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8-18 10:32:00
[JIMFF 인터뷰] 성장통을 그리다
'낮은 목소리' 박영광 감독 인터뷰
성장통을 그리다, 영화 ‘낮은 목소리’의 박영광 감독 |
박영광 감독의 ‘낮은 목소리’는 어린이 합창반의 맑은 목소리와 아이의 불안이 대비되면서,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음 페이지의 악장을 넘기는 아이의 성장통을 담은 영화다. 8월 15일, 하소생활문화센터 산책에서 박영광 감독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
![]() |
영화 ‘낮은 목소리’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낮은 목소리’는 11살 동윤이라는 합창단 솔로이스트가 자신의 변성기와 가정의 붕괴가 함께 겹치면서 어떻게 보면 하나도 힘든 성장통을 동시에 두 개를 겪으면서 변화하는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고 거기에 저항하는 그런 내용을 담은 영화입니다.
‘낮은 목소리’만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낮은 목소리’는 어린이 영화이면서 합창이라는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영화인데요. 성장 영화이지만, 성장을 막연히 아름답게만 그리지는 않으려고 했어요.
제목을 ‘낮은 목소리’로 정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이가 변성기를 겪으면서 목소리 음계가 낮아진다는 의미도 있고요. 또 ‘목소리가 크다’라는 표현을 하잖아요. 이를 층위에 대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이 아이가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요’, 혹은 ‘우리 집이 이렇게 붕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라는 표현을 해도 힘이 없다는 의미에서 ‘낮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아역 배우의 연기와 합창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는데요, 혹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배우에게 특별히 요청하신 부분이 있으실까요? ‘무심함’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던 것 같아요. 우리 일상이 어떤 감정이나 표정으로 차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저는 오히려 그사이 빈 공간들에서 더 마음에 와닿는 순간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게 이 영화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했어요. 무심하게 목적성을 갖지 않고 하는 반응과 표현을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
![]() |
영화 속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동윤이라는 인물이 합창단 테스트를 하는 장면이 있어요. 아이들이 하얀 옷을 입고 다 모인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솔로이스트를 뺏기는 장면이에요. 물론 합창을 같이 만드는 모든 파트에 있는 아이들이 다 훌륭하고 좋지만, 동윤이에게 있어서 솔로이스트의 자리는 좀 남다르기 때문에 저는 그 장면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이의 성장기 중 변성기를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모두가 ‘변성기’ 같은 시기를 겪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변성기를 중요한 소재로 선택했고, 보시는 분들도 ‘내가 그때 그랬지’ 그리고 ‘그때의 그 일들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한 번씩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과거의 성장통이 지금은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무섭고 그게 굉장히 커다란 일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를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고통을 끄집어내서 다시 고통을 느끼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상황들을 기억하고 곱씹어 보는 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영화 ‘낮은 목소리’는 변화의 기점에 서 있는 이들에게 공감과 응원을 전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박영광 감독은 머지않은 시간에 장편 영화를 찍고 싶다는 계획을 전했다. 앞으로 그가 그려나갈 또 다른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김문숙 |
Relative contents
-
- 낭만의 무도회 왈츠가 흐르는 영화 -7-
❣️[Cinelab Curation]❣️
이유 없이 설레는 봄에는 왠지 왈츠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왈츠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을 만나볼 수 있는 영화들을 가져와 봤습니다!
그럼 씨네랩 큐레이션으로 설렘 가득한 무도 회장으로 떠나 보실까요!🧡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
-
- 우리는 결국 다시 혼자가 될 것이란걸 알기 때문에
업보. 불교에서 쓰는 말이다. 선악의 행업을 말미암아 삼은 과보를 뜻한다. 이 업보의 주체는 상황마다 다르다. 인간관계에 정답이란 없으니 당연하다. 내가 업보를 돌려받을 수도 있고 타인이 누군가에게 줬던 상처를 내가 입힐 수도 있다. 불교를 정의하는 또 다른 가치관이 있다. 윤회다. 생명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내가 지금 태어났다고 한 건 언제쯤 죽는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또 나는 다른 무언가로 태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좋은 일 나쁜 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금 하품을 크게 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업보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크게 준 상처의 대가를 돌려받고 있는 셈이다.
