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8-05 15:35:01
이념 앞에 가려진 개인, 무너진 관계.
영화 <공동 경비 구역 JSA> 리뷰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에서 사건이 발생하여 북한은 남한의 기습 테러 공격으로, 남한은 북한의 납치로 주장하고 중립국에서 조사를 맡게 된다. 남한의 ‘이수혁 병장’, 북한의 ‘오경필 중사’ 그사이에 놓인 조사관 ‘소피’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사건에 진실에 다가가려 할수록 더 멀어지는 이야기를 필두로 ‘공동 경비 구역 JSA’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진짜 수사관으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 온 ‘소피’의 입장과는 달리 ‘중립국’의 입장은 누가 쐈는지보다는 왜 쐈는지를 밝히고 절차를 따지며 아무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남한, 북한, 중립국 그 누구도 진실을 원하지 않았지만, 소피와 관객은 그날의 진실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 이들의 모습과 사건을 면밀히 조사하는 소피의 모습을 대조하다 그날의 진실로 카메라는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적이라고 생각했던 경필이 수혁을 도와주는 일이 계기가 되어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먼 거리에서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이 세 사람의 거리는 어느새 서로가 적이라는 것을 잊고 익숙하게 옆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그림자 넘어왔어. 조심하라.”라는 농담을 나눌 정도로. 교차하는 시선과 침묵을 유지하는 그들로 인해 도저히 알 수 없는 관계를 파악하는 소피는 증거물을 바탕으로 의외의 인물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불안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 감정이 관계의 갈고리를 무너뜨리며 총구가 향한 방향과 그 손이 누군가를 가리키는 순간을 목격하고 한없이 무너지는 개인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먼 발치에 바라봤던 그들의 거리는 한없이 멀어진 분단 국가의 현실을 드러내고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는 중립국을 보여주며 따뜻했던 서로의 거리가 차갑게 식어 다시 만나지 못할 그곳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씁쓸할 뿐이다. 개인과 개인이 마주했을 때 서로를 바라보지 않던 총구가 이념 앞에서 끊임없이 불꽃을 일으키는 모습이 마냥 서글프기만 하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역사의 현실을 영화로 투영하여 보여준다. 지나면 지날수록 깊게 패여드는 갈등은 분단의 모습으로 드러났고 가까워질 듯 하면서도 가까워질 수 없는 영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남한과 북한의 모습이 아닐까. 서로에게 들이미는 총구를 내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당시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많은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북한 사람의 모습을 괴물과 악마의 모습이 아닌 다양한 사람으로 표현하면서 한국 영화에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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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말 대중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제목을 봤을 때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전을 각색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흥부전이 창작된 배경을 설명한 작품이었다. 당시 탐관오리들이 창궐하는 상황 속에서 백성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나라를 조금 더 살기 좋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 작품은 탄생했다. 이러한 기회 의도 좋았지만 초반 흥미로운 진행에 비해 영화의 부제와 딱히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작품이 전개되어서 고개가 갸우뚱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시놉시스
아무도 몰랐던 형제, 흥부와 놀부. 양반들의 권력 다툼으로 백성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져 가던 조선 헌종 14년. 붓 하나로 조선 팔도를 들썩이게 만든 천재작가 ‘흥부’는 어릴 적 홍경래의 난으로 헤어진 형 ‘놀부’를 찾기 위해 글로써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한다.모두가 알고 있는 형제, 조혁와 조항리. 수소문 끝에 형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조혁’을 만나게 된 ‘흥부’는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며 백성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 받는 ‘조혁’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백성을 생각하는 동생 ‘조혁’과 달리 권세에 눈이 먼 형 ‘조항리’의 야욕을 목격한 ‘흥부’는 전혀 다른 이 두 형제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탄생한 ‘흥부전’은 순식간에 조선 전역에 퍼져나가고, 이를 지켜보던 ‘조항리’는 그를 이용해 조선을 삼킬 음모를 계획한다.
대중 문화의 힘을 엿보다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자를 초반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대중 문화의 힘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는 남녀의 치정 소설을 쓰며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흥부와 이를 바탕으로 마당극이 형성되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민중들의 힘을 깨달은 양반들은 연흥부를 이용해 <정감록 외전>을 만들어내라고 지시한다. 자신들의 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민심의 힘을 이용한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양반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흥부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형제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을 딴 흥부전으로 탄생시키면서 양반들을 풍자한다.
흥부전을 접한 양반들은 격노하고, 어떻게든 자신들에게서 돌아선 민심을 무마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부분에서 양반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상 민심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 민심의 힘을 대중 문화를 통해 잘 구현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캐릭터들은 왜 갑자기 죽을까?초반 조선시대의 대중 문화를 보여주면서 흥미를 이끌었지만 급격히 그 집중도가 떨어지게 된 계기는 캐릭터들이 너무 갑자기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갑자기 선출이가 납치되고, 조혁이 붙잡혀 오고, 그리고 1분이 채 되지 않아서 조항리에 의해 단칼에 죽는다.
어떠한 설명 없이 훅훅 죽어나가서 당황스러웠다. 그저 기존 영화의 난폭한 양반 컨셉을 잡고 갑자기 이성을 잃은 조항리가 자신의 동생과 선출이를 왕의 명령도 없이 본인 손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여버린다. 물론 해당 장면에서 왕이 존재하지만 그 왕 위에 있는 조항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 권력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자신이 직접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상태로 왕이 있는 상태에서 왕을 제압하고 군졸들에게 죽이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 훨씬 더 그 느낌을 잘 자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영화에서 표현된 방식은 그저 본인 화에 못이겨서 갑자기 사람들을 죽인 생뚱맞은 장면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아쉬웠다.
영화의 부제와 후반부 내용이 연결되는 것일까?이 작품의 부제는 영어가 훨씬 더 와닿다는 느낌이다. 한국어 부제는 글로 세상을 바꾼 자이고, 영어로는 The revolutionist 혁명가 이다.
부제가 글로 세상을 바꾼자 였다면 결말이 그렇게 나면 안되는 것일 아닐까? 결말에서의 모습은 글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초반 영화의 내용 부제대로 글의 힘을 잘 보여준 전개였다. 하지만 후반부의 흐름은 글의 힘이라기 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대중 봉기에 불과했다.
