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2-04-17 03:07:59
'삶이란 게 지겹긴 해도 좋은 건가 봐'
<태어나길 잘했어>, 스포일러 없이 추천합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 어쩌다 살아있지?'라는 생각이다. 내 삶에 있는 여러 페널티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이 노예 생활이었다. 주말에 극장도 맘 편히 못 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선 넘었다. 빨리 이 400여 일이 지나야 나도 직장이란 걸 가져 주말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신체적인 문제가 있다. 이 쪽으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강박증이다. 지금도 글 쓰다 말고 손톱을 바싹 깎았다. 또 지금 리뷰를 작성하는 이유는 무언가에 홀렸기 때문이다. 매주 한 편을 안 봐서 두 번 글을 쓰지 않으면 그 다음주가 굉장히 불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씌었다. 물론 이게 재밌기도 하다. 그런데 가끔 이런 일들이 단순히 재미로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열 받으면 온 몸이 간지러운 두드러기. 요즘 자주 그러는 건망증. 신기할 정도의 이해능력. 뭔가 부족한 사회성. 흥분하면 아무 말 대잔치하는 화법까지. 또 지울 수 없는 후회가 남아있다. 나라는 인간을 감당하기엔 단점이 많은 게 확실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막 우울하고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다. 그냥 내가 뭔가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도 아니다. 그냥 그런 기분이랑 상관없이 가끔은 세상이 날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되는 건 없고. 노력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고. 어쩌다 오늘같이 나태한 내가 싫고. 사랑도 우정도 추억도 기쁨도 새롭게 시작하기엔 멀리 온 오늘. 우울하진 않아도 마음이 답답하니 그저 흘러가는 하루를 살뿐이다. 난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내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따뜻함은 뭘까? 이런 회의감이 참 지긋지긋도 하다. 잘 안다. 다들 이렇다는 걸. 그래서 이렇게 글로 쓰는 게 사실 조심스럽기도 하다. 읽는 사람에게 어두운 이야기는 부담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쩐지 내 삶의 이유를 찾고 싶다고 생각이 들 때, 역시 최고의 해답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 역시 좋은 해결방안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전주 어디쯤에 사는 춘희 씨를 만나보자.
지갑은 얇아도 마음은 따뜻해
1998년, IMF가 직격으로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어느 날이다. 주인공은 평범한 10대 소녀 춘희다.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한 집에 들어오는 춘희. 일행은 전부 검은색 옷을 입었다. 아마 친척 집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 같다. 어디에서 잘까? 대화하는 친척들. 어느 방이 좋겠어. 어느 곳이 괜찮아. 이야기를 하다가, 한 방으로 낙찰이 됐다. 그 방은 다락방이다. 책상도 있고 옷장도 있고 이런 구성이 아니다. 사람이 딱 눕기만 가능한 그런 곳이다. 남의 집 더부살이가 속이 편할 리가 없다. 손에 땀이 많이 나는 춘희. 땀 흘렸던 자국을 없애라고 꾸중 듣기 일쑤다. 거의 침낭 수준의 방에서 숙식하는 것도 모자라 신체적인 콤플렉스까지 춘희의 10대는 영 편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교우관계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폴카 댄스도 혼자. 노래방도 혼자. 놀이공원도 혼자. 언제나 혼자였던 춘희. 어머니, 아버지는 왠지 안 계시고, 집에서도 그렇게 환영받지 못한다. 아까 썼듯 다한증까지 있던 춘희. 심지어 학교 선생님까지 춘희의 손에 있는 땀에 질겁해 거리를 둔다. 춘희에게 혼자는 낯선 것이 아니다. 늘 그랬으니까. 아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시간이 지나 춘희는 어른이 됐다. 여전히 그 집에서 숙식하는 춘희. 왠지 외삼촌 가족은 집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춘희는 뚜렷한 직장이 없다. 집에서 혼자 마늘을 열심히 까 외사촌의 가게에 납품하는 것으로 돈을 모으는 모습이 제시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다한증 수술을 하기 위해 돈도 꼬박꼬박 모았던 춘희. 여러모로 괴로웠던 10대 생활을 뒤로하고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듯한 그녀다. 춘희는 정도 많다. 지나가던 노숙자에게 선물 받은 건강신발도 주기도 하고, 심리치유 프로그램에서 만난 말더듬이 남자에게 '말을 잘하시네요'라며 빙긋이 웃어 보이기도 한다. 삶은 어렵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춘희. 춘희에게 새로운 인연이 생기는 것 같다. 외로웠던 유년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누군가가 자기를 사랑해주는 상황까지 오게 됐다. 춘희에게 새로운 봄이 찾아오는 것 같다. 사랑스러운 춘희 씨는 뭔가 다른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는 새롭게 시작된 인연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삶에게 바치는 따뜻한 손 하나
그러니까. 다들 그럴 때 있지 않나. 이 세상의 불행이 나에게 다 몰빵 된 것 같은 기분. 마음대로 되는 건 없고. 난 과연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들고. 사실 혼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세상에게 선택받은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러면 항상 분기점이 되는 트라우마로 기억이 향한다. 시간을 돌린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같은 곳에서 나를 자학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지점에 관한 작품이다. 이유와 목적을 찾지 못했기에 계속해서 나에게 그 원인을 묻는다. 멍청한 놈. 네가 그런건 다 그 시기 때문이야.
