 인간이 아닌 '트롤'이라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찾고선 티나는 보레와 함께 숲 속을 알몸으로 달리며 소리를 지른다. 단순한 해방감이 아닌, 수십 년간 품어왔던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난 티나의 기쁨의 포효처럼 느껴졌다.
한편, 보레에게는 어릴 적 부모님이 인간에게 의학 실험과 고문을 당한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그 끔찍한 기억은 그에게 인간에 대한 지독한 증오와 적대감을 가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보레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기생충처럼 지구의 모든 걸 써먹어요. 자기만 즐거우면 그만이죠.", "인류 전체가 병폐에요."
하지만 티나는 이를 부정한다. "모든 인간이 악마는 아니에요."
이후, 티나는 보레가 냉장고 안에 숨겨둔 히시트(신생아와 비슷한 생김새의 월경과 비슷한 원리의 것)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여러 정황을 통해 보레가 전에 검거했던 아동 포르노 범인과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레는 인간 아이들을 훔쳐 팔아넘기며, 자신만큼 인간들도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복수심에 가득 찬 논리를 펼친다. 티나는 그의 행동을 역겨운 짓으로 여기지만, 보레는 스스로 해치게 돕는 것이라며 합리화한다.
티나는 보레를 마음이 병든 이로 바라본다. 티나와 보레 모두 인간에게 고통받은 과거를 가졌지만, 그 상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극명하게 다름을 보여준다.
이후, 보레는 여객선에서 만나자는 내용의 편지를 남겨두고 티나의 집을 떠난다. 보레는 다시 만난 자리에서 티나에게 종족을 이어나가기 위해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티나는 거절하며 답한다.
" 악마가 되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
그러자 보레는 티나에게 묻는다.
" 인간이 되려고 하는 거에요? "
티나는 대답한다.
" 누구도 해치기 싫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인가요? "
잠시 후, 경찰들이 등장하지만 보레는 바다로 뛰어들며 사라진다.
티나는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상자 안에는 울고 있는 아기가 있었고, 트롤임을 알려주는 꼬리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함께 들어 있던 카드에는 '핀란드에 잘 오셧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보레는 트롤 무리들과 합류한 뒤, 아이를 낳아 티나에게 보낸 듯하다.
과연 앞으로 티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이 트롤아이와 함께 인간들과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 카드에 적힌 대로 핀란드의 트롤 무리에 합류하게 될 것인지
영화는 의문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단지 남들과 다른 생김새로 인해, 어릴 적부터 수없이 괴로워했을 티나.
그녀가 끊임없이 보여주는 자기비하적인 태도는 그간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아왔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인간에게 받은 상처가 큰 만큼, 티나 역시 보레처럼 동족들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녀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보레에게 분명한 선을 그으며, 끝까지 인간성을 지키고자 한다.
특이한 외모에 인간이 아닌 티나는 경계 밖에 있으면서도 인간다움을 지키는 존재이고, 멀끔한 외모에 인간인 아동 포르노범은 경계 안에 있으면서도 인간다움에서 가장 멀어진 존재이다. 극 중 인물에서 드러나는 극명한 대비는 과연 ‘경계’란 것이 정말 의미 있는가를 되묻게 한다.
<경계선>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 다양한 ‘경계선’를 허물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편견을 되짚어보게 한다.
영화 초반, 티나의 외모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은 사회가 ‘외모’를 기준으로 경계선을 긋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경계에서 밀려난 티나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세상과 경계선을 긋고 살아간다.
그 후 영화는 트롤이라는 존재를 통해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티나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게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잠시 영화 바깥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인종’이라는 또 다른 경계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감독인 알리 압바시는 이란 출신으로, 현재까지 오랜 시간 북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아랍계로서 유럽 사회에서 겪었을 수많은 인종 차별과 문화적 경계선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감독의 배경은 영화의 핵심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으며, 알리 압바시 감독이 본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외모, 성, 인종, 장애 등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경계선’으로는 더 이상 누군가를 규정할 수 없다.
