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2022-06-24 11:09:10
[제 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참관기] K-콘텐츠 시대, 어린이의 과잉과 소멸
문제적 포럼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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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마음속 우주, 그 황홀한 다채로움의 단면
7★/10★
러시아 출신의 인류 최초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파리 외곽의 허름한 가가린 아파트. 이곳에 흑인 청년 ‘유리’가 산다. 어릴 때부터 가가린 아파트에서 살아온 유리는 자연스레 우주 비행사를 꿈꾸었고, 아파트는 유리의 꿈과 현실을 동시에 지탱해주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런 아파트가 안전 점검에서 기준에 미달해 철거가 결정된다. 사실 유리는 이전부터 친구와 함께 아파트를 수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안전 점검 평가 점수를 높여 가가린 아파트가 철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유리가 아무리 또래 청년들을 훌쩍 앞지르는 기술과 재능, 열정을 가졌더라도 가난한 흑인 청년이 아파트 철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유리의 절친한 친구를 비롯하여 주민들은 하나둘씩 가가린 아파트를 떠난다. 유리도 어릴 때 자신을 버린 어머니가 그를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해, 슬픔 속에서도 잠깐이나마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유리는 철저히 혼자 남겨졌다. 그러나 유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텅 빈 아파트에서 자신만의 우주선을 꾸민다. 철거를 결정한 사람들보다 가가린 아파트를 훨씬 더 잘 아는 유리가 만든 아지트는 비밀스럽고도 안락하게 유리의 삶과 꿈을 보듬는다.
유리가 구축한 자신만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우주선’은 유리뿐 아니라 다른 소외된 자들이 연결되는 장소로도 기능한다. 마약 판매상, 이주자 2세 여성 등 파리가 품지 못해 떠도는 자들이 유리의 우주선에서 관계 맺으며 국가와 사회 바깥의 삶의 가능성을 잠시나마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취약한 토대로 인해 늘 불안정하다. 결국 유리는 또다시 혼자가 된다.
끝내 허물어지고야 마는 아파트에서 유리가 그토록 간절히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가린 아파트에 살면서 우주 비행사라는 꿈을 키운 가난한 흑인 청년 유리는 그 추운 곳에서 홀로 남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유리가 창조한 세계를 영화로나마 엿본 자들은 어떻게 해야 또 다른 ‘유리의 우주선’이 사라지는 걸 막을 수 있을까…….
동명의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한 파니 라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윌은 굉장히 영리하고 감각적인 연출로 유리의 세계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에는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웅장한 음악과 장엄한 구도가 자주 등장한다. 허름한 가가린 아파트와 유리가 만든 우주선을 배경으로 말이다. 철거를 앞둔 아파트와 그곳에 사는 가난한 청년, 그리고 우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다. 하지만 〈가가린〉에서 확인할 수 있듯, 유리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꿈에 진지했고 이를 현실로 만들어냈다.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라는 뜻의 우주는 저 먼 하늘에만 있지 않다. 유리가 그러하듯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우주를 품고 있다. 〈가가린〉은 그 황홀한 다채로움의 단면을 포착하여 보여준다. 유리의 우주선이 보낸 SOS 신호가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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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가족의 울타리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혈연관계가 만들어진다. 부모와 형제들과 맺은 관계는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조금씩 영향을 준다. 전통사회부터 현대사회까지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를 하는 일은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에게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어떤 사람들은 혈연, 자기 핏줄이라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기도 했다. 이런 혈연관계 아래에서는 각자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을 나눠서 하기도 하면서 각자는 가족에 어떤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또 챙기면서 끈끈한 관계를 맺으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왔던 사람들은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떨어져 살기 시작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족에 대한 의무감도 자연스럽게 약해졌다. 최근에는 1인 가구나 비혼 인구도 늘어나면서 더욱더 그 가족의 단위는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가족이 아닌 사람들끼리 한 집에 산다거나 어떤 감정적 교류를 하면서 살아가는 가족 아닌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로 대안 가족 또는 유사 가족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함께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유사가족이 되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
영화 <브로커>는 주인공들이 일종의 유사 가족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과거 혈연관계가 시작되는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한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아이는 서서히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다. <브로커>에서는 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의 울타리에 들어갈 기회를 박탈당해버린다. 아이 우성의 엄마인 소영(아이유)은 한 성당의 베이비 박스에 아이를 내려놓고 돌아선다. 그리고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는 그 아이를 데리고 간다. 그들은 아이를 돈 받고 파는 일종의 브로커다. 이 첫 장면이 지나가는 시점에 주요 등장인물들은 가족의 울타리를 깨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같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파는 브로커인 상현과 동수는 그렇게 나쁘지 않게 보인다. 그들은 아이를 구매할 구매자를 찾는데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이상해 보이는 구매자는 걸러낸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양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아이 우성의 엄마 소영은 상현과 동수가 브로커임을 알게 된 이후 아이의 판매에 동참한다. 그렇게 더 까다롭게 아이를 키울 부모를 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아이의 울타리를 깨는 사람에서 새로운 울타리를 만들어주려는 사람들로 서서히 바뀌어나간다.
아이를 버린 엄마 소영은 미혼모다. 그만의 사정이 있고, 아이에 대한 애정도 그렇게 많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꽤 반항기 있는 말투와 센 화장이 그가 살아온 태도를 보여준다. 반면 상현은 이혼남이다. 도박으로 인해 가족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고, 그 관계도 좋지 않다. 그리고 동수는 어린 시절 보육원에 맡겨져 자라온 인물이다.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인물이다. 이 세 인물은 삶에 어딘가 결핍이 있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고, 이후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삐뚤어진 삶을 살게 되온 건지도 모르겠다. 이 세 인물 모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전혀 없거나 깨져버린 인물이다.
