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9-12 04:31:56
9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9월 9일~ 9월 11일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 <공조2: 인터내셔날> (NEW)

▶ <공조 2>가 개봉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개봉 주에 추석 연휴가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관객 수를 모았는데요.
개봉 주에 벌써 200만 관객을 돌파하였습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208만 9,14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60만 1,67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공조 2>가 개봉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개봉 주에 추석 연휴가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관객 수를 모았는데요.
개봉 주에 벌써 200만 관객을 돌파하였습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208만 9,14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60만 1,67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줄거리 남한으로 숨어든 글로벌 범죄 조직을 잡기 위해
새로운 공조 수사에 투입된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
수사 중의 실수로 사이버수사대로 전출됐던 남한 형사 ‘강진태’(유해진)는
광수대 복귀를 위해 모두가 기피하는 ‘철령’의 파트너를 자청한다.
이렇게 다시 공조하게 된 ‘철령’과 ‘진태’!
‘철령’과 재회한 ‘민영’(임윤아)의 마음도 불타오르는 가운데,
‘철령’과 ‘진태’는 여전히 서로의 속내를 의심하면서도 나름 그럴싸한 공조 수사를 펼친다.
드디어 범죄 조직 리더인 ‘장명준’(진선규)의 은신처를 찾아내려는 찰나,
미국에서 날아온 FBI 소속 ‘잭’(다니엘 헤니)이 그들 앞에 나타나는데…!
새로운 공조 수사에 투입된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
수사 중의 실수로 사이버수사대로 전출됐던 남한 형사 ‘강진태’(유해진)는
광수대 복귀를 위해 모두가 기피하는 ‘철령’의 파트너를 자청한다.
이렇게 다시 공조하게 된 ‘철령’과 ‘진태’!
‘철령’과 재회한 ‘민영’(임윤아)의 마음도 불타오르는 가운데,
‘철령’과 ‘진태’는 여전히 서로의 속내를 의심하면서도 나름 그럴싸한 공조 수사를 펼친다.
드디어 범죄 조직 리더인 ‘장명준’(진선규)의 은신처를 찾아내려는 찰나,
미국에서 날아온 FBI 소속 ‘잭’(다니엘 헤니)이 그들 앞에 나타나는데…!
2. <육사오> (▼1)
▶ 지난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던 <육사오>가 공조의 개봉으로 2위로 떨어졌습니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코미디 영화라 추석 연휴에 많은 관객이 찾은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30만 3,180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56만 6,66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지난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던 <육사오>가 공조의 개봉으로 2위로 떨어졌습니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코미디 영화라 추석 연휴에 많은 관객이 찾은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30만 3,180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56만 6,66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3. <헌트> (▼1)
▶ 개봉 이후 계속 1,2위를 차지했던 <헌트>가 9월 둘째 주에 3위로 하락하였습니다.
관객 수가 지난 주와 비교했을 때 약 2.5배 하락하였지만,
이번 주에 개봉하는 화제 작품이 없기에 비슷한 관객 수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8만 5,806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26만 3,791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개봉 이후 계속 1,2위를 차지했던 <헌트>가 9월 둘째 주에 3위로 하락하였습니다.
관객 수가 지난 주와 비교했을 때 약 2.5배 하락하였지만,
이번 주에 개봉하는 화제 작품이 없기에 비슷한 관객 수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8만 5,806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26만 3,791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117회 예측 이벤트는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스코어 예측 이벤트입니다.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공조2: 인터내셔날>의 스코어 예측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117회 예측 이벤트는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스코어 예측 이벤트입니다.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공조2: 인터내셔날>의 스코어 예측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공조2: 인터내셔날>의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제공하는 실제 관람객의 성별/나이별 관람 추이를 보겠습니다.
먼저 <공조2: 인터내셔날>의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제공하는 실제 관람객의 성별/나이별 관람 추이를 보겠습니다.
남성 46%, 여성 54%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령대 별로는 30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고 그다음으로 20대, 40대, 50대, 10대 순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습니다.

▶한 주 동안 씨네픽 이벤트의 참가자분들 중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관객 스코어에 가장 근접한 예측치를 보인 건
10대 후반 남성과(1,257,460명)과 30대 후반 여성(1,057,054명)이었습니다.
또한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관객 수 스코어 예측의 정답자 비율은 (오차범위 +-10,000) 전체 참가자의 0%에 해당합니다.
추석 연휴가 변수가 되어 예측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스코어 예측 이벤트에 참여한 20/30대 비율은 아래 표와 같습니다.

남성 46%, 여성 54%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령대 별로는 30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고 그다음으로 20대, 40대, 50대, 10대 순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습니다.
▶한 주 동안 씨네픽 이벤트의 참가자분들 중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관객 스코어에 가장 근접한 예측치를 보인 건
10대 후반 남성과(1,257,460명)과 30대 후반 여성(1,057,054명)이었습니다.
또한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관객 수 스코어 예측의 정답자 비율은 (오차범위 +-10,000) 전체 참가자의 0%에 해당합니다.
추석 연휴가 변수가 되어 예측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공조2: 인터내셔날> 주말 스코어 예측 이벤트에 참여한 20/30대 비율은 아래 표와 같습니다.
4. <극장판 엄마 까투리: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 (NEW)

▶ 추석 연휴에 영향으로 아이들을 겨냥한 애니메이션 영화 <극장판 엄마 까투리: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이
4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박스오피스에서 4위를 차지했던 <탑건: 매버릭>과 비슷한 관객 수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9월 11일) 관객 수 5만 4,84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6만 1,233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추석 연휴에 영향으로 아이들을 겨냥한 애니메이션 영화 <극장판 엄마 까투리: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이
4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박스오피스에서 4위를 차지했던 <탑건: 매버릭>과 비슷한 관객 수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9월 11일) 관객 수 5만 4,84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6만 1,233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한산: 용의 출현> (▼2)

▶ 한 달 넘게 박스오피스 TOP5를 유지한 <한산: 용의 출현>이 9월 둘째 주에 5위를 차지하였습니다.
<한산: 용의 출현> 역시 위에 말했던 것처럼 화제 작품이 없기에 5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4만 3,62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722만 5,885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주말 동안(9월 9일- 9월 11일) <Barbarian>의 매출액은 10,000,000 (한화 약 138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 역시 동일합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TOP 5> (2022년 9월 9일 ~ 2022년 9월 11일)
1. <바바리안> 1000만 달러 (누적 1000만 달러)2. <브라흐마스트라 파트 원: 시바> 440만 달러 (누적 440만 달러)3. <불릿 트레인> 325만 달러 (누적 9254만 달러)4. <탑건: 매버릭> 317만 달러 (누적 7,056만 달러)5. <DC 리그 오브 슈퍼 펫> 283만 달러 (누적 8,542만 달러)...씨네픽의 9월 둘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 한 달 넘게 박스오피스 TOP5를 유지한 <한산: 용의 출현>이 9월 둘째 주에 5위를 차지하였습니다.