물론 흥부전 2탄을 준비하면서 그것을 이용해 조항리를 제압하는 내용이었지만 이는 글의 힘만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폭력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글이 부각되지 않아서 차자리 영어 부제처럼 혁명가가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자>는 후반 전개와 개연성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다소 많은 편이었지만 흥부전의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조선시대 말기의 대중 문화가 어떠한 힘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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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 욕심 있었던 봉준호 출연작 모음
얼마 전, 뉴욕타임즈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1위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이름을 올렸죠.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인데요…! 👏그 소식을 듣고 문득 떠올랐습니다.
감독이 아닌 ‘배우 봉준호’의 얼굴.
작품 속 인물로 깜짝 등장하던 그의 카메오 모먼트들…사실 알고 보면 연기에 대한 은근한 욕심(?)도 있었던 봉 감독. 그의 짧지만 인상 깊은 출연 순간들을 한데 모아봤습니다.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연기는 배우 고유의 영역이라,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고 말하며,직접적인 지시보단 질문을 통해 배우 스스로 감정을 찾도록 유도한다고 밝혔는데요.
어쩌면, 그가 직접 연기에 나섰던 순간들은
연기를 ‘통제’하기보단 ‘이해’하려는 노력,
영화를 더 잘 만들기 위한 공부의 일환이었나 봅니다.심지어 잠깐이지만 연기도 자연스럽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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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적 소유욕, '사랑'이 되다
7★/10★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에서, 알마는 사랑하는 레이놀즈를 자기 곁에 붙들어두기 위해 음식에 독을 넣는다. 치사량은 아니지만 레이놀즈의 몸이 허약해져 알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는 많다. 알마를 그저 자기를 구성하는 여러 세계 중 하나로만 대우했던 레이놀즈는 기꺼이 알마의 요리를 먹는다. 그러고는 “사랑해”라고 말한다. 더는 알마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애정을 나눠주지 않겠다는 듯이. 이렇게 알마는 레이놀즈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둘의 사랑은 ‘완성’된다.
〈엘리자벳과 나〉는 사랑의 권태를 피학과 가학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알마와 레이놀즈의 길을 잇는다. 주인공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이자 헝가리 왕국의 왕비인 엘리자벳과 그의 시녀 이르마다. 엘리자벳은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왕족으로 손꼽힐 정도로 타고난 외모를 엄격하게 관리한 여인이다. 173의 큰 키임에도 평생 50kg 이하로 몸무게를 유지했다고 한다.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관리가 동반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는 대중이 생각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외모로 살기 위해 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황후를 맞이하러 나온 대중 앞에서 기절할 만큼 코르사주를 꽉 조일 정도로 말이다. 여성의 섭식장애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획득할 수 없는 공적 권력‧역능을 향한 욕망의 방향을 바꿔 자기 몸에 행사하는 일일 때가 많다. 엘리자벳이 주인공인 또 다른 영화 〈코르사주〉에서 드러나듯, 그녀의 공적‧사적 욕망이 ‘황후’라는 이름으로 제한될수록 엘리자벳은 더욱 엄격한 자기 통제로 이를 보상하려 했을 것이다.
이르마는 백작 가문 출신의 42세 미혼 여성으로 결혼하지 않으면 수녀원에 가야만 한다. 결혼과 수녀원은 모두 이르마에게 답답함을 상징하기에 그녀는 황후의 시녀가 되고자 한다. 엄격한 식이요법과 활동적인 운동을 즐긴 엘리자벳의 시녀가 되기 위해 달리기 테스트까지 마친 후 엘리자벳의 시녀가 된 이르마. 그녀는 금세 엘리자벳과 가까워지며 총애를 받는다. 그리스의 한 휴양지, 즉 엘리자벳의 의지와 명령만이 중요한 장소에서 남성 사회에서 가져온 습관(식이요법)을 유지하면서도 자신들만의 가능성(여성들의 우정과 사랑)을 벼려내기도 한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발랄하면서도 격정적인 친밀성은 마찬가지로 비극적 황후의 삶을 조명한 〈코르사주〉와의 결정적 질감 차이를 만든다. 〈코르사주〉가 질식 직전의 삶에서 황후가 갈망한 자유를 그녀 삶 전반에 걸쳐 풀어냈다면 〈엘리자벳과 나〉는 황후의 삶과 그런 황후를 사랑하는 이르마를 통해 남성 사회가 여성의 욕망을 취급하는 방식을 고발한다. 〈코르사주〉가 전반적으로 질식할 듯한 답답함으로 점철된 엘리자벳의 삶을 담담히 애도‧추모한다면, 〈엘리자벳과 나〉는 폭발할 듯 분출되는 황후의 욕망과 자유의지가 끝끝내 좌절하고야 마는 현실과 그에 괴로워하며 변덕을 부리는 엘리자벳을 사랑하는 이르마의 관계성에 천착하여 영화를 황후에 대한 헌사를 넘은 여성 친밀성과 사랑에 대한 통찰로 이끈다.
엘리자벳과 이르마의 사랑은 다정하거나 살갑지 않다. 상호적이지 않다. 황후의 변덕에 이르마는 늘 안달한다. 엘리자벳 시동생의 말마따나 이르마는 또 하나의 “쓰고 버릴 여자”일지도 모른다. 즉 이르마에겐 황후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인물이지만, 엘리자벳에겐 이르마가 억눌린 욕망과 자유의지를 분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시적 대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헌신적일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엘리자벳을 보며 이르마는 황후를 완전히 소유할 방법을 찾는다.