<경계선>은 단지 기괴한 트롤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삶 속 수많은 경계선의 허상을 드러내며, 그 경계가 만들어낸 차별과 편견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할 때, 조금이나마 그 경계선을 허물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이미지 : 네이버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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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만 읽던 세종이 백성을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보기 직전까지도 이 이야기가 충녕, 세종대왕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주지훈이 나오고 노비와 왕이 바뀌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가 세종이 등장해서 당황한 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 이 소재를 보고 세종에 대한 역사왜곡이라는 우려가 상당했었는데 세종이 민본에 대해 깨달은 또다른 계기를 상상력으로 풀어낸 것 같아서 재밌게 본 작품이었다.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 시놉시스
왕세자 자리가 마냥 부담스러운 심약한 왕자, 충녕이 있소이다.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왕권을 이룬 태종. 그는 주색잡기에 빠져 있는 첫째 양녕 대신 책에만 파묻혀 사는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에 책봉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왕세자의 자리가 부담스럽기만 한 충녕은 고심 끝에 궁을 탈출하기로 마음 먹고 월담을 시도 한다.
그리고 충녕을 꼭 빼닮은 덕칠이라는 노비도 있소이다! 남몰래 주인집 아씨를 흠모하며, 말보다는 주먹과 몸이 앞서는 다혈질 노비 덕칠. 어느 날 역적의 자손으로 몰려 궁으로 끌려간 아씨를 구하기 위해 궁궐을 찾았다가 담벼락 아래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세종대왕이 아직 세자도 되지 못 했던 시절, 한 순간의 실수로 노비가 되고, 노비가 왕이 될 뻔 했던 세종비밀실록. 과연 누가 진짜 “나는 왕이로소이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주지훈의 1인 2역 연기
주지훈은 이런 능청스러운 역할에 찰떡인듯싶다. 자존심도 부리지만 엉뚱하고 능청스러운 역할이 정말 잘 어울린다. 그래서 세자가 되기 싫다고 땡깡을 부리는 충녕의 모습이나 노비였던 덕칠이가 세자가 되어 눈 깜박이며 세자 흉내를 내는 것을 좋아하는 그 모습까지. 제 옷을 입은 듯 정말 귀여웠다.
특히 점차 세자가 되어가는 덕칠과 노비의 생활에 익숙해져가는 충녕의 모습은 그 경계가 흐릿해질 수 있었을텐데, 그 미묘한 차이를 잘 구분해서 천방지축이지만 차분해진 노비 덕칠과 근엄하지만 땡깡부리는 세자의 그 경계를 잘 표현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진짜 세자로 돌아온 충녕의 변화가 느껴지게끔 보여줘서 통괘했다.
세종이 민생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항상 의문이 들었던 점이 어쩜 세종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저렇게도 공감을 하고 그렇게도 열심히 민생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을까? 였다. 이런게 바로 난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난 난사람은 아니라서 내가 직접 겪지 않은 문제에 대해 겉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온 마음을 다해 공감을 하긴 힘든 편이다. 그런 내 입장에서 어떻게 세종은 태어나길 대군으로 태어나 방안에서 책만 읽었다는 사람이 백성의 애환을 어찌 알고 그렇게도 열심히 그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한평생을 바쳐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도통되지 않았다.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충녕이 노비와 뒤바뀌면서 직접 그 체험을 했기에, 그저 잠행기나 시찰과 같은 둘러보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노비가 되어 그 힘듦을 겪어보았기에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애달픔, 농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중국식 절기의 문제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주어서 좋았다.
