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0932022-12-31 15:39:26
감성추적 시간여행 영화 시간이탈자
영화 <시간이탈자> 줄거리,결말
시간 여행 그런 영화 좋아하시나요?! 과거로 간다면?! 무엇을 하시겠어요?! 로또를 산다?, 주식을 산다? 등등 많이 있겠지만, 누군가는 순양을 산다고.. 아.. 아무튼!
영화 시간이탈자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과거를 바꾸기 위해 시간 여행을 떠나며 벌어지는 이야기 입니다.
이번에 가지고 온 영화 시간이탈자는 사랑하는 연인을 살리기 위해 펼쳐지는 시간 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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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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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 공포영화? 이별영화?
사교(邪教)를 통해 보여준 예술과 종교의 존재에 대한 사유
눈부시게 아름다울수록 공포와 두려움은 커지고 기이한 오컬트 속에서 왠지 모를 위로가 느껴진다. 개봉 전부터 로튼 토마토에서 고득점을 하며 많은 관심을 받은 아리 애스터 감독의 작품이다. 전작 <유전>과 <미드소마> 모두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지만 <미드소마>는 <유전>과 달리 주인공을 불안과 어둠으로 둘러싸인 한 가정에서 개인으로 옮겨 귀신이나 신이나 초자연적 현상과 같은 요소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보여주며 화려하고 이색적인 풍경에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기이함에 놓여 방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영화이다. 전작 <유전>으로도 큰 호응을 얻은 것도 한몫했겠지만, <미드소마>가 로튼 토마토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데에는 수많은 걸작의 탄탄한 레퍼런스와 실제 연출을 위한 감독의 섬세한 연구 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미드소마>는 감독이 연인과 싸우고 쓴 각본으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영화에서 연인의 관계, 결혼, 이별, 이혼 들을 통한 의존적 관계에 대해 고심한 감독의 노력이 다방면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국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의 팬임을 밝히고 할리우드판 리메이크 작의 제작까지 참여 예정인 아리 애스터는 이 외에도 다수의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이미 여러 번 인터뷰에서 밝혔다. 시나리오 레퍼런스로 <결혼의 풍경(1973)>, <결혼과 이혼 사이(1981)>, 미장센 레퍼런스로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1964)>, <석류의 빛깔(1969)>,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2000)> 등 치밀하게 준비한 덕에 1970년대의 <위커맨(1973)>의 뒤를 이을 2019년의 포크 호러작 <미드소마>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이 돋보이는 미장센의 대표적인 예로, 영화의 초반부인 대니의 집의 벽에 걸린 축제를 벌이는 듯한 기이한 그림의 액자 등과 같이 많은 이스터 에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사원이나 제물이 불에 타는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은 감독은 버림받은 주인공이 과거와 연관된 물건들을 태우고 나서야 그 관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처럼, 관계의 파탄을 보여줄 수 있는 전형적인 방식을 차용하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는 대니가 가족을 잃으며 시작하여 새로운 가족(공동체)을 얻으며 끝나는 시나리오와도 맞닿아있다.
아리 애스터의 또 다른 두드러진 연출로는, 다른 대중적인 호러물과는 다르게 ‘일반적인’ 남성 제작가의 시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릴러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부터 다수의 호러물, 스릴러에서 관객의 몰입도와 교감 신경 자극을 위하여 성적 긴장감을 이용하곤 한다. 하지만 <미드소마>의 경우 ‘일반적인’ 성적 긴장감을 조성할만한 요소들이 다수 있으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수동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러한 감독의 시각의 영향으로 감독의 성장 배경 및 개인사를 고려해 볼 수 있는데, 이성애와 권력의 관계를 뒤집어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전 단편작 <The Strange Thing About The Johnsons>에서도 보이듯 동성애와 종교적으로 받은 억압이 감독의 시선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어느 정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종종 삐뚤어진 소망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감독은 관객들이 밝고 화려한 호르가 구성원들의 의식에 함께 빠져들기를 바랐을 것으로 보이지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자 감독이 정말로 전하고자 했던 장면은 바로 대니가 울자 함께 더 크게 울어주는 호르가 구성원들의 장면일 것이다. 주인공 대니가 겪은 어려운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 대니의 상실에 공감해주지 못하는 남자친구와 대니의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지만 울고 있는 대니의 옆에서 함께 울어주는 호르가 구성원들 중 후자를 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또한 주인공을 철저하게 상실로 인한 결핍 속에 배치한 뒤 서서히 권력을 부여하며 주인공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특이한 오컬트 영화로 포장했지만 속은 대니의 이별 영화인 셈이다. 예술이라는 기술이 하는 능력은 소외와 결핍을 공감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가진 또 다른 것이 종교이다. 기이한 행위들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그들의 사이엔 유대가 생기고 공감을 자아내 서로의 결핍을 채워준다. 