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2022-05-14 09:37:10
빛바랜 프랑스 파리…사랑과 자유가 번뜩인다
[리뷰] 12일 개봉 <파리, 13구>
12일 개봉한 <파리, 13구>(감독 자크 오디아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흑백의 파리와 섹스였다. 시작부터 끝까지 흑백으로 펼쳐지는 스크린 속 파리에게서 화려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영화의 시작. 성냥개비 모양의 아파트처럼 각 잡힌 건축물이 규칙적으로 배치된 모습이 등장한다. 감정적으로 메마른 파리의 단면이다. 그렇게 파리 13구의 겉모습은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그 도시 속 남녀 주인공들은 분주하게 사랑을 찾아 헤매고 섹스를 반복한다. 섹스 장면이 많이 나온다. 빛바랜 도시에서 펼쳐지는 진한 섹스라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낯선 두 조합은 스크린을 긴장하게 하며 동시에 요동치게 한다. 105분의 러닝 타임이 지났을 때쯤 관객은 각자 어떤 진한 색을 떠올린다.
에밀리(루시 장)는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온 남자 카미유(마키타 삼바)와 함께 살게 된다. 타인과 관계 맺는데 서툰 에밀리는 카미유가 맘에 들었지만 좋은 관계로 발전하진 않는다. 카미유는 스트레스를 섹스로 푸는 스타일이다. 대학생 노라(노에미 메를랑)는 포르노 배우 앰버 스위트(제니 베스)를 닮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또래들의 놀림감이 된다. 그러던 노라는 카미유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어딘가 해소되지 않는 느낌이다. 노라는 앰버의 유로 채팅 사이트에 접속해 말을 건다.
네 주인공은 자석처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달콤한 사랑은 짧고 외로움과 투덜거림은 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외롭지 않다. 어느 순간 강렬한 빛으로 울렁거리기 때문이다. 이 넷은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마음이 가는 데로 움직이고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상대를 있는 힘껏 헐뜯기도 했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도 했다. 아지랑이처럼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감정의 선들이 막 피어오른다. 그 선들은 다정한 종착지를 향해 조금씩 내닫는다. 그때쯤 알게 된다. 우리의 파리는 여전히 빛바래지 않았고 실제로는 여러 빛깔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그곳의 젊은이들은 생기 있게 살아간다.
이 영화가 좋았다. 늘 조심스러워하는 나에 비해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감정적으로 미성숙한 듯 성숙해 보여서다.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직선으로 내리꽂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래 본적이 사실 거의 없다. 늘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조심스러웠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도 그랬다. 언제나 나를 적당히 드러내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럽다는 건 상대를 배려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해소되지 못한 찜찜함이 남는 일이기도 했다. 때로는 관계가 틀어질 지경이 되어도 에밀리나 카미유처럼 속 시원하게 내뱉지 못했다. 그래서 이 지독하고 때로는 배려가 전혀 없는 이 관계들이 참 반듯하게 보였다. 멋진 주인공들의 멋진 부딪힘으로 기억될, 그런 영화였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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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은 없다
내용 소개
미국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보스턴 글로브 내 ‘스포트라이트’팀은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한다. 하지만 사건을 파헤치려 할수록 더욱 굳건히 닫히는 진실의 장벽. 결코 좌절할 수 없었던 끈질긴 ‘스포트라이트’팀은 추적을 멈추지 않고, 마침내 성스러운 이름 속에 감춰졌던 사제들의 얼굴이 드러나는데… ‘스포트라이트’팀이 추적한 충격적인 스캔들이 밝혀진다!
출처-네이버 영화검색
1. 선의를 가장한 추악함의 아이러니
종교의 이념은 선하다. 하지만 종교는 언제나 선하지 만은 않다. 선함도 권력을 가지면 변질되기 마련이다. 크리스천의 추악함이 수많은 역사의 한 순간들이 증명한 바 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의 이념은 세기에 걸쳐 살아남았다. 그만큼 천국이라는 공간은 나약한 인간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인가보다. 역사 속 크리스천들의 추악한 죄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게 비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게들 천국이라는 곳을 가고 싶을까.
그러고 보면, 죄를 사한다는 말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합리화 아닐까. 자신의 잘못을 사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은 뻔뻔해질 권리가 있다는 듯이.
2. 폐쇄성이 주는 안정감의 모순
그들에게 선함을 전파하는 이(사제)가 추악한 괴물임을 인지했을 때의 피해자들은 침묵을 선택했다. 과연 그들의 침묵은 누굴 위해 행해진 걸까.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들은 피해자이지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전을 선택했다. 보스턴이라늗 동네, 미국 내에서 알아주는 폐쇄적인 동네이기에 피해자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안정적인 동네일수록 폐쇄성은 짙어진다. 그들이 최고로 치는 안정을 지키기 위해 가끔 불행은 은폐된다. 그렇게 안정을 외치는 집단은 조금씩 곪아간다.
안정적인 동네는 비관적으로 보면, 내 이야기는 없고, 남말만 넘쳐나는 공간일 수도 있다. 내 이야기를 오픈해보았자, 그 이야기는 소문이라는 형태로 다시 날 공격할 수 있어서 내 이야기를 오픈하는 대신 남말을 하면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다.
3. 난 왜 이 영화가 와닿았을까
시골 동네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보스턴은 시골 동네라고 볼 순 없지만 보수적인 동네인 점은 세계 어느 시골 동네와 다르지 않을 테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고, 학대하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에요.
내 고향이 안정적인 동네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오신 분들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 분들은 알고 계셨을까. 당신들이 자랑하는 안정성이라는 이름의 폐쇄가 누군가의 마음을 곪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떤 권력의 남용을 용인하고 있을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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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뒤섞인 난맥상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법정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승패를 가리는 장소라고 믿으며 각종 꼼수와 편법에 능통한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그는 감옥에서 암에 걸린 아버지의 가석방을 약속받자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 대령의 변호를 맡기로 결정한다.
군인 신분 때문에 재판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는 박태주. 하지만 그는 변호인에게 쉽사리 협조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인 그의 눈에 정인후는 양아치니까. 그가 내란을 사전에 공모했는지, 아니면 위압에 의해 명령을 따랐는지가 재판의 쟁점인 가운데 박태주는 거짓 혹은 편법 증언을 요구하는 정인후와 거듭 부딪힌다.