그런데 사실 삶의 의미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는 의미가 있었나?라고 반문할 수 있다. 목표 좋다. 나도 이 글 써서 반응이 좋았으면 좋겠다. 또 좋은 곳에 취업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잘 살고 싶다. 근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잘 안다. 만약 내가 원하는게 이뤄졌다 치자. 소집해제를 하면 자취를 해야 한다. 그럼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겪어야 할 일이 있다. 내 뒤에서 글을 쓰고 있는 부모님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 이런 부정적인 일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게 환기가 될까?라는 생각을 한다. 솔직히 난 지금도 세상이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내가 뭘 이루건 내 안에 부정적 에피소드가 쌓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토록 잘 써왔다고 자부했던 내 인생의 역전극의 엔딩이 어찌 됐건 아무 의미 없을 거 같다. 그렇게 삶이 어두워지는 게 아무렇지 않게 성격이 변한다. 그런데. 인생이 엔딩으로 끝나는 게 전부가 아니다. 해피엔딩으로 삶이 끝나서가 아닐 것이다. 엔딩이 나면 일단 인생이 없는데, 그게 과연 중요할까? 아닐 것이다. 난 말을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만난 여자가 내가 달변가라고 칭찬했다. 그럼 행복한 거다. 비슷한 맥락으로, 세상에 닳고 닳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이유는 수천 가지인데, 행복한 건 그 단 한 가지면 된다. 영화는 이런 행복의 과정을 반복되는 자기혐오 속에 내던진다. 내가 불행했던 이유를 어린 시절의 나에게서 찾는 것에 대해 '그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밝은 삶도, 어두운 삶도 괜찮으니 이제 자기 학대는 그만두라는 땀 가득한 손을 건넨다. 어차피 우리에겐 많은 빛이 남아 있다는 말과 함께.
말 더듬이 주황
두 주인공의 인물 설정이 좋았다. 특히 쓰고 싶은 건 홍상표 배우가 맡은 주황이다. 주황은 유물에서 문지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잘 사는 집안 아들이 아니었던 남자. 주황 역시 어떤 트라우마를 안고 말을 더듬게 됐다. 이 더듬는다는 단점이 갖는 탄력이 좋았다. 사람이 갖고 있는 다른 단점이야 수 없이 많다. 예를 들어 키가 작거나, 피부가 안 좋거나 등등. 단순히 말더듬이가 아닌 다른 것을 보여줘도 큰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말더듬이로 설정한 건 여주인공과 유사점이 있다. 말더듬이가 되면 불편한 게 뭘까?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일 것이다. 나를 싫어하는 듯한 세상에 씩씩하게 살아가는 춘희와 공통점을 갖는다. 이를 기점으로 설정 하나로 인한 각본의 탄력이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 여주인공 춘희의 따스함, 주황의 지난했던 삶, 특정 집단에게 받았던 상처, 코미디 요소, 후반부 클라이맥스까지 내용의 전개가 부드러웠다. 감독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물론 영화 내적인 측면에서도 말더듬이라는 설정이 탁월했지만, 이 영화에서 이 인물이 좋았던 건 그냥 매력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 주황은 연애 경험이 그렇게 많을 수 없는 사람이다. 말을 심하게 더듬으니 사람 만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 덕에 엄청 소심하다. 그런데 이 사람의 행동은 확실히 진심이다. 캐릭터 자체가 이런 순박함이 보였다. 그 덕에 행동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남았다. 극의 전개상 춘희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이지만 주황 캐릭터의 서사도 궁금할 정도였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들어갔을 법한
일단 첫 번째. 인물 직업 중에 '영화감독' 있다. 이거 아마 자기를 투영해서 만든 캐릭터일 것이다. 그리고 주황이 수문장으로 있는 '경기전'은 감독이 지금 살고 있는 전주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또 HOT나 폴카 댄스 같은 요소도 왠지 최진영 감독이 마음에 들었던 소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춘희의 코디가 맘에 들었다.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데, 빨간색을 활용한 느낌이 '이 사람은 꾸밀 줄 안다'는 느낌이 들기 충분하다. 그리고 일부 대사에서 감독이 왠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넣은 게 아닐까 하는 부분이 있다. 여러분이 영화를 보시면서 '이 부분은 그런 거 같다'라고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엔딩에 나오는 음악도 감독의 취향이 반영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영화가 좋긴 했지만
영화 좋았다. 엔딩까지 보고 나서 기분 좋아지는 느낌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단점이 없지는 않다. 좋은 작품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드는 기시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 보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쉽고 재밌게 잘 짜인 영화라 삶에 지친 이들에게 따뜻한 손난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독립영화계의 국밥들
이 영화하면 기억에 남는게 관객들이었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이후 극장에 사람이 많은 경우를 처음 봤다. 그런데 배우들이 통통 튀고 사랑스러웠다. 어린 춘희 역을 맡았던 박혜진 배우가 기억에 남았다. 물론 어색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주인공 역을 잘 소화했다고 볼 수 있다. 아. 위에서도 썼듯 홍상표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 내가 제주 사람이라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이름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분인지는 몰랐다. 연기를 사랑해서 하는 느낌? 또 강진아 배우도 역할에 맞는 온화함과 사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이런 독립영화에 자주 나오시고 상영관도 많이 잡혀서 볼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요, 여러분 ^_^
세상을 이겨내는 모든 춘희씨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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