따라서 영화라는 예술을 이용하여 종교의 능력을 보여준 것 자체가 예술로써의 역할까지 완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과 종교가 사회에서 유지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사유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장센적인 측면에서, 장르적 특성에서, 컬트 영화사의 한 작품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 작품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대니와 함께 울어주는 호르가 구성원들의 장면이다. 다양한 흥미로운 요소들로 꾸며진, 속은 제대로 된 알맹이 덕에 영화는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평을 받을 수 있었다. 단순한 오컬트 영화 이상으로 결핍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를 보여준 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작품에서 보여줄 감독의 시선이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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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스윙 한 스푼, 우리만의 리듬으로
무엇이든 금방 잘 해내면 좋을 텐데, 인생은 왜 늘 좌충우돌이고 우당탕탕일까. 실패와 실수로 낙담하는 이들에게는 응원이 필요하지만, 요즘 세상은 차갑고 매섭다. 완벽한 육각형 인재에게 박수와 찬사가 쏟아질수록 조금 부족한 사람들은 괜히 더 조급해진다. 뒤처진 듯한 공허함은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이런 시대 속에서 20년 만에 재개봉하는 <스윙걸즈>는 재기 발랄 청춘 코미디로 고민 많은 청춘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빛나는 빅 밴드 소녀들의 이야기는 작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우연히 새로운 세계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방학 어느 날, 지루한 수학 보충 수업이 한창이다. 낙제생 중 하나인 토모코는 밴드부를 태운 버스가 떠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공부하기 싫은 토모코는 보충 수업 친구들과 뒤늦게 도착한 도시락을 밴드부에 직접 배달하러 가겠다고 자처한다.
기차를 놓치고 헤매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경기장. 그러나 밴드부는 폭염으로 상한 도시락을 먹고 단체로 식중독에 걸린다. 그리고 보충 수업 아이들이 갑작스러운 밴드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악기를 잡는다. 삐걱거리는 소리 속에서도 점차 연주의 즐거움을 발견하지만, 밴드부가 돌아오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엔, 연주의 기쁨을 잊기엔 너무 아쉽다.
[처음 만난 재미, 이렇게 놓칠 수는 없어]
토모코는 처음엔 애써 모른 척한다. 따지 못하는 신 포도를 올려다보는 여우처럼, 원래 관심 없던 밴드부라고 둘러댄다. 하지만 연주할 때의 짜릿한 성취감이 자꾸만 떠오른다. 공부엔 영 소질이 없었는데, 악기를 잡고 처음으로 '뭔가 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달까.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다. 동생의 게임기를 팔아 중고 악기를 사려 하고, 친구들과 다시 모여 연습을 시작한다. <스윙걸즈>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우연히 음악의 매력에 빠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성적이 낮으면 낙오자 취급받는 현실 속에서, 이들이 연주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은 묘하게 짠하면서도 유쾌하다. 실력이 부족해도 노력하며 스스로 방법을 생각하고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감동을 준다.
[좋아하는 일은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믿는 힘]
낮은 성적에 골칫거리 취급당하던 아이들에게 '빅 밴드' 연주는 신세계였다. 아르바이트해서 악기를 사고, 먼지 쌓인 트럼펫을 불어도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의 빛나는 아낌없이 보여준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졸업해도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을 다녀도 '이게 나한테 맞는 걸까'하고 고민하는 게 현실이다. <스윙걸즈>는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서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이 꼭 지름길처럼 빠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잘못 탄 기차가 때론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빅 밴드 스윙걸즈가 계속될 수 있는 과정에는 뜻밖의 조력자가 있다. 바로 그들의 보충수업을 담당했던 수학 선생님이다. 그는 누구보다 재즈를 사랑하지만 악기 실력은 형편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따로 재즈를 공부하고 아이들이 연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심벌즈만 치며 권태로워하던 나카무라도 마찬가지다. 밴드 탈퇴를 고민하다가 '빅 밴드'를 결성하며 피아노에 빠져든다. 꼭 처음부터 잘하는 것이 아니어도, 흥미를 느끼고 결국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게 된다.
[모든 시작은 한 걸음부터]
한국 사회는 늘 ‘빨리빨리’다. 좋은 대학, 빠른 취업, 안정적인 직장이 정답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적당히 성적을 맞춰 대학 간 아이들은 쉽게 방향을 잃고,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뒤늦게 다른 길을 가려 하면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스윙걸즈>는 그런 고민 많은 청춘들에게 말한다.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일단 해보라고, 좀 부족해도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으라고. 금관 악기의 첫 음을 내기까지는 달리기, 휴지 불기 등 온갖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재즈는 즉흥성이 매력인 음악이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완벽하지 않아도, 한 음 한 음 내다 보면 결국 멋진 연주가 완성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걱정하지 말고 한 걸음부터. 작고 수줍게 처음 악기를 불던 아이들처럼 시작해 보길 바란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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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존하는 삶의 공포를 뒤로한 마지막 인사!