관계가 깨진 인물들이 아이를 위해 다시 만들어가는 가족의 울타리
이렇게 자신의 삶이 깨진 채 살아가고 있는 세 인물이 우성이라는 한 아이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이고, 그 아이를 좋은 부모에게 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세 인물이 이루지 못한 삶의 어떤 부분을 채워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들은 아이의 삶이 자신들처럼 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브로커 일을 꽤 오래 했고 가장 나이가 많은 상현이 큰 생각 없이 아이를 넘길 것만 같지만 그마저도 마지막에는 마음을 돌린다. 그리고 아이 우성의 부모를 택하는 과정 속에서 엄마 소영의 마음도 서서히 풀려간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른 채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들어나갔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영과 상현, 동수는 아이와 밀접한 위치에서 부모를 찾으려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외부인의 시선이 등장한다. 바로 형사 수진(배두나)과 이형사(이주영)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버려진 아이의 브로커 역할을 하는 상현과 동수를 수사해 왔다. 그들은 상현의 집 근처에 잠복하며 아이가 거래되는 순간을 이용해 상현과 동수를 잡으려고 하는 인물들이다. 특히나 수진은 외부에서 이들의 대화를 도청하거나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브로커 역할을 하는 이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들의 다른 모습을 본 이후에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영화에서 수진의 역할은 외부자의 시선일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 역할도 한다. ‘낙태와 살인 중 무엇이 더 나쁜가’ 나 ‘낙태와 아이를 버리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쁜가’ 같은 복잡 미묘한 사회적 문제들을 소영과 수진의 대화를 통해서 던지고 있다. 조금은 기능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주지만 수진이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소영, 상현, 동수 세 인물의 동선에 수진의 동선이 포함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다. 그렇게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도 하나로 연결되어 합쳐진다.
영화는 모든 인물이 결국 연결되고 가족처럼 그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담겼다. 특히나 이야기 중 어떤 인물이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반복해서 내뱉는 말은 꽤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그런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고 꼭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 의지하는 관계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엄마나 아빠 역할을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성별에 상관없이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제는 정해져 있는 성역할도 없고,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든 가족 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시선이 영화 <브로커>에 담겨있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영화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영화다. 먼저 브로커 상현 역할을 맡은 배우 송강호는 그동안 보여줬던 송강호만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무심하지만 속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결국 모두의 아버지가 되어가는 인물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그는 이번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는데, 지금까지 모든 송강호의 연기가 녹아있는 이번 연기가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엄마 소영 역을 맡은 배우 아이유는 과거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주인공인 지안과 비슷한 연기를 하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범죄를 저지르고 아픔을 숨긴 채 날카롭게 반응하는 캐릭터이지만 조금씩 따뜻함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센 반응을 보이는 인물인 소영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수 역할을 맡은 배우 강동원도 그가 상처를 숨기고 부드러움을 보이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동안 보여줬던 로맨스 캐릭터 연기를 이번에 같이 보여주면서 관객의 웃음을 부른다. 그리고 형사 수진 역을 맡은 배우 배두나도 그가 잘 보여주는 조금 딱딱해 보이고 감정이 없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른 따뜻한 선택을 하는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메시지를 던지는 캐릭터를 맡았다는 점에서 그의 비중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꽤 중요한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에서 비슷한 유사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온 경험이 있다. 그는 소외된 계층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감독인데, 이번 <브로커>에서도 미혼모, 낙태, 고아, 아이 브로커 등의 문제를 한 영화에 녹아내 화두를 던지고 있다. 기존에 그가 일본에서 만들었던 영화들에 비해 너무 부드럽고 얕게만 문제를 다루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감독이 한국 배우들을 이용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히 던지고 있고, 각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연기력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꽤 안정적인 영화를 완성해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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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뭐였지? 기억이 안 난다. 분명히 방금 생각했는데 말이다. 26살밖에 되지 않은 나. 왜 군데군데 기억력에 구멍이 났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주치의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렇게 큰 문제인 것 같지는 않다고 말씀해주셨다. 큰 문제 아닌 걸까? 나에게 처방된 약은 안 좋은 것보다 장점을 더 가져다줬지만 이 기억력과 관련한 문제는 왠지 모르게 단점으로 느껴진다. 내가 누군지 기억에 난다. 그런데 오늘 해야 할 일이 가끔 생각이 안 난다. 플루옥세틴이라는 약이 정말 기억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걸까. 아니라는 답도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함이 남는다.
찜찜함. 오히려 이 찜찜함이 내 삶에서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우울한 무언가를 분출하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내가 느낀 걸 감상을 나누고 싶어서 쓰지만 어렸을 때는 그랬다. 이 찜찜함은 '왜 우울해졌을까'도 갉아먹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는 뜻일까. '왜 그랬어?'라고 물으면 줄줄줄 나올 것 같지만 이제는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뭐였지? 분명히 기억에 남아야 할 텐데. 기억하지 않으면 나는 그렇게 멈춰 서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성공해서 누군가의 위에 남아야만 한다고 여겼던 독기가 요즘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 가끔 짜증이 난다. 분명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사실인데 말이다. 내면의 분노만 기억에 남았다. 무엇이 그 일을 구성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이렇게 나처럼 내면의 분노를 지우지 못했던 인물이 있다. 이 사람은 현재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이 남자의 복수극에 동행해보자. <리멤버>다.
응어리진 채로 뱉은 넋두리
하나하나 다 잊혀간다. 뭐가 기억에 없어졌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덧 여든이다. 80대, 고령에 돌입한 한필주는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다. 한필주의 머릿속에는 기생충이 있다. 알츠하이머라는 기생충이다. 필주의 일상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간다. 브레이크 타임. 낮잠을 자고 있던 필주. 귀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오늘은 잊은 것이 없구나. 아무렇지 않은 척 제이슨의 인사에 응답한다. 이번 주면 이 일을 그만둔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일하는 필주. 프레디란 이름으로 탈을 썼던 하루하루도 이제 빛을 발하는 때가 됐다. 자식들은 다 가정을 꾸렸다. 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완벽히 혼자가 될 준비가 됐다.