<한산: 용의 출현> 역시 위에 말했던 것처럼 화제 작품이 없기에 5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말 동안 (9월 9일- 9월 11일) 관객 수 4만 3,62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722만 5,885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주말 동안(9월 9일- 9월 11일) <Barbarian>의 매출액은 10,000,000 (한화 약 138억)의
씨네랩 에디터 Hizy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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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흐르지만, 기억은 여전히 우리의 내면을 뒤흔든다
영화 <하얼빈>이 개봉된 후 극장가와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어떤 관객은 이 작품을 ‘엄숙하게 다시 써 내려간 독립운동의 한 페이지’라고 평하고, 또 누군가는 ‘감정적으로 울컥하게 만들면서도 담담하게 흘러가는 독특한 분위기’에 주목한다. 개봉을 기다려온 사람들 중에는 앞서 안중근을 다룬 여러 작품을 기억하는 이도 있고, 이제 막 안중근이라는 인물과 그의 역사적 역할을 자세히 접하는 이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언제 이런 순간이 다시 와도 우리는 과연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곱씹으며 극장을 나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얼빈>은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무겁고도 절실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영화 속에서 안중근(현빈 분)과 독립 투사들은 러시아와 만주가 뒤섞인 복잡다단한 국경 지대, 그중에서도 하얼빈을 활동 무대로 삼는다. 시대는 1909년.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질 만큼 이미 조선 땅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과 동지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고 필사의 싸움을 이어간다. 그들은 하얼빈의 얼어붙은 기차역, 어둡고 취약한 뒷골목을 거점 삼아, 비밀리에 정보를 교환하고 작전을 짜낸다. 눈 내리는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고국으로부터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거대한 제국의 압박은 점점 더 거칠게 이들을 죄어 온다.
그러나 영화는 안중근과 동지들의 처절한 현실을 단순히 영웅적 의지로만 채우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당위는 분명하지만, 눈앞의 죽음을 피할 방법이 마땅치 않고, 주변을 살펴보면 배신과 협잡이 난무하며,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노선을 주장하는 갈등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하얼빈>은 ‘독립 투쟁’의 표면 뒤에 묻혀 있는 수많은 난관과 엇갈린 이해관계, 인간적인 번민을 담담하게 그려낸다.독립 투사들의 인간적 번민
이렇듯 실제 역사적 사건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향해 치닫는 과정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안에서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거기서 관객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라는 거대 담론과, ‘한 사람의 인간 안중근’이 겪는 작고 숨 막히는 고민 사이에서 끊임없이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이런 부분에서 <하얼빈>이 이전에 안중근을 다뤘던 영화 <영웅>과 <도마 안중근>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영화 <영웅>은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틱한 감정선에 강점을 두어,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결연한 의지와 함께 감동을 자아내는 노래들로 극의 정서를 극대화했다. 반면 <도마 안중근>은 안중근의 재판 과정과 그가 가톨릭 신자로서 품고 있던 신념, 그리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부각해, 그가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신앙적·윤리적 갈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완성도를 떠나 이런 시도들은 '안중근' 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려는 시도들이었다.
이에 비해 <하얼빈>의 안중근은 묵묵하고, 동시에 인간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안중근이 태생부터 ‘결단력으로 가득한 의인’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처절한 현실 속에서 “과연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되뇌며 심리적 갈등을 겪는 존재로 나타난다. 스스로가 택한 길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길에 따라붙는 죽음의 그림자와 가족, 동지들의 희생, 그리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옥죄인다. <하얼빈>의 안중근은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감정을 이끌어낸다. 영웅서사로만 보면 희생과 결단이 낭만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내가 정말 이 모든 걸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그렇다면 안중근의 심리적 고민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화가 비추는 장면들을 보면, 먼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길’이라는 명분 안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독립운동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슬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이토록 거대한 상대를 저격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 혹은 일이 성공한 뒤에 남아 있는 것은 과연 자유일까,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의 시대일까 하는 걱정 또한 안중근의 머릿속에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내부의 신념,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겹치며, 그는 스스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영화는 이러한 심리를 매우 건조하고 진지한 톤으로 그려내며, 관객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안중근의 인간적 고민들
안중근이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현실을 매우 또렷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 순간 실패와 죽음을 예견하는 일이다. 배후 세력이 든든히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거지를 안전하게 마련할 방법도 없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조국은 더욱 식민지화되어 간다. 반역자나 스파이의 위협도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너무나도 불리하고 암울한 환경에서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 그를 고뇌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가 만일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총알을 꽂는다면, 적어도 전 세계에 조선을 도살장에서 끌려가는 짐승 취급하지 말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토는 일본 제국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침략 정책의 주체였으므로, 그를 제거한다는 행동이 동아시아의 정세에 어떤 충격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안중근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즉, ‘나라가 망할지언정, 우리 민족의 끈질긴 투쟁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에게는 존재했다. 이는 단순한 애국심 이상의, ‘나와 동시대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왜 다시 안중근을 떠올려야 할까.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안중근의 행위는 단순히 ‘역사적 의거’가 아니라, 억압받는 개인과 국가가 저항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과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는 여전히 치열한 대립 구도를 안고 있다. 서로 다른 이념과 이해관계 속에서, 때로는 법과 원칙이 무너지고,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쥐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기도 한다.
계엄령이나 내란과 같은 단어가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할 정도로 정세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100여 년 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안중근의 ‘간절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총성은 단순한 살상 행위가 아닌, 더 넓고 깊은 맥락에서 ‘정의를 외치는 나팔소리’였고, 그 울림은 우리 사회가 지금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독립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장은 잔혹한 현실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는 암시를 영화는 마지막 장면까지 내비친다. 역사적으로도 알고 있듯, 안중근 이후로도 독립운동은 수많은 형태로 전개되었다. 만주 벌판을 누비는 무장투쟁 세력부터 해외 각지의 외교 활동까지, 일제강점기 내내 ‘해방’을 꿈꾸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로 그 끈질긴 의지를 오늘의 관객에게도 전해주면서, <하얼빈>은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 ‘힘들다고 해서, 혹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멈춰 서선 안 된다.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이러한 격려는 지금을 사는 이들에게도 분명히 힘이 된다.
영화에서 보이는 현실의 정치상황
물론 <하얼빈>은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느리고, 말 그대로 ‘건조한 듯 진지하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일부 관객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투 장면이나 의거 장면에서 극적인 음악과 연출을 더해 감정선을 폭발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우민호 감독은 이를 절제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 덕분에 영화 전체가 허황된 영웅주의에 기댄다기보다는, ‘정말 그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고민했겠구나’라는 현실감을 심어준다. 관객에게는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그 인내 끝에 오는 묵직한 감동이야말로 <하얼빈>이 가진 특별한 강점이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큰 몫을 한다. 안중근을 맡은 현빈의 연기는 서사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말없이 굳센’ 동시에 ‘내면의 흔들림이 분명한’ 상태로 끌고 간다. 대사를 통해 감정을 일거에 폭발시키기보다는, 상황과 상황 사이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다짐을 되뇌는 듯한 미묘한 눈빛 변화로 캐릭터의 심리를 전달한다. 동지로 나오는 조우진, 유지태, 전광렬 등 중견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거창한 애국심을 노래하기보다, 항시 떠나는 자들의 슬픔을 눈빛으로만 보여주고, 은밀한 접선을 기다리는 초조함을 낮은 목소리로만 드러낸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면, 그저 웅장한 역사극 한 편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세기를 뛰어넘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우민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 역시 이런 연기에 잘 어우러진다. 그는 이미 <내부자들>, <마약왕>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드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번 <하얼빈>에서는 더욱 절제되고 묵묵하게, 시대의 풍경을 탁하게 그려내면서도 인물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때로는 극적인 클로즈업 대신 인물들을 배경에 작게 배치한 채, 눈 쌓인 하얼빈 거리나 기차역 풍경과 함께 묘사함으로써 시대적 고독과 혹독함을 배가시킨다. 덕분에 영화의 미장센이 매우 사실적이며, 동시에 서늘한 느낌을 전달한다.