“신세(身世) 지기 싫다!” 나이 들면 자식들이나 손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형식적으로 내뱉는 경우도 있지만, 이 말은 아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시니어들이 가진 공포 중 하나는 바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일 것이다. 더 이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열패감과 두려움은 아래 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어떻게 단정 짓냐고? <소풍>을 보면 안다. 극 중 주인공들은 이 두려움과 싸우며,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 때문. 영화는 신세 지기 싫어하는 노인들의 마지막 몸부림과 그 선택을 따라간다.
요즘 은심(나문희)은 걱정이 많다. 파킨슨병이 날로 심해지고, 현실인지 꿈인지 돌아가신 엄마가 자꾸 눈앞에 보인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해웅(류승수)은 돈 문제로 속을 썩인다. 이때 고향 절친이자 사돈인 금순(김영옥)이 집에 찾아오고, 이들은 오랜만에 고향인 남해로 향한다. 부모의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된 은심은 하나둘씩 이곳의 추억을 음미하던 중, 과거 자신을 짝사랑하던 태호(박근형)를 만난다.
<소풍>은 제목이 갖고 있는 중의적인 의미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 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란 소절처럼, 이들의 고향 나들이는 그 자체로서의 오랜만에 떠나는 소풍이자, 생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소풍이다.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온 후, 노년이 되어서야 누리는 이 소풍의 분위기는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과 즐거움, 따뜻함이 가득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이 부각되는 건 생의 마지막이라는 지점에 있다.
영화는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도 노인이 겪는 신체적 아픔을 즉시 한다. 파킨슨병에 의한 손 떨림은 물론, 허리가 아파 거동 자체를 못하는 모습, 뇌종양 등 질병으로 인한 고충 등을 가감 없이 전한다. 특히 금순이 허리가 아파 움직이지 못하고 소변을 실례하는 장면은 적지 않은 충격을 전한다. 이처럼 노인들의 치부를 전시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들의 아름답고도 행복한 짧은 여행이 곧 마무리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신세 지는 일 없이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삶을 마감하겠다는 이들의 다짐을 굳건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존엄사라는 뜨거운 감자를 수면위로 올려놓은 영화는 윤리적인 잣대가 아닌 당사자들의 고통과 공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감독은 중반부에 은심과 금순의 미래를 보여준다. 자식이 걱정할까봐 병을 숨기고 살아온 친구의 죽음은 은심의 미래를, 요양병원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친구가 죽은 듯 사는 모습은 금순의 미래를 보는 듯하다. 이 장면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노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노인들이 가진 고통과 공포다. 두 친구는 이런 공포에 휘감겨 살다가 가느니, 차라리 존엄을 택한 것. 후반부는 이들의 존엄 투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소 아쉬운 지점은 이 문제의식이 개인만의 문제로 그친다는 점이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노인들이 겪는 다수의 문제를 개인이 감내하고 존엄으로서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각 자체가 이들에게만 국한된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플랜 75>의 경우 고령화 사회 문제를 사회적 시각으로 넓혔던 것에 비해, <소풍>은 그 부분이 다소 약하다. 물론, 은심과 해웅 사이에 빚어진 중산층 가족의 민낯, 리조트 개발 위기에 놓인 시골 마을 등 가족 및 사회로 눈을 돌리긴 했지만, 이 부분마저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구실로만 작용한다. 더불어 특별함 보단 안전함을 택한 듯 너무나 밉지만 그럼에도 도와주는 어미의 모습, 그 모든 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지켜보게 하는 건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등 노배우들의 연기다.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실제 은심, 금순, 태호로 살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이들의 존재감은 영화의 빈 공간을 채우고도 남는다. 특히 세 배우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80대 노인들의 고통과 아픔을 연기로 승화시킨다. 여기에 요양병원에 갇혀 사는 이들의 친구 청자 역에 최선자, 은심을 질투하는 맹희 역에 이용이, 마을 터줏대감 영배 역에 한태일 등 스테레오 타입의 역할이지만 각자 자신이 맡은 연기를 수행하는 노배우들의 연기 또한 영화에 힘을 싣는다.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큰 힘을 발휘하는 건 임영웅의 ‘모래 알갱이’다. 영화를 위해 만든 곡은 아니지만, 마치 이 영화를 위해 탄생한 곡처럼 은심과 금순의 이야기에 잘 스며든다. “나는 작은 바람에도 흩어질 / 나는 가벼운 모래 알갱이 / 그대 이 모래에 작은 발걸음을 내어요 / 깊게 패이지 않을 만큼 가볍게” 아등바등 가열차게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누군가에게 신세 지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모래 알갱이처럼 홀연히 떠나며 건네는 이들의 인사. 이 노래와 함께 마주해보길 바란다.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3.0 /5.0
한줄평: 의존하는 삶의 공포를 뒤로한 마지막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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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찬 없는 최후의 만찬
SYNOPSIS.
