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2-04-17 18:54:53
서툰 사랑을 알려줄 내 첫사랑
<아사코>, 스포일러 없이 추천합니다!
나만 그런가? 갑자기 아무 맥락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가령 오늘 꿈의 내용은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에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오늘 일을 하며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딱히 선생님에게 대들거나 한 적이 없어 맞을 일이 없었다. 그런 트라우마가 자체가 애초에 머릿속에 없었다. 또 꿈에서 맞은 정도의 수위는 거의 조선시대 곤장 때리기와 유사할 정도였다. 무슨 선생님의 부모님 욕을 한 게 아닌 한 그렇게 맞을 일 자체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맞은 이유도 '바닥에 오줌 싸서'였다. 난 바닥에 오줌을 싸 본 적이 없어서 역시 기억에 남지 않았다. 어째 꿈도 나같이 꾼다. 당연히 다들 그렇겠지만 내일 바닥에 오줌 싸서 곤장 맞는 꿈을 꿀 거라고 생각 못했다.
사실 이건 당연하다. 우리 보편적인 인류에게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란 없으니 필연적으로 앞날을 미리 내다볼 수 없다. 그래서 다들 '이랬으면 좋겠다' 식의 바람을 자주 남기곤 한다. 그런데 이거랑 미래를 예측해서 정확히 맞춘다는 건 완전 별개의 것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삶에 운명이라는 단어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다른 무언가가 한 교차로에서 만난다'라는 건 정말 아무리 봐도 놀랄 일이다. 학교생활 동안 크게 선생님들에게 대들지 않았던 내가 그런 꿈을 꾸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 기회가 나에게 오다니. 사실 올 만 해서 오는 건데 나를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 사이에 그가 있는 게 너무나도 신기하게 보인다. 그런데 이런 특이한 경험이 사람의 인생에 딱 한 번만 오지 않는 것 같다. 난 오늘 그런 꿈을 꾸고 어느 날 느닷없이 교실 유리창을 망치로 두들기는 꿈을 꿀 수도 있다. 또 오늘 먹었던 자장면 vs볶음밥의 기로가 내일 모래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이게 된다고?'싶은 순간은 나이를 들면 들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다. 그럼 계속해서 고민해야 한다. 또 선택해야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우리 중 한 명이 바닥에 오줌 쌀 확률과 유사한 사건이 일어난' 인간의 모습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는 딜레마에 관한 영화가 있다. 첫눈에 반한 한 남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첫사랑이 사라지고
여주인공 아사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 쪼리 질질 끌며 길을 걷던 여름의 어느 날. 더벅머리의 한 남자가 물끄러미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낀다. 거짓말같이 시선이 이끌린 두 사람. 남자는 느닷없이 여자와 입을 맞춘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둘은 연인이 된다. 첫 번째 남자 친구의 이름은 바쿠다. 바쿠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자기 맘에 든다고 여자에게 입을 맞추는 게 뭐 보통 정적인 남자라면 불가능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걸 떠나서 확실히 개성이 강한 영혼이었던 것 같다. 톡톡 튀는 매력으로 아사코의 마음을 훔친 바쿠. 사랑이 깊어진 둘은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사랑이 사라졌다. 아무 언질도 없이.
시간이 지났다. 아사코는 여전히 사랑의 상처가 남아있다. 그렇게 지난 일에 신음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 왠지 본 얼굴이다. 바쿠다. 일하다가 바쿠를 발견했다. 말을 걸어보는 아사코. 그런데 바쿠는 자기가 바쿠가 아니라고 한다. 바쿠를 똑 닮은 남자의 이름은 료헤이다. 얼굴은 똑같은데 아무튼 바쿠가 아니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쿠와 료헤이는 얼굴만 똑같지 직업도 성격도 다르다. 그냥 바쿠가 다른 척한다기엔 360도 다른 사람이라 '아니구나' 싶기 충분하다. 그러나, 바쿠 닮은 사람을 봐서 안녕하고 끝나지 않는다. 아사코는 료헤이와도 사랑에 빠진다. 그러니까 여주인공은 얼굴은 같은데 성격과 직업은 딴판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때 겪는 아사코가 겪는 사랑이야기가 영화의 소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복을 반복하다
우리 인생은 사실 같은 순간의 반복이다. 4월의 어느 일요일에 이 글을 쓰는 나도 사실 저번 주의 반복이다. 또한 돈이 없는 지금 이 상황도 6개월 동안 반복되어 지금 7번째다. 이런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의 반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영화를 만든 것도 반복이다. 마스크 쓰고 돌아다니는 것도 반복의 일종이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며 선택을 내려야 한다. <아사코>는 이 반복에 대해 다룬 영화다. 물론 정확하게 딱 딱 맞아떨어지는 반복인 건 아니다. 영화에서 조금씩만 변형된 채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 극은 이 디테일을 굉장히 잘 살렸는데, 예를 들어 바쿠와의 데이트 장소였던 사진전이 료헤이와의 만남에서도 반복된다. 다른 것으로는 바쿠의 실종이다. 바쿠는 실종을 두 번 한다. 또 다음. 아사코도 연락을 끊고 료헤이와 거리를 둔다. 이것 역시 사랑에 실패하는 과정을 두 번 반복한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디테일을 꼼꼼히 구현해서 반복되는 인생의 과정을 묘사했다.