결국, 지금 계엄과 내란의 기운이 감돈다는 뉴스가 흘러나올 정도로 정치적 혼돈이 이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하얼빈>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고,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온전한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투쟁했다. 그 정신을 잊은 채, 그저 분열과 힘겨루기에 빠져 있다면, 과연 우리는 100년 전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로부터 무엇을 배운 것인가. 영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안중근의 망설임, 결단, 그리고 최후의 총성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끈질기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혹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이 작품이 단지 ‘역사 재현’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유효한 독립군의 정신, 잃지 말아야 할 자유와 인간의 존엄,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용기가 진정한 <하얼빈>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는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정치적 혼돈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이 시점에 더없이 소중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몇몇 관객에게는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마음 한구석에 새겨야 할 작품이다. 어쩌면 그것이 <하얼빈>이 우리에게 주는 ‘차분하지만 강력한 울림’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만 치부하기에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 너무나도 절실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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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한 두 번의 큰 불행을 맞이한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병에 걸리거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 경우가 대표적인 불행의 한 종류 일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남은 가족들은 그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견디고 또 견딘다. 그 과정은 꽤 길게 이어진다. 한 순간에 갑자기 없어진 사람은 평생 지워낼 수는 없다. 단지 일상을 살면서, 다른 것에 집중하면서 잠시 그 생각과 감정을 떨쳐내려 노력할 뿐이다. 남은 모든 가족이 마찬가지다. 황망스럽게 떠난 사람의 자리는 채울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떠난 사람이 원하던 삶의 모습을 따라가기도 한다.
그 사람의 빈자리는 크지만 그것을 채우려 애쓰며 보내는 시간은 삶의 의지를 더 다지게 만들기도 한다. 때론 절망적인 감정들이 괴롭히지만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어느덧 그 사람이 있었던 그 자리에 자신이 서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큰 슬픔과 불행을 맞았지만 그것이 조금은 더 나은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 어려움을 어떤 식으로 넘기고 극복하는지가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부주장 송태섭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과거에 크게 유행했던 코믹스 [슬램덩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영화는 코믹스의 주인공들이 소속된 북산고와 산왕고가 토너먼트에서 만나 대결을 벌이는 경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경기 장면 중간중간에 플래쉬백으로 북산의 부주장인 송태섭의 과거를 끼워 넣었다. 기존 코믹스에서 주인공인 강백호와 서태웅의 서사는 충분히 담겨있었고, 나머지 멤버들인 채치수, 정대만의 뒷 이야기도 꽤 비중 있게 다뤄졌다. 하지만 송태섭의 서사는 많이 다뤄지지 않았었다.
이번 영화에서 보이는 송태섭의 과거는 꽤 슬픈 사연이 있다. 송태섭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었고, 뒤이어 태섭에게 농구하는 법을 알려주던 태선의 형 준섭도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태섭만 남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태섭이 황망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태섭은 준수한 농구 선수였던 형 준섭의 뒤를 이어 농구 선수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늘 형의 그늘에 가려 그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영화 중간중간 삽입된 플래쉬백을 통해 태섭의 성장 이야기가 꽤 큰 비중으로 포함되어 있다.
송태섭은 가까운 사람을 두 사람이나 잃었다. 가족이 의지하고 있었던 아버지와 형이 차례로 사라지면서 태섭은 자신이 가족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지만 제대로 그 일을 해내지는 못한다. 형을 뛰어넘는 농구 실력을 가지지 못한 그는 계속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때 들어가게 된 게 바로 북산고의 농구팀이다. 이 팀의 멤버들을 만나 그는 완전히 자신의 꿈을 찾아간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송태섭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코믹스에서 보았던 강백호와 서태웅의 모습도 그대로 담겨있지만 산왕과의 경기에서 가장 집중하는 건 송태섭이 경기 중에 만나는 어려움을 어떤 식으로 이겨내는지가 중심이 된다. 더 나아가 송태섭이 북산에 어떤 존재인지 중점적으로 화면에 담는다.
박진감 있게 펼쳐지는 북산과 산왕의 농구 경기
이야기가 송태섭에 집중하고 있지만 다른 멤버들의 모습도 담겨있다. 불꽃 남자 정대만, 고릴라 채치수, 에이스 서태웅, 천재 강백호도 경기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이 그대로 들어가 있어서 이들을 보던 과거의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나머지 멤버들의 과거 서사를 자세히 제시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코믹스를 보지 않았던 관객이라면 이들의 행동이나 능력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기존 팬들에게는 굉장히 좋은 만족도를 보이겠지만 [슬램덩크]를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원작이 가지고 있는 유머의 상당 부분을 덜어냈다. 가족을 잃은 송태섭의 성장기에 좀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가벼운 분위기보다는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로 전개되고 있다. 기존 주인공인 강백호가 가지는 유머러스하고 엉뚱한 모습을 완전히 덜어내지는 못하지만 강력한 우승후보인 산왕과 펼치는 북산의 대결 자체는 무척 긴장감 있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경기 안에서 송태섭이 겪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농구 영화답게 경기 모습은 굉장히 박진감이 넘친다. 특히나 농구할 때 들리는 소리들이 인상적이다. 공 튀기는 소리, 신발이 미끄러지는 소리, 골이 들어갔을 때 공이 그물을 통과하는 소리 그리고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소리들이 실제 관객이 경기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플래쉬백에서 보이는 길거리 농구 장면도 마찬가지다. 드리블을 하며 상대방을 제치고 골을 넣는 장면은 마치 현장에 있는 듯 역동적으로 담겨있다.
과거 시리즈의 팬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영화다. 그 당시 TV 애니메이션과 코믹스로 접했던 팬들은 그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과 경기모습이 좋은 감정을 떠올리게 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연출한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은 원작 코믹스를 직접 그리고 만들어냈다. 과거에 다소 소홀히 다뤄졌던 송태섭이라는 인물을 주심으로 북산의 마지막 경기를 보여주면서 재미있는 농구 애니메이션을 다시 만들어냈다. 과거 플래쉬백이 조금 많이 들어가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다는 평가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과거 코믹스의 분위기와 감정을 무척 훌륭하게 영상으로 옮긴 영화다.
이 영화는 송태섭이 북산이라는 팀에서 자신의 형이 가고자 했던 길을 똑같이 가게 되는 이야기다. 더 나아가 형의 그늘을 지우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이 무척 흥미롭게 담겨있다. 과거 원작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송태섭의 성장이야기와 경기를 보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또한 원작을 잘 모르더라도 농구라는 스포츠의 박진감을 느끼고 싶은 관객들이라면 충분히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북산이라는 팀원들의 꺾이지 않는 마음을 영상으로 만난다면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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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가족 (Shoplifters, 2018)
- 어느 가족 (万引き家族, Shoplifters, 2018)
개봉일 : 2018.07.26. (한국 기준)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마츠오카 마유, 키키 기린, 죠 카이리, 사사키 미유
‘서로를 선택한 진짜 가족의 이야기’
가족이란 무엇일까? 함께 밥을 먹는 사이? 아니면 한 집안에 사는 사이? 깊은 신뢰감을 가진 사이 또는 혈육을 말하는 걸까?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며, 가족과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풀어내기로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은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를 통해 또 다른 가족의 의미를 전한다.
제3자가 바라보기엔 불완전하고, ‘가족’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가족. 하지만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너무도 단란한 가족. 조금은 가난하고, 또 난잡한 집안이지만 가족들 사이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물건을 훔치고, 아빠는 일용직으로 근무하며, 엄마는 마트에서 근무한다. 노쇠한 할머니는 느릿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들의 손을 어루만진다. 이 가족은 완전하진 않지만 행복하다.
행복해 보이는 이 가족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가볍지도 않다. 그 비밀은 새로운 가족인 ‘유리’의 등장과 함께 조금씩 가족들에게 다가온다.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추운 겨울밤, 어리고 가냘픈 아이 ‘유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리고 오사무와 노부요, 아키, 하츠에, 쇼타는 작은 아이를 복작이는 집안에 앉히고 밥을 먹인다. 아직 겨울이 오진 않았지만, 찬바람이 부는 날 밤 따스한 국물 요리를 먹는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 만큼, 이 가족의 분위기는 따스하다.