체험이 아니라 경험을 한다는 것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보면서 느꼈던 점은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인들 역시 체험이 아니라 경험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선거 일정이 다가오면 시장을 돌거나 김장을 하거나 반찬나눔 행사를 한다거나 이렇게 1일 체험을 진행하면서 시민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보여주기식 선거 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체험은 솔직히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노고를 체험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말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처럼 노비가 되어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경험을 해야만이 그들을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점이 100%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저 당선이 되기 위해 서민인척 위하는 체험 형식의 행동은 가시적일 뿐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정치인은 도대체 언제 만나볼 수 있을지 안타까울 뿐이다.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세종의 민존벙치의 뿌리는 충녕의 궁궐 가출사건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재밌는 해석이었고, 현실 정치까지 생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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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사라진 거장 피아니스트를 찾아서
시놉시스
뉴욕의 한 음악 비평가가 브라질의 젊은 피아노 거장 테노리우 주니오르의 행방불명 사건 뒤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 탐험에 나선다.
EDITOR AMY PICK
쿠바 라틴 재즈를 다룬 <치코와 리타>를 만든 트루에바와 하비에르 마니스칼이 만든 신작 영화로브라질 천재 피아니스트의 존재를 좇는 영화다. 피아니스트 이름은 ‘테노리우 주니오르’. 남미에서 일어난 군사독재 정권과 문화인들의 탄압과 함께, 당시 테노리오의 동료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 역사적 상황들을 단서 조각들로 진실을 맞춰간다.
테노리우 주니오를 찾아서
이 영화의 주인공 ‘테노리우 주니오르’. 1960년대 재즈 삼바의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그가 브라질 음악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합니다. 그의 선율은 예술적이며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최고입니다”.
그의 지인들은 입을 모아 그의 예술성 뿐만 아니라 인간성에도 극찬을 보낸다.
그런 브라질의 인재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당시 군사독재를 펼치던 브라질 군부에 의해 한밤중에 잡혀간 것.
영화는 인터뷰를 통해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음악가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 한 가정에서 사라지는 것,
문화와 개인적인 측면에서 상황을 조명하며 지인들이 안고 갈 고통과 그리움을 담아낸다.
다큐멘터리를 뛰어넘어
자칫 지루한 다큐멘터리로 끝날수 있는 영화를 다채롭게 꽉꽉 채워넣었는데,
브라질의 음악 거장들의 인터뷰와 테노리우의 음악을 애니메이션과 결합하여 시청각을 모두 사로잡았다.
또 감독은 수많은 테노리우 지인들의 인터뷰와 당시 감금되었던 수용소를 직접 찾아가 테노리우가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이 관객들에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본인의 생각을 가감없이 던지며 사라진 예술가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을 표한다.
영화, 음악, 미술 LET'S GO
영화는 음악, 인터뷰, 역사,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작화가 조화를 이뤄 재즈와 브라질 역사를 알지 못해도 충분히 즐길수 있는 영화다. 또한 브라질의 음악이 전세계 음악을 뛰어 넘어 영화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담겨져 있으니 씨네필들이라면 안 볼 이유가 없는 작품!
