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혁2022-12-04 15:25:30
루피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원피스 필름 레드 / ワンピース フィルム レッド, 2022
무슨 말이 필요할까?
2022년 기준. <원피스>는 단행본 역대 누계 부수 5억 1000만 부로 일본 만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만화가 되었다.
이번 <원피스 필름 레드>은 일본 박스오피스 11주 연속 1위와 북미 박스오피스 2위 등. 역대 일본 박스오피스 9위에 이름을 올릴 만큼의 흥행과 반응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대해적 시대.
노래 하나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디바 ‘우타’를 보기 위해 밀짚모자 "루피"와 해적단, 그리고 해군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이 콘서트에는 그들도 모르는 ‘우타’만의 속내가 드러나는데...
1. 원피스를 모르진 않겠죠?
제목에는 없지만, "극장판"에 속하는 <원피스 필름 레드>는 "원피스"라는 이름만으로도 진입장벽이 높은 영화이다.
"극장"이라는 곳에 맞게 제작된 영화이나 예습이 반강제적으로 필요한데, 그게 새로운 관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존 작품의 주인공 "루피"외에도 이번 극장판에 "우타"라는 캐릭터가 새로이 등장한다!
이런들 저런들 공부가 필요한데, "우타"의 등장에 "시리즈"만이 누릴 수 있는 쌓여있는 설명들로 이해하게 만든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우타"는 "샹크스의 딸"이다! - "샹크스"는 "루피"가 해적을 결정하게 된 동기를 만든 캐릭터이다.
이로 "우타"에게 필요한 이목은 채웠지만, "왜?"라는 동기가 남았다.
기존 작품에서도 다뤄지지 않은 <필름 레드>만의 오리지널 스토리인만큼 어설프게 말한다면, "기존 캐릭터(샹크스)"를 끌어들인 팬들의 원망도 만만치 않을 거다.
그런 점에서 이번 <원피스 필름 레드>는 "디즈니 프린세스"를 앞세운 "뮤지컬"이 떠오른다!
2. 노래는 좋은데, 말이지!
<101마리 달마시안, 1996>의 악당 "크루엘라"를 연상시키는 머리도 있겠지만, 노래를 부른다는 설정이 가장 크다!
극 중. "EDM"를 비롯해 "댄스 - 록발라드"까지 폭넓은 장르의 음악들을 "우타"의 노래만으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이외에도 큰 스크린으로 보는 퍼포먼스는 "공연 실황"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하는 "팬무비"와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이 부분이 가장 해당 작품의 호불호를 가리는 기준이 되지 않을까?
결국, <필름 레드>는 "원피스"라는 작품을 기반하여 만들어진 작품으로 그 기대치는 "뮤지컬"이 아니라 "액션"에 있다.
소위, "갈아 넣었다"라는 표현을 쓰기에 부족하기도 했고 분량 자체도 후반부에 몰려있어 적기도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아쉬운 점은 이번 <원피스 필름 레드>에 맞춰 자신 있게 내놓은 "뮤지컬"에 있다.
많이 언급되고, 지적되는 "뮤지컬"의 고질적인 문제는 기존 캐릭터들의 대사를 노래의 가사로 변환시키는 "사운드"에 있다!
이번 <필름 레드>에서도 이 점이 지적되는 게 "우타"의 대사 톤과 노래를 부르는 톤이 급격한 게 달라진다. - 그도 그럴 것이 노래는 기존 성우 "나즈카 카오리"가 아닌 "Ado"가 부른다!
결국, 매번 좋은 노래들이 시작하는 데에 관객들은 늘 손발을 쥐게 만든다.
3. 디즈니 프린세스에서 더 벗어나서...
그럼에도, <원피스 필름 레드>는 재밌는 작품이다!
"우타"의 노래가 처음 소개되는 과정에는 현재,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들이 보이고, "전쟁"으로 피해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공감대를 쌓아가 위로하는 모습은 스크린 너머 우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선택한 "노래"는 여타 매체들에서 차용했던 "화합"으로 활용되나 <필름 레드>는 이보다 한 발 더 앞서나간다!
여기, 관객들을 설득시킬 "우타"의 동기에 "플래시백"까지 사용하나 관객들을 설득하는 데에 일부 과한 연출들도 눈에 보인다!
극 중. "해군"이 능력에 조종되는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쏘는 모습과 다르게, 해적 "샹크스 패밀리"는 보호하는 장면이 그러한데, 의도적으로 '선과 악'의 구도로 만들려는 단순한 서사에는 아쉬움이 생긴다. - 해군 측의 "아카이누"가 공격을 허락하고, "키자루"는 이를 시도하니...
· tmi. 1 - 쿠키 영상 1개가 있다.
· tmi. 2 - "코요테"가 부른 <우리의 꿈>은 국내에서 만든 창작곡으로 인기는 다 아시죠?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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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한 유년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족
가족은 한 개인의 성장과 안착된 환경을 만들어주는 버팀목 같은 존재다. 어린 시절에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이고 아이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도움을 준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이겨 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는 부쩍 성장해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 하지만 그 지점으로 가기까지는 많은 인내심이 따르고 한 순간 한 순간 이겨내는 것이 어려운 시기도 있다. 그 어려움을 결국은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버팀목이 되어 한 걸음씩 나아가면 그래도 그 고난함이 견딜만하다.
하지만 어려움이 심각해지면 앞으로 나아가는 그 발걸음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 어두운 시기를 끝까지 참아내지 못하고 무너진 가족의 일원이 있다면 그 일원은 가족의 분위기를 바꾼다. 술이나 도박에 중독되어 가정에 소홀하거나 자신의 희망을 다른 이성에게 찾아 여러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책임을 자녀에게 전가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여 뒤쳐진 그 가족의 일원에게 손을 뻗어 같이 가려는 노력은 꽤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암흑 같은 시기에 약간은 원망스러울 그 가족족의 손을 잡으며 걸어가다 보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된다.