역사 속 실제 인물 엘리자벳은 1898년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코르사주〉는 상상력을 발휘해 황후에게 대안적 역사, 품위 있는 죽음을 선물했다. 〈엘리자벳과 나〉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에는 그 목적이 다르다. 〈코르사주〉의 상상력이 황후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엘리자벳과 나〉의 상상력은 잡히지 않는 황후를 자기 곁에 붙들어두기 위한 이르마의 결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팬텀 스레드〉의 레이놀즈가 독약을 탄 알마의 음식을 기꺼이 먹으며 사랑에 투신하듯, 죽기 직전의 엘리자벳도 이르마의 집착적 소유욕을 사랑의 표현으로 용인해준다. 이제 황후는 죽었고, 더는 자신을 떠날 수 없게 된 황후 앞에서 이르마는 평온을 얻는다. 더는 위기에 빠지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획득한 자의 표정이다. 소유욕이 사랑일 수는 없다. 동시대의 감각으로는 오히려 범죄에 가깝다. 그럼에도 〈코르사주〉를 경유해〈팬텀 스레드〉로 나아가는 〈엘리자벳과 나〉의 극단적 소유욕이 ‘사랑’일 수 있는 건, 사랑의 불확실성과 필멸성을 온몸으로 거부하겠다는 광기에 우리가 무언가 애잔한 공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르마가 언제나 두 사람의 관계성에 더 목말랐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납득이 되는 집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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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레틱(Heretic, 2025)>, 종교는 거들 뿐인 밀실 탈출 스릴러
A24에서 또 한 번 강렬한 공포 영화를 내놓았다. <유전>, <미드소마>, <톡 투 미>와 같은 특유의 신선한 호러 감각이 이번엔 종교를 만났다. 외딴 집을 찾은 신앙심 깊은 두 소녀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야기, <헤레틱>이다. *필자는 지난 3월 27일, 씨네렙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를 통해 <헤레틱>을 미리 만날 수 있었다.
'헤레틱'은 영어로 '이단'이라는 뜻이고, 바로 내일(2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 기본 정보
제목: 헤레틱 (2024)
감독: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출연: 소피 대처, 클로이 이스트, 휴 그랜트
장르: 공포, 스릴러
러닝타임: 111분
국내 개봉일: 2025년 4월 2일
제작/배급: A24
줄거리: 어느 눈 오는 날, 몰몬 선교사 자매인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이 이스트)는 전도를 위해 한 남성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집 주인 리드(휴 그랜트)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맞이하며 날씨가 궂으니 잠깐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다. 규칙상, 여성이 있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지만 '아내가 있다'는 말에 두 자매는 의심 없이 문을 넘는다. 하지만 아내는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고, 남자의 대화는 점차 묘하게 불편한 질문들로 이어지는데... 자신들이 이 집에 꼼짝없이 갇혔다는 것을 깨달은 두 자매는 탈출을 감행한다.
1. 믿음과 의심 사이의 긴장감
최근 공포 영화는 점프 스케어보다 서스펜스와 심리적 긴장감으로 관객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헤레틱>도 그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낯선 남자의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긴장감을 점진적으로 쌓아올린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에는 '종교'라는 소재가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무섭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섭다"는 역설적인 명제를 중심에 두고, 영화는 관객을 믿음과 의심 사이 긴장으로 이끈다. 궤변 같으면서도 논리적인 시험 속에서, 관객은 주인공들과 함께 끊임없이 무엇을 믿어야 할지 시험대에 놓인다.
물론 영화가 처음부터 이 철학적 긴장감만으로 공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궂은 날씨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외딴집, 그 안에 두 젊은 여성이 중년 남성과 함께 있다는 상황만으로 관객은 익숙한 불안을 감지한다. 이 상황 속에선 성별에 따른 물리적 힘의 위계가 힘의 비대칭을 만든다. 이는 남성이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끔찍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본능적인 불안을 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여성, 그리고 관객이 처음으로 의심하는 것은 바로 남성의 정체이다. 중년 남성 리드가 정말로 겉모습처럼 선한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곧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문제이다.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이 역할에 ‘노팅 힐’로 유명한 휴 그랜트를 캐스팅했다. 그는 젠틀하고 따뜻한 미소의 리드를 연기하며, 두 여성이 기꺼이 스스로 낯선 남자의 집 안으로 향하게 만든다. 물론 그들이 의심 없이 안으로 들어간 결정적인 이유는 리드가 ‘집 안에 아내가 있다’고 안심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리드는 부인이 낯을 가린다며 계속해서 그녀의 등장을 지연시킨다. 리드라는 인물에 대해 신뢰를 거둘지에 대한 판단은 영화 초반부를 지탱하는 핵심이다.
두 자매는 이러한 의심 속에서도 그들의 본래 목적대로 리드에게 전도를 하려 한다. 하지만 대화의 주도권은 점차 리드에게 넘어간다. 그는 점점 종교적 신념을 정면으로 겨누기 시작하고, 미묘하게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리드는 계속해서 두 여성의 신념을 흔든다. 그리고 두 여성은 점점 그가 만들어낸 심리 게임의 룰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 모든 과정을 따라가는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리드의 질문에 동참하게 되고, 함께 시험을 받는 듯한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헤레틱>은 단순히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실존적인 위협에 기반한 상황을 통해 스릴러라는 장르적 재미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믿음에 관한 심리 게임을 풀어나간다. 영화에서 긴장과 불안을 조성하는 방식은 매우 치밀하며,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이 설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2. 치밀한 설계
영화는 상당히 치밀히 짜여져 있다. 결말에서 치밀한 설계는 단순히 장르의 플롯을 넘어서 주제의식으로 발현된다. 동시에 관객으로서 이 치밀함 덕분에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즐거움도 준다. 먼저 캐릭터의 균형이 잘 맞춰졌다고 생각했다. 팩스터와 반스는 모두 독실한 몰몬교 신자이다. 그들은 속옷마저 교회가 규정한 의상을 입고, 교회의 공동체에 기반하여 생활한다. 반스는 현실감이 없이 순진한 전형적인 신자처럼 보인다. 반면, 팩스터는 상대적으로 눈치가 빠르고 현실 감각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팩스터는 리드의 말에 휩쓸리지 않고 반박할 수 있는 논리적 인물이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 덕분에 일방적으로 리드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닌, 맞서는 모습을 기대하게 만들고 탈출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또한 인물들이 상당히 실행력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의심이 거두어진 순간에 망설임 없이 행동한다. ‘저건 믿으면 안 될 거 같은데’하는 답답함이 들 때쯤, 타이밍 좋게 인물들도 움직여준달까. 그런데 그 순간마다 절묘하게 새로운 변수나 불가항력적 상황이 또 던져진다. 결국 그들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치밀하게 설계한 덕분에 영화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빈틈 없다고 느낀 부분은 대사이다. 감독들의 전작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소리를 내면 죽는다'는 설정 아래 대사를 최소화하며 긴장을 유도했다면, <헤레틱>은 그 정반대 지점에서 대사로만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감독들 역시 이런 극적인 대비를 하나의 창작 실험으로 삼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대사는 '말맛'이 살아있는 그 자체로 즉흥적인 재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대신 모든 대사가 계산된 구조 안에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예를 들어, 초반부 리드가 반스에게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말하자 반스는 ‘스파이더맨’이 말한 것이라고 받아친다. 리드는 이를 ‘볼테르’가 말한 것이라 정정한다. 처음 이 장면에서 이 대사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흘러갔기 때문에, 자그마한 유머라고 생각하고 웃고 넘겼다. 그러나 이후 영화가 반복적으로 원형과 복제, 신념의 계승과 변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앞선 대사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대화를 통해 서서히 분위기를 조이고, 이후 그 대사들이 퍼즐처럼 맞물려 돌아올 때 강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심지어 음악마저 아무 의미 없이 삽입되지 않고 있다. 이런 지점들이 감상 이후 곱씹을수록 서늘함을 안겨준다.
