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7-22 15:34:42
다른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순간.
영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리뷰
이 무더운 여름조차 싱그러운 분위기로 새겨주어 본격 여름이 그리워지는 영화인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를 소개하려고 한다. 세대와 세대를 잇고 마음과 마음을 잇는 따뜻한 영화는 2년이 넘은 지금도 바래지지 않은 채 색을 유지하고 따뜻함을 간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은 정말 많은 영화에서 다루어졌지만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일반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관계없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환갑을 맞은 정연은 일본에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딸을 만나러 일본에 간다. 비가 무수같이 떨어지는 날, 딸이 아닌 손녀인 안이 마중 나와 있다. 일면식도 없던 손녀와 택시를 타고 딸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은 정적 그 자체다. 손녀 안은 한마디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통화를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정연이 집을 돌아본다. 그 모습을 보던 안은 밖으로 나가자고 말하고 정연은 안과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긴 외출을 하고 돌아와 우연히 손녀의 휴대폰을 보게 된다. 두 사람은 오늘 하루를 잘 보낼 수 있을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갈 곳을 잃어버리다가 한 대상을 찾아 언제 끝날지 모를 원망을 자신을 상처 내면서 까지 쏟아붓는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져드는 원망이라는 마음은 누군가가 되짚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감정을 깨닫고, 인정하는 순간 왠지 모를 미안함과 민망함이 몰려오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나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도 없다. 의외의 지점에서 겹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언어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눈빛, 몸짓, 그 외의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아픔을 공유한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이루어져서 서로의 마음을 잘 두드릴 수 있었다. 타인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 좀 늦어도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는 모습이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짧게만 느껴지는 영화의 여운은 끊어지지 않을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안이 서울로 왔을 때, 서로 어떤 표정으로 다시 만날지 궁금해진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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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공자>의, 귀공자에 의한, 귀공자를 위한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불법 복싱 경기를 뛰며 어머니 수술비를 마련하던 복싱 선수 ‘마르코’(강태주). 어느 날, 평생 본 적 없는 한국인 아버지가 보낸 변호사가 마르코의 앞에 나타나고,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찾는다는 말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마르코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목숨을 건 추격전에 휘말린다. 비행기에서 잠깐 대화를 나눴던 정체불명의 남자 ‘귀공자’(김선호)는 곧장 마르코의 숨통을 조여 온다. 마르코의 이복형인 재벌 2세 ‘한 이사’(김강우)도, 필리핀에서 우연히 마르코와 만났던 ‘윤주’(고아라)도 제각각의 이유로 마르코를 쫓기 시작한다. 이처럼 영문 모를 추격전의 끝에서 마르코는 자기 인생을 바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또 한 번의 변주
한국형 누아르의 진수를 보여줬던 <신세계>. 빛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까? 박훈정 감독의 작품은 언제나 <신세계>와 비교될 운명이었다. 실제로 몇몇은 <신세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박훈정 감독은 꾸준히 변화를 시도했다. 누아르라는 장르 밖으로 나가지는 않되, 그 안에서 변주를 줬다. 일례로 <마녀>는 <신세계>와 달리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관객에게 어필했다.
<낙원의 밤>은 서사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꾀했다. 한국형 누아르의 관습적인 이야기를 거부했다. 의리와 정을 강조하는 사나이 대신 같은 트라우마를 지닌 두 남녀에게 주목했다. 우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족처럼 보이기도 하며, 이성 간의 사랑 같기도 한 이야기를 보여줬다. 덕분에 <낙원의 밤>은 서정적인 누아르였다.
박훈정 감독의 신작 <귀공자>도 마찬가지다. 이번 변화의 핵심은 캐릭터다. 공들여 만든 '귀공자'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장르, 이야기, 메시지를 마음껏 가지고 논다. 귀공자가 한 인물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에 가능한 시도다. 다만 성공적인 변화인지는 의문이다. '귀공자'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전반적인 균형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귀공자의 영화
귀공자. 처음 보거나 들으면 꽤 어색한 제목이다. 근래에 잘 쓰이지 않는 말이라서 오글거리거나 과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이보다 적확한 제목도 없는 듯하다. 따져 보면 이 영화는 어떤 맥락에서든 귀공자의 영화가 맞기 때문이다.
사전적으로 귀공자는 "귀한 집 아들. 또는 귀한 집 젊은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귀공자>에는 눈에 보이는 귀한 집 아들과 숨겨진 귀한 집 아들이 있다. 한 이사는 눈에 보이는 귀공자다. 재벌 2세인 그는 이복여동생 '가영'(정라엘)과 치열한 경영권 다툼 중이다. 마르코는 숨겨진 귀공자다. 필리핀에서 병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하루하루 연명하는 그. 마르코는 한 이사의 또 다른 이복동생이자, 귀한 집 아들로 밝혀진다.
<귀공자>는 기본적으로 이들의 추격전이다. 한 이사는 쫓고, 마르코는 쫓긴다. 한 이사는 급하다.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려 내서 유언 내용을 고쳐야 한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마르코를 사로잡으려고 한다. 그의 건강한 심장을 이식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으니. 아버지를 만나는 줄 알았던 마르코는 이내 필사적으로 도주한다. 평생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살던 그가 이복형을 위해 순순히 죽을 이유는 없다.
귀공자에 의한 영화
두 귀공자의 갈등을 틈타 속셈을 알 수 없는 세 번째 '귀공자'가 등장한다. 그 역시 귀공자의 사전적 정의에 부합한다. "생김새나 몸가짐이 의젓하고 고상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오프닝 장면에서 그는 마치 제임스 본드 같다. 깔끔한 패션과 헤어스타일을 자랑한다. 일 하는 솜씨도 프로다. 신속 정확하게 목표를 처리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속물적이다. 명품 구두에 피가 튀면 크게 화내며, 빗방울이 떨어지자 양복이 젖을까 봐 추격을 멈추기까지 한다. 그 덕분에 귀공자가 본모습인지, 귀공자를 동경하는 경박함이 진짜 정체인지 알기 어렵다.
그의 행적은 이러한 양면성을 반영한다. 러닝 타임이 지나도 그의 속셈은 오리무중이다. 그는 마르코를 한 이사에게 데려가던 사람들을 습격한다. 마르코를 빼낸 후에는 몸값으로 천만 달러를 요구하며 한 이사를 협박한다. 그렇다고 마냥 마르코를 돕지도 않는다. 스스로를 친구라고 소개하지만 정작 마르코에게 총을 겨누기도 한다. 선과 악이 분명한 한 이사와 마르코 사이에서 '귀공자'는 물음표가 가득한 영역에 발을 딛고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콘셉트도 그의 양면성과 맞닿아 있다. '귀공자'의 계획이 끝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보니 영화 분위기도 그의 행보에 따라 달라진다. 마르코가 추격전에 휘말리는 전반부는 진지한 누아르에 가깝다. 그런데 '귀공자'가 난입하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피 튀기는 액션과 만난 그의 유머와 기행이 무거움과 경박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룬다. 박훈정 표 누아르가 블랙코미디로 넘어가는 전환점인 셈이다.