혼자가 될 준비가 됐다. 책임질 것이 없다는 것은 많은 것이 열려있다는 의미가 된다. 눈이 풀려있던 필주. 갑자기 눈에 힘이 들어온다. 필주는 집 안에 있던 허름한 방으로 향한다. 카메라가 있었다. 카메라를 앞에 선 필주. 한두 마디 내뱉는다. "저는 한필주입니다. 제 가족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에게 누명을 써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이유로 광인이 되셨고, 누나는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일제에게 성착취를 당했습니다." 그의 손에 권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다. 카메라가 향하는 곳은 사진들이다. 정치인, 전직 군인, 일본인 학자 등 한필주는 오랫동안 이들을 목표로 복수극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행히 전등을 쏴서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한필주의 기력은 충분하다. 머릿속이 채 무너지기 전에 먼저 떠난 가족들의 복수극을 실행해야 한다. 한필주는 목표를 달성하고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까?
재미있는 영화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재미있다. 장르적인 특성을 아주 잘 잡았다. 장르를 굳이 따지면 스릴러물에 가깝다. 어? 액션 들어가는 것 같던데?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한필주가 80대인걸 고려하면 빠릿빠릿한 액션이 들어갈 틈이 없다. 그 대신 스릴러물로 서스펜스를 만드는 방식이 다양한 것은 강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주인공 한필주의 '알츠하이머' 진단이다. 기억을 잊는 병. 이 기억이 없어지는 시기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서 이렇게 들어갑니다~' 말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자체로도 서스펜스가 생길 수 있다. 주인공이 언제 기억을 잊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시각적인 이미지와 알약이라는 소재로 짜임새 있는 묘사를 보여줬다. 이 알츠하이머라는 소재가 편의적으로 들어간 부분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지점은 한필주의 복수극이다. 주인공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인물은 가족을 죽인 친일파를 처단해야 한다. 그럼 이 복수극이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는가?를 영화 안에서 보여줘야 한다. 이를 영화는 캐릭터의 속성으로 돌파하는데, 구체적으로 이를 위해 초반부의 군데군데 삽입한 한필주의 성격 묘사나 전쟁 영웅 출신이었다는 설정이 인물을 살아 숨 쉬게 만든다. 또 복수극을 벌이면서 한필주는 자잘자잘한 문제에 부딪히는데, 이 부분을 일반적인 형태가 아닌 창의적인 방식을 썼다는 것도 이 부분의 장르 특성을 강화시킨 좋은 해결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영화에서 서스펜스를 만드는 소재로는 추격극이 있다. 초반부에 피살되는 인물은 굉장히 큰 기업의 CEO로 보인다. 아마 자기가 만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재계에서 알아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죽으면 엄청나게 관심이 끌린다. 이를 기점으로 정만식 배우가 맡은 형사 캐릭터가 한필주의 행보를 좇는다. 여기서 경찰 캐릭터를 단순히 권력에 굴복하거나 무능력하기만 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도 충분히 장점으로 뽑을 수 있는 부분이다. 주인공 일행을 뒤쫓는 사람의 입장이자 사건의 관찰자로서 일반 관객들을 대면하는 설정이 좋았다. 이야기의 흐름을 깨지 않는 선에서 과하지 않게 캐릭터를 직조한 것이다. 또 다른 요소로는 주인공 인규의 속사정이다. 인규는 그냥 한국의 평범한 20대다. 피시방에서 게임하는 거,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 인물이 어떻게 필주의 복수극에 동참할 수 있었냐? 의 원인이 극에서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인물이 왜 동화될 수밖에 없는지를 섬세하게 그리며 극에서 인물에게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 네 가지 스릴러 요소가 극 이해를 돕는 윤활유가 되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지루하진 않다. <콜래트럴>의 형식을 차용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영화 자체의 오리지널리티가 장르적인 특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치밀하게 그린 큰 그림
그리고 영화에서 장점으로 작용했던 부분은 큰 갈래를 잘 설정했다는 부분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인공 한필주의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세팅은 주제와도 이어진다. 주인공이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또 잊어버렸는지가 영화에서 주요하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와 관련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묘사가 관객 입장에서 '이 사람이 이런 걸 기억하고 있네'라고 두 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하이라이트 신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때 굉장히 중요하게 작동한다. 어떤 인물은 무언가를 기억하지만 다른 중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 대비가 악한 무리로 속해있는 빌런들의 후안무치를 두드러지게 묘사하는 효과를 낸다. 또한 이 인물이 이 일을 벌이는 동기부여의 설계는 탁월했다. 이 부분은 극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극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지점이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이 한필주의 동기부여라고 생각한다.
또 초반부의 이야기 전개가 후반부에서 잘 회수되는 부분도 각본의 큰 그림을 느끼게 한다. 주인공 한필주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인물이다. 영화의 다른 한 구석에서 한필주가 그렇게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럼 이렇게 우리나라를 위해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인물이 이런 곤궁한 상황을 겪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직 군인이라는 설정은 후반부까지 무력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부분과도 이어진다. 또 하이라이트 신에서 인물의 행보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 각본의 큰 그림은 후반부에 그대로 이어진다. 가령 인규의 속사정을 알 수 있는 부분에서 3자의 인물이 끼어든다. 이 3자의 인물이 끼어든다는 암시가 초반부에 인규가 어떤 걸 확인하면서 나온다. 그리고 이 인물이 중반부에도, 후반부에도 등장한다. 그냥 단순히 떡밥 회수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인규의 동기부여와도 관련이 있으며 인물의 행보를 가로지르는 주요 인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나름 꼼꼼했던 인물 설정을 느낄 수 있다. 극에서 크게 막히는 부분이 없으니 몰입이 잘 되는 것이다.