한편, 10.26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어 권력을 잡겠다는 야욕을 품은 합수부장 '전상두'(유재명). 박 대령 재판을 자기 발판으로 삼기로 결정한 그는 실시간으로 재판관에게 쪽지를 전달하고 재판을 도청 및 녹음하며 정인후의 노력을 물거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무위에 그친 역발상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경호원들은 박정희 대통령 외 5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의 재판을 다룬 <행복의 나라>는 시간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어중간하다. 사건의 전후사정이 이미 영화화돼 대성공을 거뒀기 때문.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의 동기를, <서울의 봄>은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을 영화화했다. 심지어 둘은 장르도 달랐다. 전자는 누아르를, 후자는 전쟁 영화의 속성을 강조했다.
이에 <광해, 왕이 된 남자>와 <7년의 밤>을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역발상을 했다. 10.26 사태나 주동자인 김재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은 공범 박흥주 육군 대령과 그를 변호한 태윤기 변호사에게 주목했다. 특히 그들의 인생사를 각색해 극명하게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게 되는 과정을 법정물로 포장해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행복의 나라>는 역발상의 힘을 스스로 포기했다. 신념과 규칙에 충실한 삶 대 생존을 위해 유연해야 하는 삶이라는 대립 구도를 깊게 파고드는 대신 쉬운 길을 간다. 무조건적인 악역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워 스케일을 키우고 군사 정권과 민주 시민의 대립을 강조한다. 문제는 같은 이야기로 천만이 넘는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 선배들이 있다는 것. 결국 노선을 바꾼 순간 <행복의 나라>는 자기 자리를 잃고 말았다.
거대한 사건 속 개인적인 이야기
장르만 놓고 보면 <행복의 나라>는 <변호인>과 비슷해 보인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법정물이니까. 하지만 두 영화의 지향점은 전혀 다르다. <변호인>은 분노를 연료로 삼아 달리는 작품이었다. 무고한 피고인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그에 맞서는 변호인의 투쟁. 이 명확한 선악 구도에 송강호라는 배우의 연기력을 더하니 마치 들끓는 불과도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행복의 나라>는 다르다. 선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성이 핵심이다.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두 주인공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인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을 꿈꾸며 판검사가 되려다가 실패한 변호사다. 법정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곳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곳이라는 대사에는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박태주 대령이 앉아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인데도 판자촌에 집이 있을 정도로 청렴한 군인이다. 요직에 있지만 권력을 마다하고 최전방 전출을 거듭 요청한 참군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10.26 사태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두 삶을 충돌시킨다. 배경은 대한민국의 향배를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지만, 정작 내용은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감독의 전작인 <광해, 왕이 된 남자>와도 유사하다. <광해>도 중심 사건은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극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된 내용은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충(忠)으로 무장한 유학자 '허균'(류승룡)이 광해군으로 위장한 광대 '하선'(이병헌)과 지내면서 자기 신념과 사상의 문제를 깨닫고 새 나라와 새로운 왕을 꿈꾸게 되는 티키타카야말로 천만 관객을 휘어잡은 원동력이었다. <행복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두 인생의 충돌로 빚은 법정극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신념을 지녔다 보니 정인후와 박태주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정인후는 철저한 원칙주의자 군인 박태주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관등성명, 상명하복이 권위주의의 발현에 불과하다며 비웃는 사람이니까. 박태주도 다르지 않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법정에서 온갖 편법을 써가며 승리를 추구하고, 정의가 아니라 돈과 이익을 위해 변호를 맡는 정인후는 단지 변호사일 뿐, 신뢰할만한 변호인이 아니다.
1차 공판만 해도 정인후는 자기 의도대로 재판에 임한다. 군인이니 군법에 따라 단심제 군사 재판을 받겠다는 박태주. 정인후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군사 재판은 받지만, 단심제는 3심제로 바꿔달라며 위헌심사요청을 한다. 위헌심사요청이 기각되자 재판관을 교체해 달라며 재판을 여론 싸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2차 공판부터는 다르다. 정인후는 점차 피고인의 입장과 신념이 녹아든 전략을 수립한다. 군인에게 명령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저 명령을 따른 박태주의 책임을 부정하는 식이다. 대통령을 살해한 후 정보부가 아니라 육군본부로 가자는 의견을 박태주가 냈다는 진술에 착안해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태주도 정인후를 만나 변한다.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재판을 포기하려던 그. 그는 군인이고 원칙주의자면 규칙대로 재판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서 책임을 지라는 정인후의 일갈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는 법정극 특유의 쾌감으로 이어진다. 감정 호소로 일관한 <변호인>과 달리 <행복의 나라> 속 재판씬은 판세가 거듭 뒤집히다 보니 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에 더해 흐름을 가져오려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변호인과 피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 팀이 되는 이야기가 병행되니 복합적인 재미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인권변호사가 되어가는 정인후를 보면서 박 대령이 웃음과 하이파이브로 화답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익숙한 맛으로 돌파하는 고구마
정인후와 박태주가 한 팀이 되어가는 과정은 자칫 고구마일 수 있다. 비록 역사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나, 박태주라는 캐릭터가 다소 과하게 올곧은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 자기는 죽고, 아내와 두 아이만 남아 험난하게 살아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 신념을 좀처럼 꺾지 못한다. 상관도 못 버리고, 명령에 충실한 군인이라는 자부심도 저버리지 못하고, 대통령을 살해했지만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도 내려놓지 못한다.
