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은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와는 상반된 메시지를 전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어‧일본어‧중국어‧수어를 사용하는 배우들이 모인 연극에서, 오랜 호흡으로 다져진 ‘합’이 ‘말’보다 중요한 건 당연하다. 두 주인공이 ‘말없이’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묵묵히 보듬어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말은 인간의 관계‧신뢰를 다지는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함께한 시간과 서로를 향한 존중이 관계의 심연에 도달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게 영화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삼각관계에 관한 세 편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옴니버스 영화 〈우연과 상상〉은 정반대다. 영화에서 삼각관계의 미묘한 순간을 부각하는 건 오롯이 말, 즉 대사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서든 똑부러지는 표정과 말투로 청산유수 말하는 장면을 볼 때, 저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비현실적이란 느낌을 받고는 한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은 예외다. 관계의 내밀한 지점을 거침없이 파고들고, 인간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만들어지는지를 드러내는 놀라운 대사로 가득한 세 편의 에피소드가 각각 한 편의 장편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았겠다 싶을 정도다.
세 편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삼각관계는 각기 다른 양상을 지닌다. 첫 번째는 친구로 지내는 두 여성이 시차를 두고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을 때 벌어진 이야기를 다룬다. 전 애인과 헤어진 후에도 오랜 시간 그가 남긴 흔적 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헤어진 상대방이 불쑥 나를 찾아와 간신히 평온해진 일상을 제멋대로 흩트리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첫 번째 에피소드에 과몰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사만으로 전해지는 그날의 분위기, 우리의 과거, 아직 사랑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음 마음 등등. 숨 막힐 듯 몰아치는 현란하고도 적확한 대사에 혼이 빠질 것만 같았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조금 전형적이지만, 그 때문에 현실적이기도 하다. 원한을 품은 젊은 애인의 부탁으로 명망 있는 교수를 유혹하여 망신 주려는 만학도 유부녀. 그녀는 몰래 녹음기를 켜고 교수 앞에서 그의 소설을 읽으며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그런데 계획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대화를 나누던 과정에서 둘이 서로에게서 깊은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엇나가는 건 계획뿐만이 아니다. 그날의 녹음 파일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여자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교수에게 복수해줄 것을 부탁하던 지질한 젊은 애인은 어느덧 번듯한 회사원이 되어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깊은 공감의 경험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되돌아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마지막은 앞의 두 에피소드에 비해 조금 더 잔잔하고, 조금 더 감동적이다. 졸업 후 수십 년 만에 동창회에 참석하려 고향으로 돌아온 레즈비언 여성. 동창회에서 과거 사랑을 나누었던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길가를 거닐던 중, 평범한 주부가 된 옛 연인을 우연히 만난다. 그녀는 남자와 결혼한 후 아이까지 낳은 상태였다. 잡다한 대화를 주고받던 여자는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진다. 이제 자잘한 이야기 말고 우리가 정말 행복한지에 관해 대화해보자는 것이다. 반전이 있다. 둘은 그날 처음 보는 사이였다. 길거리에서 얼떨결에 서로를 동창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둘은 멈추지 않는다. ‘우연’한 만남을 ‘상상’으로 전환하기, 즉 서로를 착각했던 사람이라 가정하고 대화를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수십 년을 묵힌 오래된 질문과 감정을 쏟아냄으로써 묘한 감동을 자아내는 둘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부차적인 소통 수단에 불과했던 말에 ‘상상’이 더해지자, 말은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아름다운 무언가로 탈바꿈한다.
영화를 보며, 나와 타인 사이에 풀 수 없는 실타래처럼 잔뜩 얽힌 마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새삼 되새겼다. 우리는 대체로 그 복잡함에 굴복하여 이를 그대로 내버려두거나 날카로운 도구로 잘라버림으로써 상대방과 단절하고는 한다. 하지만 〈우연과 상상〉은 우리에게 그 복잡함을 돌파할 언어적 힘이 있음을 환기한다. 영화 속 인물들처럼 얽힌 실타래를 즉각적이고 현란한 말로 풀어낼 사람이야 적겠지만, 다소 서툰 말솜씨를 가진 사람이라도 끙끙거리다 보면 적확한 한마디 말 정도는 벼려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실타래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확인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도 그 원인과 상태를 알면 위안이 되는 법이니, 그것만으로 우리는 한결 더 편안해질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에서 ‘말’에 대한 서로 다른 통찰을 선보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성취가 놀랍고 고맙다. 관계와 말이 고민인 모든 사람에게 하마구치 류스케의 두 영화를 강력히 권한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