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크렁2022-12-19 01:02:16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영화 <지옥의 화원, 2021> 리뷰
어렸을 적, 세상의 중심은 나였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건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매번 뽑히던 반장 선거에서 탈락했고, 성적은 예상만큼 좋지 않았으며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학교 시절 처음으로 D라는 성적을 손에 받아 들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마음 깊이 깨달았다. 아, 나는 정말로 별거 아닌 존재였구나. 내가 죽어도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 잘 돌아가겠구나. 그 사실을 고작 나쁜 성적으로 깨달았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웃긴 일이다.
영화 <지옥의 화원, 2021>은 액션 코미디 장르로, 싸움 실력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대양아치의 시대에 최강의 자리를 노리는 오에루(OL, Office Lady)들의 세력 다툼이 주된 줄거리이다.
이 영화는 관람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아무렇지 않게 관객들을 그들의 세계관으로 멱살 잡고 데려가기 때문에 줄거리 요약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영화관을 뛰쳐나가거나. 관객에게는 두 개의 선택이 있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양아치, 오에루
오로지 힘과 싸움 능력만으로 승부하고 서열이 정해지는 양아치의 세계, 그리고 동일한 유니폼과 구두를 신은 여직원, 오에루. 이 조합이 매우 낯설고 신선하다. 싸우는 모습에서 살짝 쾌감도 느꼈고, 영화를 보고 나서는 싸움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성 액션물이 필요하다. 개인사업자도 언제나 싸우고 싶습니다.
심지어 여직원들은 싸움 대결 후에는 착실히 복사도 하고, 커피도 타고, 얼굴과 온몸에 반창고를 붙이고는 일을 열심히 한다. 양아치도 먹고 살아야 하긴 하니까 그런가보다. 뒤에서 싸우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빼먹는다던가, 밖에서는 소란스럽게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점심을 먹는다든가 하는 영화 특유의 코미디가 웃음을 자아낸다.
#2. 우리의 정의로운 만화 주인공, 호조 란
주인공 나오코(나가노 메이)의 나레이션으로 우리는 이 영화가 학원 액션 만화들의 설정을 많이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후반부에 등장하는 나오코의 방에는 이 영화에서 언뜻언뜻 떠오르는 만화들이 대놓고 등장하기도 한다.
회사에 새로 입사한 호조 란(히로세 아리스)은 싸움의 절대 강자로, 우리가 아는 만화 속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한다. 길거리에서 불량한 양아치를 혼내주고, 혼란스럽던 사내 질서를 실력으로 단칼에 정리하고, 양아치 세계와 접점이 전혀 없는 나오코와 절친한 친구가 된다.
그녀의 실력이 소문나게 되면서 주변에서 싸움 좀 한다고 하는 양아치들이 도전장을 들고 찾아오고, 그마저 호조 란에게는 너무나 쉬운 상대일 뿐이다.
그런데 나오코가 인질로 끌려가게 되면서, 스토리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 우리의 히로인이던 호조 란이 싸움에서 진 것이다.
#3. 나오코의 각성
호조 란이 기절하고 난 뒤, 나오코는 당황한다. 물론 나도 나오코 못지않게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란이 최강자 아니었어? 만화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힘들어하다가도 결국 일어나서 이겨야 하는 거 아니야? 라며 눈동자를 있는 힘껏 굴리고 있는 순간, 이 영화의 진짜 최강자가 등장한다.
(놀랍지 않게도) 나오코다. 그녀는 싸움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능력을 숨기고 있었던 우리의 진짜 주인공이었다. 압도적인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타고난 재능으로 너무나도 쉽게 일대를 평정하고, 지상 최강의 여직원이 된다.
#4. 이 세계의 주인공
나오코가 싸우는 동안 사실 깨어났던 호조 란은 도망친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님을. 싸우는 게 좋았고, 어렸을 적부터 싸움을 잘했으며, 주인공 특유의 정의로운 성격까지 갖추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결코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매우 힘들다.
사부인 '최초의 여직원'을 찾아가 수련을 마치고 나오코에게 정식으로 도전해보지만, 주인공은 이길 수 없다. 나는 내심 란이 이기길 바랬지만, 란도 나도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나오코다. 재능은 노력으로 이길 수 없다. 나는 살짝 슬펐다.
#5. 그리고, 다른 세계의 엔딩
나오코와의 결투에서 패배한 호조 란은 서럽게 울지만, 갑자기 남직원이 등장한다. 그는 나오코를 포함한 많은 여직원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남직원으로 영화 중간에 약 2초간 등장했던, 존재감이 크지 않은 등장 인물이다. 울고 있는 란에게 그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뜬금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저 상황에서 나만 웃긴지, 저들은 꽤 진지해서 더 웃음이 났다.
호조 란과 남직원이 껴안는 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히 혼자 걸어가는 나오코의 모습 위로 '완패'라는 단어가 띄워지며 영화가 끝난다.
싸움의 세계에서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호조 란은 알고 보니 인기남과 이루어지는 로맨스 장르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세계의 주인공이다.
<지옥의 화원>을 보고 나서 나의 장르는 무엇일까, 잠깐 고민했다.
살다 보면 가끔씩 좌절감이 밀려올 때가 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과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은 기분에, 내가 너무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들.
그런데 나의 장르가 가족 영화라면?
나에게는 걱정해주는 부모님이 있고, 우리는 가끔 다투기도 하고 서로 서운할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웃으면서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이 세계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닐까?
내가 주인공이 아닌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지상 최강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나오코가 아니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해도 된다.
다른 장르 어딘가에서 나는 분명 주인공이니까.
*본 리뷰는 씨네랩의 크리에이터 시사회에 참석하여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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