또 반대로 접근한 지점도 있다. 어떤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삶의 반복을 구현반 부분도 있다. 구체적으로 바쿠와의 사랑이 빠지는 과정을 보면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보자마자 키스한다. 그냥 운명인 것이다. (사랑의 운명을 비유하듯 바쿠와 아사코가 오토바이 사고가 나는 신도 있다.) 반대로 료헤이와의 사랑은 썸을 타는 기간이 몇 번 있다.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근데 그 사랑에 빠졌던 근거가 뭐냐? 첫 번째 남자와 지금 두 번째가 비슷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동적이었던 아사코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계속해서 나라는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를 조명한다. 이 과정에서 아사코가 조금씩 선택을 바꾸는데, 이 선택의 차이점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본다면 감상이 깊어질 것이다. 아마 극본을 쓴 감독도 이 부분에 대해 자기의 의견을 어느 정도 넣은 듯 보인다.
하마구치 류스케 월드
물론 하마구치 류스케의 필모그래피를 전부 다 본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 개봉했던 <해피 아워>, <드라이브 마이 카>, 또 이 <아사코>만 봤다. 그런데 이 세 작품을 보면 이 사람 취향이 느껴진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확실히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급의 당연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감독의 접근법은 확실히 다르다. <해피 아워>에서는 제목에 해피가 있지만 318분 중 300분이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인물들이 행복한 순간을 어떻게 꿈꾸냐? 에 대한 질문은 가장 마지막 대사에서 볼 수 있다. 불행한 건 너무 복잡해서 풀 수조차 없는데 행복감은 그 친구들끼리의 모임 하나로도 예상할 수 있다.
또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이런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제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카>는 건조한 느낌이었다. 영화에서는 다카츠키, 미사키 둘과 가후쿠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게 묘사된다. 같이 술도 먹고 차도 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미사키의 경우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미사키와의 관계성이 아예 안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극보다는 확실히 적다. 각색까지 하며 구상했던 하마구치 류스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하마구치 류스케는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왜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자아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내렸던 무언가가 나를 투영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실 중요한 건 '나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가 아닐까'라는 메시지가 세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이 <아사코>에서도 아사코에서도 바쿠와의 사랑이 료헤이에게도 영향이 간다. <해피 아워>에서도 앞에서 썼듯 그냥 주인공들이 재밌어하는 일로 행복을 예상한다. <드라이브 마이카>는 그냥 대놓고 대사에도 나온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만 하고 마느냐? 아니다. 이걸 굉장히 신선하게 전개한다. <아사코> 역시 상상을 뛰어넘는 전개로 관계성과 자아에 대해 탐구하는 영화다.
영상미가 좋아요
이 영화 영상미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후반부에 강물을 비추는 신이 있는데 이때 그 무미건조한 카메라 렌즈와의 시너지가 기억에 남는다. 또 초반부 바쿠와 아사코의 사고 신에서도 넘어진 형태(?)를 잘 잡았다. 뭐 사실 영화 자체 비주얼도 괜찮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이라 할 수 있는 얼굴 클로즈업에서 전체적인 배경 색감이 괜찮았다. 촬영감독이 카메라 종류를 잘 고른 느낌이다. 뭐 단순히 미장센도 좋았지만 일단 두 남녀 주인공이 잘생겼다. 특히 카라타 에리카 진짜 미인이다.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가 여주인공의 미모였다. 수수하게 예쁜 사람 중 가장 최대치의 미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 밖에서 카라타 에리카와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너무 선남선녀라 좀 문제가 있긴 한 거 같지만 예쁜 건 예쁜 거다.(물론 남자 주인공 히가시데 마사히로도 잘생겼다.) 뭐 남자는 또 다른 문제가 있고 카라타 에리카는 복귀를 준비한다는 것 같은데 상처를 준 이들에게 충분히 뉘우쳤길 바란다. 좋은 작품으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에도 관심이 많은 여배우로 알고 있는데 살짝 김이 새 버렸다. 데뷔작으로 칸에 입성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근데 이 배우의 잠재 가능성을 떠나서 연기는... ㅎㅎ..
어떤 걸 받아들일 것인가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2020년 4월이었다. 아직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던 과거. 더 큰일이 많았는데도 계속해서 머릿속을 웅웅 맴돌던 사건이 있었다. 난 어쩌면 성장하지 못한 걸까?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르고 싶어서 내 자신을 더 성장시켜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제까지의 일들이 다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반문하던 때 이 영화를 봤다.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정말 뒤통수 한 대 후려치고 싶었던 과거의 나. 세상에서 내가 내 자신을 가장 싫어해야 면죄부가 생기는 것 같았다. 영화는 이런 나(내지는 우리)에게 단적으로 뾰족한 해결책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인생의 과정을 긍정한 느낌이다. 당신은 더 나아진 선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막연하게 격려한 느낌이 들었다. 나같이 여러번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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