귀공자를 위한 영화
이들 세 귀공자가 모이면 영화는 마침내 본심을 털어놓는다. 그 중심에는 한국인과 필리핀인 사이 혼혈 '코피노'가 있다. 전반부는 마르코의 일상을 자세히 비춘다. 그는 불법 복싱으로 어머니 치료비를 마련하다가 끝내 범죄를 저지른다. 아버지의 도움은 없다. 이 대목은 코피노에게 무관심한 한국 사회를 비판한다. 마르코와 한 이사의 만남도 문제를 고발한다. 한 이사는 마르코를 잡종이라 부르며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머니가 필리핀 사람이기 때문. 이는 서서히 이슈화되는 동남아 차별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영화적 상상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 <귀공자>의 시도는 더 인상적이다. 후반부에 '귀공자'는 자기도 코피노라고, 피 튀기는 추격전도 인질극도 다 자기가 계획한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 순간 귀공자 3명의 관계가, 익숙한 재벌가 다툼은 다시 쓰인다. 차별하는 한국인과 차별받는 코피노, 그리고 차별적인 사회 구조를 뒤엎으려는 코피노가 새롭게 보인다. 마르코의 진짜 정체를 둘러싼 반전도 허를 찌른다. 귀공자라는 허상조차 막지 못하는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일말의 아쉬움은 있다. 모든 코피노를 하나의 정체성 안에 가두는 섣부른 일반화가 눈에 띈다. 원색적인 언행을 걸러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귀공자>의 시도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슬픈 열대>가 본래 제목인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상업영화에서 코피노라는 소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귀공자만을 위한 결과
하지만 <귀공자>의 결과물은 기대 이하다. 과감한 시도는 좋았으나, 의도가 스크린 위에 온전히 구현되지는 않았다. 귀공자라는 키워드를 강조하려다 놓친 캐릭터가 많다.
고아라가 연기한 윤주가 대표적이다. 강렬한 첫인상과는 달리 그녀는 사건의 배경과 전개를 설명하는 기능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퇴장도 작위적이다. 추격전의 흐름을 한 번 더 꼬기 위해 갑자기 사라진다. <마녀>와 <낙원의 밤>에서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을 만든 전력이 있다 보니 이러한 활용법은 의아하기까지 하다.
'귀공자'라는 캐릭터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파생된 문제도 있다. 반전의 임팩트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에게 모든 역할을 몰아준 결과 다른 두 주인공은 그저 소모된다. 우선 매력적인 마스크를 지닌 신인 강태주를 찾아 놓고도 마르코를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그를 진중하고 수동적인 캐릭터로 설정하다 보니 친구가 되어야 할 '귀공자'와의 합이 잘 맞지 않는다. 복싱이라는 소재를 액션 영화가 살려내지 못한 것 역시 실망스럽다.
한 이사 역시 전반부와 후반부의 괴리가 두드러진다. 김강우의 광기 어린 연기는 인상적이지만, 그는 '귀공자' 주도로 장르가 전환될 때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전반부에는 무게감 있는 사이코패스였지만, 후반부에는 무게 잡는 척만 하는 평범한 악역으로 전락한다.
이에 더해 액션 누아르를 표방하는 영화치고 액션씬의 임팩트가 약하다. 카 체이싱 장면의 경우 템포가 다소 느리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을 비추는 앵글이 고정되어 있고, 차체를 비추는 앵글은 자동차 광고를 보는 듯하다. 그 결과 역동감이나 박진감이 부족하다. 잔인하게 피 튀기는 액션도 인상적이지 않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카메라 때문에 정확히 어떤 사건이 화면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박훈정 감독은 개봉 전 기자간담회에서 "차별받은 이들이 차별하는 이들에게 한 방 먹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귀공자와 코피노, 두 키워드를 엮어낸 스토리에서 그 의도는 분명하게 읽혔다. 하지만 그 의도가 스크린에서 적절하게 펼쳐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결과 이번에도 박훈정 감독의 변주는 절반의 성공으로 보인다. <신세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날도 다음을 기약한다.
Poor 형편없음
달리 말하면 김선호의, 김선호에 의한, 김선호를 위한 영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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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승부를 그려내다
조승우 필모깨기를 열심히 하며 발견한 작품 <퍼펙트 게임> 2010년대만 하더라도 스포츠 관련 영화가 굉장히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딱히 흥행하는 것이 없어보인다. 영화 <퍼펙트 게임> 역시 그 무렵에 나온 작품이다.
영화 <퍼펙트 게임> 시놉시스
대결을 원한 세상 속으로 꿈을 던진 두 남자, 최동원 선동열의 고독하고도 치열한 맞대결!! 불안과 격동의 1980년대, 프로야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전국민을 사로잡고 있었다!
노력과 끈기로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로 자리잡은 롯데의 최동원! 그리고 최동원의 뒤를 이어 떠오르는 해태의 천재 투수 선동열! 세상은 우정을 나누던 선후배였던 두 사람을 라이벌로 몰아세운다.
전적 1승 1패, 그리고 1987년 5월 16일, 자신들의 꿈을 걸어야 했던 최동원과 선동열의 마지막 맞대결이 펼쳐진다! 선동열 앞에서만은 큰 산이고 싶었던 최동원. 그 산을 뛰어 넘고 싶었던 선동열.
*해당 내용은 네이버 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퍼펙트 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비지엠 하나는 정말 잘 썼다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자이를 꼽아보자면 아마 영화에서 그 역할을 음향이 하지 않나 싶다. BGM을 비롯한 다양한 음향 요소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미세한 감정을 증폭시키면서 순간적으로 영화의 몰입도를 극대화 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의 매력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이 영화 <퍼펙트 게임>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이 와,,, BGM하나는 정말 잘 썼다! 였으니 말이다.
야구 경기의 스펙타클하고 빠른 전재를 보일 때와 최동원이 좌절하는 장면, 그리고 선동렬이 이 악물고 연습하는 장면 등 그때 그때의 캐릭터의 감정과 경기장의 분위기를 정말 잘 살릴 수 있는 음향적 요소를 굉장히 잘 활용해서 2시간이 넘는 조금은 긴 러닝타임 속에서도 지루함 없이 집중해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관객을 울리는 영화
개인적으로 영화를 감사하는 태도는 감독이 정해놓은 포인트대로 감상하며 눈물을 쏟아주고, 웃어주고 다 해놓고 비판하는 타입이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영화 <퍼펙트 게임>은 울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 작품이었다. 스포츠 정신을 강조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두 선수를 응원하며 두 선수를 중심으로 규합하는 롯데와 해태의 선수들을 보면서 그 찐한 우정과 승부욕에 감동을 안받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 장면이 과했다. 약간 스리스을쩍~ 넌지시 포인트를 잡는게 아니라 울어라!! 여기서 안 울면 이상한거다!! 이렇게 연출을 하고 있어서 그리고 그 당시에는 최동원과 선동렬이 거의 스포츠계의 영웅과 같은 사람들이었겠지만 약간 너무 신화화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까지?? 해야되나 싶었다. 물론 그 때 살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그들의 경기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두 선수의 빅매치가 어떠한 무게감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뭔가 그들의 이야기를 너무 극단적으로 신화화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신화화를 통해서 애써 감동포인트를 주려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그래도 연기력만큼은 뛰어났던 작품
최동원과 선동렬의 경기를 직접 봐본적이 없다. 심지어 유튜브를 통해서 남은 자료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나에게는 조승우와 양동근이 연기한 캐릭터로써 존재할 뿐이었다. 실제 인물과의 비교는 어렵겠지만 문외한으로써 느낀 영화 <퍼펙트 게임>은 야구선수들이 저렇게 훈련을 하고 경기에 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는 스토리라인만 제외한다면 약간 시대를 풍미했던 야구와 야구 선수들의 다큐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조승우와 양동근은 극 중에서 조승우와 양동근이라는 배우로 보인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초반 캐스팅이 됐을 때는 미스캐스팅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하던데 외적으로는 닮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최동원과 선동렬 선수의 캐릭터와 야구를 대하는 진심, 그들의 내적인 모습을 잘 캐치해서 표현했다고 느껴졌다.