추창민 감독은 고구마를 익숙한 맛으로 뚫어버린다. 정인후의 아버지와 박 대령을 겹쳐 보이게 한다. 개척 교회 목사로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돕다가 수감되고, 가족을 돌보지 못한 아버지. 정인후는 자기 신념대로 살아야 하는 아버지를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가슴으로 이해해 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가 박태주를 만나는 장면과 이어진다. 그 덕분에 자칫 답답할 뻔한 전개는 가족애로 변환되어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다소 양식적인 스토리텔링이기는 하다.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통해 시대적 사건에 접근하면서 특히 감정선을 자극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유발하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화법이니까. 야매 변호사였다가 사건을 맡은 후 진정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는 정인후나 <변호인>의 송우석이나 다를 바 없다. 또 정인후와 아버지의 관계성도 이러한 맥락에서는 신파를 의도한 구조 배치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욕과 함께 무너지다
하지만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나라>는 이내 본연의 색을 잃는다. 의외로 초중반부까지 이 작품은 10.26 사태의 배경이나 실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김재규의 결단 정도로 언급할 뿐이다. 애초에 핵심 플롯 자체가 정인후와 박태주 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이는 의도적인 공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12.12 군사반란을 필두로 실제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역사적 맥락의 공백이 서서히 두드러지면서 영화의 만듦새도 무너진다. 배경이어야 할 사건이 돌연 주인공이 되다 보니 묻어 두었던 의문점이 한 번에 터져 나오기 때문. 일례로 중반부까지만 해도 매력적이었던 입체적인 인물상은 중심점을 잃고 흩어진다. 정인후의 경우 단지 박태주를 살리려는지 민주주의 투사가 되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박태주도 명령에 의한 피해자인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투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가 청렴한 군인이고 신념에 맞는 명령을 따랐으니 민주주의 투사로 여겨야 하는지, 군사 정권에 협력한 군인을 살리는 게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10.26 사태의 본질과 맥락을 외면한 채로 시작한 미시적인 이야기를 무리하게 거시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장르적으로도 균형을 잃는다.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서울의 봄>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서울의 봄>처럼 쿠데타 과정을 자세하거나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10.26 사태는 지우고 12.12 군사 반란을 부각한 선택은 법정극이라는 장점도 희석시키고, <행복의 나라>만의 개성을 깎아먹는 악수가 되고 만다.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지막으로는 극 중 전상두, 곧 전두환을 다루는 방식도 <서울의 봄>과 비교를 피할 수 없다. 황정민의 전두광과는 달리 유재명의 전상두는 상대적으로 일차원적이다. 전자는 들끓는 성공욕,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보스 기질, 위기 때마다 빛나는 간교함이 어우러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반면에 전상두는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절대악으로만 묘사된다.
그 결과 전상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영화는 편의적으로 느껴진다. 전두환이 의문의 여지없는 악역이기는 하나, 그를 덮어두고 비난하면 메시지가 뻔해지고 재미도 덜해지기 때문. 정인후가 전상두 면전에서 욕을 하는 골프장 시퀀스가 통쾌하거나 희열이 느껴지는 대신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슈퍼맨처럼 압도적인 힘을 지닌 히어로를 잘못 활용해 액션의 긴장감과 쾌감을 모두 놓친 <저스티스 리그>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행복의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유독 짙다. 악명 높은 한 인물 대신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의 서사에 우직하게 집중했다면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이전 시대극들과는 또 다른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조정석과 이선균,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두 주연의 연기도 함께 빛이 바래기에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시대의 그림자에 가려진 개인을 비추기에는 조명이 너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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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적 사랑 이야기라고만 하기엔,
넷플릭스 인공지능 님께서 안보겠다고 무시하는 나를 무시하고, 꾸준히 추천해주던 드라마가 있었다. 사실 넷플릭스에 포진해있는 중국드라마는 너무 터무니없는 설정에 로맨스 부어버리기가 주요 플롯인 드라마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왜 넷플릭스는 나에게 보지도 않을 드라마를 추천하는지 너무 짜증이 나려던 찰나에 하다하다 유튜브까지 이 드라마를 추천하기에 도대체 뭔데? 하며 짜증스레 시도한 이 드라마, 굉장히 흡입력 있었다. 이쯤되면, 인공지능 정말로 무섭다. 내 취향을 정말 잘 파악하는구나, 이녀석......
상견니, 한국어로 해석하면, "널 보고 싶어" 인만큼 이 드라마는 로맨스다. 내 글을 한 번 이상 읽어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나는 로맨스를 정말 못본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특별한 특징이 없이 멜로이기만 한, 드라마는 못본다. 이것은 드라마의 웰메이드 여부를 떠나, 내 성격의 지랄맞음 때문이며, 드라마에서 오글거리는 장면을 단 10초도 못 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일례로, 현재 내 친구들, 지인들은 모두 보고 있는 갯마을 차차차는 친구들의 권유로 8화까지 억지로 보다가 포기했다. 와, 김선호 배우를 꽤 오랫동안 좋아했음에도 로맨스의 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친구들이 정말 아까워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우선 첫 째, 이 드라마가 타임루프물이기 때문이었고, 일종의 추리물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범인을 찾고, 그 범인의 행동을 유추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추리물 덕후이기에 가능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만큼 주인공들의 로맨스 감정을 덜 부담스러워하면서 따라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드라마의 스릴러적인 요소들이 한 몫 했다.
따라서 내가 이 드라마를 추천하는 것은 많은 이들의 동의를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이 드라마의 인물들 간의 로맨스 기류 때문에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본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 같고, 나같이 스릴러 부분에 집중해서 본 사람은 크게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1. 운명론적 로맨스 클리셰의 변주
이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난 우리 나라의 드라마가 있었다. 찾아보니, 무려 2013년작이었던 드라마 '나인'이다. 두 드라마의 공통점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시나리오라는 점이다. 하지만 상견니에서 시간 여행을 하는 매개체는 음악이지만 나인에서는 주인공이 향을 피우면,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이었던 만큼 그 매개체가 향이었다.
시간여행을 하는 매개체가 음악이든 향이든 결국 이 드라마의 로맨스 장르적 요소를 극화시키는 부분들이다. '다음 생에, 다른 시간에 존재해도 이 세상에 내 짝은 온리원 너 하나'라는 타임루프적 세계관은 운명론적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현 시점에서도 많이 익숙한 플롯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도 굉장히 특이한 드라마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운명론적 사랑을 논하는 클리셰가 참 많다.
하지만 클리셰에는 수많은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약간의 변주를 꾀한 부분이 있다면, 도플갱어의 존재였다. 천윈루와 황위쉬안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성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상황이어도 인격이 천윈루냐 황위쉬안이냐에 따라서 상황이 달리 흘러갈 수 있는 긴장감을 조성하기 때문에 같은 몸을 두 인격이 공유한다는 설정이 이 드라마를 비단 운명론적인 클리셰에 갇히지 않게, 덜 진부하게 만드는 포인트였다고 생각한다.