STEP 1. 깊게 심호흡하고 눈앞의 음식에만 집중해 보세요
STEP 2. 한 번에 한 가지 종류의 음식만 먹어보세요
STEP 3.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세요
모든 단계를 통과한 여러분을 이제 ‘클럽 제로’의 회원으로 임명합니다!
최고급 기숙사 시설에서 학생들에게 일대일 특별 교육을 제공하는 엘리트 학교의 새로운 영양교사로 임명된 ‘미스 노백’. (미아 와시코브시카) 건강을 유지하면서 학습 능력을 키우는 ‘의식적 식사법’을 가르치는 ‘미스 노백’의 다정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수업에 아이들은 점차 빠져들게 되고 더 극단적이고 위험한 식사를 이어가는데…
POINT.
✔️ "유럽의 웨스 앤더슨"이라는 평을 받는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이 선보이는 감각
✔️ 다양한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한 만큼, 음악이 영화 주제를 돋보이게 해요
✔️ 음악과 함께 어우러지는 원색의 미술도 아주 매력적
✔️ 앨리스, 제인 에어, 스토커... 다양한 얼굴을 보여온 배우 미아 바시코프스카의 단단한 연기
✔️ 독특한 소재를 독특하게 풀어가는 전개
스무 살 언저리쯤, 사이비를 만난 적이 있다. 사이비. 작년에 <나는 신이다>로, 그 전에는 코로나19 당시 신천지로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그 이름. 내가 만난 이는 대학 선배의 얼굴을 하고 나에게 밥을 몇 번씩 사주며, 서로가 기독교인임을 확인하고, 별도의 성경 공부 모임을 만들어 나를 데려갔다. “이상한데?” 싶은 말을 들어도 내가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런 걸까 의구심만 품던 어느 날, 진짜 이건 너무 아니다 싶은 문장을 듣고 나는 그와의 인연을 단숨에 끊었다. 결국 그가 어떤 종류의 사이비였는지도 모르는 채로, 폐해 하나 남기지 않고 무사히 벗어났지만, 그 사건을 통해 분명히 한 가지를 배웠다.
조종은 언제나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방울 한 방울, 원하는 문장을 조금씩 섞으면서 급진적인 곳까지 나아간다는 것. 개구리를 삶아 죽이듯이. 아주 조금씩. 그래서 나는 이후로 <나는 신이다>를 보거나 그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아니 저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다들 믿었단 말이야?”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상한 문장을 하루아침에 듣는 사람과, 차곡차곡 거기까지 이끌려 간 사람의 지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이비만 그럴까? 우리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아는 현실은, 이성과 지성으로 견고히 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는 어쩌면 매우 취약한지도 모른다. 그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 <클럽 제로>가 있다.
#삐딱한 세계에 어서 오세요
영화는 원탁을 치워내고 의자만 움직여 둘러앉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은 ‘노박’이라는 교사의 영양학 수업을 듣게 된 이유를 제각각 밝힌다. 듣다 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음식에 대한 생각은 어쩌면 그 음식이 연장하는 삶을 대하는 자세와도 닮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열망을 아는 것. 그래서 파고들 부분을 찾아내는 것. 그 자리가 조종의 시작점이 된다.
이 영화에서 기묘하게 삐딱한 느낌으로 고정된 샷을 많이 사용하는 카메라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때만큼은 적극적으로 패닝(pan)해 움직인다. 가구의 직선이 강조된, 움직이지 않는 배경을 뒤로 하고, 학교 풍경은 기이하게 삭막하다. 노란색과 파란색 교복을 비롯한 원색들이 기묘하게 튀어 오르고, 강박적으로 울리는 음악이 끈덕지게 우리를 스크린으로 끌어 당긴다.
여기서, 한때 앨리스였고 또 제인 에어였던 배우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영양학에 대해 남다른 기준을 가진 독특한 교사 미스 노박으로 분해 낯선 얼굴을 보여준다. 미스 노박은 더없이 맞는 말들을 조합해서, 음식에 대해 기존에 갖고 있는 우리의 통념을 벗겨낸다. 무의식적으로 해온 “먹기”라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하도록 유도하고, 학생들을 차곡차곡 남다른 세상으로 데려간다.