시대의 이야기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재밌었던 영화 <퍼펙트 게임>. 감정과 신파에 예민하지만 않다면 뜨거운 승부를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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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녀의 잉태가 결코 축복일 수 없는 이유!
수녀가 임신했다. 과연 이 일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판단은 누가 주체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신부와 수녀들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축복하고, 임신을 맞닥뜨린 수녀는 저주처럼 느낄 것이다. 신이 내린 운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종교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한다면 오해 마시라. <이매큘레이트>의 내용이다. 티 하나 없이 깔끔한 의미를 지닌 제목과 달리, 극 후반부는 피로 범벅된 주인공 수녀의 모습을 마주하며 그녀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그만큼 영화는 수녀의 수난사인 동시에 한 여성의 수난사를 보여준다.
수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온 미국 소녀 세실리아(시드니 스위니)는 테데스키 신부(알바로 모르테) 소개로 어느 수녀원에 도착한다. 언어의 장벽은 물론, 악몽에 시달리는 등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그녀는 조금씩 타지에서의 적응을 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영문 모를 구토를 한 세실리아는 추기경과 신부에게 수녀가 되기 전 성관계 유무를 했냐는 질문을 받는다. 불쾌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녀. 신에게 선택받은 자로서 성당 모든이에게 축복을 받지만, 정작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 그리고 점점 이곳의 이상한 점을 알게 되고, 아무도 모르게 탈출을 감행한다.
<이매큘레이트>는 수녀의 임신이라는 소재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올해 상반기 개봉한 <오멘: 저주의 시작>이 떠오른다. 미국인 수녀가 홀로 이탈리아의 한 수녀원으로 온 후, 영문 모를 임신을 하는 설정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하지만 두 영화는 약속이나 한 듯 후반부에서 서로 각자의 길을 간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화자가 수녀이지만, 결국 시리즈의 악마 데미안의 실체를 찾아가는 여정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반대로 이 영화는 갑작스럽게 임신을 한 수녀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심리적 여정을 주의 깊게 아니, 끈질기게 따라간다.
보통의 수녀에서 성녀가 된 그녀의 삶은 한순간에 뒤바뀌는데,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초반 로우 앵글로 신을 비춘 것과 동일하게 성녀가 된 세실리아를 보여준다. 하루아침에 신격화가 된 세실리아를 우러러보는 수녀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안개 속에 싸여 있는 것 같은 수녀원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그녀는 신이 아닌 그릇된 믿음에 사로잡힌 이들이 누군가에게 바치는 재물처럼 여겨진다.
이후 세실리아가 겪는 고난의 과정이 그려지는데, 그 감정의 폭이 들쑥날쑥하다. 감독은 고난의 과정을 견고한 서사 흐름으로 보여주기보다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영상으로 오롯이 옮긴다. 마치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처럼 고통스런운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사가 아닌 심리의 방점을 둔 이야기 흐름 때문에 기본적인 정보 전달이 미흡하고, 각 인물의 행동 근거가 약하다. 특히 비밀을 감춘 채 그녀에게 접근하는 신부와 수녀들의 180도 다른 모습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넌스플로테이션(수녀들의 삶을 다룬 장르)을 차용해 장르적 재미를 살리려고 했지만, 점프 스케어와 피칠갑 장면에만 의존해 호러 장르의 재미를 십분 살리지는 못하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공포가 남다른 건 현대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두려움을 잘 옮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하는 공포 영화는 시대의 가장 어둡고 두려운 부분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해왔던 게 사실. 그런 점에서 <이매큘레이트>는 현대 여성들이 가진 임신과 출산 자체의 공포,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결혼 후 당연히 임신해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주장에 따른 현대 여성들의 잠재적 두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극 중 세실리아 임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의 재림인데, 이는 예로부터 전해진 종교의 원칙, 가족 윤리 등 굳어진 여성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억압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압박은 극 중 세실리아의 마음에 불안과 고통을 심고, 임신의 궁극적 목적이 밝혀진 이후 억압된 감정이 싹을 틔우면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주를 일으킨다. 그녀의 피칠갑은 이유가 있다.
더불어 영화는 지금도 미국에서 첨예한 대립을 겪고 있는 낙태 금지법에 대한 은유적 항의의 뉘앙스를 풍긴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마지막 세실리아의 마지막 절규와 행동만 보더라도 이를 잘 나타낸다.
뭐니 뭐니해도 <이매큘레이트>의 가장 큰 매력은 핏빛 열연을 펼친 시드니 스위니다. 그녀는 불안, 당혹, 슬픔, 분노 등 세실리아의 다층적 감정선을 큰 눈망울과 세밀한 표정 연기, 그리고 떠나가라 지리는 목청으로 표현한다. 드라마 <유포리아>를 통해 눈도장을 찍은 후, 다수의 작품을 거쳐오면서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는 시드니 스위니에게 이 영화는 완성도를 떠나 그녀의 연기 인생에 두고두고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무조건 후반부 시드니 고라니, 아니 시드니 스위니의 절규와 외침, 그리고 마지막 결단을 주목하길 바란다.
P/S: 참고로 시드니 스위니는 연기는 물론 제작에도 참여했다. 몇 년 전 오디션을 위해 읽은 스크립트가 준 강렬한 섬뜩함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 그는 미공개로 남은 그 작품을 자신이 직접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유포리아> 시즌 2 이후, 이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을 재게, 마이클 모한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고, 제작의 시작을 알렸다. 이 작품에 담긴 그녀의 애정을 알았다는 듯 <이매큘레이트>는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제작비 대비 4배 이상의 수익을 벌어드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사진제공: ㈜엔케이컨텐츠
평점: 3.0 / 5.0
한줄평: 시드니 스위니가 열고 닫는 여성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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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명 하에 박탈당한 모든 것을 위해
어릴 적에 상상해본 적이 있다. 만약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일찍 태어났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봐도 아름다운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운이 좋아봤자 규방 규수. 혹 팔자가 사납다면 어디까지 떨어질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결국 그 망상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대에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싱겁게 끝났다. 오랜만에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면서였다.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2020년 첫 만점을 준 작품으로도 많이 알려졌지만, <씨네21> 평론가 별점 또한 반짝반짝해서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0만 관객을 훌쩍 넘어서서 (2월 10일 기준) 13만을 향해 달려가는 이 영화는, 내용만 보면 자못 단순하다. 화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라는 귀족의 초상화를 의뢰받아 그가 사는 섬으로 향한다. 의뢰를 맡긴 이는 엘로이즈의 어머니로, 딸의 결혼 전에 남편 될 사람에게 미리 초상화를 보내 두려는 심산이었다.
엘로이즈의 언니는 결혼을 앞두고 목숨을 잃었는데 하녀 소피부터 동생 엘로이즈까지 모두가 내심 자살로 추측한다. 결혼을 피해 수도원에 들어가 있던 엘로이즈는 언니가 남긴 미안하다는 편지를 받고, 원치 않는 결혼으로 떠밀려 나온다. 그런 엘로이즈는 결혼 초상화에 모델로 설 마음이 전혀 없으니, 산책 친구인 척 몰래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조건이 마리안느에게 붙었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를 바라보고, 엘로이즈도 그런 마리안느를 마주 보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새로운 감정의 기류가 피어난다.