2. 천윈루를 죽인 것은 사람일까, 마음일까
세대는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다른 인격이 있다는 설정이 이 드라마의 또다른 흥미 요소인 이유는 각기 다른 인격은 각기 다른 주체적인 행동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에서는 같은 얼굴로 태어났지만 상반된 두 여자, 황위쉬안과 천윈루가 등장한다. 황위쉬안은 인기도 많고, 사회성도 좋은 커리어우먼이지만 천윈루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에서도 친구 없이 자발적 왕따로 살아가는 컴플렉스 덩어리이다. 그런데 황위쉬안이 천윈루의 몸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아지고, 자신이 좋아하던 리쯔웨이의 사랑을 받는 황위쉬안의 모습을 보면서 어딘지 모를 공간에 갇혀있던 천위루의 정신은 황위쉬안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자괴감을 느낀다. 드라마를 꾸준히 보면서 천윈루가 황위쉬안을 비교하는 데에서 온 자괴감이 결국 언젠가 큰 사단을 낼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만드는데, 그렇다면, 그 자괴감이 천윈루를 죽인 것인지, 아니면 그 자괴감과 상관없이 그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인지 궁금증을 끝까지 자아낸다. 바로 이 부분이 내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된 내용적 요소였다.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것은 세상에게 실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기대가 많기 때문이란 걸
이 드라마를 시공간을 뛰어넘은 운명적 사랑 이야기로만 보지 않은 나에게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궁극적 메시지는 시공간을 뛰어넘은 운명적인 사랑의 구현이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한 여학생의 삶에 대한 관점 바꾸기 프로젝트의 실현이라고 생각했다. 천윈루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천윈루 자체로도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천윈루 내면의 삐뚤어진 시선을 자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시선을 지적하고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이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만으로도 천윈루는 더 이상 우울의 터널 깊숙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윈루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것보다 이런 황위쉬안과 천윈루 사이의 관계성은 모든 캐릭터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드러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작가는 황위쉬안의 몸과 정신을 빌려, 한 인간의 불안한 청춘의 삶을 응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3. 총평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의 주요 로맨스가 열린 결말로 끝나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도 열린 결말이다 보니, 우리가 드라마 상에서 봐온 로맨스 씬들이 결국 의미없는 씬들로 소비되고, 내 눈앞에서 주인공들이 꽁냥대는 실체적 로맨스가 없으니, 허탈해서 그런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나는 주요 커플의 로맨스가 끝난 것이 아니고, 내 눈앞에서 이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아도 모든 캐릭터들이 행복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다시 만나 사랑할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긍정적이지 않나 생각했다. 많은 관객들이 바라는 것처럼 주요 인물들의 사랑에는 천윈루의 죽음과 모쥔제의 죽음과 같은 크나큰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모쥔제까지 포함된 세 사람의 우정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보다는 미래에 새로운 사랑을 그려나갈 그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렇게 정리했다. 그렇게 크나큰 희생을 감수해야할 만큼 대단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드라마의 마지막 오토바이씬에서처럼 결국 이들은 어떻게든지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할 것이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넌지시 던져준 결말이 덜 슬퍼서 좋았다.
난 이게 문제다. 모든 사람들이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현실은 그럴 수가 없으니, 영화에서조차 모든 이들의 공평한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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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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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The Last Duel, 2021)
개봉일 : 2021.10.20. (한국 기준)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해리엇 월터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프로메테우스>, <마션>, <바디 오브 라이즈>의 감독으로 유명한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과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등 짱짱한 배우 라인업을 보고 개봉날만을 기다린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편의상 <라스트 듀얼>과 혼용 표기)
<마션>에 이은 리들리 스콧 감독과 맷 데이먼의 만남, 그리고 <스타워즈>를 통해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어 버린 배우 아담 드라이버와 최근 <프리가이>로 눈에 들어온 조디 코머, <나를 찾아줘>를 통해 알게 된, 항상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배우 벤 애플렉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라니. 그것도 시대극?! 얼마나 멋진 작품이 나올까 잔뜩 기대했다.
<듄>과 <베놈> 같은 대중적이고 커다란 작품들에 밀려 개봉 전부터 상영관 배정이 많이 부족해 보여 크고 좋은 관에서 보긴 그른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기에 개봉 전에라도 미리 보자며 프리미어 상영을 다녀왔다. 심지어 <라스트 듀얼>을 보려고 평소 팔자에도 없던 중세 시대와 봉건 제도에 대해 나름 공부까지 하고 갔다. (이 부분은 이동진 평론가님의 영상을 통해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라스트 듀얼>은 근세(1500년)가 시작되기 전, 1000년 정도에 이른, 아주 길었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극 중 배경은 중세 시대 중에서도 유럽에 창궐한 흑사병이 진정된 지 얼마 안 된 혼란한 시기였으며, 그 혼란함을 추스를 후세를 낳기 위해 주인공인 장이 두 번째 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장의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가 장의 절친 자크에게 겁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영주와 왕은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 각자의 억울함과 분노를 표하던 장과 자크는 마지막 재판 방법인 결투 재판을 신청하게 된다.
잘잘못을 따질 수 없을 때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됐던 결투 재판은 재판장에서 내리지 못한 결론을 하늘이 내려줄 거라, 하늘이 선한 자를 살려줄 거라 믿으며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재판이다. 말이 좋아 재판이지 사실 야만적이고 처절한 결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지배계급 사이의 주종 관계가 확연하게 정립되는 봉건 제도가 있던 시기이자 하늘과 신의 존재를 받들며 온 국민에게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던 그 시기에 전투 재판은 하늘의 뜻을 묻는 정당한 재판에 속했다.
영화의 제목이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인 이유는 영화 속 인물들이 벌이는 결투가 실제 프랑스에서 행해진 마지막 전투 재판이기 때문이다. 봉건 제도의 몰락과 왕권의 확립,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믿음에 앞서 합리적인 부분을 먼저 찾기 시작한 사회와 인식의 변화와 일어나기 시작했고, 지독하게 처절했던 이 마지막 결투의 영향으로 전투 재판 제도는 사라졌다고 한다. <라스트 듀얼>은 마지막 전투 재판의 기록을 인용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라스트 듀얼>은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권력과 자존심 다툼을 하는 두 남성의 까칠한 민낯을 보여주며 그 사이에서 용기를 내 무고함을 소리치는 여성의 시선을 함께 담아낸다. 겉으로 보면 한 여성을 둘러싼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두 남성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 정도의 느낌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실상은 다르다.
영화는 장, 자크 두 남성의 시선과 사건의 중심에 있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나눠 진행된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 아내는 남편의 재산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상이 박혀있던 그 시기에 살아온 장과 자크는 마르그리트를 지키거나 그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결투 재판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나의 소유물을 건든 자를,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자를 심판하기 위해 나의 운명을, 내 소유물인 아내의 운명을 함께 건 것이다. 아내는 물론 선택권이 없다.
하나의 사건을 둔 세 사람의 시선은 모두 다르다. 특히 유일한 여성인 마르그리트의 시선은 이 사건을 다르게 보고 있다. 영화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통해 그 시절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잔인할 만큼 투명하게 보여준다.