어느 가족 시놉시스
할머니의 연금과 물건을 훔쳐 생활하며 가난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어느 가족. 우연히 길 위에서 떨고 있는 한 소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가족처럼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각자 품고 있던 비밀과 간절한 바람이 드러나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마트에서 손발을 맞춰 음식을 훔치는 아이와 아빠로 보이는 남자. 두 사람은 아이의 가방에 먹을 것을 담고, 저녁으로 먹을 고로케를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 따스한 집이 그리울 만큼 차가운 늦겨울 밤, 오사무는 며칠째 집 앞을 헤매고 있는 작은 소녀를 집안으로 들인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한 가족의 저녁상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
할머니 하츠에는 작은 아이를 살펴보던 중,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한 것을 발견한다. 아이의 이름은 ‘유리’. 오사무는 유리를 데려다주기 위해 유리를 업고 집을 나선다. 그렇게 도착한 집앞,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부부 싸움 소리. 오사무와 노부요는 유리를 업은 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오사무는 건설 일용직, 노부요는 마트 직원, 아키는 접대를 하고, 하츠에는 전 남편의 위자료와 연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집은 하츠에의 집인듯하다. 가난하고 불안정한 집안의 상태. 학교에 가야 할 나이인 쇼타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마루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애들이 학교에 가는 거야.”라며 발보다 큰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가는 쇼타의 모습이 의연해 보이면서도 짠하다. 오사무는 다 지어지지 않은 아파트의 문턱을 지나며 “나 왔어-”라고 말해본다. 평생 가져볼 일 없을듯한 번듯한 아파트. 이 가족은 가난하다. 그리고 사회의 끝에 간신히 걸쳐진 채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뜨거운 여름 날씨와 땀에 흠뻑 젖은 가족들의 티가 그들의 숨 가쁜 하루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듯하다.
버거운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건 ‘가족’이라는 존재뿐이다. 오사무, 노부요, 아키, 하츠에, 쇼타, 그리고 유리. 6명으로 늘어난 만큼, 이 가족은 조금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츠에와 쇼타는 밀개 떡을 좋아한다는 유리를 위해 음식을 양보하고, 오사무는 유리를 쇼타의 ‘여동생’이라고 말한다. 어딘가 어색하고 군데군데 구멍이 보이는듯하지만, 이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가족은 전 부모에게서 고통받았을 ‘쥬리’를 ‘린’이라는 단발머리의 소녀로 만들어준다. 쥬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TV에 나온 날, 노부요는 유리의 머리를 잘라준다. 아키는 “언니도 다른 이름이 있어”라며 유리와 자신 사이의 유대감을 표시한다. 유리는 “린이 더 좋아.”라고 답하며 머리를 자른 자신의 모습과, 현재 가족들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한다.
“부모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
대부분의 ‘가족’들은 서로의 선택이 아닌, 혈육으로 이루어진다. “가족 같은 사이”라고 표하는 가까운 사이 말고,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진짜 가족’의 경우 말이다. 하지만 이 가족은 서로를 ‘선택’했고, 새로운 가족이 된다. 노부요는 유리가 처음 만나던 날 입고 있었던 옷을 불태우며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노부요와 유리가 함께 목욕을 하던 날, 노부요는 다리미에 데인 상처가 있는 유리의 팔을 보게 된다. 유리는 내게도 같은 상처가 있다며 노부요를 바라보고, 노부요의 상처를 말없이 쓰다듬는다. 노부요는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괜찮아, (상처는) 다 나았어.”라고 말하지만, 유리는 아직 나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아직 다 낫지 않은 건’ 노부요의 상처였을까, 아니면 유리의 마음이었을까?
노부요는 유리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며 ‘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가족이 되고, 행복하길 바란다. 노부요가 처음 본 유리는 그저 집 앞에 앉아있던 어린 여자아이였지만, 이젠 딸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가 된다. 노부요는 유리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습한 여름날, 노부요와 오사무는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직장을 잃었다는 노부요에게 오사무는 옛날처럼 술집을 하거나, 다른 일도 있다며 일부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오사무의 이야기를 듣던 노부요는 “나 지쳐버렸어.”라는 한마디로 분위기를 무겁게 누른다. 그 순간 소나기가 내린다. 그 후, 노부요와 오사무는 평소와 다른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 이 특별하고 행복하고, 또 평화로운 순간은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행복했던 마지막 바다 나들이. 하츠에는 손을 맞잡은 채 파도를 피하고 있는 다섯 명을 바라본다. 행복한 엄마 아빠와 3남매로 보이는 모습. 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마웠다고 속삭인 후, 조용한 죽음을 맞이한다. 하츠에는 오래된 집과 계좌 속 11만 6천엔, 보석함에 든 3만엔. 그리고 ‘어느 가족’의 존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하츠에가 떠난 후, 이 가족은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한다.
쇼타가 경찰에 붙잡히고, 남은 가족들의 도주는 무산된다. 이 가족의 생활은 엽기적인 유괴와 살인 사건으로 세간에 소개된다. 전 남편을 죽이고 묻은 여자와 남자, 남편을 빼앗은 가족에게서 돈을 받은 할머니, 그리고 그 할머니와 살고 있던 남편을 빼앗은 가족의 딸. 유괴된 듯 보이는 어린아이 둘. 할머니는 집안에 묻힌 채 발견된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들을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형사들은 하츠에의 시신을 유기한 것이라며 노부요를 몰아붙인다. 노부요는 형사에게 이렇게 답한다. 내가 유기한 것이 아닌, 누군가 버린 걸 주웠다고 말이다. 이건 사실이다. 오사무는 차 안에 버려진 쇼타를 ‘아들’처럼 키웠고, 집 앞을 헤매던 유리를 ‘딸’로 맞이한다. 그리고 전 남편과 그의 가족으로부터 버려져 혼자 살고 있는 하츠에와 아키의 가족이 된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인물들. 그들은 함께 모여 서로를 보듬고, 가짜 가족이 아닌 진짜 가족이 된다.
“두 아이는 당신을 뭐라고 불렀어요?”
오사무는 쇼타에게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보라고 말하고, 유리를 ‘여동생’이라고 불러보라고 한다. 하지만 쇼타는 ‘아빠’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노부요는 고민하고 있는 쇼타에게 그 말이 중요한 건 아니라며 위로한다. 하지만 노부요도 ‘엄마’라는 말을 듣길 바랐을 것이다. 쇼타와 함께 시장을 걸어가며 “어머니, 저녁 반찬으로 고로케 어떠세요?”라고 묻는 상인의 말에 노부요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다. 쇼타는 웃고 있는 노부요를 바라보며 “어머니라고 불리면 좋아요?”라고 묻는다. 불임으로 인해 아이를 낳지 못한 노부요에게 쇼타와 유리는 가슴으로 낳고, 사랑으로 키워낸 아이들이었다.
노부요는 남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죄를 뒤집어쓴다. 모든 일은 혼자 꾸민것이며, 다른 이들은 몰랐다고 진술한 그녀는 5년형을 받게 된다. 그 후, 옷을 흠뻑 젖게 할 만큼 습한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온다. 노부요는 더 이상 이 가족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린 쇼타에게 역부족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눈이 잔뜩 쌓인 날 밤, 등을 기대고 누운 오사무와 쇼타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아빠에서 아저씨로 돌아갈게.”