한 사람의 절망
이 영화는 탄탄하다. 뒤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름다운 미로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든다. 매 장면이 명화 같아서 다음이 궁금할 틈도 없었다. 음악이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종이에 슥슥 그림 그리는 소리, 따닥따닥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소리에 맞춰 나도 같이 숨을 죽인 탓이다. 그러다 한 번씩 그 촘촘한 연결이 의도적으로 삐그덕거리며 튿어질 때, 어린 시절 바이킹 처음 탔을 때처럼 심장이 철렁한다. 모닥불 앞에서 마비된 듯 서로를 바라보다 급작스럽게 움직임이 시작될 때라든가, 마을 여인들이 모여 주문처럼 들리는 노래를 시작할 때, 두 사람의 작별 장면에서도.
그중에서도 삐끗하는 정도가 심하다고 느꼈던 건 마리안느가 저택 안에서 환상을 보는 장면이다. 하얀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유령처럼 떠오르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중간중간 본다. 솔직히 말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전설의 고향이야 뭐야..."였다. 나중의 장면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작위적인 장면 아닌가, 싶다가... 어쩌면 엘로이즈가 아니라 엘로이즈의 언니 모습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비명도 지르지 않고 절벽으로 뛰어내린, 그렇게 결혼이라는 견고한 미래로부터 도망친, 절망했던 한 사람.
어쩌면 마리안느가 태워버린, 얼굴이 지워진 초상화도 엘로이즈의 언니 것이었는지 모른다. 엘로이즈에 비해 다소 현란한 손 모양을 하고 있어서,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엘로이즈의 그림은 몰래 그려야 했으니, 누가 봐도 요구받은 포즈 같은 그런 손 모양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유령이든 초상화든 어디까지나 한 관객의 해석이고 추측일 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한 갈래 가능성일 뿐이다. 다만 내가 이 영화에 엘로이즈 언니의 그림자가 계속 기웃거린다고 느낀 이유는 엘로이즈가 결혼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이유와 아마 같을 것이다. 꼭 같은 경험이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정서겠지.
두 사람의 사랑
결혼이 싫어 수도원으로까지 도망쳤음에도 끝내 결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자 엘로이즈는 더 도망치지 못한다. 초상화 모델이 되길 거절하는 이상의 반항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타난, 빤히 응시하는 시선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면서 엘로이즈의 삶에 사랑이라는 불이 켜진다.
두 사람은 예술가였고, 각자의 미학이 공명하는 사랑을 했다. 마리안느가 꿈을 꾸고, 손을 움직이는 예술가라면 엘로이즈는 생각하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꿈꾸게 만드는 예술가랄까. (마음을 확인한 후 마리안느가 "내 꿈을 꿨어?" 물으면 엘로이즈는 "네 생각을 했어." 대답한다.) 처음 완성된 초상화를 볼 때도 두 사람은 화가와 미술 비평가처럼 대화하며 단박에 서로의 말 아래 깔려있는 마음까지 알아차린다.
엘로이즈는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묻는다. 같은 장면에서 서로가 관찰한 서로의 면면을 ("모두 알고 있군요") 말하는 두 사람을 보면, 화가와 모델은 같은 장소에서 다른 장르로 예술을 펼쳐가는 두 사람의 예술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요즘 세상엔 그렇지도 않겠지만, 시대극 속에서라면 으레 모델은 화가에 비해 부수적인 인물로 인식된다. 존재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존재는 그인데도.
게다가 이 이야기를 할 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우리는 동등한 지위라고, 정확히 같은 지위라고 단호하게 강조한다. 높으신 분이라고 놀리듯 던진 마리안느의 말을 다잡으며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사였지만, 어쩐지 뮤즈라는 이름으로 예술가의 자리를 박탈당해온 이들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의 자리에서 내쳐진 이들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까미유 끌로델, 그는 예술가로서도 연인으로서도 깎여나간 이름이니까.
이 영화는 그렇게 수많은 이들을 떠오르게 만들고는 고스란히 감싸 안는다. 목적어 자리에 갇혀 있던 이들을 구해내어 그들이 빼앗긴 주어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뮤즈와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박탈당했던 예술가와 연인들의 자리를 오롯이 되찾아 준다.
세 사람의 연대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귀족 아가씨는 요리를 하고 하녀는 자수를 놓는데, 화가가 가운데서 술을 똑같이 따라 한 잔씩 나누어준다. 자연스럽게 술을 받아 홀짝이고 각자의 일을 계속하는, 문자 그대로 정확히 같은 지위의 세 사람. 엘로이즈가 수도원 생활을 표현할 때 썼던 "평등이 주는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첫 초상화가 신랄한 비판을 받으며 두 예술가에게 버려지고,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말미를 조금 더 주며 자리를 비운 단 며칠. 짧은 시간 세 사람은 친구가 되어 시간을 함께 보낸다. 마을 여자들이 모닥불 근처에 모일 때도 함께 가고, 카드놀이를 하거나 책을 함께 읽고 각자의 감상을 이야기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하녀 소피가 민간요법에 의지해 낙태를 꾀할 때 같이 바다로 들로 다니며 돕고, 중절 수술을 하러 갈 때에도 동행했다.
그리고 이들의 아름다운 연대는 이내 예술로 승화한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와 침통한 분위기가 감도는 밤, 엘로이즈는 그 순간을 단박에 예술로 바꾸어 버린다. 요청에 의해, 누군가가 눈대중해볼 대상이 되기 위해 예술의 객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주체가 되어 순간을 뒤틀고 비집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뒤집어, 가련한 객체였던 에우리디케를 선택의 주체로 만들었듯이 또 그렇게.
세 사람 모두에게 그런 힘이 있었다. 여성 화가에게는 주제 하나도 쉬이 내어주지 않던 시대에 게릴라전을 치르듯 그림을 그리던 마리안느에게도, 상대는 자신의 초상화까지 그려가는데 자신은 상대가 사는 도시밖에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억지로 결혼을 해야만 하는 엘로이즈에게도, 원치 않았던 임신을 혼자서 떨치고서는 시든 꽃을 활짝 핀 자수로 담아내는 소피에게도 그 힘은 보인다. 그리고 그 힘은 그들끼리만 보낸 그 며칠 가장 활활 타오른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함께 있는 힘으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홀로 있음도 결국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식하며 스스로와 함께 있는 것일 테니. 이 영화에서 그림은 함께 있거나, 함께 있던 시간을 되새길 때 그리는 것들이다.
또한 음악이 나오는 장면은 단 세 장면뿐인데,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가장 좋아하는 곡"을 들려주는 장면, (개인적으로는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처음 입 맞추고 싶었던 순간이 이때일 거라고 믿고 있다. 같이 본 친구는 다른 장면을 꼽았지만.) 물리적으로 옆에 서서 눈을 마주치면서 음을 쌓아가는 여자들의 노래는 물론이고, 몸으로는 떨어져 있는 마지막 장면조차 엘로이즈의 시선 끝에는 누가 봐도 확실히 마리안느가 아른거리고 있다.
예술이란 단어는 너무 크고 깊어, 나로서는 장님 코끼리 더듬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 예술이란 사랑하는 눈에서 시작될 때 그 본질의 의미를 갖는 것일 거라고 믿는다. 또 역시 예술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스카 와일드 같은 유미주의자들에게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아름답지 못하게 담는 것은 폭력이 될 수밖에 없고, 폭력의 양상을 보이는 순간 예술은 이미 본질을 상실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과 사랑은 어쩐지 닮아있어, 이 영화의 두 예술가 사이에서 부드럽게 얽히고 파도처럼 고동친다. 시선 속에서, 대화 속에서 넘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던 그것에, 두 예술가가 캔버스 앞에 마주하는 순간부터 불이 붙는다.