시놉시스만 들으면 <클럽 제로>는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미스 노박, 그의 손에 의해 괴이한 ‘클럽 제로’의 세계로 넘어간 아이들의 영화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영화를 보고 그 메시지 하나만을 읽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클럽 제로>에 등장하는 학교는 그 자체로 매우 기이하다. 다만 우리에게 그 기이함이 익숙할 뿐이다.
학교 표어는 “There’s more in you”와 “We reach up to the stars”다. 학교 이름은 대놓고 talent school, 재능학교다. 너는 더 잘할 수 있고, 네 안에 더 큰 것들이 있고, 그래서 너는 저 별처럼 높은 데까지 자라갈 거라는 말. 이렇게 써놓으면 다소 컬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익숙한 문장들이 아닌가? 자존심을 너무 중시하느라 지쳐버린 어른들이 강박적으로 쏟아낸 자존감 열풍으로, 작은 거절도 흠집도 감당하지 못할 아이들을 길러낸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르지는 않는지.
#사실과 믿음, 어디까지일까
이 영화는 두말할 나위 없이 믿음에 대한 영화이다. 우리는 사실 관계는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앎’의 영역이라고 굳게 “믿는”다. 믿음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 종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 같은 영역에만 속하는 단어라고 “믿는” 단어지만, 사실 우리는 많은 사실들을 믿고 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지도에서 보고 찾아갈 때, 우리는 이 지도를 따라가면 그곳이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다. 아직 내 눈으로 확인해서 앎으로 넘어오지 않은 영역이지만, 이 지도가 맞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믿음 또한 앎에서 기인한 것이라 해도, 믿음은 그렇게 우리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종교인들만의 단어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앎과 믿음은 자주 비틀린다. 소비주의를 막고 음식이 낭비되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던 아이도 미스 노박의 수업을 들으며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아이가 된다. 이미 믿음이 가지를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이전의 앎과 믿음을 폐기한 것이다. 우리의 문장들은 그렇게 쉽게 비틀리고, 우리는 그렇게 쉽게 변한다.
이 영화는 미아 바시코프시카의 '확신으로 단단한' 표정을 전면에 내세워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믿는 것이 정말, 맞는지? 우리가 이룩한 현실이 정말로 견고하고 탄탄하게 세워진 세계가 맞는지? 어쩌면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조차, 근본적으로 뒤집어질 가능성은 없는지?
물론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딸기와 크림이 가득 얹힌 초콜릿 라테 한 잔을 가득 마신 내가 갑자기 ‘클럽 제로’에 들어갈 일은 없겠고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도 그렇겠지만, 꼭 그런 극단적 사례까지 가지 않을 뿐 이러한 믿음의 전복은 우리에게 꽤나 흔한 일이다. 오래 전에는 다이어트의 적이 지방이라고 말하던 세상이 요즘은 탄수화물을 주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처럼. 사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은 3대 영양소일 뿐인데.
#만찬 없는 최후의 만찬
미스 노박만을 탓하기엔 이미 이리저리 부조리하게 삐딱한 세계였다. 애초에 섭식에 ‘유행’이 있다는 것도 우습지만, 유행을 따라 미스 노박을 데려온 학부모 회의는 미스 노박과 학생들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면서 본질을 전혀 잡지 못한다. “오페라인지 극장인지”를 집요하게 챙기는 그 시선은 아이들에게 닿지 못한다.
어떤 부모도 아이들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잘 교육하고 싶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어떤 부모도 완벽할 수 없으므로. 사태가 흐를 만큼 흐른 후에도 “오페라인지 극장인지”나 운운하고 있는 다른 부모들뿐 아니라, “조종당했다manipulated”는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단 한 사람의 부모 또한 다른 부모들과 같은 엔딩을 맞이했다.
“최후의 만찬” 같은 장면을 한참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삶에서 만찬을 제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최후의 만찬에서 만찬을 제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후 뿐이 아닌가?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나.
생각해 보면 영화의 모두가, 그리고 현실의 우리 모두가, 다 미련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모두 미련하고, 휩쓸리고, 답답하고, 슬퍼진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울려 퍼진다. 이 영화 속 “믿음”에 대한 인식은 낯설지 않다. 기후위기를 진심으로 우려하는 사람들과 지구온난화가 거대한 음모라고 믿는 사람들이 같은 지구 상에 살아가고 있는걸. 우리는 결국 각자의 믿음을 얼기설기 엮어 올리며, 구멍 숭숭 난 현실을 살고 있다.