미국 백인 노동자 가정에서 자란 남자아이의 이야기
영화 <힐빌리의 노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특히 미국의 백인 노동자 가정에서 자란 한 남자아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주인공 JD(가브리엘 바소)의 유년기 시절과 현재를 담는다. 현재 그는 예일대 법대생이고 중요한 인턴십 면접을 앞두고 있다. 그는 면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누나 린지(헤일리 베넷)의 연락을 받게 되고, 엄마 베브(에이미 아담스)가 헤로인을 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돌아가는 과정과 함께 JD의 청소년 시기의 이야기들이 플래쉬백으로 교차로 보인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유년기 시절 엄마 베브의 모습은 망가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혼을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고, 새로운 이성을 만나지만 금방 헤어지는 일이 반복된다. 그렇게 감정적인 안정을 찾지 못하면서 가끔 아이들에게도 심한 폭언이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의도치 않게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기도 한다. 엄마와 아주 잘 지내면서 따뜻한 모습을 보던 JD는 갑자기 급격히 감정이 변하는 엄마를 볼 때 많이 흔들린다. 그렇게 흔들리는 엄마를 보는 JD의 눈동자는 점점 초점을 잃어간다.
영화에는 엄마와 누나 이외에도 할머니(글렌 클로즈)도 중요한 가족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공장 노동자였던 할아버지(보 홉킨스) 옆에서 가족을 챙기며 살아왔던 그에게 자신의 딸인 베브가 그렇게 삶의 끈을 놓는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손주 JD를 보면서 그것을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약함을 잠시 감추고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대마초를 피워대는 JD를 다시 잡아 자신의 길로 돌아가게 만든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고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JD
주인공의 현재 모습을 보면 굉장한 우등생이며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JD가 성장했던 마을은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공장 노동자들이 주로 지냈던 그 지역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은 JD가 면접 전 참여했던 변호사들 간의 만찬 자리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대부분은 그 마을과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촌구석이나 부끄러운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JD는 그 인식에 굉장한 불만을 토로하며 반론을 제기한다. 그에게는 자신이 자라고 자신을 만들었던 그 마을을 하찮게 생각하는 그 발언들이 부당하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JD에게 가족은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보다 보면 굉장히 불편한 장면들이 있다. 특히 엄마 베브가 JD에게 무차별한 감정적 폭발을 쏟아내고 폭력을 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던 JD와 누나 린지가 다행히 문제없이 자라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이 어쩌면 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엄마가 채워주지 못한 자리를 할머니가 대신 채웠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길로 빠지려고 하는 순간을 직감적으로 눈치챈 할머니는 자신의 딸 베브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을 때, 손주들을 지키려 최선을 다한다.
적어도 할머니는 JD와 린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 두 손주가 거의 성장할 때까지 그들을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이끄는 모습은 깊은 감동을 준다. 특히 JD를 할머니 본인 집으로 데려와 생활할 때, 나쁜 길로 나아가던 JD가 할머니의 노동과 고생하는 모습을 경험하고는 올바른 길로 변화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JD가 시험에서 1등을 했을 때, 할머니의 표정에서 보이는 기쁨은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일 것이다. 아마도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JD는 가족이란 어떤 것이고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
JD는 과거부터 약에 중독된 엄마를 보아왔다. 보통의 경우라면 성장한 후 다시 보기 싫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엄마가 다시 헤로인에 손을 댔다는 말을 듣고는 고향으로 곧장 돌아온다. 그의 할머니가 그랬듯이 자신에게 남은 가족인 누나와 엄마의 손을 놓지 않는다. 영화 말미, 한 모텔의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가 JD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손을 내밀 때, JD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는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잡으며 이야기한다. 면접 때문에 잠시 학교로 가야 하지만 다시 돌아올 거라고,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영화가 던지는 질문, 가족이란 무엇일까
영화는 비록 가정의 환경 자체가 불우하더라고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현실적으로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가는 걸음을 포기해버리면 그건 엄마 베브가 선택한 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아주 훌륭한 삶은 아닐지라도 계속 먹고 마시며 살아갈 힘 정도는 얻어지지 않을까. 그런 긍정적인 인식이 영화 전반에 깔려있다.
베스트셀러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JD가 실제로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약에 중독되었던 엄마를 연기한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할머니 역을 맡아 실제 외모까지 비슷하게 분장한 글렌 클로즈의 연기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약해진 몸에도 불구하고 강인함을 보여주며 손주들을 끝까지 챙기는 할머니의 모습은 글렌 클로즈의 연기와 목소리를 만나 한층 돋보인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는 트럼프 지지층으로 대표되는 백인 노동자층 가정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는 정치적인 영화이고 아주 보수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인 색깔을 걷어내고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는 이야기에 집중한다면 그렇게 불편하지 않게 관람할 수 있는 영화다. 비록 아주 좋은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JD를 비롯한 가족의 모습과 그들의 선택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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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벽 끝에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몇 년 전, 친구와 미국 서부 자동차 여행을 했다. 샌프란에서 출발해 LA를 찍고 샌디에이고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LA로 올라오는, 나름의 모험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 번을 왕복할 정도의 거리를 달리면서 온갖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했고, 미국이란 땅이 낯선 나를 위해 유학 중인 친구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소개해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흔한 미국 사람이 홈리스가 되는 시나리오'가 기억에 남는다. 친구에 따르면 미국 서민들의 경우 차를 한번 수리하는 비용과 인건비가 원체 비싸기 때문에 차 유리창이 깨져도 신문지로 붙이고 다니기도 한다. 도심 외곽에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어느 날 차가 완전히 고장 나기라도 하면, 수중에 단돈 몇 천 달러가 없어서 수리비를 변통하지 못한다.(렌트와 보험비를 포함한 기본 생활비가 비싸기 때문에 수중에 현금이 많이 없다고 한다. 저축이란 개념도 약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차를 타고 직장에 가지 못 하여 직장에 잘린다. 직장에서 잘리면 렌트와 보험을 내지 못하고, 그러다 어처구니없게도 홈리스로 전락한다.
샌프란 도심 거리에 보이는 홈리스들은 거리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있었는데 실은 파트타임 일을 몇 개씩 뛴다고 한다. 이들은 차가 없기 때문에 다운타운을 떠나지 못하고 슬럼을 형성한다. 미국인에게는 마치 신발과도 같은 자동차가 없다는 것은 일자리의 선택 범위를 확연히 좁히면서, 삶의 방식까지도 제한한다. <노매드랜드>를 보았다면,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과 위와 같은 홈리스들이 질적으로 어떤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물을 수 있다. 펀이 자처한 유목민 생활은 도심의 홈리스의 삶보다도 더 척박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의도치 않게 동정 어린 눈길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마주친 옛 학생 앞에서 펀은 자신이 홈리스(homeless)가 아니라 엄연한 하우스리스(houseless)라고 선포한다. 홈은 곧 하우스라는 공식에 들어맞지 않을 뿐, 그녀는 홈리스와 다르게 기동력과 안식처를 동시에 쟁취했다고 청중을 설득하고자 한다. 후반부에 카센터에서 구제불능이 된 고물 밴을 집이자 안식처라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진심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주장에 진정으로 동조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펀은 마치 60년대 히피 라이프를 시대착오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 유아적이라는 인상마저 주기에 이른다. 이러한 세간의 오해를 뒤로하고 그녀의 여정은 계속된다.