오사무는 더 이상 쇼타에게 아빠라는 말을 바랄 수 없음을 느낀다. 쇼타는 오사무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버스를 타고 떠난다. 오사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는 버스를 따라 달린다. 버스는 멈추지 않았고,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쇼타’는 끝까지 오사무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다. 오사무와 쇼타는 성장기인 쇼타의 고민을 공유하고, 위로하고, 또 함께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느 ‘부자’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지만 ‘사회적 통념’상 오사무는 쇼타의 아빠가 될 수 없었다. 오사무가 아빠이기를 포기한 마지막 순간, 쇼타는 오사무가 들을 수 없는 거리에서나마 ‘아빠’라는 단어를 소리 없이 읊어본 후, 입속으로 삼킨다.
그리고 뒤이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간 유리의 모습이 나온다. 유리는 쇼타에게 배운 대로 삼 형제, 육개장.. 등을 함께 말하며 숫자를 세고 있다. 숫자 셈이 반복되고, 유리는 누군가를 다시 기다리듯, 계속해서 집 앞을 서성이고 있다. 유리는 오사무와 쇼타가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늦겨울에 서로의 손을 잡으며 만들어진 진짜 가족은 끈적한 공기와 뜨거운 햇살이 비치는 여름을 보내고, 다시 차가운 겨울을 맞이한다. 소나기처럼 짧았던 행복한 가족의 시간이 지나가고, 사회는 이들에게서 ‘가족’이라는 타이틀을 앗아간다. ‘아빠’ ‘엄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보기도 전에 끝나버린 ‘어느 가족’의 이야기였다.
<어느 가족>을 보면서 아빠, 엄마, 가족이라는 존재는 정확히 어떠한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로 가득한 6명이 함께 모여 만든 이 가족 또한 ‘진짜 가족’이다. 전 남편에게서 도망쳐온 노부요와 노부요를 사랑하는 오사무. 자해를 일삼던 소녀 아키, 전남편과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노인 하츠에, 도박장 앞에 버려진 아이 쇼타, 학대와 방치를 일삼던 부모에게서 버려진 유리. 사람들은 이 가족을 보며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뉴스를 보는 이들에게 하츠에는 희생된 할머니, 노부요와 오사무는 유괴범, 아키와 쇼타, 유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붙잡힌 아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해서 행복했다.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손발의 따스함으로 당신의 하루가 어땠을지 짐작해보고, 미워하기도 하고 서로를 의지하기도 하는 이들은 진짜 가족이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Kyung film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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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도적인 긴장감의 서부극!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작은 긴장감이 늘 자리한다. 혼자 있는 시간만 있다면 그런 긴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같이 시간을 보낸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그리고 직장 동료와 보내는 시간 등 다양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삶이라는 그림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런 상호작용의 시간 속에는 크고 작은 긴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 긴장이 작으면 보통 편하게 받아들이게 되지만 불편함이 커지면 큰 긴장이 따라오고 평상심을 잃게 만든다. 우리가 평소에 눈치 채지 못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긴장은 시종일관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삶에 영향을 준다.
다른 어떤 관계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런 긴장감이 일상에 배어들어있다. 부모와 만들어지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아이가 자라나는데 심리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가족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이벤트들도 각 가족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각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긴장의 정도도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생각하는 관계의 모습과 미래도 다르다. 그 긴장을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인한 고통을 그대로 받을 것이고, 그것일 시답잖은 것으로 느끼면 무시하고 외면할 것이다. 각자가 느끼는 긴장감에 따라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나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해 나가게 된다.
각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영화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일상 속에 스며든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영화다. 1925년 미국 몬태나를 배경으로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고 있는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필 버뱅크(베네딕트 컴버비치)와 조지 버뱅크(제시 플레먼스)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영화 초반에 필과 조지가 일 때문에 로즈가 운영하는 숙박 업소에 방문하게 되면서 두 가족이 만나게 된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대할 때 만들어지는 그 긴장감은 영화의 끝까지 시선을 잡아놓는다.
이들이 만나는 모습을 통해 인물들의 성격을 알 수 있는다, 필은 호탕하고 조금은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다. 반면 그의 동생 조지는 좀 더 섬세하게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인물로 필의 행동으로 인해 상처 받는 로즈에게 공감하고 위로하는 인물이다. 그의 관심을 받는 로즈는 남편을 잃은 이후 아들과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숙박업과 식당을 운영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아들인 피터는 조화 만드는 것을 좋아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등 손으로 하는 세심한 작업들을 잘한다. 그래서 피터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리여리하고 감성적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 이 네 인물이 만나게 되고, 그중에서 조지와 로즈는 서로에게 끌리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데 어찌 보면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가족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소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영화가 좀 더 집중하는 건 각 인물들의 감정과 표정이다. 비록 로즈에게는 재혼이긴 하지만 조지의 관심을 받은 그는 결국 조지를 선택하면서 그의 가족 일원이 되는 선택을 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고 안정적인 일이 있었던 조지를 택한 로즈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특히 조지의 형인 필의 시선은 무척 좋지 않다.
로즈와 피터가 필과 조지의 가족이 되는 과정을 간단히 보여주던 영화는 피터를 대학에 보낸다는 설정으로 잠시 이야기에서 제외시킨다. 그 이후 집중하는 건 조지의 집에서 살고 있는 로즈의 감정이다. 비록 시부모님이 같은 집에 살지 않지만 조지의 형인 필은 남성주의적인 성향으로 갑자기 자신의 무리에 들어온 여성인 로즈를 곱지 않게 보고 있다. 그는 로즈를 무시하고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조지는 로즈가 부담스럽지 않게 최대한 애쓰지만 로즈는 말이 없고 얼굴엔 근심이 가득하다. 결국 그는 술에 의지해서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렇게 로즈가 술에 의지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화면 속 로즈의 얼굴은 매우 불편해 보인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그런 로즈의 심리를 무척 세세하고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의 서부극
사실 이 독특한 서부극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예상하기는 무척 힘들다. 초반 조지와 로즈에게 집중했던 영화는 로즈와 필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듯하다가 다시 피터와 필의 관계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서부극이었다면 분명히 총을 이용한 격투가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로 등장했을 테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비슷한 장면조차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묘사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오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영화의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만큼 이 영화는 각 인물들의 위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긴장감을 무척 잘 활용하고 있다.
영화 속 로즈의 아들인 피터는 영화 중반 이후에 학교의 방학기간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다. 사실 필은 피터의 여리여리한 모습과 취미를 조롱하고 무시했던 인물이다. 그렇게 시작된 피터에 대한 조롱은 로즈에 대한 무시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구도는 영화 후반부에는 완전히 깨진다. 다시 집에 돌아온 피터의 모습을 보던 필은 어느 순간 그에게 따뜻한 말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건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것이 조금은 독특한 패션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른 남자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피터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그가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필과 피터가 먼 산등성이에 만들어진 개 모습의 그림자를 같이 봤을 때 무언가 특별한 동질감을 느낀다.
영화 중반부까지가 로즈와 필의 관계로 인한 긴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면 후반부는 필과 피터의 관계로 인한 긴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두 사람 간의 특별한 감정이 될 수도 있고, 두 사람 간에 남아있는 앙금과 적대적인 부분이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어떤 인물에 감정을 대입하는지에 따라서 느껴지는 긴장감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필과 피터가 다시 만난 시점에서는 분명히 그것은 적대적인 긴장이지만 둘 사이에 어떤 사건 이후로 그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바뀌는 긴장으로 변경된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더 흥미진진해진다.
필로 인해 발생한 관계의 긴장에서 로즈는 나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다. 술에 의지한 방식인데 그것에 의존하면서 어떤 기회가 생겼을 때 소심하게 필의 심기를 건드린다. 즉 그가 가진 힘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 방식이 조금은 무력해 보이는 방식인 것이다. 반면 피터는 필에게 느껴지는 친숙감을 이용해 둘 간의 신뢰를 만들어낸다. 두 사람에게 만들어진 동질감은 피터가 필과의 관계를 조금 더 가까운 관계로 만들게 되는데 두 사람 각자가 진심으로 서로를 신뢰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이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각자가 서로 적대감을 갖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도의 심리전이 바탕에 깔려있다.