EDITOR_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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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인의 책무와 촘스키의 시민불복종 원리의 접점이 시사하는 것
일찍이 <여론조작>을 발표했던 노엄 촘스키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에 부당하게 참전해왔다는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국 정부의 행위를 크게 비판하는 한편으론 시민불복종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국가의 범죄를 막기위한 행동을 하는 것은 마땅하다. 살인을 막기 위해 교통 법규를 위반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노엄 촘스키가 구체적으로 지정한 국가의 범죄란 당시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이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이 시작된 이래로 군사적 개입은 일절 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더 나아가 닉슨은 대외적으로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며 베트남에서 미군이 물러날 것처럼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트남에서 공산진영(북베트남)의 우세가 두드러지자, 미국은 수많은 장병들을 베트남으로 보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하지만,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게 되는 법이다. 국가기밀로 덮어두기엔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고, 베트남으로 파병간 장병들의 사기도 날이 갈수록 떨어져갔다. 그런 와중에 뉴욕 타임즈는 다른 언론사들보다 먼저 ‘펜타곤 페이퍼’라고 불리는 베트남전 기밀문서를 입수하게 된다. 이 문서에는 정부가 시민들에게 숨겨온 베트남전의 기록과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영화 <더 포스트>는 바로 이 시기, 정부의 거대한 거짓과 부정한 권력에 맞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언론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더 포스트>는 출판의 자유와 권력에 대한 견제로 언론의 역할을 보여주는 영화인 동시에, 캐서린이 남성중심사회에서 최초의 여성 발행인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와 지위를 되찾기까지의 이야기도 담아내며, 위엄있고 우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한편으론 다소 정적일 수 있는 소재를 속도감과 몰입감 있게 촬영하여 이야기 자체의 매력 또한 잃지 않고 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어쩌면 미래에도 유효할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점, 영화속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높이 살만하며, 1971년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도 가감없이 반영하고 있다는 점, 이야기 자체도 속도감 있고 흡입력있게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은 영화라고 하겠다.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오늘날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놀라웠고, 지금 당장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소회를 밝혔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당시 트럼프 정부를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 수 있겠다. 실제로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미국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체제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기도 했다. 물론, 국내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국내의 특정 언론인 혹은 특정 언론들은 진실을 보도하는 것보다도 자신들의 관심사나 이익을 위한 기사를 쓰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론의 책임에 대한 메세지와 부정한 권력을 향해 경종을 울리는 영화 <더 포스트>는 꽤 오랜시간 회자될만한 수작이다. 언론인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정보의 제공자가 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서 각 개인들에게도 ‘진실’의 의미와 사회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볼만한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두 언론인의 남다른 무게
여기,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정반대의 입장, 정반대의 성격을 보이는 <워싱턴 포스트>의 두 언론인이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최고 경영자 캐서린 그레이엄과 편집장 벤 브래들리가 바로 그들이다. 영화가 시작된 이후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의견충돌을 겪는다. 우선, 백인 남성 중심의 전문직 사회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장으로 자리잡은 미국인 남성 벤 브래들리는 자신의 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언론인답게 특종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날 <뉴욕 타임즈>의 1면을 가득 채운 ‘펜타곤 페이퍼’에 대한 특종을 접하자마자 벤의 관심사 역시 그쪽으로 쏠린다. 다만, 주목해야 할 점은 벤이 펜타곤 페이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특종을 놓치지 않으려는 언론인의 직업적 열정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는 점이다. 벤 역시 언론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닉슨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으며, “출판할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출판이 답이다”라는 언론인으로서의 도덕과 책임감도 보이긴 하지만, 영화속 그에게서 보이는 상당 부분은 단순한 전문직 종사자의 직업적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벤 : 케이(캐서린)만 용감한 건 아니지.
토니 : 당신이 잃을 게 뭐있다고.
벤 : 내 직장, 명성...
토니 : 벤, 왜 이래. 당신 명성은 광택만 더하게 될 걸 우리 둘 다 알잖아. 직장으로 말하자면 또 구하면 그만이고.
실제로 밴에겐 선택지가 많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케이의 선택을 용기있는 선택이라고 말한 토니와 벤이 나눈 대화를 참고해보면, 이 영화속 벤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벤은 분명 언론인으로서의 열정과 도덕, 책임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언론인이 아니더라도 전문직 남성들이 갖는 일에 대한 열정과 성공에 대한 욕망과도 같은 것들이 그에게선 언뜻 보이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정한 언론인은 벤이 아니다.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속에서 당당하게 일어서는 사람, 모든 것을 걸더라도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 사회의 압력으로 움츠러들었을 뿐, 강인한 내면으로 다시 일어서는 사람. 바로 캐서린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주인공이다.
