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2-03-14 12:56:47
한 잔은 떠나버린 너에게, 한 잔은 곪아버린 나에게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리뷰
그렇게 화제였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드디어 보았다. 그렇다. 뒷북도 한참 뒷북을 친 것이다. 영화는 인생에서의 커리어도, 사랑도 모두 잡은 것처럼 보이는 카후쿠의 삶을 조명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는 연극배우로서의 삶, 사랑하는 아내와의 화목한 삶, 두 가지를 모두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아내의 외도를 눈으로 확인하지만 그는 그녀의 부정을 외면한다. 그녀를 질책하는 순간, 그의 화목한 삶은 날라갈 것 같아서. 하지만 그녀의 아내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 그는 그녀에게 이유를 묻지 못한 채, 슬픔과 궁금증을 묻어두고 살아간다. 마치 로봇처럼.
1. 다양하게 표현되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대사
바냐 아저씨, 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조용히 죽어 무덤에 가면 얘기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느님이 가엾게 여기시겠죠.
우리는, 아저씨, 사랑하는 아저씨,
밝고 우아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며, 지금 이 불행을,
감격에 젖어 미소를 띠며 돌아보겠죠.
그리고 쉬는 거예요.
나는 믿어요, 아저씨,
나는 뜨겁게, 간절히 믿어요
[출처] 필사 :: 체호프의 희곡, 바냐아저씨 명대사|작성자 헤베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대사는 수화로 표현된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다.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은 카후쿠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와 언어가 다 다른 배우들을 연극 바냐 아저씨의 캐릭터로 캐스팅한다. 이런 연출법은 생소하면서도 현대 사회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오히려 더 부각시킨다. 언어가 달라도 감정이 통한다면, 진심은 결국 통하게 되어 있다는 점, 다만, 그 소통이 진실어린 소통일 때 말이다. 겉보기엔 각기 다른 언어들이 상충된 소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극 속 인물들의 이런 생소한 소통 방식은 관객들에게 극 속의 내용을 더 진실되게 전달하는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카후쿠는 그 점을 노린 것이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수화로 진행되는 연극은 다른 어떤 연극보다도 특이한 전달법을 선택했지만 관객들에게 제공한 감정의 폭은 다른 어떤 연극보다도 넓었을 것이다. 언어의 기능적 불통이 의미론적 불통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의미론적 감정의 증폭만이 남은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배우들에게 감정을 배제하고, 로봇처럼 대사를 읽게 시키기도 한다. 그런 그의 독특한 지도는 배우들로 하여금 대사에 배우들의 개성을 입히기에 앞서, 대사가 주는 메시지에 먼저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주었다고 본다. 극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역시 극이 주는 메시지일 테니까. 그 메시지를 직구 던지듯 전달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대본 숙지와 메시지에 대한 텍스트적 이해가 우선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2. 진실을 알고도 묵인한 그의 최후
하지만 그런 인상적인 극을 연출하는 그는 위선자였다.
그는 아내의 부정을 알고 있었다. 부정을 저지를 당사자도 그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정작 중요한 구멍을 메꾸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구멍은 점점 커져가 카후쿠에게 무감정을 선사한다. 좋은 사람으로 나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그는 솔직할 수 없다. 남을 질책할 수도 없고,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겉모습을 유지한다. 하지만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며 죄책감에 매여 살아간다. 자신의 문제를 질책하지 않고, 이해하는 그의 표면적 자비는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다 못해 그의 행동을 위선으로 몰아가고 싶은 못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 카후쿠 입장에서는 자신의 평온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를 이해한 것이었겠지만 이미 그가 그녀의 잘못을 묻어둔 순간부터 그의 평온한 삶은 끝나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직업을 가진 카후쿠에게 이런 지나친 감정적 절제는 아이러니로 보이기도 한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에 몰입하게 된다. 배우 자신이 실제로 처한 상황과 다른 상황을 연기해야 할 때도 있지만 자신의 상황과 완벽히 일치하는 캐릭터를 만나기도 한다. 카후쿠에게 바냐 아저씨는 그런 캐릭터였던 것 같다. 바냐 아저씨의 대사 한 줄 한 줄을 마주할 때, 그는 자신의 상황과 바냐 아저씨의 상황을 비교해 깊은 몰입을 해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런 몰입이 주는 감정적 소용돌이를 감당해 내기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아내와 연결점이 있었던 후배 배우에게 바냐 역할을 맡긴 것 같다. 그의 아내와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던 후배 배우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기 위해서. 보다보니, 그 배우에게 소소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3. 상처는 상처로 치유하는 법
그의 상처는 그의 운전사, 미사키와의 담담한 대화들로 치유되기 시작한다. 자신과는 다른 결의 슬픔, 죄책감이지만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마주하고, 담담히 견디어내고 있는, 어쩌면 그보다 더 성숙한 태도를 가진 미사키의 모습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고야 만다. 그녀가 자신의 상처, 죄책감에 대해 마주하는 모습을 목도하며, 자신도 그래야 함을, 그래야 자신이 제 2막을 시작해나갈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의 연극을 보면서 미사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로를 받는다. 그는 운전 기사로 일하면서 카후쿠의 딜레마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그가 연기하는 바냐 아저씨의 진정성을 가슴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고, 극복해나가는 카후쿠의 모습에서, 그리고 카후쿠가 연기하는 고뇌하는 바냐 아저씨의 모습에서 자신이 지고 있던 죄책감을 조금은 덜었던 것 같다. 영화 마지막의 미사키의 표정이 나에게 그렇게 해석되었으니 말이다.
카후쿠는 자신의 나약한 대처로, 아내를 잃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 표출해내지 못해 묵혀버린 감정들을 뒤늦게 폭발시킨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바냐 아저씨로 분한다. 여전히 바냐 아저씨로 분해 연기하는 것은 그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나이가 들어가는 어른들에게 특정한 정도의 성숙함을 요구한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프레임을 걸고서 말이다. 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라고 있는 것임을 영화는 역설하고 있다. 표출되지 못하고, 곪아버린 감정은 그 인간의 삶의 질을 하락시키고, 점점 로봇으로 살도록 만들기만 할 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성 못지 않게 감정도 중요한 요소이기에 힘든 부분이 있으면 표출하고, 싫어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싫어도 하고, 화도 내고 해야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한 인간이라고 평가해 줄 수 있지 않을까.
4. 총평
수화로 연기하는 한국 여배우가 확실히 돋보였었다. 배우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카후쿠의 후배 배우 역할은 참 오묘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카후쿠를 깨우치기 위해서 배치된 인물인지 의심이 될만큼 그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이 영화의 모든 대사, 인물 캐릭터는 감정적인 호소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카후쿠가 마지막에 표출하는 감정이 돋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전반적인 건조한 분위기에 한 몫하듯, 오토의 바람 상대였던 것으로 보이는 후배 배우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되려 당당한 태도는 오히려 그에게 건방지게 충고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그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는 태도는 카후쿠의 감정 표출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 그 배우의 기능적 역할은 결국 카후쿠의 성장을 위한 것이었던 걸까 계속 곱씹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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