바퀴에 칼이 꽂힌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점은 있다. 바로 각본의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선 초반부에 한필주가 얼마나 섬세한 인간인지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진상 손님이 제이슨(인규)의 4만 원을 갖고 튀게 생겼다. 억울한 인규. 이런 인규를 대신해서 4만 원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이 설계까진 좋았다. 지갑을 놓고 간 것을 빌미로 센스를 보여주던 필주. 그런데 이 사람이 4만 원을 뺏기기 위해서 음식점에서 계산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음식점에서 뭔가 먹을 때 언제 계산할까? 바로 다 먹고 계산한다. 계산 딱 하고 일행이랑 차 타고 집에 안녕하고 사라지는 게 우리 모습이다. 그런데 이 일반적인 과정을 살짝 무시한 느낌이 있다. 물리적인 시간이 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이와 비슷한 부분에서 경찰 캐릭터랑 한필주 캐릭터가 대면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있고 나서 한필주 캐릭터와 경찰 캐릭터의 행보는 굉장히 편의적으로 끼워 맞춘 부분이 있다. 우리가 만약에 경찰 캐릭터의 입장이라고 봤을 때, 이 시퀀스의 후반부쯤에 그럴만한 객관적 이유를 제시하긴 하지만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이런 김새는 느낌은 대사 작문법에도 이어진다. 군데군데 조악한 대사들이 눈에 보인다. 일단 초반부. 인규(제이슨)와 필주(프레디)가 우정을 묘사하는 방법이 없다. 핸드사인을 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야. 우리 PC방 갈래? 나 롤 배웠는데.' '(음식을 먹으며) 너무 JMT야!' 전부 80대 할아버지 필주의 입에서 나온 대사다. 글쓴이는 1997년 생이다. 글쓴이의 입에서 'JMT'란 단어가 나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또 '리그 오브 레전드'를 안 한지 거의 2년이 넘어간다. 굳이 할아버지와 20대 청년과의 우정을 이런 식으로 묘사할 이유가 있을까? 굉장히 불필요한 부분이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두 사람의 우정을 묘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정을 보여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근데 그걸 어울리지도 않는 방식으로, 현실성도 느껴지지 않는 말을 하면서 보여줄 이유가 있나? 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런 조악함은 러닝타임 도중에도 몇 번 더 나타난다. 후반부에 한필주가 복수극을 펼치면서 어떤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직접 자기 입으로 '나는 친일파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때 인물 간이 처해있는 입장에 굉장히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거지! 이거 위해서 영화 만들었지! 그런데 그 '친일파다!'대사가 들어가니까 굉장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굳이 그 장면에서 그게 들어가지 않아도 감정적으로 들끓는데 말이다.
또 영화 극후 반부에서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이 끝마무리되고 극에서 굉장히 중요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신이 있다. 여기서 나누는 모든 대화가 전부 다 사족같이 느껴졌다. 여기서 어떤 인물이 한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 영화를 봤던 모든 사람이라면 이 문장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나 쓰고 있는 글쓴이도 역사의 죄인들이 합당한 벌을 받았으면 한다. 그런데 이 말을 굳이 꺼내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는 의문이다. 이는 바로 직전 시퀀스에서 이 평가를 말했던 인물의 대사와도 어울리지 않으며 신파극처럼 느끼기도 쉬운 데다가 얼핏 보면 이 친일파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초를 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왜 이 영화를 볼까? 친일파를 처단하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왜 카타르시스를 느낄까? 현실에서 이뤄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왜? 어떤 친일파는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 한국사회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 또 우리가 사적 복수로 누군가를 처단하는 일이 불법이기 때문이다. 대체역사물의 느낌으로 영화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평가를 굳이 입으로 말한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친일파들은 감옥에 가서 자연사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이 평가가 전체적인 흐름을 크게 비트는 것처럼 들린다. '이 정도면 잘 만든 스릴러' '이 정도면 잘 설계한 메시지' '친일파를 잊어버리면 안 되지' 싶은 것이 '?????' 싶은 결함을 남기는 옥에 티였다.
기억에 남을 것 같아
많이 아쉽다. 기대를 아예 안 하고 갔다. 그런데 의외로 재밌었다. 올해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준비하며 일제의 만행에 대해 공부했다. 그 공부했을 때 느꼈던 화가 스르르 생각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어떤 정치인이 이와 관련된 망언을 했다. 이 부분도 생각났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질렀다. 그 타인이 누군가를 해친 것이 아닌 한 성적으로 착취하거나 폭력을 벌이는 짓이 잘하는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마치 이를 합리화하는 듯한 그 국회의원의 말에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그 국회의원의 말을 반박하는 것 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뿐일까? 극에서 2022년 10월 말의 대한민국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얼마 전에 한 기업체에서 근무하던 노동자 분이 세상을 떠났다. 이 노동자 분을 생각하게 만드는 키워드가 극에서 중요하게 쓰였다. 당연히 나 역시 화가 났던 일이기 때문에 같이 분노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을 후반부에서 중요하게 작동시키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 사회에 산재해 있는 언급되지 않는 사건사고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윗 문단, 그러니까 후반부에서 대사가 아쉬웠다고 썼던 그 시퀀스를 보고 나니 상기했던 단점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쉽다. 더 꼼꼼했으면 이런 단점이 생각나지 않았을 텐데, 싶은 것이다. 이성민, 남주혁 두 배우 연기 엄청 잘했다. 이성민 배우는 <남산의 부장들>보다 더 잘했고, 남주혁 배우는 <한산>의 와키자카를 연상케 하는 뛰어난 퍼포먼스였다. 메시지도 좋고. 서스펜스 좋고. 배우 연기 잘했고. 캐릭터 캐스팅 좋았고. 그런데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단점이 뚜렷하니 좋은 평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산>보다 더 흥행할 수 있는 영화가 꼼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굉장히 아쉬웠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에겐 추천하고 싶진 않지만, 분기마다 한 번씩 가는 분들에겐 추천하고 싶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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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홈>, 괴물화의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이유
넷플릭스 최고 히트작 중 하나, <스위트홈>.