캐서린은 <워싱턴 포스트>의 최고 결정권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에게 걸맞는 대우를 하지 않는다. 당시 미국 사회의 전문직은 백인 남성들에게만 열려있었다. 때문에 백인 남성이 대다수인 사회속에서 전문직 여성들은 은근하게 차별받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영화 <더 포스트>에선 정당하게 회사의 경영권을 이어받았음에도 끝없이 그녀를 무시하거나 소외시키는 태도를 보이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캐서린의 조언을 듣지 않는 벤, 캐서린이 듣는 앞에서 그 자격을 논하는 아서, 이사회가 끝나고 세남자들의 뒤에서 걷는 캐서린의 모습, 이사회에서 일어나려는 캐서린을 한손으로 주저앉히는 증권거래인 등. 벤의 말 한마디면 아무런 말도 못하는 사무실과는 대조되는 캐서린의 환경은 전문직 백인 여성이 감수해야하는 사회적 압력과 시선을 과장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캐서린이 자신을 자꾸만 주저앉히려고 하고, 깎아내리는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자기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당당하게 일어서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때문에 캐서린의 성장담을 담아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투쟁의 과정에서 캐서린은 우아하고 위엄있는 방식을 택했기때문에 이 영화의 문체는 캐서린의 숭고한 투쟁을 닮아 품위있는 어조로 읽힌다. 덧붙여 캐서린 개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귀기울이지 않고 거리를 둔채로 그녀의 이야기를 적어가는 것으로 객관적인 시선에서 쓰고 있어서 이야기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시민불복종과 언론인의 책무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71년, 미국 언론들이 다루었던 ‘펜타곤 페이퍼’의 내용을 읽게 된 미국 시민들이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하기도 했으므로, 반전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1971년 5월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중 61%는 베트남전 개입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면 군입대 거부도 늘어났고, 베트남에 주둔하는 부대에선 탈영하는 병사들도 늘었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병사들도 있었으며, 반전 시위의 규모와 인식은 점차 커져갔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일련의 움직임들은 미국사의 대표적인 시민불복종 운동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상위 엘리트 계층을 제외한 각계 각층에서 반전(反戰)의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시민불복종 운동의 최전선에는 바로 언론인들이 있었다. 영화속에서 보여지듯이, 시민들의 알 권리를 위한 언론인의 책무와 국가 기밀과 관련한 보안법을 지키는 일은 상충되는 것들이다. 시민들의 알 권리를 지키자면, 국가 보안법에 걸려서 불법적인 행위를 하게 되고, 합법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딜레마에서 언론인은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비단 언론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이글의 시작과 함께 소개한 노엄 촘스키는 이런 딜레마를 헤쳐가기 위해서 시민불복종을 강조한다. 실제로 1971년에 한 네덜란드 방송에서 그가 비유한 것을 해석하자면, 국가의 범죄를 막기 위해 국민이 저지르는 범죄는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분명한 기준과 인간본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결과로 얻어낸 정의로운 대의가 있어야만 시민불복종은 정당화될 수 있다. 미국의 베트남전 같은 경우에는 충분히 정당화될 근거를 갖추고 있다. 1971년 한해에만 미국은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 80만 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미국 정부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무력시위는 학살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이라면, 시민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의 국가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면, 우리 정부가 불법으로 지정한 행위를 통해서라도 우리 국가의 범죄를 막아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노엄 촘스키가 강조한 시민불복종의 의미이다.
영화 <더 포스트>는 바로 그 점을 인정한다. 반전시위에서 한 청년은 미국이라는 열차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기위해선 때론 몸을 선로에 던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캐서린과 벤은 국가 보안법에 위반되더라도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실을 신문 지면에 쓰기로 한다. 캐서린과 벤은 이를 통해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것은 물론, 정부의 잘못된 선택을 교정하고자 한다. “헌법 제정자들이 언론의 자유를 준 것은 반드시 가져야 할 보호 장치이며, 민주주주의에 필수적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언론은 피치자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통치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이유때문이다.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통해서 권력기관들의 부패를 견제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언론은 억압받지 않는 위치에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더 포스트>가 말하는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노엄 촘스키가 당시에 말한 시민불복종의 원리와 닮아 있다.
