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6-23 15:57:25
가장 먼 곳에서 느끼는 아늑함.
영화 <그랜마> 리뷰
연인과 헤어진 날 아침, 손녀 세이지가 찾아와 임신 중단 수술을 위한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오지만 엘이 가진 돈은 43달러뿐이었다. 당장 오늘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에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잠깐의 외출에도 찾아오는 불합리한 모습을 마냥 지켜만 보지 않는 엘의 거침없는 분노가 때론 무례하게 비치기도 하지만 방관 없는 당당함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강한 외면과는 달리 조금씩 불안정한 엘의 마음은 6개의 에피소드와 자신과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로 인해 조금씩 단단한 마음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했다. 철저히 자신에 대해서 부정했던 시간을 지나 자신으로 당당할 수 있었던 현재의 모습이 세이지와 함께하는 여정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처음에는 마냥 불친절하고 퉁명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세이지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느껴지는 따뜻함이 인상적이었고 뭔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세이지에 당당함을 불어넣어 주는 모습을 보며 왠지 나도 힘이 났다. 특히 세이지의 임신에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던 녀석을 혼내주는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폭력의 순간이든, 대화를 통한 재회의 순간이든 남은 평생 매일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될 일을 인정하는 자세를 잘 드러낸 영화였다. 어른의 모습이 완벽함을 갖추기도 어렵겠지만 자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어 불안감보다는 단단함을 가진 사람이 어른의 모습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회피하고 싶었던 순간을 당당히 마주하는 엘의 모습을 통해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움을 채워가고 있었다. 우리가 보통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조금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불안정한 모습도 어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낙태 시술소가 있었던 곳에는 카페가 들어서고 그곳에서 낙태라는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 공간에 있을 수 없게 하고, 함께 책임을 져야 할 이는 책임을 회피한다. 또, 낙태 시술소 앞에 있는 여자가 낙태를 반대하는 시위를 펼친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이 모여 홀로 남는 여성을 홀로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끌지만 영화의 상황과 엘은 그 상황에 젖어들지 않고 같이 걸어나간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정상에서 정상을 외친다.
Relative contents
-
- 절대 고요를 찾는 남데브 아저씨(Namdev Bhau in Search of Silence/2018/인도, 우크라이나)
- (이미지 출처: 네이버이미지)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남데브 바우는 인도 남부의 허름한 서민 아파트에 산다. 식구는 남데브 부부, 장성한 딸, 그리고 그의 형 부부. 그의 형은 무엇엔가에 취해 살며 헛소리를 하고 아내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딸은 생각하는 것을 거의 모두 말로 쏟아내는 스타일. 그의 가정은 시끄럽고 산만하다.
좁아서 물건으로 가득한 아파트, 원색의 실내장식은 그가 느끼는 소음의 게이지를 높인다. 더워서 창문을 열어놓고 지내는 사정이니 집안이나 밖이나 소음의 차이가 별로 없다.
남데브는, 아마도 변호사로 보이는, 부유한 사내의 자가용 운전기사이다. 그의 고용주도 쉴새없이 말을 쏟아놓는 다변가.
그는 소음이 싫다. 그래서 침묵을 견지한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침묵으로 반응할 뿐.
어느날 월급을 두둑히 받은 남데브는 아내에게 봉급 전체를 넘겨주고 평소에 가고 싶어하던 티베트로 훌쩍 떠난다. 그의 목적지는 "침묵의 계곡".
그러나 그의 여정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기차, 버스의 소음은 그렇다 하더라도 한적한 시골의 호텔에서조차 옆방의 투숙객 때문에 혼자 잠들 수 없는 형편에 놓인다.
차라리 노숙을 결심하는 남데브. 하지만 그것도 녹록하지 않다.
목적지를 향해 점점 북으로 향하다가 역시 혼자 여행 중인 열 두 살 소년 알리크를 만난다. 계속 남데브 곁을 따라붙는 소년 때문에 남데브는 골치가 아프다. 소년의 목적지는 "붉은 성"으로 "침묵의 계곡"에서 멀지 않은 곳.
알리크가 쉴새없이 조잘대며 남데브를 괴롭게 하지만 묘한 구석이 있는 알리크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마침내 다다른 "침묵의 계곡". 그곳은 이름난 관광지에 불과했다. 단체로 명소를 찾아온 학생들 때문에 남데브는 '고요'를 찾을 수 없었다. 화가 난 남데브에게 알리크는 그가 하고 있는 게임을 알려주며 "붉은 성"까지 같이 가자고 조른다. 소년은 그곳에서 부모와 만나기로 한 게임을 완수해야만 한다고 했다.
한편 TV뉴스로 우연히 알리크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남데브는 차마 어려움에 처한 어린 소년을 혼자 가게 할 수 없어 동행하기로 한다. 알리크의 비극이 너무 안쓰러워 "붉은 성"에 이른 남데브는 자기와 함께 살지 않겠느냐고 묻지만 알리크는 게임을 마쳐야 한다며 이별을 고하고 남데브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한다.
<절대 고요를 찾는 남데브 아저씨>는 인도를 배경으로 하여 우크라이나 출신 감독이 만든 영화이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소음에 반응하는 표정 묘사는 유머러스하다. 남데브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는 소음은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가 양미간을 찌푸리는 소음의 세계에 관객들도 같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 보면 영화는 어느새 중반부에 이르러 있다.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인도 북부의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눈을 시원하게 한다. 인적드문 숲에서 가방을 베고 눕는 남데브가 부러워질 지경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명예살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부터 영화는 유머와 여유에서 멀어지고 슬픈 기운에 잠긴다.