내가 평상시 선호하는 장르(잔인함+ 폭력성+공포/ 크리쳐물)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스위트홈>에 열광하나"하는 궁금증에서 올해 초 정주행을 시작했고, 그 여정은 2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편당 50분 정도의 분량이었지만, 체감상 10~20분 정도 되는 것처럼, 그야말로 '순삭'이었다.
이렇게 평상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에 푹 빠진 것도 참 드문 체험이다.
<스위트홈>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전제들!
'정체불명의 원인으로(욕망으로 추정) 괴물화가 되가는 사람들'
누가, 왜 괴물이 되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욕망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그 욕망이라는 것도 비구체적이다. 욕망이 없는자가 있겠는가.
절망, 좌절을 심하게 겪은 사람이 괴물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작품 속에서 정말 멀쩡해보이는 사람도, 차분하고 의롭고 냉정해 보이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갑자기 괴물이 된다. 아무 이유없이. 아무 맥락없이. 허무하게.
(그러고보니, 긴급속보를 발표하던 대통령도 생방송 중에 갑자기 괴물이 된다.)
<스위트홈> 속 괴물들 1
<스위트홈> 속 괴물들 2
결국, <스위트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정, 세계관은 이것이다.
괴물이 되는 자와 여전히 사람으로 남은자 간의 '차이점'이 없다.
모두가 '잠재적 괴물'이다. 누구 한 사람 빠지지 않고. 너도. 나도.어떤 블로그 리뷰에서, <괴물화가 되는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것이 이 작품의 논리적 허점>이라고 쓴 것을 보았다.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괴물화가 되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괴물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나만은 절대 "괴물"이 안될 것이라 자신할 수 있는가.
별거 아닌 일에도, '나 지금 피곤하다, 나 지금 힘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괴물같은 모습이 불쑥 불쑥 튀어 나올 때가 있다.
특히 아이를 키우며 더 그렇다.
나에게도 "나쁜 어른, 나쁜 부모"의 모습이 종종 튀어나온다.
나도 모르게 아이를 대하면서 "괴물"같은 모습이 되는 순간이 있다.
별거 아닌 일에 소리지르고 화를 내며 윽박지른다. 내가 힘들다는 핑계로.
뉴스 속 괴물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라고 욕을 하면서,
나와 그 사람들을 구분지으면서, '에이,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하면서,
나는 괴물이 아닌 것처럼, 나는 마치 "성숙한 어른"인 것처럼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스위트홈> 속 '괴물'보다 더 악질인 '인간들'
<스위트홈>에도, 괴물보다 더 괴물같은, 진짜 악질 인간들이 등장한다.
여전히 사람의 탈을 쓰고 있으나 그 속은 더이상 사람이 아닌 괴물들.
<스위트홈>에 내가 끌렸던 이유를 이해했다.
원인불명의 괴물화에 수긍한 이유.
'나'도 언제든 '괴물화'가 될 수 있으니까.
<스위트홈> 메인 주인공 '현수'는 '특수감염인'으로 분리된다. 괴물이 되긴 되었는데, 다른 괴물과는 달리 여전히 사람의 본성이 남아 있는 존재! 괴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괴물의 무시무시한 힘과 사람의 자제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특수감염인.
나 역시 특수감염인이 아닌가.
코피를 쏟고 있는 특수감염인 '현수'
현수는 괴물이 되기 기전 폭포수 같은 피를 쏟는다.
'코피'는 중요한 상징이다. 코피가 마구마구 쏟아지는 것은 그 사람이 '괴물화'가 되고 있다는 전조증상이다. 일종의 신호다. '너 곧 괴물된다!'
쏟아지는 코피를 보며 자신이 괴물화가 되고 있음에 충격을 받은 <스위트홈> 속 등장인물
특수감염인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괴물이 될 때 '코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스위트홈> 속에서 주인공 현수가 '특수감염인'인 것을 알게 된 주민들이, 현수를 방출할 것인지 남길 것인지 '투표'하는 장면은 참 의미심장하다.
현수를 방출할지 말지 투표하는 생존자 주민들
특수감염인 현수를 추방할 것인가 우리와 함께 지내게 할 것인가.
무서워서 당연히 현수를 방출시키자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으나, 그 결과는 의외였다.
팽팽한 접전! 추방시키자는 사람들, 남기자는 사람들이 반으로 나뉜다.
다들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도 언제든지 괴물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괴물은 무섭고 내쫓고 싶지만, 한편으로 그 내쫓겨지는 것이 언제든 내가 될 수도 있으니,
쉽게 내쫓지도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 갑자기 폭포수 같은 코피를 쏟아내면, 주변 사람들은 '저 사람도 괴물화가 되고 있군!'을 알아채고 겁을 먹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코피'를 쏟아내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스위트 홈> 살아남은 주민들은 괴물화가 되고 안되고의 여부를 떠나, 모두 자기만의 치부를, 자기만의 약점을, 자기만의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자국을 남긴다. 코피처럼 당장에 눈에 확 드러나는 자국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자국을 남기고야 만다.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가하거나, 상대방에게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 하거나, 상대를 근거없이 의심하고 비방하는 등의 모습들..)