조화로운 세 가지 : 훌륭한 연출, 좋은 영화음악 그리고 뛰어난 연기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절대 마음을 놓고 볼 수 없는 서부극이다.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볼 수 있는데, 이런 긴장감과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음악도 굉장히 효과적이다. 영화 음악을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는 그룹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다. 하지만 여러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작곡을 하기도 했다. <펜텀 스레드>나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영화 음악에 참여했는데 음악으로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심리를 음악을 통해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영화 음악 역시 각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적 상태를 음악을 통해 극대화시켰다.
영화를 연출한 제인 캠피온 감독은 영화 <피아노>로 20대 미혼모의 이야기와 그의 심리를 뛰어나게 묘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을 했었다. 이후 <여인의 초상>과 같은 영화를 연출했었는데 다작을 하는 감독은 아니어서 연출작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번 <파워 오브 도그>에서도 여성을 비롯해 남성의 심리를 꿰뚫는 연출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필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 비치의 연기가 훌륭하고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의지한 채 망가져가는 로즈 역의 커스틴 던스트의 연기도 무척 실감 난다. 또한 인물의 실제 마음이 어떤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인 피터를 연기한 코디 스밋 맥피의 연기도 매우 훌륭하다. 이렇게 연출, 음악, 배우들의 연기까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무척 독특하고 몰입감 있는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의 제목인 <파워 오브 도그>는 성경의 구절인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라는 말에서 나온 표현이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이 구절에 담긴 의미를 포함하고 있겠지만 영화 속 필과 피터가 함께 보는 산등성이의 개의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던 해석은 보는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파워 오브 도그 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makOjhOAw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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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인생영화는 무엇인가요. 또 어떤 의미인가요
인생영화. 난 사실 인생영화가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한동안 제일 재미있었던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스릴러 장르의 영화를 뽑았다. <나이브스 아웃> <유전> <큐어> <킬빌 1,2> 같은 영화들은 재생하기만 하면 시간이 후딱 간다. 또한 나는 MCU의 팬이기도 하다. 내가 작년 동안 제일 잘한 일 뽑으라고 한다면 극장에서 어벤저스 시리즈 그러니까 MCU의 영화들을 다 봤다는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의 맨몸액션 영화들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한테 있어 영화는 이런 것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든 머리를 비워줄 수 있다면 참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로맨스 영화는 왠지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아서 피하곤 했었다. 왜일까 생각했다. 내가 나를 숨기면서 살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를 보라고 한다면 두려웠다. 난 왜인지 나를 나누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런 시간은 다 간 것 같다. 물음표의 연속이던 내 머릿속에 느낌표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될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 '이러면 되는구나!'로 변했다. 이제 나도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난 나를 어두운 이야기만 할 줄 알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를 괴롭히던 몇몇 생각들에 이젠 구애받지 않게 됐다. 이를 서서히 깨달을 즈음에, 또 이제는 스릴러, 호러물이 아닌 잔잔한 작품도 좋다고 여길 때 이 영화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셈이다. 2021년 2월. 이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해피 투게더>는 이별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크게 세 사람만 나온다. 양조위가 맡은 아휘. 장국영이 맡은 보영. 장첸이 맡은 장이다. 이 세 주인공 중 아휘와 보영은 연인관계다. 허구한 날 싸움만 하는 것 같은 두 사람. 관계 회복을 위해 홍콩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난다. 외국에 온다 해서 예외가 있는 건 아니다. 이과수 폭포에 가면서도 두 사람은 또 싸운다. 지칠 대로 지친 아휘는 보영과의 관계를 마무리한다. 보영의 빈자리를 느끼는 아휘. 없다는 것에 외로움을 느끼지만 다시 상처 받기 싫어 보영에게 냉담하게 행동한다. 보영은 이런 아휘를 다시 시작하자며 흔들어놓는다. 흔들리던 아휘.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되어 나타난 보영의 같이 있어달라는 말에 긍정도, 부정도 없이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까칠했지만 사실 아휘는 보영과 함께여서 행복했다. 보영이 다 낫게 되면 자기를 떠날 것이라는 불안감에 보영의 여권을 숨기기까지 하는 아휘.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된다. 결국 보영의 손은 다 낫는다. 보영은 아휘에게 여권이 어디 있냐며 따져 묻지만 안 돌려줄거라는 답을 듣는다. 보영은 이에 화나 아휘와 헤어진다. 혼자가 된 아휘. 아휘는 보영이 떠났다는 사실에 외로워하며 이리저리 방황한다. 방황 끝에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계획하고 원래 일하던 식당에서 그만둬 도살장에서 일하게 된다. 돈을 원하는 만큼 모은 아휘는 홍콩으로 떠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잠깐 들른 대만에 식당에서 일하다 만난 친구 장의 사진을 보게 되고, 장을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게 됨으로서 이 영화는 끝난다. 이게 대략적인 영화의 줄거리다. 딱히 어려울 것 없는 내용이다. 싸우다 헤어지고 난 다음의 평범한 커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해피 투게더>는 다르다. 왕가위는 이런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는 줄거리를 가지고도 다른 로맨스영화와의 차이점을 만들어낸다.
내가 생각하는 차이점은 왕가위 감독의 연출에서 나온다. 첫번째. 어렵지는 않지만 특이한 줄거리다. 연인이 싸우고 헤어진다. 끝. 영화의 줄거리는 1줄로 요약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산 이유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만약'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만약에 부딫힌다. 아. 그때 그랬으면 어쨌을까. 내일 일을 미리 알수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후회가 우리 삶에서 좋은 구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 영화는 이런 모두를 이해라도 한 듯 우리가 선택할 만약이란 가정을 전부 다 보여준다. 수도없는 결벌 후 계속해서 사랑을 이어간 둘이 행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둘은 걸핏하면 싸웠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불행했다고 볼 수 있나? 아니다. 둘은 같이 왈츠를 추다가도 서로 사랑한다는걸 인지하고 격하게 포옹한다. 그러니까 둘에게 만약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져 연인관계이기 때문에 불행한 하루하루가 계속될 것이다. 즉, 둘의 관계는 무슨 짓을 하든 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왜? 영화에서 다 보여준것과 같이 이미 이들은 할만큼 했다. 이것만큼 확실한 미래에 대한 예상은 없을 것이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며 행복했지만 불행했던 시간을 보낸 우리들에게 말 한마디를 건낸다. 그래서, 너가 선택해야 했던 미련과 후회를 골랐다고 해서 현재와 다를거라고 생각해? 아닐걸. 난 플롯을 통해서 왕가위 감독이 이 말을 하고 싶어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두번째 연출의도로 이어진다.