불합리와 야만의 시대에서 여성은 아내의 도리를 다해야 했고, 집안에 틀어박혀 식모 살이와 온갖 수모를 견뎌야 했고, 아이를 잉태하는 수단에 불과한 취급을 받아야 했다. 모든 여성들이 포기하며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마르그리트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남편 장에게 호소한다.
나는 마르그리트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다른 분위기이긴 하지만 마르그리트를 보며 올해 7월에 개봉했던 <오필리아>의 주인공, 오필리아가 떠오르기도 했다. 남성이 절대적이었던 사회에서 일어난 남성들의 권력 싸움과 여러 사건 뒤에 묻혀있던 여성 주인공, 그리고 그들의 시선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담아낸 두 영화의 모습이 얼핏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 개의 시선에 따라 정의롭던 사람이 강압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희대의 바람둥이가 순수한 사랑에 미쳐버린 청년으로 변하고, 무고한 여성의 외침이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사건의 진실은 신이 내려줄 수 있는 것인가. 왜 여성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는 건 남성뿐인가, 그리고 무고함에 박수받는 것 또한 왜 남성인 것인가.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보는 내내 불편함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속이 답답할 정도로 불편했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굉장히 높다. 중세 시대를 충실하게 복원해낸 세트와 의상, 미술,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지만 그 긴 시간마저도 완벽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관객을 끌어당기는 배우들의 힘. 그리고 각자의 시선을 따라 조금씩 비틀어낸 카메라의 시선. 같은 사건을 3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 같은 시간을 3번 반복해 보는 일인데, 그럼에도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던 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라스트 듀얼>이라는 영화의 제목만 보고 중세 시대의 웅장한 전투를 기대한다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인물들의 위엄을 보여주는 짧은 전투 장면과 두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마지막 결투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두 사람의 결투는 충분히 처절했고, 단시간에 나를 압도했다. 하지만 그 결투 뒤에 숨겨진 진실들은 끝까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라스트 듀얼 시놉시스
부조리한 권력과 야만의 시대, 14세기 프랑스. 유서 깊은 ‘카루주’ 가의 부인 ‘마르그리트’는 남편 ‘장’이 집을 비운 사이, 불시에 들이닥친 ‘장’의 친구 ‘자크’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자크’는 ‘마르그리트’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감내해야 할 불명예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자크’의 죄를 고발한다. 권력을 등에 업은 ‘자크’는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장’은 승리하는 사람이 곧 정의로 판정 받게 되는 결투 재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장’이 결투에서 패할 경우, ‘마르그리트’는 즉시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는데… 단 한번의 결투가 세 사람의 운명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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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건과 세 개의 시선
세 사람을 둘러싼 사건은 여러 가지가 아닌 단 하나다. 하지만 세 사람은 모두 다른 시선으로 사건을 보고 있다.
장은 영주의 눈에 든 자크가 목숨을 살려준 자신과의 우정을 배신하고 아첨을 반복하며 권력을 얻은 놈이라 생각한다. 장은 자크가 아내 마르그리트의 결혼 지참금이었던 땅을 빼앗고, 나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예정이었던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며 무지향성으로 분노를 터트린다.
1장, 장의 시선으로 보면 자크는 분명 아첨꾼이자 배신자가 맞지만 자크의 시선으로 본 순간들은 사뭇 다르다. 자크가 난봉꾼인 건 맞지만, 그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다. 리모주 전투에서 다른 병사들이 장의 뒤를 따르지 않을 때, 가장 먼저 장을 뒤따라가야 한다고 선봉에 선 사람은 자크였고, 자크는 영주에게 장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한다. 자크는 권력을 얻으려고 영주와 함께 어울리긴 하지만, 꼭 장을 배신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성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 권력
하지만 막강한 권력 앞에서 두 인물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우정과 이성을 가볍게 내버린다. 장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옳음 따윈 없어. 사내들의 권력만 존재하는 거야.”
장은 영주에게 인정받고, 좋은 땅을 받고, 본인 대신에 성을 물려받게 된 자크에게 분노와 열등감을 느낀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기로 했던 진짜 주인은 나인데,.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이 없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오가고 있는데, 기사 집안도 아니었던 친구 놈이 성에서 잘 놀고먹고 있다니. 앞서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입은 장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거다.
그래서 장은 자크를 이길 유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버지처럼 기사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전쟁을 끝마치고 영주에게 보고를 하러 간 자리에서 장은 자신을 가볍게 부르는 자크에게 자신은 이제 기사니 존칭(Sir)을 하라고 명령한다. 자크는 공격적으로 나오는 장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우선 그가 기사인 것은 맞으니 존칭을 붙여 대답한다.
기사가 되어 존칭을 받음으로써 이제 자크를 이긴 걸까 싶었는데, 장이 다시 분노할 일이 생긴다. 자크가 자신의 아내 마르그리트를 겁탈한 것이다. 아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나의 후세를 낳아줄 값진 암말, 나의 소유물을 말이다. 장은 마르그리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보다 자크를 벌하는 것에 더 열을 내며 마지막 전투 재판까지 참여한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장이 결투에서 지면 화형에 처해질 운명을 부여받고, 두 남성이 자유롭게 칼을 휘두를 동안 발목이 묶인 채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본다. 남성들의 권력싸움 앞에서 여성이었던 마르그리트는 무력하게 묶여 그들의 싸움에 희생되고 있을 뿐이었다.
여성을 부조리한 시선으로 바라본 남성들
중세 시대 여성들은 인권을 존중받지 못한다. 사회적 지위가 없기에 남편 없이는 재판을 열 수 없었고, 여성은 무슨 일을 당하든 입을 열 수 없었으며 후세를 잇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 또는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른 집안에 보내지는 뇌물 정도로 인식된다. 여성은 그저 남편, 남성의 권력과 욕망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자 소유물일 뿐이다.
영화의 초반, 장의 시선으로 본 장의 모습은 마치 아내를 아껴 재판까지 참여한 꽤 멀쩡한 남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본 장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사건을 알게 된 순간엔 마치 자신의 물건을 뺏겨 화가 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아내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기보단 “나의 소유물을 건드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내거를 가져가려고 해?” 이런 마음과 비슷한 분노였다. 장은 마르그리트의 말을 듣자마자 “그놈은 왜!”라고 소리치며 나의 소유물을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는 듯 마르그리트를 침대에 눕힌다.