3. 총평
<헤레틱>은 스릴러 장르 특유의 긴장감을 정교하게 설계한 작품이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오직 대화만으로 긴장을 구축하는 연출이 인상 깊었고, 이야기 자체도 흡입력이 있어 몰입하며 감상할 수 있었다.
다만, 극의 대부분이 대사 중심으로 진행되다 보니, 일부 장면에서는 다소 과하게 설명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리드라는 인물의 특성상 몇몇 장면은 마치 신학 강의를 듣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대사의 길이나 논리적 구성이 그러한 인상을 더욱 강화한다. 다시 보면 더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할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해 이 ‘강의 장면’들 때문에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리드가 주도하는 그 ‘강의’가 실제로는 힘의 위계와 물리적 위협 위에서 작동한다는 점은, 그의 논리에 대한 신뢰를 흔든다. 앞서 언급한 실존적 위협은 장르적으로는 훌륭한 장치지만, 영화가 내세우는 주제적 메시지(믿음과 확신에 대한 탐구)와는 결이 어긋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인물들이 마주하는 상황은 믿음에 대한 철학적 시험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한 몸부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 때문에 미묘한 뉘앙스만 주던 초반부에서 다소 노골적인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영화의 매력이 한풀 꺾인다. 결말 또한 만족스럽다고 하긴 어렵다. 여러 버전의 결말을 놓고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덧붙인 듯한 인상을 준다. 믿음이라는 주제에 대한 해답을 끝내 찾지 못한 채, 결국 캐릭터가 가진 ‘선(善)’의 속성에 기대어 마무리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의심하는 리드가 실은 누구보다 믿음을 갈구하는 인물처럼 마무리되는 아이러니도 다소 예측 가능한 부분이다.
배우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휴 그랜트는 로맨틱 코미디의 상징과도 같던 자신의 이미지를 이번 작품에서 기민하게 비틀었다. 그가 완전히 다른 역할로 변신한 것은 아닌, 기존의 친근하고 젠틀한 이미지를 미묘하게 왜곡해 섬뜩한 설득력을 만들어낸 점이 인상 깊었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당신이 알고 있던 '로맨틱한 휴 그랜트'의 잔상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팩스턴을 연기한 소피 대처는 어딘가 낯익은 인상이다 싶었는데, 제나 오르테가와 안야 테일러 조이를 반씩 섞은 것 같다. 실제로 과거 몰몬교 신자였다고 하는데, 그런 배경이 캐릭터의 미묘한 디테일을 풍부하게 만든 것 같다. 최근 개봉한 <컴패니언>에서도 색다른 연기를 보여줬는데, 배우에 관심이 생겼다면 해당 작품도 꼭 보기를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컴패니언>에서 더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반스를 연기한 클로이 이스트는 <파벨만스>에서도 얼굴을 비췄던 배우다. 그녀 역시 몰몬교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흥미롭게도 "다른 삶을 살았으면 자매 선교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소피 대처와 클로이 이스트 모두 2000년생으로 비교적 어린 배우들이다. 실제 나이와 캐릭터가 잘 맞아떨어지며, 두 사람의 호흡도 매우 자연스럽다. 전반적으로 캐스팅이 탁월하게 어우러졌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튼, 재밌게 감상했다. 필자는 종교에 큰 관심이 없어 처음엔 관람을 망설였지만, 막상 보고 나니 종교적 맥락보다는 심리 스릴러로서의 완성도와 장르적 매력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종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한정된 공간과 인물 간의 긴장감이 주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면, 종교에 대해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아쉬울 수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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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여운 캐릭터의 유통기한이란
* <미니언즈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미니언즈2 (2022)
감독: 카일 발다
출연(목소리): 스티브 카렐, 타라지 P.헨슨, 양자경 등
장르: 애니메이션, 코미디
러닝타임: 87분
개봉일: 2022.07.20
미니 보스와 미니언들의 본격 성장기
트릴로지로 구성된 <슈퍼배드> 시리즈는 악당 '그루'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라면 스핀오프 <미니언즈> 시리즈는 말그대로 그루의 조력자 겸 친구로 등장했던 미니언들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작품이다. <슈퍼배드>의 프리퀄로서 미니언이라는 종족의 기원부터 이들이 어린 그루를 만나게 되는 초기 서사를 그렸던 전편에 이어 2편은 11살이 된 그루와 미니언들의 본격적인 성장기를 담고 있다. 6인의 악당을 동경하는 '그루'는 미니언들과 함께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소한 말썽을 피우는 게 전부이지만, 세계 최고의 악당이 되기를 꿈꾼다. 6인의 악당에 한 자리 공석이 생겨 면접을 보러 간 그루는 어리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무시를 당하자 눈앞에서 스톤을 훔쳐 달아나버린다. 하지만 말썽쟁이 미니언 '오토'가 스톤을 잃어버리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그루마저 늙은 악당 '공포의 검은 장갑'에게 납치를 당한다. 그렇게 그루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나는 미니언, 그루를 쫓는 악당들, 그리고 잃어버린 스톤을 찾기 위해 떠난 오토의 좌충우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신 없는 플롯, 핵심 스토리의 부재
<미니언즈2>는 기존 시리즈 작품들처럼 러닝타임이 짧지만 중심 플롯이 세 개나 등장하기 때문에 많은 사건들과 캐릭터들이 정신없이 지나간다. '미니언즈'의 핵심은 심플함과 직관적인 코미디라고 생각하는데, 많은 플롯을 활용하면서 그 장점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미니언을 두 팀(주인공 3인조와 오토)으로 쪼개고, 그루마저 이들과 떨어뜨려 놓아 함께 있을 때 시너지를 이루는 주인공들의 매력적인 합을 보기가 쉽지 않다. 또한, 중심 축이 되는 스토리라인 부재도 아쉽다. 가장 많은 분량을 가져간 '케빈-밥-스튜어트'의 쿵푸 액션 도전기는 슬랩스틱 개그와 시각 효과를 제외하면 별다른 내용이 없다. 반면 <슈퍼배드>와의 연계성을 가져간 그루의 서사는 떡밥 회수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제공하나 본작이 <미니언즈> 시리즈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또한 의미 있는 구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루'와 '미니언'의 비중이 비등비등하게 반영되어 본작이 <미니언즈> 시리즈인지 <슈퍼배드> 시리즈인지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 영어 대사를 소화하지 않는 미니언들이 무작정 큰 비중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슈퍼배드> 시리즈와 이어지는 '그루'의 서사가 꽤나 중요하게 다뤄지면서 미니언들은 그저 코믹하고 귀여운 요소로 활용되는 것에 그친다. <미니언즈> 전편은 <슈퍼배드>의 주인공인 '그루'가 등장하지 않았지만 마성의 매력을 가진 미니언들만으로 작품을 꽉 채우는데 성공했던 터라 스핀오프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살리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귀여운 매력만으로는 분명한 한계