이 영화는 당대 여성의 지위를 고민하는 여성의 메시지를 배제하고 볼 수 없고, 아주 대놓고 두 여성의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고, 그들이 펼치는 예술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셋은 마치 케르베로스의 세 머리 같아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생존의 결을 같이 한다고 느낀다. 주인공들끼리 보낸 5일이 아름다웠던 건, 그 셋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랑은, 여성은 이런 존재라고 보여주는 것만 같다. 나는 예술도 여성성도 사랑도 모두 무언가를 강인하게 감싸는 힘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어그러진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라고, 그렇게 믿는다.
한 사람의 절망, 두 사람의 사랑, 세 사람의 연대 안에서. 그렇게 이 영화는 보여준 이들과 보여주지 않은 이들까지 감싸 안으며 우아하게 타오른다. 한 번 붙은 불은 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슈베르트의 <여름>처럼 강렬한 사랑의 기억 하나가 박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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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하지 않는 악만큼 중요한 것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하라사와라는 작은 산골 마을에 딸과 살고 있는 남자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다. 조용히 일 하는 중인 타쿠미. 장작을 열심히 팬다. 톱으로 나무도 자른다. 일하다 담배 한 번 피워준다. 이런 타쿠미에겐 일행이 있다. "타쿠미 상!" 타쿠미에게 다가오는 타쿠미의 친구. 타쿠미는 친구에게 자연물의 많은 것들을 알려주며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눈다. '땅와사비' 하나를 뽑는 타쿠미. 친구에게 "너희 우동집에 이거 넣어서 먹으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숲 속에서 시간을 보내니 친구가 타쿠미에게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그런데, 딸 하나(니시카와 료)는요?" 사실 타쿠미는 건망증이 심하다. 하나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는 때가 오면 집으로 데려와야 했다. 내 정신 좀 봐! 사랑하는 딸을 데리러 가는 타쿠미. 그러나 친구가 타쿠미에게 말 한마디를 더 건넨다. "오늘 우리 동네에 글램핑을 짓겠다면서 워크숍을 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 올 거죠?"라고 묻는 친구. 타쿠미는 "간다"라고 답한다. 모든 것이 상류에서 하류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 영화는 서늘하게 이 마을에 일어나는 일들을 비추고, 특별한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이 영화의 결말은 일반적이지 않다. 영화의 느릿느릿한 템포때문에도 그렇고, 인물의 감정선엔 특히 더 그렇다. 영화의 많은 것들은 상황만 몇 개 보여줄 뿐 이 둘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 덕에 영화가 좀 뭉뚱그려진 채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왜 타쿠미는 타카하시를 죽인 거야? 하나는 어떻게 된 거야?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아 의문점만 생긴다. 단순히 줄거리와 결말만 그럴까?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기이할 정도로 길어서 어느 부분에서 장면이 끊길지 예상이 잘 안 간다. 단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만 직관적으로 들어와서 '이 영화가 복잡다단한 인간성을 보여주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엔딩에서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공격하는 일이 영화 내내 반복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를 위해 영화의 몇 키워드에 대해 써 볼 것이다.
첫 번째 키워드는 단절이다. 글쓴이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단절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다. 이 팬데믹 사태는 영화에서 두 사건에 개입하며 인물 간의 갈등을 드러낸다. 우선 이 영화의 핵심 갈등은 마을의 어느 곳에 글램핑 터를 짓는 것이다. 이 글램핑 터를 짓는 이유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경영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졌으니 정부에 보조금을 받기 위해'다. 이 공사는 곧 양 측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어 중반부까지 인물들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또 다른 단절은 의사소통의 단절이다. 워크숍에서 박살이 난 타카하시와 마유즈키. 주민들에게 "사장에게 말하고 오라"라는 피드백을 듣는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사장과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 의사소통은 무언가 특별하다. 바로 줌(zoom)으로 회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 역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고 보기 어렵다. 타카하시와 마유즈키의 상사는 두 사람의 주장을 별로 귀담아 안 듣고 그냥 무작정 "선주민 남자(타쿠미)에게 글램핑 터 부지의 관리인 직을 제의해라"라고 말한다. 이 대화는 방식의 측면에서도 제약이 많은데 내용도 알차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타카하시와 마유즈키 - 둘의 상사 간의 대화가 단절됐다는 것을 단적으로 암시하는 연출이다.
두 번째로 암시하고 있는 이 영화의 단절은 건망증이다. 타쿠미는 뭐든 잘 잊어버린다. 영화 초반부에 딸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 친구 덕에 그 약속을 떠올린다. 사실 처음 볼 때 이 장면을 그냥 별 것 없다고 넘겼다. 깜빡 잊어버리는 건 그냥 우연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잊어버린다'라는 모티브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본다면 분명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타쿠미는 앞과 뒤에 일어난 일 중 먼저 발생한 사건을 잊어버리는 건망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영화가 (후술 하겠지만) 자연의 순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특별하다. 타쿠미는 전을 잊어버리고 이후에 일어난 일만 기억했다. 이 결과로 딸 하나를 데려오는 걸 잊어버렸다. 영화가 전에 일어난 일을 잊어버린 자에게 소소한 벌을 내렸다고 볼 수 있고, 역시 타쿠미는 사건의 전부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않아 '단절'을 체화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하나를 둘러싼 단절도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초반부에 하나는 사슴의 사체(뼈)를 본다. 아빠에게 "얘는 총에 맞았다"는 말을 들은 하나. 이 하나는 연이어서 사슴을 목격한다. 초반에 사슴이 죽은 걸 봤다. 그다음 장면은 사슴이 살아있는 장면이었다. 그다음의 다음 장면은 하나가 사슴에게 공격당한 뒤의 장면이다. 이 장면들이 시간 순서대로 읽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글쓴이가 영화를 두 번째 볼 때는 '두 번째 장면이 진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어느 순간부터 혼자 다니는 모습만 나온다. 이야기를 이끄는 동력도 뭣도 없는 채 신화의 한 장면 같은 장소를 돌아다닌다. 하나가 공격당했다는 묘사가 있을 리가 없다. 엔딩에서 코피 흘리는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신기루 같은 하나의 행보를 더 신비롭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소파에서 잠을 자는 하나. 카메라는 아버지 타쿠미가 하나를 업고 어디론가 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장면이 끝나면 다시 하나가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다. 과연 뭐가 진짜일까? 어떤 장면이 영화의 메인 플롯인지는 하마구치 류스케도 모를 것 같지만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와 관련된 몇 장면들은 순리를 벗어나는 연출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하나는 "숲 깊은 곳에 들어가면 사슴에게 공격당할 수 있어"라는 경고를 무시한다. 종합해 보자. 하나는 섭리를 어기는 존재다. 이를 영화 안의 이야기로, 또 연출로 보여주고 있다. 단지 하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그 모든 모순을 이을 뿐이다.