현대인의 끝나지 않는 노동이 궁극적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고들 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중산층에게는 소박하게는 집 한 채 마련, 궁극적으론 경제적 자유가 최종 목표라고도 한다. 그러나 2008년 서브프라임이 촉발한 금융위기부터 지금의 Covid-19까지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그 10년 간 경제적으로 낙오한 이탈자들 뿐 아니라 이제 막 노동시장에 진입한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이 '소박했던' 바람은 신기루 같은 꿈이 되어가고 있다. 현실 앞에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떠도는 주체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한 삶을 실제로 실천하고 사투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음을 영화는 증명한다.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생활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이 마치 구석기시대로 회귀한 듯한 생활 풍경을 묘사한다. 이들은 수렵과 채집을 하듯 아마존 물류센터, 캠핑장, 고속도로 식당에서 단기 일자리를 구하며 동굴에 몸을 누이듯 밴 안에 몸을 누인다. 특히 영화는 실제 노매드인 린다 메이, 스웽키, 데이브와의 우정을 통해 이들의 다공성(porous)이면서도 쉽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노매드 식의 연대에 주목한다. 구석기인들처럼 이들은 서로 평등하고 계급을 의식하지 않으며 식량과 불을 나눈다. 또한 필요 없는 물건은 서로 교환하거나 나누고, 노동의 품앗이를 한다. 불을 지피는 모습, 공룡, 화석, 먼 별빛 등 태곳적을 상징하는 고고학적인 소재들이 도처에 등장한다.
방법론에 대하여
본 영화는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 저, <노매드랜드 : 21세기에 미국에서 살아남기>라는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였으며 주인공 펀과 데이브를 제외한 일군의 조연 역으로 실제 노매드의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연기하도록 하였다. 어딘가 익숙한 이 작법은 다름 아닌 TV 다큐멘터리의 DNA를 가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법과 닮아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침 최근에 그의 20년간의 영화 자서전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이 감독의 작업 방식과,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데뷔작 <환상의 빛>에서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이국적이고 동양적 가치관을 읽어내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서 그는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부러 무관한 정서의 작품을 찍고자 하였으며 마치 재즈에 비유할 수 있는 TV의 즉흥적인 성격을 가진 비연극적인 작품을 찍고자 한 것이 바로 <원더풀 라이프>이다. 그는 <원더풀 라이프>의 방법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나 픽션이라는 식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해석하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배우든 일반인이든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자는 규칙을 정한 것입니다.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허문 장르 안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직접 연기하는 인물들의 자기표현 욕구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것이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놀라운 화학작용을 발견한다. 이로써 인터뷰는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표현의 생성 과정이 된다.
<노매드랜드> 역시 픽션과 다큐가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를 두고 '픽션에 다큐멘터리식 터치가 들어갔다'거나, '페이크 다큐'라고 단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그의 영화에 다큐식 터치가 가미되었다는 평가에 억울하다고 반응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들을 다큐식 촬영을 단순 차용하여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은 자오의 섬세한 연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카메라는 광활한 대자연과 그 안에서 늙고 풍화되어 가는 인물들을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애정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말하자면 극적이거나 작위적인 연출을 지양하는 대신, 대상이 스스로를 자연스레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을 애정과 시간을 들여 지켜보고자 한다. 특히 현실 고발의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여 한 생태계를 파괴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감독은 노매드의 삶에 미묘하고도 아주 깊숙이 그러나 그들의 존엄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침투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카메라의 존재와 배우의 존재는, 노매드들이 스스로의 삶을 인식하는 태도에도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노매드인 출연진들도 이제 카메라 앞의 배우처럼 자기 삶에 대한 표현 욕구를 드러낸다. 그때 우리는 이들만이 가진 긍지, 강인함, 존재론적 고독을 발견한다.
펀 역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먼드 또한 본인이 연기를 한다는 사실, 스스로가 배우라는 사실조차 잊고 5개월의 긴 여정 동안 순전히 펀이라는 인물로 살아간다. 맥도먼드는 실제로 아마존에 이력서를 내고 취업도 하고, 밥 웰스가 설립한 RTR(Rubber Tramp Rendezvous)에 머무는 노매드들과 교류를 하며 함께 생활한다. 그동안 누구도 그녀를 유명 여배우라고 의심해본 적 없을 만큼, 맥도먼드는 생활 연기에 녹아들어 완벽하게 한 캐릭터를 체화할 수 있었다. 이 성실하기 그지없는 배우는 나중에 펀이라는 인물의 핵심 코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인터뷰한다(링크). RTR에 처음 입성했을 때 펀은 처음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그들의 사연과 이야기를 조용히 듣는 역할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밥 웰스와 일대일로 대면할 때 자신의 이야기(실은 픽션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두 사람의 독대 장면은 후반부에 한번 더 반복되는데, 맥도먼드 배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순수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밥 웰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그 장면이 끝나고 배우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가 타인의 삶을 대하는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는 완전히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감독이나 제작자의 생각을 투영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감독은 배우 양쪽에게 정보의 불균형을 주고 돌발적인 지시를 내린다든가 하는 '조작'과 테크닉을 통해 즉흥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밥 웰스가 그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상실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은, 펀이라는 같은 처지의 청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토로이자 고백이었다. 이 장면은 밥 웰스를 외부인으로서 관찰하면서 얻어내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사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배우였고 그녀의 남편도 멀쩡히 살아있다 한들, 그가 드러낸 진실된 감정은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영화은 이런 진귀한 장면을 포착, 발굴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맥도먼드가 자신의 정체를 공개해버리고 용서를 구한다. 그 순간 아주 밀도 있게 형성된 특별한 관계는 다음 국면을 맞이한다. 이 영화는 배우와 카메라를 통해 실존하는 인물들의 삶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다가가려고 하지만, 그들의 순수한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성숙한 태도를 취한다.