언젠가 "명예살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아들 알리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게임을 만들고 메뉴얼을 작성한 알리크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인간에게 신분의 차이를 규정한 어리석음, 그 차이를 지속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살인. 그래서 부모 없는 인생을 살게 되고 만 어린 소년.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고요'를 찾아 떠났던 남데브는 자기 옆을 따라다니며 쉴새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알리크를 불교사원("붉은 성"은 절이었다.)에 남겨두고 오며 비로소 한없는 적막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남데르의 소원은 그의 욕망에 갇혀있을 때 이루어지지 않고 소년의 슬픔에 공감하고 마음을 내주었을 때에야 성취되었다.
"명예살인"의 부당함을 조용히 고발하는 다르 가이 감독의 속삭임에 관객은 갑자기 섬뜩한 '절대 고요'를 느끼게 된다(©2020.최수형).
-
- 영화 교섭 |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영화 교섭 결말 후기 줄거리 쿠키 | 실화를 담아보았지만? | 황정민 X 현빈 주연
요즘 극장에 교섭 VS 유령 VS 아바타 VS 슬램덩크 치열한 대결을 하고 있어요. 저는 그 중에서 교섭을! 선택해서 봤는데... 아?... 내 실수 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슬램덩크를 봤어야 했지!! 하면서 리뷰 써봅니다.
기본 정보
장르 : 드라마, 액션, 스릴러, 시대극, 버디, 모험
감독 : 임순례
출연진 : 황정민, 현빈, 강기영
개봉일 : 2023년 01월 18일
평점 : 6.32
기획 의도
중동에서 납치된 한국인을 구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외교관과 국정원 요원의 이야기 "어떤 경우라도 희생자를 안 만드는 게 이 협상의 기조 아닙니까?" 세계 공인 여행금지 국가 중 최악으로 악명 높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선교사들이 피랍되는 사건이 터졌다.
교섭 전문이지만 이번에 처음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외교관 재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현지 사정에 능통한 국정원 요원 대식과 함께 인질을 구하기 위해 작전을 세운다.
여담
영화 교섭은 민감한 소재를 가지고 만든 영화로써, 억울하게 탈레반에게 잡힌 것이 아닌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 알려주기 위해 영화를 만들어서 그런지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린다. 개봉 당시 유령과 큰 기대를 모았으니, 두 영화다 관람객 평점이 좋지 못하여 난항을 겪고 있는 중이다.
후기 및 결말
영화 교섭의 결말을 살펴보자면 교섭 전문가인 황정민이 직접 탈레반 소굴 안으로 들어가 협상을 진행하며 한치에 물러섬 없는 정직한 수 싸움을 이겨 피랍되어 있는 한국인들을 구출해 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가 다 끝난 후 예전에 이 사건이 엄청 큰 이슈화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사가 집중 됬던 적이 있다. 아무래도 그 이야기를 영화로 다시 재각색하여 만들다 보니 호불호가 당연히 있을 수 밖에... 무엇보다 교섭을 한다는 주제로 교섭 -> 실패 -> 교섭 -> 실패 무한 반복을 2시간을 늘려서 더욱더 그런 것 같다.
영화 교섭은 쿠키영상은 없지만, 시즌 2를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이 있었다. 과연 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속에서 교섭 2가 나올까?! 극장가에 재미있는 영화가 안 나와 박스오피스 1위 하고 있긴 한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
- 9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
.
국내
강동원 X 허준호 X 이솜 X 이동휘 X 김종수<빙의>, 크랭크인
ⓒ CJ ENM
<기생충>, <헤어질 결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김성식 감독의 연출 데뷔작인 <빙의> (가제)가
지난 9월 14일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영화 <빙의>(가제)는 귀신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지만 귀신 같은 통찰력으로
온갖 사건을 해결하는 가짜 퇴마사 ‘천박사’가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력한 빙의 사건을 의뢰받으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강동원, 허준호, 이솜, 이동휘, 김종수 배우가 출연을 한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일반 상영작 27일 티켓 오픈
ⓒ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개·폐막식 입장권 예매는 오는 23일(금) 오후 2시부터, 일반 상영작 티켓 예매는 27일(화)
오후 2시부터 온라인을 통해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아시아 전역의 우수한 TV, OTT, 온라인 콘텐츠를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인 아시아콘텐츠 어워즈 티켓 역시 9월 23일(금)에 오픈된다.
<콘스탄틴>, 17년만에 속편 제작 확정
ⓒ 네이버 영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콘스탄틴>이 17년만에 속편 제작을 확정했다.
<콘스탄틴> 1편을 제작했던 아키바 골즈먼이 속편의 각본과 제작을 이어 맡았고,
키아누 리브스가 존 콘스탄틴으로 다시 등장할 예정이다.
김지운 감독, 미국 드라마 시리즈 연출
ⓒ 네이버 영화
<악마를 보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 등 다수의 히트작을 보유한 김지운 감독이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극본을 쓴 김보연, 에리카 리폴트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떠나는 한국 가족에 관한
드라마를 제작한다.