여성 편력이 굉장하다고 소문난 자크 또한 여성을 육욕의 대상으로만 인지한다. 그는 축하파티 자리에서 처음으로 본 마르그리트의 미모에 홀려 혼자만의 착각에 빠진다. 욕심내면 안된다는 부하의 말에 자크는 “나를 향한 저 눈빛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박하며 일방적이고 사랑, 사랑보단 폭력에 가까운 욕망을 키워간다. 자크는 재판장에 서서도 끝까지 그것은 강제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마르그리트 또한 자신을 사랑했다고, 사랑에 빠진 것이 죄는 아니라고 소리친다.
거기에 얹어지는 남성 법조인들의 수치스러운 질문 퍼레이드를 보며 어이가 없다 못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이 시대는 대체 얼마나 야만적이고 지저분했던 걸까. 중세 시대라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위엄과 무게감 따위가 모두 사라져버리는 장면이었다.
우리에 갇힌 암말과 같은 여성의 지위
영화의 세 번째 시선, 드디어 마르그리트의 시선이다. 마르그리트는 국가적 배신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아버지의 딸이다. 나름 돈도 많고 괜찮은 집안이었지만 배신자 딱지가 붙자 아무도 마르그리트의 집안과 연을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마르그리트와 혼인을 약속한 건 바로 장이었다.
흑사병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장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 명성과 집안을 이어줄 후세를 낳는 일이었다. 장은 마르그리트 집안의 돈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젊은 마르그리트의 몸을 이용하기 위해 마르그리트를 아내로 맞이한다.
장은 수차례 관계 후에도 임신이 되지 않는 마르그리트를 보며 첫 아내와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며 마르그리트를 압박한다. 장의 어머니 또한 아내의 의무를 다하라고, 여성은 겁탈을 당해도 아무 말 없이 집안에 있는 거라고 다그친다. 마르그리트의 친구 마리 또한 결혼의 무게감을 느끼며, 여성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 사회가 말하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모두 희생한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려던 여성, 마르그리트
마르그리트는 장이 꽁꽁 묶어둔 그의 번식용 값진 암말을 보며 자신 또한 그 암말의 존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혼 후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고립된 상태로 살아온 마르그리트는 장이 긴 전투를 떠나고 스스로 집안일을 처리하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새하얀 얼굴이 아닌 조금은 탄 얼굴, 하인인 알리스는 얼굴이 타지 않았냐고 묻는 마르그리트에게 “얼굴에 색이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죠.”라고 답한다. 스스로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마르그리트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남성들의 욕망을 채워줄 도구 따위가 아니다.
여성의 침묵의 대가는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뿐이고, 만일 침묵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장도 친구 마리도, 마르그리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모두가 마르그리트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욕하며 자크의 편을 든다. 하지만 마르그리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장의 어머니는 자신도 겁탈을 당했지만 꾹 참고 견뎌 겨우 살아있다고, 재판을 진행하지 말라며 마르그리트를 말린다.
부조리한 일을 겪었음에도 여성은 침묵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찬스를 얻는 것뿐이다. 삶을 영위한다는 건 고귀한 일이지만, 여성은 그저 살아있을 뿐, 명예, 지위, 돈 같은 것들을 절대 탐할 수 없는 아이를 낳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마르그리트가 침묵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마르그리트는 장과 자크의 결투 재판에 끼인 채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고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 그것도 자신의 손이 아닌 장의 손에 쥐어진 자신의 목숨을 반강제로 걸게 된다.
피 튀기는 마지막 결투
사실 점점 더 처절해져가는 결투를 보며 장과 자크 두 사람이 다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두 인물이 모두 미웠으니까. 하지만 발목이 묶인 채 결투를 지켜보는 마르그리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장을 조금은 응원했던 것 같다.
처음엔 말을 타고 꼿꼿한 자세로 시작된 두 사람의 싸움은 점점 처절하게 변한다. 장과 자크는 말의 죽음과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이내 괴성을 내며 무기를 휘두른다. 긴 창에서 도끼, 검, 그리고 단검까지. 두 사람의 거리가 짧아질수록 싸움은 더 치열하고 본능적인 모양새로 바뀐다. 장과 자크, 두 사람은 본인의 권력을 위해 한 명이 죽을 때까지 미친 듯이 싸운다.
신의 손, 신의 심판인 결투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건 결국 남성이었다.
신의 손,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결투 재판이지만 사실 결투 재판은 싸움을 하는 남성이 언제 지치느냐, 언제 죽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남성들에 의해 내려지는 이 재판은 사회에서 남성이 가진 절대적인 힘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만든다.
남성들의 힘이 모든 걸 결정하는 그 결투에 자신의 목숨마저 걸라니. 마르그리트는 장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그대로 쥐여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말한다.
“이게(아이를 낳는 것) 내 삶이었어요.”
“엄마에게 정의가 필요한 것보다 더,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해요.”
마르그리트는 이러한 재판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재판은 과연 누굴 위한 재판이며 이 재판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은 제대로 된 것이었을까?
장이 결투에서 승리하고 마르그리트의 발목에 묶여있던 족쇄가 풀리지만 세상은 여전히 마르그리트가 아닌 신의 재판에서 승리한 장에게 집중하고 박수를 보낸다. 누구도 마르그리트의 무고함엔 관심이 없다. 이게 바로 그 시대의 진정한 민낯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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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진짜로 봐야 할 건...
돈 룩 업
줄거리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와 그의 담당 교수 랜들.
이들은 여느 때처럼 관측을 하다가 엄청난 크기의 혜성이 지구로 날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고에 보고를 거쳐 소식은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지만, 대통령은 별것 아니라는 듯 그들을 집무실에서 내보낸다.
결국 이 급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토크쇼까지 나가게 되지만,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인기 스타의 스캔들뿐.
대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을까?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로 봐야 할 건...
숨은 의미 찾기
“미안한데 모든 대화를 재치있고 매력적이고 호감 있게 할 순 없는 거예요.
어떨 땐 할 말을 제대로 전해야 하고 듣기도 해야 해요.”
거대한 혜성이 충돌한다는데도, 토크쇼는 가볍고 즐거워야 한다는 mc들에게 민디는 소리친다. 이성적이고 침착하게, 그들의 장단에 맞춰주려던 시도는 처참히 실패해버린다. 민디는 공포에 절은 눈빛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며 디비아스키가 울면서 했던 말을 반복한다. 지구가 파괴된다는 소식은 재밌으면 안 된다고, 무섭고 불편해야 한다고.