두번째.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카메라 구도다. 감독의 전작에서는 볼 수 없는 구도가 보인다. 인물들을 굉장히 가깝게 찍는 카메라 워킹 여러가지가 나온다. 가령 이과수 폭포 전등을 빤히 쳐다보는 아휘의 모습도 카메라가 굉장히 가까이서 주인공을 찍는다. 또 있다. 장이 녹음기를 주며 '여기에 네가 슬픈 걸 털어놓아봐'라고 말할때 조용히 우는 아휘의 모습을 줌인한다. 아휘가 보영이 왔다는 생각에 문을 열지만 아무도 없다는걸 확인할 때에도 카메라를 가까이 대며 찍는다. 나는 이런 장면들을 보며 내가 아휘이거나 보영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혹은 내가 이들을 아는 제 3자가 되어 이들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보는것같은 느낌도 들었다. 난 왕가위가 이런 지점을 의도했다고 생각한다. 감정이입때문에 이렇게 매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 얼마나 이 인물이 이런 일들로 하여금 외로워하는지, 이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카메라를 우리에게 돌린것이다. 이런 공감대의 활용은 엔딩신 지하철 장면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홍콩의 지하철 어느 장면들을 비춰준다. 마치 내가 지하철을 타는 승객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지하철이 되어 홍콩의 사람들을 주욱 비춰주고, 무언가를 다짐하는 아휘를 보여준 다음 영화는 종착지에 도착한 기차를 보여준다. 난 이 엔딩의 두 장면을 보며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지나간 일에 생각이 많아질 때 기차를 탔다고 가정해보자. 더이상 무언가를 떠올리고 싶어도 기차가 종착지에 도착하면 일단 내리고 봐야 한다. 무언가와 이별한다는 건 이런게 아닐까. 기차와도 비슷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간 일은 기차와도 같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내려야 하는 기차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내려야 할 때 내려야한다. 난 왕가위감독이 기차와 엔딩신을 통해 이런 비유를 했다고 생각한다. 카메라 구도가 이끄는 공감대도 이와 관련이 있다. 엔딩신에서의 지하철을 바라보는 시점은 승객으로서의 시각과도 닮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아휘와 관객들은 동일시가 된 셈이다.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좋아. 그래서. 이제까지 너희 이야기 실컷 했지? 이제 네 미련과 후회에서 내릴때가 됐어. 아쉬움은 털어내라구. 난 왕가위 감독이 이 연출요소들로 이 메세지를 주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플롯을 독특하게 만들지 않은 대신 카메라 구도로 영화를 표현한것도 이 말을 전달하기 위한 좋은 받침대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기도 하다.
세번째.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한마디 더 했다. 그래서. 너가 돌아가야 할 다른 곳은 어디인가요.라는 질문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어 자유롭다. 가족이란 것도, 친구란 것도 다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 든든한게 아니었다. 내가 외로울 때 두서없는 투정을 드러내도 찾아갈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었다. 영화는 이런 돌아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 주인공 다 돌아갈곳이 없어 외롭다. 가령 아휘와 장만 해도 집을 무작정 떠나온 사람이다. 보영은 아휘라는 마음의 안식처를 잃어버렸다. 종반부로 가면 쉴 곳이 유일하게 생긴 주인공이 있다. 아휘다. 아휘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장이다. 지하철 타는 엔딩신 이전 장면은 아휘가 장의 집을 찾는 부분이다. 아휘는 마음 아프게 누군가와 이별해 방황하지만 결국 장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아휘는 앞으로 방황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언제든 마음이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앞의 두가지 만큼이나 이 지점이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앞에서 내가 쓴 부분을 다시 갖고올 필요가 있다. 결국 무언가와 이별한다는 건 돌아갈 길 하나 없애고 다른 길을 파는것이 아닐까. 아휘는 장이 있기 때문에 더이상 헤메지 않을 것이다. 왕가위 감독은 이런 '돌아갈 곳이 있고 없고'의 차이의 대비를 통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헤어진다는 거?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마음이 놓일 곳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한다. 난 이 영화를 보며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누군가와 친했다고 해서 그 사람과 영원히 행복할리는 없다. 이걸 뻔히 알고있다면, 인생 모든게 다 정해진게 되어 외로워지게 된다. 난 가끔 이런 나를 이해해주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진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 이래서 난 이 영화가 좋았다. 나에게 그래도 됐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이다. 영화 안에서 봄이라고 유추할만한 계절적 배경이 드러나진 않는다. 무엇이 봄의 햇볕같을까. 당연히 둘이 사랑하는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헤어지는 순간을 보여주지 않느냐? 아니다. 영화는 수도 없는 결별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절대 결코 완벽한 인간일 수 없다. 영화는 이런 미숙함에 대해 아름다운 봄과도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다 어느 부분에선 미숙하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구를 떠나보내기가 부지기수다. 그래도 괜찮다. 이것도 봄의 햇볕같은 날이자 '해피 투게더'한 날일 것이다. 는 이게 영화의 제목이 이것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누군가가나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까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이해하는 무언가와 함께 해야한다. 피할 필요 없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다 일어난다. 당신은 무얼 선택하든 같은 선택지를 골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챙겨야할 것 몇가지만 챙기고 앞으로 나아가자. 왕가위 감독은 이 사랑이야기를 통해 보다 성숙한 대답을 해주는 것 같다. 남남 커플의 사랑이야기에서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왕가위의 연출능력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두고두고 볼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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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독일] 한스의 선택
<거대한 자유(Grosse Freiheit)>(2021, 세바스티안 마이저)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1969년 서독, 몇 번째인지 모를 옥살이를 하던 한스 호프만은 ‘175조’ 폐지 목소리를 담은 기사를 보게 된다. 출소한 후 어느 바 앞에 다다르고, 두 남자가 스스럼없이 애정표현을 하며 그곳을 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간판에 적힌 이름은 ‘거대한 자유’. 들어가 홀로 있던 한스는 낯선 남자를 따라 계단을 내려간다. 미로같은 공간, 남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 카메라는 그들을 비추지만 집중조명하지는 않는다. 꿈꾸는 듯한 시선과 리듬으로 한스를 따라간다. 이내 미로를 빠져나온 그는 자판기에서 담배를 뽑고, 밤거리로 나와 상점 쇼윈도를 깨 물건을 대강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여유롭게 서성이다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번의 카메라는 길 건너편에 고정된 채 먼발치에서 원테이크로 그를 담는다. 화면은 어둡고,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바 시퀀스에서 가득 울려 퍼지던 음악은 멎은 채다. 단조로운 경보음이 귀를 파고든다. 엔딩크레딧에서는 그마저도 사라지고 고요만이 남는다.
침묵 속에서 관객은 생각에 빠진다, 한스는 왜 교도소로 돌아가기로 했을까. 그에 대한 두 갈래의 해석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포스터 아트 또한 다른 정서로 읽히게 될 것 같다.
먼저, 13년 동안 여러 번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더 나은 삶을 바라기를 포기하게 됐고, 머릿속 감옥에 갇혀버렸다고 보는 방향이 있다. 앞서 한스는 레오를 교도소에서 내보내기 위해 그의 거짓 진술을 인정했었다. ‘왜 그랬냐’고 묻는 레오에게 ‘너와 달리 나는 이미 희망이 없다’며 자조했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대사는 오스카와의 미래를 꿈꾸던 십 년 전과 대조된다. 연인을 향한 열정으로 반짝이던 눈은 이제 생기를 잃고 일시적인 위안을 찾는다. ‘거대한 자유’에서 마음껏 서로를 탐하는 남자들을 지나며 제가 속할 곳이 아니라고 느꼈고, 자유를 반납한 후 ‘안락’하고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자판기에서 담배를 뽑은 것은 영혼이 억압에 중독되었음을 상징한다. 마침내 ‘거대한 자유’가 ‘(부분적으로)허용’됐을 때, 한스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린 채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좀 더 힘을 싣고 싶은 것은 두 번째 해석이다. (배우의 얼굴에 담긴 것이 이에 가깝다고 느꼈다.) 한스는 변한 적이 없다, 늘 사랑의 자유를 위해 망설임 없이 다른 모든 자유를 포기할 준비가 돼 있는 이였다. 십 년 전 오스카에게 동독으로 넘어가자고 말했던 그는, 이제 빅토르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기로 한 결정은 익숙한 억압으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빅토르와 같은 중독자의 패턴을 보인 것도, 체념하거나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한스는 자신이 무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거대한 자유’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자들을 지나치며 그가 느낀 것은 몸의 자유, 그리고 ‘너’의 부재. 그래서 쇼윈도에 돌을 던졌다. ‘너’와의 추억이 담긴 담배에 불을 붙이곤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다. ‘네가 나올 수 없다면 내가 들어갈게.’, 그에게 자유는, 머무는 장소에 있지 않았다. 사랑에 있었고, 상대방에 있었다.