애도를 마치고 나면
이제 비로소 펀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2008년 경기침체로 미국 엠파이어의 석고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마을은 폐허가 되고 만다. 사랑하는 남편 '보'마저 병으로 떠나보내자, 펀은 집을 청산하고 밴 한대를 몰고서 노매드의 생활을 시작한다(영어로는 hit the road라고 표현하는데 모든걸 박차고 길 위로 떠나는 이미지가 상기된다). 이 유랑길은 1) 생존을 위한, 2) 도피를 위한, 그리고 3) 애도를 위한 유랑이다. 먼저 1) 생존이란, 삶의 터전을 잃은 이가 때때로 자신에게 떨어지는 파트타임 일자리를 수렵/채집하는 과정이다. 초반에 비치는 아마존 물류 시스템의 부감은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주인공이 저 18세기의 낭만적인 방랑객이 아니라 21세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변방을 떠날 수 없는 취약계층 노동자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다음으로 2) 도피는, 상실로부터의 도피이다. 펀은 늘 새로운 시도나 친구들의 초대를 거절하는 습성이 있다. 펀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모든 옛 기억들을 자신의 밴에 차곡차곡 쌓아서 들고 다닌다. 그리고 데이브가 이를 훼손했을 때 노여워하고 심지어 다시 접착제로 붙이기도 한다.
이런 회피형 인물이, 의도치 않게 다른 노매드들과 스치고 대자연의 존재를 마주하며 하나둘씩 상처를 씻어내려가게 된다. 그녀는 한시적인 일을 하면서 유독 오물을 치우거나 얼룩을 닦는 일을 많이 한다. 샤워를 하는 뒷모습에서 검은 물이 씻겨내리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즉, 펀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고 정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주어진 애도의 과업을 완수해가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를 노년의 성장 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서사는,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떠났다가 깨닫고 돌아오는 서사인가?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 아니라 떠남을 위한 떠남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첫번째에는 도망치고 잊기 위해, 두번째에는 기억하고 되찾기 위한 떠남이다. 예컨대 펀에게는 몇번 정착할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 주변에는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안전망이 있다. 데이브와 언니 부부의 존재가 그러한데, 이들은 펀이 도피와 애도의 순례를 끝마쳤을 때 노매드의 삶을 버리고 정착하게 될 것인지를 다시한번 자문하도록 하는 역할이다. 로드무비의 여정이 반지처럼 한 번의 원을 그렸을 때, 그녀를 추동하는 힘은 생존을 위한 갈구도, 과거로부터의 도피도, 상실한 자의 애도도 아닌 태생적인 자유로움과 독립심, 강인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며, 망자의 시선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워진다.
스웽키가 마침내 알래스카에 도착하여 보내온 영상에서 제비들은 알을 깨고 나온 껍질을 물가에 떨구고 어디론가 한없이 떠돈다. 겉으로 보기에 목적이 없는 어지러운 비행일 지라도 자연의 순리 안에서 이들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비상하고 있는 것일 테다. 이처럼 스스로의 방랑에서 각자 그 목적을 찾아내는 것이 노매드들이 거쳐야 할 통과 의례이자 숙명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해석을 차치하더라도, 거대한 자연의 풍광과 목격한 자의 내면의 풍경을 2.39:1의 웅장한 시네마스코프 안에 담아내는 데 성공하였는데, 과연 테렌스 멀릭 스쿨이라고 자처할만하였다. 또 한편으로 감독은 노매드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지 않는 균형을 잡기 위하여, 평범한 가정의 일상 안에서도 생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려 한다. 펀이 데이브의 집에 초대받아서 데이브 손자를 어색하게 안고 있다가 잠든 아기의 손을 쥐어보는 장면은, 거대한 나무와 자라나는 여린 잎을 보듯이 자연을 바라볼 때와 같은 순일한 감정을 자아낸다.
마치며
이 글의 서두는 홈리스가 되는 취약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길 위를 달리고 대자연의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시선은 점차 미국 사회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부터 대자연 그 자체, 자연 앞의 나의 미약한 존재에 대한 감각으로 옮겨갔다. (<노매드랜드>도 이러한 순차를 따르고 있다) 우리가 샌디에이고에 도착했을 때 꽤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위험해보이는 절벽임에도 어떠한 보호막도 쳐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안내 간판에는 <접근하지 마시오, 바다사자 어미가 갓 낳은 새끼들을 떠날 수 있음>이라고 적혀있었다. 인간에게 추락할 수 있다, 위험하다고 경고하기는 커녕, 너의 위험은 내 알 바 아니고 생태 환경을 위해 접근하지 말라는 말이 미국 특유의 자유주의적인 사고라고 생각되었다. 노매드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이를 닮아있다. 야생에 맨몸으로 뛰어든 사람들은 앞으로 닥칠 상황이 얼마나 위험할지를 스스로 가늠하고 판단하면서 더듬거리며 길을 나아간다. 스페어타이어도 없이 서부를 횡단하는 펀에게 선배 스웽키가 조언해주듯이, 이들은 사회적 보호막에 의지하는 대신 절벽에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외침과 손길을 의지한다.
우리의 자동차 여행은 사실 험난했다. 하루 50불짜리 에어비앤비 숙소는 형편없었고 위험한 다운타운 동네의 안 좋은 집을 예약하여 숙소를 옮긴 적도 있었다. 그때 든 생각은 자동차로 미 서부를 횡단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절대 못하겠단 생각이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늘 떠나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그만큼 정주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고 제대로 잘 정착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기도 했던 것 같다. 영화 전반부에 노매드들이 무모하고 고집스럽단 인상마저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 판단을 진정으로 거둘 수 있었다. 제비들이 알을 깨고 날아다니는 데에는 어떤 말과 해석도 필요 없듯이, 자연에서 태어나 다시 자연으로 풍화하는 삶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그동안 나름 여러 대륙의 대자연들을 찾아다니면서 눈물이 흐를 만큼 위엄있는 그 풍경들이 여행자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은 강하게 뇌리에 박혀 때때로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지금 내 삶에 작용하고 있다. 어쩌면 <노매드랜드>도 그런 영화가 될 것만 같다.
