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종전이 선언된 한반도. 분단의 상징이었던 공동경비구역 JSA는 공동경제구역 JEA로 전환되고, 남북의 공동 화폐 생산을 위한 조폐국이 설립된다. 그러나 남북의 경제협력이 예상과 달리 더욱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혼란을 유발하자, 평양에서 서울로 왔지만 꿈과 달랐던 현실에 분노한 '도쿄(전종서)'는 무장 강도가 되어 경찰의 추적에 시달리는 신세가 된다. 그런 그녀에게 불공정한 사회에 반격을 가하자고 제안한 '교수(유지태)'. 그의 설득에 넘어간 도쿄는 북한 출신 수배범 '베를린(박해수)', 땅굴 은행털이범 '모스크바(이원종)'와 '싸움꾼 덴버(김지훈)', 해커 '리우(이현우)' 등과 한 팀이 되어 조폐국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며 4조 원 규모의 지폐를 찍어낸다. 한편, 조폐국 밖에서는 남한 협상 전문가 '선우진(김윤진)' 경감과 북한 특수작전부대 '차무혁(김성오)'대위로 구성된 공동 대응팀이 갖가지 방안을 동원하며 강도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하이스트 장르의 핵심
당연한 말이겠지만, 하이스트 장르의 핵심은 '강도'라는 행위에 달려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강도라는 행위를 어떻게 부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강도짓을 하는 사람에게 주목할 수 있다. 은행을 턴다면, 그들이 은행을 터는 동기와 목적, 그 강도 행위에 담긴 상징성이 다른 결의 서스펜스를 이야기에 불어넣을 수 있다. 또한 강도 행위 자체를 강조할 수도 있다. 은행을 털고 도주하는 일련의 과정이 낳는 긴박함과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두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하이스트 장르물은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아미 오브 더 데드>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공개 당시 좀비 영화로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지만, 하이스트 영화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아쉬움이 크다. 영화는 좀비가 점령한 라스베이거스에 침투해 은행 금고를 강탈한다는 이야기를 잘 살려내지 못했다. 감독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아픔과 깨달음이 투영된 드라마는 인상적이었지만, 하이스트 영화로서 갖추어야 할 액션과 장르적 쾌감은 부재했었기 때문이다. 역대 넷플릭스 전체 2위를 차지한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의 한국판 리메이크,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1도 같은 맥락에서 문제를 노출한다.
<종이의 집> 한국어판 각색의 핵심
리메이크 작품으로서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1>가 갖는 가장 큰 차별점은 통일 직전 한반도라는 배경 설정이다. 사실 김지운 감독의 <인랑>에서도 볼 수 있었던, 통일을 앞두고 혼란에 빠진 한반도라는 설정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런데도 이 설정을 굳이 활용한 것은 해당 내용이 리메이크로서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단지 하회탈이나 한국 전통 악기인 꽹과리, 징 등의 전통적인 사운드가 더해진 배경음악 같은 외적인 요소 외에도 한국적 특성을 녹여내려 한 시도인 것이다.
실제로 이는 강도 행위의 이유, 목적, 상징성과 캐릭터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꾼다. 즉, 드라마는 강도 행위 자체가 아닌 행위자에게 주목한다. 교수가 조폐국 강도를 계획한 이유만 봐도 알 수 있다. 원작에서 교수는 자신의 병원비를 위해 은행 강도를 시도하다가 죽은 아버지의 계획을 물려받는다. 반면에 한국판에서 교수는 디스토피아로 변해가는 통일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목적으로 조폐국에 침입한다. 이는 교수의 과거사가 드러나는 6화부터 올해 하반기에 나올 파트 2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이유기도 하다. 남북 경제협력계획에 참여했던 교수는 자신의 비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과거는 현재 그의 범죄 행각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자신이 주장한 욕망에 의거한 경제 부흥이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대화하자 본인이 직접 이 문제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공론화하는 모습에는 명암이 한 데 존재한다. 덕분에 인질극의 기획자이자 자신의 여자에게 따뜻한 카페 주인이라는 그의 이중성도 더욱 돋보인다.