무엇이 만찬을 만찬으로 만드는가? 훌륭한 요리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 시간이 아름답게 기억되려면 애정 어린 눈빛과 따뜻한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구멍 난 현실 속, 각자의 믿음 아래, 음식이 아닌 삶으로 주어졌어야 했던 해답들은 무엇이었을까?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하여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1월 2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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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 표류기
그림자꽃
줄거리
평범한 평양 시민 김련희 씨는 2011년, 간 치료 차 중국에 방문한다.
병원비는 예상보다 비쌌고, 그녀는 브로커에게 ‘한국에선 금방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에 속아 북한 여권을 뺏기고 한국에 들어온 김련희 씨.
그로부터 11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가족들 품에 돌아가지 못한 채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
남한 표류기
숨은 의미 찾기
영화 속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김련희 씨가 한국을 떠나 북한의 가족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인권보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간첩은 돌려보내서는 안 되고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를 돕거나, 상처 준다.
김련희 씨는 대놓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에는 익숙한 듯했다. 물론 댓글을 읽는 그녀의 표정은 서글펐지만. 들리지 않는 척 무시하기도 하고, 맞서 싸우기도 한다. 사실 그보다 그녀를 더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위로하는 척,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그녀를 상처 주는 사람들이었다.
"북한 여자들은 왜 다 획일화되었느냔 말이야."
그저 분위기를 띄우자고 노래를 한 구절 불렀을 뿐이다. 그랬더니 북한 노래는 하나같이 똑같다며 체제를 들먹이는 사람들. 다 같이 즐기자고 노래해 보라며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노래가 끝나니 체제가 문제라며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는 김련희 씨의 표정은, 대놓고 욕지거리를 날리는 사람을 바라볼 때보다 몇 배는 더 씁쓸해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하고, 예술로 하나가 될 거라 믿었던 사람들에게 당한 배신의 몫은 훨씬 컸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 때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마주할 수도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
이승준 감독은 멀게만 느껴지는 북한과 우리나라의 비슷한 점을 찾아보자고 생각해서 이 영화를 찍기 시작했노라 고백했다. 그 의도에 충실하게, 영화는 체제에 대한 토론이나 정치적 싸움을 담기보단 우리네 모두가 살아가는 영상을 담아내려 애썼다.
그들 역시 사람 가득한 출근길을 지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면 친구들과 맥주 한잔하며 회포를 푼다. 특히 김련희 씨와 그의 딸인 리련금 씨가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습이 겹쳐 보이는 장면에서는 의문이 들었다. 이토록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다를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 왜 떨어져 살아야 하는가?
더불어 주인공인 김련희 씨는 가지 못하는 평양의 모습을 영화에서 담아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김련희 씨의 가족인 리금룡 씨의 리련금 씨가 생활하는 모습은 이승준 감독과 친분이 있는 핀란드 영화감독이 찍어온 것이라고 한다. 같은 나라 사람인 이승준 감독도, 평양이 고향인 김련희 씨도 만나지 못하는 가족을, 다른 나라 사람이 대신 만나고 온다는 것이 어딘가 모순적이지 않은가.
김련희 씨가, 또한 우리가 그들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건 오직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영화 내에서 김련희 씨가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했던 장면은 예정에 없던 장면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반갑고 아쉽게 느껴졌을 통화가, 분단된 쓰라린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켜준다.
"너가 북한에 돌아가는 것은, 그거는 이제 안 되는 거야."
고된 타향살이에 지친 김련희 씨는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을 당시 함께 건너온 동지들을 만났다. 그동안 못 나눈 안부와 한국에 건너올 때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이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던 동지들은 김련희 씨에게 북한은 더 이상 갈 수 없노라고 못을 박았다. 그 말은 앞서 자신을 상처 주던 남한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묵직하고 날카로웠다. 한때는 목숨을 의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앞장서 그녀더러 포기하라는 가혹한 현실을, 그녀는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평양 시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남한의 체제가 잘못되었고 이념과 사상이 달라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평양시민이라는 단어는 '어디의 누구'가 아닌 '누군가의 누구'로 살고 싶은 그녀의 소망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뿐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자신을 '서울시민'으로 칭하는 것을 두고 우린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에겐 서울에 마음을 뉠 집이 있고, 의지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스스로를 '서울'이라는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약속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김련희 씨는 서울 어딘가에 누워 있어도, 서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어도 진정 쉬지는 못한다. 그녀가 속해있는 공동체는 평양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는 '평양시민'이란 평양에 있는 나의 집, 나의 가족들의 김련희로 살고 싶노라고 말하는 것임을, 왜 우리는 또렷이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까.
영화가 끝나기 직전, 스크린에는 탑골공원 근처를 배회하는 김련희 씨의 뒷모습으로 가득 찼다. 문득 해외여행을 갔던 때가 떠올랐다. 나와 다른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 속에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나. 그 순간의 나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어지러운 거리를 방황하는 김련희 씨의 뒷모습에 담긴 것은 설렘이나 기대가 아닌, 혼란과 당혹스러움이었다.