김영대, <낮에 뜨는 달> 검토 중
ⓒ 네이버 영화
인기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낮에 뜨는 달]에 배우 김영대가 출연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낮에 뜨는 달]은 시간이 멈춘 남자와 흘러가는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외
ⓒ네이버 영화
배우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재판을 다룬 영화가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제목은 <Hot Take: The Depp/ Heard Trial>으로 조니 뎁은 배우 마크 햅카가 연기하고,
앰버 허드는 배우 매건 데이비스가 연기할 예정이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
- 그 누구도 보여주지 않은 '조커'와 '아서'의 내면세계
<조커 : 폴리 아 되>와 <조커>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설왕설래가 굉장하다. CGV의 에그지수는 진작 박살 난 지 오래고, 로튼토마토 지수도 예상외로 낮게 나오고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영화 안에서 아서가 취한 태도가 빌런 '조커'와 상충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조커;를 인질 잡아 토드 필립스가 객기 부린 것에 불과하다는 유튜브 속 평론가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조커' 보러 왔으면 악랄하고 강력한 빌런을 보고 싶어 하지 이런 내용을 원하는 게 아니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기대한 건 자신의 악함을 깨달은 조커가 사회를 뒤집어 1편과 유사하게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충격적인 플롯을 띄고 있다. 그 충격의 방향이 <조커> 1편의 형태가 아니다. 그 <조커> 1편의 위에서 아서의 뇌를 들여다보는 듯한 플롯으로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는 줄거리를 띄는 것이 이 <조커 : 폴리 아 되>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글쓴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 영화 <조커 : 폴리 아 되>에 대해 '1편의 후속작이 아니다'라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완벽하게 조커가 된 아서 플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근거. 두 영화의 플롯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우선 <조커>의 플롯부터. 아서 플랙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남자다. 인생에 재미라곤 없다. 우울한 아서 플랙. 번듯한 직업이나 모아놓은 돈 같은 거 없다. 대신 있는 건 정신질환이다. 느닷없이 하하하하 웃는 아서 플랙. 뜬금없이, 그것도 기괴하게 웃는 터라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이런 아서에게도 꿈이 있다. 바로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인기 스타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을 동경하는 아서. 사실 아서는 머레이가 자기의 두 번째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 아버지는 누구냐고? 바로 고담 시의 실력자 토머스 웨인이다. 어머니가 말해준 바에 의하면 아서는 웨인 가의 숨겨진 아들이었다. 꿈속에 사는 아서. 아니 꿈속에서 나오기 싫은 아서. 비참한 현실에 혹시?라는 희망이 점점 아서의 망상장애로 발전한다. 내가 대단한 코미디언이라는 망상. 도시의 실력자가 내 아버지라는 망상. 그리고 사랑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망상이 아서를 지배한다. 영화 <조커>는 아서의 망상에 대해 다룬 영화다. 망상이 끌고 가는 대로 도착하다 보면 지옥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고 우리는 그 엔딩에 각자의 의견을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영화가 전면에 배치한 것은 아서의 자의식이다. 존재감이 없던 아서. 유리 자동문을 지나갈 때도 문에 부딪힐 정도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는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아서가 세상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는 과정을 핵심으로 삼았다. 소위 말하는 '자의식 과잉'과 '인정욕구'의 표출이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초반부. 아서의 굽은 등을 보여주며 주인공의 위축된 내면을 보여준다. 주인공 뒤의 라디오 방송에선 '청소 노동자들이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전염병이 창궐한다'라는 뉴스가 나온다. 시각적으로 아서의 정신상태를 보여주면서 청각적으로는 이 사회가 노동권에 있어 약자를 존중하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연이어 조커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상담치료 과정에서 상담사에게 "내 얘기를 듣지 않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상담사가 입 밖으로 꺼낸 말. "사회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요"라는 대사다. 앞 장면과 연이어 아서 플랙은 개인적으로도 사회구조적으로도 구제받지 못한다. 그럼 희망을 품어야 한다. 뭐 같은 현실에 희망이 없으면 안 된다. 아서가 생각한 해결책은 코미디다.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 출연하는 걸 목표로 삼은 아서. 혼자 일기장에 끄적이며 농담거리를 만든다. 공연에 대한 경험을 하나 둘 쌓다 보면 언젠가 성공해서 멘토인 머레이의 쇼에 나올 거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가 웨인의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 세 사람을 총으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이 내면에 있던 분노를 세상 밖에 드러냈다는 사실도 굉장히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코미디언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이 체화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직업이다. 따지고 보면 아서 플랙이 코미디언 '조커'로서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살인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앞에서 안 웃기다고 온갖 조롱을 다 듣고 총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해고당한 공연에 비하면 홀가분한 마음에 춤까지 춘다. 조커의 자의식이 처음으로 상승한 사건이다. 심지어 고담 시의 언론사에 보도도 되고 사회가 이 살인마를 칭송하기까지 한다. 조커의 퍼포먼스가 처음으로 먹힌 것이다. 이 춤은 후반부 계단에서 춤을 추면서 내려가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아무 관객이 없는 야외무대다. 아니 모든 관객이 지켜보고 있는 야외무대에서 계단을 내려가며 춤을 춘다. 이 춤의 리액션 중 하나는 경찰이다. (이후의 사건이지만) 어머니 페니 플랙을 살해해도 쫓아오지 않았던 경찰이 양아치 세 명 죽였다고 아서를 따라온다. 