그 코피 만큼이나 빨갛고, 선명하고, 무섭고, 자국이 강하게 남아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무언가를, 밖으로 쏟아내면서 그것이 괴물화의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 수도.
나는 괴물이 아니라고, 괴물과 다르다고,
괴물과 나를 구분지으며, 내 코피를 슬쩍 슬쩍 닦아내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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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속으로...스웨덴] 사랑이라는 모순에 대해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트와일라잇>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뱀파이어의 인기를 체감케 한 소설로도 잘 알려진 <렛 미 인>은 두 차례 리메이크 될 정도로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전무후무한 서정 뱀파이어물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리는 작품 중 하나이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해당 영화는 원작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스톡홀름 외곽의 소도시 블라케베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로 단순 로맨스를 넘어 관객들로 하여금 갇혀있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된 일종의 성장과도 같은 묘한 감상을 갖게 한다는 작품으로도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이야기는 일 년 중 반절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눈이 내리는 그야말로 열기의 화창함과는 상반된 곳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온 세상의 소음을 흡수할 정도의 눈이 내린 어느 날, 고요 속에 살아 숨쉬던 도시는 소녀 '이엘리' 를 맞이하게 되고 소년 '오스칼'은 그녀의 비밀에 점차 다가가게 된다.
혹시 누군가와의 사랑이 세계를 바꿔놓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여기 소년 오스칼의 세계가 그러하다. 이엘리라는 소녀와의 만남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그녀가 단순히 뱀파이어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스칼은 지속적인 학교 폭력에 노출되어있는 인물로 유일한 여가라고는 단조로운 아파트를 뛰쳐나가 자신을 괴롭히는 상대를 흉내내며 그를 찌르는 상상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 눈 내리는 고요한 놀이터를 배경으로 그렇게 폭력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던 두 소년과 소녀는 만나게 된다.
오스칼이 이엘리에게 빠지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하다.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외톨이었던 자신의 새로운 친구일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가해의 흔적을 발견하는 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어른들이 제안하는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다름 아닌 폭력이다. 밤이 찾아오면 더욱 고요해지는 이 곳에서 두 사람의 세계는 그렇게 맞물린다. 그야말로 더 큰 성찰로 나아가지 못한 단순한 아이들의 해결책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유혹적이다. 오스칼은 어쩌면 어른 그 이상을 웃도는 나이이나 영원히 12살로 살아가는 이엘리에게서 폭력 이라는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오스칼은 그런 이엘리의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시간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겪게 된다.
영화는 그야말로 이러한 모순의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채 조용하나 거침없는 전개를 선보인다. 냉전 이후 처절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치열하지도 않는 삶을 사는 후기 산업 사회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여가라곤 산책과 수다가 전부인 삶을 산다. 이를 배경으로 폭력으로 하나가 되는 두 아이는 모순적이다. 폭력을 통해 폭력 속에서 구원 받는다는 서사는 물론 그들을 둘러 싼 한 밤 중 눈부신 눈더미와 같은 배경 역시 아이러니의 이미지를 갖는다. 제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엘리라는 비극은 초대 받아야 들어올 수 있는 존재이다. <렛 미 인>은 극중에도 강조되어 등장하지만 뱀파이어인 그녀가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지만 누군가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인다. 이엘리의 보호자였던 호키는 물론 오스칼 역시 그녀를 자진해 맞이한다. 그렇게 의도된 모순들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말 마저 이엘리가 과연 오스카를 이용하는 것인지 사랑하는 것인지 의문을 남기는 와중 그들이 결국 알면서도 선택한 비극이라는 모순이 갖는 의미와도 같은 지점이 강조되기에 서정을 자극한다 볼 수 있다. 순리는 납득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큰 울림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예외는 그 자체로도 모순을 품고있으나 특별함을 갖고 있다. 영화 <렛 미 인>이 보여주는 서사 또한 그러하다. 더불어 12살 아이인 오스칼의 시점이기에 관객은 일정 부분 그의 나이대로 돌아가 잘못된 것임에도 그 선택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 다시 주요 소재를 살펴본다면 왜 모순이 갖는 단점이 해당 영화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지 알 수 있다.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은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뱀파이어라는 특정 설정 역시 모순의 일종으로 십분 작용한다. 사실 뱀파이어는 근사한 외모와 비극적 배경으로 여러 콘텐츠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어주나 현실을 사는 뱀파이어는 어쩌면 그 환상과는 꽤 큰 차이를 보일지 모른다. 우선 콘텐츠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이들은 피를 섭취하며 그 외의 음식물에는 몸이 먼저 거부감을 보인다. 그렇기에 늘 살인이 따라 다님으로 유랑이 불가피하다. 또한 대체로 평생을 살며 이들의 시간은 추정컨대 죽음을 맞이한 날에 멈춰져있다. 그것을 장점으로 부를 쌓는 류의 스토리도 다수 존재하나 이엘리의 시간은 12살에 멈춰져있다. 경제 활동은 물론 법적으로 홀로 살아가기에 장벽이 존재하는 나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엘리는 보호자 호킨의 사냥을 통해 피를 공급 받으며 살아간다. 여기서 이 호킨과 이엘리의 관계성이 영화 속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소녀인 이엘리에 비해 호킨은 아버지로 보일법한 외모의 어른이다. 그는 이엘리를 위해 낯선 곳에서 사냥을 시작하지만 어쩐지 그의 행동은 허술하기만 하다. 제대로 된 피를 구하기도 전에 사람들에 의해 장비를 잃어버리기도, 제대로 된 사전 조사 없이 사냥감을 구하려다 모든 것을 망쳐버리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고마움은 커녕 이엘리는 모질게 대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호킨은 불평하지 않는다. 그 어떤 감정의 표현 없이 이엘리만을 위한다. 그가 딱 한 번 자신의 의견을 소리내 말하는 것은 오스칼과의 만남을 중단하라는 때 뿐이다. 그리고 그는 실패한 사냥을 책임지기 위해, 더 나아가 이엘리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얼굴 위로 염산을 부어 끝내 이엘리의 허기를 채워주게 된다. 그렇다면 이 관계성은 영화 속 서사에 왜 들어가게 된 것일까.