단절 다음으로 설명하고 싶은 키워드는 양 측간의 갈등이다. 영화는 성실하게 두 집단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를 묘사한다. 이 소시민스러운 순간을 보여주는 방식을 보면 흥미로운 것이 있다. 우선 전반부. 영화의 주인공이 타쿠미이기 때문에 타쿠미 쪽 서사가 나온다.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귀여운 딸 하나와 함께 산다. 어떤 장면에선 아버지 타쿠미가 딸 하나를 업고 길을 걷는 장면이나 자연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도 있다. 인물의 이런 감정적인 부분은 사실 영화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쿠미한테 어떤 사정이 있건 없건간에 살인자는 살인자 아닌가? 하지만 이 묘사는 후반부에 타카하시와 마유즈키가 자동차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차 안 대화 장면은 사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기시감이 느껴지는 부분일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와 <우연과 상상>에서 자동차 안의 대화를 사람과 사람 간의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과정으로 소화했다. 이 장면은 그 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게 역시 적용된다. 관객들도 인물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 장면의 역할까지 본다면 두 세계에 정을 붙인 감독의 의도가 느껴진다. 소개팅 앱이나 마유즈키의 직업이 요양보호사였다는 사실이 굳이 들어간 이유는 역시 이 둘(타카하시, 마유즈키)도 그냥 평범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차 안 대화 장면이 들어간 시점도 의미심장하다. 이야기의 중후반인데, 이 영화가 가령 <매그놀리아> 내지는 <도그데이즈>(2024)같이 각자의 입장이 중요한 옴니버스 영화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 타카하시-마유즈키의 인간적인 면모는 초반부에 들어가야 적절하다. 왜? 이 둘에게도 마음을 열 만한 가치가 충분하고 역시 주인공이니까.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과감하게 중후반부에 배치한다. 이 장면 이후 '하나가 실종되고 - 타카하시가 살해당한다'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을 통해 그린 인물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보여주는지 느껴지는 듯하다. 두 사람은 전적으로 동격에 놓인 선량한 사람이다. 악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 영화의 살인사건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더 직설적으로, 우리는 이 영화 하이라이트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100%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것들이 서로 충돌하며 작용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글쓴이는 위에서 단절과 양 측의 갈등에 대해 서술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필연이다. 사실 글쓴이가 쓰지 않은 부분이 있다. 단절과 갈등에 대한 부분을 더 깊게 쓰지 않은 것이다. 사실 위에서 쓴 '단절'과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필연이라는 키워드 하에 묶여있다. 첫 번째 예시. 마유즈키가 팔을 다치고 하나가 공격당한 사건이다. 이 둘은 전적으로 별개의 사건이다. 마유즈키는 집에서 쉬는 걸 선택했고 하나는 촌장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절묘하게 공통점을 가지며 반복된다. 두 인물은 자연의 경고를 들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두 인물에게 공통된 필연이 주어졌고 이 필연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차이점이 갈린 것이다. 두 번째 예시. 주인공의 집에 회장님이 와서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무엇으로? 마유즈키와 타카하시가 상사와 비대면으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둘은 겉으로 보기에 목적과 내용이 아예 다르다는 점에서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두 대화는 상호 간의 입장을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는 일이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은 영화에서 중요하다. 각기 다른 입장에 놓인 인물들이 당연한 순리를 거치는 것이다. '사랑하는 딸'과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을 잊어버린 것 역시 상호 충돌한다. 하지만 둘이 별개의 것인 거랑 이 두 사건은 하나의 키워드로 엮인다. 타쿠미가 건망증이 심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그 줄기다. 이렇게 두 별개의 사건이 하나의 필연으로 이어진다는 방식은 영화에서 하나가 공격당한 것과도 이어진다. 바로 초반부 타쿠미와 하나가 사슴의 뼈를 보고 "총을 맞았다"라고 말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것이다. 이 둘은 별개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 장면을 묘사하는 전후의 톤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전반부는 다큐 같은 템포였지만 후반부는 판타지스럽게 보여주기 때문에 두 사건은 별개의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 같다. 하지만 이 두 장면 역시 공통점이 있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장면으로 인해 생명에 위협이 간다. 명확한 사건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이럴 땐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나지!'라는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필연적인 일들을 엇갈리게 제시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필연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것들을 느끼고 있다. 누군가가 존재해서 이 사건을 연결시킨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단순히 플롯에서만 이런 맥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음향이나 편집, 촬영 같은 것도 이 충돌을 시청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선 초반부. 아버지 타쿠미가 딸 하나를 업고 걸어가고 있다. 영화가 있는 그대로 보여줄 거면 하나를 만나고 업히고 하는 장면을 보여줘도 된다. 하지만 영화는 편집을 촬영으로 대체해서 부녀를 보여준다. 이러면 뭐가 생기냐. 이야기가 초장부터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기이하다는 느낌을 주기 쉽다. 이 장면에 들어가는 음향은 역시 이 연출의 연장선상이다. 사운드가 부녀간의 감정을 쭉 보여주는 듯하다가 갑자기 끊는다. 단절이다. 우리가 영화까지 가는 감정선은 단절되지만 영화 안의 내적논리는 그 순간에도 재생되고 있다. 심지어 이 장면이 아니더라도 음악이 들리다가 끊기는 형태는 반복된다. 단절의 이미지를 하나로 이어서 이야기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영화의 편집 역시 이상한 리듬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마치 사운드가 들리다가 끊기는 것처럼 영화가 테이크를 길게 뺄 때의 규칙이 안 보인다. 가령 초반에 주인공이 물통에 물을 채울 때를 본다면 그냥 물만 길고 끝나는 게 아니라 들고 지나가는 것까지 다 보여준다. 그런데 어느 장면에서는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편집을 촬영으로 대체한다. 또 어떤 장면에선 두 사람의 시점을 고의적으로 충돌시키는 편집까지 보여준다. 가령 주인공이 땅와사비를 뽑는 장면을 보면 재미있다. 카메라에서 땅와사비 뽑는 장면을 보면 땅와사비의 시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장면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이 땅와사비를 뽑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자연물을 이용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 자연물의 시점을 동시에 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타쿠미가 자동차를 끌고 주차하는 장면을 보면 초반에는 타쿠미의 차량을 보여주다가 후반에는 차 뒤편에 있는 여자를 카메라가 보여준다. 이 주차 장면이나 땅와사비 장면이나 그 자체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점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영화 안의 누군가도 함께 등장시킨 것이다. 천재적인 발상이다. 이야기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두 사건에 묘한 선후관계를 제시해서 필연으로 만든 걸로 모자라 카메라워킹으로 영화 안에 존재하는 3자를 등장시킨 것이다. 악인이 존재하지 않지만 3자는 존재하다는 것. 그리고 이 3자가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3자는 무엇일까? 영화의 첫 장면과 가장 마지막 장면이 아예 다른 맥락임에도 이야기의 틀을 이룬다는 점에서 수미상관처럼 느껴지고, 엔딩에서 새끼 사슴과 하나를 동일시시키고, 이 폭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영화 등장인물들이 지키지 못한 것에 책임을 묻게 하는 것. 그게 무엇일까?
글쓴이는 이 엇갈리지만 영화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을 한 단어로 순리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쓰다가 갑자기 네이버 검색창에 '순리'라고 검색하면 '순한 이치와 도리, 또는 도리나 이치에 순종함'이라는 의미가 나온다. 이치와 도리. 당연하게 당면한 일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취하는 것. 하나처럼 영화 안에서 독립된 사건으로 움직이는 인물들도, 타쿠미처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인물도, 타카하시처럼 사람은 착하지만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은 사람들도 이 순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 생각은 영화에서 하나가 실종되면서 시작되는 장면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장면의 시작을 잘 보시면 물이 위에서 아래로 쪼르르 흘러가는 장면이 기점이다. 이 장면은 영화 안에서 맥락이 생기기도 한다. 워크숍 장면에서 마을회장 할아버지는 "상류에서 만들어진 일이 하류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하류의 사람들이 상류의 주민들을 원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이에 힘입어 "중요한 건 균형"이라고 말한다. 영화 안에서 개입을 지양하고 순리에 따르자는 논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하나의 실종도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라는 맥락이라는 걸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실종이 순리에 따른 결과가 되는 셈이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물론 영화는 하나의 실종만을 순리로 단정짓지 않았다. 순리에서 벗어난 것들은 영화 전,후반부에 두 개나 있다.