2018년 겨울, 몬테레이 베이의 석양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자서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지수 옮김 pp. 32-45
이미지 출처
https://www.vogue.com/article/oscar-predictions-2021https://tonebenderspodcast.com/159-nomadland-with-sergio-diaz-and-zach-seivers/
https://edition.cnn.com/style/article/nomadland-film-making-of-spc-intl/index.html
https://i.pinimg.com/originals/1c/77/90/1c779035984fbca2c3080c4e93fb8490.jpg
https://www.imdb.com/title/tt9770150/mediaindex/?ref_=tt_mv_sm2021년 4월 26일 감상 / 2021년 4월 28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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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최근 유튜버들이 20년 전 '밀양 성폭행 사건' 가해자들 신상을 잇달아 공개하면서
'밀양 사건'의 모티브가 된 <한공주>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6월 2주차 씨네뉴스 함께해요.현대차x손석구x문병곤 <밤낚시>
현대자동차가 자체 제작한 단편 영화 ‘밤낚시’가 오는 14일 개봉합니다. <밤낚시>는 전기차 충전소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한 사건과 반전 스토리를 다룬 휴머니즘 스릴러로 배우 손석구가 출연 및 공동제작을 맡으며 화제에 올랐습니다. 또한 지난 2013년 <세이프>로 한국인 최초 칸 영화제 단편경쟁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문병곤 감독이 11년 만에 메가폰을 잡았으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조형래 촬영 감독이 참여하여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경규 수입 영화 <이소룡-들> 포스터 공개
세기의 아이콘 이소룡 사망 후, 세계 곳곳에서 포스트 이소룡이 되려는 ‘이소룡-들’이 등장하던 시절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이소룡-들>이 캐릭터 포스터를 공개했습니다. 영화는 시체스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초청받은 작품이며, 데이비드 그레고리 감독의 <이소룡-들>은 리샤오룽(이소룡)이 구축한 영화 세계가 그의 사후에도 전 세계 대중의 열광 속에서 팽창하는 과정을 조명합니다.
한공주 OTT에서 역주행
20년 전 ‘밀양 사건’ 이 최근 다시 주목을 받으며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가운데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한공주> 가 OTT 역주행을 그리고 있습니다. 최근 한 유튜브 채널이 성폭행 사건 가해자들의 신상과 근황을 차례로 공개하며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결과로 2014년에 개봉한 독립영화가 차트 역주행하는 건 이례적인 사건입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출품작 2천674편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 사무국은 오는 9월 제20회 영화제 공모작이 총 2천674편이 출품됐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영화제보다 705편이 늘며 역대 최다 출품 수를 기록했으며, 100여 편을 엄선해 상영할 예정입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오는 9월 5일부터 10일까지 열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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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에게 오는 끝을 준비하는 자세
눈은 아일랜드 전역에 내리고 있었다. 눈은 음울한 중부 평야의 구석구석에도, 나무 없는 구릉지대에도 내리고, 앨런의 늪에도 소리 없이 내리고, 더 멀리 서쪽으로 섀넌 강의 어둡고 거친 물결 위에도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또한 마이클 퓨리가 묻혀 있는 언덕 위의 그 쓸쓸한 교회 부속묘지의 구석구석에도 내리고 있었다.
기우뚱한 십자가와 묘석 위에도, 작은 출입문 위의 뾰족한 쇠창 위에도, 그리고 앙상한 가시나무 위에도 눈은 바람에 나부끼며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그가 눈이 온 세상에 사뿐이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그리고 그들의 최후의 종말의 강림처럼 눈이 모든 산 이와 죽은 이들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그의 영혼은 서서히 스러져갔다.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소설 <죽은 사람들> 중
당신은 상실에 얼마나 초연한가? 모든 사람들은 삶의 끝에 죽음을 맞이하고, 동시에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목도한다. 만약 당신이 상실에도 절망하지 않고 무던할 수 있다면 그건 좀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이라면 모두,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의 생에 죽음이 개입하는 순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이를 잃는 순간을 상상하면 언제나 깊은 공포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올해 초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예기치 못한 죽음과 이별을 경험하기에, 그때를 준비하기 위해 마음의 두께를 단단히 만들며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면, 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거니까.
그런 나의 생각이 무의식에 적용된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연달아 죽음을 다룬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 형을 잃은 후 직장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 부터, 부검을 통해 죽은 자들이 남긴 말을 산 자들에게 전하는 법의학자들의 드라마 언내추럴. 그리고 마지막은 오늘 이야기할 작품이자, 존엄사를 선택한 친구 마사와 그를 지켜보는 친구 잉그리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이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소개 및 줄거리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스페인의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영어 장편 영화이며, 2020년 발간된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 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고 등급의 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는데, 상영 시 18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신기록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국내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첫 상영되었고 10월 23일 공식적으로 영화관 개봉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부국제에서부터 궁금했던 터라 개봉 다음 주에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는 출간 기념 사인회를 위해 뉴욕 맨해튼을 찾은 유명 작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 마사(틸다 스윈튼)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가며 시작된다. 이후 잉그리드는 뉴욕에서 마사의 곁을 지키며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마사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안락사 계획을 밝히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옆방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
마사(틸다 스윈튼)의 부탁을 들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충격에 빠진다. 미국에서는 일부 주에서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지만 뉴욕주는 그 일부가 아닐뿐더러, 잉그리드는 저서를 통해 '생명이 어째서 죽음에 이르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할 만큼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사는 그녀에게 부탁하기 전 이미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살에 동조할 수 없다'라며 거절을 당한 상태였다. 잉그리드가 느꼈을 두려움은, 만약 내가 친구에게 같은 부탁을 들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무리 시한부라고 하더라도 그런 부탁은 충격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죽음이 목을 조이는 생생한 감각을 느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투병(鬪病)이라는 단어에는 싸울 투에 병 병 자를 사용한다. 그야말로 적극적으로 질병과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연히 치열하게 질병과 맞서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며 병을 완치하는 것이 싸움에서의 승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영화 속 말기 암 환자이자 마사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암 환자가 계속 싸워주길 바라고, 투병 결과에 따라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굴욕스러운 고통 속에서 죽지 않는 것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선언한다.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마사의 대사 중
감독은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고 싶은 마음도 당연한 인간의 욕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탄생과 죽음이 선과 악처럼 나누어져 있는 것을 꼬집는다. 살아있음은 옳은 것이고 죽음은 부정한 것일까? 모두가 삶의 끝에 죽음을 만난다는 것만 봐도 무리한 가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글의 도입에서 언급한 일본의 드라마 <언내추럴> 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죽는 것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어쩌다 목숨을 잃지요. 그리고 우리는 어쩌다 살고 있는 겁니다. 어쩌다 살고 있으니까 죽음을 불길하게 여겨선 안돼요."