호킨의 마지막 대사가 '이엘리' 였음으로 미루어보건데 이들은 부녀지간이 아닌 연인 사이였음이 암시된다. 호킨 역시 오스칼의 나이에 그녀를 따라 나섰던 것일지 모르며 그렇게 호킨의 시간 역시 이엘리와 만나는 그 순간 멈춰버렸을지 모른다. 끝까지 이엘리에게 헌신하는 감정이 사랑이라면 어쩌면 결국 이엘리에게 구원 받았음으로 함께 길을 떠나게 된 오스칼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 역시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호킨과의 관계성을 통해 한 차례 그들의 미래가 예고된 바와 달리 결말은 기차 차장 너머 한껏 들어오는 햇살을 강조하며 아름다운 새출발로 묘사된다. 오스칼은 그 환한 빛을 맞이하며 어둠 속에 잠긴 자신의 사랑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내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아침과도 같은 사랑의 시작이 결국 밤의 희생양이 되는 호킨의 결말처럼 끝나리라는 일종의 예고, 순환의 흔적은 잔인하나 동시에 찬란하기도 하다.
엔딩 크레딧 역시 마찬가지이다. 눈을 꽉 감은 채로 강한 빛을 마주하면 눈 앞을 가득 채웠던 어둠은 점차 붉은 색의 빛으로 물든다. 검은 엔딩 크레딧의 배경은 꽉 감았던 오스칼의 시야를 대변하듯 칠흑같은 어둠의 색이었다가 점차 피붉은 색으로 변화한다. 오스칼이 최후가 어쩌면 호킨의 최후처럼 반복되는 일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오스칼의 세상, 권태와 폭력에 노출되어있던 세상은 이엘리라는 광폭적인 사랑에 의해 변화를 맞이했다. 이는 명백한 구원이다. 눈부시도록 밝은 수영장에서 죽음의 위기에 놓였던 오스칼이 이엘리를 바라보기 훨씬 이전부터 구원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오스칼 뿐일까? 더 짙은 어둠을 찾아, 더욱 긴 겨울을 찾아 유랑하던 이엘리는 이제 어둠 속에서 먼저 오스칼을 향해 신호를 보낸다. 어쩌면 오스칼의 존재는 단순 호킨의 대체제가 아닌, 다시 시작된 시간 즉 영원을 사는 이가 다시금 맞이하는 원형의 시간일지 모른다.
눈 부시도록 시린 스웨덴의 눈은 아이러니 하게도 긴 밤과 함께 찾아온다. 추위도 잊은 소녀에게 오스칼은 과연 무엇을 깨닫게 해준 것일까. 찬안한 밤의 설원은 그렇게 두 사람을 방관한다. 관객들 역시 그 끝이 비극일지 찬란할지 알 수 없으나 소년과 소녀를 다른 시간으로 보내줄 수 밖에 없다.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알고 있으나 그 끝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소재이기도 하다. 사랑의 모순됨은 그렇기에 우리가 가장 열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가장 많은 색을 띄고 있는 것 역시 그때문일지 모른다. 내 삶이 슬펐기에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노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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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니스 엔드
저니스 엔드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는데, 어느 순간, 이 영화는 매우 '개인적'이고 '연극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아무 정보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었고, 영국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 선택했다.
영화를 다 보고 영화정보를 찾아보니, 내 느낌이 정확하게 맞아서 신기했다. 이 영화는 R. C. 셰리프가 1928년에 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셰리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장교로 참전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을 썼다.
잘 알려진 것처럼, 1차 세계대전은 재래식 무기로 싸운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쟁이다.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이 이 기록을 깨지만, 불과 20년 사이 무기의 발달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연합군은 4천3백만 명이 참전했고, 사망자와 실종자(사망으로 추정)를 합하면 1천만 명이 넘었다. 즉, 4명 가운데 한 명이 전사한 것이다. 여기에 부상자가 1천2백만 명이었으니 사상자로 보면 4명 가운데 2명은 죽거나 다친 것이다.
동맹국은 2천5백만 명이 참전했는데, 사망자와 실종자가 8백만 명이고, 부상자도 8백만 명 정도다. 사상자가 1천6백만 명이니 통계로 보면 동맹국 군인의 피해가 더 컸다.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당연히 2차 세계대전이 훨씬 많지만, 2차 세계대전의 무기는 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파괴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는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전선을 따라 참호를 길게 파고, 진지를 구축한 다음, 적과 대치한다.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상대 참호를 점령해야 하고, 그렇게 병사들의 몸뚱이를 갈아넣으면서 전쟁은 끝없는 소모전으로 변해갔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문학작품이 많다. 가장 유명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비롯해 최근에 개봉한 영화 '1917' 그래픽노블 '1914-1918' 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 가운데 존 엘리스가 쓴 '참호에 갇힌 1차 세계대전'을 보면, 이 전쟁이 '참호전'이라는 특징을 얻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참전 군인 대부분은 참호에서 생활한다. 전선을 따라 길고 복잡하게 만든 참호는 아군의 기지 역할을 하고, 안전한 방어진지이면서, 적을 공격할 때도 빠르게 기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적과 아군의 참호 거리는 불과 50미터여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으며, 상대방에게 심리전 - 음악, 방송 등 - 을 펼칠 수 있고, 심지어 적군이어도 임시 휴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참호는 안전하지만 매우 비좁고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발이 빠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여기에 쥐가 들끓고, 미쳐 거두지 못한 아군 병사의 시신을 참호 바깥쪽에 땅을 파서 메워 벽을 만들기도 했다.
