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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oDAY2021-03-17 00:00:00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신중하고 확실한 디즈니의 변화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리뷰

인간과 드래곤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신비의 땅, 쿠만드라 왕국. 어느 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삼키는 악의 세력 '드룬'이 모습을 드러내자 드래곤들은 인간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힘을 하나의 보석에 남긴 채 스스로를 희생한다. 그러나 드래곤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드래곤의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분열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500년 후 보석의 수호자인 '벤자(대니얼 대 킴)' 족장은 분열된 쿠만드라를 하나로 통합하려 하지만 '비라나(산드라 오)'를 비롯한 다른 족장들에게 배신당하고, 부활한 드룬은 또다시 세상을 공포에 빠뜨린다. 이에 보석의 마지막 수호자인 '라야(켈리 마리 트란)'는 라이벌 '나마리(젬만 찬)'의 방해를 뚫고 쿠만드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전설 속 마지막 드래곤 '시수(아코피나)'를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디즈니의 새로운 애니메이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을 향한 우려의 시선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로빈슨 가족>을 시작으로 <겨울왕국 2>에 이르기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끈 총괄 제작자 존 라세터가 성추행 사건으로 스튜디오를 떠난 뒤 제작된 첫 작품이라는 점은 완성도에 대한 의구심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또한 비록 애니메이션 작품은 아니지만 작년에 공개된 <뮬란> 실사영화가 숱한 논란을 낳으며 중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의 몰이해와 정치적 올바름을 대하는 디즈니의 위선을 드러냈던 기억은 동남아시아 문화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에 대한 걱정을 부추겼다. 그러나 <겨울왕국> 시리즈의 감독인 제니퍼 리의 총지휘 아래서 제작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모든 의심과 걱정이 기우였음을 확인해 주었다.

 

 

우선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다소 보수적인 자세로 총책임자가 교체된 여파를 최소화한다. 그러다 보니 이 작품으로부터 <주토피아> 같은 새롭고 재기 발랄한 이야기나 전개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첫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영화는 예상한 그대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주인공이 모종의 이유로 집을 떠나 새로운 친구와 동료들을 만나고, 가슴 아픈 이별 안에서 절망하지만, 그 과정에서 세상을 바꾸거나 구할 깨달음을 얻고 한 단계 성숙해지는 영웅 서사, 영웅 신화의 구조를 그대로 취한다. 그래서 라야의 여정이 세상을 향한 신뢰와 희망의 가치와 필요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이에 더해 마찬가지로 안전한 볼거리와 캐릭터도 검증된 서사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동원된다. 예를 들어 라야와 그 일행들이 새로운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귀여움과 웃음을 유발하며 문제를 해결해주는 원숭이들의 역할은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에서 예상치 못한 활약을 펼치는 보우트러클과 니플러의 역할과 같다. 라야와 그녀의 친구들이 서로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회복하는 장면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주인공들이 한 팀으로 거듭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해당 장면의 배경이 전체적으로 보랏빛을 띤다는 점도 한몫한다. 캐릭터들의 경우 <겨울왕국> 속 등장인물들의 의상만 동남아시아 풍으로 바꾼 것과 다르지 않다. 어릴 적 친했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어색해지는 안나와 엘사의 관계는 라야와 미나라의 관계에서 반복되며, 유머를 선사하는 라야 일행의 뒤에는 한스와 크리스토퍼, 올라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반면에 동남아시아 문화를 재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사실 중국, 한국, 일본의 문화를 한 데 뭉뚱그려 동아시아 문화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동남아시아를 한 범주로 묶는 작업은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당장 베트남의 경우 중국에 맞서 약 천 년간 독립과 굴복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자 및 유교 문화권 안에 녹아들었지만, 그 인접 국가인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만 하더라도 힌두교나 불교 문화권에 속하는 것이 그 예시다. 심지어 섬나라인 인도네시아는 인구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고,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의 영향으로 가톨릭 문화권에 속한다. 