마사는 종군 기자였다. 평생 살아있음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쟁터를 다니며 남겨진 사람들을 만나왔다. 삶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이미 죽음은 두려워하기에 너무나 가까운 것이었다. 전쟁터 속에서 그녀는 어쩌면 삶이 그저 '남겨지는 것'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10대 때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남자친구 프레드를 만나 아이를 임신하지만, PTSD에 시달리던 프레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하며 떠난다. 시간이 흘러 마사는 친부의 존재를 추궁하는 딸을 위해 그의 근황을 수소문하고 화재 현장에서 살려달라는 환청을 듣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후 딸 미셸과도 점차 멀어진다. 살아냈지만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남겨진 프레드. 자신보다 일을 우선순위에 두는 엄마와 존재도 모르는 아빠를 용서하지 못하고 탄생을 저주했을 미셸. 그리고 혼자 남겨져 치열한 삶을 전쟁처럼 치러냈던 마사까지. 이들의 모습은 비극적이지만 그 누구도 패배자라고 말할 수 없다.
아름다움으로 설득하는 페드로의 미장센
다채로운 미술은 시한부나 죽음 같은 소재를 슬프고 우울한 동정 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세련된 미감과 선명한 색감이 만드는 페드로의 미장센은 감각이 모든 서사를 선명하게 심지어는 아름답게 인지하도록 돕는다. 모든 로케이션과 장면이 아름다워서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마사가 죽음을 준비하며 샛노란 자켓과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장면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정도이다.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각자의 속도가 조금씩 다를 뿐. 끝을 향해 가는 이 여정을 얼마나 다채롭게 채우느냐는 모두가 가진 숙제일 것이다.
미술과 의상은 그 자체로 페드로의 언어다. 페드로의 드높은 미적 감각은 배우를 즐겁게 한다. 페드로는 내가 녹색 터틀넥을 입으면 틸다는 푸른 재킷을 입게 했다. 이미 그 대비만으로 멋진 구도인데 카메라까지 켜지자 ‘세상에, 우리가 페드로의 세계로 들어왔어! 우리가 페드로의 머릿속에 있어!’라는 느낌을 받았다. 페드로의 세계는 마법 같고 또 동화 같다. 우리의 눈이 회색빛으로 일상을 본다면, 페드로의 눈은 총천연색의 테크니컬러로 세상을 감각한다. 그 세계 안에 발을 디디는 순간 새로운 눈이 열리고, 말초적이라 오히려 인간적인 감정이 내 깊은 뿌리를 자극한다. 관객이 페드로의 영화에 느끼는 반응과 비슷하다. 일상의 삶과 거리를 두는 상상적인 세계가 펼쳐지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의 근원만은 관객의 마음에 특별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가닿듯 말이다.
줄리안 무어의 씨네 21 인터뷰 중
다양한 예술가와 작품을 언급하며 은유적으로 사용한 점도 흥미롭다. 에드워드 호퍼의 1960 작 <People In The Sun> 도 그중 하나이다. 도시 속 인간의 고독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이미 오래전부터 영화 속에서 오마주 되어왔다. 대표적으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들이 그 예이다. <룸 넥스트 도어> 에서는 마사와 잉그리드가 함께 떠난 숙소에서 해당 작품의 모작이 걸려있는 것으로 직접 언급된다. 또한 의자에 기대어 같은 방향의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같은 구조로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오마주 하였다. 영화 속에서는 숙소 테라스의 선베드로 표현하였으며 왼쪽에는 집이 오른쪽에는 자연이 위치한 것도 동일하다.
영화에서 선베드는 자주 비춰지며 상징적인 장소로 사용된다. 마사는 이 장소를 아름답다고 표현하며 마음에 들어 한다. 같이 외출할까 하고 묻는 잉그리드에게 마사가 좀 더 여기에 있고 싶다고 하는 장면도, 닫힌 문을 보고 마사가 죽었다고 생각한 잉그리드가 무너지는 장면도, 끝내 마사가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도, 그리고 마사와 똑닮은 딸 미셸(틸다 스윈튼)과 잉그리드가 누워있는 위로 눈이 내리는 엔딩 장면도 모두 이 테라스의 선베드에서 이뤄진다. 같은 장소에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는 인물들을 통해 결국에 동시대에 살고 같은 것을 겪더라도, 탄생과 죽음이 고유하듯이, 인간은 개별적으로 고유하며 각자의 자아로 다른 선택을 하는 존재라는 걸 체감했다. 그러니 인간이 느끼는 필연적인 외로움이 안쓰럽다가도 숭고하게 느껴졌다.
삶은 임시적이고 끝은 반드시 온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끝'의 존재가 그저 사실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마사의 질병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기후 위기에 대한 언급도 감독이 다루는 종말 중 일부이다. 가장 먼저는 대기 오염으로 인한 뉴욕의 분홍색 눈이 그 예이다. 본격적으로는 마사와 잉그리드가 오래전 만났던 애인이자, 환경 전문가인 데미언은 통해 이야기한다. 그는 악화되는 기후 위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도,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할 거라는 기대도 없는 회의론자이다. 아들 부부의 출산에 화를 낼 정도이다. 페드로 감독은 데미언의 입을 빌려 진지하게 기후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설명한다. 그 또한 우리가 지금 혀끝에 있지 않아 외면할 뿐인 또 하나의 종말이다.
희망이 없는 게 아니야.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잉그리드 대사 중
비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내러티브를 환기시키는 건 바로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라는 인물이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잉그리드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삶의 대척점에 두며 '생명의 적'으로 여겼던 잉그리드는 결국 마지막 순간 옆방에 함께 있어 달라는 마사의 제안을 수락한다. 갑자기 두려움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소중한 무언가를 앗아가고 상실은 숨 막히게 아프지만 삶이 일시적이며 끝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마사의 선택을 존중한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제각기 종말을 준비하는데, 그중 잉그리드의 태도만 다른 점이 인상깊다. 비관적인 미래에 대해 말하는 데미언에게 잉그리드는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마사의 선택에도 용기를 내어 기꺼이 손을 잡아준다. 부모와 손절한 채 살아온 미셸에게는 엄마인 마사를 용서할 수 있는 다리이자 숨구멍 역할을 해준다. 끝을 잘 준비하는 것만큼, 삶에 충실한 것도 중요하기에 잉그리드는 최선을 다한다.