이 가정을 계속해서 곱씹다 보면 인생이 허무해진다. 공감을 못 받으면 어떡하지. 이겨내도 막상 같은 시련이 덮치면 어떡하지.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일인데. 이러다 내가 받은 상처가 세상의 기준에 끼지 못한 게 된다면 참 외롭지 않을까. 이 감정이 내가 단 1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런 거겠지.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상대를 모욕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고, 나 역시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주변인들에게 더 감사해야 한다는 걸. 갑자기 나더러 화려하다고 했던 내 스승 중 한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연락할 일은 없어 마음으로만 그분의 행복을 기원한다. 나는 내가 성공했던 일들보다 훨씬 더 초라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에 휘둘리는 인간이기도 하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아무것도 없는 영화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눠진다. 한국의 인기 여배우가 유명 영화감독과 불륜설이 난다. 국내 여론은 당연히 난리가 나고 베를린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아는 언니랑 대화를 나눈다. 1부 끝. 2부는 여배우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불륜이 났던 남자 감독과 만난다. 2부 끝. 이 영화는 줄거리만 단출한 게 아니다. 영화의 화법도 조용하다. 플롯이랄 게 없다. 조명도 제대로 안 된 것 같고. 인물 갑자기 튀어나오고. 대화도 사실 의미가 없다. 난 왕가위를 좋아한다. 왕가위 영화의 핵심은 때깔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왕가위의 감성과는 전혀 딴판이다. 왕가위는 스트릿룩으로 멋을 뽐낸 사람쯤 된다면 (이 영화에서의) 홍상수는 맨투맨에 슬랙스만 입었는데 신발이 짚신인 사람이다. 난 난해한 옷차림인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비춰서 과연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없다. 이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건 없다. 2021년 오늘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알았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딱히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혼자 밤 해변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공유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말이 아니라 상황을 보여주려고 했다. 감독은 어떤 감정을 생각하고 이 영화를 쓴 걸까? 난 외로움과 후회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영희가 유일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공간은 해변이다. 그녀는 애인을 좀 많이 신경 쓴다. 친한 언니에게도 애인 이야기를 한다. 지인들과 술 먹을 때도 애인 생각을 한다. 해변에서도 애인의 얼굴을 그린다. 그러다가 해변에서 잔다. 시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냥 그녀는 그러고 만다. 아무 일 없는 듯이. 시간이 지나 그녀의 그리움이 어떻게 됐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2부를 보자. 바다에서 지인들끼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다. 근데 이건 꿈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2부가 끝났다. 영화 안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던 건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다. 모든 게 꿈이었다. 결국 그녀는 혼자서 길을 걷는다. 영화의 시작은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었는데 끝은 혼자다. 갈등의 해결? 그런 것 없다. 주인공의 해피엔딩? 없다. 새드엔딩? 당연히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 상황은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외로움이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그런 막연함이 외로움이라 생각한다. 영희는 혼자서 소리친다.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냐고 주변인들에게 묻는다. 근데 이게 꿈이다. 내가 진짜 나쁜 년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 마저도 혼자만의 착각으로 끝났다. 그뿐일까? 영희의 애인인 감독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본인만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다. 결과적으로 비행기 타고 13시간이나 걸리는 베를린에서 남자를 생각했던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버렸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그리움은 꿈으로 매몰됐다. 남는 게 없는 셈이다. 이게 홍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감정이다. 외로움이다. 우리는 초입 10분 만에 이 영화가 이러다가 끝날 거란 걸 알고 있다. 감독이 홍상수니까. 근데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밤 해변을 보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다. 어차피 세상에 나를 공감할 수 없는 건 나밖에 없단 걸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엔 이유가 없다. 그냥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가장 외로워진다. 그리고 그게 내가 만든 이유 때문이란 걸 알면 걷잡을 수 없이 후회가 커진다. 바닷가에 홀로 누워서 잠을 자고 싶다. 그냥 멍하니 시간만 지나면 좋을 테니까. 좌절과 외로움을 겪는 사람들, 그러니까 나 포함한 모든 이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다. 아무것도 없을 땐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마지막 엔딩신 바로 전까지를 보니 아마 홍상수 감독도 그런 것 같다. 외로우니까. 이 모든 게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나 보다.