일부 시민들은 조커 가면을 쓰고 아서를 지지하기까지 한다. 이제 사회를 움직이는 인간이 됐다.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들리는 소식. 머레이는 아서의 과거 스탠딩 코미디 이력을 보고 조롱한 바 있는데, 이 아-무도 웃지 않았던 영상을 보고 토크쇼에 초대한 것이다. 서서히 팽창하는 자의식. 바람만 맞췄던 첫 번째 아버지 토마스 웨인과는 다르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초대한 것이다. 토크쇼에 초대된다. 이후 토크쇼에서 광대 분장으로 나타나 "나를 조커로 불러줄래요?"라고 부탁한다. 이 질문에 읽히는 가장 강력한 의도는 '조커'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한 의미가 있고, 나는 그런 굉장한 사람이라는 자신감이다. 이후 토크쇼가 진행된다. 아서는 머레이에게 "당신은 무례하군요"라며 머리에 총알을 겨눈다. 세상이 뒤흔들린다. 슈퍼스타 머레이의 바닥을 방송에 노출시키고 살인까지 했으니 당연하다. 조커의 자의식이 폭발한다. 조커가 벌인 퍼포먼스에 세상이 열광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돌아보면 <조커>는 재능 없는 예술가가 사회를 병들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보여줘 병든 사회를 담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조커 : 폴리 아 되>는 이 1편의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다. 2편의 초반부. 여전히 자존감이 낮은 아서. 낮은 자존감이 사람 살인한다고 채워질 리가 없다. 본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사실 환경 문제도 크다. 아캄 수용소의 모든 교도관들이 아서를 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배도 그냥 주면 되는데 "오늘은 농담 없냐?"면서 강아지 손 내밀라고 하듯 사람을 아래로 깔본다. 감옥에는 화장실도 없다. 양동이 같은 곳에 볼일 보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비워야 한다. 사람 사는 환경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연히 위축된다. 글쓴이는 이 설정, 초반부가 보여주는 영화의 배경이 1편 초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아예 겹쳐지는 장면(마르고 굽은 등을 보여주는)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인물의 내면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무기력한 아서는 어떤 계기를 만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희망에 부푼다. 그 계기는 할리 퀸젤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으로 가득 찬 아서. 여기서부터 자존감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농담을 하고 싶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아서에게 살아갈 의미가 생긴다. 글쓴이는 이 할리퀸(레이디 가가)이 안겨주는 희망이 1편의 코미디와 유사한 맥락이라고 본다. 아서에게 코미디는 미래다. 코미디를 사랑한다. 그래서 미래에 코미디로 먹고사는 걸 꿈꾸고 있다. 이 코미디에 대한 사랑이 할리퀸에게 옮겨온 것이 2편이다. 이 공통점은 아서가 코미디와 사랑에 서투르다는 점에서도 유사성을 띤다. 또 결정적으로 아서가 품고 있는 사랑이 어떻게 커지는가가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공통점이다. 그건 바로 망상이다. <조커> 초반 머레이가 관객석에 앉아있는 아서를 불러 '자네 같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야'식의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선 아서가 혼자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있는데 소피만 혼자 흐뭇하게 웃는 장면이나 갑자기 하하 호호하고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조커> 1편이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망상은 중요하다. 아서가 후반부까지 코미디를 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이유(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이기 때문이다. 이 코미디에 관한 망상은 후반부에 해체되면서 아서의 무리수로 이어진다. 코미디를 보며 혼자 흐뭇하게 웃던 소피라는 애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아서는 코미디에 재능이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아서는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머레이를 살해한다. 이 부정적인 현실 - 망상과 사랑 - 부푼 자아를 충족하기 위한 무리수라는 구조는 2편에서도 이어진다.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도 아서의 희망인 리와의 관계가 망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에는 '폴리 아 되'라 아서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하지만 망상은 망상이다. 그 망상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느냐. 이번엔 뮤지컬이다. 현실에서 뮤지컬 같은 상황이 벌어질 리는 없다. 뮤지컬 신은 전체적으로 영화 같은 상황이다. 감옥에 갇혀 한정적인 동선 때문에 나눌 수 없는 사랑을 음악과 춤으로 망상을 공유한다. 이미 전에 꿈꿔왔던 망상이 시간이 지나 더 영화적이고 깊어진다. 후반부 아서가 조커를 포기하자 그의 망상이 해체된다. 망상 속 공연에서 리는 아서를 쐈고 현실 속 할리퀸은 조커를 차버렸다. 조커로서의 이름도 잃고 자아까지 포기한 아서. 하지만 이 1편에서 이 과정을 겪고 아서 플랙의 조커가 탄생했던 것처럼 새로운 빌런이 등장한다. '넌 죽어도 싼 놈이야'라는 말과 함께 악의 축을 살해하는 남자가 영화 후반부를 마무리짓는다. <조커 : 폴리 아 되>의 후반부를 적어도 <조커>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커 : 폴리 아 되>가 진짜 <조커>의 후속작이 맞냐는 비판에 동의하기 어렵다. 플롯이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아니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뮤지컬이라는 비현실적인 시퀀스를 넣어서 망상의 깊이를 더 진득하게 뽑아냈다. 1편에서 작동했던 핵심 모티브 사랑과 망상 그리고 빌런의 탄생을 2편에서 그대로 이어 더 발전시켰다. 여기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플롯의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세 가지 특성 역시 전작 1편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 가지 특성 중 첫째.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는 할리퀸이 등장한다. 첫 번째 할리퀸은 할리 퀸젤이다. 할리퀸은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며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처음부터 리는 아서로 접근하지 않고 조커로 접근한다. "나 당신이 주제인 영화 20번은 봤어요"라는 말,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서 머레이의 머리를 날렸으면 했다"는 말이 그렇다. 