<슈퍼배드>도 어느덧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시리즈를 이끌어 왔고, 이러한 롱런의 비결로는 시리즈 초기까지 감초에 불과했던 미니언들의 커진 존재감을 꼽을 수 있다. <미니언즈> 1편은 탄탄한 스토리라인 없이 오로지 미니언들의 귀여움과 코믹한 캐릭터성만을 내세워 <슈퍼배드> 시리즈를 넘어서는 수익을 거두는데 성공했을 정도다. 완성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오로지 캐릭터의 인기만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시리즈물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해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후속작 제작이 지속되면서 더 이상 귀여움만으로는 승부수를 띄우기 어려운 구간에 도달한 듯하다. 미니언의 캐릭터 쇼만으로 작품을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는데, 더 이상 이들과 함께 풀어나갈 스토리나 매력적인 사건들이 없다. 사실 몇 편 째 어설픈 빌런과 그루/미니언의 대결 구도만으로 작품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후속작인 이번 작품 역시 흥행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제작이 확정된 <슈퍼배드4>와 그 이후에도 프랜차이즈를 계속 확장해 나갈 계획이라면 날이 갈수록 유치함만 더해지고 있는 각본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줄거리 없이 캐릭터의 인기만으로 흥행을 거두었던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과거에도 많았다. 하지만 빈약한 시나리오 문제는 시리즈가 지속됨에 따라 귀여운 매력의 약발이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니언즈> 시리즈 또한 이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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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끝나고 정말이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각종 활동을 해보기 위해 몇 장의 자기소개서, 몇 차례의 면접 등을 준비하면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있다. 바로 객관성. 사실을 전달하고, 팩트를 체킹하는 일에는 물론이고,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을 작성하는 일에 있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장착해 주관성이 만들어낸 억측의 구렁텅이에 빠져선 안 된다. 이런 객관성과 주관성을 이야기할 때에 꼭 빠지지 않는 소재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예술이다. 예술을 순전히 객관성의 영역으로 치부하기엔 예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창의력과 독창성의 의미가 퇴색된다. 또 예술을 오로지 주관성의 영역이라 하기엔 예술을 창작자들을 비롯한 전체 예술 비평가들의 존재가 무안해지며, 그들의 평가 또한 예술의 한 분야로 평가되는 요즘, 예술의 객관성을 빼놓고 예술을 거론하기엔 무리이다. 이렇듯 예술을 주관성과 객관성의 이분법적 논리로 분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영화 <위플래쉬> 내의 대사에도 이런 관점이 등장해 더욱 재밌었다. 영화 속 "앤드류"가 한 말, 예술과 음악엔 객관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편견을 갖지 않을 수 있고, 주관성을 가진 무언가에 내 식대로 생각하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위플래쉬>를 전부 관람한 후 필자의 머릿속엔 단 한가지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객관성을 잃었다.' 영화 <위플래쉬>를 분석하고, 나만의 평을 내려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객관성을 잃었다는 사실은 필자의 뼈 아픈 실수이지만 또 그런 실수를 유도하게끔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는 뜻으로도 생각된다.
영화 <위플래쉬>는 끌어들임과 매혹 그리고 빨아들임을 영상화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심지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영화예술의 미학적 진수를 담아내 모든 이들의 객관성을 무너뜨리는 굉장한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굉장히 무난한 하얀색의 폰트로 작성된 타이틀이 검은 화면을 배경으로 보여지고 뒤에선 본인이 음악 영화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드럼 영화임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스네어 연주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모두 거치고, 어두운 복도 끝엔 빛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좁은 방 안에서 연주하는 한 남자, 주인공 "앤드류"가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달리 인과 줌 인을 통해 카메라는 그에게 다가갔고, 이후 숏에서 그 시점은 카메라의 전지적 시점이 아닌 또 다른 주인공 "플래처"의 시점임을 알 수 있었다.
영화 <위플래쉬>는 시점과 구도의 미학을 완벽히 이해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 프레임 속 황금 비율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프레임의 대각선이 모이는 중앙점과 그 위 쯤일 것이다. 영화는 그 점보다 더 놓은 지점에 인물을 어두운 복도와 외로운 불빛 하나로 이루어진 공간에 배치하여 의도적으로 인물을 작아보이게 하고 연약한 존재로 비춰지게끔 연출했다. 이후 등장한 "플래처"의 시점을 통해 보이는 당황한 "앤드류"의 당황한 눈빛과 불안정한 몸짓, 아직 부족해보이는 연주 실력은 그를 더욱 작게 만들었고, 관객은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각 인물들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고, 무슨 입장에 처해있는지 별다른 대사 없이도 눈치챌 수 있다.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모든 배경과 사건의 조짐을 시작과 동시에 암시한다.