근데 마지막 엔딩신을 보자. 영희는 일어나서 똑바로 걷는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단 걸, 다 의미가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단 걸 아는데도 앞을 보며 걸어간다. 외롭다는 뜻이다. 근데 1부에서 남자 등에 업혀 가던 모습이 아니었다. 2부는 혼자서 걷는다. 이제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난 이 영화의 그녀 모습에게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외롭지 않은가 보다. 아무도 찾지 않아도 될 정도로 씩씩해졌나 보다. 영희는 후회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후회는 어차피 우리의 곁에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진다.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용서를 해주지 않을 때가 많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영희는 이 모든 게 허상임을 알고도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앞으로만 걷는다. 난 이런 그녀의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후회가 작동한 후의 방식과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나라는 인간이 비호감 덩어리라 멀어질 수밖에 없던 모순적인 순간들. 뭐 그런 순간이 우리의 일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걸 벗어나지 못하면 후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또 막상 그걸 세상이 이해해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냥 방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우리는 걸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세상에게 상처를 주고도 앞으로 걷는다는 건 받은 이들의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 셈일 테니까. 현실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홍상수는 부인에게 큰 상처를 줬다. 사실 어찌 보면 질이 안 좋은 사람이다. 그는 이런 자기의 모습을 영희에 투영해 우리의 한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 알아.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단 걸. 그리고 내 애인도 이해할 수 없겠지. 내가 누리던 인기 영희의 주변인처럼 다 꿈처럼 사라지겠지. 사랑도 언젠가 실패할 테고. 그럼에도 영희는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걸었다. 외로움과 후회를 보여줘도 사실 자기는 선택지가 없단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홍상수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하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내가 잘못한 일에 내가 외로움을 느끼던 타인이 나에게 가한 이기심이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게 인생사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모순이고 후회 속에 갇혀 나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변명한 셈이다. 나도 외롭고 후회한다고. 이게 내가 느낀 감정들이라는 걸 보여줬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는 바도 없이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을 완벽하게 비유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끊임없는 루틴의 반복 속에 산다. 반복되는 일상 속 비호감 덩어리인 나.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때의 나만 있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게 꿈같아서 즐거웠던 시간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그러면 어때. 이 세상은 모순덩어리다. 내가 보이는 것들이 타인은 눈치 못 채는 순간의 연속이다. 타인과 교감하는 순간까지 심지어 꿈같이 사라질 때가 부지기수다. 이건 결국 후회나 외로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영희처럼 앞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다. 회의감이 가득한 게 우리의 삶이라고 한들 홍상수는 이 감정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닌 감독이다. 홍상수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지만 나도 그에게 설득당해버렸다. 처음엔 양홍원의 <오보에>를 리뷰하려고 시작했던 글이 점점 길어졌다. 굉장히 중요한 기획서를 써서 모 교수님에게 내야 하는데 한 3시간 동안 이 글만 썼다. 이제는 해변에서 혼자 배회하지 않아야 할 텐데. 공부도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7월 말의 밤이 조용히 진다.
-
- 가해의 침묵은 피해의 고발이 되어,
과거의 과오는 현재의 과실로, 가해의 침묵은 피해의 고발로.
누군가의 목소리로 영화가 시작한다. 평범한 대화인 듯 싶더니 점차 실랑이로 번진다. 앞뒤맥락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혼란한 상황을 대변하는 듯한 카메라 워킹이 이어진다. 우리가 보고 있는 화면은 흐리지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 명확하게 귀에 꽂힌다.
<케이 넘버>는 첫 장면부터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를 요약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이야기들이 어떤 장벽을 넘고자 하는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하여 돕는다. 대화의 주체는 '해외 입양인'과 '어느 기관의 직원'이다. 해외 입양을 갔던 사람이 자신에 대한 공적인 서류를 요구하는데 이를 들어주지 않으며 각종 변명을 댄다. 일처리가 수월하지 않다. 왜? 여느 국가들보다 공공기관과 빠른 일처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왜 우리 국민이었던 사람들을 적대시할까? 여기서부터 관객의 입장은 시작된다. 해외에 나간다는 것 자체를 성공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입양갔던 사람들에게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흔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들 한다. 더 좋은 환경에서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 그들은 근본적인 부분부터 침해당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그 목소리가 우리에게 닿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은 처절한 고발이었다.