영화는 참호 생활의 어려움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개인적'이고 '연극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부분은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가 참호생활의 묘사였고, 다른 하나는 군인들 - 장교와 사병 - 특히 장교들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롤리 소위는 이제 막 장교 훈련을 마치고 임관한 앳된 소위다. 그는 전방 연대로 전입 인사를 하러 왔다가 사단장을 찾는다. 사단장은 롤리 소위의 삼촌(외삼촌)이다. 이 정도 빽이면 좋은 보직을 받아 안전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롤리 소위는 최전방 대대로 배속해달라고 요청한다. 스탠호프 대위가 대대장으로 있는 그 대대로 꼭 배속을 해달라는 롤리 소위의 부탁에, 사단장도 어쩔 수 없다며 수긍한다.
롤리 소위와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 전에 함께 살던 사이였다. 롤리 소위의 집안은 명문가로 부유한 - 아마 귀족일 수도 있다 - 집안이었고, 그런 롤리의 저택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던 사람이 스탠호프였다. 스탠호프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입대해 지금은 대위가 되었고, 사단에서 유명한 전설적인 대대장이 되었다.
반면 롤리 소위는 학군장교였다가 최근 8주 훈련을 마치고 이제 막 전방부대로 배속받은 신참이었다. 롤리 소위의 기억으로 스탠호프는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롤리, 롤리의 누나와 함께 셋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추억이 있었다.
프랑스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는 대대는 이제 막 직전 부대와 임무 교대를 하고, 앞으로 6일 동안 참호에서 대기하며 독일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방어 임무를 맡았다. 전선은 벌써 몇달 째 교착상태에 있었고, 소문으로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소문 속에서 이미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롤리 소위는 전쟁 전의 스탠호프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참호에서 본 대대장 스탠호프는 롤리 소위의 기억에 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전입인사를 하러 온 롤리를 바라보는 스탠호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친동생 같은 롤리였지만, 최전선에서 만나는 롤리를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그의 내부에서 뒤섞이며 심한 내적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눈동자의 흔들림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전설적인 군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탁월한 지휘관으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지휘관으로 누구보다 병사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승리하지만, 그만큼 많은 병사를 잃은 스탠호프 대위는, 부하 병사들 한 명, 한 명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료가 그렇게 허무하게 주검으로 변하는 장면을 보면서 비통한 감정과 그 감정을 누르고 전투를 치러야 하는 지휘관으로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결국 스탠호프 대위는 견디기 힘든 감정을 억누르려 술을 마시게 되고, 거의 알콜중독에 이르게 된다. 롤리 소위가 스탠호프 대위를 만난 이후, 이야기는 스탠호프 대위를 둘러싸고 측근인 부하 장교들과 연대장의 대화, 갈등을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영국군은 첩보를 통해 3월 21일, 독일군이 공격할 거라는 정보를 얻지만, 확실한 정보를 알기 위해 스탠호프 대대에 독일군을 생포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스탠호프 대위는 더 어두워진 다음 공격하자고 주장하지만, 연대장은 상급부대에 보고해야 한다며 오후5시에 공격하라고 다그친다. 이는 분명 병사들이 더 많이 죽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스탠호프 대위는 연대장에게 반발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친다.
두 명의 장교와 여덟 명의 병사로 침투조를 짜는데, 지휘장교로 스탠호프 대위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가장 친하게 지낸 오스본 중위가 차출되고, 롤리 소위는 자원한다. 그렇게 독일군 생포작전이 시작되고, 열 명의 군인이 독일군 참호로 뛰어들어 독일군 한 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하지만, 살아돌아온 군인은 롤리 소위와 네 명의 병사였다.
전쟁에서 군인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적군을 더 많이 죽이는 방법이 유일했던 전쟁이 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런 잔혹한 전술 앞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스탠호프 대위의 심정은 갈갈이 찢겨나간다.
참호 안에서 일어나는 장교들의 갈등, 장교와 사병의 갈등은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 스탠호프 대위는 마치 햄릿처럼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전쟁에 끌려들어온 '개인'이며, 명분이라고는 오로지 '국가의 이익'인데, '국가'는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단지 '애국심'만으로 명분을 찾기에는 이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개개인에게 깊은 내면의 상처를 입히고 있다.
스탠호프 대위의 대대가 참호로 들어간 지 나흘째 되는 날, 독일군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나중에 알려지지만, 이날의 공격은 독일군의 '춘계 대공습'으로 기록되었고, 단 사흘의 전투로 양쪽에서 무려 7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독일군의 포격으로 롤리 소위는 등에 부상을 입고 스탠호프 대위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스탠호프 대위는 포탄이 어지럽게 터지는 참호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다. 그렇게 참호에 있던 영국군 대대는 전멸한다. 포연이 그치고, 전멸한 영국군 사이를 걷는 독일군은 방독면을 쓰고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썼다는 주장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쳐가듯 잠깐 독일군이 방독면을 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참혹성을 알리고 있다.
전투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극한 상황이라 결코 낭만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없고, 어떤 예측도 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기 때문에, 군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런 대규모 살상전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고 우연이라면, 전사한 병사 역시 그의 죽음은 우연일 뿐이다. 문제는, 인간의 존재가 이런 불분명한 명분 때문에 도구로, 소모품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딜레마를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 개개인은 전쟁의 거대한 구조를 깨뜨리지 못한다. 결국 구조의 틀에 갇힌 개인은 자신의 삶,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죽음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며, 이런 모순과 갈등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인 것이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지만, 인간의 존재와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 내면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보편적 공감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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