순리에서 벗어난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이 벌인 각각의 실수는 인물들에게 당연한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암시처럼 보인다. 실수를 저지른 인간들은 영화 안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 그 첫 번째 실수는 타카하시의 것이다. 그 질문이 뭐냐. 영화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볼 수 있는 "사슴은 그래서 어디로 가지?"라는 질문이다. 타카하시는 이 질문에 그냥 대충 얼버무린다. 인간의 개발을 위해서라면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위협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 사슴의 생사에 대해 깊게 탐구하지 않은 인간의 벌이 뭘까? 타쿠미에게 글램핑 터의 관리자 역할 같은 걸 대안으로 내민 벌은? 살인이다. 목숨을 잃는 것이다. 이 영화가 필연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고 길게 쭉 썼다. 이 필연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인간의 개입에 대해 경고하는 자연을 무시하고 대충 얼버무리다 처형당한 인간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왜 마유즈키가 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을까? 자연에 의해 팔을 다친 마유즈키는 타쿠미의 집에서 쉰다. 경고를 마지막엔 받아들인 마유즈키는 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은 것이다. 만약 타쿠미와 동행했다면 마유즈키가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실수에 의한 처벌'이라는 부분에 근거를 하나 더 하고 싶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두 번째로 범한 실수에 대해 적는 것이다. 영화가 두 상황을 필연으로 잇는다고 길게 써왔다. 그럼 이 것(타쿠미의 살인)과 유사한 상황이 영화에 있다는 뜻이겠지? 글쓴이는 총성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초반부. 총성이 탕 울린다. 이 총성 때문에 사슴이 죽었다는 걸 타쿠미는 이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방관한다.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로 큰 소리지만 원인을 규명하지 않는다. 이는 곧 타쿠미도 타카츠키와 유사하게 자연의 경고를 방관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에 노력하지 않은 것. 이는 영화 후반부 타카츠키가 의무를 포기한 것과 겹쳐 보인다. 그럼 어떻게 돼? 당연한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나태한 인간이 방관한 탓에 애 먼 사슴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사슴은 총을 쏜 인간에게 분노해서 하나를 공격했다. 심지어 하나는 마유즈키처럼 자연의 경고, 그러니까 회장 할아버지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조건이 충분하다. 이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를 보여주면서 순리를 묘사하는 만큼 엔딩에서 타카하시가 살해당하는 장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에 연장선상에서 하나가 공격당한 것 내지는 죽어가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심지어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대신 그 이유를 뭉뚱그려 보여준 것이야 말로 영화의 기획의도를 살리는 좋은 선택이다. 애초부터 그 원인을 규명할 수 있으면 자연 그 자체지 인간이 아니다.
카메라와 편집도 이 이야기에 존재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그대로 구현한다. 하나 보여준 다음 사슴 보여주고 사슴의 피살 보여준 다음 하나를 비춘다. 이건 편집이 의도적으로 두 존재를 동일시시켰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살인을 저지르고 하나와 함께 도망가는 타쿠미를 먼발치서 익스트림 롱쇼트로 찍는다. 어느새 형상조차 보이지 않으면 의식이 흐릿한 타카하시가 몸을 비틀거리면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중후반부 차에서 일어나는 대화와 가락국수집에서의 장면을 통해 강박적으로 대칭을 이룬 것과는 대비된다. 균형을 어긴 인간이라는 걸 영화가 기술적인 부분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그냥 뚝딱 만든 각본 같아 보이지만 영화 안에 잡혀있는 내적 체계가 굉장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영화 안에서 구현하는 것. 이거야 말로 영화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을 천천히 쌓아 올려 한 번에 터트렸던 <드라이브 마이 카>의 정성이, <우연과 상상>에서 인간이 서로를 마주하며 일어나는 묘한 스파크가 터졌던 그 순간을 엔딩으로 치환시켜 관객에게 강력한 충격을 선사한다. 또한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예술의 속성과 동일시했던 것이 굉장히 신선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철저하게 우리 세상에 살고 있는 무형의 존재를 등장시키는 괴력을 보여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치를 거부한 인간에게 응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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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코 | 의도는 좋았던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시작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촉토 부족 보호구역 마을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청각 장애인 '마야 로페즈/에코'(알라콰 콕스). 하지만 그녀는 쇼핑을 가던 중 교통사고에 휘말리고, 다리 한쪽과 엄마를 잃는다. 이에 마야의 외할머니 '출라'(탄투 카디널)는 갱단에서 일하던 마야 아빠 '윌리엄'(잔 매클라넌)을 비난하고, 윌리엄은 마야를 데리고 뉴욕으로 떠난다.
뉴욕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마야.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아빠를 따라간 체육관에서 '킹핀'(빈센트 도노프리오)을 만난다. 마야는 자기를 아껴주는 킹핀을 삼촌처럼 따르고, 아빠가 살해당하자 킹핀의 권유로 그의 갱단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크아이'(제레미 레너)와의 만남 이후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과 자기 과거에 얽힌 진실을 깨닫고, 항상 배후에 있었던 킹핀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시작
디즈니+ 드라마 <에코>의 공개를 앞두고 마블 스튜디오는 새로운 레이블 '마블 스포트라이트(Marvel Spotlight)'를 론칭한다고 발표했다. 스트리밍 부문 사장 브래드 윈더바움은 '마블 스포트라이트'를 "사전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 다양한 스토리를 제공하는 작품들이 있는 레이블"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MCU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변화로 보인다. 최근 MCU는 초창기와는 달리 세계관 연계에 집중한 나머지 캐릭터 각각의 매력을 부각하는 데 실패했다. <더 마블스>만 해도 캡틴 마블, 모니카 램보, 미즈 마블의 개별 서사와 팀의 결성 과정 모두 미흡하다는 평을 받았다.
즉,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출범은 초심을 찾는 시도다. 한 캐릭터에 오롯이 집중한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기존 드라마와 달리 <에코>의 에피소드 5편을 동시에 공개한 이유라 할 수도 있다. 다만 <에코>가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시작을 제대로 알렸는지는 의문이다. <에코>는 팬들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이질적인 드라마이기 때문. 그 중심에는 드라마의 지향점과 어긋난 마케팅 전략이 있다.
에코가 적임자인 이유
물론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정체성을 보여줄 1번 타자로서 에코는 부족함이 없다. <호크아이>에서 모습을 비췄지만, 비중 있는 조연에 불과했기에 아직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차별화된 개성도 명확하다. 그녀는 청각장애인이면서도 호크아이나 킹핀에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니까.
또 그녀는 나날이 거대해지는 멀티버스 사가의 세계관에서 자칫 가려지기 쉬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에코는 MCU 세계관을 풍부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에 들어맞는다. 지구에서 현실적인 스케일로 활약하는 소소한 히어로들의 활약을 최근 MCU에서는 보기 어렵기 때문.
이에 더해 기존 팬들의 관심을 끌 포인트도 있었다. 그녀가 비록 중심 캐릭터는 아닐지언정, 여러 주역과 관계를 맺고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 <호크아이>에서 에코와 접점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 킹핀이 현재 제작 중인 디즈니+ 드라마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 출연 예정이듯이.