어떠한 부분을 연습해야하는지 어느정도 알려준 "플래처" 교수의 힌트에 따라 "앤드류"는 더블 타임 스윙을 연습한다. 결국 그는 찾아온 기회에 가뿐히 스카웃되어 "플래처" 교수의 '스튜디오 밴드'로 입성하게 된다. 영화 속엔 재즈 밴드라 일컬을 수 있는 밴드가 총 4개 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두 밴드가 바로 "앤드류"의 첫 밴드인 '나소 밴드'와 '스튜디오 밴드'이다. 물론 두 밴드 사이엔 어느 정도 수준 차이가 존재하지만, 실력 차이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밴드 구성의 의미이다. 두 밴드 모두 젊은 20대 청년들이 모여 이뤄진 밴드이기에 교수가 자리에 없을 때나 학교에 도착해 본인 연주를 준비할 때면 공간은 떠드는 소리에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채워진다. 하지만 교수가 들어왔음에도 전혀 그 태도가 변치 않고 유지되며 문제있는 실력에 따끔히 지적하지 않는 교수로 구성된 나소 밴드와 달리 지정된 시각이 되자 문이 부숴져라 세게 열면서 들어오는 "플래처" 교수와 만반의 준비를 끝맺히고 교수의 콜싸인에만 집중한 학생들로 구성된 스튜디오 밴드는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대표한다. 문제되는 사항이 있는 경우, "플래처" 교수는 한 마리의 야수가 되어 욕설과 분위기로 학생을 압도해 공포감을 조성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주인공 "앤드류"의 시선을 따라가고, 전지적인 시점에서 카메라 촬영을 한다 하더라도 "앤드류"의 관점과 입장을 따라 움직인다. 이런 카메라의 움직임과 구도는 스튜디오 밴드의 공포서린 분위기를 "앤드류"의 관점에서 담아내 그가 느낄 두려움과 불안함을 관객이 피부에 와닿게끔 유도한다.
영화가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인물 구도는 바로 상하 관계이다. 영화 <기생충>이 보이는 선이나 보이진 않지만 유추할 수 있는 무언의 선으로 인물 간의 구도를 설정하고, 그 구도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출했다면 영화 <위플래쉬>는 두 인물이 잡힌 투 샷 속 각 인물의 고개와 몸이 쏠린 정도 등의 움직임과 서 있는 인물과 앉아있는 인물의 수직적 위치를 통해 상하 관계를 구사하여 인물 간 주종관계를 설정한다. 상대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위치와 발성으로 묵직하게 누르는 "플래처" 교수의 공포스러운 교수법은 영화 <위플래쉬>가 당시 교육계에서 화제의 영화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플래처"라는 인물을 그저 악마의 인간화로만 비춰지게 방치하지 않았다. "앤드류"가 첫 합주를 앞두고 복도에서 대기를 할 때 찾아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묻고, 존경하는 재즈 뮤지션들의 생애 그리고 그 생애 중 가장 인상깊은 사건인 '심벌 던지기'를 말하는 씬을 볼 때면그는 굉장히 좋은 사람, 친절한 교수처럼 보여진다. 물론 이에 대해 양의 탈을 쓴 늑대, 착한 척하는 괴물이라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후 경연장에서 동료 지휘가의 딸을 만나 친절히 대화하고,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에 아이와 약속까지 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좋은 사람이다. 영화는 공간을 기준으로 "플래처"를 구분한다. 자신의 밴드원들이 존재하는 공간, 음악이 존재하는 공간에선 그 누구보다 치밀하고, 날카로우며, 프로 의식이 투철한 인물이지만, 이후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제자의 죽음, 제3의 공간에선 굉장히 따뜻하고, 온화한 인물이다.
"플래처"라는 인물이 그저 화가 많고, 다혈질적이며,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영화는 답한다. 물론 이를 표출하고 행하는 방법은 충분히 잘못되었지만 영화는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재즈와 음악에 진심인 면을 강조했고, 이는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등장하는 씬의 존재적 의미를 강화시킨다는 측면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보조 자리에서 메인 자리로, 갖은 고생과 수 많은 일들이 지나고 나서야 그토록 원했던 스튜디오 밴드의 메인 드럼을 꿰찰 수 있었다. 이 점에도 의심쩍은 부분은 있다. 이후 장면에서 언급되듯 "앤드류"가 스튜디오 밴드에 입성할 수 있었던 데엔 "플래처" 교수의 힌트가 있어서였고, 메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데에도 타인의 귀책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런 고생 끝에 차지한 메인 자리도 새로운 곡, 새로운 드러머의 합류로 위태로워지기 시작하고, 본인이 자리를 꿰차게 되었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던 난항들이 겹쳐 노력과 시간이 모두 물거품이 되자 "앤드류"는 그동안의 설움이 터져 경연장에서 "플래처"를 덮쳤고, 결국 퇴학당한다.
"앤드류"는 흔히 말하는 아웃사이더 중 하나이다. 영화의 초반부 혼자 연습실에 남아 외로이 연습하는 씬에서도, 연습을 마치고 향한 자취방에 가는 길, 파티 중인 옆 방을 뒤로한 채 쓸슬히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그의 등에서도 그리고 어느 밴드에 가서도 인정받지 못해 그저 불안한 눈동자만 돌리는 그의 눈빛과 행동에서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위플래쉬> 내엔 보통의 타 영화들처럼 대화가 영화의 전반적인 씬을 지배하거나 서사를 담당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씬, 음악만이 존재하는 씬, 연주하는 씬들이 그 역할을 대체한다. 하지만 그 몇 안되는 대화씬, 세기 좋은 수량의 소통 장면이 영화 전체에 주는 영향력은 수와 반비례한다. 작품 속 대화 씬을 모두 종합해 보면 뮤지션으로서 최선을 다 하고, 죽을 힘을 다해 분투하는 "앤드류"의 노력들을 어쩌면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그 노력들과는 반대되는 이들과 나눈 대화들이 전부다. 여자친구 "니키"를 만나 데이트를 하고, 아버지를 만나 영화를 관람하고, 아버지의 지인들과 함께하는 식사하는 그 모든 씬들엔 "앤드류"가 걷고 있는 길들을 무시하려는 눈빛 내지는 음악으로서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권유하고자 하는 시선만이 존재한다. 또한 대비되는 점은 음악이 존해하고, "앤드류"가 드러머로서 존재하는 공간엔 항상 침묵, 압박, 공포만이 존재하지만 인간 "앤드류"로서 존재하는 공간엔 위로, 환영, 평안의 말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앤드류"가 가고자 하는 길엔 대화보단 행동, 위로보단 압박, 평안보다 음악이 더욱 중요해보이고, 이는 영화의 구조 전체를 구성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영화의 종반부 "앤드류"가 내린 선택으로 귀결된다.