결정적으로 리는 아서를 처음 만날 때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리는 아서를 만날 때 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안 한다. 하더라도 "나 당신 만나서 기뻐"라는 식의 감상만 드러내는 말만 한다. 심지어 몇 마디는 거짓말이다. 조커를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랑에 서툰 아서. 리의 존재 때문에 조커와 아서 사이에서 조커를 고른다. 후술 할 리와 메리언 사이의 대립으로 보여주는 정체성의 충돌이 서툰 사랑 때문에 이도저도 아니게 됐는데, 이 요인에 리가 있는 것이다. 이 정체성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반대편의 할리 퀸이 등장한다. 바로 변호사 메리앤(캐서린 키너)다. 메리앤이 직업인으로서 펼친 주장은 간단했다. 아서는 인격이 분리됐고, 조커로서의 자아가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일종의 심신 미약 논리다. 메리앤은 변호사로서만 아서를 돌본 것이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그를 위하기도 했다. 교도관들이 아서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는 것을 보고 "우산 안 씌워주면 누가 죽냐"라고 핀잔 섞인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렇다. 또 아서와 조커가 분리됐다는 논리에 근거를 덧붙이는 작업도 했었다. 인터뷰를 잡는다거나 의사와의 상담이 그랬다. 법정에서도 하비 덴트의 논리를 공박할 때 '당신이 아서에 대해 뭘 아느냐'라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리가 아서를 버린 것과 반대로 매리앤은 진정성 있게 아서를 대한 것이다. 단지 아서는 리가 부풀린 조커로서의 자아 때문에 무리수를 뒀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가 현실적인 걸 고르지 않았나? 아니다. 매리언은 할리퀸이 극에 끼친 영향처럼 아서가 후반부에 선택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할리퀸이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고 말하듯 아서에게 '당신은 아서예요'라고 말했던 것이 효과가 있던 셈이다. 이 두 할리퀸이 가로지르는 정체성의 딜레마는 <조커> 전작이 가졌던 딜레마기도 하다. 아서 플렉, 그러니까 조커는 어떤 존재일까? "당신은 죽어도 싸!"라는 논리 하에 유명하면서도 무례한 사람만 골라 처단하는 인물일까? 아니다. 조커는 그냥 자의적으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야 세상에게 내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하지만 조커는 살인마와 소시민 사이에서 널뛰기한다. 단지 후반부에 아서가 조커를 골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아버지를 경유한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 역시 <조커>와의 유사성을 띤다. 두 명의 아버지가 조커와 아서 사이의 정체성을 널뛰기하다 1편의 아서로 귀결 짓듯 두 명의 할리퀸이 2편의 아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중 둘째. 망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은 뮤지컬 파트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아서 플랙의 망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전작 조커에서 아서는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점차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드러낸다. 그가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기점이 있다. 후반부에 이르러 어머니 페니를 살해하며 아서 본인이 망상이 심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 과정에서 아서는 자신이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사실(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망상을 현실같이 표현할 필요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망상을 망상답고 더 내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영화의 '폴리 아 되'를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다. 아서가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영화 내에서는 아서가 여전히 망상 속에 빠져 있다는 점을 뮤지컬 형식으로 명확히 시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아서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망상의 정도를 표현하면서 얼마나 아서가 허황된 꿈에 취해있는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관객도 처음부터 그가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뮤지컬 장면이 아서의 캐릭터성을 설명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군가는 이런 장치가 지나치게 직관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조커>에서 망상과 현실사이를 널뛰기하는 플롯으로 '뭐가 진짜지?' 토론하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영화 속 망상 장면을 뮤지컬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아서의 망상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이미 깔고, 그 구분이 없는 아서의 내면을 관객이 더 직관적으로 체험하게끔 뮤지컬을 사용했다. 그 결과, 이런 방식의 연출은 아서의 심리를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하며, 오히려 아서가 망상 속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를 더 확실히 보여준다. 이 선택은 1편의 플롯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아서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세 가지중 둘째. 이 영화가 가진 문제의식이다. 우선 영화 <조커>가 다룬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 있다. 전작 <조커>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이 한 사회의 단면을 가감 없이 다뤘기 때문이다. 아서 플랙이 조커로 흑화 하게 된 이유는 (행위의 악함과는 별개로) 인간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머니 페니의 학대로 인한 망상장애, 노동환경의 열악함, 사회구조적으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그의 처지, 그리고 조커를 조커로 만든 사람들이 그 예다. 이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미디어'다. 미디어는 아서가 '웨인 엔터프라이즈' 직원 세 명을 살해한 사건만 보도하고, 페니의 죽음 같은 일은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또한 아서가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아를 포기하는 사건인 '머레이 쇼'의 방송분 역시 미디어를 이용한 폭력이다. 