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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erer2024-04-14 19:11:27

일을 향한 외사랑

영화 <거미집> 리뷰

재능은 일상적으로는 천부적이고 타고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의미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노력 또한 재능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사전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더불어 훈련된 능력'을 아울러 재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 타고난 재주만으로는 재능을 묘사하기에 부족하다. 어떤 노력이 뒷받침되고 있는지도 추가로 설명해야 한다. 타고난 재주가 전부가 아니니 재능에는 정도가 없다.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속도의 문제가 된다. 설정한 목표를 얼마나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타고난 재주와 성실한 노력은 목표를 등반하는 두 가지 도구다. 그렇지만 대부분 노력은 줄이고 타고난 재주로 등반하고 싶어 하기에 골치가 아프기 시작한다. 재주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노력은 의식적인 행동의 결과니까.

 재주이건 노력이건 중요한 건 믿음이다. 믿음이 추진력이 된다. 목표로 질주해 나가는 힘은 믿음이다. 특별히 수치화할 수는 없어도 자신을 믿는 힘이 필요하다. 운동처럼 눈에 보이게끔 드러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력한 경과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힘을 쏟아야 하는 재주와 노력의 총량을 가늠해 보면서 시간을 가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지를 대략적으로 고민하며 선택을 내리게 된다. 재능을 포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재능을 포기한다는 건 그 일을 버리는 일이다. 미지의 시도를 감내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거미집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극 중에서 만드는 영화의 이름 또한 '거미집'이다. 엄청난 데뷔작을 촬영하고 나서 그저 그런 영화만 만들어오던 감독 김열은 촬영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꿈에서 현재 촬영하는 작품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크게 바꿀 필요도 없다. 결말만 조금 바꾸면 3류 영화가 명작이 될 수 있다. 감독은 바뀐 결말로 자신이 다시금 올라설 수 있음을 믿는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영화의 촬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를 비워야 하다 보니 시간이 없다. 가뜩이나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건 검열이다. 영화의 내용을 검열받던 시절이다 보니 바꾼 결말 또한 허가를 받아야 촬영할 수 있다.



 감독은 여주인공 캐릭터를 바꿔서 순종적인 인물에서 주체적인 인물상으로 새롭게 그려내려고 한다.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닌 신여성으로. 당대에 보기 어려운 그러한 새로운 인물로 묘사하려고 한다. 물론, 캐릭터를 바꾸는데 결말만 살짝 바꾼다고 될 일은 아니다. 당연히 인물의 성격이 설득력을 갖춰야 하니 극의 전개 과정을 꽤 많이 바꿔야 했다. 정작 배우들은 바뀐 내용이나 바뀌기 전이나 별다른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는 데에도 말이다. 감독은 자신의 커리어를 반전시킬 수 있는 한 번의 거대한 선택을 꿈꾸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회의적이다. 평론가나 함께 일하는 배우들 모두 그랬다. 캐릭터를 바꾼다고 해서 근간인 치정극에서 뭐가 크게 달라지겠는가.

 영화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영화 안에서는 감독이 OK 사인을 내리기 전에는 무엇도 넘어갈 수 없다. 영화 밖에서는 감독이 사인을 기다려야 한다. 검열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허가받지 않은 것들 뿐이다. 정해진 틀 안에서 최대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 처지가 역전되는 상황이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나오는 게 흥미로웠다. 문공부 직원, 영화 제작사 대표, 주연 배우가 번갈아가면서 권한을 쥐고 흔든다. 흔들리는 건 감독 또한 마찬가지다. 작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배우들의 불신을 잠재우면서 제작사, 문공부의 검열과 제재를 피할 방도를 구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시선을 정리해야 했다. 한쪽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끔, 다른 한쪽은 시선을 돌려 다른 쪽을 보게끔 말이다.


 누군가 내가 가진 능력을 낱낱이 해부해서 까발릴 것 같다는 상상. 쉼 없이 달리다가 이따금 일을 한다는 사실이 낯선 감각으로 느껴질 때 그런 생각을 한다. 무의식으로 내려앉은 과정이 이따금 생소하게 다가오는 순간들. 의식적으로 숨 쉬는 것처럼 말이다. 감독이 처한 위치 또한 이런 형국이지 않았을까? 자신감으로만 밀어붙이기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만들어져야 하니까. 갈등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각자의 재능으로 분주하다. 어그러지려면 수도 없이 많은 이유로 중단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떠올려서 결과물을 향해 다가간다.


 믿음을 힘으로 쓰면 일종의 광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동일하다. 영화 전반에 짙게 깔려있는 쌉싸름한 유머 코드는  형태를 다시금 고민해 보게 만든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가짜 일과 진짜 일을 구분해보기도 하고, 일의 경지를 추동하는 수고로움을 짚어보게 되기도 한다. 치정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무엇일까? 남녀 간의 사랑에서 성별 구분을 지우고, 존재와 무존재의 구분을 지우는 식으로 나아가면 궁극적으로는 무엇이 남을까? 자신까지 삼켜 먹어버릴지도 모른다. 일을 향한 열의 또한 사랑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일을 처절하기 그지없는 외사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게끔 만든다.


   사진 출처 : TMDB '거미집'

작성자 . wanderer

출처 . https://brunch.co.kr/@nkt109/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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