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 (Unrueh, 2022)
“조용하고 강한 역사의 속삭임”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93분
감독 : 시릴 쇼이블린
개인적인 평점 : 3.5/5 (개인적으론 4점. 취향을 많이 탈것 같아서 3.5!)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 줄거리
19세기,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며 시계를 만드는 스위스 한 마을은 변화를 겪는다. 이 마을에서 조용히 일어난 무정부주의 운동 지지 현장에서 한 러시아인 여행자와 시계 공장 노동자가 만난다.
어두운 밤, 밝은 아침 외엔 시간이란 개념이 없던 세상에 시간이란 개념이 생겨나고, 자연을 이용한 시계를 지나 커다란 궤종 시계, 벽 시계, 손목시계, 그리고 손목에 얹을 수도 있는 전자시계까지 등장한 현재. 우리에게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만들어지고 성립되는 순간과 작은 사람들의 저항을 담아낸 영화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트레일러와 이미지, 시놉시스를 읽자마자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빠른 속도와 통일된 시간, 통신에 익숙해져 버린 현재와는 조금 동떨어져있는 영화였다. 나쁜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니다. 비유를 해보자면 5G가 통용되는 시대에서 만나는 클래식한 벽돌 휴대폰 같았고, 흔히 보지 못할 우직한 중심이 있는 영화였달까. 영화는 자극과 빠른 전개가 당연시된 최근 영화들과 비교해 상당히 잔잔했고, 그 안엔 함께 그들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현실적인 세상이 담겨있었다.
영화의 메시지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의 시릴 쇼이블린 감독은 자신의 할머니와 그보다 앞서 살아간 여성들이 실제로 시계공장에서 일하며 겪었던 경험과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19세기 무정부 주의자(아나키스트)들과 그 시대의 정보들을 섞어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재의 표준 시간이 만들어지기 전, 한마을 안에서도 4개의 시간이 적용되던 그때. 정보를 알고 있는 게 힘이고, 내 정보가 중심이 되는 게 곧 권력이었던 시절, 커다란 권력을 쥔 사람들과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작은 힘을 모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이자 중요한 역사다. 시릴 쇼이블린 감독은 커다란 세상 속, 작은 존재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소수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그리고 그는 GV를 통해 이 역사들을 잊지 말아야 하며 무정부 주의와 권력자들의 힘겨루기가 현대의 사회 주의, 우리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즉 현대는 어떤 과정을 거쳐 구성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노래가 들리지 않는 영화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에는 음악이 없다. 등장인물들의 합창을 제외하면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고, 새소리, 시계 초침 소리, 공장의 기계 소리, 숲의 여러 소리들만 들려온다. 배경음악이 최대한 배제된 상태를 일부러 연출한 것인지 궁금증이 생겼었다. 그 궁금증은 영화의 상영 후 이어진 GV에서 간단하게 풀렸다.
시릴 쇼이블린 감독은 영화 음악이 가진 파워를 알기에 당연히 이 영화에도 음악을 삽입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딱 와닿는 음악이 나오지 않아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포르투갈의 영화 음악 감독과 접선을 했는데 그 음악 감독님은 “음악이 없다니. 무슨 소리야! 귀에 들리는 모든 게 음악인데.”라는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 나는 그의 조언이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 아주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본래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영화이기에 오히려 음악이 없는 게 더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소수들의 자유로움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정해진 시간, 규율이 정해지기 전 자유롭게 살아가던 작은 도시의 이야기다. 이 도시 내에서도 자신만의 시간을 정하며 슬슬 권력 싸움이 시작되고 있는 모습이지만, 아직은 무정부주의 지도를 술집에 걸 수 있을 정도의 자유가 남아있다.
재미있는 요소들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딱 봤을 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재미를 찾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Yes”라고 답하겠다.
이 영화엔 여러 역사적인 사실이 들어있다. 영화에서 표현된 것들은 모두 진짜다. 한마을에서 몇 개의 표준 시를 사용하는 것, 사진 기술이 발전하며 조금은 저렴해진 비용 덕에 평범한 사람들도 사진을 찍는 모습. 이름을 날린 사람들의 사진을 사고팔며 그들의 운동을 응원하는 행위. 매일 오랜 시간(12시간 정도) 세밀한 작업을 하기 위해 작은 알약을 삼키는 시계공들의 모습까지.
해당 장면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시릴 쇼이블린 감독은 “19세기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또는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그들은...”하고 말문을 열며 길고 정성스러운 답변을 해주었다. 그의 말에선 이 시대와 시계공, 소수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느껴졌다.
또 다른 재미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아름다운 화면 구성이다. 자연광을 한껏 이용해 담아낸 자연과 마을의 풍경은 반짝반짝 빛나고, 수려하면서도 불편해 보이는 그 시대의 의상과 아주 가까이서 담아낸 시계의 내부 모습이 흥미를 자극한다.
시릴 쇼이블린 감독은 비용 문제도 있지만, 평소에도 인공조명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를 촬영할 당시엔 딱! 하필 그 지역에 30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큰 비가 내리는 해였다는데, 비를 피해 인공조명 없이 햇살을 담아내기 위해 엄청난 인내심과 공을 들였다고 한다. 시릴 쇼이블린 감독과 모든 관계자들이 공을 들인 만큼, 영화는 티끌 하나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중성이 뛰어난 영화는 아니다 보니 이 영화가 한국에서 정식 개봉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기회가 된다면 이 영화를, 시릴 쇼이블린 감독의 영화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영화였다.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5월 2일 17시 30분 CGV 전주고사 7관 (GV 포함)
5월 7일 13시 30분 CGV 전주고사 7관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