셋째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 "청소부들이 쓰레기를 안 치워서 쥐가 들끓는다"는 대사는 미디어가 노동 현장에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대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미디어는 성실하지 못한 존재다. 페니의 죽음에 대해 취재하지도 못했고 아서를 조커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미디어의 악영향이 아서의 개인적인 불행들과 시너지를 이루어, 조커라는 캐릭터가 관객 입장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전작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조커: 폴리 아 되에서도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아서, 조커 둘 다 카메라를 통해 비치는 장면이 있다는 점이다. 매리언이 아서에게 '당신은 조커가 아니라 아서예요. 아서를 보여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이 과정을 카메라로 녹화한다. 아서를 진짜 위했던 매리언조차도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쓰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미디어를 통해 재판 승소를 노린 것이다. 법정 장면에서도 아서는 판사가 아닌 카메라를 의식한다. 굳이 따지자면 판사에게 '나는 조커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설득력이 있다. 판결 내리는 건 판사니까. 그런데 아서는 카메라에 대고 굳이 말한다. 조커라는 존재가 인정받았던 계기가 미디어였다는 걸 아서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내린 행동이다. 아서가 "난 할리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할리 퀸이 TV를 보며 유리창을 깨고 TV를 가져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아서에게 연락을 하는 게 아니라 TV를 가져가는 것이 할리퀸이 조커를 사랑하지 아서를 아끼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미디어의 존재에 따라 갈리는 인물들의 리액션은 극후반부의 폭탄 테러와 아서가 군중들에 의해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아수라장이 됐다. 조커는 정신을 잃은 채로 길을 배회한다. 지나가던 조커 추종자가 차에 탑승해서 아서를 탈출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아서는 조커로서 선택받게 된다. 하지만 아서가 내린 판단은 전적으로 아서의 것이다. 군중들이 원하는 조커라면 법정을 탈출해서 사람들을 조종해야 하는데 냅다 도망가버린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것과 관객이 알고 있는 실제 현실 사이의 괴리를 명확하게 그린다. 가짜 조커들이 아서에게 기대한 모습이 '폴리 아 되(망상)'이었더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괴리가 발생한 이유? 아서는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 세계관의 군중들은 아서를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니면 접할 수 없다. 카메라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인물들의 행보를 가른 걸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셋째. 전작을 승계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미지들이 <조커>와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불어넣는다. 전작 조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계단을 내려오며 춤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조커의 추락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면서, 그의 홀가분함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조커: 폴리 아되>에서의 계단(장소도 같은) 신은 다르다. 이번엔 계단 장면에서 더 이상 무겁거나 상징적인 춤도 없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고된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할리 퀸이 계단에 서 있고 아서는 할리퀸을 좋아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간다. 이 영화처럼 조커 내면의 아서 플랙을 그리고 싶었다 하더라도 계단 신에 의미를 부여해도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적으로 그걸 거부한다. 전작에서 그렇게 상징적인 장면으로 성공을 거뒀는데, 이번에는 그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전작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조커의 추락과 흑화의 이유를 면밀하게 보여주는 하강의 이미지를 상징했는데, 이번에는 상승에 이유를 붙이지 않는다. 아서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는 많은 이유가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가 행복한 이유에는 그리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영화는 이런 식으로 전작의 이미지를 비튼다. 예를 들어, 전작에서 아서가 두들겨 맞았던 길거리를 전속력으로 질주해서 조커로서의 자아를 할리 퀸 앞에서 표출하는 장면도 있었다. 아서의 이야기가 처음 시작됐던 곳에서 조커의 자아가 붕괴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또 생방송 중에 조커 분장을 하고 "아캄의 돼지 같은 교도관들"이라고 외친 후 굳이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전작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부정하는 요소다. 전작 <조커> 1편에서도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머레이를 공격했다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서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묘사했다. 이렇게 영화는 전작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표현하면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굉장한 창의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조커의 캐릭터성을 영화 안에 구현했다는 점이다. 기존에 조커가 미디어에 나온 경우를 생각해 본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지. 조커가 전하는 가족 이야기는 매번 달랐고, 목표가 돈인 것도 아니라 악행을 펼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욕망이었다. 캐릭터를 규명하지 않는, 즉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느낌이 조커의 본질이었지.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잭 니콜슨)는 유희적인 면모가 강조된 인간이었다. 그저 자기가 재밌으니까 나쁜 짓을 하는 인물이다. 죽을 때도 까르르 웃고 죽을 정도로 이상한 면모가 가득한 캐릭터였다. 맷 리브스의 조커 역시 그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설명 없다. 배트맨과의 대화 장면만 짧게 보여줄 뿐이었다. 