너무 낭만화한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이라 해도- 한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짚어내려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늘 확실하지만은 않은 말과 행동, 몸짓과 표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뒤따르는 감상은 달라질 테다. 내가 한스 호프만의 눈빛에서 읽은 바는 위 두 문단 중 후자에 가까웠고, 그를 바탕으로 아래 문장들을 적었다.
1945년, 한스 호프만은 수용소에서 교도소로 ‘옮겨진’다. 파시즘 체제가 내린 형을 2차대전 후에 ‘이어’ 살게 된 것이다. 독일 제국 때 확립되고 나치가 강화한 ‘형법 175조’를 서독이 그대로 따르기로 해서다. 영화가 이 이상한 시대와 국가와 법을 고발하는 방법은, 한스라는 인물로 중심을 잡는 것, 그의 눈에 세계를 담고 세계가 그를 관찰하게 하는 것이다. 허구적 ‘위인’의 (자서전보다는)전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관계의 상대방들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 역시 그를 관찰하고, 시선으로 그에 대해 말한다. 1968년, 재판을 받고, 옷을 벗고, 신체 부위를 내보이는- 그의 행동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건 익숙함 때문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종종 자조와 체념을 내보이기는 하지만 한스의 태도는 늘 당당하다. 잘못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때도 지금도 ‘늘 방법을 찾아낸다’. 한스 호프만은 그 한결같음으로 주변의 폭력성과 비정상성을 선명히 드러내는, 드물게 빛나는 사람이다. (해선 안 될 것은 한스를 밀어낸 오스카나 거짓 진술을 한 레오를 섣불리 평가하는 행위. 레오를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한스 뿐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저화질 필름에 담긴 비디오였다. 장소는 공중화장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그곳에서 성행위를 하는 남자들을 촬영한다. 서독 경찰이 숨겨놓은 카메라에 찍힌 영상으로, 재판장에서 공개되어 한스가 ‘175조’를 어겼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쓰인다. 그러나 영화는 먼저 관객에게 그 자체만을 보여주길 택했다. 촬영된 까닭과 재생되는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본다면, 영상에 담긴 것은 그저 (불법이 아니어야 할 일이 불법인 세상에서) 순수한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일 따름이다. 오스카와의 추억 역시 유사한 비율과 톤의 프레임에 담겨 있다. 그리고 하나 더, 교도소 문에 달린 반입구가 있다, 빅토르가 한스에게 불을 붙여주던. 독방에서 한스가 피운 성냥의 불빛이 꺼지며 1945년으로 연결되는 연출은- 긴 세월 동안 여러 번의 옥살이를 하며 그가 찾은 자유가 무엇인지 탐구하려는 듯하다.
작품이 1945년이나 1969년이 아닌 1968년을 오프닝에 배치한 까닭은, 또다른 시작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래된 인연과, 새로운 사랑의 상대방으로서 재회한 해. 오스카의 죽음을 알고 무너져내리는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빅토르가 십 년 후 마약중독으로 괴로워할 때, 한스는 그 포옹을 돌려준다. 당신의 괴로움을 다 내 피부에 새기겠다고, 내가 붙잡을 테니 당신은 놓아도 괜찮다고 선언하듯 촘촘하고 단단한 그 포옹들. 작품은 빅토르와 한스의 관계를 ‘편견을 넘어선 우정’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히 로맨스에 다다르도록 했다. 거기엔 빅토르가 처음부터 틀렸다는 암시가 있다. 어쩌면 먼저 상대를 좋아하기 시작한 쪽이었던 그는, 그 마음을 알아채고 꺼내어 준 한스의 사랑에 구원받았다. 구원은 (차별적 억압의 근거로 이용되곤 했던) 십자가와 성경에 있지 않았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남자와 데이트하는, 성경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러브레터를 쓰는, 그것을 찢어 담배를 말아 피우는 한스의- 조그마한 신성모독, 위대한 사랑에 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가끔 <거대한 자유>의 포스터를 들여다봤다. 누군가의 머리에 나 있는 문, 그 프레임 안엔 아마도 그 자신일 남자가 갇혀 담배를 물고 있다. 밖에서 불을 붙이는 손은 누구의 것일까, 어쩌면 그역시 자신의 손일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짐작하기도 했다. 영화를 관람하며 손의 주인이 빅토르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면이 기억의 방으로 들어온 순간, ‘손은 그 자신의 것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1957년, 컴컴한 독방에서 한스는 오스카와의 추억을 재생했다. 성냥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나서야 담배에 불을 붙였다. 13년 동안 교도소와 독방을 들락거린 그를 살아남게, 아니 살게 한 것은 그 성냥불이었다. 찰나를 태우고 사그라들지만 기억 속에서 반복해 빛을 내는 그것은, 특정한 대상인 빅토르보다는 모든 사랑과 상대방들을 상징함에 더 가깝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한스는 사랑의 감정과 기억에서 얻은 연료로 삶의 불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둠 속 잠깐의 빛에 홀려 중독된 것이라 해도, 그 길에 사랑이 있다면- 나는 한스의 마지막 선택을 감히 안타까워하고 싶지는 않다.
<거대한 자유>는 실재했던 부조리와 폭력에 대한 고발, 빅토르와 한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스 호프만과 그가 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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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홈 리뷰」당신이 느꼈을 점을 세세하게 담아냈습니다ㅣ스포주의ㅣ자막을 위주로 봐주세용ㅣSweet home reviewㅣ
?"스위트홈 리뷰(*스포주의)"
뭐 저는 고민시 배우가
발레하는 거 봤으니까 만족입니다^^*- "스위트홈" 시놉시스1
세상을 차단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10대 소년. 현수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직은 사람이니까. 이웃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스위트홈" 시놉시스2
끔찍한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외톨이 고등학생 현수는 그린 홈이라는 낡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다.
절망에 빠진 그는 점차 그린 홈에 관한 비밀을 깨닫는다.
왜곡된 인간 욕망을 여러 가지 형태로 투영하면서 인류를 몰아내려는 괴물이 그린 홈을 둘러싸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해 그린 홈 주민들은 그 괴물들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스위트홈" 정보
공개일: 2020년 12월 18일
화수: 10부작
제작: 스튜디오 드래곤, StudioN
장르: 호러, 크리처, 생존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
연출: 이응복
극본: 홍소리, 김형민, 박소정
출연: 송강, 이진욱, 이시영, 박규영, 고민시, 고윤정
원작: 네이버 웹툰 스위트홈
시청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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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수요일이 사라졌다> 예고편
교통사고 이후, 요일마다 바뀌는 7명의 자아가 생긴 '나'.
조금 불편하지만 평온한 날들이었다. 수요일이 사라지기 전까지...
일주일 중 '나'의 날은 화요일.
여느 날처럼 하루를 마무리하고 일주일 후를 기약하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수요일 아침에 눈을 뜬 '나'는 화요일이었다. 수요일이 사라졌다.
화요일만 살아온 '나'에겐 조금은 낯선 수요일이었지만,
꿈만 같은 하루가 계속되길 바랐다.
그날 밤,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까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진짜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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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만도> 메인 예고편
작전 중 사고로 민간인을 쏜
마약단속국의 특수요원 ‘제임스’는 PTSD에 시달린다.
그런 그의 집에 특수부대 출신의 범죄자
‘조니’ 일당이 몰래 숨겨놓은 돈을 찾기 위해 찾아온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제임스’와 아내는 집을 비우고,
남은 두 딸이 그들의 인질이 되어버린다.
모두가 위험에 빠진 순간, ‘제임스’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다시 한번 총을 장전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