/
*Average of Korean
평범한 한국인들은 입양에 대해 알고 있나요?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걸 어떻게 생각해? 영화에 등장하는 해외 입양인이 문득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자 ‘배냇(해외 입양인을 돕는 사회적협동조합)’ 활동가는 ‘평범한 한국인’이란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해외 입양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 나와 같은 사람들. 사실 나는 해외 입양에 대해 조금이나마 인식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다. 평소 여러가지 사건에 대해 파악하는 걸 좋아해서, ‘그것이 알고싶다’ 유튜브 채널을 즐겨본 시기가 있었다. 그때 해외 입양인이 오랜 시간이 지나 본인의 친부모님을 찾고 싶어 관련 서류를 받아보러 한국에 들어와 여러 기관을 돌아다녀보지만 그들은 서류를 공개하지 않고 여러가지 변명을 대며 불친절하게 대응하다가 급기야 문을 열어주지 않고 없는 척 했다. 창문에 움직임이 얼핏 보이는데도 없는 척 하던 그들의 전화 너머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해외 입양인들의 ‘일부’가 향수로 인해 생부모를 찾는데 기관에서 협조도 안 해주고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하는구나, 싶은 얄팍한 감상 뿐이었다. 그들은 단순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적, 세계적 인신매매 희생자였음을 <케이 넘버>를 통해 비로소 알게된 것이다.
*케이 넘버 : 부랑자 청소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이름이 아닌 숫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코드처럼 해외 입양인들에게도 정체 모를 코드가 있다. 코드란, 이름을 불러줄 가치가 없으며 대량의 인물을 편리하게 다루기 위해 사용되고는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가 체계가 바로 잡히기 전, 혼란했던 시기에 그 어린 아이들에게 ‘케이 넘버’가 붙여졌다. 심지어 중간에 번호를 매기는 기준이 바뀌었다.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던 사건, ‘형제복지원’에 대한 이야기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올림픽 시즌과 맞물려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감금, 폭행 등을 자행했던 부랑자 청소와 같은 개념으로 해외 입양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실제로 형제복지원에 아동방이 있었고, 아이들에게 입양 감사편지를 쓰게 만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이 비워지고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오는 목격담을 보아 입양센터와 연계가 있었음이 자명하다. 실제로 당시 해외 입양을 보내는 카테고리가 3가지 있었고, 그중 하나가 고아였다. 고아를 만들기 위해서 서류를 만들어내고, 머리 수 대로 돈이 떨어졌고, 한 명을 해외로 보내게 되면 당시 돈으로도 3천만원이, 기관의 한 직원의 연봉을 지급해줄 수 있는 자본이 마련되는 악순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해외 입양'은 한국이 세계에 준 선물이다. 근본부터 잘못된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스템, 해외 입양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어 그대로 해외에서 차용하기까지 이르렀다. 국가 차원의 이해관계가 어린 아이들을 빌미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교류가 활발했던 국가들 중 스웨덴과 덴마크는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든 없든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국민이 있다면 그들에게 키울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해줘야 했다. 그래서 한국의 입양아들을 원했다. 입양아들에 대한 수요는 계속되고 심지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아이에 대해 사랑을 줄 수 있는 구조도 구축되어 있지 않고, 미혼모에게는 모든 처벌을 내리는 사회 속에서 잘못된 처벌의 영향이 무고한 아이들에게 도달했다.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추방되는 박해와 차별을 온몸으로 받게 된 것이다.
*사과하라
올림픽 시즌과 맞물려 한국의 세계적인 위상이 낮아질 수 있다는 공식 문건이 제시된다. 화면에 나오는 해외 입양인 수를 합산하는 도표는 비공식 입양아까지 합쳐지며 숫자가 끝없이 올라간다. 우리가 감히 셀 수 없을 해외 입양인들은 항상 친부모들을 향한 레이더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코로나 사망자 숫자를 보며 '혹시 생모가 살아 있을까?' '저 사람이 내 엄마아빠는 아닐까?' '혹시 저 노숙자처럼 살아가는 건 아닐까?' 불필요한 상상을 그만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부모를 알아가야 하는 목표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해외로 매매되었던 아이들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돌아오고 있다. 한국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가서 돌아오지 않아야 할 존재이니까. 이후의 리액션은 예상에도 없었으니까. 이제 우리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주목해야 한다. 해외 입양인들이 당한 일들을 가늠해보면, 그들이 원하는 대응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대대적으로 행해졌던 불법 인신매매에 대한 인정, 현재까지 이어지는 서류 왜곡에 대한 개선, 친부모님 혹은 형제자매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인내하고 한 마디를 강하게 내뱉었다. "사과하라"
/
여기까지 읽은 분들, 혹은 영화를 보고난 분들은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열악한 환경에서 본인의 뿌리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지? GV에서 같은 질문이 나왔으며 감독님, ‘배냇’ 대표님, 교수님은 각 입장에서 다양한 답변을 주셨지만 그 맥락은 같았다. ‘관심’이 필요하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갈수록 잔혹한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어떤 사건은 판도를 뒤흔들기도 하고 또 다른 사건은 아예 묻히기도 한다. 그 차이는 대중이 관심으로 갈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함께 목소리를 내주느냐가 관건이다. 사건에 직접 개입되어 있는 분들은 우리, 대중, 관객들이 보이는 움직임에 힘입어 해결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해당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백록
-
- 달 너머 샹그릴라까지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부모님의 집을 떠난 지 십년도 더 지났고,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스스로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가끔 부모님의 집을 찾을 때, (이제는 개념조차 희미한) ‘집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들 때가 있다. 낯선 목소리가 “집에 어른 계시니?” 할 때면, 습관처럼 안 계신다고 대답하고 나서는 끊긴 전화기 앞에서 잠시 상념에 빠진다. 내게 나는 어른이 아닌가? 문득 내 나이를 깨달은 자의, ‘어른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빠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그 질문에 대한 어느 아름다운 답안을 이 영화, <벨파스트>에서 찾았다.