나는 내가 원해서 그 거리로 나섰다. 거리를 가득 매운 인파 속에서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그 사실에 짜릿함을 느꼈다. 하지만 김련희 씨는 자신의 의지로 한국에 온 게 아니다. 원치 않았던 여행, 길을 잃었지만 아무에게도 길을 물을 수 없는 게 그녀의 처지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풍경, 익숙한 사람들의 스침이 그녀에게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이 되어 지나갔을 일이다.
"길어야 1년, 2년일 거야."
종각 거리를 배회하는 뒷모습에는 김련희 씨가 딸과 통화하는 음성이 겹쳐서 흘러나왔다. 언제쯤 오냐는 딸의 물음에 김련희 씨는 길어야 1, 2년이라며 딸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11년째 남한 땅에 표류 중이다.
'북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닌, '가족에게 가는' 길
감상평
“안녕하세요. 저는 평양 아줌마 김련희입니다.”
영화를 보기 앞서 이승준 감독님과 김련희 씨 두 사람이 함께 올라 짤막한 무대인사를 남겼다. 그때 김련희 씨는 자신을 ‘평양 아줌마’라고 소개하며 수줍은 듯 웃었다. 그 짧은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가슴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울림이 가득 퍼져나갔다. 맹숭맹숭한 그런 기분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는 15년도부터 찍기 시작해 19년도에야 완성된 작품이라고 한다.
김련희 씨는 혼란스러운 한국 역사의 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겪고 느끼며 살아왔다. 간간이 느꼈던 절망과 희망들의 폭이 너무나도 커서, 나까지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았다. 북한과 멀어지는 것 같아 초조하다가도 다시 가까워지는듯해 안심하고. 이제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어 설레다가도, 계속해서 출국금지명령을 받아 절망하는 과정이, 비단 김련희 씨 개인의 것이 아닌 한반도 전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가족이 있잖아요. 그 누구도 가족을 뺏겨선 안 돼요."
김련희 씨의 말마따나, 인간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살았든 죽었든, 좋든 싫든 누구나 가족이란 것이 있다. 이념과 체제 너머, 그녀는 인류가 기본으로 누려야 할 '행복'이라는 권리를 빼앗겼다고 호소한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의 북행을 반대했던 수많은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가족이 북에 머물러 있어도, 지금은 대립 상태이니 평생 거기에서 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우린 그녀의 문제를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 그만이다. 가족하고 살고 싶다는 말, 나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잘못된 게 아니지 않은가.
기막힌 우연처럼, 영화관을 나서며 이어폰을 꽂았더니 투애니원의 '컴백홈'이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그저 흥얼거리며 들었을 그 노래를 가사 한 자, 한 자 곱씹어가며 들었다. 나는 김련희 씨가 '북한으로 돌아가길' 바라진 않는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이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으나, 솔직하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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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 <믹의 지름길> (2010)
왜 제목이 '믹의 지름길'인가 하면 우리가 여태껏 믹의 지름길을 따라왔는데 과연 그것이 맞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려고 한 것 같다. 믹은 비호감이지만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결말 즈음에는 에밀리 부부에게 결정권을 돌린다. 역사는 이래 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에게 턴이 주어진다.
러닝타임이 1시간 44분인 영화인데, 오,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황야에서 세 마차가 걷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을 수 없어지는 것은 마차 바퀴의 끼익 끼익 하는 소리다. 처음에는 말들의 신음 소리인 줄 알았다. 물과 식량이 바닥나고 사람들은 황무지에서 말을 아낀다. 그저 걷고 또 걸어야만 하는 시간들 속에서 세 그룹은 동물들의 부담을 줄이려 자신들은 옆에서 걷는다. 믹은 시종일관 자기 말 한 필 위에 앉아서 이동한다. 그 모습이 얄밉다. 믹 외의 남자들은 동물들을 끌고, 여자들은 몇 걸음 떨어져서 걷는 형태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걷는 여자들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여자들이 불만이 더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형태라고도 생각했다. 젊은 부부 중 아내인 밀리는 히스테리를 터트린다. 여기서 히스테리란 가부장에게 자기 존재를 의지하고 맡긴 채 자신은 사태에 관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여겨 혼란스러움이 폭발하는 것이다. 믹은 여자들과 대화할 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여자들은 카오스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은 파괴로부터 왔죠.'