나는 조커라는 캐릭터의 핵심이 바로 규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조커를 실사화한 영화들이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이 '조커' 시리즈는 전적으로 다르다. 아서 플랙에게 명백한 이유가 주어지고, 그가 악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미 이 영화의 조커는 처음부터 기존과는 다르다. 완벽하게 대치된다. 그 대신 우리가 아는 조커의 이미지를 구현해야 제목과 캐릭터에서 배트맨 세계관을 빌려온 근거가 성립된다. 이걸 어디서 찾았을까? 글쓴이는 1편과 2편 사이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기존 '조커'와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전통적인 조커의 특징을 뒤엎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1편의 조커가 그려왔던 2편의 망상이 원인을 뭉개버린다는 점에서 전형성을 거부하는 '조커'의 전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한 이야기 내적으로 망상에 빠져있는 아서 플랙의 캐릭터성을 살리는 데에도 생동감을 부여한 선택이었다. 영화가 1편이 있어 2편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편의 상황이 망상이 되어 2편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두 영화의 연속성을 처음부터 망상으로 이은 것이다. 이것이 기획의도라면 사실 굳이 조커의 캐릭터를 강조할 이유가 없다. 기획의도에 충실할 것이라면 아서에 집중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할리퀸이 언급하는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심화되는 지점이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이 대사 굳이 필요 없다. 조커가 나온 뉴스 40번 읽었다고 해도 이야기상의 결함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영화였어야 했던 이유. 영화가 상상에서 그린 예술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1편에서 조커 추종자들이 그린 악의 이미지가 허상이었던 것처럼 <조커>라는 영화에서 그린 조커의 이미지를 극 중 극의 형식으로 통렬하게 조롱한다는 단면이 여기서 읽힌다. 이 망상으로 1편과 2편을 이으면서 충돌시킨 선택은 영화가 악을 보여주는 데 있어 아주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1편에서 꿈꿔온 2편, 1편에서 기억하는 대중들의 조커에 관한 이미지, 할리퀸에 대한 아서의 생각, '이렇게 하면 먹힐 거야'라는 법정에서의 안일함 등 1편에 근거한 2편의 판단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이런 점에서 엔딩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규명할 수 없는 악이 조커라면서, 영화의 마지막에 조커가 죽는 건 명확한 결말 아닌가?"라고. 하지만 난 이 영화에서 조커가 의인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규명할 수 없음 / 조커의 정체성 둘 다 동시에 살렸다고 본다. 마지막 아서를 살해하는 남자는 초반부부터 소름 끼치게 웃는다. 여기서부터 아서와 공통점을 가진다. 결정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넌 죽어도 싸!”라고 말하면서 아서를 살해한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아서와 남자를 겹치게 보여준 것이다. 글쓴이는 이 남자가 아서 플랙의 후임, 즉 또 다른 조커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커 추종자가 아닌 아서 플랙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아서가 머레이와의 토크쇼에서 자살을 시사하다가 결국 머레이를 살해했던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영화가 두 사람을 통해 "공유된 광기"를 조커라는 캐릭터로 보여줬다고도 읽을 수 있다. 결국, 영화는 악을 의인화하기보다는, 조커라는 이름 아래 공유되는 광기와 혼란 그 자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 영화는 조커가 아닌 아서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그 방식은 전례를 따르지 않았고, 조커처럼 규명할 수 없는 캐릭터를 새롭게 정의했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되는 것이다.
불호평이 압도적으로 많은 영화다. 누군가는 진짜 조커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전작의 장력을 스스로 거부했다면서 영화에게 야유를 보낸다. 글쓴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충분히 현대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감정적인 폭이 넓고 조커의 캐릭터성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뮤지컬 시퀀스들이 그렇게까지 완성도가 높지는 않아보인다는 점과 난해한 플롯, 느린 템포가 대중영화로서 합격점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충분히 좋은 후속작이라고 생각한다.
-
- [SIWFF 데일리] 세 여자의 거울치료
제목 : 그렇고 그런 사이
감독 : 김인혜
시놉시스 : 선지는 새언니가 된 친구 진희와 제사상에 올릴 전을 부친다. 분명 결혼 전까진 쿨한 친구였는데, 오늘따라 진희가 엄마 영순을 대하는 태도가 불편하다.
결혼과 파혼, 그 사이
널부러져있는 짐, 그리고 쌓여있는 '선지'의 이름이 적힌 청접장. 이 장면만 봐도 '선지'는 파혼을 하고 본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말 "급" 짠해보이는 선지의 뒷모습. 그게 영화 <그렇고 그런 사이>의 시작이다.
'선지'는 왜인지 눈치를 보며 거실로 가고, 거실에는 한창 명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엄마 '영순'. '영순'은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방문을 안한 며느리 '진희'의 뒷담화를 '선지'에게 늘어놓는다. 그 때 알 수 있는 사실은, '진희'는 '선지'의 오랜 친구이고 '선지'의 소개로 인하여 '선지'의 오빠인 '선호'와 결혼했다는 사실. 정말 결혼과 파혼 사이의 오프닝 시퀀스.
한복을 안입고 왔구나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진희'는 때마침 방문한다. 그때 엄마 '영순'은 "한복을 입..을 줄 알았는데" 라며 말 끝을 흐린다. 요즘도 한복을 입는구나. '진희'는 핫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고와서는, 일할 때 편한 복장이 최고라며 능글맞게 상황을 넘어간다. 여기서 '영순'의 두번 째 충격. 바로 이어지는 '진희'의 명절선물은 바로 샤인머스캣. 이 장면을 보면 '진희'와 '영순'은 신세대 며느리와 아직 옛날을 살아가고 있는 시어머니의 충돌. 그리고 그걸 얄밉게 지켜보는 남편이자 아들 '선호'.
그리고 2N년째 전 부쳐본 솜씨로 '선지'는 능숙하게 전을 부치지만, '진희'는 이 광경이 낯설다. " 어머니 요즘 사먹는게 최고예요~"를 시전해보지만, '영순'은 칼같이 거절한다. 요즘 쉽게 볼 수 있는 명절의 분위기 아닐까. 그러던 중 '진희'와 '선지' 그리고 '영순'은 각자의 이유로 전을 방치하고, 전은 새까맣게 타버린다. 마치 '영순'의 마음처럼.
세 여자의 거울 치료
'거울 치료'란 즉 역지사지다. '영순'은 '진희'의 시어머니기도 하지만 딸 가진 엄마이기도 하고. '진희'는 며느리이자 '선지'의 새언니이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다. 마찬가지로 '선지'도 훗날 누군가의 며느리지이자 '진희'의 아가씨이고, '영순'의 소중한 딸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사실을 깨닫는다.