영화 <벨파스트>는 동명의 도시 벨파스트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에게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록허트 교수, <오리엔트 특급 살인> 포와로의 배우로도 익숙한 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재로 만든, 반쯤 자전적인 영화다. 케네스 브래너가 녹아든 주인공 꼬마 ‘버디’는 벨파스트의 한 골목에 살고 있다. 저녁 나절이 되면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이웃들이 끝말잇기처럼 줄줄이 전달해줄 만큼 서로가 서로를 빤히 아는 동네. 그곳에서 쓰레기통 뚜껑을 들고 상상 속의 용을 무찌르면서 놀던 꼬마의 평화로운 세상은, 이내 깨진다.
용을 무찌르는 데 쓰던 방패는, 어느새 실제적으로 눈 앞에 튀는 벽돌 조각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고 만다. 아이들이 꿈꾸어야 할 시간을 현실에 매어두는 것, 그게 분쟁이다. 아직 어린 버디에게 더없이 정겨운 고향이었던 벨파스트는, 동시에 폭력과 긴장에 묶인 지역이기도 했던 것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종교 갈등인 동시에, 아일랜드 독립주의 계열과 친영 계열의 갈등까지 뒤섞여 유독 복잡한 분쟁의 양상을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도 분쟁의 내용을 그리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상황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요약 서술되고 넘어가며, 그나마도 속도가 매우 빠르게 처리된다. 텔레비전에서 군대를 보낸다는 소식이 발표되는 동시에 창밖으로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식이다.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얼룩들이 아주 최근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정치적인 관점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거기에 방점을 찍은 영화는 아니다. 관객으로서 나 또한 그보다는 한 가족의 이야기, 한 사람의 이야기로 주목하고 싶다.
#. 정답은 있는가
‘어른’과 유사하게 되어 가면서 점점 느끼는 게 하나 있다면, 거대하고 거창한 하나의 정답을 맹목적으로 외치는 사람 중에는 가짜의 비율이 높다는 것. 목청만 높이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직접 사유하고 살아낸 것만이 내게 남지만, 그렇게 삶으로 배운 것조차도 하나의 고정된 정답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생각도 언제 깨지고 바뀔지 모른다.
이건 꽤나 속이 복잡해지고 불안해지는 생각이어서, 가끔은 이 마음 끝에서 툭 큰소리를 내게 되기도 한다. 목청만 높이지 말자는 생각 끝에서 목청이 높아지다니 역설적이지만. 허장성세는 결핍에서 나오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영화 속에는 ‘하나의 정답’을 외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답을 종용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맞부딪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세계가 그려져 있다. 실제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을 떠나, 세계 보편적으로 익숙한 상황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름의 방법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놓고 끙끙대는 버디에게 “숫자를 애매하게 쓰라”고 하며, 이를 “애매하게 맞추기spread betting”라고 한다. 하나 뿐인 정답을 콕 짚는 대신,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조언을 따른 버디가 반쪽의 성공만 거두고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같이 하기do the project together”. 경계를 흩는 것도 좋지만, 궁극적으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눈을 맞추고 함께하는 것이 해결의 열쇠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와 너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나란히 연대하기. 이것은 정답이 아니다. 다만 정답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 변화보다 기억
구불구불해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길처럼, 상황은 계속 바뀐다. 한때 데이트가 끝나고 자신이 집에 데려다 주었을 ‘갈색 스타킹 소녀’가 이제는 평생을 함께한 노년의 여성이 되어, 자신의 노구를 ‘집에 데려와 주겠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잠시 할아버지가 멍해지듯이. "고향을 떠나는leaving home" 행동이 "살아가는moving on" 행위로 해석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듯이. 주부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효소 세제가 한 주부에게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되듯이.