영화 <위플래쉬>엔 음악 영화답게 음악이 끊이지 않고, 음악을 업으로 하는 이들을 담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들의 퍼포먼스 또한 빈번히 등장한다. 흥미로운 건 영화 <위플래쉬>는 음악을 뮤지컬 영화 속 음악처럼 사용한다는 점이다. "앤드류"는 낯을 굉장히 많이 가리는 인물로 보이고, 다른 이들과도 막역한 사이로 못 지내는 성격인지라 주인공 치고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의 심정, 배경, 분위기 등을 행동과 눈빛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는데, 이에 도움을 주려 영화는 인물의 심정이 중요히 드러나야 하는 씬에서 재즈 음악을 들려주어 음악의 분위기를 통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앤드류"를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음악들 뿐만 아니라 "앤드류"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영상들 또한 관객에게 소리와 함께 보여주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하는 연주법은 영화의 종반부에 나올 연주의 복선이기도 하다. 영화 <위플래쉬>는 이렇듯 음악 하나, 영상 하나 허투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후 등장할 모든 씬, 모든 장면들을 위해 초반부부터 빌드업을 이런 방식으로 쌓아가기 시작하고, 최종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 내에서도 이 지점들을 통해 설명하게 된다.
더블 타임 스윙. 파라디들. 300 비트. 영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과제가 이런 음악 용어들을 관객들에게 잘 설명하는 건 아니었을까. 마치 메디컬 장르 영화나 드라마의 좌우측 하단엔 의학 전문 용어에 대한 해설이 등장하게 되는데, 영화 <위플래쉬>는 행동을 통해 설명하겠다고 대답을 이었다. 영화는 그 연주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전 철저한 빌드업을 통해 등장을 대비했고, 등장을 더욱 화려하게 하면서 관객을 설득시켰다. 심지어 영화는 연주를 하는 인물이나 연주를 하고 있지 않는 보통의 인물이나 가리지 않고 그들의 손과 귀 그리고 입에 집중하게끔 유도했다. 손의 방향, 손가락의 움직임 그리고 귀 장식과 귀의 모양 등 신체를 지속적으로 비추면서 관객들의 시선을 훈련시켰고, 이후 등장하는 연주씬에서 그 모든 요소들을 풀어내 긴장감과 흥미진진함 모두를 겸비한 장면으로 만들어내었다. 연주곡으로 선정한 곡들 또한 예사롭지 아니하며, 굉장히 인상적이다. 재즈에도 종류가 굉장히 많고, 각 종류별 구사할 수 있는 음악적 분위기도 천차만별이다. 그 많은 선택지 중 드럼, 일렉 기타, 스케일 별 트럼펫 등의 관악기로 구성된 빅 밴드 음악, 그 중에서도 드럼 연주가 귀에 꽂히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각 악기별 독특한 등장 타이밍과 솔로로 만들어진 악기 라이벌링까지 겸비된 음악. 이 모든 재즈의 매력적인 점들을 모인 곡이 바로 영화 <위플래쉬>의 대표곡인 'Whiplash'와 'Caravan'이다. 영화는 이 악기 라이벌링을 효과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각 파트별 솔로를 담당하는 악기를 클로즈업하여 비추고, 솔로가 타 악기로 변경하게 되는 때가 오면 샷을 끊지 않고 스위시 팬을 통해 촬영하였으며, 각 악기별 연주자들의 손, 관악기의 경우 입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해 황홀한 연주의 황홀한 연출을 구사했다. 모든 솔로가 모두 마쳐져 다시 모든 악기가 하나가 되는 때면 팬을 통해 구성원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마침내 멈춘 카메라는 드럼에 포커스를 맞춰 연주자의 고된 표정, 현란한 손놀림과 발놀림 그리고 앞에서 압박을 주고 있는 지휘자 "플래처" 간의 알 수 없는 신경전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일련의 사고가 있고 난 후 모든 드러머로서의 삶을 접고 평범한 한 20대 청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다 우연히 한 재즈 바에서 피아노를 치는 "플래처"를 만난다. 그는 "앤드류"의 증언과 함께 학부모들에게 그의 폭력적인 교수법이 고발되어 교수직에서 쫓겨나 모 프로 밴드에서 지휘를 맡는다고 한다. 그는 "앤드류"를 만나 그 교수법에 대해 스스로가 내린 결론을 이야기한다. 그 때 등장한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 "세상에서 제일 나쁜 두 마디가 있다. 그정도면 됐어."
"앤드류"의 아빠는 음악으로 성공하고 싶어하는 아들 "앤드류"에게 음악이 아닌 평범한 삶도 생각해볼 것을 은연 중 틈틈히 주입시켰다. "앤드류"의 여자친구인 "니키"도 평범히 대학교를 다니지만 아직 본인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 모르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영화 <위플래쉬> 속 오직 "앤드류"만이 최고가 되기 위해, 위대해지기 위해 아둥바둥, 손이 찢어지는 것도 참아가며 연습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이 과연 "플래처"를 만나 생긴 것일까? 그의 욕망, 링컨 센터에서 연주를 하겠다는 의지, 침대마저 연습실로 옮기고 만나는 여자친구마저 연습에 매진하기 위해 헤어지자 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플래처"를 만나 더욱 강화되었다면 몰라도 그의 집착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 대답한다. 어쩌면 "플래처"와 "앤드류"는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최고가 되기 위해 집착하려는 남자와 최고를 만들기 위해 집착하는 남자가 만났고, 알 수 없는 신경전과 밀당이 오고 갔기에 모종의 동질감이 생기지 않았을까?'그정도면 됐어'의 보통 수준이 아닌 최고가 되기 위한 두 남자의 끝이 다가온다.