깨닫는 과정이 굉장히 웃기다. 영화관에서 소리내며 웃는 일이 거의 없는데, 오랜만에 웃게된 영화다. 뭔가 정말 있을 법 한 일을 다루고 있고 그 이야기를 있을 법 하게 풀어내서인지 캐릭터의 감정 이입이 잘되었다. 30분의 러닝타임을 세 여자에게 골고루 썼달까. 알차다.
씨네랩 에디터 ria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 - 09.01
'아시아단편 단편선 2' 상영 시간표
2022-08-27 17:00 - 18: 36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08-29 19:30 - 21:06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
- 삶과 영화의 가능성
영화는 평범한 방에서 평범한 인물들의 인터뷰를 비추며 시작된다. 헨드헬드로 촬영한 구도나 인터뷰 영상처럼 연출된 화면은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림보 스테이션은 어딘가에 있을법한 평범한 장소이며, 시오리는 현실 세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닌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현실과 환상 사이의 불분명함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모호한 경계에서 <원더풀 라이프>는 영화로써 삶을 조명한다.
기억은 주관적인 것이라며, 대신 꿈이나 미래를 선택하면 안되냐고 묻는 이세야의 질문에 카와시마는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한다. 삶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가 있음에도 반드시 스스로 기억을 선택해서 연출하도록 한 설정은 영화의 주요한 메세지를 관통한다. 사실은 순간에 불과하다. 비디오 테이프와 기억에 기반해 연출한 영화는 다르듯이 우리가 떠올리는 기억은 주관적이다.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흘러가야만 하는 우리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간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닌 기억, 비디오 테이프가 아닌 영화이다.
달은 이와 관련된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모치즈키는 달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매일 똑같은 달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시오리에게 나카무라는 '늘 똑같더라도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니 달은 참 재미있다'고 이야기한다. 나카무라는 림보의 책임자이며, 이 장면을 제외하면 거의 등장하지 않고 관찰자에 머무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메세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듯하다.
마지막 무렵에 영화에 등장하던 달이 사실은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 지점에서 달은 영화와 연결된다. 인물들이 달이라고 믿던 것은 사실 달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이라고 믿었던 마음은, 그들이 느낀 아름다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림보에서 찍는 영화는 비디오테이프와 동일할 수 없고, 우리의 기억은 사실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집중해야할 것은 사실이 아닌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를 찍는 시선 역시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유사하다. '무엇을 찍을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찍을지'이다. 그때 영화는 하나의 삶이 된다.
모치즈키는 쿄코가 마지막 기억으로 자신을 선택한 것을 알게 된 뒤 비로소 기억을 선택한다. 50년 동안 행복한 기억을 찾아 헤맨 뒤 자신도 누군가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모치즈키의 기억을 촬영하는데, 쿄코와의 순간이 아닌 림보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선택한 것이 밝혀진다. 빛의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달처럼,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자신도 행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모치즈키는 다시 한 번 다른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동료들과 함께 기억을 연출하고 추억을 선물하며 지내온 림보에서의 50년 세월도 삶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기억을 선택하는 과정은 자신의 시선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와타나베는 살아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던 자신을 회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삶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결국 와타나베는 아내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러간 기억을 선택한다. 그저 그런 삶, 그저 그런 결혼 생활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어쨌건 그의 삶은 그곳에 존재했다. 향수와 회한이 섞인 그 추억은 와타나베가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는 증거이다.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왔다고 이야기하는 야마모토는 기억을 선택하면 나머지를 잊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여기며 어릴 적 어둠 속 옷장에 숨은 기억을 선택한다. 선택의 가치는 선택할 수 있었던 것에서 온다. 삶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 위에 놓인다. 야마모토의 선택은 사실 선택하지 못한 것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삶의 요소들을 마주하고 선택하기를 회피함으로써 선택의 가치와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와타나베의 말은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기억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세야는 회피하는 대신,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진다. 이세야는 젊은 인물이며 배우 본인의 이름을 사용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과 영화의 가능성을 동시에 긍정하는 감독의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부드러운 영상미가 설득력을 더했다. 조금 더 깊게 고민한 <어바웃 타임> 같았다. 삶에 대하여, 어찌보면 간편한 대답일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겸허한 마음이 느껴져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
-
- 우리가 팔콘앤윈터솔져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
2021. 04. 16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https://www.epidemicsound.com/
*영상 타임라인*
00:00 클라이막스로 향해중
00:49 예상했던 짭틴아메리카
02:26 캡틴의 향수를 뿌린 샘
04:16 5화 카메오?
06:12 새로운 10년
-
- 영화 <켈리 갱> 30초 예고편
폭력과 부패로 가득했던 시대
온갖 범죄로 세상을 더럽히는 무법자 ‘해리’와 부패경찰 ‘알렉스’에 맞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악인들을 단죄한
전설적 영웅이자 세상이 버린 위대한 범죄자
‘네드 켈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 영화 <듄> 메인 예고편
10191년,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후계자인 폴(티모시 샬라메)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유일한 구원자인 예지된 자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리고 어떤 계시처럼 매일 꿈에서 아라키스의 행성에 있는 한 여인을 만난다. 아라키스는 우주에서 가장 비싼 물질인 스파이스의 생산지로 대가문 세력들의 음모가 격돌하는 전쟁터. 귀족들이 지지하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에 대한 황제의 질투는 폴과 그 일족들을 죽음이 기다리는 아라키스로 이끄는데…
두려움에 맞서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라! 이것은 위대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