또한 강도짓이 이처럼 단순히 돈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거시적 안목에서 이루어진다는 서사는 도쿄의 캐릭터성도 바꿔 놓는다. 원작 속 도쿄는 어디로 튈지 모를 감정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캐릭터였지만, 한국판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교수의 계획과 신념에 진심이다. 작중 과거사가 드러난 이들 중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에 크게 다치고 또 실망했기 때문에, 교수의 계획대로 한국 사회에 멋지게 복수하고 싶은 욕망은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다. 이에 더해 생존과 욕구에 충실한 베를린의 역할도 빛난다. 교수와 도쿄가 개인적 욕망을 거시적 안목에서의 욕망과 일치시키는 반면, 북한 수용소에서 폭동 후 탈출한 수배자인 베를린은 개인적 이익에만 충실하다. 그는 사익과 일치될 때에만 교수의 계획을 따르며, 박해수의 연기력이 더해져 그의 악랄함은 더욱 배가된다. 인질들을 남북으로 갈라 치거나 공포심으로 인질을 통제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베를린은 교수와 도쿄의 대척점으로서 모든 에피소드에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변화가 와닿지 않는 이유
이처럼 <종이의 집> 리메이크는 새로운 배경 설정을 통해 첫 화부터 하이스트 장르와 거시적 서사를 결합하는 각색을 시도한다. 문제는 강도 사건의 행위자에 주목한 변화, 그 중심에 위치한 통일 직전의 한반도라는 배경 설정을 세련되게 묘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전반적인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1화에 어설픈 연출이 집중되다 보니 남은 다섯 에피소드 역시 덩달아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다. 먼저 한국 영화의 여러 클리셰가 눈에 띈다. '선수 입장'이라는 워딩만 없을 뿐, 그에 버금가는 "대기들 타시고" 혹은 "오빠, 쓸데없는 짓 하다가 대가리에 빵꾸 나"와 같은 대사는 긴박해야 할 강도 작전의 김을 빼버리는데 일조한다. BTS를 굳이 강조하는 연출은 그들의 인기에 탑승하려는 얕은 술책처럼 보인다. 빈곤을 겪는 여성을 다시 한번 성매매 현장에 빠뜨리는 전개 또한 넷플릭스 작품에게서 기대할 법한 신선한 매력을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중 북한에 대한 묘사가 낡은 화법에 의존한다는 점이 아쉽다. 1화는 북한 사람들이 무조건적으로 남한을 선망하고 남한의 발전된 사회상에 무지할 것처럼 묘사한다. 북한 사람들이 모두 문명과 거리가 멀 것이라는 편견을 담아내며 한국 영화나 드라마 속 북한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작품의 화자이면서 동시에 교수의 계획과 신념을 보충해주는 인물인 도쿄라는 캐릭터의 완성도를 저해한다. 단지 서울말을 쓰기 때문이 아니다. 평생을 지방에서 살았어도 서울에 올라온 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도쿄의 서울말은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그녀가 북한 사람으로서 무시당하지 않고 남한에서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장한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북한 자체를 평면적으로 묘사한 결과 도쿄라는 캐릭터가 교수에게 설득되고, 그를 신뢰하며, 그의 계획을 충실히 이행하는 모습이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그녀는 단순히 한국 문화가 좋아서 남한으로 향했다가 배신당한 후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는 작위적인 서사 안에 갇혀 버린다. 특히 그녀가 교수와 함께 작품의 주제 의식을 책임지는 캐릭터이다 보니 결국 이 문제는 드라마 전반의 완성도까지 하락시킨다. 드라마의 메시지 자체도 덩달아 얕아지기 때문이다.
강도 행위도, 행위자도 잡지 못한 하이스트 장르물
이처럼 강도 사건의 행위자에 주목한 각색이 불완전한 가운데, 심지어 강도 행위 그 자체를 묘사한 장면들도 그리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조폐국 내외에서 벌어지는 인질극의 전개가 원작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스트 장르물은 인물들의 드라마만큼이나 그들이 벌이는 강도 행각 자체를 예상치 못한 장면들로 채워 넣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위기 상황이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있으니 8명의 강도가 벌이는 인질극도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1은 하이스트 장르물이 충족시켜야 할 두 요소를 모두 놓친 것이다.
물론 원작을 보지 않은 입장이라면 충분히 몰입하여 즐길 수 있는 대목이 존재한다. 특히 여론전을 펼치는 부분은 교수의 계획에 내포된 정치적 함의와 맞물려 꽤나 흥미롭다. 파트 1의 후반부에 등장하여 리메이크작이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듯 보이는 거시적 서사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고립된 조폐국 내부에서 인질극의 긴장감을 극도로 높여주는 베를린과 조폐국장의 관계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폐국장 조영민 역을 맡은 박명훈의 생생한 발암 연기 덕분에 악역인 베를린에게 공감하게 되는 아이러니함은 각자의 욕망에 충실해야 하는 작중 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대목들도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1을 구해내지는 못한다.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볼 수 있게 하는 응급처치는 될지언정, 이미 장르물로서 차포를 다 뗀 하이스트 드라마를 소생시킬 힘까지는 없다.
물론 이 작품이 엄연히 '파트 1'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6화는 파트 1과 2를 나눌 분기점에 불과하며, 작중 조폐국 강도 사건과 인질극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을 한 작품으로 본다면 파트 1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중 발단과 전개 혹은 발단과 전개 및 위기의 일부까지만 보여준 채로 끝난 것이다. 따라서 파트 1의 정확한 평가는 파트 2가 공개된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장윤주의 '나이로비'가 대표적이다. 예고편에서부터 부자연스러운 스타일링과 대사를 지적받은 나이로비 캐릭터는 사실 캐릭터에 대한 설명 자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매 에피소드마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과거사가 부각되는 만큼, 이 문제는 충분히 파트 2에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가기 위한 중간다리에 불과했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영화 자체의 완성도 덕분에 호평을 받은 것을 보면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1을 향한 비판은 충분히 일리 있다. 조폐국과 주변 경관의 CG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거나, 조폐국 내부도 세트장 티가 많이 나는 것,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일관성 있게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인상만으로도 드라마의 부족한 완성도는 감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파트 2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지적할 수 있는 확실한 문제다. 그렇기에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1을 보고 나서 실망감은 쉬이 감춰지지 않는다. 단지 리메이크 작품으로서 시도된 각색의 방향성으로부터 파트 2가 보완하고 또 온전히 완성할 한 편의 드라마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P(Poor, 형편없음)
야심한 목표와 허술한 계획의 만남. 파트 2에서의 업데이트를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