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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2-02-15 16:58:07

상실의 슬픔에 줌 인(zoom-in)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리뷰

 

  상실 이후, 적절한 추모 기간은 얼마일까? 언젠가부터 사건사고, 재난에 희생된 사람들을 다루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을 졸이게 된다. 당장은 모두가 가족‧동료‧친구를 잃은 슬픔에 공감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제 그만하라’고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나만의 피해의식은 아닐 것이다. 일베 회원들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 중인 유가족 앞에서 ‘폭식 투쟁’을 전개한 이후부터였을까? 우리 사회가 슬픔에도 유통기한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상실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과 그 흔적이 나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을 천천히 좇는 영화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어린 사야카는 우연히 동네 펫숍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개 ‘루’를 발견한다. 루는 ‘믹스견’이라 품종이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함께하기로 한 사야카와 루는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추억을 쌓아 올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준다. 루가 수개월 만에 심장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다시 혼자가 된 사야카. 그는 루가 떠난 후에도 일상의 모든 공간에 남은 루의 흔적과 마주하며 우울한 기분에 빠져 지낸다. 루와 행복했던 만큼, 그 공백도 크게 느껴져서다. 그러던 중 오래전 아들을 잃은 동네 할아버지 후세와 친구가 된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상실이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를 차근히, 느린 속도로 마주해나간다.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개월 전 루를 떠나보낸 사야카와 수십 년 전 아들을 먼저 보낸 후세가 느끼는 슬픔의 크기는 같다. 오랜 시간이 후세의 슬픔을 덜어주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제 마을에서는 아들을 잃은 후세의 이야기가 슬픔이 증발한 건조한 소문으로만 떠돌지만, 후세는 여전히 수십 년 전에 머무르며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후세의 슬픔을 '과거'로 흘려보내는 동안, 후세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홀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상실의 슬픔은 진정 어린 공감과 연대의 마음으로 승화될 수 있다.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후세와 사야카가 끝내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다. 서로의 슬픔에 공감해주는 사람을 만난 후에야 사야카와 후세는 상실한 존재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공감과 연대가 어렵다면 상대가 ‘이제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무엇이든, 타인의 슬픔에 유통기한을 정해놓고 그만하라 닦달하는 것보단 낫다.

 

 

  영화에는 성인이 된 사야카의 내레이션과 어린 사야카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는 사야카가 루를 잃은 상처와 ‘함께’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슬픔은 ‘극복’되어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상실로 인한 슬픔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성숙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타인의 슬픔을 존중하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다. 다시 한번, 상실의 슬픔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루를 떠나보낸 사야카의 슬픔과 사야카가 이 슬픔을 마주하는 과정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가까이서 보여준다. 내게는 이 영화가 상실의 슬픔에 줌 인(zoom-in)함으로써 슬픔마저 ‘죄’로 몰아가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영화로 읽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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