자꾸 모양을 바꾸는 세상에서 변치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할아버지는 “벨파스트 출신의 버디”라는 정체성을 명확하게 기억하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계속 묻는다. 버디는 그때그때 구체적인 대답을 꺼내는 아이다.
할아버지의 질문들은 버디의 뿌리를 세우는 힘이 될 것이다. 오늘의 버디도 할아버지의 사랑을 풍성하게 느끼지만, 먼 훗날 뒤채고 흔들리는 날에 더욱 느낄 것이다. 이 사랑은 대를 이어 내려온다. 손자의 수학 문제 푸는 법은 도와줄 수 있었지만, 자식의 성장 과정을 옆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사랑이, 그 자식의 마음에 “많이 도와주셨지”라는 아릿한 사랑으로 남아 있듯이. “가라. 돌아보지 마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단호한 얼굴에서 끈끈한 마음이 묻어나듯이.
“돌아보지 마라”는 할머니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버디는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보는 마음, 결국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마음일 것이다.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마음. 구불구불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앞만 바라보지 않는 마음. 그 마음만이 우리를 바라는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 달까지 가자
우리가 바라는 곳은 어디인가.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달’이 언급된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1969년 7월)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광활한 우주를 소재로 한 텔레비전 방송을 보는 장면도 나오고, 버디와 캐서린이 함께 하는 과제도 달 착륙에 관한 것이다. 달 착륙 숙제를 했는지, 함께하고 싶은지 묻는 문장도 의미심장하다. “Have you gone to the moon yet?” 달에 가보았는지 묻고, “Do you want to, with me?” 같이 하겠는지 묻는 문장에도 ‘숙제’라는 목적어는 없다. 숙제를 마치고 최고점을 받은 아이들에게 아빠가 묻는 말 또한, 달까지 가는 방법이다.
할아버지와 아빠의 대화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달로 가라Get yourself to the moon”는 말을 한 뒤 할아버지는 “런던은 오직 작은 한 걸음일 뿐”이라며 “벨파스트는 언제든 뒤돌아보면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니까.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벨파스트를 갑자기 떠나야 했던 어린 시절이 자신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뿌리를 뽑혀 옮겨 심기는 감각은, 정도와 상황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로 남는 기억이니까. 그러나 트라우마는 트라우마로만 끝나지 않는다. 순진무구한 버디의 시선을 필터 삼아 걸러진 다음, 이야기에 응집된다.
인류가 처음 달을 밟은 것만큼이나, 벨파스트를 벗어난 삶 또한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을 것이다. 달을 밟기까지 우주비행사와 과학자들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듯, 버디의 가족 또한 상당한 역경을 겪었다. 그렇게 도달한 자리는 그전까지 있던 곳과 중력부터 다른 곳, 완전히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다 넘어서서, 이제 반자전적인 영화로 트라우마를 다독인다. 현대사의 얼룩과 다사다난한 개인사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잘 엮어낸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잘 만든 이야기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주목하게 한다.
영화 속 할머니가 서글프게 내뱉은, “벨파스트에는 샹그릴라로 가는 길이 없단다”는 말에 배인 기억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벨파스트의 기억을 달 너머 샹그릴라에 마침내 이르게 한다. 흑백의 날들에 유일하게 생생한 색채로 그려진 세상에 그 길을 만든다. 이제 벨파스트에는 샹그릴라로 가는 길이 놓였다. 샹그릴라는 스크린 속에 있다는 할머니의 말은, 360도 돌아 맞는 말이다. 스크린 속 샹그릴라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힘은, 영화에 있다.
이 영화는 불시착처럼 느껴졌을 어떤 순간을 연착륙시킨다. 기억의 재구성에는 그런 힘이 있다. 스웨터를 풀어 그 털실로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듯, 같은 재료로 새로운 꿈을 그릴 수 있다.
#. 어른이 된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게 뭘까. 정답 없는 질문을 몇 번이고 읊조린다. 매번 다른 답안을 써낼 수밖에 없는 질문, 그때그때 달라질 답안을 아무도 평가해줄 수 없음에도 이게 최선인지 더 나은 답안이 없는지 계속 고민해야 하는 질문.