페드로 감독은 <룸 넥스트 도어>를 만들기 한참 전, 살아있는 무언가가 (특히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 인터뷰를 보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잉그리드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변화하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회의적인 다른 인물들을 강인한 따뜻함으로 포용하는 잉그리드는 감독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아닐까. 종말이라는 비극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몇 번이고 무너지고 쓰러지지만, 결코 비극에 휩쓸리거나 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강한 사람 말이다.
안락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러기지 의견과 논란이 많다. 영화 하나만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도 아니다. 극 중 주인공인 마사는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하기에 영화는 존엄사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난 이 모든 서사 속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부분에 더 집중하고 싶다. 영화 중간에 소설 <죽은 사람들>의 구절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글 맨 처음을 그 구절로 시작했다. 영화 마지막은 그를 인용한 잉그리드의 대사로 끝이 난다.
- 눈이 내린다.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나와 네 딸 위로.
마사의 죽은 자리에 앉은 마사와 똑같이 생긴 딸 미셸 위로, 함께 걷던 숲속 위로 내리는 눈처럼 죽음은 평범한 삶 곳곳에서 언제나 존재한다. 오늘도 누군가의 옆집에서는 생명이 죽고, 같은 날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죽은 자의 온기가 남은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규칙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배운다. 언젠가 또다시 상실의 고통에 잠식되는 날이 오더라도 맘껏 슬퍼하고 그리워하지만서도 힘차게 살아가고 싶다. 오랜만에 힘을 잔뜩 주어 긴 글을 적었다. 끝에 대해, 상실에 대해 어떻게 하면 의연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에게 인상적인 영화였다. 아름다운 페드로의 연출에 그리고 틸다 스윈튼, 줄리안 무어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에 박수를 보낸다.
[참고자료]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0627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4/10/25/FZTF4Z5KOFHGPJXTXPADTMHJII/
영화 <죽은 사람들> 2004
드라마 <언내추럴>
https://www.m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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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을 향한 발걸음
글은 영화, 소설 [파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과]를 읽었는데 [파쇄]를 안 읽었다? 읽고 오십시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보통 소설을 원작으로 한 제2 창작물이 만들어질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정말 충직하게 원작을 따른 사실주의 그림처럼 되거나, 내가 분노하다 못해 매번 거론하는 [나는 전설이다]처럼 완전히 다른 작품과 색깔로 피카소식 해석을 하거나. 그리고 그 어디에의 중간에 걸쳐져서 감독이 모자이크처럼 여기서 저기서 조금씩 떼어 붙이거나. 그러나 세 가지 방법 중 어떤 특별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영화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원작을 어떻게 그리느냐. 혹은 원작에서 관객들이 원하는 것을 얼마나 살리느냐. 에 제2 창작물의 승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파과]가 선택한 방법은 마지막 방법이었다. 작품의 전반부는 원작의 서사를 잘 압축하고 적절하게 베어 넣어 배치했으며,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소설의 분위기도 눈앞에서 안개처럼 펼쳐진다. 물론 거기에도 변주라고 할 법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슬릴 정도의 큰 프레임의 이동은 없으며, 그 변화로 인해 주요 메시지가 숨거나 해석되지 않게 가면을 쓴 채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나마 사람에 가까웠던 이름인 [손톱]이었던 시절이건, 이젠 짐승만도 못한 인간에 가까워 보일 이름인 [조각]으로 살고 있는 지금이건. 그녀는 여전히 한쪽 마음에는 깊은 상실을, 그리고 발걸음에는 우울한 쇠퇴함을 잔뜩 묻힌 채 목표물을 향한 관심도, 시선도 거두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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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주라고 부를 법한 감독의 모자이크는 후반부 1/3 지점부터에 포진되어 있는데. 여기서 아마도 이 영화의 승패 까지는 아니더라도 선호도 정도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원작의 시점은 철저하게 그녀의 시점에서 풀이되고 있다. 그녀의 독백(방백이려나)을 따라가다 보면 으스러지는 것은 그녀의 타깃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마음마저도 함께 조각조각 찢어져 나부끼게 된다. 그러나 영화가 원작과 노선을 달리 하는 그 순간에는 “늙고 쓸모없는”과 ”상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전설의 위대함”, 그리고 “관계”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
덕분에 책에서는 그다지 강조되지도, 그렇다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액션 장면들이 으스대며 들어설 자리가 생기고, 지나가기 바빴던 인물들도 한 번씩 고개를 돌려 관객들과 눈을 맞출 시간이 생긴다. 또한 자신을 생의 마지막 1분이 남은 시점에서야 알아보고 투정을 부리는 듯한 투우(김성철)의 모습을 보면서. 이 두 사람 간의 애증에 대해 좀 더 느낄 수 있도록 여운을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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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치 구전설화처럼 전해지던 그녀의 위용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순간은. 독백을 고집했던, 혹은 그녀의 시각으로만 해석되던 전반부의 장면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후반부에 갑자기 강조된 투우의 시점 덕에 그녀에게만 향하던 집중력이 조금 흩어진다고 느꼈다. 그리고 [파쇄]에서 따온 듯한 킬러양성 법칙 101의 마지막 단계(?)는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아 삼켜 내는 것이 조금은 껄끄러웠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은 손톱이자 조각이며, 누구에겐 더 이상 만들지 않아야 할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대모님이 되어버린 그녀. 이혜영에 의해 완벽하게 정리된다. 눅눅하기 그지없는 영화 속에서 날이 바짝 선 칼 같은 예리함으로. 바스러질 것만 같은 육신으로도 냉담하게 일을 해내는 원작 속의 조각을 정말 눈앞에 가져다 놓다 못해 애초에 이 업계(?)에서 한평생을 산 것만 같은 모습인 그녀 덕에 말이다.
그녀는 영화에서 톡톡 튀어나온 부분을 친절히 잘라내고 얇게 저미고 천천히 갈아 내게 내밀었고. 나는 가루약을 받아 든 어린 투우가 되어 고개 한 번 끄덕인 채 쓴 약을 꼴깍꼴깍 삼켜낼 수 있었다. 그녀가 이제 곧 사탕을 줄 거야.라는 기대와 함께.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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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딧이 이렇게 반가우면서도 아쉬울 일인가 싶었다. 이 생각과 함께 찾아온 안도와 동시에 배어 나온 깊은 한숨은, 마치 영화 내내 긴장하고 있던 나의 모든 신경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는 토닥임처럼 다가왔다.