<더 포스트>의 화두, 언론인의 시민불복종과 일반 시민의 시민불복종
여기에 아직도 유효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이론을 조금 빌려와서 말하자면, 행정부를 비롯한 국가 정책 결정권자들을 비롯한 국가 권력은 모두 시민에게서 양도받은 것들이다. 따라서 시민들에겐 자신들이 빌려준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 권리가 있으며, 그 알 권리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300년 가까이 되어가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내용은 아직도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현대사회에선 새로이 추가되는 것들-요컨대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자본-은 있어도 그 뿌리가 흔들리는 법은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언론의 역할과 책임, 그 중요성 역시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더 포스트>의 화두는 자유민주주의가 존속하는 이상, 그보다 더 나은 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유효할 것이다.
한편, “언론인의 책임과 의무”에서 조금 더 나아가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론의 역할도 역할이지만, 언론인 역시 일반 시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 <더 포스트>가 말하는 언론인의 역할을 다하는 행위와 노엄 촘스키의 시민불복종의 원칙에 접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영화는 비단 언론인 뿐만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부패하고 부정한 권력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2016, 12)되고, 영국의 브렉시트(2016, 06), 미국에선 급진주의자 트럼프가 당선된 시기(2016, 11)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지금 이 영화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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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레이더스 시사회 영화 후기 - 독재로부터 자유를 빼앗기질 않을 권리!
서기 2043년 독재국가인 에머슨이 전쟁을 명분으로 하여 미성년자들을 아카데미라는 곳에 데려가 인간병기로 만든다. 니스카는 자신의 어린 딸인 와시즈를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와시즈는 아카데미에 끌려가게 되고 그로부터 10개월이 흐른다. 니스카는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큰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한편 와시즈는 아카데미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지낸다. 하지만 외톨이로 지내는 와시즈에게 교관이 다가와 자신의 어머니인 니스카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큰 실망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니스카는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아카데미의 경계에서 매일 원망한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카데미에 있는 자신의 딸과 아이들을 구출하려고 준비하는데...
근미래의 디스토피아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려주는 영화!
하니엘의 영화 잠깐 엿보기
단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에머슨에게 길들여진 인간병기로 만들어진다면?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없는 걸까?
이 영화는 2043년의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다. 시민들은 식량을 드론으로 배급받는데 형편없는 음식들이다. 그리고 국가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여버리는 독재 국가인 에머슨을 보면서 우리의 삶에 자유가 빼앗긴다면 희망이 없는 채로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에 쓰일 인간병기를 만들기 위해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아카데미에서 훈련시킨다. 하지만 미성년자들은 결국 군인으로 키워져 전장에 배치되고 권력의 도구로 쓰이게 된다. 만약 우리도 근미래에 이러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할까? 자유라는 게 없어지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과 다를 게 없어진다.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하면 사회가 얼마나 비참해지게 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독재가 실행한다 해도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 예시가 니스카를 도와주는 인디언 부족들인데 이들은 토착민이면서 자신의 영토를 수호한다. 후반부에 갈수록 에머슨의 군대와 드론들이 쳐들어와 이들과 싸우려고 하지만 자연을 수호하는 와시즈의 능력이 늦게 발휘된 덕분인지 물러나게 된다. 전쟁을 한다는 이유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자유를 빼앗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영화 '나이트 레이더스'였다.
독재 국가는 독을 탄 음식을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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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충보다 더 한국적인 영화
낯선 미국 땅 중 한국인이라고는 절대 살 것 같지 않은 허허벌판 아칸소로 떠나온 한국 가족. 가족들에게 지루한 병아리감별사 일에서 벗어나 미국 땅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은 자신만의 농장을 가꾸기 시작하고 엄마 '모니카'(한예리)도 병아리 감별사로 일을 다시 시작한다. 아직 어린 아이들의 보육을 위해 ‘모니카’의 엄마 ‘순자’(윤여정)가 함께 살기로 하지만 큰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김)은 미국에서 볼 법한 할머니 상과는 영 딴판인 할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에는 다양한 갈등이 존재한다. 갈등이라는 키워드로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1. 가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인 여자 vs 성공에 눈 먼 한탕주의 남자
가부장적인 남자는 가정의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위신을 세워주는 요소들을 정해놓고 산다. 예를 들면, 좋은 집, 좋은 차로 대표되는 돈, 즉, 가정에서 남자가 해야할 일이란 그저 돈을 잘 벌어다주는 것, 그래서 가족들이 풍족하게 살게 해 주면 그만이라는 생각들로 지배적인 것이다. 그 과정에 있어서 가족의 희생이 필수적이라면, 그리고 그 희생에도 불구하고, 풍족한 가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남자들의 위신은 설 데가 없게 된다.