영화 속 여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남자들의 목표는 명확하다. 식구가 정착할 만한 '기회의 땅'을 찾는 것이다. 식수를 찾고, 금을 찾고,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야만적인 인디언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엔 그런 남자를 믿는다. 에밀리는 남편에게 자기가 믿는 것은 당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만히 걷는 와중에 생포된 인디언이 눈에 들어온다. 에밀리는 인디언에게 저녁식사를 나눠준다. 그에게 식수를 준다. 이 두 단계에서 두 사람의 소통은 분명히 발전한다. 처음에는 거칠고 퉁명스러워 보이게 접시를 내려놓았던 인디언이 두 번째에서는 부드럽게 그릇을 내려놓는 것이다. 에밀리는 돌에 벽화를 그리는 그의 신발을 바느질로 고쳐준다. 그녀는 그렇게 하면서 믹의 비아냥과 밀리의 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에밀리는 '빚지기 싫다'고 말했지만 정말 인디언을 위해 하는 행동들이 그런 의도 때문이었을까? 에밀리는 같은 인간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인륜, 천륜적인 마음을 자신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익숙한 자본주의의 틀 대로 자기 마음을 읽어낸 결과가 '빚지기 싫다'이다. 그녀에게는 따뜻한 마음이 있지만 그것을 해석할 언어 틀이 부족했던 것이다.
<믹의 지름길>에서는 <퍼스트 카우>가 선명하게 보인다. (북미 개봉 순서대로 하면 반대겠다) 땅과 바다에 주인이 없고, 자기가 자기 살 길을 모색해야 했던 19세기 서부개척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공유한다. 나는 그 시대를 여태껏 봐 왔던 서부극의 신나고 열정적인 황야의 모험으로 상상했었다. 하지만 라이카트는 말이 없고 막막한 끊임없는 걷기로 개척 시대를 나타낸다. 두 영화는 모두 우정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질서가 없고 삶과 죽음이 손바닥 뒤집듯 되는 시대에서 서로를 믿고 피어나는 그런 우정 말이다. (에밀리의 라탄 바구니를 들고, 그 안의 돋보기를 유심하게 보는 인디언)
세 마차 중 한 그룹은 특히 독실하여, 쉬는 시간에 그들은 성경을 읽고 찬송을 왼다. 어린 지미가 있고 글로리는 임신한 상태다. 물을 거부하던 남편 윌리엄은 걷다가 쓰러진다. 이 상황에서 인디언은 윌리엄의 주변에 모래를 뿌린 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세 구의 마차를 옮길 때 가만히 지켜만 보던 상황과 완전히 대조된다. 윌리엄이 쓰러졌을 때 인디언은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그의 노래는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 밖 관객들 모두에게 커다란 파문을 몰고 온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생이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느낌을 가져오는 것이다. 힘들게 전진하다 누군가 쓰러지면 그와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느낌 말이다.
믹이 인디언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그 총구가 화면을 향하므로 관객은 마치 우리에게 총이 겨누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믹에게 에밀리가 총을 겨누어 만들어지는 삼각 구도를 보며 왠지 눈물이 났다.
라이카트는 섬세하게도 처음에는 인디언을 밧줄로 감아 줄에 매인 채로 이동하게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는 그를 줄에서 풀어낸다. 그를 묶어봤자... 물을 발견하기가 더욱 늦어질 뿐이다. 우리는 결국 같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끊나지 않을 것 같은 황야라는 자연 속에서 살기 위해 물을 찾아내야 하는 운명공동체다.
미래를 아는 관객은 우리 주인공들이 물이 있는 지역, 혹은 인디언 마을에 도착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도 우려스럽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인디언 마을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과거의 폭력은 행해졌다. 황야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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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듄(DUNE)' 리뷰 - 영화 세계관 및 스토리 요약정리(*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동명의 원작소설 기반 분석 해석
- 베네 게세리트, 초암공사, 퀴사츠 헤더락 등 정리
- 영화 정보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감독: 드니 빌뇌브
각본: 에릭 로스, 존 스페이츠, 드니 빌뇌브
원작: 프랭크 허버트의 듄(1965)
제작: 드니 빌뇌브, 케일 보이터. 메리 페어런트,조 카라치올로 주니어
주연: 티모시 샬라메, 제이슨 모모아 외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기간: 2019년 3월 18일 ~ 2019년 7월 26일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워너브라더스
수입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2020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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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틀쥬스 비틀쥬스> 1차 예고편
올가을, 팀 버튼 표 호러 판타지가 돌아온다? [비틀쥬스 비틀쥬스] 1차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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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스> 메인 예고편
"미스 프랑스에 나갈 거예요"
동네 복싱장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지긋지긋한 매일을 보내던 알렉스.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자신의 오랜 꿈을 기억해낸다.
좌충우돌 미스 프랑스 도전기!
한계를 뛰어넘은 당당한 발걸음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