그래도 <벨파스트>에서 끌어낸 하나의 답안이, 지금은 꽤나 마음에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불시착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어떤 순간을 연착륙의 기억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 그렇게 이야기의 힘으로 나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 시간의 한 마디를 건너온 사람만이, 분절된 지점을 지나 뒤를 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란 재료를 얻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니까.
그렇게 달까지 가자. 나의 샹그릴라로. 각자의 기억과 재구성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아폴로 11호 같은 (그리고 누리호 같은) 성공적 발사체를 놓아줄 테니까.
-
- #모비우스 / Morbius, 2020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흥행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테니, 해당 작품이 '어떤 청사진을 펼쳤는지?'를 말해보겠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멀티버스(다중우주)"를 인정하며 3명의 스파이더맨을 비롯해 악당들까지 종합선물세트로 내놓은 결과물은 제작진과 관객들 모두 만족스러웠습니다.
이제는 관객들의 바램과 제작진들의 의도가 '얼마나 일치하는지와 상충되는지?'에 걱정과 기대가 공존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첫 타자로 나서는 <모비우스>는 어땠는지? - 영화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희귀 질환을 앓고 있던 "모비우스"는 자신을 비롯해 똑같은 질환에 걸린 이들의 치료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흡혈박쥐와 인간의 DNA 결합에 성공하고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에 나서는데요.
결과는 성공하나 이 과정에서 끊임없는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왜, 박쥐 중에서 "배트맨"만 있는 줄 알아?
1. 면접관의 느낌이 이런 건가?
솔직히, 영화 <모비우스>는 본 작품보다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를 비롯한 "SSU(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를 구성하는 하나의 퍼즐로 더 관심이 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하나의 영화로 끝나지 않을게 관객들이나 제작진 모두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모비우스>를 어디에 초점을 두고서 봐야 우리는 좀 더 재밌고 만족스럽게 극장을 나갈 수 있을까요?그래서, 니 이름이 뭐니?
영화 <모비우스>는 104분의 분량의 상당 부분을 자기소개에 할애합니다.
"박쥐"라는 점에서 경쟁사의 "배트맨"이 연상되나 <모비우스>는 처음이라 관객들과는 처음이라서 이런 부분이 꼭꼭 필요한데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다름 영화들이 해왔기에 관객들에게는 호기심보다는 피로함부터 앞서니 나름의 차별화는 보여줘야만 합니다.
그렇게, 선보이는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보여주는 폭주한 상태에서의 액션은 나름 시선을 이끄는데 충분했습니다.2. 여러 갈래로 퍼지는 이야기들
하지만, 이후 각 캐릭터들의 동기에 있어 살짝의 아쉬움이 엿보입니다.
먼저, "모비우스"는 능력을 얻고 치료가 되지만 이후 일정 시간마다 피를 마셔야 하는 부작용에 부득이한 피해에 고민을 합니다.
이에 관객들도 납득할 수 있는 데에는 자신과 비슷한 질환을 가진 아이들을 치료하는 이야기를 사전에 제공했기에 그런 그의 고민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의 친구 "마일로"에는 "모비우스"와는 다르게 생략된 설명이 많아 보였습니다.그래도, 악당이고 친구인데...
극중. "마일로" 역시,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인물이나 "모비우스"가 만든 혈청을 맞으며 그와 똑같은 능력을 얻게 되는 캐릭터로 대척점에 서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일로"는 '왜 이를 뽐내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요. (앞에서 '자신과 비슷한 질환을 가진 아이들을 치료하는 이야기'처럼 말이죠)
그러나, 영화를 보면 그의 행동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설명만을 합니다. - 아버지와 같은 "니콜스 박사"에게는 "차별적 사랑"에 이야기하지만, 전혀 모르는 바입니다.
여렸을 적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편지를 다른 아이들에게 빼앗겨 얻어맞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비우스"입니다. (이를 "마일로"로만 바꿨어도...)
그러면서, "모비우스"와의 힘을 합치자는 이야기와 그의 연인 "밴 크로포드 박사"와의 사랑까지 중구난방으로 뻗치는 느낌이죠.3. 결국, 쿠키 2개에 마음이 녹는다.
이렇게, "마일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에는 이를 맡은 "맷 스미스"의 연기가 주인공 "모비우스"를 연기한 "자레드 레토"도 만들지 못한 스팟을 만들거든요.
바로, <유주얼 서스펙트, 1995>의 "카이저 소제"가 점점 똑바로 걸어나가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거든요.