영화에 등장한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들에 대한 풍자는 차치하고,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바로 대중들이다. 지구 멸망에 대한 이슈를 누군가는 선동하고, 누군가는 이용하고, 누군가는 조종하고 있다. 이 영화를 넷플릭스로 시청했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따르는 해석보다는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한 해석이 훨씬 중요하고 긴박하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쿨’한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사람을 ‘덕후’라고 부르며 그들의 말과 행동을 ‘오글거린다’는 단어로 일축한다. 쿨하지 못하고 지질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다. 길게 늘여 쓴 글씨들과 렌즈를 밀착해서 찍어낸 사진들은 우스운 취급을 받는다. 그런 것들은 너무 뜨겁거나 본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짤막한 글과 멀리서 찍은 몇 장의 사진들을 선호한다. 이른바 ‘세 줄 요약’이 되어 있지 않으면 쳐다도 보지 않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왜? 그런 것은 ‘쿨하지 않’으니까.
이른바 ‘쿨’해지기 위해선 주변을 면밀히 살피지 않아야 하고, 상대에 크게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한 마디로 세상에 무심하면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나 쿨해서 냉방병에 걸릴 지경이다.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모두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탓에 날아오는 혜성을 눈치채지 못한다. 아니,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다. 정작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혼자 있을 때면 속으로 안절부절하면서도 거울 속 진실을 바라보기는 두려워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디비아스키와 민디의 말마따나 모든 것이 ‘쿨’해서는 안 된다. 때론 오글거릴지라도 뜨거워야 하며 구질구질하더라도 물고 늘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진실에 접근하도록 도와주고,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실화…가 될지도 모를 이야기"
포스터의 문구는 유머 넘치게도 영화가 실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걸 마냥 우습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내가 속한 세상에 열심히 관심을 가지려고만 한다면, 영화가 실화가 될 거란 우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 속에서 우리의 시야를 가리려고 하는 모든 인물들을 걷어내고 본질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영화가 실화가 될까 걱정스러운 이유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에 있다.
“우린 그 혜성이 주는 일자리에 찬성이야.”
거대 기업 ‘배시’의 창립자인 ‘피터 이셔웰’의 말 한마디에 혜성의 궤도를 돌리려던 계획은 전면 무산된다. 그 대신 엄청난 양의 광물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이 혜성의 가치를 다시금 판단하게 되고, 인류는 이 혜성을 지구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몇몇 사람들은 그 혜성이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라 우려하지만, 대부분은 배시와 정부에서 하는 광고를 보고 마음을 돌린다. 혜성에서 얻은 광물들로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고, 지구를 더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그 광고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에베레스트 산만한 크기의 혜성이 시시각각 지구로 다가오고 있다. 그 정도 크기면 인류가 이루었던 모든 업적들은 산산조각 날 것이고,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것이다. 그런 순간조차 혜성을 돈으로 환산해 소유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인간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늘 자연을 인간의 것으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파괴하고 부수어서 인간에게 유리한 모습으로 꾸며오지 않았던가. 자연을 마음대로 다루고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과거가 만들어놓은 현재를 보라.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남극은 녹아내리고, 섬이 잠기고 있다. 혜성이 지구에 닿는 순간 미래는 없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끝없는 욕심 때문에 자신들이 만든, 아니, 누군가가 속길 바라며 만든 환상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이쯤에서 제목을 살펴보자. 대체 왜 ‘돈 룩 업(Don’t loook up)’일까? 영화 내용에 따르면 제목은 ‘저스트 룩 업(Just look up)’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길을 보세요. 그리고 한 발을 내디디세요.
한 발 또 한 발, 하루 또 하루.”
대통령인 '올리언'은 연설한다. 아마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늘에 다가오는 진실을 올려다보지 않는 대신, 텔레비전을 들여다 보라는 소리니까. 조금 재치 있게 보자면, 올리언이 외쳤던 구호를 굳이 제목으로 쓴 이유는 비꼬기 위해서다. ‘그래, 그냥 그렇게 평생 진실을 외면하면서 핸드폰이나 들여다보고 사세요.’ 하고 말이다. 올려다보지 말라는 말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올려다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제목이다. 실제로 제목이 ‘저스트 룩 업’ 이었다면 너무 단순해서 재미가 없었을 것 같은데, 감독의 유머 감각이 돋보인다. 하지만 제목에서의 ‘돈 룩 업’은 조금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몇몇 나라에서 혜성 궤도를 바꾸기 위해 미사일 발사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배시의 계획이 성공하기를 바라야 하는 때가 오고야 만다. 배시의 미사일을 발사하는 당일, 디비아스키와 민디는 뉴스도, 하늘도 바라보지 않은 채 집으로 향한다. 내내 하늘을 바라보라고 외쳤던 그들이지만, 그날만큼은 하늘 위의 혜성이 아닌 둘러앉은 가족들을 바라본다. 그저 소중한 사람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소소한 우스갯소리를 하며 대화를 나눌 뿐이다.
“아무 일 없는 듯 굴어도 되지만 이건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
축하하든 울든 기도하든 우리가 저지른 실수를 어떻게든 바로잡아.
내일은 오지 않을지 모르니까.”
‘돈 룩 업’이라는 제목은 올리언의 연설과 같이 미래를 보고 전진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현재를 살아가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극 중 라일리 비너의 노래 가사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더불어 민디가 홀로 외롭게 죽을 것이라는 피터의 예측과 다른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을 쳐다보며 발만 동동 구를 바에야, 지금 당장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조금이라도 더 눈을 맞추는 것은 어떨까.
그 눈빛과 마음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가슴에 담는 것이, 어쩌면 지구 멸망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닐까.
이것은 우주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감상평
‘우주’라는 주제는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다.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에 열심히 수업 궤도를 따라가려 애썼지만 결국 어느 한순간에 놓쳐버렸고, 다른 학생들이 열심히 이름이나 숫자와 싸우고 있을 때 나는 그냥 무심히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 특별히 우주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을 거라면 ‘수금지화목토천해’만 외워도 그만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블 망원경이니 뭐니 하는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기에, 우주를 관측할 만한 호기심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주와 관련된 영화나 소설은 가끔 챙겨 본다. 실제 우주를 내다 보기엔 어렵고 광활한 것들도 작품 안에서는 축약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주 속에 있는 사람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주야장천 쏟아내기만 했다면 딱히 즐거운 시청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지구에서 우주로 나가는 이야기가 아닌, ‘우주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이야기였다. 한 발 더 들어가서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신경을 자극했고, 덕분에 제법 즐겁게 영화를 시청했다.
영화는 결국 ‘케빈 인 더 우즈’와 비슷한 결말을 맞이한다. 보통의 영화와 달리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며 끝난다. 이런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현실적이라서보다는, 겸허히 사랑하는 이들과 마지막을 함께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해 후회하고 되돌리려는 쓸모없는 노력을 하기보단,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맞으니까.