제이콥은 한국의 가부장적인 남자들의 표본이다.
"아이들이 내가 성공하는 건 보여줘야 할 것 아니야"
"나만 믿어, 조금만 있으면 우리 다 잘 살 수 있어"
등의 대사를 보면, "가족을 위한"이라는 방패를 가지고, 본인의 이상을 추구하는 데에만 여념이 없는 남자이다. 물론, 제이콥이 성공한다면 가족들은 행복하고 여유있게 살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의 이상에 대한 결과이지, 그의 이상의 목적이 아닌데, 성공하지도 못했으면서 가부장적인 가장들은 가족을 자신의 무모한 도전의 이유, 목적인 것처럼 포장한다. 마치, 진짜 가족을 위해서 한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가족은 그들의 이상의 부가적인 이유이지, 그들은 가족을 담보 잡아 도박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빛좋은 개살구 같은 그들의 포장이 얼마나 비겁한지 왜 그들만 모르는 것인가.
그에 반해, 부인은 아무래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생활비에 쪼들리는 삶이기 때문에 남자의 무모한 도전에 대해서 마냥 박수를 치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상의도 없이, 트레일러 집에 살게 한 이 남자에 대해서 간헐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이 남자의 도전이 성공만 한다면 정말 가족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테니, 이 남자를 믿어보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아칸소를 떠나자는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어야 하는건지 우왕좌왕하는 이 여자를 보자니,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슬로건으로 밀어붙이는 이 남자의 결과와 목적이 뒤바뀐 주객전도식 설득에 매번 지고야 마는 이 여자도 결국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자라온 여자이기 때문에 그녀도 남편 없이는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사실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다만, 직감적으로 이 남자의 농사에 대한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그저 불안할 뿐이고, 돈이 벌리기 보다는 돈이 나가는 현재 상황에 대한 불안이 이 여자를 반 미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 이것이 그녀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을 그녀와 그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들이 살아왔던 시대가 그들에게 요구했던 사회성이 아마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고, 시대의 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들은 그렇게 갈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 미국 문화와 한국 문화의 충돌
부부 간의 갈등과는 별개로, 미국 태생 자식 세대와 오리지널 한국 할머니의 문화적, 세대적 충돌도 이 영화의 중요한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 아들의 입장에서는 미국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맛있는 쿠키를 구울 줄도 모르고, 싫어하는 음식만 잔뜩 해서 먹이는 할머니는 엄마 아빠가 싸우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고, 영어도 못하면서 이상한 영어로 사람 당황시키기나 하는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식사 예절에서 개인의 그릇이 중요한 미국에서 그릇을 공유하고, 컵도 공유하는 할머니의 행동에서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던 자식 세대의 감정에 깊이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너는 내 가족이니까 네가 쓰고 있는 물건도 내가 그냥 허락 구하지 않고 쓸 권리가 있다'는 식의 접근이 영화의 배경 기준에서 자식 세대보다 더 어린 세대인 내가 우리 할머니의 그런 태도에 기분이 나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깊이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현재 우리나라도 영화의 배경 시대에 비하면, 참 많이 서구적으로 바뀌었구나, 많이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그 때나 지금이나 세대 간의 충돌의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영화 상에서 개인주의 문화를 정없는 문화로 간주해버리고, 정이라는 애매한 말로 무례함을 덮어버리는 집단주의가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와 충돌했을 때, 어느 쪽이 이기는가 하면, 집단주의가 이기고야 만다. 집단주의 문화 에서 가족이라는 집단의 존재가 아주 중요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하는 희생이 당연시된다. 희생의 힘이란 아주 강력해서 각자의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미국 아이들은 처음 집단주의에 노출되면, 처음엔 그 집단주의의 일종의 무례함이 오지랖으로 보일 수 밖에 없지만 집단주의에서 필수 요소인 희생에 노출되면, 무례함에 대한 불쾌함이 사그라들고, 고마움으로 바뀌게 된다. 그 고마움이 결국 집단주의에서 형성되는 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도 앨런은 할머니에 대한 불쾌함을 느꼈던 과거는 잊고, 할머니에게 의지하게 된다.