영화의 본체가 되는 소설 [파과]와 함께 스핀오프 같은 소설 [파쇄]까지 일 하는 척하면서 단번에 읽어 내려갔던 이후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기쁘면서도, [원작 잘 살리기] 위원회(같은 게 있다면) 상무(자리 정도는 차지했을 나 같은 인간)인 나에게는 마치 조각 그녀가 지니고 다니는 비녀의 날 끝처럼 나를 쿡쿡 쑤셔댔다. 고통이라 불러야 할지. 희열이라 느껴야 할지. 조각(이혜영) 그녀가 류(김무열)에게 품었던 마음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아슬아슬함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영화를 기대하기도. 그러면서도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가 가져다준 만족감은 소설 말미에 조각이 느꼈을 해방감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감정과 제법 닮아 있었기에, 새로운 시작 앞에 당도하고 나서야 내보인 킬러 조각의 뒷모습에 대고 슬며시 웃을 수 있었다.
킬러의 뒷모습이 이렇게 반가워서 될 일인가 싶지만. 바뀐 그녀의 마음 때문에 기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매번 상실을 안겨야 할 상대의 모습만을 바라보던 그녀는. 등을 돌려 자신이 상실해 온 것을 향해 달려가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일 테니까. 스스로에게는 어쩌면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했을 부분을 대담하게 드러낸 그녀가 더 강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용이 너무 귀여워(?)
[이 글의 TMI]
1. 인간적으로 빵 어떻게 끊는지 아시는 분?
2. 인바디 체중계 산 뒤로 매일이 충격의 연속임.
3. 오예 연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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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스토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1984년 4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첫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1985년까지 짧은 시간에 무려 열세 명을 살해했으며, 수십 건의 폭행, 강도, 강간 범죄를 저지른 범죄가 발생했다. LA경찰은 처음 살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몇 건의 살인사건이 더 발생할 때까지 이들 살인 범죄가 연쇄살인이라고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완 형사 프랭크와 신참 형사 길버트가 이 사건을 맡아 수사를 시작했다. 범인이 미쳐 날뛸 때는 열흘 사이에 다섯 건의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범인은 매우 주도면밀해서 지문을 포함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발자국은 어쩔 수 없었다.
생존자가 증언한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몽타쥬를 그리고, 범행 장소에서 발견한 여러 개의 족적을 확인하면서 범인이 신은 신발이 매우 특이한 신발이라는 걸 밝혀냈다. 그 신발은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유명 메이커는 아니었고,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회사에서 만든 제품으로, 모두 여섯 켤레가 대만에서 미국으로 들어왔고, 다섯 켤레는 다른 지역으로, 오직 한 켤레만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따라서 그 신발은 신은 사람이 범인인 것은 확실했다.
범인은 키가 약 180센티미터, 백인 또는 밝은색 피부의 남미 계열 사람이며, 신발 크기는 295밀리미터였다. 경찰은 비밀수사에서 공개수사로 전술을 바꾸고, 범인에 관한 정보를 미디어를 통해 공개했다. 한번은 가장 핵심 증거인 신발에 관한 내용은 빼고 언론에 알렸으며, 두번째는 LA시장이 직접 범인의 정보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형사들이 알고 있던 모든 정보를 공개했다.
수사를 하고 있던 형사들은 시장이 언론을 통해 말한 정보로 인해 범인이 자취를 감출 것이고, 수사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경찰에게 퍽 운이 좋았던 상황이었다. LA시장이 생방송으로 범인의 정보를 언론 앞에서 알리고 있을 때, 범인은 LA를 떠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형을 만나러 갔고, 그 다음 날,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다시 LA로 돌아온다.
단 하루 사이였지만, 모든 신문, 방송에서 범인의 얼굴 사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고, 거리에서, 버스에서 시민들은 범인 리처드 라미레스를 알아보고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결국 범인은 도주에 실패하고,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린치를 당해 쓰러지고, 나중에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잡혀 경찰서로 이송된다.
범인 리처드 라미레스는 1985년에 체포되지만, 정식 재판은 1989년에 하게 되고, 그에게 적용된 43건의 사건이 모두 유죄로 선고되면서 리처드 라미레스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2013년 병원에서 암으로 자연사하는데, 그가 저지른 범죄에 비하면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리처드 라미네스는 1960년 생으로 멕시코인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우하고 불행한 환경에 둘러싸여 자랐다. 그를 둘러싼 부모, 친척들 모두 폭력적이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었으며, 마약,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봤다고 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체포되고, 경찰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드러내지 않았다. 즉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의아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가 체포되어 대중과 언론 앞에 나서는 장면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의식하고,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장면을 제외하고, 리처드 라미네스가 재판을 받는 장면을 보면,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수치심이 사라진 인간으로, 싸이코패스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인간의 외피를 한 '다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표현이 비과학적이라는 건 알지만,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과학적 입장으로 보자면, 리처드 라미레스 같은 인간이 나오는 것 역시 사회가 한 '개인'에게 그런 영향을 끼친 것이고, 인간은 주위 환경의 영향을 직접 받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개인'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살았느냐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2009년, 미국의 '라이프'는 '세계의 살인마 31인'을 발표했다. 이 목록에 당연히 '나이트 스토커'인 리처드 마리레스도 있다. 이 목록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마들의 범죄를 보면, 오히려 리처드 라미레스의 악행은 밑바닥에 있을 정도로 끔찍한 살인귀들이 많다.
한국에서도 유영철, 이춘재 같은 연쇄살인범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가정환경이 매우 불행하고 불우했다는 것이다. 가정환경이 불우하다고 모두 연쇄살인범이나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니, 이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성장 환경과 과정이 개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린이 한 명을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함께 한다는 말은 과거의 공동체가 존재했을 때,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며 살았음을 의미하는 말인데, 오늘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개인'을 내세우며, 개인들의 연대와 협동을 구조적으로 파괴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주인인 자본가들이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범죄를 단지 개인의 성향, 일탈, 인성과 같은 비과학적 분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적 역학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사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고, 개인의 삶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여기에 '개인' 고유의 특성이 결합하게 되는 것이고, 극악한 범죄자들은 이런 '개인의 특성'이 그의 사회적 성장 배경과 결합해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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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리뷰 후기입니다.영상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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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c1WjG...
https://www.youtube.com/watch?v=VbjW9...
음악 출처
Kevin MacLeod의 Heartwarming은(는)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라이선스(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 따라 라이선스가 부여됩니다.
출처: http://incompetech.com/music/royalty-...
아티스트: http://incompete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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