덧붙여서, 마지막 쿠키 영상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올리언의 아들인 제이슨이 홀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핸드폰을 바라보며 ‘구독과 좋아요’를 외치는 모습 말이다. 어쩌면 진짜로 최후의 인류는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오싹함과 결국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구나 하는 깨달음. 어쩌면 본편을 축약한 쿠키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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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부족한 서사, 하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영상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같이 생활을 하게 된다. 서류적은 부분을 떠나서 서로 이어진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인체의 화학 작용을 통해 많은 것을 공유하고 주고받는다. 그런 달콤한 시기에 아이를 낳으면 아이와 함께 가족이 된다. 두 사람만 생활할 때와 아이가 생긴 이후의 생활은 다르다. 서로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가졌던 두 사람은 이제 아이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꽤 강하게 쏟아내고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고와 위험에도 대처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경험했던 일들이다. 우리를 키워낸 부모님 세대를 봐도 그렇고 지금 막 부모가 된 젊은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서로 돌보고 지켜줘야 할 대상이 늘어났다는 건, 무언가를 같이 공유할 존재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희생과 배려를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또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상대방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도 추가된다. 그래서 위협적인 것이 주변에 있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좀 더 좋은 환경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집단의 이동은 어쩌면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다니는 인간의 본성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13년 만에 돌아온 <아바타>
최근에 개봉한 <아바타: 물의 길>은 전편에서 연인이 된 제이크(샘 워싱턴)와 네이티리(조 샐다나)가 가족을 만들고 지켜내는 과정이 담겨있다. 13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이야기에도 그런 시간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다.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직접 낳은 아이들인 네테이얌(제이미 플래터스), 로아크(브리튼 달튼), 투크티리(트리니티 블리스)와 입양한 아이들인 키리(시고니 위버), 스파이더(잭 챔피언)를 키우고 있다. 한 부족의 리더로서 큰 문제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부족을 이끌 수 있었던 제이크는 어느 날 지구인들이 다시 판도라 행성에 대규모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부족을 떠날 준비를 한다.
사실 제이크는 이 부족에서 투르코 막토 라는 구원자로 불렸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강력한 리더이자 부족을 지키는 존재였지만 자신이 지켜야 할 가족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아빠일 뿐이다. 좀 더 공격적인 부분을 보강하고 돌아온 지구인들을 본 제이크가 처음 느끼는 건, 바로 두려움이다. 자기 자신의 죽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가족과 부족들이 감당해야 할 위험이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 두려움의 감정이 <아바타: 물의 길>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며 영화 내내 이어진다.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그 두려움을 느낀 후, 부족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들이 결정한 건 일단 위험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에 숨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의 부족에 찾아가 조용히 숨어 지내려고 한다. 실제로 그건 꽤 긴 시간 동안 효과가 있었다. 조용히 살며 그의 가족들은 바다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으며 영화는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다. 바닷속의 새로운 생명체들과 아름다운 풍경은 그들이 느낀 두려움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이번 영화의 중심은 제이크 가족 이야기
제이크 가족이 바다 부족과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과정도 담긴다. 특히나 에테이얌이나 로아크 등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바다 부족의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다투는 과정도 꽤 디테일하게 담겨있다. 그러니까 전편이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2편에서는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가족들의 삶과 적응하는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지구인들의 침공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위한 양념 정도로 활용되고 있다.
1편에서 사망한 군인인 쿼리치(스티븐 랭)도 다시 등장한다. 이미 지구인 쿼리치는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의 기억과 습성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아바타에 전송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아바타 모습을 한 쿼리치의 부대원들이 제이크 가족을 추적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빌런이고 쿼리치라는 인물의 카리스마도 여전하지만, 전편과 동일한 인물들이 단지 아바타의 모습으로 바뀌어 재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금은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영화 속 제이크는 전편에서는 인간과 아바타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어떤 식으로 가족을 지켜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줄 알았던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고 이번 이야기 속에서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피하려고 하지만 영원히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이크의 성장은 이번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아이들이 판도라 행성의 바다 생명체들과 교류하고 위협에 맞서는 것을 통해서 성장하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이크와 네이티리 가족 전체의 성장기로 봐야 할 것 같다.
부족한 서사, 그 단점을 잊게 만드는 뛰어난 영상미
1편이 우리에게 그 당시 최고 기술력을 화면으로 보여준 것처럼, 이번 후속편에서도 최고의 영상과 특수효과를 영상에 담았다. 이번엔 바닷속으로 카메라를 옮겨 아름다운 바다 생명체들을 보여주고 주인공들이 그들과 교류하는 과정을 꽤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마치 해상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마치 눈앞에 실제로 있을 것만 같은 화면은 이것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효과가 눈앞에 펼쳐진다.
화면만큼은 최고 수준이지만 이 영화의 이야기는 조금 아쉽다.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가족 서사로 이이기의 규모 자체가 조금은 축소된 느낌이 있고, 19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그렇게 빠르게 이야기가 전개되지는 않아서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제이크 가족이 위협을 피해 숨었다가 위협에 대항하는 이야기 정도로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1편에 비해 좀 더 단순해진 서사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까지 축소시킨다.
전체 이야기 자체는 한 가족이 겪는 혼란과 성장 서사다. 최소 3편까지 제작 중이고 시리즈가 성공적으로 흥행한다면 몇 편이 더 제작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아바타: 물의 길>은 앞으로 이어질 대서사의 발판을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느낌이 강한 영화다. 1편에 비해 서사는 조금 부족하지만 화면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은 감각은 뛰어나다. 체험형 영화로서 3D나 아이맥스, 4D, 돌비 사운드관 같은 다양한 특수 상영관에서 체험하면서 보기 좋은 영화다. 이렇게 시각적 만족도가 주는 장점이 다른 단점을 상쇄하고 더 높은 평가를 하게 만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인 샘 워싱턴, 조 샐다나, 시고니 위버, 스티븐 랭 등도 전편과 같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캐릭터들이어서 크게 새로운 느낌은 없지만 전편의 연기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를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속편을 만드는데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최근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CG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 완성도 높은 화면을 보여주면서 급하게 찍어내는 것이 아닌 장인이 만들어낸 영상과 영화가 어떤 식으로 완성되는지를 몸소 보여줬다. 그가 앞으로 계속 이어나갈 <아바타> 시리즈의 다음 서사와 영상이 궁금해진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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