3. 미나리의 의미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살아야 했지만 아메리칸 드림 하나 바라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땅에서의 현실도 한국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가난을 타파하고자 하는 가장의 마지막 승부처로 잡은 넓은 대지에서 말라가는 작물과는 달리, 미나리는 특별히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너무 잘 자라버린다. 아등바등하면서 되도 않는 농사를 하는 제이콥과는 대비되는 할머니의 미나리는 결국 이 가족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는 작물로서, 미국 땅에서 기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한국인 이민 가족들의 집념을 상징하는 듯 했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고서도 여전히 미국에서 자리잡고 살고 계신 이민 가족, 교포 분들이 어디에서 자라도 극강의 생명력을 보이는 미나리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총평
이 영화는 제 2의 기생충이다 뭐다, 말들이 참 많던데, 기생충과는 참 분위기도 다르고, 더 한국적인 영화다. 기생충은 인간 사회의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입장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 영화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사람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에 대해 논하고 있는 이 영화에 대해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미나리의 경우, 한국 사회의 특징적인 점들을 잘 집어내어 한국인에게는 당연한 내용이고, 해외 영화 팬들에게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스테레오타입적인 특징을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영화라고 생각한다. 기생충의 경우, 한국 태생 감독이 한국 영화의 세계화를 목표로 만든 영화 같았다면, 미나리의 경우, 한국 교포인 감독이 '한국인에 대한 이해'라는 과목을 세계인들에게 강의하고 있는 듯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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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 누구나와요? 그 사람들 나오나요?
큰 스포일러는 없지만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영상이나 글은 영화 관람 후 읽어주세요! :)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이 드디어 개봉했습니다!
기존 마블 영화의 팬이시거나 기존 스파이더맨 시리즈들을 좋아하셨던 분들에게는 선물같은 영화입니다.
그동안 모든 시리즈를 보셨던 분들이라면 그동안의 추억과 영화의 장면, 대사들이 많이 떠오르실 거에요.
마블이 작정하고 팬서비스를 해주는 영화 같기도 합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에서 확인해주세요!!
제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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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나병의 영화정보 #10? ?영화 캐스팅이 궁금하다고?!?
?씨나병의 영화정보 #10? ⠀ ?열 번째 주제? ⠀ ?영화 캐스팅이 궁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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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하더 데이 폴> 공식 예고편
서부영화는 올드하다는 편견을 깨라! 개척시대 서부에 새로운 피를 수혈할 짜릿한 액션과 스릴의 복수극. 조너선 메이저스, 이드리스 엘바, 자시 베츠, 레지나 킹, 델로이 린도, 러키스 스탠필드, RJ 사일러, 에디 가세기, 대니엘 데드와일러, 디온 콜 등 호화 출연진. 제임스 새뮤얼이 연출을, 숀 ‘제이지’ 카터, 제임스 래시터, 제임스 새뮤얼, 로런스 벤더가 제작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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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노스페라투> 메인 예고편
"그가 오고 있어…" 100년만에 다시 깨어난 노스페라투 ⚰️ 영원한 어둠 속 '그'가 점점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