착실한 '에코'소개서
<에코>는 목표에 걸맞은 이야기를 착실하게 채워 넣었다. 우선 에코의 특징을 잘 살렸다. 그녀는 다양성 코드를 살리기에 가장 적합한 캐릭터다. 여성이고, 청각장애인이며, 아메리카 원주민이기 때문. 아직도 백인 남성으로 가득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슈퍼 히어로 장르에서 파격적인 캐릭터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는 대사 연출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에코는 모든 대사를 수어로 처리하고, 상대역도 대사를 말할 때 수어를 같이 사용한다. 덕분에 <에코>의 감상 경험은 다른 영화나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다. 잠깐만 눈을 화면에서 떼도 내용을 놓칠 수밖에 없다. 이는 호불호가 나뉘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청각 장애인의 일상 속 불편함을 주류 미디어에 메타적으로 반영한 대목처럼 보이기도 한다.
촉토 부족의 일원으로 에코를 설정한 점도 눈에 띈다. 특히 촉토 부족이 지하에서 태어나 지상으로 올라왔다는 전설을 에코라는 히어로의 정체성과 연결시킨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 덕분에 <호크아이> 속 조연은 차별화된 서사를 만들 수 있다. 어릴 적 촉토 부족 마을을 떠난 킹핀의 후견 하에서 지낸 에코. 킹핀의 악행과 음모를 깨달은 그녀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킹핀의 파트너가 될지, 아니면 자기 부족에게 돌아갈지.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의 문제점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다. 젊은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대도시로 떠나다 보니 정치권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인프라도 부족해지면서 원주민 마을과 보호구역이 슬럼화되기 때문.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지, 아니면 주류 사회에 동화될지 선택해야 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뇌가 <에코>에 담겨 있는 셈이다. 출연진 다수를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캐스팅하고,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감독을 고용한 제작진의 노력이 빛을 발한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MCU다운 액션
그뿐만이 아니다. <에코>는 MCU 드라마 최초로 TV-MA(19세 관람가) 등급을 받을 정도로 액션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그래서인지 <에코>는 디즈니+에서 공개된 MCU 드라마가 공유한 단점도 피했다. MCU 드라마는 그간 액션 연출이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스토리 전개, 캐릭터 구축 면에서 호평받은 <완다비전>, <로키>, <문나이트>, <호크아이> 등도 이 지적을 못 피했다.
<에코>는 다르다. 과장 보태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연상시키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액션을 선보인다. 예를 들어 스케이트장에서 갱들이 대치하는 장면에서 총에 맞아 피가 튀기는 장면을 굳이 가리지 않으며 생생함과 잔인함을 살렸다. 다른 육박전이나 기차 액션 시퀀스에서도 합을 맞추기보다는 보다 날 것의 액션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 성공했다.
특색도 있다. 귀가 안 들리는 캐릭터의 특성을 액션 연출에 반영했다. 드라마는 액션씬이 펼쳐지기 직전에 배경 음악을 일부러 제거한다. 음향도 가능한 작게 볼륨을 낮춘다. 마치 청각장애인이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러다가 액션씬이 시작되는 순간 비명소리, 타격음 소리, 뼈가 부러지는 소리, 배경 음악을 일제히 터뜨린다. 마지막 화에 등장하는 클라이맥스가 대표적이다.
이는 짧은 찰나에 긴장감을 극도로 고조시켜서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탁월하다. 액션은 일종의 폭발이다. 지속적으로 커지던 감정골의 불씨가 특정 계기로 불타오르는 순간, 감정은 액션으로 표출된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선이듯, 액션은 스토리와 감정의 연장선이다. <에코>는 그 순간에 한 템포를 쉬어가면서 폭발의 임팩트를 최대한 누리려 한다.
포장지를 잘못 쌌다
하지만 <에코>의 특색 있는 지향점과 준수한 완성도는 정당한 평가를 받기 어려워 보인다. 마케팅을 통해 만들어진 드라마의 이미지와 본편 내용 사이에 간극이 크기 때문. 캐릭터의 독립적인 서사에 집중한다는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취지가 무색하게 포스터와 예고편은 다른 작품과의 연계를 더 기대하게 만든다. 그 결과 예상을 많이 벗어난 본편 내용과 퀄리티는 당혹감과 실망감을 키운다.
포스터만 봐도 그렇다. 에코보다도 악역인 킹핀의 모습이 더 크다. 예고편에서는 데어데블이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현재 제작 중인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 킹핀이 메인 빌런으로 등장할 예정이라는 점, 데어데블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과 <변호사 쉬헐크>에 이미 출연한 점 등을 고려하면 <에코>를 일종의 중간다리로 간주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본편에서는 MCU 작품과의 연계성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새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호크아이> 속 에코의 분량을 일부 가져온 게 전부다. 마지막 보너스 영상 정도를 제외하면 킹핀도 본인만의 서사를 많이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에코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활용된다. 예고편에서 모습을 비춘 데어데블은 말 그대로 카메오다. 즉, <에코>는 예고편이나 포스터를 보고 기대한 이야기와는 분명 다르다.
이는 예상 못한 부작용을 유발한다. 제작진의 노력, 중요도, 의의와는 별개로 촉토 부족 관련 플롯은 시청자의 시선을 붙잡지 못한다. 에코가 촉토 부족이라는 사실이 <호크아이>에서 드러난 바 없다. 코믹스 팬이 아닌 이상에야 촉토 부족의 등장이 급작스러운 이유다. 결국 촉토 부족 분량에 비해 에코보다 친숙한 킹핀이 등장한 대목이 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에코>는 기대에 따라 만족도가 극과 극으로 나뉠 작품이다. 앞으로의 스토리나 캐릭터와 관련된 암시나 힌트 같은 MCU와의 연계성을 기대했다면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반면에 드라마와 영화가 긴밀히 연계되는 현재 MCU에 지쳤다면 오히려 흥미로울 수 있다. 주인공 한 명의 매력에 집중하고, 다른 작품과의 연계는 쿠키 영상에 맡긴 초창기 MCU로 돌아가려는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의지가 만족스러울 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에코>가 점점 식어가는 MCU 팬들의 애정을 전부 되살릴 만한 드라마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로 마블 스포트라이트와 MCU의 미래는 아직, 그리고 여전히 불확실해 보인다.
Poor 형편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는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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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학을 압둔 대학 새내기와 인간관계에 지친 청춘을 위한 영화
환몽(幻夢) CINE Pick's!_ 입학을 앞둔 새내기들을 위한 영화
- 환‘s Pick : 건축학개론(2012), 대학생활의 로망 혹은 실제
- 몽‘s Pick : 우리들(2015), 인간관계에 고민이 많아질 여러분에게#우리들 #건축학개론 #청춘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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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점 9.2 테크니컬한 액션연출로 시간 가는줄 모르고 보게되는 영춘권의 대가 견자단 [엽문]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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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귀공자> 메인 예고편
필리핀 불법 경기장을 전전하는 복싱 선수 ‘마르코’ 앞에 정체불명의 남자 ‘귀공자’를 비롯한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닌 세력들이 나타나 광기의 추격을 펼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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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노트르담> 메인 예고편
한물 간 건축가이자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모드.
툭하면 애인과 싸우고 찾아오는 전남편과는 여전히 오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잊고 있던 옛사랑까지 나타나 혼란스러운 가운데 노트르담 성당 산책로 복원 사업이라는 중대한 프로젝트까지 맡게 되고..
일과 사랑, 육아까지 그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모드의 행운은 어디까지 이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