물론, 앞서 말한 해당 능력에 따른 부작용까지의 설명이 된 상태라서 다른 의미로의 섬뜩함마저 불러오니 더더욱 설명에 아쉬움이 생깁니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 <모비우스>는 아쉬움 투성의 영화로 남겨지겠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습니다.이래서, 화날 때 쿠키가 좋다는 거야!
이번 영화를 연출한 '다니엘 에스피노사' 감독의 이름만을 들어봐선 모르겠지만, 그가 연출해온 <세이프 하우스, 2012>와 <라이프, 2017>를 봤다면 그의 스타일이 뭔지는 잘 아실 겁니다.
특출난 작품보다는 공식대로 무난하게 만드는 연출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비우스>는 특별히, 모나지도 않는 작품으로 충분히 바라볼만한 작품입니다.
다만, 전작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인 만큼 그 모나지도 않는 평범함이 살짝 아쉽게 다가오지만요.※ 쿠키 영상은 2개로 "엔딩 크레딧"이 나오기 전에 다 나옵니다.
※ 앞서 말한 "SSU(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의 "스파이더맨"이 "꼭, 톰 홀랜드만은 아니겠다"는 예측이 됩니다. (아니면, 말고?)
-
- 아직도 위대한 개츠비
워낙 유명한 영화이기에 호화롭게 잘 사는 장면만 나와도 바로 '그 장면'이 나오는 영화. 영화를 보기 전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아이리시 맨>처럼 메인 인물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영화일 줄 알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초반은 개츠비의 외적인 매력에 빠지고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점점 그의 내적인 매력에 빠진다.
#사진 밑으로 스포가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스틸컷
당시 미국
누구나 자신의 꿈이 있지 않은가. 돈과 명예, 남들 부럽지 않은 재력과 행복한 나날들 같은 꿈 말이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당시 미국에서 드리우는 '아메리카 드림'으로 엄청난 호황기를 누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희망찬 꿈과 포부를 안길 수 있는 시대에 개츠비 역시 그 꿈을 달성한다. 화려한 대저택과 신나는 파티, 언제나 밝은 그의 저택 조명은 개츠비의 능력을 과시하게 만든다. 개츠비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나오는 부자들의 파티 장면은 영화 중간마다 나오는 노동자들과 상당히 대비되어 나온다. 즉, 영화는 당시 1920년 호황기를 맞는 미국 사회에 따라 빚어지는 빈부격차와 계층 분화의 대립을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당시 갑작스러운 호황기에 따라 나날이 발전하는 물질의 변화에 맞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문화지체현상(culture lag)이 벌어진다. 영화는 이 현상을 역시 포커스를 맞혔는데 부패한 권력과 사치 넘치는 모습들, 거짓으로 꾸민 허상이 확장되가는 미국인의 모습을 드러내며 당시 미국 상황을 느낄 수 있다.
위대함
개츠비라는 사람이 왜 위대할까. 필자는 원작을 읽지 않았지만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위대한'을 적은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의 시점 그리고 소설에서 말하는 의미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개츠비가 가지고 있는 진심 즉, 데이지(캐리 멀리건)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닉은 첫 장면부터 각종 정신병을 앓고 있어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예전 만났던 개츠비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개츠비가 엄청난 돈을 벌고 싶었던 이유는 5년 전 헤어졌던 데이지를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포기하거나 오히려 그 꿈이 현실의 제안으로 메워버린다. 닉도 이 같은 과정으로 결국 정신병을 앓는 지경까지 이르러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츠비는 다르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돈을 인식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이용해 데이지의 사랑을 얻고 싶어 한다. 현재도 이어지는 물질적 욕망과 욕망으로 만들어진 허상 된 세상 속에서 물질적 욕망을 이기는 진정한 사랑. 이 얼마나 위대한가. 닉이 왜 마지막에 '위대한'을 적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
-
-
- 영화 <소피의 세계> 메인 예고편
우연히 여행 블로그 속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 수영.
그곳에는 2년 전 만난 여행자 소피가 한국에서 머문 나흘의 기록이 있다.
수영은 소피의 일기를 통해 최악의 시기를 버티던 남편 종구와의 일상을 새롭게 바라본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감정과 사실이 이해될, 것도 같다.
소피가 써 내려간 세계 속에서
다투고 울고 웃었던 우리는 어떤 마음을 남겼을까?
2022년 봄에서 2020년 가을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상으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
- 영화 <블랙 위도우> 숨겨진 작전 영상
‘어벤져스’ 군단에서 강력한 전투 능력과 명민한 전략을 함께 겸비한 히어로 ‘블랙 위도우’ 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