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your bunny2021-03-01 00:00:00
<벌새>, 그래도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14살 소녀 은희가 마주한 거대한 세계 속의 이야기, <벌새>
두 번째로 보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긴 여운이 남은 영화였다. 처음 보기 시작할 때는 ‘러닝타임이 꽤 길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계속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라는 생각이 들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나오면 ‘벌써 끝나 버렸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장면 하나하나를 모두 눈에 담고 싶을 만큼 편안한 색감을 띄는 것이 이 영화를 보고, 또 보게 하는 매력인 것 같다.
전반적으로 잔잔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영화를 보다 보니 어딘가 ‘소란스럽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14살 소녀 은희가 마주한 거대한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들 때문인 것 같다. 인상 깊었던 장면을 이야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은희가 친구 지숙에게 자신을 때리는 오빠 때문에 자살하는 상상을 얘기하는 장면이다.
- 내가 자살을 하는 거야. 오빠 새끼가 괴롭혀서 힘들다고 유서 남기고.
- 죽고 나서 하루만 유령으로 있는 거야. 그 새끼 막 울고 아빠한테 혼나. 그럼 난 그걸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상상을 한다.
- 그러면 난 막 상상만 해도 후련해.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이런 상상을 해야 하는 은희의 모습에 탄식이 저절로 났다. 그리고 지숙의 대답인 “다들 우리한테 미안해하긴 할까?”라는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갑자기 내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아직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진심을 담아 미안해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어른들이 너무 많다.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사과를 받지 못하고 눈앞의 현실에 낙담하고 있을 아이들이 많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바꿔 나가야 할 과제이다.
은희가 우연히 발견한 엄마를 애타게 부르지만, 엄마는 전혀 듣지 못하고 그런 엄마를 은희가 그저 바라보는 장면이다. 아마 이때 엄마는 돌아가신 외삼촌, 즉 엄마의 오빠를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그리워하고 있던 것 같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데 닿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금 당장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다시는 그 사람을 직접 만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참 이상하다. 감정이 무뎌져서 당장 눈물이 펑펑 날 정도로 슬프진 않은데 그냥 좀 마음이 이상하다.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가만히 그 사람을 생각하다 보면 주위의 소리가 차단되며 멍-해지기도 한다. 잠시 정적에 휩싸인다. 이 장면에서 은희의 엄마가 딱 그 상황이지 않았을까.
영지가 다툰 이후로 사이가 서먹해진 은희와 지숙에게 ‘잘린 손가락’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다.
-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 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 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잘린 손가락 묻고 오던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
피 묻은 작업복에 지나간 내 청춘, 이리도 서럽구나
하루하루 지쳐진 내 몸 쓴 소주에 달래며
고향 두고 떠나오던 날 어머니 생각하며
술에 취해 터벅, 손 묻은 산을 헤매고 다녔다오
터벅터벅 찬 소주에 취해 헤매어 다녔다오
영지의 정적인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조용히 영지의 목소리를 듣고, 눈빛을 바라보고, 가사를 곱씹어보면 괜히 울적해진다. 노래를 다 부른 영지는 은희와 지숙을 보며 햇살같이 웃는다.
이 장면의 영지는 정말 ‘새벽’ 같다.
‘선생님은 자기가 싫어진 적이 있으세요?’라는 은희의 물음에 대한 영지의 대답이다.
나도 내가 좋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사람들도 누구나 나 자신이 싫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을 접하기 전까지의 나는 내가 싫어질 때 자책하곤 했다. 나를 싫어하는 그 감정을 외면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내가 마냥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나 자신이 좋을 때도 있듯이 내가 싫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이다.
오빠에게 맞고 지낸 은희에게 앞으로 맞지 말고, 가만히 있지 말라는 말을 건네는 영지의 모습이다.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는 사람, 맞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주는 사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사람.
‘가만히 있지 마’라는 말을 실제로 해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나조차도 이런 말을 선뜻 해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용기가 있다는 점에서 영지는 참 좋은 사람 같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 하루를 겪어도,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웃던 사람이 떠나도, 친한 사람과 사이가 잠깐 틀어져도, 내게 위로가 되어주던 사람의 다정한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도,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
나쁜 일을 겪으면 신기하게도 기쁜 일이 다가온다. 어떤 인연을 놓치면 놀랍게도 또 다른 좋은 인연이 찾아온다.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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