 

하지만 영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난제를 해결한다. 하나는 공간적 배경의 설정이다. 작중 주 무대가 되는 가상의 대륙 쿠만드라는 드래곤 모양의 길고 거대한 강이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는데, 이는 메콩 강이 관통하고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형적 특성을 변형시킨 형태다. 다섯 국가가 강을 둘러싸고 위치한 것 역시 메콩 강 유역이 미얀마, 라오스,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에 걸쳐 퍼져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지역 특색을 동남아시아 혹은 쿠만드라라는 한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한결 자연스럽다. 더 나아가 현실을 닮은 공간의 구체적인 특성은 보편적인 서사 구조의 무색무취함에 특색을 더한다. 이는 작중 등장하는 계단식 논, 수중 가옥, 볶음밥이나 쌀국수, 동남아시아 지역 특유의 검이나 무기인 올리시(olisi) 등을 이용한 액션 등이 단순한 수박 겉핥기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다른 하나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토리의 중심 소재이자 주체인 드래곤의 존재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시수를 비롯한 드래곤이 흔한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드래곤에 비해 뱀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비를 내리거나 안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작중 드래곤이 주로 강에서 서식하며 모습을 바꾸거나 비를 내린다고 알려진 '나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가는 힌두교의 대표 경전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비롯한 다양한 경전에서 등장하는 뱀신이며,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수호신으로도 등장한다. 메콩 강에서 나가가 불을 뿜으면 수면 위로 불이 솟아오른다는 설화가 남아있을 정도로 캄보디아와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뱀신으로 숭배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가를 닮은 드래곤이 인도차이나 반도와 메콩 강과 비슷한 땅을 구한다는 전개는 적절한 대표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동남아시아 공통의 지형적 특성과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문화적 인자를 변용한 결과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종교와 문화적 차이도 거뜬히 뛰어넘는다.

 

 

이때 메콩 강과 나가를 변용한 선택이 동남아시아의 현재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평범한 듯 보이는 애니메이션에 깊이를 더해준다. 드룬과 처절하게 싸우던 드래곤은 자신들의 힘을 담은 보석 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드래곤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던 인간들은 공생하거나 쿠만드라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야와 나마리처럼 하나 남은 드래곤의 보석을 독점하려는 이기심과 불신에 사로잡힌 채 메말라 가는 땅에서 드룬에 의해 죽어간다.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드래곤들의 선택도 그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그들은 "가뭄은 지구의 죽음이다"라고 쓴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의 표현을 충실히 따라간다. 

 

이러한 드래곤과 강의 소멸은 하류 지역의 풍족한 토양과 수백 종의 어종을 통해 수천만 명의 생명줄이었던 메콩 강이 메말라 가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201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메콩 강을 둘러싸고 앞서 이야기한 다섯 국가와 중국은 물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중국이 메콩 강 상류에 샤오완 댐 등을 건설하자 유량이 크게 줄고, 그 결과 농업용수와 생활용수가 줄어들며 농업과 어업 등에 영향을 미치는 등 피해가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메콩 강 유역 국가들은 정상회의를 열어 왔으나 양측의 이해관계 차이로 인해 아직까지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 덕분에 신뢰와 배려심을 강조하는 영화의 새로울 것 없는 메시지는 각 족장이 모인 자리에서 각기 용의 보석을 탐낼 뿐 공생할 길을 찾지 않는 초반부 장면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무게감을 갖는다.

 

 

비록 코로나 시국이라고 해도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유달리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개봉일이 하루 빨랐던 <미나리>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모두 빼앗겼고, 북미에서도 전주에 개봉한 <톰과 제리>보다 적은 첫 주말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성공한 작품을 벤치마킹한 결과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준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의의를 고려할 때 온당치 못한 대우로 보인다. 단지 주인공, 조력자, 악역 등 주요한 캐릭터가 모두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이 작품은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재해석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남은 영화이고, 정치적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한층 성숙해진 태도를 볼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왜 여전히 디즈니라는 이름에 주목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납득시킨다. 

 

 

A(Acceptable, 무난함)

무색무취의 스토리를 아름답게 색칠하는 다양성을 향한 디즈니의 진지한 고민

작성자 . KinoDAY

출처 . https://brunch.co.kr/@potter11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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