"플래처"의 권유로 치웠던 드럼을 다시 꺼내어 그의 공연을 도우러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잘만 하면 이전의 모든 사건, 사고들을 묻을 수 있을 만큼 큰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플래처"는 "앤드류"에게 다가갔고, 모든 일들의 원흉은 "앤드류"라 지목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전한다. 사실 그 공연엔 "앤드류"가 연습하지 않은 곡들이 선정되어있었고, 전혀 알지 못하는 곡들에 "앤드류"는 함정에 빠져 결국 공연장에서 이탈하고야 만다. 공연을 보러와 준 아버지에게 안긴 "앤드류". 포옹도 잠시 결의에 찬 눈빛을 한 그는 앉음과 동시에 신 들린 연주를 펼친다.
영화의 종반부, 영화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부분이자 러닝타임 내내 공들여 쌓아올린 바벨탑을 화룡점정할 시간이다. 영화 <위플래쉬>는 가장 중요한 그 순간, 대사를 모두 삭제하고 오로지 음악 그리고 "앤드류", "플래처"만 남겨둔다. 초중반부부터 복선으로 이어졌던 버디 리치의 연주와 결을 같이하는 드럼의 현란한 솔로가 이어진다. 그동안 연습해왔던 더블 타임 스윙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소리를 구사한다. 영화는 초중반부에 <Whiplash>와 <Caravan>을 조금씩 들려주기만 할뿐 전체를 들려주거나 연주 전체를 보여주지 않았다. 곡 전체가 궁금했던 찰나 영화는 그 답답함에 시원한 사이다라도 되어주듯 현란하게 칼춤을 춘다. 이미 곡이 끝났어야 할 타임인데도 "앤드류"는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플래처"도 그에게 와 협박을 하고, 방해를 하려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연주가 지속되자 "앤드류"에게 다가간 "플래처". 영화는 "플래처"의 눈을 바라보게끔 유도한다. 그의 눈엔 어느새 최고의 뮤지션을 찾았다는 기쁨과 제자의 몰입된 그 순간을 완성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진정한 광기어린 자가 풍기는 아우라에 눌린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마구잡이처럼 이어질 수 있었던 "앤드류"의 연주는 "플래처"의 지휘로 데크레센도 형태를 취하다 "플래처"의 지휘로 다시 크레센도되어 완벽한 드럼 솔로로 변주한다.
해당 씬엔 특별한 대사나 감정을 유발하는 특별한 연출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앤드류"의 연주다. 슬로우 모션, 손의 움직임을 쫓아가는 트래킹 샷, 계속해서 튀겨지는 피와 땀만이 영화의 엔딩을 장식한다. 영화 <위플래쉬>의 종반부가 훌륭한 이유는 말로써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서 그간의 설움, 과정, 노력, 애환, 고통을 함축적으로 표현해내었기 때문이다. "앤드류"와 "플래처", 곡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서로 콜싸인을 맞추려 눈을 마주한다. 상하관계, 주종관계처럼 수직 위치로 배치되었던 눈은 동등한 수평선의 위치에 놓여진다. 비록 눈에 익스트림 클로즈업되었지만 우린 "플래처"가 "앤드류"에게 어떠한 말을 전한 걸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그 말을 들은 "앤드류"는 "니코"를 만난 씬을 제외하고 거의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엔딩을 화려히 장식하고 영화는 마무리된다.
100마디 말보다 하나의 행동이 어떨 때엔 더 도움이 되고,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영화는 더 하는 것보다 빼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무엇을 더 해야 하고, 무엇을 덜어내야 하는지가 아마도 영화의 진수인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영화 <위플래쉬>는 그 진수의 향연이지 않았을까? 본 작품에 대한 평가 내지는 한줄평을 보면 "플래처"의 악랄한 교수법을 비판하고 이를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로 생각해 평가한 평들이 많다. 물론 그 지점 또한 무시할 수 없으며, 필자의 생각에도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에 그 요소를 결코 무시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만 작품을 관람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재즈와 드럼, 밴드가 운용되고 연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완벽하게 이해한 감독이 만들어낸 너무도 아름답고도 체계적인 연출 그리고 이를 더욱 빛내는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매력적인 영화음악이 존재하는 영화가 <위플래쉬>이다. 그 어떤 요소로도 본 작품은 정말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는 내가 지금 어디있는지도, 윤리가 무엇인지도, 내 귀에 들리는게 무엇인지도 잊고 그저 즐기게, 미치게 한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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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 어벤져스의 MBTI를 알아보자!
#산돌구름 #MBTI #마블MBTI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영상 타임라인*
0:00 인트로
0:50 이기적 통솔자, 아이언맨
2:55 융통성 제로 선비, 캡틴 아메리카
5:35 역시 어벤져스 외교관, 토르
6:28 조용하다 화내면 무서운 사람, 헐크
7:57 엘리트 공무원, 호크아이
9:08 아웃트로2020. 08. 26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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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고스트 버스터즈 다시 출동!!!
1980년대 두 편이 개봉했던 고스트 버스터즈의 세 번째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2016년에 만들어진 여성 중심의 고스트 버스터즈가 있었지만 좀 실망스러웠는데요.
이번에 개봉하는 고스트 버스터즈 라이즈는 기존 시리즈를 정식으로 이어가는 영화입니다.
기존 시리즈의 감독인 이반 라이트만의 아들인 제이슨 라이트만이 감독을 맡아 기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요.
먹깨비나 머쉬멜로우맨 같은 유령들도 그대로 등장합니다.
오리지널 멤버들도 등장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리뷰 영상을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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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 Busters' third film, which was released in the 1980s, was released.
There was a women-centered Ghost Busters created in 2016, but it was a little disappointing.
Ghost Busters Afterlife, which will be released this time, is a film that officially continues the existing series.
Jason Reitman, the son of Ivan Reitman, the director of the existing series, is the director and captivates the hearts of existing fans.
Ghosts such as Muk-Kae-bi and Mushmallowman also appear as they are.
The original members are coming out, so if you're curious, please watch the review vid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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